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02

레토릭 by 박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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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스네즈나야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타르탈리아는 거울 너머의 자신을 본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타고 흐른다. 안광을 잃은 눈동자는 심연처럼 어둡고 파랗게 침잠되어있다.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던가…. 타르탈리아는 좀 더 허리를 밀착하며 거울 가까이 다가간다. 그는 곧 주먹을 들어 올려 있는 힘껏 거울을 후려친다. 쩌적, 쩌적. 소리 나며 금 가는 거울 속에, 타르탈리아의 모습 역시 산산이 조각 나 기괴한 형태가 된다. 마수와 괴물을 상대하는 그에게 있어 이런 거울을 박살내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궁전의 모든 곳이 여왕, 차리차의 손길이 닿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감히 이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여왕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녀가 하사한 권능조차 그의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한다. 치받치는 역겨움에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통을 움켜쥔다. 그는 헐떡이며 울렁거리는 속을 식히기 위해 위 안에 든 것을 모조리 뱉어낸다. 그래봤자 먹은 것도 없어서 새하얀 위액뿐이다. 그는 눈의 흰 자위가 보일 정도로 삐뚜름하게 허공을 노려보며 의무적으로 토하고, 겨우 진정했다.

쉼 없이 몰려오는 마수과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일주일 넘게 밤잠 설쳐가며 싸우던 대빙벽에서도… 그는 이렇게까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 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 전장이야말로 그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고 화살로 뚫으면, 모든 것이 끝나 있었으니까.

“….”

화장실 내부를 간단히 정돈한 후에 다시 세면대 앞에 선다. 묵묵하게 입안을 헹구고 식은땀을 흘린 이마와 뒷목을 닦는다.

타르탈리아는 하고 싶은 말을 참는 성격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는 군인이었고 상냥하고 다정하게 돌려 말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로서 누군가에게 일부러 상처 주는 일에 익숙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암왕제군’에게 그런 식으로 대한 것은… 생각보다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발심을 느낄 정도인가? 의문을 가진 순간, 종려의 얼굴이 떠오른다. 긴 뿔. 두꺼운 꼬리. 검은색 한푸와 검은 부채까지. 우람한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인지하고, 타르탈리아는 감당할 수 없는 혐오감에 몸서리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싫기 때문에 그만 토해버린 것도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 힘든 이유는 그저 ‘사람을 싫어하는 행위’ 자체가 낯설어서 그런 것이다. 그에게 미안하다든지, 그를 조금은 좋아해보겠다든지 하는 결심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감정을 갈무리한 타르탈리아는 다시 검은 장갑을 끼며 궁전의 복도로 나온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파란색 사파이어와 새하얀 크리스탈로 꾸며진 연회장이 그를 반긴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조금 쓰라린 가다듬는다. 그의 가문은 집행관의 가족으로서 오늘 연회에 초청되었다. 아마 초호화 방을 배정 받았겠지만, 그들이 평소에 지내던 저택보다는 작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벽난로에서 뜨거운 초코를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게 사이좋은 형태로 지냈지만, 얼음 여왕의 궁전에서의 경험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금세 나아졌다. 일단 엄마부터 찾아야지. 연회장을 둘러보며 제 가족을 찾으려던 타르탈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무대 위에서,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고 푸른 여제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권위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스네즈나야의 전사이자, 충실한 무기인 그가 어떻게 그녀의 부름을 외면할 수 있을까? 타르탈리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홀린 듯이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고아한 자세로 타르탈리아를 응시할 뿐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옆에 있던 ‘종려’를 찾았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귀공자. 연회는 잘 즐기고 있니?”

“여왕님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후후. 너에게는 오랜만에 따르는 술이구나.”

여왕이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들어 올리자 타르탈리아는 엄중한 자세로 크리스탈 잔을 내민다. 여왕은 그의 잔에 ‘불의 물’을 한가득 채워준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항상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어 고맙구나, 귀공자야. 너 같은 아이가 나의 권속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거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오로지 여왕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이 스네즈나야에선 누구라도 최선을 다 해. 아니면 죽으니까요. 그러니 내가 원하는 건 ‘최고’거든.”

“….”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분위기에 타르탈리아는 여왕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의 그녀는 파란 입술을 끌어당기며 속삭인다.

“조금 전 암왕제군께서 피곤하다며 휴식하러 가셨는데… 이상한 일이야. 난 지금까지 바위 신이 ‘피곤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거든. 어떻게 해야 암왕제군이 피곤함을 느끼고 불편한 표정을 지을 수가 있을까? 귀공자가 마지막에 그분을 모셨으니 어느 정도 짚이는 사안이 있지?”

“….”

“모르겠니? 아니면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거니?”

“….”

“난 암왕제군을 ‘최고’로 모시기 위해 귀품 있고 예의가 바른 너를 부른 건데…. 혹시 내가 모르는, 우려해야 할 만한 부분이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 ‘차리차’는 ‘암왕제군’이 스네즈나야에서 불편함 없이 지내기를 바란다. 아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을 느끼고 리월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귀공자…. 내가 너에게 조금 더 기대해도 될까?”

