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8

당신의 소리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이 눈이 당신을 인식했을 때.

입가가 풀어지는 건, 이 눈이 당신과 마주쳤을 때.

그런 입에서 들뜬 소리가 나오는 건, 당신에게 처음 오늘의 인사를 할 때.

 

 

벌써 며칠이고 느비예트와 만나지 못했다. 멜모니아 궁에 찾아가도 그는 항상 부재중이었고, 앞으로 며칠 더 바쁠 예정이라는 안내를 들었다. 이렇게 연락할 방도도 없이 만남이 끊길 때마다, 프레미네는 자신의 무력함과 처지의 차이라는 것을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평소처럼 좋지 않은 날씨에 추가타를 더하듯 비까지 내려, 프레미네는 울적한 기분으로 「바다」를 향했다.

행인 대부분이 우산을 쓰고 있었다. 프레미네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젖을 것인데, 우산이 무슨 소용인가.

걷는 도중에도 생각은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말하건대, 프레미네는 제가 자만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안에서 나는 특별하다고, 그렇게 그가 말해준 것이 기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대 했다. 그러면 필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을 통해 알면서도.

느비예트가 프레미네를 피하고 있다, 그런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사람이고, 제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 틀림없었다. 프레미네는 그 사실에 더더욱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만다.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서. 보고 싶을 때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감정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지 알고 싶지 않아서.

「바다」의 깊은 곳, 언제나 풍경이 새로운 곳이다. 흐름대로 따라가면 어딘가에는 난파선이 있고, 어딘가에는 유적이 있고, 어딘가에는 숨겨진 지하동굴이 있다. 프레미네는 특징 있는 지역의 위치를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멀리 규모 있고 높다란 건물이 바닥에 박혀있다. 메로피드 요새다. 유감스럽게도 임무를 겸한 복역에는 좋지 못한 기억만이 있다. 그 시절,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의 순수 폰타인 국민이란, 물의 정령이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존재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홍수를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고. 「바다」를 가만히 표류하며 생각한다. 누가 지어낸 소문일까. 예언을 희망적으로 해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폰타인의 멸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믿었다. 프레미네는 어느 쪽이냐면, 차라리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곁보다 물과 함께 있는 게 편안했던 것은, 어쩌면.

가라앉지도 않고, 떠오르지도 않고, 그런 상태를 유지하며 둥실둥실 표류한다. 통통 물범이 시야 끝에서 노래했고, 어느새 해달 한 마리가 따라붙었다. 지금은 너와 놀아 줄 여유가 없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무구한 얼굴을 보면 차마 밀어낼 수도 없었다. 해달은 너무 거리를 좁혀 다가오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곁에 있겠다는 듯 옆에서 같이 「바다」를 떠돌았다.

올려다본 머나먼 수면은 「바다」가 어두운 이유를 증명이라도 하듯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프레미네는 문득 느비예트와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그것이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떠한 연유인지, 「바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최고심판관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더랬다. 지금은 어떠한가.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래도 느비예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의 곁은, 그의 곁이나 다름없었다.

비가 오는 날은 물의 용이 울고 있기 때문이야.

오래전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동요. 오늘도, 물의 용은 울고 있는 걸까. 하지만 물의 용에게 울지 말라고 격려할 힘은 없었다. 그 생각에서마저 느비예트를 떠올리고 만다.

물의 용은 울지 않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단정 지어 말했다. 하지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낱 마물조차도 눈물을 흘리는 걸 프레미네는 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물의 용이 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유가 무엇이건, 슬프지 않아도 눈물은 난다. 그리고 눈물은 주인을 무척이나 피곤하게 만들었다. 역시나, 누군가는 달래주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물의 용아, 물의 용아, 울지 마.

보그르르, 입에서는 목소리 대신 물거품이 나올 뿐이었다. 인간은 물속에서는 말로 의사전달을 할 수 없었다. 그 고요는 분명 편안했을 텐데. 지금은 답답했다. 수면으로 올라간다. 해달도, 통통 물범도 따라오지 않았다.

수면에 가까워질수록 물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여전히 비가 내린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게.

“……울지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프레미네는 제 뺨에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걸 느꼈다. 이런 것, 이제는 금세 숨길 수 있었다. 비까지 내린다면 더더욱. 어리석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시간이 멋대로 흘러 프레미네의 몸을 성인으로 만든다 한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불안.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나 숨을 쉬듯 따라오는 불안.

빗물과 눈물이 섞여서 시야가 흐릿하다. 그런 가운데에 보인 것은 빛, 분명 빛이었다. 그 발광체를 프레미네는 알고 있었다. 분명, 느비예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러한 빛을 보았다. 따뜻한 흰색. 그것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이것은 기대를 늘리는 일종의 저주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찾아와 준다고, 믿을 수밖에 없어지니까.

“저택에 가도 행방을 모른다고 하기에, 한참 헤매었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

프레미네는 멍한 눈으로 눈앞의 빛이 천천히 꺼지는 걸 보았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건 프레미네의 체온이다. 하늘은 개지 않았지만, 비는 그쳐 버렸다.

“……미안해요, 저……. ……느비예트 님 옷, 다 젖어버렸네요.”

형편없고 어리석고 불안정하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차마 그 은백의 눈과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지금 제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으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뭍으로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수온이 차갑습니다.”

프레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고집스럽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시선은 마주칠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비 탓에 온도 차가 심하니까요.”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없이 상냥해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몸을 끌어안겨, 잠수해버리면 도망갈 곳도 없었다. 프레미네는 포기하고 느비예트의 품에 꼭 달라붙었다. 차라리 말할 수 없는 「바다」밑이 나았다. 한참이나 밑으로 내려와서야, 느비예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두침침한 물 아래에서 마주친 시선은, 선명하지 않은 시야에서도 프레미네를 다정히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느비예트가 프레미네를 데려다 앉힌 곳은 바다 이슬 꽃이 많이 피는, 프레미네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어째서 이곳을 골랐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야기할 수단은 없었다. 여전히 눈물은 소리 없이 방울져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수면 아래인 이곳에서 그럴 필요는 없는데, 느비예트는 상냥하게 프레미네의 눈가를 쓸었다. 그것은 더욱 서러움을 촉발시켰다.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느비예트의 품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러면 한 손으로는 허리를 안고, 한 손으로는 프레미네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왔다.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많이 바빴나요? 저는 사실 외로웠어요.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인간은 물 아래에서는 아무 말도 전할 수 없어서.

오래전, 어머니와 읽었던 인어공주라는 동화가 떠올랐다. 차라리 거품이 되어버린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느비예트는 그런 생각조차도 이 물의 흐름에서 읽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할 정도로 서툴게 다정하니까. 도망가고 싶은데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프레미네를 꼭 잡고 있으니까. 그 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서, 프레미네는 눈물이 그치고도 한참을 그와 있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천천히,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느비예트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어깨를 톡톡 두드리면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다시 수면을 향해 올라간다. 공기가 통하는 곳으로 가면 많이, 많이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입술이 달싹거렸다. 불안한 기색을 품고 그의 얼굴을 보면 새하얀 달빛 같은 눈은 가볍게 웃었다. 프레미네는 조금, 아주 조금 책임 전가를 하고 싶어졌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응석받이로 만드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그 이상은 생각으로도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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