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01

레토릭 by 박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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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네즈나야의 서북쪽에 있는 대빙벽. 천리의 세상에서 넘어오는 온갖 마수와 괴물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그 국경선을 지키는 집행관이 있다.

귀공자, 타르탈리아다.

그는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우인단’이라고 불리는 스네즈나야의 군대에 징병되었다. 타고난 실력과 피나는 노력,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결단력까지. 그런 타르탈리아가 승승장구하여 스네즈나야에서 최고의 권세를 누린다는, 단 11명에게만 주어진다는 ‘집행관’ 작위를 부여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대빙벽으로는 매년 무수히 많은 군인과 용병이 강제로 징병되지만,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곤 했다.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추운 곳. 시간과 때에 관계없이 밀려오는 마수와 괴물……. 보통의 사람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혹한의 전쟁터였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 오는 이들은 이곳의 우두머리인 11번째 집행관을 험악하게 상상하고는 했다. 뚱뚱할 정도의 거구에, 털이 부숭부숭하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있을 것 같은 식으로. 하지만 놀랍게도 타르탈리아는 스네즈나야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24살이며, 따스한 노을빛 머리카락을 지녔다. 피부는 무척 하얗고 깨끗하며 눈은 얼음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 자체가 정말 조각한 듯이, 살아있는 인형처럼 아름다워서 대빙벽에서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는 것보다 얼음 궁전에서 귀족 영애와 춤을 추는 것이 훨씬 어울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대빙벽에 있었다. 그는 전장에 있어야 하는 천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리라. 그는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단순하고 간단한, 편리한. 그래서 때때로 무식하게 보이는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가 14살 때 군인이 된 것도 영향이 크긴 하겠지만, 그때도 그는 귀족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춰주는 일에 곤혹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공작이 된 가문에서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모닥불에 앞에 앉아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도, 즐거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의 충실한 부하인 세르게이가 피식 웃는 것도 늘 있는 일이었다.

“집행관 님, 표정이 볼만하군요.”

“아하하하. 당연하지. 분명히 디오의 편지일 거야. 으.”

‘디오’는, 타르탈리아의 형으로, 본명은 ‘디오메데스’이나 애칭으로 ‘디오’라고 줄여 부른다. 가문의 장남인 그는 이미 몇 년 전, 가주가 되어 가문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훌륭한 형이었다. 비록 권세를 따지고 볼 때 타르탈리아가 훨씬 높은 작위를 지녔으나 그것이 그들 사이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다. 타르탈리아의 형제, 자매는 모두 사이가 좋았다!

“정략결혼이요?”

“그래. 디오는 아직도 포기를 안했어. 내게 어울리는 귀족 영애를 물색하느라 혈안이 되어있어.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거지. 나처럼 무식하고 투박한 군인에게 누가 시집오려고 하겠어?”

“하하하. 집행관 님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시는 듯합니다. 집행관님은 이곳에서 가장 귀티가 흐르시는 분이라고요.”

“비위맞추는 거냐? 세르게이, 그만둬라.”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타르탈리아는 편지를 가져온 우체부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후다닥 걸음을 옮긴다. 이 혹독한 곳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온기를 지닌 것이었다. 늘 존경스러운 부모님. 가문의 장남이자 가주인 형, 디오. 결혼하여 출가했으나 교류가 잦은 누나, 나디아. 그리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어린 세 명의 동생들의 편지를 읽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비록 요즘은 형인 디오가 자꾸만 타르탈리아에게 결혼하라고 압박을 주고 있긴 했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장난스러운 권유임을 알기 때문에 불쾌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차피 가문의 일은 오로지 장남이 이행해야 할 의무다. 즉 삼남인 타르탈리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든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스네즈나야는 그런 문화였다.

“집행관 님! 안녕하십니까?”

낡은 나무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는 사이에 우체부가 얼어붙은 얼굴로 일그러진 미소를 보냈다. 그의 앞으로는 언제나 편지가 왔기 때문에, 우체부 역시 능숙하게 품에 있는 가방 안을 뒤적거린다.

안타깝게도 이곳 대빙벽에 머무는 이들은 편지를 받을 일이 드물다. 보통은 마수나 괴물을 상대하다보면 비명횡사하여 편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없었다. 혹은 이 혹독한 곳에 남길 자처했다면 대부분 고아이거나 갈 곳이 없는 불쌍한 신세들뿐이니 편지가 올 리 없다. 타르탈리아처럼 가족이 많고 사이가 좋아서 편지가 자주 오가는 이는 드물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체부는 편지를 뒤적거리다가 달랑 하나만 있는 카드를 보고 놀랐다. 놀란 얼굴은 타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이 그에게 보내는 편지는 5통 이상이었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끈에 묶어 오곤 했다. 그런데…… 하나?

“하나?”

“하나……네요?”

“줘봐.”

타르탈리아는 어쩐지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가문의 씰로 봉인된 편지를 바라보던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급하게 편지를 꺼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토니아의 비보였다.

그의 유일한 여동생……. 토니아가 죽었다.

타르탈리아는 머잖아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그는 그가 늘 타고 다니는 새하얀 암말 위에 올라타면서도 자신에게 따라붙는 세르게이에게 횡설수설했다.

“가족에게 가봐야겠다. 넌 그때까지 책임지고 이 대빙벽을 지켜라.”

“걱정 마십시오, 집행관 님.”

어떤 정신으로 그 설원을 지나왔을까? 그는 살이 에인 듯한 추위를 견뎌가며 쉬지도 않고 말을 타고 달렸다. 허기도 그를 막을 수 없었으며 휴식해야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저, 가족들 품을 향해 나아갈 뿐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귀환이었다. 영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저택에 몇년만에 돌아오는 것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택에 드리워진,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천막을 바라보았을 때…. 타르탈리아는 말에서 내리면서 비틀거렸다.

새하얀 코트를 휘두르는 듯하며 문을 열었을 때, 오열하는 소리에 타르탈리아의 걸음이 느려졌다. 얼음 신의 비호에 의해, 위대한 스네즈나야의 집행관의 여동생의 죽음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얼음 관 위에 매달린 가족들이 타르탈리아를, 아니, 셋째 아들인 아약스를 발견했다.

“아약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이었으나 눈물을 참지 못했다. 디오가 눈물로 젖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머니는 울다가 실신하기 직전이었고 그런 어머니를 나디아가 부축해주고 있었다. 안톤은 테우세르를 안고 울고 있었고 테우세르는 오열하며 누나, 토니아 누나, 하고 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타르탈리아는 눈물을 흘려보내며 디오의 부축을 받으며 토니아에게 걸어갔다.

사랑하는 내 여동생!!!

토니아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동생이었다. 물론 가장 막내인 테우세르가 가장 어려서 유달리 챙기긴 했지만, 여동생 앞에서 이길 수 있는 오빠가 어디 있을까? 사랑스러운 주근깨로 가득했던 붉은 머리의 소녀……. 그녀는 매번 귀족 영애처럼 곱실거리는 머리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약스는 그녀의 머리를 열심히 땋아준 후에 속삭였다. 토니아, 이렇게 묶고 자면 다음날 예쁘게 되어있을 거야. 그 어떤 귀족 영애보다 예쁠 거야. 오빠 믿지? 그러면 토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응! 오빠 최고! 그리고 다음날, 여김 없이 토니아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왔다. 새하얀 잠옷 원피스를 흩날리며 아약스의 침대 위로 올라온 소녀는 쿵쿵 뛰며 외쳤다. 오빠, 오빠! 그녀의 머리는 마치 파마를 한 것처럼 찰랑찰랑했다.

