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03

레토릭 by 박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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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 한심한 얼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타르탈리아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황급히 저택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새하얀 코트를 바짝 여민 채 마차로 향하던 타르탈리아는 소리가 난 쪽을 응시했다. 난간 위에 앉은 스카라무슈가 모자를 고쳐 쓴다. 그는 곧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튼다. 지금까지 스카라무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지만,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더욱더 큰 반발심을 느꼈다. 그 역시 우인단의 집행관이니 자신의 소식을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쨌든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야 뻔했다. 그 역시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기 위해서다. 집행관은 대부분 다 이런 식이다.

“일이 전부 해결됐다고 믿는 모양이야. 멍청하다니까, 정말.”

“뭐지? 나랑 싸우자는 건가?”

“건방 떨지 마. 난 그냥 진실을 말해주고 싶을 뿐이니까.”

스카라무슈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난간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착지한 후에 타르탈리아 앞에 섰다. 그는 곧 마치 희극에 나오는 광대처럼 어깨를 으쓱거리고 팔을 휘저으며 과장된 행동을 보인다.

“신은 절대 자애롭지 않아. ‘얼음 여왕’은 이번 사건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 넌 그녀에게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야 해. 동시에 ‘바위 군주’도 너에게 뭔가를 받아내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안심하지 말란 뜻이야. 뭐라도 대비하는 게 좋을 걸?”

“….”

“음? 난 세상 물정 모르는 네게 친절히 조언해줄 뿐이야. 혹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

별안간 도토레의 충고가 떠올랐기 때문에 타르탈리아는 곧바로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가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말이 어느정도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대답 없는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리던 스카라무슈는 느긋한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간다. 눈이 내려 새하얀 궁중 정원을 여유롭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본래 가려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미리 언질을 준 덕에 대기 중인 마부가 있었다. 타르탈리아를 발견한 마부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마차 문을 열고 좌석에 올라타며 ‘저택으로 간다.’하고 명령을 내렸다. 마부가 말을 닦달하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르탈리아는 거침없이 올라탄 기세와 달리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인단의 집행관이란 것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든다니까.

하지만, 스카라무슈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온유하신 얼음 여왕께서 집행관인 타르탈리아를 엄중히 처벌하기 위해 재판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사건은 일단락 되었지만, 타르탈리아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귀인인 종려가 묵인해주길 원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따랐을 뿐. 내부적으로는 그녀가 내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엉망진창으로 만든 꼴이다.

마음이 가라앉는 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타르탈리아는 그녀가 내린 임무에 최선을 다했었다. 대빙벽에서, 천리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괴물과 마수로부터 스네즈나야를 지키는 일. 누구나 기피하는 그 혹독한 임무를 군말 없이 수행해오며 또 얼마나 완벽한 성과를 보였던가. 그 커다란 국경선이 굳건할 수 있는 까닭엔 분명히 11번째 집행관이 있었다. 우인단은 인기 없는 군인이며, 권력의 정점으로서 의뭉스러운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얼음 여왕의 충실한 부하라는 자부심!

대체 난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과거라고 해야 할까? ‘원래’라면 타르탈리아는 슬슬 대빙벽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에게는 수호해야 할 국경선이 있었으니까.

타르탈리아는 누구보다도 스네즈나야를 사랑하고 얼음 신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는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집행관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마찰해야 한다든지. 가문, 결혼, 같은 귀족 문화에 등 떠밀려 이용당한다든지.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속임수와 계략, 음모가 판을 치는 정세 자체에 몸 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는 싸우고 싶었을 뿐이다. 새하얀 설원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는 것이야말로 그가 진정 추구하는 전사의 길이다.

그래. 돌아가자.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결심한 타르탈리아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 마차에서 내렸다. 집행관의 가족이자 위대한 가문으로서 얼음 여왕의 연회에 초청 받은 이들은 어째서인지 도망치듯 부랴부랴 저택으로 돌아온 후였다. 그들도 대충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약스와 토니아의 일로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로비부터 무거운 분위기가 전해져 온다. 타르탈리아는 두꺼운 가죽 장갑을 벗으며 저택 안을 둘러본다. 워낙 식구가 많아 어디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만연한 이곳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다니…. 타르탈리아는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져 착잡해졌다. 마치 토니아가 죽었을 때의 비통함을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이렇게 우울해할 것은 또 무엇이람.

타르탈리아가 붉은 가면을 벗어 아약스가 되는 순간, 나선형 계단 위에서 익숙한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

테우세르였다. 아약스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제게 뛰어오는 막냇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단숨에 들어올린 그는 테우세르의 뺨에 얼굴을 비빈다.

“형. 토니아 누나 결혼해? 응?”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그치만.”

두 팔을 목에 거는 어린 막냇동생을 다독이던 타르탈리아는 때마침 응접실에서 나오는 형 디오의 얼굴을 바라본다. 심각한 표정을 보아 하니 조금 전까지도 토니아의 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토니아 누나가 계속 울었어.”

“그래? 이따가 형이 보러 갈게. 일단 어른들하고 이야기 좀 나누고. 안톤? 테우세르 데리고 올라가 있어.”

“왜! 나도 들을래!”

“얼른.”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안톤은 조금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가도 테우세르를 건네는 타르탈리아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는다. 다만 어린 테우세르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 칭얼거릴 뿐이다. 그들이 나선형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디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응접실에 들어가고, 곧 그 문이 굳게 닫힌다.