“그것이야말로 제가 기다리던 명령입니다, 위대하신 여왕님.”

여왕은 그제야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으며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인사를 올린 후에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그녀는 곧 타르탈리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른 쪽을 바라본다. 아마도 합창단을 준비한, 아를레키노의 무대를 보기 위해서다. 천사처럼 고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객석 아래로… 타르탈리아는 무표정으로 내려온다.

설마 그 얼굴로 여왕님께 미주알고주알 고자질했으려고? 하지만… ‘암왕제군’은 정말 말이 많았다. 어쩌면 자신과 헤어진 후에 여왕님께 자신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았을 수도 있다. 지금껏 누가 자신을 욕하든 말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지만, 그 대상이 바위 신이라고 상상하니 기분이 묘했다.

아니, 바보 같은 망상이다. 어차피 그들은 위대하고 상서로운 신들이니 한낱 인간인 ‘귀공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단지 궁금한 것은 정말로 ‘암왕제군’이 자신이 한 말에 충격 받고 연회를 즐길 수 없을 정도로 상처 받아서 이 자리를 떠났냐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고 싶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정말로 그가 상처 받고 떠났다고 하니 아까보다 더욱 불쾌한 기분이 솟구친다.

그정도도 버티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토니아는…!!!

타르탈리아는 일순 뒤집어질 것 같은 속에 미간을 좁히며 기둥 뒤로 돌아섰다. 더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정을 취하고 가족들을 찾을 심산이었다. 그 후에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도토레’다. 가면을 쓴 파란 머리의 사내는 즐거운 듯이 히죽거리며 뒷짐을 진 채다. 그를 무시하기 위해 왼쪽으로 갔으나 도토레가 잽싸게 따라와 막고, 또 오른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인 일이 벌어졌다. 두어 번 신경전 한 후에야 비로소 타르탈리아가 팔짱을 끼고 도토레를 노려본다.

“뭐야?”

“흐흐흣. 넌 좀… 바보잖아, 귀공자.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진 마. 대빙벽에 박혀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사실이잖아?”

이건 또 뭐야….

안 그래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타르탈리아는 도토레가 자신에게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다. 이 자가 이렇게 빈정거리는 것도 한두 번은 아니지만.

“넌 아마 여왕님께서 내리신 명령의 본질을 몰라. 그래서 나, 박사 도토레가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필요 없으니 비켜.”

“내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더 나을 텐데? 난 널 도와줄 수 있어. 네가 나를 조금 도와준다면 말이지.”

“하…. 비키라고. 세 번 말하게 하면 진심으로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암왕제군이 원하는 건… 별게 아냐. ‘몸’이지. 그는 너랑 자고 싶어 해. 자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겠지? 너랑 몸을 섞고 싶어 한다는 뜻이야. 리월은 반인반수가 대부분이라, 종족을 초월한 사랑에 익숙하지. 오히려 같은 성별 같은 건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

“….”

그의 말을 무시하려던 타르탈리아는 갑자기 밀려드는 말에 그대로 굳어서 도토레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팔짱을 낀 팔을 꽉 붙들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토레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비틀며 자신의 턱을 매만질 뿐, 타르탈리아의 반응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런데 흥미롭단 말이지…. 어떻게 종족이나 성별을 초월한 사이에 번식할 수 있는지 말이야. 교배 공식에 어긋나는 일인데… 역시 ‘리월’인가? 하하하. 스네즈나야에서도 힘내야하지 않겠어? 어쩌면 우리는 좀 늦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연구를 시작해야지.”

“…하고 싶은 말 다 했어? 간다.”

“혹시 ‘암왕제군’의 정액을 받게 되면, 내게 그 일부를….”

타르탈리아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귀를 후비는 시늉을 하며 그대로 도토레를 지나쳐갔다. 등 뒤에서 그가 남성 자위 도구니 후장에 넣는 기구니 상스러운 단어를 내뱉는 것도 들리긴 했지만, 끝까지 못 들은 척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궁전인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천장, 벽, 기둥 따위가 영롱하게 빛나서 마치 사파이어 같은 진귀한 보석 안에 갇힌 기분이 들 정도다. 여왕의 권능을 고려해볼 때 어쩌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곳이라고 해도 눈에 거슬린다든지 춥다든지 하는 불편함은 조금도 없었다. 외교 문제로 방문한 사절단에게 초호화 궁전을 구축하여 접대한 것은 스네즈나야라는 나라를 대변하는 일이기도 했으니, 모든 부분에서 완벽해야만 했다.

물론 그 준비성은 리월의 삼안오현 선인들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얼음 여왕은 응당 연회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귀족들에게 자비와 자애를 베풀었으니, 11번째 집행관인 타르탈리아의 가족이 머무는 방(저택이라고 부를 만한)은 과히 압도될 만큼 웅장한 곳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벽난로 앞에 모여 있었다. 아약스는 자신의 품에 앉은 테우세르를 끌어안은 채 재잘재잘 떠드는 토니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마치 여행이라고 온 것처럼 과자나 디저트를 먹으며 쉼 없이 떠들고 있었다.