오빠 내 머리 좀 봐!

너무 예쁘지?!

오빠를 믿길 잘했어!

그러면 아약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내 동생. 토니아. 너무 예쁘다, 너무 예쁘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아약스는 눈을 부릅뜨고 얼음 관에 다가갔다.

“내 동생의 얼굴을 봐야하겠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그였으므로, 가족들조차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관에 매달린 가족들이 떨어져나가고 우인단의 대원이 관을 걷어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리꽃으로 둘러싸인 여동생, 토니아가 누워 있었다. 이제는 성숙한 여인이 된……. 아약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긴 머리를 쓸어 넘긴다. 얼음 신의 비호에 따라 먼길을 오면서도 그녀는 훼손된 곳이 없었다. 그저 얼음 인형처럼 어여쁠 뿐이었다. 타르탈리아는 가죽 장갑을 벗은 후에 손등으로 그녀를 쓰다듬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다.

집행관, 타르탈리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는다. 곧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시신을 살핀다. 그녀의 새하얀 목에는 강하게 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토니아의 머리를 정돈해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가 손짓하자 다시 얼음 관이 닫힌다. 타르탈리아는 묵묵하게 손수건을 꺼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 그는 기어코 쓰러진 어머니를 부축하는 우인단의 대원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자살이냐 아니면 타살이냐.”

“…….”

“죽음의 명확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느냐.”

“그것이, 자살이라고 합니다.”

그의 여동생, 토니아는, 리월로 시집갔다. 리월의 오래된 바위 신, 암왕제군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타르탈리아가 마수와 괴물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도, 토니아의 편지 안에는 철없는 소녀처럼 사랑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다정하고 상냥한지, 얼마나 멋있고 잘생겼는지. 경계선에서 고생하는 오빠의 안중은 아차, 하며 뒤늦게 물어보곤 했다. 오히려 그 편이 타르탈리아를 안도시키곤 했다. 그가 이 대빙벽을 수호하는 동안 그가 사랑하는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를 바랐으니까. 그것이면, 정말 그것이면 되었는데.

토니아, 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째서 내 동생이 자살한 거야? 행복한 것이 아니었어?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었어? 토니아. 대답해. 대답해……. 아니면…….

그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내를 떠올리며 분노했다.

죽여버리겠어.

타르탈리아는 어둑해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이 대륙에서 가장 강대하다는 리월에, 집권한 이후 계속 황제로서 통치 중인 사내를 떠올리며 타르탈리아는 생각한 것을 중얼거렸다.

“죽여버리겠어.”


스네즈나야의 장례는 아주 엄숙하다. 그들의 장례는 금禁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눈물조차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타르탈리아는 집행관으로서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무수히 많은 죽음을 겪어왔다. 죽음이라는 이별은 그에게 익숙했고 그만큼 그를 무뎌지게 했으며 때때로 몹시 냉정하게 보이게끔 했다. 무엇보다도 대빙벽에선 눈물을 흘리는 순간 얼어붙어 살갗을 찢어버리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언제 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타르탈리아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흐르게 둔다.

반나절. 최소 반나절은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생, 토니아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 커다란 홀에는, 쓰러진 어머니와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따라나선 누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족이 모여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이성을 챙기고 심약한 아버지를 위해 모포를 둘러드리고,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형은 자신의 가족, 형수와 조카도 챙겨야 하니, 오늘 같은 날은 삼남인 자신도 나서야 함을 안다. 하지만….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그저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타르탈리아가 21살 때, 스네즈나야의 나이로 토니아가 성인이 되었을 때, 리월의 황제는 스네즈나야를 방문했다. 외교 문제로 얼음 여왕인 차리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성대한 방문이었는지 그는 용이 이끄는 황금색 마차를 끌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왔다. 그 모습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한달 내내 스네즈나야 전역을 휩쓸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으므로 타르탈리아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이 나쁘게도, 그 남자도 실제로 만나보았었다.

그는 그때 이미 집행관이었는데, 때마침 그는 대빙벽에서의 임무를 잠시 뒷전으로 미루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었다. 토니아의 성공적인 사교계 데뷔를 위해서였다. 보통 영애는 성인이 되면 여왕, 차리차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사교계에 데뷔한다. 놀랍게도 그 해 차리차는 토니아에게 ‘올해 최고의 영애’라는 평가를 내어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었다. 아무튼 그 이후에는 가문의 형제, 자매와 함께 여러 연회를 다니며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보통 이 일은 가문의 가주가 해야 하는 일이다.

토니아는 사실 다른 영애에 비하면 상황이 좋았다. 일단 가문의 외모 자체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부모는 이미 옛날부터 선남선녀로 유명했다. 디오는 훌륭한 외모로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이었고, 누이, 나디아가 받은 구애만 해도 몇 번이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다. 토니아 역시 붉은, 곱실거리는 풍성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너무나 예쁜 아이였다. 그밖에도 디오와 나디아는 둘 다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쌓인 인맥이 많았고, 차남인 형은 예술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삼남인 타르탈리아가 집행관이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을 가진 영애였다. 그런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서 냅다 얼굴 도장부터 찍는 귀족이 줄을 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타르탈리아는, 그럴 때마다 웃는 낯으로 토니아 뒤에 서 있었다. 누이, 나디아는 연애한 후에 결혼했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토니아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아기 사슴 같은 아이였다. 적어도 타르탈리아의 눈에는 그랬다. 그래서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토니아가 말을 꺼낼라 치면 잽싸게 말문을 열곤 했다.

“난 자네의 형인 키릴렌코가 대빙벽에 징병되었다가 줄행랑 친 후 왕성의 경비대로 자원한 사실에 대해 난 알고 있어. 응, 그냥 그렇다는 뜻이야.”

그럴 때마다 토니아는 볼을 부풀리며 아약스를 퍽퍽 쳐대었다. 감히 이 집행관을 마구 때릴 수 있는 것은 그의 동생뿐이었다.

“오빠! 이래선 나 결혼도 못하겠어!”

“오, 토니아. 오빠 말 들어. 저 녀석은 패기도 없어. 거기다 나이 차이도 너무 많이 나잖아? 넌 고작 18살이야, 토니아. 응?”

“에휴. 정말.”

토니아는 레이스로 치장된 장갑을 낀 손으로 아약스에게 팔짱을 꼈다. 아약스는 그런 토니아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다가 그녀의 땋아 올린 머리를 바라보았다. 훤히 드러난 목에 걸린 아름다운 사파이어 목걸이. 그는 다정한 손길로 토니아의 목걸이를 살짝 정돈해주며 속삭였다.

“토니아…. 사랑하는 내 동생. 오빠가 이곳에 오래 있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오빠 장단을 좀 맞춰주면 안 돼?”

“…알았어.”

어차피 그에게 주어진 ‘휴가’는 길지 않다. 그는 또다시 대빙벽으로 나서야할 테고 마수와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좋은 남편 하다못해 좋은 가문이라도 파악해두고 싶었다. 토니아가 버러지 같은 가문이나 쓰레기 같은 남편에게 시집가면 어쩌나, 싶어서 지나치게 간섭했었다.그는 지금까지 사교계에서 활동했던 형 누나와 달리 완전히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더 초조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쯤 리월의 황제의 방문으로, 왕성에서 역대 가장 거대한 연회가 열렸다. 여왕은 일부러 스네즈나야의 귀족을 모두 초대했다. 리월의 황제를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보여주기 식으로 강제 출석 시킨 것도 없잖아 있을 터였다. 그녀는 고국의 강대함도 화려함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급진적인 여왕이었으니까. 타르탈리아는 11명의 집행관 중 한 명으로서 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런 지루한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이었다. 그날, 토니아는 리월의 황제를 봤다. 그리고 타르탈리아에게 뛰어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 나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어.