“어떻게 됐니, 아약스. 응? 어떻게 됐어.”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아있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아약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두꺼운 흰색 코트를 벗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팔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잘 해결됐어요, 엄마. 걱정 마.”

“여왕님께서 뭐라고 하시니. 응? 자세히 좀 이야기해봐.”

“….”

그가 겪은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실로 간단했다. 암왕제군께서 스스로 무지하다 자처하며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셨음이라. 여왕님께서는 진노하지 않으셨고 집행관 타르탈리아에게 내려질 처벌도 없었다. 토니아에게 벌어진 일은 순수성이 증명되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비밀로 묻어두기로 하였으니. 그야말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막내딸이자 여동생인 토니아를 믿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암왕제군이 보여준 선의에 관해선 과히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바위 신은 얼음 여왕과 비슷한 격의 존재이므로 당연한 반응이다.

“자비로운 분이로군!”

“다행이야. 정말로!”

가문에 우환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쁜 듯 서로 부둥켜안는 가족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분위기에 온전히 스며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타르탈리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가족에게 자신이 처한 곤란한 상황에 대해 말해봤자… 그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어차피 이 일은 ‘타르탈리아’의 일이지 ‘아약스’의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순백의 거짓말로 가족들을 안심시킬 뿐이다.

최대한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그가 갑자기 뜨끔한 것은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 암왕제군을 우리 저택으로 초대하자.”

“네?”

“우린 그분께 빚을 졌다. 빚은 반드시 갚는 것이 진정한 스네즈나야인이지. 물론 그분께서 여왕님의 궁전에 머무는 것만큼 만족하진 못하시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니.”

“하아? 진심이에요?”

“좋은 생각입니다, 어머니. 정말 훌륭하신 우리의 어머니! 가문에 리월의 바위 신을 모실 수 있다는 것만큼 경사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아마 우리 저택에 그분이 들렸다는 걸 알면 우리 가문은 더욱더 가치가 상승할 거야!”

“그러네. 그분께서는 재물의 신이자 화로의 신이라 하셨어. 아마 우리 집안에 평화와 안녕을 가져다 주실 거야. 우리의 아이들이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랄 수 있도록 축복해주실 게 분명해.”

“그렇지. 그래. 소문을 아예 원천 차단해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분과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혹시 비밀이 새어나가더라도 쉽게 거짓말로 꾸밀 수 있단다. 치밀하게 준비해두자고. 가문을 위해서야.”

“맞습니다. 정말 현명하시네요! 세상엔 위기를 즐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잠깐. 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지?

당황한 아약스를 두고 대식구가 한 마디씩 말문을 열자 마치 저잣거리에 온 것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자신이 그 인간과 토니아를 떨어뜨려놓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타르탈리아는 입만 벙긋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암왕제군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암왕제군은, 그러니까 ‘종려’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존재이기는 했다. 오랜 전쟁으로 정세가 참혹하기 그지없는 스네즈나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타국의 집정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급진적 친왕파 세력인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환영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대외적인 이해관계일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타르탈리아와 종려는 여동생 때문에 주먹질을 한 사이였다.

토니아의 순결이 강제로 박탈 당할 뻔한 사건인데! 그 남자에게 험한 꼴을 당했으면 어쩌려고! 아니, 강제로 결혼하게 되어 시체로 돌아와야 정신을 차리겠어?!

그러나 ‘이제’는 없는 일이다. 타르탈리아는 더는 정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종려는… 그가 본 종려는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관심 있는 사람은.

불현듯 자신을 들여다보는 종려가 떠오른다. 동시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능청스럽게 뽀뽀한 후에, 관심 있다고 말한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그 호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결혼하고도 남을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건 자신이었다. 내가 여자였다면, 말이지. 희롱 당한 여인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아니다. 근본적으로 역겨움과 불쾌함에 가까운 감정이다! 어떻게 남자인 자신에게 그딴 짓거리를! 아무리 종려가 삼안오현 선인으로 종족과 성별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은 아니었다!

타르탈리아가 마치 정지화면처럼 꽤 오랜 시간 팔짱을 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소란을 떨던 가족들도 서서히 조용해졌다.

“…미안하다, 아약스. 우리가 눈치도 없이.”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굳이 알 필요 없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여! 무지 또한 특권이리라!

타르탈리아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이야기는 좀 더 생각해봐요. 전… 토니아에게 가봐야겠어요. 테우세르랑 안톤도 궁금해할 거예요.”

“아아. 그렇지. 그래. 얼른 올라가보렴.”

응접실에서 나온 타르탈리아는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저택의 복도를 둘러본다. 이미 이곳은 충분히 평화롭다. 더는 깨어질 구석이 없다. 종려와 엮이지 않는다면, 계속 이렇게 따스하겠지.

초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그리고 나는, 대빙벽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는 또 한번 결심하며 나선형 계단 위로, 빙글빙글 몸을 맡긴다.


그곳에는 천사가 있었다.

토니아는 새하얀 이불 속에 누워 있다가 기척을 느끼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파란 눈망울 주변으로 붉게 달아오른 살갗에 훌쩍이는 콧소리까지. 분명히 애잔하고 안타까운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어린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성숙한 여인이 되어가는 동생임을 알지만…. 아약스는 두 팔을 벌리고 자신에게 뛰어오는 토니아를 안아준다. 그에게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원피스는 설원처럼 하얘서, 말 그대로 천사 같았다. 빨간 머리의 천사.