몇 십분 전, 슬슬 자야지―하고 경고를 주던 어머니도 ‘그래. 너무 늦게까지 놀지는 마렴.’하는 말로 침실로 들어가셨으니, 정말로 자유였다.

“후. 나 정말 그렇게 여왕님과 집행관님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어. 콜롬비나 님!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그렇게 강하다며? 노래도 진짜 잘하시던데.”

“맞아. 나는 카피타노 님 보고 깜짝 놀랐어. 인간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큰 사람은 처음 봤거든. 근데 가면은 왜 쓰고 있는 거지?

“토니아. 오빠도 집행관인데….”

“맞다, 너희 풀치넬라 시장님한테는 인사했냐? 난 했어!”

“아니. 오늘 엄청 바빠 보이시던데.”

“그럼 우리 내일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얘들아. 나도 집행관인데….”

타르탈리아는 무시당하는 자신의 처지가 즐거워서 웃음을 가까스로 참는다. 스네즈나야에서 집행관이란 귀족 순위를 능가하는 서열 순위인데도 불구하고, 그 역시 집안에서는 그저 ‘아약스’라는 오빠나 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행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여동생 토니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벽난로에 데워진 듯 따뜻해진다.

이런 행복…. 타르탈리아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네즈나야을 지키고 싶었다. 가족이 주는 이 기쁨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그는 그 험난한 대빙벽을 수호하는 임무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전장을 향한 싸움의 갈망도 있었고, 여왕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도 충만했지만, 때때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까닭은 역시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평화와 안녕 덕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어느새 동화의 한 장면 같은 따스한 시간도 끝났다.

모두가 잠든 시간…. 벽난로 안의 따스한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계속 타오른다. 고요한 방안에서 타르탈리아는 홀로 동생들을 챙긴다. 먼저 테우세르를 안고 침대에 눕혀주고, 안톤의 머리 밑에 베개를 넣어준다.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무표정으로 잠든 토니아를 바라보다가 살짝 그녀를 안아들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그녀를 반듯하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다. 앞머리를 정돈해준 후에, 타르탈리아는 한참이나 토니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한 번 잃어봤기 때문일까.

철혈로 무장되어지는 마음은 조금도 깨어질 틈이 없다.

얼음 여왕의 명령은 떨어졌다. 즉, 자신의 의지는 섞일 틈이 없어졌다. 내일부터는 어쩔 수 없이 ‘종려’라는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어야 할 처지다. 어차피 우인단의 집행관이란 편식할 수 없어서 싫으나 좋으나 떨어진 명령이라면 무조건 실행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도토레가 말한 대로, 육체적 접대라고 해도. 여왕님의 뜻이 정말로 성 상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이 충실한 여왕님의 신하는 그녀의 뜻을 이행할 뿐이다. 타르탈리아는 만약 암왕제군이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제 몸을 상납할 의지도 충만했다. 그저 이 모든 일에 토니아가 엮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의 옆에서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바라보다가 스르륵 팔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곱슬거리는, 구름 같은 붉은 머리카락이 걸렸다. 그는 여동생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눈을 감는다.

사랑하는 내 동생, 토니아…. 토니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오빠!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타르탈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라서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분명히 누워서 잠자고 있던 토니아가 온데간데없었다. 심장이 철렁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그가 눕혀준 그대로 안톤과 테우세르는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혹시 나디아 누나의 방에 간 걸까? 아니면 형수님? 그마저도 아니면 엄마? 아무래도 셋 다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직감이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놀라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걸어 나가며, 아무렇게나 걸어둔 외투를 몸에 둘렀다.

복도에는 따스한 기운이 맴돌지만, 새벽의 스산함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다행히 얼음 궁전은 반쯤은 투명하여 등불이 없어도 분간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대빙벽에서 활동하느라 빛과 어둠을 분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타르탈리아에게 복도를 돌파하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타르탈리아는 불안한 감정에 두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바보 같은 놈!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토니아가 사라지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을 마구 자책하며 복도를 지나쳐 둥근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어찌나 가벼운 발걸음인지 그의 발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토니아?”

행여나 소란을 피울까봐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결국, 타르탈리아는 저택의 문을 열고 궁전 밖으로 나간다.

새하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후드를 쓰며 주변을 살핀다. 어찌나 고요하게 내리는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고 침착해지는,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같은 눈이라고 해도 대빙벽에 몰아치는 거센 눈보라와 비교하면 굉장히 얌전한 날씨다.

눈이 내려서 다행이었다. 토니아의 흔적으로 보이는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으므로. 타르탈리아는 길게 뻗은 화단을 따라 걸으며 이내 온실 안까지 들어왔다.

“토니아? 여기 있니?”