그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어.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반짝이는 파란 눈에 가득 찬 생기. 그것에 전염된 듯이 타르탈리아는 활짝 웃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나는 좋아, 토니아. 네가 기쁘다면… 네가 즐겁다면…. 사랑하는 내 동생, 토니아.

그렇게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주었다.

3년 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타르탈리아는 눈을 감았다가 뜬 후에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용히 닦았다. 그는 잇새로 흐느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무던히도 애쓰면서, 눈알에 힘을 주어 관을 노려보았다. 그는 곧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저택의 홀을 둘러본다.

“….”

아내가 죽었는데도…. 그 사람은 오지도 않은 것일까? 리월에서 장례식을 치러주긴 한 걸까? 그렇다면 왜 우리를 부르지 않은 것일까. 직계인 우리를. 혹시 죽은 걸 모르고 있지는 않을까?

타르탈리아는 온갖 망상을 하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퍽 쳤다. 그의 눈에서는 이제 화염처럼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는 반나절 가까이 얌전히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거의 자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청년은 기어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두꺼운 저택의 문을 열고 심연처럼 어둑한 세계로 뛰쳐나간다. 타르탈리아의 행동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어두운 눈발을 향해 뛰쳐나간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그 자에게 복수하리라. 이 원한은 절대 녹지 않을 얼음과 같으며 곧 창백하게 불타오르는 화염이다.

세찬 눈보라가 타르탈리아의 몸을 휘감는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만, 내면에서 솟구치는 고통이 너무나 뜨거워 얼어붙지 않는다. 양손을 뻗고 제게 쏟아지는 어둠을 받아들인다. 그의 마음은 심연처럼 새까맣게 물들고 그의 눈동자는 광기에 젖는다.

고대 악이 있다면 들어다오.

내 심장을 주마.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 사내의 심장! 그 사내의 완벽하고도 완전한, 온전한 죽음뿐이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검은 괴수가 뛰쳐나온다. 그것의 형체는 감히 묘사할 수 없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타르탈리아를 ‘먹었다’. 타르탈리아는 그것에 몸을 맡긴다. 그의 영혼과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져 산산이 조각난다.

눈을 떴을 때… 타르탈리아는 푹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뻑뻑한 눈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군가 광인처럼 설원을 헤매던 그를 안전한 곳에 옮겨둔 모양이었다. 타르탈리아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토니아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어리석기는. 이렇게 태평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찰랑이는 붉은 머리카락의 토니아가 등장했다. 타르탈리아는 너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쩜 이렇게 생생한 환상이 있을 수 있을까?! 토니아는 토끼처럼 펄쩍거리며 뛰어와 아약스의 품에 안겼다. 아플 정도로 강한 포옹이었다!!!

“오빠, 오빠. 일어나! 응? 얼른 내 새 옷 좀 봐줘. 리월풍의 옷을 빌려왔어. 응?”

“…토니아?”

“아무래도 리월하고 스네즈나야의 합동 연회니까. 좀 리월 분위기를 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물어보니까 거기는 따뜻한 나라라서 노출이 좀 있는 옷도 입는다고 하더라! 응? 얼른얼른.”

“토, 토니아? 토니아. 토니아?”

“응? 왜애. 아직도 잠이 덜 깼어? 어제 몇 시에….”

쉼 없이 조잘거리는 토니아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토니아를 끌어안았다. 토니아는 도리어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타르탈리아의 등을 두드렸다.

“…아약스 오빠. 왜 그래…? 악몽이라도 꿨어?”

그 말에 타르탈리아는 입술을 짓이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악몽이었어. 정말… 끔찍했어.”

“오빠…. 대빙벽에서 너무 힘들어서 그래? 응?”

“아니야. 그냥. 그냥 조금만 이러고 있자, 토니아….”

“….”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의 으스러질 것 같이 작은 체구를 한참 안아주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감정이 잦아들었다. 타르탈리아는 어둑한 눈으로 토니아를 응시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핀다. 마구 풀어헤친 머리가 몽글몽글한 크림이나 거품 같았다.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 위에는 생기 가득한 홍조로 물들어 있다. 그녀의 붉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그녀를 안아 올린다. 장난스러운 자세였다.

“꺄, 오빠! 나 18살이야. 이제 성인이라구!”

“어라. 그래? 아가씨 취급 받고 싶다 이겁니까, 아가씨? 데뷔했다, 이겁니까?”

“아, 정말! 내려줘!”

“하하하. 토니아 양? 그렇게 말해도 응접실까지 안고 갈 겁니다만?”

18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타르탈리아는 제게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토니아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아든 채 복도로 나선다. 에베베, 다 컸는데 애처럼 안겨 있냐! 바로 장난을 거는 안톤과, 나도나도, 형, 나도 안아줘, 하고 달라붙는 테우세르까지. 타르탈리아는 활짝 미소 지으며 그들을 가까스로 끌어안고 쓰다듬는다.

심연이 내 부름에 응했다.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대 악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자, 이제부턴.

타르탈리아는 차가운 얼굴로 복도를 향해 나간다.


타르탈리아가 이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집행관’이기도 하다.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한 지령을 몇 번이나 완수했었고 최근엔 대빙벽에서 마수와 괴물을 상대하느라 이미 닳고 닳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제게 닥친 변화에 대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악 혹은 심연, 어둠에 자신의 심장을 바친 대가로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치고…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귀족 영애로 올해 딱 성인이 되었으니. 그녀는 맨발로 작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거울 앞에 서 있다. 그는 소파에 앉은 채 거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며 감상을 기다리는 토니아를 바라본다. 이렇게 예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쁜 건 예쁜 거고, 리월 복장은 좀 별로였다.

“토니아, 농담이지? 그렇게 허벅지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으면 얼어 죽을 수도 있어.”

“으응? 그렇지만 얼음 여왕님의 성은 조금도 춥지 않잖아.”

“안은 여왕님의 권능으로 절대 춥지 않겠지만, 그래도 발코니나 테라스는 추울 거야. 무엇보다도 노출 자체가 너무 과해. 가슴에 구멍은 왜 뚫어둔 거야?”

“흥. 알았어. 그러면 다음 옷!”

타르탈리아는 14살 때 출가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진 경우 누군가는 가족에 대한 정이 없거나 애틋함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타르탈리아는 반대였다. 군인으로 혹독하게 훈련받고 단련하면서 돌아가고 싶다는 나약한 생각은 한 적 없지만, 함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애수와 애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련이 있었다. 여유가 날 때마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무른 성향이 있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그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 특히 동생들이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으면 했다.

아마도 이런 점이 실책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군인이고, 삼남이라서, 출가한지 오래되어 외부인 같으니… 크게 간섭하지 않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은 소리’를 하는 아들, 동생, 형, 오빠이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토니아. 아무리 봐도 아까 입은 새하얀 드레스가 가장 예쁜 것 같은데? 더 입어볼 거야?”

“당연하지! 아직 두 벌 남았는걸! 혹시 모르잖아.”

“샘플을 다섯 벌이나 입은 거야? 토니아, 오늘이 최고치구나. 아약스를 너무 괴롭히지 마라.”

“아하하. 난 괜찮아, 형.”

