원신

[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15

노발리스는 푸른 꽃의 꿈을 꾼다

아버지 아드님을 주십시오....

아를레키노는 고민하고 있었다. 흘깃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한 표정이었지만, 더할 나위 없을 만큼 고민하고 있었다. 업무용 책상 위에 흩어진 수십 장의 사진을 보면서.

사진은 전부 피사체로부터 먼 곳에서 포커스를 맞춘 것으로, 때때로 초점이 나가거나 흔들린 것들이 있었다. 사진 속 중심 피사체는 전부 같은 인물 한 쌍. 한 명은 아를레키노의 「아이들」 중 한 명인 프레미네 스네즈비치. 그리고 또 한 명은……. 진홍을 숨긴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외교 상담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친 상대, 폰타인의 최고 심판관 느비예트. 불쾌하게도 찍힌 사진마다 정확하게 렌즈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감시를 알면서도 내버려두고 있음이 명확했다.

물론, 둘이 함께 있다 한들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물론, 프레미네는 이 최고 심판관과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외박이 잦아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물론, 둘의 만남도 프레미네의 단독행동도 아를레키노의 허가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사진 중 하나에 프레미네의 입술에 최고 심판관이 제 입술을 겹치는 듯한 모습이 찍혀있어도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프레미네는 원래 정신이 불안정한 면이 있는 아이다. 그것이 이 자를 만나 많이 안정된 것을 아를레키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래도, 수지가 안 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진을 모아 정리하고 있자니 타이밍 좋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건 다름이 아니라 사진 속 아이다. 아를레키노가 그를 불렀으므로.

사진을 서랍 안에 던져넣으면서 입실을 허가하면, 문고리가 돌아갔다. 평소라면 병아리 같은 연노란색 머리카락의 위에 얹혀있을 모자를 손에 쥔 채로. 시선은 바닥을 향해있다. 특별히 그러한 규칙을 세운 적이 없지만, 저택의 아이들은 아를레키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다.

“……부르셨습니까, 「아버지」.”

숙인 고개에서는 미미한 불안이 비쳐 보였다. 프레미네는 섬세하고 약한 동물이었기에,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아마도 아를레키노의 용건을 어느 정도 눈치챘으리라. 잠시 그 상태를 살핀 뒤, 아를레키노는 입을 열었다.

 

*

 

“이 안건은 여기서 마무리되었으니, 본론에 들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평상시라면 다정했을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다. 프레미네는 무릎 위에서 초조하게 움직이려는 손가락을 억누르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속이 좋지 않았다. 속에서 자꾸 울렁거리며 치밀어오르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고 여러 번 심호흡했다. 「아버지」와 느비예트의 외교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가뜩이나 분수에 맞지 않는데, 이제부터 나올 이야기란 프레미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흘러갈 것이 틀림없었다. 차라리 자리를 피하게 해주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정해진 후에, 느비예트에게 인사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싫어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적어도 어제 들은 「아버지」의 의사 표명은 그러했다. 명령은 절대적이고, 그것은 벽난로의 집이라는 소속을 넘어서서 프레미네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아버지」는 절대 그 자체였고, 「아버지」는 전부였으니까. 이 자리에 동석할 수 있게 부탁한 것이 프레미네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 프레미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를레키노는 테이블 위의 다 식어 빠진 차를 느긋하게 입에 가져다 댔다.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오늘 이야깃거리가 따로 있을 거라는 건 들어오셨을 때부터 알 수 있었지 않습니까. 편하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프레미네 군에 관한 일이지요?”

“후후……. 아직 어린아이지 않습니까. 보호자인 제 의견과 견해가 중요한 시기지요.”

“예. 귀공의 말씀을 저도 항상 경청하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도 슬슬 힘들어 보이니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프레미네를 흘깃 보는 표정은 잔잔한 수면처럼 고요했다. 느비예트가 허용한 프레미네의 특권은 자리에 제삼자가 함께 있을 때는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치면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항상 프레미네를 바로 찾지만, 사람이 많은 것을 꺼리는 프레미네를 배려해 서로 눈인사나 하고 지나가는 지경이니까. 약속하지 않고 마주치는 날은 항상 그랬다. 그 배려가 기쁘고, 조금은 외로웠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 아이와의 사적인 만남을 그만두실 때라고 판단됩니다만.”

“과연. 댁에서 그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시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느비예트의 시선이 다시 한번 프레미네에게 닿았다. 프레미네도 그가 자신을 보는 것을 알았다. 정말 좋아하는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헛구역질을 참는 걸 노력할 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이라면 얼굴이라도 잘 새겨두고 싶으니까.

“그는 이견이 없는 모양이로군요. 이해했습니다.”