얼음으로 만든 꽃을 비롯하여 스네즈나야에서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다양한 꽃이 피어있다. 그러나 타르탈리아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그는 토니아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점점 더 맥박이 기분 나쁘게 요동 치고 있었다. 그는 거의 가슴에 통증을 느낄 정도여서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그는 곧 발견했다. 토니아가 고개 숙여 파란 꽃의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앞에….

암왕제군.

타르탈리아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는 망토를 걷어내며 속력을 내어 뛰었고, 종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고, 토니아의 미소가 그를 향한다. 그리고 주먹이 그대로 종려의 얼굴에 꽂힌다.

“꺄악!!!”

놀랍게도 종려는 살짝 휘청거렸을 뿐 넘어지지도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날렸는데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손등의 통증이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인함에 타르탈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미소 지었다. 종려는 조금 놀란 듯이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어루만진다. 검붉은 피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손가락에 닿는다. 타르탈리아는 그 사이에 주먹을 풀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수형검을 만들어 그를 베거나 찌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쥐어 패야지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요 며칠 이 남자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오, 오빠. 오빠!!! 오해야!!!”

“토니아! 이 늦은 시간에 결혼하지도 않은 숙녀가 남자랑 단 둘이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야? 어? 미쳤어?!”

“네. 오해입니다, 타르탈리아 씨. 손이 엄청 맵군요….”

“입 닥쳐. 난 절대 저 남자랑 너를 결혼시킬 수 없어. 그러니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버리겠어.”

“오, 오빠. 오빠!!!”

“제가 또 스네즈나야의 문화에 대해 무지했군요. 유감입니다. 하지만 제 결백과 토니아 양의 순수함에 대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 증명은 제 종족이 용이라는 것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데.”

종려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타르탈리아는 안광이 없는 눈으로 종려를 노려보며 다시 주먹을 날렸다. 토니아의 비명이 귀청을 찌르지만, 그는 그동안 억눌러왔던 잔혹한 폭력성을 꺼내들었다. 그의 이 감정은 오로지 대빙벽을 쳐들어오는 수많은 마수와 괴물에게나 보이던 것이었다. 그러나 타르탈리아에게 암왕제군은 자신의 나라, 자신의 가족, 자신의 감정을 위협하는 괴물 중에 괴물이었으므로 자비와 이해를 베풀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대체 뭘까?

암왕제군. 자신을 종려라고 소개한 남자는 덩치가 몹시 크고 두 뿔이 곧게 솟아나 있고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부피감이 대단했다. 즉 어찌 보면 둔해보였는데,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종려는 타르탈리아의 주먹을 막아내는 합을 세 번이나 선보인 후에 차분하게 타르탈리아의 팔을 꺾어 그를 뒤로 밀치기까지 했다. 다양한 욕구가 치밀어 오른 그는 손바닥 안에 수형검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종려의 목을 찌르자 그가 뒤로 고개를 젖히며 피한다.

“귀공자 님.”

“!”

“타르탈리아 씨. 부디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입 닥치라고 했어!”

종려는 미간을 좁힌다.

“…토니아 양 앞에서 계속 이러실 겁니까? 그녀가 무서워하고 있어요.”

속삭이듯 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종려와 타르탈리아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타르탈리아는 멈추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토니아가 주저앉아서 훌쩍거리고 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응시하던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수형검을 없애고 곧장 토니아에게 다가갔다. 외투를 벗은 후에 그녀의 몸을 둘러주고 토니아를 품안에 넣어 머리를 다독였다.

“왜 그래…. 오빠…. 무서워.”

“토니아,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 괜찮아. 응? 어디 봐. 얼굴 좀 봐.”

“오, 오빠…. 흐윽, 하지 마. 싸우지 마…. 응?”

“응. 미안해. 미안해.”

눈물이 아롱아롱 떨어지고 있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이런 얼굴을 하는 토니아에게 그는 너무나 약했다…. 타르탈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토니아를 으스러질 기세로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입을 맞추며 하염없이 그녀를 달랬다. 많이 놀랐는지 토니아에게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전해져왔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일단 돌아가서 토니아 양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꺼져.”

훌쩍이는 그녀를 어루만지며 타르탈리아는 종려를 노려보았다. 순간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대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일단 토니아의 안정이 우선이기도 했다. 곧 타르탈리아는 토니아를 안아들고 저택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군.”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아를레키노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타르탈리아의 뺨을 한 번 더 후려친다. 아프지는 않았다. 모든 집행관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모욕적이지도 않았다. 단지… 이성이 뒤늦게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아침 일찍부터 소집된 집행관들을 보아 하니 이미 어제 새벽의 일은 얼음 여왕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했다, 귀공자.”

다시 한 번 아를레키노가 손바닥을 들어 올려 타르탈리아의 뺨을 내려쳤다.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준 것은 풀치넬라다.

“그만하게, 아를레키노. 아직 어린애잖아.”

“그래. 어린이지. 타르탈리아가 ‘어린이’라서 사고치는 것을 몇 번이나 눈감아주고 넘어갔다는 것도 알아야할 거야. 그리고 네가 지나치게 이 새끼를 감싸주느라 버릇이 나빠졌다는 것도. 어제 네 행동으로 리월과 스네즈나야의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질 거지?”