디오는 아침부터 바쁜 일정이 있었는지 왔다갔다 복도를 오가다가 고개를 슥 내밀어 말 한두 마디 얹고 다시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업무가 정리되었는지 응접실에 들어선 디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다정한 눈길로 토니아의 머리를 살짝 정돈해주며 그녀가 입은 ‘칭파오’, 리월식 복장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리월이 스네즈나야와 정반대에 있다는 건 알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런 옷을 입는단 말이야…? 몸매가 너무 드러나잖아?”

“아약스 오빠랑 똑같은 말 하네.”

“우리가 괜히 형제겠니? 이제 두 벌 남았다고 했지. 마저 입어보렴. 이 오빠도 봐줄게.”

“여기서 딱 기다려!”

작은 의자에서 폴짝 내려온 토니아는 다시 응접실 안쪽으로 사라진다. 아약스는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디오도 어깨를 으쓱인다.

“토니아가 엄청 설렌 것 같지? 당연해. 여왕님이 이 정도로 큰 연회를 연 적은 몇 백 년만인지. 나도 놀랄 정도의 스케일이야. 우리가 그 연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의 한 순간에 함께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마 스네즈나야의 모든 귀족이 올 거야. 토니아의 데뷔 자체도 성공적이었는데 최고의 영애로 발탁된 해에 이런 큰 연회가 열리다니. 모두 우리 토니아를 한 번씩 보려고 하겠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토니아는 반드시 좋은 남편을 만나게 될 거야. 정말 기대돼.”

타르탈리아는 팔짱을 낀 채 눈을 내리깐다. 그는 부드러운 블라우스에 너머로, 자신의 팔뚝에 불만스럽게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네즈나야는 거대한 나라이고 그만큼 많은 귀족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부와 명예를 늘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결혼이란 일종의 장사 수단에 가깝다. 더 나은 가문과 결혼하기 위해 서로의 손익을 계산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형, 디오는 가주로서 무척 계산적이고 치밀하게 결혼했다. 영지는 얼마나 큰지 병사는 얼마나 거느리고 있는지 등등. 언뜻 보면 정 없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목적이 일맥상통한 관계여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아주 무탈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썩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어서 아이도 두 명이나 낳았다.

그의 누나, 나디아는 예외다. 누나는 매형, 블라드와 열렬히 연애한 끝에 결혼했으니까. 매일 편지를 쓰고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다만 블라드는 가난한 집안이어서 세간의 시선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들이 사이가 좋더라도 기둥서방이니 무능한 남편이니 하는 꼬리표는 뗄 수 없었다.

물론 이 결혼 문화와 동떨어진 작은형도 있기는 하다. 결혼은 나 몰라라 하고 수메르로 유학 가버리긴 했지만, 차남이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이다.

누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누가 옳다고 해야 하는가?

이 모든 결혼이 결국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가 시작된 인연이기도 한데.

타르탈리아는 이런 문화의 흐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그에게는 거리가 다소 먼 일이기도 했다. 그는 군인이었으니까. 스네즈나야처럼 쉼 없이 전쟁이 일어나는 나라에서 군인은, 그 무엇보다도 존경 받는 직업이지만, 결혼상대로는 최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쉽게 죽었으니까. 여인들이 군인을 싫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일에 대해 늘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치부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에 대해 형에게 할 말이 있어.”

“음?”

“여제께서는 황제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실 예정이시다…. 나는 집행관으로서 비밀을 엄수해야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디오에게 밀착했다.

“…연회라고 해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아마 거래 조건이 수틀리거나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어. 그래서 말인데, 그곳에 토니아가 참석하지 않기를 원해.”

“…아약스. 너 지금 무슨….”

디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핀다. 그는 곧 한손으로 타르탈리아의 팔을 붙들며 속삭인다.

“바보 같은 소리. 신중한 네 성격은 알지만, 너무 뜬구름 잡는 걱정이다. 설마 얼음 궁전에서 바로 전쟁이 나겠어? 설령 그렇다고 해도 여제께서 절대 우리를 다치게 하실 분이야?”

“형. 그 연회가 아니더라도 토니아는 충분히 남편을 만들 수 있어. 그곳만이 기회는 아니야.”

“아니. 오히려 기회야. 네 말대로라면 그곳은 스네즈나야의 귀족뿐만 아니라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도 온다는 뜻이 아니야? 만약 토니아가 리월의 선인과 결혼한다면 우리 가문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디오메데스.”

갑작스러운 어휘에 디오의 몸이 딱딱해졌다. 눈앞에 있는 것은 삼남, 아약스가 아니라 집행관, 타르탈리아였다. 그의 직위는 스네즈나야에서 11번째였으므로 형인 그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하던 디오는 먼저 눈을 내리깔고 타르탈리아를 놓아주었다. 그는 달갑지 않다는 듯 장갑을 낀 손을 문지르다가 뒷목을 긁적인다.

“토니아가 실망할 거야. 저 아이는 연회 소식을 들은 이후에 내내 저 상태야. 몇 번이나 치수를 쟀는지 몰라. 드레스 샘플만 30번을 넘게 입었어! 어떻게 이야기할 건데?”

“….”

“분명히 토니아의 친구들은 모두 참석할 거다. 그리고 그 날 별일 없이 무사히 연회를 즐겼고 다들 흥미 있는 남자를 만났다고 이야기할 거야. 추가적으로 난 가주로서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비웃음거리가 되겠지. 가장 좋은 타이밍에 데뷔한 영애를 내놓지 않는 가주가 있냐고 손가락질 당할 것은 안 봐도 뻔해. 정말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야?”

“….”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토니아가 리월의 황제에게 반해서….

….

차마 입으로 낼 수도 없는 끔찍한 현실은 지금으로선 타르탈리아만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연회에 토니아가 참석하고, 그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 자체를 막고 싶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해서 무조건 결혼하라는 법도 없지만, 그 과정에서 토니아가 겪을 마음고생을 눈곱만큼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토니아의 인생에서 그 인간을 완전히 도려내고 싶었다.

오로지 그 욕망만이 타르탈리아를 지배한다.

“…알았어. 아약스, 네 뜻대로 해라. 네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겠지. 너를 믿어.”

결국, 패배를 선언한 것은 형이었다. 아약스가 동생들에게 끔찍한 만큼, 디오도 제 동생에게 약했다. 타르탈리아가 아무리 스네즈나야의 11번째 집행관이고 대빙벽에서 마수와 괴물을 상대로 살육을 저지르는 군인이라고 해도…. 결국 그에게는 동생인 것이다.

다정한 언사에도 타르탈리아는 여전히 굳은 채다. 그는 역시 이런 성미가 아니었다. 형에게 날을 세워 이야기하고 이해시키지도 않은 채 제 뜻대로 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토니아의 결혼 문제는 가주인 디오가 해야 할 일이고, 삼남인 자신이 관여할 일도 아닌데… 예민한 말투로 형과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되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에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어쩌겠는가. 그의 심장은 이미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니.

그가 성났다고 여기는지 디오가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에 타르탈리아를 끌어당기고 품에 넣는다. 머리카락을 마구 다독이는 손길에 고집스럽게 끼고 있던 팔짱이 풀렸다. 디오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타르탈리아의 등을 두드린다.

“…고마워 형.”

“대신! 네가 이야기해. 난 토니아 감당할 자신 없어.”

“….”

이렇게까지 해주었는데 이 일까지 떠넘길 수는 없다.

하지만…. 디오와 이야기하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토니아와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뭘 감당해?”

몰래 다가온 토니아의 부름에 포옹하고 있던 사이좋은 형제가 떨어져 나갔다.