“오빠…!”

“토니아. 괜찮아?”

“응응. 나는 괜찮아….”

“토니아. 얼굴이 붕어가 다 됐네.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호수에 얼음낚시를 하러 갔잖아. 그때 네가 처음 낚았던 물고기랑 닮았어.”

“하지 마….”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토니아를 다독이며 침대에 가까이 다가온 아약스는 다시 토니아를 침대에 내려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항상 조잘거리며 시끄럽게 떠들던 토니아가 조용하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녀는 테우세르처럼 어리지 않다. 아약스가, 타르탈리아가 이 스네즈나야에서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11번째 집행관이 누릴 수 있는 권세란 그만큼 책임져야 할 의무와 소임의 무게도 무겁다는 뜻임을 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죄책감과 미안함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막연한 미래에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렸을 테고. 물론 타르탈리아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절대로.

나의 동생, 토니아. 너는 그런 감정을 알 필요가 없어. 너는 그냥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매일 행복과 기쁨을 누리면 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네 동심은 평생 지켜질 거야.

“오빠가 사과하고 싶어. 너무 화내서… 놀랐지. 화내서 미안해.”

토니아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큰 눈망울이 금세 촉촉해진다. 아약스는 커다란 손으로 토니아의 뺨을 천천히 문지르며 속삭인다.

“나도 정말 놀랐거든. 갑자기 네가 사라져서. 어떻게 된 건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냐. 나도 정말 기억이 안 나….”

“…그래. 어차피 잘 해결됐으니 괜찮아. 너는 억지로 결혼하는 일 없을 거고, 오빠도 결투를 벌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우리 가문이 처벌받는 일도 없을 거고.”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여왕님께서.”

그리고 암왕제군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셨다. 그러자 토니아는 납득했다. 자세한 정황을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타르탈리아는 울컥한 듯 입술을 비죽이며 또 울음을 터트리려는 동생을 말없이 다독여줄 뿐이다.

“우리가 그분에게 빚을 졌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파란 눈의 소녀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온실 속 화초 같이 자랐으면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누가 스네즈나야인 아니랄까 봐. 타르탈리아는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트려 어깨를 들썩였다.

“아하하. 그렇지. 그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 빚을 네가 갚을 필요는 없어.”

“어째서?”

“오빠가 갚을 거니까.”

어차피 타르탈리아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고, 그 일을 토니아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를 테면 암왕제군의 접대 같은 것. 이 저택에 그를 초청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고, 더 나아가 얼음 여왕님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다시 대빙벽으로 갈 것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토니아.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

“내가 할 일?”

“그래. 넌. 너와 가문을 위해 좋은 남편을 만나야지. 디오 형은 귀족 사이의 평판과 소문에 대해 잘 알잖아. 그러니 형의 충고를 새겨듣고 어쭙잖은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말라고. 물론 누나처럼, 사랑을 추구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면 그 남자 인성이 좋아야 하겠지. 우리 형부를 봐. 정말 우리 가족과 가문에게는 끔찍하게 잘해주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설마 나 같은 오빠가 있는데, 네가 남자를 보는 눈이 엉망이진 않을 거야, 그렇지? 흠. 그렇지만… 리월 사람은 별로인 것 같아. 응. 오빠의 개인적인 의견이야. 휴~ 마음이 안 놓이긴 하네.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물색해주고 싶은데.”

“오빠는… 대빙벽에 돌아갈 거야?”

“알잖아, 토니아. 나는….”

귀공자 타르탈리아는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전장에 있어야 하는 천성의 소유자다. 그는 전장에서 비로소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언제 갈 건데?”

“조만간. 일이 정리되면. 편지 보내줄 거지? 그곳에서 내 유일한 즐거움이 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약속이야, 토니아. 꼭… 나한테 계속, 계속, 편지 보내줘야 해.”

“응. 당연하지.”

그녀가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모든 행복을 자신에게 전해주기를 약속했으니, 자신도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 혹한의 전쟁터에서 그는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손가락을 걸어, 서로에게 약속하는 감정에 젖었을 때였다.

갑자기 꼬르르르륵! 하는 엄청 큰 소리가 나서 아약스의 몸이 화들짝 튀어 올랐다.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는 아약스와 달리 토니아는 허둥지둥 자신의 배를 문지른다.

“토, 토니아? 이 천둥소리는 뭐야?”

“으악! 어제 저택에 돌아온 뒤로 입맛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뭐어? 하아? 미련하게 왜 그랬어. 가자, 일단 쿠키 좀 만들어달라고 하자.”

“갑자기 엄청 배고파!!!”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토니아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긴 머리를 찰랑거리고 원피스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저, 저 말괄량이 같으니. 실내화도 신지 않고! 타르탈리아는 마치 공주님을 호위하는 기사처럼 실내화를 들고 부랴부랴 그녀를 뒤따라 나선다.

“토니아! 실내화!”

“어우, 몰라몰라. 배고파!”

토니아가 쿵쿵쿵 소리 내며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방에 틀어박혀 있던 안톤이 벌컥 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러나 얼굴엔 장난기 가득한 환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야, 고릴라! 살살 좀 다녀라!!! 집 무너져!”