“흐음. 맞습니다. 정말…. 이번 일은 곤란하군요.”

“후후후. 괜찮다니까, 판탈로네. 아를레키노. 너무 열 내지 마. 다 방법이 있다니까? 내가 이미 알려줬다네. 그렇지? 타르탈리아?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을 거야.”

도토레는 딱히 타르탈리아를 걱정하는 식도 아니면서 판탈로네를 안심시키고 아를레키노를 말려준다. 타르탈리아는 도토레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눈을 내리깐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지난밤 가족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느라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인인 숙녀가 외간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치명적인 해가 된다. 만약 과장된 소문이 스네즈나야에 퍼지면… 토니아와 결혼하려고 할 남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니아와 암왕제군을 결혼하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 상대에게 타르탈리아가 주먹질 해버렸다. 그렇다면 마지막 수단은 종려를 죽이고, 그 피로 여동생의 순결을 증명하면 되었지만, 정말 불행하게도 상대가 암왕제군이었다.

암왕제군. 무력으로 리월을 세우고 6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무패의 신화를 기록하는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얼음 신도 그에게 계약을 청하여 천리로부터 위협 받는 이 스네즈나야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상대를 자신이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타르탈리아가 패배하면, 평생 치욕스러워 하다가 서서히 멸문하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다.

….

하….

타르탈리아는 뜨거워진 눈두덩을 꾹꾹 누른다.

그 사이에 풀치넬라는 타르탈리아를 부축해주며 의자에 앉혀준다. 곧 그는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타르탈리아의 뺨을 살펴보며 밀착한다.

“타르탈리아. 암왕제군과 조우하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다고 해라. 정치란 그런 거야.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란다. 고개를 숙일 땐 숙여야해. 일단 사건을 마무리 지은 후에 그때….”

“….”

“…설마 토니아 때문이니. 응?”

만약 잘못했다고 빌어서, 용서 받으면… 결국, 토니아는 암왕제군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인가? 대체 난 지금까지 뭘 한 거야? 그것을 막기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 했건만….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운명이었던 걸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토니아의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고?

“타르탈리아? 여왕님께서 부르셔.”

시뇨라의 부름에 타르탈리아는 잇새를 꽉 깨물었다. 한숨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삐뚜름하게 걸린 가면을 고쳐 쓴다.

아직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이 궁전 안은 조용하다. 그래서 어쩐지 폭풍의 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또각또각, 경쾌한 구두 소리가 궁전 안에 울려퍼진다. 시뇨라는 두꺼운 코트를 걸친 채 앞서 나가다가 잠시 멈추어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그러게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너도 이번엔 좀 긴장해야 할 걸? 여왕님께서 엄. 청. 화가 나셨거든. 하지만 구원을 바라진 마. 그분은 이미 충분히 온유하고 자애로우며, 너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니까.”

“…시끄러워.”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고 생각해. 반대로 말하자면 네가 이 상황을 완벽하게 헤쳐 나가면 여왕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실 거라는 뜻이야. 일종의 기회지. 위기를 즐기는 건 네가 좋아하는 거 아닌가?”

“….”

“흥…. 그런 멍청한 표정, 너랑 정말 안 어울리네.”

시뇨라는 타르탈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색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는다. 타르탈리아는 잠시 그녀와 떨어져 멀뚱히 서 있다가 그녀에게 따라붙는다.

이윽고 복도의 끝에 도착하자 굳게 닫혀 있던 알현실의 문이 열린다. 거대한 보석 같은 문 너머로는 이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위대한 신, 얼음 여왕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갑게 타오르는 화염처럼… 무표정으로 타르탈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압감. 처음 그를 내려다보던 여왕님의 눈빛과 현재의 그 눈빛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문이 닫히고, 홀로 로비에 선 타르탈리아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린다.

“위대하신 여왕님.”

“고개를 들어요, 귀공자.”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고… 주변을 훑어본다. 상석에 앉은 이는 얼음 여왕, 그리고 바위의 황제도 함께였다. 면류관을 쓴 황제가 살짝 손으로 장식을 걷어내며 노란 눈으로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언뜻 보인 입술에 붉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다시 손을 내리고 무표정으로 타르탈리아를 응시할 뿐이다.

“지난밤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실망을 금할 길이 없구나. 귀공자, 타르탈리아. 넌 옛날부터 충동적으로 사고를 치는 경향이 있었지.”

신랄한 어조에 타르탈리아는 순간 낯이 뜨거워졌다. 얼음 여왕은 매우 온유하여 그를 크게 닦달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단지 그는 이 자리에 종려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아를레키노에게 맞았을 때나, 도토레가 빈정거렸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 종려를 보면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것만 같아서였다.