“별일 아냐. 오, 근데 토니아. 정말 예쁘다. 초록색 드레스는 상상도 못했는데 네 머리색 때문인가? 정말 잘 어울려. 토니아. 너처럼 예쁜 아이를 우리는 천사라고 부르기로 했어.”

디오는 빠르게 대화를 수습하며 토니아에게 칭찬을 퍼부어준다. 토니아는 금세 치마를 잡고 펄럭이다가 의자 위로 펄쩍 올라간다. 조심해! 디오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웃는다. 곧 그녀는 거울 앞에서 한껏 아양을 부리며 디오와 아약스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예뻐? 어때? 그래도 아까 그 드레스가 나아?”

“하, 이건 정말… 고르기 어려운 문제네. 그렇지, 아약스?”

“아. 정말 행복한 고민이야! 뭘 입고 가야하지?”

디오가 눈치껏 팔꿈치로 타르탈리아를 퍽 치지만, 타르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토니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토니아.”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다.

연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말에 토니아는 예상대로 왜?! 하고 묻더니 바로 앞에 앉은 디오에게 시선을 보냈다. 디오는 지팡이 손잡이를 만지작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 그렇게 묻자 부모님은 곤란하다는 듯이 아약스를 바라보았다. 아약스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어쩌면 연회에서 위험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고저쩌고. 결론은 넌 가지 말고 집에 남으라는 말을 최대한 온화하게 말했지만….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형, 누나들은 연회에 참석하니까. 왜 자신은 안 되느냐고 묻던 그녀는 곧 눈물을 흘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 후에는 저녁 식사도 거르는 바람에 아약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토니아. 오빠 들어갈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있던 그녀는 몸을 뒤척인다. 명백히 대화하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아약스는 벽난로 안의 불씨를 잠깐 확인하다가 천천히 토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그녀의 얼굴 옆면을 살펴보았다. 속눈썹이 눈물에 젖어 촉촉하고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우는 것만 보아도 아약스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토니아….”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아주며 그녀를 어르자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물이 더욱더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주륵주륵 새어나오는 눈물을 바라보던 아약스는 손가락으로 토니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테우세르는 모르겠지만, 넌 알고 있잖아. 토니아…. 집행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잖아. 난 다른 사람보다 잔혹한 일을 많이 겪었어. 그래서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어. 나를 이해해주면 안 돼?”

“그건, 알아. 하지만… 오빠랑 이야기하기 싫어.”

“….”

“혼자 있고 싶어.”

토니아는 눈을 꼭 감은 채 속삭였다. 아약스는 그런 토니아를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아약스는 토니아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녀가 항상 웃기만을 원한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번 연회만 지나친다면 그 황제와 자신의 여동생은 만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 타르탈리아는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마음이 토니아에게 화내는 형태로 변질되지는 않았다.

“나의 어여쁜 천사야. 대신 이번 연회가 끝나면 같이 말을 타러 가자. 어머니께서 못 타게 하시잖아? 오빠가 비밀로 해줄게. 응?”

“…정말?”

“으으응. 물론이지.”

그제야 토니아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고개를 비튼다. 새파란 눈동자에 가득 찬 눈물이 왜 이리도 아름다운지! 타르탈리아는 토니아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토니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약스를 흘겨보지만, 곧 오빠의 몸을 꽉 끌어안는다.

….

얼음 여왕이 여는 연회는 흔치 않다. 그녀는 몇 백 년이나 스네즈나야를 통치한 여제로서 분명히 백성을 사랑함이 분명하지만, 때때로 무정하게 평가되기도 한다. 스네즈나야의 서북쪽에 맞닿아있는 ‘천리’라는 곳에서 마수와 괴물이 쳐들어와 끝없이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관심사는 전쟁에 관련된 것이다. 강력한 무기, 튼튼한 방어구, 군인 양성, 화력을 뒷받침해줄 원소 융합에 대한 연구, 기계 인간 개발 등등….

그런 여제가 타국의 황제를 환영하기 위해 연회를 연다니.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타르탈리아는 집행관 사이에서 대빙벽을 지키는 귀공자로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청년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며칠 전, 모든 집행관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집행관에게도 얼음 여왕의 연회는 중대한 일이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피에로는 엄숙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타르탈리아의 앞 순번인 10명의 집행관에게 업무를 분담한 채다.

‘귀공자 타르탈리아는 경비를 담당하라.’

‘경비? 궁전을? 뭐, 좋아. 그러지 뭐.’

‘흐흥.’

산드로네는 무언가 즐거운지 대놓고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며 비웃는다.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그녀가 왜 자신을 향해 조소를 흘리는지 알지 못했다. 얼음 궁전 경비라니. 자신은 원래 대빙벽을 수호하고 있었으니 최적의 임무 아닌가? 타르탈리아는 산드로네가 왜 자신에게 저렇게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그 행동이 그녀를 더 화나게 했는지 별안간 눈알에 힘을 주어 타르탈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곧바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어차피 이 연회에 있어서 크게 머리 써야 할 사람은 극소수다. 이를 테면 야심찬 정치가로서 풀치넬라가 이번 연회로 취할 이득에 관련된 외교 문제나, 우인단의 자금을 관리하는 판탈로네가 연회를 장식할 모라 분배라든가…. 누가 보면 타르탈리아에게는 하찮은 임무가 주어졌다고 반발심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이쪽이 더 편했다.

좋은 편이다. 머리 쓰는 일은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어진 임무를 소홀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11번째 집행관을 따르는 대원을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보초를 서게 하고, 또 교대하며 순찰을 도는 팀도 따로 꾸렸다.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연회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원들과 함께 궁전 근방을 순찰하기로 결정했다.

저번에는.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르다. 타르탈리아는 새하얀 정장을 입었다. 셔츠의 깃을 바짝 올리고 새하얀 크라바트로 목을 감쌌다. 파란색 자수로 수놓은 정장 아래로는 새하얀 장갑을, 또 새하얀 구두를 신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느낌을 주는 복장이지만, 그는 잘 소화해냈다. 물론 오늘 타르탈리아에게 쏟아지는 평가는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누구인가, 귀공자 타르탈리아였다. 그는 스네즈나야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미인이다. 그런데 우인단의 집행관이라는 엄청난 작위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는 귀족 가문의 삼남으로, 아주 젊었다! 게다가 그는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아서 사교계에서는 거의 전설 속 동물인 유니콘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어쩌면 리월에서 온다는 황제보다도 더욱더 간절함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귀공자 님?”

타르탈리아는 술잔을 든 채 홀 주위를 살펴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리월의 황제는 오지 않았고, 오기 전에 미리 참석하기 위한 귀족의 신분을 파악하며, 혹시 불순한 움직임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찰나였다.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귀족 영애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아아.”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린 영애와 그녀를 한껏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누… 누구더라….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짚으며 그들이 기분 상하지 않을, 최대한 예의 바른 말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사실 그는 이런 귀족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군인이고 어린 나이에 징병되었으므로, 예법에 대해서는 어릴 때 충분히 배웠지만, 귀족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누가 누구랑 결혼했고, 누가 누구의 사촌이고….

“안녕하세요, 레이디 다닐라! 오랜만입니다. 부친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어머, 디오메데스 경. 물론이죠.”

어느새 다가온 형, 디오가 아약스에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마침 이렇게 마주하니, 제 셋째 동생 안톤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지만요. 부인께서 좋게 봐주신다면 이보다 더 영광인 일이 있겠습니까?”