“뭐? 고릴라?! 죽고 싶어?!”

“토니아 누나!!! 어디 가?!”

“배고파!”

울음을 멈추고 다시 평소처럼 밝아진 토니아를 따라 뛰어 내려가는 그들을 내려다보던 타르탈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가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입고 마차에 몰래 올라탄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설령 그때 자신이 저택에 있었다고 해도, 결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내려오는 아약스를 기다리는 것은 다름 아닌 디오였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잘 이야기했다는 신호를 보내자 디오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아는 기분이 풀린 모양이네.”

“응. 토니아가 빚을 지게 할 수는 없지.”

“너는 괜찮은 거야?”

“당연하지. 난 ‘귀공자 타르탈리아’니까. 오히려 시원하게 바위 신을 상대로 한 방 먹였으니 훈장 하나 딴 셈이야.”

“흠…. 아쉽네. ‘암왕제군’하고 알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형. 아직도 그 이야기야? 아까는 가족들 앞이라서 말 못했지만, 난 절대 반대야. 암왕제군을 왜 우리 저택에 초대해? 우린 얼음 여왕의 ‘체스 기물’이야. 하지만 암왕제군은 ‘체스의 주인’이지. 그들과 엮인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그저 이용당할 뿐이야. 단지 그것이 우리의 얼음 여왕님이라면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암왕제군이라면 치욕스러운 일이 되는 거지.”

“근데 너 정색하면 무서운 거 알지?”

“내가 언제 정색했다고 그래?”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굴던 아약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그럼….”

“그럼이고 저럼이고. 싫다니까요.”

“너 맞선 보자.”

“?”

이야기가 또 왜 이렇게 되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린 아약스에게 디오가 훌쩍 다가왔다.

“괜찮은 귀족 영애들 많아. 이번 연회에서 수많은 가주들 상대해보니 예우와 범절이 뛰어난 여식들 많더라고. 요즘엔 플루트라든가 바이올린, 피아노 같은 악기 정도는 다들 하나씩 할 줄 알더라. 아마 요리, 자수 같은 것도 다들 잘하겠지. 너 정말 그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그러다가 사교철도 지나고 적정기도 다 지나서 아무도 너를 찾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네가 아무리 젊고 잘생겼다고 해도 그 인기가 평생 갈 거라고 생각해?”

“오…. 지금 무슨 말이야? 나는. 난 결혼할 생각이 없어.”

“결혼 안 할 거라는 말은 하지 마라, 아약스. 난 우리 가족 모두 잘 결혼시켜서, 잘 먹고 잘 사는 걸 봐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가주거든.”

“형? 난 집행관이거든. 나는 군인이야. 무식하고 투박하다고. 누가 이런 나한테 시집오려고 하겠어?”

“넌 정말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무식하고 투박하다니. 뭐, 됐어. 그러니까, 네가 집행관이라는 것을 어필하지 말고, 젊고 잘생긴 것을 어필할 수 있을 때 사교철에 연회에 참석도 하고 소개도 받고 맞선 자리도 마련하라 이 말이야.”

“와, 진짜.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네. 디오 형. 나는 진심으로.”

아약스는 거의 벽까지 몰아붙이는 디오를 차마 밀어내진 못하고, 양손으로 디오를 막아낼 뿐이다. 이미 실내화는 떨어뜨린 지 오래다. 너무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 잊고 있었다.

그랬다. 가문을 강성하고 부유하게 만드는 것에 상당히 열정적인 디오메데스가 자신에게 꾸준히 ‘정략결혼이라도 해라’라며 편지를 보냈고, 여유가 나 저택으로 돌아올 때마다 항상 맞선 자리를 주선해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순서로 따지면 형과 누나는 전부 결혼하였으니, 이제 삼남인 자신의 순서가 맞긴 하다. 안톤은 아직 어리고, 토니아는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 테우세르는 말할 것도 없다. 장남이자 가주인 디오의 압박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아약스는 자신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디오의 기세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난….”

“약속 잡는다?”

“형…. 나는. 내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토니아가….”

“토니아? 토니아는 올해 최고의 귀족 영애가 됐어. 그녀에게 청혼하는 남자는 줄을 섰고, 그들을 솎아내기만 하면 돼. 하지만 너는 달라. 네가 부족하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의 아약스. 단지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고,”

“그냥 뽀뽀를 하지 그래?”

어느새 나타난 토니아가 우물우물 쿠키를 씹으며 또 우유를 마시며 디오와 아약스를 쳐다본다. 잔뜩 심각해져 미간을 좁힌 아약스와 달리 디오는 아약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쪽 소리 내어 키스해준다. 아약스는 이마를 문지르며 불안하게 토니아를 바라본다.

“토니아. 나의 천사. 마침 잘 왔다. 내 이야기 좀 들어보렴.”

“제발, 안 돼. 형. 알았으니까.”

“네 오빠도 결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오빠가 뽑은 리스트 확인 좀 해주겠니?”

갑자기 멈춘 토니아가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지른 것은 정확히 5초 후의 일이었다.

“세상에!!! 아약스 오빠의 결혼!!! 누구랑? 누구? 어디? 초상화 있어?!”

“아니, 확정된 게 아니라. 토니아.”