“감히 스네즈나야에 친히 방문해주신 리월의 바위 신을 공격하고 상처를 내다니. 너에게 엄중한 벌을 내릴 것이다. 귀공자. 너는 내가 내리는 명령을 거절할 수 없으며 의문을 가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벌인 행동으로 내려지는 처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 토니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누구도 자신의 여동생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이름만 아는, 타르탈리아의 여동생일 뿐이니까. 그녀의 결혼 문제를 포함한 앞날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11번째 집행관인 자신이 얼음 여왕에게 처벌을 받는 순간부터, 그 소문은 시작될 것이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면 토니아와 암왕제군에 관련된 일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암왕제군과 결혼시키면…. 아니야. 싸우자고 해야 할까? 결투 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뿐이다. 이 분위기에서 만약 그런 말을 꺼낸다면 얼음 여왕이 더 크게 화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타르탈리아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종려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토니아.

“온유한 차리차, 매서운 눈보라처럼 굴지 마시오.”

종려가 손을 뻗은 곳은 다름 아닌 작은 찻잔이었다. 그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입술에 대어 한 모금 마신 후에 손가락 위에 얹어두었다. 얼음 여왕의 시선이 바위 신에게 옮겨졌다.

“이 일에 대하여 사과해야할 사람은 바로 나야. 스네즈나야의 문화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미흡했어. 리월은 따뜻한 날씨 때문에 밤 문화가 성행하고, 연애에도 아주 자유로우니까. 딱히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네. 그래서 타르탈리아 씨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되네. 단지 여동생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렇지?”

“….”

“그가 나를 공격한 것 때문에 처벌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러니 그 명령을 거두시오. 그리고 타르탈리아 씨와 토니아 양의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이 사건을 크게 키우지 않는 편이 좋겠어. 응,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지. 나의 권속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고 소문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암왕제군? 혹 노여움이 남으셨다면 그 어떤 명령을 내리셔도 관계없습니다.”

“으음. 아니. 나는 화나지 않았네. 물론. 타르탈리아 씨가 바위 신에게 크게 한 방 먹여 피를 내었다는 훈장을 갖고 싶다면 또 모르겠지만.”

종려는 왼손으로 다시 면류관을 걷어낸다.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그 어조는 어쩐지 장난스러운 듯도 싶다. 타르탈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종려를 바라보았다.

“집행관 중 말석이라고 들었는데 기개가 대단하더군. 아마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지.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러다니. 스네즈나야의 무인은 두려움을 모르는구나. 과연, 그 권속을 보아하니 얼음 여왕은 얼마나 대단한 전사일지.”

“하하, 암왕제군.”

차리차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다.

“제군의 넓은 아량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귀공자, 타르탈리아. 너는 이분에게 빚을 졌다. 그리고 스네즈나야인은 빚은 반드시 갚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이만 물러가거라.”

“….”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린 후에 걸음을 옮겼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조용히 복도를 걷던 그의 걸음걸이가 점차 빨라진다. 어느새 그는 거의 달리는 식으로 뛰기 시작한다.

실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결국, 그는 처벌을 받지 않게 됐다. 리월의 암왕제군과의 계약은 계속 조율되어질 듯싶다. 그리고 토니아도. 강제로 결혼하거나 치욕스러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그가 결심했던 것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일이 걱정했던 것보다 더 쉽게 풀린 상황이어서 그런 것일까?

혼란스러운 타르탈리아는 어째서인지 진정할 수 없었다. 어느새 도착한 복도의 끝에, 궁전 문을 박차고 나간 그는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정원으로 뛰쳐나간다. 그는 폐를 가득 채울 정도로 깊게 호흡하며 목적지도 없이 뛰다가 이내 서서히 느려졌다. 헐떡거리며 호흡하던 그는 그대로 서서 허공을 바라본다. 그의 머리와 어깨 위로 조금씩 눈이 쌓인다.

타르탈리아는 심장이 담긴 가슴 위로 손을 올린다.

불쾌하다. 이 심장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불쾌하다고 여기고 있다.

아마도 이 감정은, 종려를 향한 고마움에서 비롯된 호감일 것이다. 그래…. 고마움.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심장을 검게 물들인 심연은 마치 그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그를 닦달하는 듯하다. 감히 어떻게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느냐고 맹렬하게 비난하는 듯하다. 면류관 너머로 보이던 노란 눈동자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두근, 두근, 두근. 아플 정도로 뛰는 맥박에 타르탈리아는 고통을 느낀다. 너무, 너무 불쾌하다. 차라리 심장을 쥐어뜯고 싶어!!!

“타르탈리아 씨, 여기 계셨군요.”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더욱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지금은… 딱히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계속 그래왔듯이 그를 두고 떠날 수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타르탈리아는 일부러 시선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가 지나오는 자리엔 여러 흔적이 남는다. 발자국이 깊게 패이고 긴 모포자락에 쓸리다가 이내 두꺼운 꼬리로 한 번 더 훑어낸다. 그러자 마치 긴 자루가 질질 끌린 것 같은 흔적만이 남는다.

타르탈리아는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하는 순간이지만,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 모든 상황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종려였으니까.

“좀 더 확실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토니아 양이요.”