사, 살았다…. 타르탈리아는 애써 웃으며 디오를 향해 웃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무려 7남매인 그의 형제, 자매가 한껏 치장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같은 연회는 결혼을 눈앞에 둔 젊은이가 아니더라도 가문의 모든 구성원이 모두 나오기 때문에 친목을 다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타르탈리아는 가족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테우세르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 테우세르?”

“형!”

늦둥이인 테우세르가 후다닥 뛰어와 타르탈리아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테우세르의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가 다시 가족 구성원을 살펴보았다. 토니아만 없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다들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이봐요, 사랑하는 가족들. 토니아는?”

“….”

“….”

“설마 그 아이만 저택에 두고 온 거예요? 안톤, 너라도 집에 남아 있었어야지.”

“형. 왜 나한테만 그래.”

“엄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정말 그 아이만 두고 온 건가요?”

“오, 레이디 다닐라. 반가워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딸아이가 정말 잘 컸군요? 첫째라고 했던가?”

“어머, 세상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요! 이제 좀 괜찮으신 건가요? 그보다, 삼남인 귀공자 님까지 대동하실 줄 몰랐는데요.”

곤란한 질문에 대답하기 싫은 듯 그들의 훌륭한 어머니는 빠르게 다닐라에게 다가서 그녀에게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긴다. 타르탈리아는 황당한 시선으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가족들을 응시했다.

“난… 토니아에게만 한 말이 아니야. 안톤, 테우세르도 포함해서 한 말이었어! 그런데 동생들까지 데려와 버리면, 토니아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

“….”

“사실은, 아약스.”

디오는 진중하게 아약스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불안한 감각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는 토니아를 막지 못했어. 너도 알고 있지? 어렸을 때 그 아이가 얼마나 파괴적인 말괄량이였는지. 그 아이는… 몰래 마차에 올라탔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어떻게 우리가 그 아이를 밀어낼 수 있었겠어?”

“?”

타르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지금은 내 아내와 함께 있다. 네 형수께서 오늘 잘 돌봐주실 거야. 아니, 이따가 우리와 합석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기왕 이렇게 된 것 너도 그냥 용서해라.”

디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직 리월의 황제가 오지 않았다. 그전에 토니아를 구슬려 안톤, 테우세르와 함께 집에 보내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는 초조한 마음에 술잔을 지나가는 시종에게 건넨 후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연회장 내부가 술렁거렸다.

커다란 아치형 창문 너머로 찬란한 빛이 들이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

타르탈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빛을 따라 먼 곳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은 찢어지고 그 사이에 황금색 태양빛이 일렁거린다. 잠시의 정적, 그 후에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린 거대한 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를 필두로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 위를 헤엄치는 듯 요동치는 몸통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가 달려 있었다. 그 용 주변에는 두루미, 사슴, 학, 해태, 기린, 그런 동양의 신수들이 따라붙는다. 커다란 정원 한쪽은 그들을 위해 이미 텅텅 비어둔 상태였다. 그 위로 하나둘 내려앉는다. 검은 용이 내려앉자 쿵 하고 땅이 흔들렸다. 전율이 일 정도로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그 모습에 스네즈나야의 귀족들이 모두 체통을 잃고 궁전 밖, 정원으로 뛰어간다.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혼란스러운 연회를 바라보며 시선을 돌린다.

토니아…. 토니아….

그는 여동생 이름을 속삭이며 붉은 머리에, 새하얀 드레스를 입었을 여동생을 찾을 뿐이었다.


리월의 삼안오현선인三眼五顯仙人이라 불리는 이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라고 했다. 그들은 대부분 거대한 뿔, 꼬리를 달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것에 더해 귀, 날개, 비늘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외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복식의 형태가 아주 다양했는데 대부분 가운 형태의 도포를 두르고 있었다. 길이, 둘레가 제각각인 반인반수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아주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온갖 마수와 괴물을 상대해온 타르탈리아에게는 진귀한 풍경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어째서인지 그 역시 홀린 듯이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저 한 명을 보기 위해서다.

리월의 황제, 암왕제군.

리월에서 가장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는 용 그 자체라고 했다. 긴 뿔에 두꺼운 꼬리는 다른 이와 크게 다를 바 없고 검은색 한푸와 검은 부채도 그다지 화려한 색상은 아니었으나, 그가 황제임은 분명했다. 누가 봐도 그에게는 그런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엄숙한 표정은 짐짓 무정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그 내면에는 필시 오래 산 것의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그저 몰린 사람들 너머로 그를 노려보았다. 살의!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낀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당장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 검이나 창을 그의 목에 겨누고 그를 꿰뚫고 싶었다. 저 말끔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창백하게 질리는 꼴을 봐야지만 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가슴에 불타오르는 이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으리라. 심장을 주어 얻은 이 기회를 절대 허투루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눈이 마주쳤다!

암왕제군의 걸음이 천천히 멈추었다. 신비하게도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선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잘 흐르는 폭포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바위 같은 황제를 피해 나아갈 뿐이다. 그는 검은 부채를 천천히 펄럭이며 타르탈리아를 빤히 쳐다본다. 그에 응하는 듯 타르탈리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

과연, 암왕제군이라고 했던가. 고작 살기일 뿐인데 곧장 자신을 찾고, 쳐다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자다. 저자도 무늬만 황제는 아닌 모양이다.

그에게 완벽하게 복수하기 위해서 살의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더 이로울지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제 속내를 숨기고 그에게 접근한 후에 배신한다? 그것은 제 성격과 맞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전장을 지배하는 집행관으로서 활이나 검, 혹은 창으로 제 의지를 표명하고 싶을 뿐이다.

눈이 마주친 시간은 짧았다. 암왕제군은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선인들과 함께 흐르는 듯 저택 안으로 들어간다. 타르탈리아 역시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떼어내었다.

일단 토니아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신과 달리 토니아는 퍼레이드 같았던 방문에서 누가 황제인지 알아봤을 리 없다. 그는 다급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지휘관에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과 달리 타르탈리아는 마음이 급했다.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삼안오현 선인 중 높은 직위로 추정되는 이는 이들은 이미 여제와 함께 있었다. 그 옆에는 피에로, 카피타노, 콜롬비나, 풀치넬라도 있었다. 그들 역시 서열이 높기 때문에 저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말석인 타르탈리아는, 물론 원한다면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다시 귀족들 사이로 걸음을 옮긴다.

스네즈나야의 연회는 다양한 꽃과 얼음 조각으로 꾸며진다. 그러나 얼음 신의 권능에 의해 꽃은 얼지 않고 조각품은 녹지 않는다. 혹독한 얼음 틈새에서 피어난 꽃처럼 보이기에 더 영롱하고 찬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타르탈리아는 이 아름다운 연회장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홀을 돌며 몇 번이나 제게 말을 붙여오는 이들을 물리치며 여동생을 찾았다.

“도련님!”

“형수님!”

형, 디오의 아내다. 타르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형수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금발의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다가 슬쩍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된 얼음 조각품 뒤로 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도련님. 화나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형수님. 토니아는요?”

“저쪽에서….”

“?”

“춤을 신청 받아서 춤을 추고 있어요.”

“오.”

타르탈리아는 무대 위에 선 수많은 청년들을 훑어보다가 이내 자신의 동생 토니아를 발견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낯선 사내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는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바뀌고 춤이 시작된다.