“그렇지. 역시 내 천사야. 가자. 내가 설명해줄 테니 네가 검토해주렴. 네 언니는 아이를 보느라 너무 바쁘잖냐. 어머니는 현명하시지만, 젊은 사람의 의견도 들어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지.”

“당연하지!!! 꺄!!! 재밌겠다!!! 새언니!!! 생기면 좋겠다!!!”

“나는, 결혼할 마음이…….”

또다시 쾅쾅 소리 내며 서재로 뛰어가는 토니아를 바라보며, 디오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토니아를 따라갈 뿐이었다. 망연자실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이마를 팍팍 소리 내어 쳤다.

바보 같은 아약스! 하루라도 빨리 대빙벽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타르탈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실내화를 줍고 부랴부랴 그들을 따라가며 외쳤다.

“휴~! 토니아! 실내화는 신어야지!”


“평소에 정말 궁금했어요. 대빙벽은 정말 혹독하죠? 한 번 가보고 싶네요~.”

쉽지 않네…….

타르탈리아는 모자를 고쳐 쓰며 자신의 옆에 환상에 잠긴 여성을 바라본다. 예쁘고, 똑똑하지만… 그녀의 순수함은 어쩐지 타르탈리아를 불편하게 했다. 대빙벽은 수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 기껏해야 잘 꾸며진 별장으로 놀러가는 것 말곤 떠나본 적이 없는 귀족 영애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준한 곳이다. 하지만 그녀를 질책할 수는 없다. 이 여성도 결국 그녀의 집에선 토니아 같은 존재일 테니까. 온실 속 화초처럼 추위 한 번 겪어보지 않고 사랑받으며 자란 막내 딸.

이 거대한 빙설의 공원을 보라. 수도를 가로지르는 공원은 수메르의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까지 초빙하여 만든 곳이다. 뻥 뚫려있는 듯한 하늘은 자연 그대로를 느끼게 하지만, 실제로는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으로 막혀있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스케이팅을 한다든지 낮은 언덕에서 눈썰매를 탄다든지 혹은 말을 타고 격구를 한다든지, 아름답게 꾸며진 호숫가를 따라 산책하는 귀족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쨌거나 귀족의 산물이었다. 스네즈나야에서 작위를 받지 못한 이는 발을 들일 수조차 없이 폐쇄적인 친목 장소가 이렇게나 크고, 넓고, 길다. 그래서 지나가는 이마다 지인이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타르탈리아가 그랬다. 그는 맞은편에서 오는 이마다 입을 틀어막고 휘둥그레 눈을 뜨거나 후다닥 앞으로 다가와 인사하거나 안절부절 주변을 배회하며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는 사람들로 신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우인단의 최연소 집행관이자, 스네즈나야에서는 알아주는 미인이었으니까.

“타르탈리아 님?”

“아, 네. 음. 그곳은 생각보다 혹독하니까요. 좀…. 힘들 수도 있을 텐데요.”

“으응. 제가 위험에 처해도 타르탈리아 님이 구해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잠깐 입술을 달싹이던 타르탈리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눈을 감았다. 물론… 구해줄 거긴 한데…. 아, 모르겠다. 사람 살려. 타르탈리아는 진심으로 생명력이 깎이는 것을 느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따라오던 타르탈리아의 가족, 특히 디오와 토니아가 아약스의 시선을 눈치 채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잘한다, 잘한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특함에 두통이 더 심해졌다.

하…. 그냥 내일 대빙벽으로 가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서 눈앞에 서 있는 두 명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의 암왕제군과 얼음 여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탓이다.

“여, 여왕님.”

“호오?”

여왕은 신기하다는 듯이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여인을 훑어본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린다.

“위대하신 여왕님. 산책 나오신 건가요?”

반짝이는 크리스탈이 박힌 드레스를 입고 서있는 여왕은 냉기가 흐르는 듯한 하얗고 시린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온유한 느낌이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일부러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암왕제군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던 탓이다.

타르탈리아는 빙설의 공원을 산책하는 일은 귀족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건재함을 드러내기 위해 산책해야 한다. 철마다 바뀌는 정세를 따라가기 위해, 유익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산책해야 한다. 그마저도 아니면, 여인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것으로, 11번째 집행관이 아내로 삼을 만한 여인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홍보하여, 관심 있으면 너도 서신을 보내 약속을 잡으라는 은근한 과시를 위해서라도, 산책해야만 했다.

다 쓸데없는 보여주기 식 산물이다. 알면서도 맞장구를 쳐준 이유는 가족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다. 무의미한 만남을 몇 번 반복하다보면 다들 자신을 무식하고 투박한 군인이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서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란 희망사항은 덤이었다.

그 과정에서 암왕제군은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정말 조금도. 그래서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심장이 불온하게 두근두근 거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인형처럼 눈을 깜빡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왕님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암왕제군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왕님!!!”

후다닥 뛰어온 것은 가주이자 큰형인 디오였다. 그 뒤에는 토니아를 포함한 식구들이 보였다. 아마도 암왕제군에 대한 호기심과 호의를 참을 수 없었을 테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타르탈리아는 모자를 고쳐 쓰며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도 디오의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형. 우리 형이 또 방정맞은 행동을 하겠구나…. 안 보고도 뻔한 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암왕제군. 저는 11번째 집행관, 타르탈리아의 형인 디오메데스라고 합니다.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선의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해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만.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너무나 영광입니다.”