숨을 깊게 내쉬자, 새하얀 김이 흩어졌다. 타르탈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험궂은 날씨에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타르탈리아 씨가 제일 듣고 싶은 부분이라고 여기실 것 같아서 찾아온 겁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왜 라고 물으신다면, 단순하게도 눈 내리는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리월에서는 눈을 보기 어렵습니다. 100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따뜻한 곳이니까요. 제가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 모습은… 제 짧은 견해를 더해보자면, 몽유병처럼 보였습니다. 스네즈나야의 문화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라나섰을 뿐입니다. 토니아 양은 어느 순간 깨어났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유리 백합을 보여주었습니다. 얼음 여왕께서 친히 나를 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을 온실에 두었기에. 그 다음엔 타르탈리아 씨가 온 것입니다. 그녀와 마주친 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

“흠. 좀 더 추가로 설명하자면, 용은 단 한 명만을 반려로 삼습니다. 용이라는 종족의 특성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 반려가 없으니 제 행동을 불미스럽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암왕제군입니다. 리월은 이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며 결혼을 통해 동맹 체재를 유지하려는 국가의 관습을 이해하고 수용합니다만, 그 대상이 ‘암왕제군’인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물론 황제로서 비를 들이라는 요청을 수없이 듣기는 합니다만. 황후든, 황비든, 혼례란 적법한 절차와 의례에 따라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리월의 전통과 문화를 그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사람이며,”

“알겠습니다.”

타르탈리아는 어쩐지 필사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종려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미 충분히 이해했다. 실제로 그가 말한 대로…. 토니아는 자신이 그곳까지 왜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눈을 떠보니 온실 속이었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종려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아 하니 토니아의 말은 진심이었나 보다.

이따가 토니아에게 사과해야겠어….

물론 이 모든 일을 암왕제군이 계획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을 위해 음흉한 목적을 품고 토니아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남녀 둘이 외부에서 발각되어 결혼한 귀족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정말 그의 목적이 토니아였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처음부터 얼음 여왕에게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해도 될 일이었다. 하다못해 조금 전 알현실에서 조금만 강경하게 나갔으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체 그가 왜? 애초에 종려는 스네즈나야의 얼음 여왕에게 초대 받은 귀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스네즈나야의 상황이 힘들어서 부유한 강대국인 리월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서 친히 그를 모시고 온 격이다.

즉, 쉽게 해석하자면, 그는 토니아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고, 우연이었을 뿐이다.

알면서도….

타르탈리아는 썩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종려가 여동생의 순결을 지켜주고 또 가문의 체면을 살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조아릴 때가 도래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쳐다보지도 않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종려의 말에 타르탈리아는 무심하게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그도 충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가 굳이 지적해주지 않아도 태도를 바꾸려고 했었다!

…아마도.

타르탈리아는 눈이 쌓이는 난간에서 눈을 떼어 겨우겨우 종려를 응시했다. 노란 눈동자는 여전히 타르탈리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으려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봐주시니까 좋긴 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종려는 무표정이었다.

“저도 하나 확인해볼 것이 있습니다.”

종려는 뒷짐을 진 채 타르탈리아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가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타르탈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들짐승처럼 빛날 듯 영롱한 호박색 눈동자를 휙휙 움직인다. 마치 확인하는 듯이 타르탈리아의 양쪽 눈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입술을 연다.

“당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여동생이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기이한 몽유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 무슨…. 토니아는 아프지 않아요. 누구보다도 건강합니다. 어젯밤은….”

타르탈리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토니아가 왜 그랬는지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궁금한 상황이었다.

“그렇죠. 아마 정말로 병을 앓고 있다면 가족들이 알아차렸을 거고, 당신의 부유한 재력으로 그녀를 치료하려고 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간단해.”

남자는 눈에 힘을 준 채 타르탈리아와 가까워진다. 그의 입술에 가라앉은 검붉은 딱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입술을 열 때마다 긴 송곳니가 보였고, 목에는 목깃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검은 비늘이 드문드문 보였다.

“혹시 리월과 스네즈나야의 동맹 유지와 계약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11번째 집행관의 여동생과 나와 강제로 혼인시키려고, 일부러 내 산책로에 보낸 게 아닌가 하는.”

“당신 미친 거야?”

“아니야?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 아닌가? 내가 어떻게 이 상황에서 타르탈리아 씨를 믿을 수 있지? 응? 자네의 여동생과 내가 결혼하면 손해 보는 것은 나뿐이 아닌가?”

“제정신이 아니군. 대체 왜 당신이 손해를. 지금 내 여동생을 무시하는 건가? 아직 어리긴 해도 내 여동생은 올해 최고의 귀족 영애로 뽑혔어. 당신 같은 사람에겐 과분해. 내 여동생은 절. 대. 당신하고 결혼 안 해.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서 결혼할 거라고 말했으면 나는 신성한 피의 결투를 신청했을 거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까?!”