그는 잠시 넋을 놓고 동생을 바라보았다. 작은 은색 왕관에 땋아 올린 머리카락하며 훤히 드러난 등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긴장과 불안으로 떨리고 있음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도련님. 삼안오현 선인들은 아주 예법이 출중하다고 들었어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

아무래도 토니아를 닦달할 것으로 여겼는지 형수는 타르탈리아를 달래는 어조로 말한다. 타르탈리아는 입술을 비틀며 미소 짓다가 다시 토니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춤을 추는 시간이 왜 이리도 긴지….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잦아들고 첫 번째 춤이 끝났다. 토니아는 신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에 형수를 찾다가 타르탈리아와 눈이 그대로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싶었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저벅저벅 타르탈리아에게 걸어왔다. 타르탈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낀 채 제게 다가오는 토니아를 바라본다.

“토니아? 돌아가자.”

“싫어.”

“토니아.”

“오빠. 왜 이래? 아무 위험도 없잖아. 그냥 연회일 뿐이야. 여왕님이 여는 연회. 다시 있을까 말까 한 연회라고!”

“토니아. 고집 부리지 마.”

“오빠야말로 고집 좀 부리지 마. 난.”

“토니아.”

“왜 그러는 거야? 이해를 시켜줘. 그냥 무작정 안 된다고만 하니까 답답하고 화만 나잖아.”

“말했잖아. 이 연회는….”

그래봤자 아약스도 토니아도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들은 질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던 타르탈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슬쩍 주변을 살펴보던 아약스는 다급하게 토니아의 팔을 붙들었다.

“토니아. 가자, 일단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해.”

“오빠!”

“토니아!”

여제와 황제가 좌석에서 내려와 연회장으로 내려왔고, 그들 사이가 무척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좌중은 이미 가까운 곳에 있는 여제와 황제로 관심이 쏠려있었는데 그들은 싸우느라 그 분위기를 읽지 못한 것이다.

이미 거리가 가까워졌다. 타르탈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토니아를 응시하다가 제게 다가오는 권위, 여제를 바라본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창백한 얼굴이 가까워진다.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의 팔을 놓아주고 그녀에게 몸을 돌린다.

“귀공자 타르탈리아. 나의 11번째 집행관.”

“위대하신 여왕님.”

타르탈리아는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여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내밀어진 손을 바라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는 고개를 조아린 채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일어나라, 타르탈리아.”

“예, 폐하.”

“네게도 소개 시켜주어야겠구나. 이분은, 리월의 암왕제군이시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눈을 내리깔고 뒷짐을 졌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흑요석 같이 검은 머리카락. 금광석처럼 샛노란 눈.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그 시선을 응시하다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음. 이분이 11번째 집행관이시군요.”

그는 아주 중후한, 묵직한 저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타르탈리아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토니아구나.”

“여왕님!”

“올해 알현식 이후로 처음이구나. 여전히 아름다워.”

“여왕님의 고결함에는 견줄 수도 없습니다.”

여제의 온화한 인사와 토니아의 겸손한 응대에 타르탈리아는 활짝 웃고 싶었으나 어쩐지 입술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고, 또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확실히 타르탈리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에게 보였던 살기의 유무를 다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심 없었다. 현재 그의 관심은 오로지 토니아에게 있었다.

토니아의 표정을 읽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암왕제군이 아니었으면 했다. 그녀의 눈에 가득 찬 사랑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플 것만 같았다. 제발, 제발. 타르탈리아는 간신히 시선을 떼어 토니아를 바라보았다.

….

토니아는… 여제를 보고 있었다.

뭐지?

타르탈리아는 토니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녀는 알현식 때처럼 무척 감동스럽다는 듯이 여제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랬다. 토니아는 마치 암왕제군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토니아는 여왕을 무척 흠모하는 강경한 왕당파에 가깝고 그것은 아약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딱히 이상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너무나 당연한 태도였지만, 어쩐지 예상 밖의 만남이었다. 그러니까 타르탈리아는 그녀가 암왕제군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무작정 들이대는 모습을 상상하고, 그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건…?

“그러면, 갈까요. 제군.”

“아. 타르탈리아 씨?”

타르탈리아는 어리둥절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도 모르게 불만스럽게 미간이 좁아든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귀품이 흐르고 예의가 바른 청년이군요. 오늘 이 연회를 함께 즐기며… 타르탈리아 씨가 이 얼음 궁전을 소개해주면 좋을 듯한데, 여제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 아니. 저는. 저는 여동생을.”

“제군께서는 스네즈나야에 계시는 동안 원하는 바 무엇이든 뜻대로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귀공자?”

“…물론입니다, 여왕 폐하.”

“그러면, 이쪽으로.”

여왕의 손짓에 제군은 몸을 천천히 돌리며 그녀와 함께 걷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잽싸게 토니아에게 몸을 굴린다. 그녀는 어쩐지 양손을 모으고 황홀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토니아, 너….”

“세상에. 여왕님….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시다. 정말… 나를 기억해주시다니…. 이렇게 또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

타르탈리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토니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토니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작 그 행동에 당황한 듯 토니아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오빠를 올려다볼 뿐이다.

“토니아, 너 정말… 괜찮니?”

“응? 뭐가?”

“괜찮아? 지금 뭔가 느껴져? 무슨 생각이 들어?”

그는 자신이 먼저 ‘암왕제군’의 첫인상에 대해 물어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꼴은 아닌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후에 원천차단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며 토니아 역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뭘 묻고 싶은 거야? 그냥…. 그냥. 여왕님이 예쁘고 아름다워. 내가 좀만 부지런했으면 나도 우인단에 들어가는 건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군인이 장난인 줄 아니?”

“음. 그래서 무슨 말 하는 거야?”

잠시 떨어진 거리에서 여제의 시선이 닿는다. 타르탈리아는 초조한 듯이 입술을 짓이기다가 토니아의 팔을 살짝 붙들고 속삭였다.

“토니아. 이따가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응? 오빠는 명령을 수행하고 올 테니까.”

“오빠, 오빠! 여왕님이 오늘 무슨 말씀하시는지 꼭 기억했다가 말해줘야 해!”

타르탈리아는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여제와 제군에게 다가간다.


여왕 폐하의 권위 그 자체인 스네즈나야의 얼음 궁전이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할 수 있을까?

무대 위에 선 콜롬비나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애처로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감상할 때까지 타르탈리아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제군과 여제뿐으로 타르탈리아는 말없이 주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시종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얼음 궁전을 직접 설계했을 여왕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녀 앞에서 궁전을 소개하는 일은 비전문가가 아는 체 하는 꼴이다. 하물며 타르탈리아조차 여태껏 대빙벽 근방에서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곳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암왕제군을 위하여 궁전 외부와 내부를 확대한데다, 그는 옛날부터 이런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런 연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스네즈나야로 오는 길에 이 나라의 문화에 대해 몇 가지 공부했습니다만, 놀랍게도 스네즈나야는 얼음과 눈 때문인지 작품 활동이 특이한 양상으로 성행하더군요. 리월에서는 오래된 반석 사이에 난 광물을 갈고 닦아 보석을 만든다든지 바위와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런 차이점이 무척 흥미롭더군요. 아마도 추운 환경이기 때문에 도자기를 빚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네즈나야에서 발견되는 ‘골동품’은 대체로 어떤 종류의 것인지 궁금하네요. 그렇지, 이 궁전 안에는 오래된 물건을 보관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습니까? 가능하다면 보고 싶습니다만. 오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아아. ‘콜롬비나’라고 했던가요. 저분은 아주 노래를 잘하시는군요. 노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스네즈나야의 무형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음악, 무용 같은 것 말입니다. 리월에서는 연극이 주를 이루는데 이곳은 오케스트라라는 악단의 연주가 웅장하게 이루어지는군요. 악기 연주가 주된 형태인 것도 흥미롭습니다. 추운 곳에서 노래하면 목이 쉽게 상하기 때문일까요? 아, 그렇지. 하지만 제가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문학입니다. 문학의 창조자가 속한 사회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네, 이름 난 작품 대부분이 몹시 현실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문학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스네즈나야의 극단적인 성향 때문입니까? 그대의 소견은 어떠신지?”