“음. 그렇군요. 타르탈리아 씨의 큰 형님 되십니까? 그렇다면 가주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몸이 약하신 관계로 일찍 작위를 물려주시고 지금은 요양 중이십니다. 본래 영지에서 지내시는데 최근 여왕님의 연회로 일부러 스네즈나야의 수도까지 오셨지요.”

저 물 막히듯 흐르는 대화를 보라. 누가 공작 가문 가주 아니랄까봐. 타르탈리아는 행여나 디오가 처리하기 곤란한 말을 내뱉을까 봐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여왕님. 이 젊은 두 청년은 선약이 있었으니 이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약스. 너무 숙녀 분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라. 그리고, 토니아. 이쪽으로 와. 암왕제군께 제대로 인사 드려야지.”

타르탈리아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는 디오를 바라보았다. 토니아는 뒤에서 머쓱하게 서 있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귀족 영애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에스코트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제가 먼저 암왕제군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예?”

“미안합니다, 안나 양. 제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다음을 기약해도 괜찮을까요?”

“에.”

타르탈리아는 안나라는 여성이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턱짓으로 손을 가리켰다. 안나는 무척 치욕스러운 듯 주변을 살펴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타르탈리아가 고개 숙여 손등에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추자, 안나는 곧바로 몸을 휙 돌리더니 드레스까지 잡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강제로 약속을 파한 꼴이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불러 세우기 전에 서둘러 종려의 팔을 잡아당겼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내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일행과 거리가 멀어진 후에야 비로소 타르탈리아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진땀이 나는 듯도 하다. 멀거니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하는 이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끌고 와놓고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으시네요.”

“….”

타르탈리아는 손등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타르탈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좀… 걷죠.”

“좋습니다.”

종려는 뒷짐을 진 채 빙설 공원의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걷는다. 뿔이라든가 꼬리도 무척 눈에 띄는 모습이었지만, 역시 허리까지 오는 흑색의 긴 머리카락이 가장 눈에 띄었다. 하나로 단정하게 묶긴 하였으나 흑색이라는 것만으로도 스네즈나야에서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 세상에 동떨어진 이처럼 우두커니 서서 눈 내리는 호수를 바라본다. 인공적으로 만든 눈이라지만, 실제의 눈과 같은 것이기에 아름다움은 한결 같다.

“아름다운 공원이네요. 그런데 보아하니 이곳은 상류층 사람만 올 수 있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그럼 하류층 사람들은 어디서 산책하나요? 다른 공원이 있습니까?”

“….”

갑작스러운 질문에 타르탈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음. 인권. 인륜. 인세. 이런 이야기는 여제하고 해야겠지. 난 그저 하층민들은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이 나라의 노동 계층이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이 암왕제군이라는 직책 때문인지 접근하기가 쉽지 않네요.”

“….”

“네. 저는 스네즈나야에 놀러온 것도 맞으니까. 하하하. 꾸밈없고 솔직한 사람이 은밀하게 구경시켜주었으면 하는데…. 타르탈리아 씨. 혹시 잘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 그렇지. 아까 형님께서 아주 말씀을 잘하시던데. 디오메데스 경?”

“저희 형은 바쁩니다.”

“그럼. 토니아 양은 어떨까요.”

반발심이 솟구치자 눈앞이 깜빡깜빡 점멸했다. 그는 종려에게 토니아를 소개시켜줄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팔짱을 낀 가슴과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종려는 무표정으로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아직도 토니아 양의 일로 화가 나 계신 겁니까? 제가 다른 뜻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할까 봐요?”

“알고 계시는군요. 제 동생하고 말 섞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흠. 그럼 나도 화를 좀 내볼까. 아까 그 여인은 누구였지? 안나 양?”

그가 살짝 다가오자 타르탈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그들은 작은 다리 위에 서 있었고, 그가 닿은 곳은 작은 다리의 난간이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난간으로 서서히 그를 몰아세운 종려는 노란 눈으로 타르탈리아를 노려본다.

“오가는 길에 무척 떠드는 사람이 많더군요. 11번째 집행관인 타르탈리아님이 드디어 귀족 영애와 함께 산책하고 계신다…. 무슨 뜻인가 했더니. 참, 재밌더군요. 여자는 다른 남자와 단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순결을 운운하면서, 피의 결투를 벌일 정도로 순결성에 집착하면서, 남자는 내키는 대로 만나도 되는 겁니까? 그것이 이 스네즈나야 상류층의 규칙입니까? 나와 입 맞춘 주제에 다른 여인과 만나다니. 나를 모욕하는 건가?”

“무, 무슨. 그게 무슨.”

“아니면 그 정도는 입맞춤도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 다시 해볼까요. 당신의 순결성은 누가 입증해줄지 궁금한데. 참고로 이번에 난 입증해주지 않을 거야. 타르탈리아 씨.”

“잠,”

어느새 종려의 두 팔 사이에 갇힌 타르탈리아는 몸을 비틀었다. 작은 다리 위였지만, 그래도 너무나 눈에 띄었다. 그가 허리를 뒤로 젖히자 도리어 종려가 몸을 밀착해왔다. 바지 앞섶과 허벅지에 종려의 몸이 닿자 타르탈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저 멀리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 무리를 발견하고 종려를 붙들었다.

“내 앞에서 다른 여인하고 말 섞지 마세요. 내가 질투도 소유욕도 강한 편이라서.”