타르탈리아는 눈을 부릅뜬 채 종려에게 맞대응했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모욕 받는 것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지만, 여동생이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토니아의 돌발 행동을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말 그녀가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될 것이었으면 오빠이자 집행관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략결혼이라니. 대체 토니아의 어디가 부족해서 계약으로 혼인을 한단 말인가? 물론 스네즈나야의 귀족들은 전부 그런 결혼을 한다지만!!! 최우선은 토니아의 의견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오빠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바람이다.

하지만 당신이 망쳤지.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동맹이니 손해니 하는 말을 운운하다니. 실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바로 종려가 아닌지?

역시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맞지 않나?

그 둘은 이제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일순 호흡이 거칠어지는 순간… 눈도 깜빡이지 않고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종려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그리고.

쪽.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주먹을 뻗어 종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아니, 칠 뻔했다. 종려는 예상했다는 듯이 타르탈리아의 손을 꽉 쥔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 **?!”

“아, 미안합니다. 너무 가까워서요. 근데 그건 스네즈나야 욕설인가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군요.”

지금 나한테 뽀뽀를 한 거야?

타르탈리아는 다른 손으로 주먹을 날리는 대신 거침없이 입술을 문질렀다.

“당신 진짜 뭐, 뭐하는?”

“좋아. 제대로 확인했습니다. 만약 정말 당신이 그런 의도로 여동생을 보낸 거라면, 무척 실망할 것 같았거든요.”

“무슨 ***야. ** **야.”

“우아한 귀공자로 알고 있었는데, 욕을 제법 잘하시네요. 대빙벽은 무척 험난하여 거칠고 포악한 사내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던데, 그 때문인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곳에서 총괄하려면 언행이 사나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하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대단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공자’라는 코드네임을 받을 정도로 고아하다는 뜻일 테니까요. 평소에도 얼마나 기품이 넘치시는지 낱낱이 느껴보고 싶어지는군요.”

“하!”

어안이 벙벙하여 황당하게 쳐다보는 타르탈리아와 달리 종려는 다소 활기찬 얼굴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뭘 만족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저는 타르탈리아 씨한테 맞았지만, 때린 기억은 없는데…. 그대는 누구에게 맞으신 겁니까?”

살벌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종려는 느리게 손을 뻗어 타르탈리아의 뺨 위에 톡 얹는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타르탈리아는 고개를 휙 돌릴 수조차 없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의 끝에… 종려의 입술에 붙은 피딱지가 보인다. 손등으로 부어오른 뺨을 만지는 종려의 손목을 툭 쳐내었다.

“…별거 아닙니다. 신경 끄세요.”

그러나 종려는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손가락 끝으로 타르탈리아의 턱을 들어올린다. 그러자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종려는 금방이라도 깊게 입 맞출 것처럼 다가온다. 타르탈리아는 아까처럼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신경을 끄라니.”

종려는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이 타르탈리아의 뺨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다시 손가락 끝으로 문지른다. 조금 전까지 아픈 것도 잊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고통이 사라진다. 마치 그에게 치유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난…. 그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눈이….

소낙눈이 내린다.

이런 눈은 위험하다. 예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쏟아지는 폭설인지라 까딱하면 파묻혀 그대로 갇혀버린다.

“나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어.”

천천히 호흡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담는다. 속눈썹에 걸린 작은 눈. 그 아래로 광물처럼 빛나는 눈이 조금 기분 좋은 듯 가늘어진다. 조금 전 타르탈리아의 저의를 파악하겠다는 듯이 이리저리 훑어보던 낌새는 사라졌다. 단지 그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타르탈리아의 파란 두 눈 자체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대체 무엇이 담겨있기에 이토록 검고 시린지 궁금하다는 듯이….

“스네즈나야는 반드시 빚을 갚는다고 했던가요. 제가 이 정도나 해주었으니 타르탈리아 씨도 절 위해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는 너랑 자고 싶어 해.

순간 도토레가 한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어차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사내로서 치욕스러울 일일 수도 있겠지만,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오히려 이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눈 딱 감고 몸을 대주면 엮일 일이 없지 않을까….

“하나 제외해주세요.”

“?”

“저를 싫어한다고 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를 이번 일에서 차감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손실을 메꿔야 이익이 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타르탈리아는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종려를 바라보았다.

“남자여서 싫고, 용인 것도 싫고, 황제인 것도 싫고, 늙어서 싫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

문득 타르탈리아는 그에게 심한 말을 뱉었던 것이 떠올라 낯이 뜨거워졌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도 맞고, 진심으로 그가 싫은 것도 맞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좀 더 예의 바르게 거절했어도 될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는 몽땅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건 단지… 제가 좀 욱해서 한 말일 뿐이고….”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

“내가 타르탈리아 씨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잖아?”

종려는 두어 걸음 물러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끔하게 나았군요, 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뒷짐을 진 채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긴다. 스륵스륵 기어가는 듯한 용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타르탈리아는 머리와 어깨에 눈이 소복하게 쌓일 정도로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득 어루만진 뺨에는 그 어떤 통증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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