느비예트는 규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프레미네와의 사이에서 「아버지」의 의견을 가장 중시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전부 빠르게 끝날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한 프레미네는, 지금 제가 하는 생각이 정말 이기적이고 추하다는 걸 실감했다.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졌을까. 스스로가 너무 싫어져서, 울지 않으려고 마음먹은 것도 의미가 없었다. 당장 눈물은커녕 눈이 뜨거워지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느비예트에게 너무 미안했다. 붙잡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니,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와 귀공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맞는 일이지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는 너무 이상한 말이다. 미안해요, 도 너무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도망가 버릴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많이 생각해 왔는데, 전부 기억나지 않았고 새로 생각나는 말은 다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하게, 이상하게 아까까지 그렇게 힘들었던 호흡도 편해졌다.

“……다만, 댁의 규율에는 불만을 힘으로 해결해도 좋다는 항목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척이나 싸늘한 목소리였다.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프레미네가 움찔 놀라면서 느비예트를 볼 정도로. 느비예트의 말에 아를레키노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집안 내의 규율입니다만. 간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저와 그는 오래전에 타인이 아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귀댁과 저도 타인이라고 잘라내기에는 꽤 먼 곳까지 왔습니다. 그가 이견이 없는 건 이견을 내지 못할 뿐으로 보입니다만.”

작게 「아버지」가 웃은 듯한 소리가 들렸다. 프레미네는 두 사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일리 있는 말입니다. 저희 아이는 이견을 낼 수 없는 성격인 것 또한 맞지요. 좋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하시죠. 알고 계시겠지만 옛 집터가 주변에 피해도 가지 않고 좋은 곳입니다.”

아를레키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프레미네는 뒤늦게 상황이 이해됐다. 느비예트는 지금 「아버지」에게 무력 싸움을 신청한 것이다. 책상 앞에서 일어나 아를레키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느비예트를 보고, 프레미네는 더더욱 안색이 창백해져서 저도 모르게 느비예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기, 기다려요!”

“프레미네 군.”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따뜻한 목소리와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부드러운 시선이다. 기쁘다. 기뻤다. 그렇지만 그런 감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느비예트 님이 다치는 건 싫어요, 죽어버리는 것도 싫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버지」랑은…….”

「아버지」는 절대였고, 그것은 무력도 마찬가지였다. 프레미네의 감정 같은 걸 위해서 느비예트가 크게 다치거나 죽어버리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필사적으로 만류하는 프레미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비예트는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야기했듯, 저는 강합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정말로, 정말로 강한걸요…….”

“음……?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같이 가서 프레미네 군도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되겠군요.”

“네? 아, 와악……!”

언제나 그렇듯 마치 어린아이를 안아 들듯이 프레미네를 품에 안아 올리고 느비예트는 다시 아를레키노의 뒤를 따랐다. 아를레키노는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뒤돌아보지도 않고 느긋한 보폭으로 걸었다. 내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프레미네는 느비예트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꼭 끌어안았다.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다치는 게 무섭고, 버림받지 않은 게 기쁘고, 그리고, 그리고 바보같이 그의 품 안에 있는 게 행복했다. 불안하기에 그지없지만 그가 자신의 실력에 자신있는 것을 믿기로 했다. 눈이 조금 뜨겁고 아팠다.

 

 

 

물의 칼날이 하늘을 날고, 증발하여 사라지고, 꿰뚫을듯한 수압으로 「아버지」를 쉴 새 없이 공격하는 걸 보며 프레미네는 창백한 표정으로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전황이었다. 시원스러운 얼굴로 전부 쳐내고 있지만, 아를레키노는 공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수단조차 없었다. 용서 없는 공격이 끊길 기미 없이 30분을 지나가고, 점점 「아버지」의 옷과 얼굴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둘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미네는 이제 아를레키노가 크게 다치지 않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느비예트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지만, 최고 심판관 자리에 있는 만큼 가차 없는 면이 있기도 했다. 아를레키노는 프레미네의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느비예트가 다치게 할 리가 없다고 믿어야 했다. 최소한의 견제를 할 수 있게 같은 수준을 유지해 공격하는 건 여유가 있는 것이고, 어쩌면 느비예트는 아를레키노를 지치게 할 생각뿐인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후우…….”

붉은색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낫이 아를레키노의 손에서 툭 떨어진 것은 표정 변화 없는 한숨과 거의 동시였다. 물의 공세도 그것과 동시에 끊겨서, 프레미네는 소강상태가 된 것을 느끼고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사전에 느비예트가 돌무덤 위에 앉아있으라며 올려준 게 아니었으면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정도로 각오를 보여주신다면 더는 할 말이 없군요. 이전처럼 프레미네를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걱정을 덜어드린 듯하여서 다행이군요.”