종려가 톡톡 타르탈리아의 머리에 붙은 눈을 털어주었다. 그는 가볍게 입김을 불어주더니 살짝 떨어져 나갔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다름 아닌 디오였다. 그는 아무래도 타르탈리아와 암왕제군이 다시 싸운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가온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눈치를 살핀다. 그 멀리엔 토니아를 포함한 가족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아약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작 종려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팔을 내민다.

“디오메데스 경. 조금 전 타르탈리아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게 친히 스네즈나야 이곳저곳을 구경 시켜주신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당분간’ 아우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의미인지, 디오는 단숨에 파악했다. 그는 곧 감격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오! 당연히. 물론입니다. 암왕제군. 아약스의 약속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겠네요.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아약스, 친히 모셔라. 아니지. 아니야. 암왕제군. 괜찮으시다면 부디 저희 저택에서 머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타르탈리아는 눈을 부릅뜨고 디오를 노려보았다. 아약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더 원망스럽게도 종려는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정말입니까? 대단히 친절한 분이로군. 과연. 타르탈리아 씨가 왜 귀공자라는 코드를 받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타르탈리아 씨가 아주 예의가 바르시고 범절이 뛰어나시던데, 훌륭한 형님 아래에서 배웠기 때문이군요.”

“예? 아하하하!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약스가 정말 특출 난 아이였으니까요. 제가 가르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재능이 있었던 겁니다. 어릴 때부터요!”

“그런가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산책하시겠습니까? 아약스의 어릴 때 이야기를 해드리죠! 자, 이쪽으로!”

**…. 타르탈리아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고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퍽 내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오와 종려는 큰소리로 웃으며 멀어져갈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암왕제군!”

진짜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타르탈리아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월. 무려 4,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대륙 최고의 강대국의, 심지어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위상과 통치력을 자랑하는 황제가 보잘 것 없는 스네즈나야의 공작 가문에 방문한다니. 뭐, 우연이 겹치고 겹치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황당한 것은 종려는 마치 이웃사촌 집에 놀러온 것처럼 편안해보였다는 것이다. 무려 얼음 여제가 대여해주었을 으리으리한 마차에서 내린 주제에 그는 화려하지 않은 현대식 정장을 입고 있어서 언뜻 보면 남작 정도 되는 직위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는 보란 듯이 내놓고 다녔던 긴 뿔, 두꺼운 꼬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디오는 매우 벅찬 듯이 저택을 손짓하며 활기차게 말한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디오메데스 경. 초대해주어 감사합니다.”

“아아, 그것은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일단 날이 추우니 들어가시지요. 먼저….”

타르탈리아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날아오는 손바닥에 억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감히 11번째 집행관의 등짝을 거침없이 후려친 상대는 누나 나디아였다.

“아, 뭐야아!”

“뭐하는 거야, 아약스?”

“뭐가.”

“태도가 그게 뭐냐고. 너 뭐 돼? 똑바로 안 해?”

“어우, 누나! 손이 왜 이렇게 매워?”

그래봤자 고작 리월의 황제인데 뭘 저렇게 신나셨는지. 별로 대단한 놈도 아니야.

입술을 비죽이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멀거니 서서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드리워진 검은 천막이 보인다. 아직도 그는 토니아가 죽음이 생생했다. 그것은 사라지거나 없어지게 된 일이 아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일 뿐이다. 물론 다행히도, 나디아 누나는 결혼했고, 아이도 있다. 하지만 토니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종려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이 모두 종려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이 불편했다.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아등바등 애를 써도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답답하고, 무엇보다도.

타르탈리아는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고기를 씹다가 힐끗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대화 상대를 잘 만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주인 디오는 스네즈나야의 수도에서 귀족 문화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종려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막힘없이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가문의 일원 모두가 고등 교육을 받았고,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에 대해 잘 알았다. 솔직히 타르탈리아가 생각하기에 역시 본인은 무식하고 투박하다. 14살 때부터 군인이 되어 대빙벽을 수호했으니, 뭐…. 멍청하다고 해도 부정은 못한다. 실제로 세상 물정 모르는 면이 없잖아 있기는 하다….

“‘콜롬비나’님의 음악을 들어보셨습니까? 정말 노래를 잘 부르시는 분이죠. 저희 가문에서도 음악적 재능을 지닌 아이가 있는데요. 그렇지, 토니아?”

“오. 영애께서는 어떤 악기를 다루십니까?”

“저… 바이올린이요.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보신 적 있어요?”

“네. 오케스트라 연주는 몇 번 관람한 적 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따가 연주를 들어봐도 될까요? 바이올린도 가까이서 보고 싶네요.”

“네! 제군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요!”

아, 제발. 토니아, 토니아, 토니아!!!

타르탈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와인 잔을 냅다 들이켰다. 목구멍에서 꿀꺽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목을 축였다가 이내 쏠린 시선에 아 하고 멋쩍음을 숨기지 못했다.

“타르탈리아 씨는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있습니까?”

“아, 저는.”

“아약스는 정말 그야말로 무대 체질이죠. 재능이 정말 많아서, 배우를 하면 인기가 정말 많았을 텐데!”

“그렇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췄으니까. 연기도 잘했을 거야.”

“몸으로 하는 건 전부 재능이 있었으니까 아마 악기도 잘 다뤘을 텐데. 최근엔 우인단 집행관으로서 연설 정도만 하지?”