타르탈리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암왕제군은 정말 말이 많았다. 아무래도 그는 상대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만 하는 성격인 듯했다. 말이 많은 것이야 그렇다 쳐도…. 입에 담는 내용도 어쩜 이리도 지루한지. 타르탈리아는 그가 예술이니 뭐니 지껄이는 모든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자신을 갈고닦는 수행에 있다.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은 ‘신의 눈동자’가 아닌 ‘내면의 눈’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던가. 그것은 그들이 반인반수이기 때문인 걸까? 혼혈이라서? 아무튼 그들은 특이한 선술을 사용한다는데 그 선술은 보통 어떤 식인지. 암왕제군은 최초의 선인이자 모든 선인의 스승이라 하였는데 대체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이런 소재로 대화했다면 타르탈리아도 귀를 기울였을 지도 모른다.

뭐, 가정일 뿐이다. 타르탈리아는 암왕제군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 박학다식한 제군의 비위를 맞춰줄 훌륭한 여왕님이…….

없었다!

타르탈리아는 순간 당황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그들은 연회장에서 벗어나 다소 한적한 복도에 들어선 채다. 얼음 궁전의 보석 같은 통로에 간격마다 미술품이 놓여 있었다. 콜롬비나의 음악은 어느새 멀어져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타르탈리아 씨? 제 이야기가 지루하십니까?”

종려는 접힌 부채로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묻는다. 머리는 새까맣고 눈은 샛노란 것이 흡사 스네즈나야의 높은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짐승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실제로 그는 뿔과 꼬리를 달고 있으니 짐승이라 할 만하였다.

타르탈리아는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깊은 혐오감에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던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틀어 시선을 피했다.

“…여왕님을 다시 모시고 오겠습니다.”

“오, 아닙니다. 타르탈리아 씨. 그대의 여왕과 제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 알고 계십니까? 제가 스네즈나야에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왕과 교류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타르탈리아 씨랑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

타르탈리아는 잠시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했던 귀족 영애는 무수히 많았지만, 사내, 반인반수, 그것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국가 원수는 처음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타르탈리아에게 눈앞의 이 남자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혹은 여동생의 죽음을 방관한 존재에 불과했다.

견딜 수 없는 불쾌감에 입술을 비틀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모든 일은 이미 다 옛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동생 토니아는… 죽지 않았고, 살아 있다. 웃는 토니아를 볼 때면 자신이 겪었던 일이 모두 환상처럼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지만.

암왕제군. 왜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충격이 다시 덮쳐오는 것일까? 어떤 여지 혹은 가능성이 온전히 배제되지 않아서일까? 토니아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느꼈던 슬픔과 고통이 격정적으로 휘몰아친다. 그리고 가슴이 거세게 들끓었다. 그가 이 스네즈나야를 떠나 리월로 돌아갈 때까지 이 충동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 타르탈리아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어졌다.

애초에 그는 타인을 오묘하게 괴롭히는 성정은 못 되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다정하고 상냥하다. 그를 부족함 없이 키워준 부모와 사이좋은 형제자매 사이에서 나고 자랐으니 사랑을 받을 줄도 알았고 베풀 줄도 알았다. 심지어 그는 전투에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우월한 존재로서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타인을 미워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만큼 여유로운 환경에서 지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군인이고, 대빙벽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집행관이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 한복판에서 괴롭힌다든지 싫어한다든지 하는 감정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런 감정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혹독한 곳이다. 그래서 그는 대체로 인간관계가 원만한 축에 속했다. 굳이 날선 감정으로 대할 만큼 인간 자체를 미워할 상황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래서 이런 충동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라며 동시에 당황스러움이 덮쳐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에게는… 어떻게 해서든 상처주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복수하고 싶었고 보복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싸늘해지는 만큼 어쩐지 그의 가슴은 분노로 불타오른다.

“죄송하지만, 저는 암왕제군과는.”

“종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네, 제 이름입니다.”

“…네, 네. 암왕제군. 저는 여기서 더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음 궁전을 더 둘러보고 싶다면 부디 여왕님께 다른 집행관을 지명하시길 바랍니다.”

“…네?”

종려는 진심으로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그는 곧 부채로 입술을 톡톡 치다가 살짝 펼친 후에 가볍게 부채질을 한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하염없이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충격 받은 듯한 표정에 묘한 희열이 느껴져서 분노가 조금 사그라졌다.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곧장 자리를 옮기는 대신 종려의 다음 반응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

종려는 다시 부채를 접고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타르탈리아를 응시한다.

“혹시 이유가 있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저희는 만난 지 얼마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 당황스럽군요. 혹시 제가 실례를 저질렀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스네즈나야의 문화에 대해 공부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타르탈리아는 그 배려가 깊은 행동에 그만 주먹을 올릴 뻔했다. 아주 유려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더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는 듯 구는 저 얼굴이 가증스러웠다. 토니아에게도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단 한 번이라도? 그 아이는 착해. 만약 저런 표정을 봤더라면 그 아이는 분명히 모든 것을 용서했을 텐데!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다 싫습니다.”

“….”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 그냥 싫다는데. 그러니 그만 꺼져.

타르탈리아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선을 돌렸다. 콜롬비나의 노래가 끝났으니 잠시 휴식이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음 춤 무대에 토니아가 오를 지도 모른다. 어떤 사내랑 춤을 추게 될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지켜봐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토니아의 남편이 암왕제군만 아니라면 상관없지, 막상 직접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여동생의 결혼에 삼남이 너무 간섭해도 그다지 좋은 광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종려를 두고 가려던 타르탈리아는 일순 자신을 붙드는 손길에 그대로 멈추었다.

종려는 아주 가벼운 손길로 타르탈리아를 잡았지만, 타르탈리아는 그 손길에 놀랐다. 그는 집행관이다. 누군가에게 잡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종려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치 깃털을 잡는 듯이 온유한 손짓이었다.

솟구치는 혐오감에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었다. 그러자 종려가 당황한 듯 손을 젓는다.

“건드리지 마!!!”

“죄송합니다. 놀라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납득이 잘 안 됐습니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마치 추행 당한 여인처럼 소리쳤다는 사실에 일순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불이 붙은 폭탄처럼 내내 뜨거워지기만 하던 심장이 기어코 터졌다. 씨근덕거리며 종려를 노려보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기어코 그는 정중하게 사과하는 종려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고 만다.

“납득? 제가 납득시켜드리길 원합니까? 맙소사. 똑똑한 척은 다 하시더니 의외로 멍청하시군요. 아시겠지만, 저희는 같은 성별이죠. 전 여성이 아니면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우리의 종족은 다릅니다. 네, 확실히 뿔과 꼬리는 거부감이 드는군요. 그리고 제군께서는 국가 원수이지 않습니까?”

타르탈리아는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저는 제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무식하고 멍청한 군인이죠.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제군께서 여태껏 하시는 말씀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우리 사이에 대화의 진척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군요.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

“당신은 아주 늙었어요.”

비열하고, 간사하고, 졸렬하구나! 그러나… 왜 이리도 희열이 느껴지는지? 그 어떤 싸움도 이런 옹졸한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 타르탈리아는 미쳐 날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허리를 접어가며 웃고 싶었다. 그를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리고 싶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는다.

타르탈리아는 멀거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종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몸을 돌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연회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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