언제 그렇게 살벌했느냐는 듯 조용히 대화하는 두 사람을 프레미네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느비예트가 프레미네에게 다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고 말했고 아를레키노는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한 뒤 자리를 떠났다. 폰타인 성으로 돌아가는 길, 느비예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프레미네는 뭘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걷는 내내 그런 프레미네를 보며 느비예트는 드물게 소리를 내 웃었다.

 

*

 

“프레미네의 개인행동을 정식으로 허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너라면 의문이 많겠지. 그래서 너를 따로 부른 거란다, 리니.”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있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험이다.”

“……아, 그렇군요. 그 남자는 절대 프레미네가 위험해지는 걸 손 놓고 보지 않을 테니……. 적어도 「한겨울 계획」에서 희생자를 내지 않으려면 필요한 수라는 말씀이지요? 이해했습니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었어도 「아버지」께 의문을 품을 일도 없지만요.”

“그런 걸 위해서 너희가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지. ……그렇지, 네가 생각하던 이유는 뭐였는지 궁금하구나.”

“……음…….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프레미네를 조금 더 신경 쓰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너에게는 티가 나는가 보구나.”

“부정하지 않으시네요? 뭐, 저는 그것도 그것대로 기뻐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프레미네에게는 그 정도로 따로 신경 써주시는 게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남자가……,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좋은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니까요.”

“언제나 아이들을 잘 지켜보고 있는 듯 해서 기쁘구나.”

“다른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프레미네는 저에게도 특별히 사랑하는 동생이니까요. 이 특례에 대한 일부 불만은 제가 잘 다스려보겠습니다.”

“맡기도록 하마. 그만 들어가 보거라.”

“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굴러가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는 건 의외였다만……. 최고 심판관이 「공평」을 그 정도로 버리게 될 줄이야. 오히려 거꾸로 당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군…….”

 

*

 

홍차를 따른 찻잔에 각설탕을 네 개 넣고 느릿하게 저어 녹인다. 느비예트가 손수 챙겨주는 사치를 누리며 프레미네는 식후 차를 홀짝였다. 어린애 같고 부끄러워서 홍차에 설탕 넣는 걸 좋아하는 건 가족 앞에서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모든 걸 안다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했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묻고 싶은 게 정리가 되었을 테지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할 말이 많을 테지만 우선은 식사를 하자고, 그렇게 그가 말해 프레미네는 먹는 내내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했지만 결국은 물어볼 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왜 그렇게 강한 거예요?”

“태생적으로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 전에 빼앗긴 힘을 되찾았다고 해야 하겠습니다만.”

프레미네는 곰곰이 생각했다. 상상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침착하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얼마 전이면……, 혹시 전에 말씀하셨던 폰타인 사람의 「원죄」가 사라졌다는 게 관련이 있나요? 예언……, 틀렸으니까…….”

“그때가 맞습니다. 제가 모습이 인간과 닮았을 뿐, 인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어느 정도 이해했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비 오는 날에 물의 용을 찾는 건 너무, 너무……, 너무 부끄러운 일이에요…….”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본인 앞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람.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계속 말하지 않았습니까, 비가 와도 물의 용은 안 운다고. 신뢰받지 못하고 있군요.”

“……죄송해요. 강하다고 계속 말씀하셨던 것도 막연해서……. 그리고, …….”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해서 프레미네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은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부 죄송해요. 「아버지」께……, 거역할 수 없다는 이유는 이유가 되지 않는 걸 알아요. 저는 느비예트 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 집에 있을 수 없게 되는 게 더 무서웠던 거니까요.”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군요.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올바른 일입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저는 더욱 걱정했을 겁니다.”

“…….”

그가 이렇게 응석을 받아주는 건 언제까지, 어디까지일까. 상처를 줄 수 있는 몹시 나쁜 짓을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그 태도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 거짓말처럼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지는 걸 알았다. 옆으로 자리를 옮긴 느비예트가 토닥여주고 눈물을 핥아주는 게 조금 싫었다. 그렇게 잘해줄 가치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그런 생각마저 프레미네를 귀하게 여겨주는 그를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었으니까. 그냥 꼭꼭 끌어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품 안에서 훌쩍이는 병아리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느비예트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거래가 끝난 것이다. 아를레키노의 계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굳이 거래가 아니더라도 느비예트는 프레미네를 무사히 어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이미 했다. 길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었을 때, 그때야말로 프레미네 자신의 의지로 「집」보다 느비예트를 택하는 걸 기다릴 뿐이었다. 기다리는 건 익숙했고, 시간은 결국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사리사욕이 없다는 평가를 듣지만, 느비예트는 그렇게까지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멜뤼진에게 애정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이미 오래전에 「공평」 같은 건 버렸으니까. 하물며 품 안에 가둬두고 싶은 존재가 생겼다면.

이름을 부르자 투명한 푸른 눈이 느비예트를 담았다. 거래에서 손해를 본 쪽이 과연 누구인지,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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