“호오. 남매끼리 합주 같은 건 안 하나요?”

“…다 옛날이야기에요. 지금 전 군인이라서 다룰 줄 아는 악기는 없습니다.”

“오빠! 그래도 예전에 피아노를 연주했었잖아. 까먹었으려나? 괜찮다면 반주라도 해줘, 응?”

“토니아. 오빠는 정말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 나보다는 나디아 누나가 훨씬 연주를 잘 할 것 같은데….”

“음. 저는 타르탈리아 씨가 하는 연주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그래, 아약스! 오랜만에 피아노 쳐보는 건 어떻겠니? 나도 네가 연주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고 싶구나.”

반짝이는 토니아의 눈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 되긴 했지만, 솔직히 자신감이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단지 암왕제군을 위해 연주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의 어릴 적 꿈이 현모양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가정적인 여인이 되는 것이 토니아가 진정 바라는 것이라면 그녀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전력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 실제로 그가 좋은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사사건건 개입해서 토니아가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굳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 그래, 결혼하면 좋지. 결혼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직도 폐쇄적인 스네즈나야는 결혼을 높은 가치로 여기고, 기혼 여성을 우대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사회적 흐름을 따라야 할까? 하필 토니아가?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권세를 누린다는 11번째 집행관, 타르탈리아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타르탈리아는 가문 전체를 부양하고도 남을 부와 권력을 지닌 사내다. 그러니 그의 여동생이 조금 늦게 결혼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감히 누가 토니아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조금 더 세상을 둘러본 후에 결혼해도 늦지 않잖아?

토니아는 스네즈나야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 예술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당연하게도 일반 학교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학비를 모두 충당해주었다. 아마 그녀가 학교 내에서 가장 실력이 없었어도 졸업할 수 있게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토니아는 그의 작은형처럼 예술적으로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까, 큰형이나 누나처럼 굳이 결혼하여 가문에 이바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저 먼 대륙으로 나가 이것저것 경험하다 보면 또 다른 것을 배우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그러면 수메르의 아카데미아 혹은 폰타인의 연구기관에 들어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타르탈리아는 토니아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네가 정말 결혼하고 싶다면, 나는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달라진 점이 있다면.

토니아는 한껏 호의적인 표정으로 종려를 보고 있다. 타르탈리아는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마음에 가시가 돋힌 듯하여 참을 수 없다. 그는 이미 자신의 여동생이 사랑에 빠질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다.

식사가 끝난 후 후식 시간을 갖기 위해 모두 응접실로 모였다. 차와 케이크가 마련됨과 동시에, 작은 연주 무대가 자연스럽게 준비되었다. 아약스는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고 토니아는 바이올린을 든 채다. 그리고 다들 편하게 앉거나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르탈리아는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이올린 줄을 매만지던 토니아가 고개를 비틀며 타르탈리아를 내려다본다.

“오빠, 설마 악보 보는 법 까먹은 건 아니지?”

“까먹은 건 아니야.”

“그럼 실수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토니아가 너무 엄격하게 점수 매기지 않아야 할 텐데…. 악보를 고정하며 힐끗 시선을 돌리자 종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뜨거운 찻잔을 든 채 타르탈리아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저 남자의 시선이, 토니아에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불행으로 여겨야 할까.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한 토니아가 자세를 잡는다. 바이올린에 기대어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몹시 아름답다. 파란 눈동자는 기분 좋게 휘어진 채 아약스에게 반주를 시작하라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약스는 천천히 건반을 두드린다.

손가락 끝으로 거친 파동이 전해져 온다.

오빠. 나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어.

귓가에 울리는 토니아의 목소리에 일순 심장이 지끈거렸다.

종려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누가 봐도 그 남자는, 매력적이니까. 얼굴도 잘생겼고 덩치도 무척 좋다. 문화와 예절에 대한 이해심도 깊어서 매너도 좋고 배려심도 좋다.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게 된다.

그래, 당신을 좋아하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해!

그것이 설령 나라도…!!!

갑자기 심장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타르탈리아는 이 고통이 환상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식은땀을 흘리고 호흡을 참아가며 가까스로 반주를 끝마쳤다. 가족들이 모두 박수를 쳐준다. 아약스는 반주자였지만, 그래도 지금 이 분위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쳐주며 훌륭한 연주자인 토니아를 응원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토니아의 얼굴을 눈에 담았을 때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토니아는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발꿈치를 들어 올린 채 종려를 바라본다.

“암왕제군, 제 연주 어떠셨어요?!”

사랑만 받고 자라 당연히 사랑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토니아의 목소리에 눈앞이 까매진다.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훌륭하십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은데. 타르탈리아는 홀린 듯이 토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어.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또다시, 과거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그때의 얼굴이 겹쳐진다. 반짝이는 파란 눈에 가득 찬 생기. 그것에 전염된 듯이 타르탈리아는 활짝 웃었다.

네가 행복하다면 나는 좋아, 토니아. 네가 기쁘다면…. 네가 즐겁다면… 사랑하는 내 동생, 토니아.

그렇게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주었다.

그랬었는데.

지금 타르탈리아는 감히 웃을 수 없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말았다. 사랑에 빠지는 여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타르탈리아는 산산이 조각났다. 유리처럼 깨어진 그는 토니아와 종려를 비추며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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