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6
심장 소리, 물이 비쳐오는 창가에서
최고심판관이 직접 법정에 서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날에는 에피클레스 오페라 하우스도 만석을 넘어서서 최고심판관의 끄트머리라도 보고 싶어 흘깃흘깃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니까. 그런 인파 속, 프레미네는 오페라 하우스의 구석 자리에 앉아 폰타인 최고심판관의 공정한 심판 과정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제 일을 제대로 해내는 어른은 멋지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느비예트는 멋있는 사람이니까,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오빠, 어떻게 생각해?”
부프 데테 저택의 어느 방. 테이블 앞에 앉아 케이크 반 조각과 함께 홍차를 마시던 리넷이 툭 던진 한마디에 리니는 잠시 침묵했다.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알지만 굳이 끄집어내야 할까. 솔직히 리니도 심경이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한마디로 정리해서 입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는데 우리가 입을 대서 뭐 하겠어. 개인적으로는 뭐…….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프레미네, 본 적 있어?”
“확실히. 응, 나는 프레미네가 행복하면 됐어. 그 애의 빈 자리를 누군가 채워주면 좋겠다고 계속 바라고 있었기도 하고.”
“그러면 됐잖아. 덕분인지 요즘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요즘 들어 프레미네는 마술 무대의 조역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본인의 본업인 잠수부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있다. 그 노력의 동기에 그 남자가 없다고는 이 자리의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정함과 동시에 마음에 안 든다는 심정이 공존해서.
“그래도 왜 하필 최고심판관일까. 좀 덜 바쁜 사람 많은데.”
“프레미네가 원하는 걸 우리가 뭐라고 판단하겠어, 리넷.”
“하지만 그 사람은 프레미네가 힘들 때 다 제치고 당장 와줄 수 없는걸. ……참견이 지나치다는 건 알고 있어.”
소리 없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홍차는, 오늘따라 조금 떫은 맛이 난다. 생각에 빠져 너무 우렸는지도 모르겠다.
“동감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과자 몇 개 더 집어먹지 마.”
“들켰어?”
“진작에.”
“그 애는 우리가 걱정할까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오히려 걱정이야. 역부족인 걸까.”
테이블에 남은 의자에 걸터앉으며 리니가 리넷의 과자를 뺏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생각을 너무 깊게 하는 거야. 세상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어.”
“응, 하지만.”
리넷은 테이블 옆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창틀 너머로, 오늘의 일정을 끝낸 프레미네가 멜모니아 궁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최고심판관에게 질투 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아, 그건 이해해. 마음에 안 들지.”
“갑자기 나타나서 곱게 키운 프레미네를 채가고 말이야.”
“그러게.”
많이 식어버린 홍차를 다시 한입, 그러고는 더 마실 수 없겠다는 듯 찻잔을 아예 내려놓고 리넷이 구시렁거렸다.
“울리면 가만 안 둘 거야.”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리넷이 다른 소중한 사람이 생겼을 때, 프레미네도 똑같은 생각을 할 거야.”
“……응.”
그리고 그건, 오빠에게도 마찬가지겠지. 굳이 말하지 않은 말을 마치 다 안다는 듯 어른스럽게 웃는 리니의 뺨을, 리넷은 손을 뻗어 쭉 잡아당겼다.
*
“어서 오세요, 프레미네 님! 오늘도 반갑습니다. 느비예트 님께서는 먼저 일을 끝내고 휴식하고 계세요. 편안히 있다가 가시도록 시간을 수배해 두었으니, 느긋하게 있다가 가세요.”
어느새 얼굴이 익숙해진 세드나의 환대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언제나 크게 들리는 건 왜일까. 어느샌가 저택만큼이나 이 집무실 안이 익숙해지고 말았다. 세드나의 말과는 달리 남은 일이 있었는지,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느비예트의 시선이 희미한 발소리를 따라 프레미네에게 닿았다.
“느비예트 님, 저 왔어요.”
“어서 오십시오. 앉아서 맞이하게 된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잠시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네.”
책상 앞의 소파, 그중 왼쪽에 놓인 곳에 앉는다. 그곳은 이미 프레미네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다. 쿠션을 끌어안고 반쯤 누워있으면 하얀 종이에 만년필이 긁히는 소리가 여러 번 났다. 그리고 잠시 침묵. 흘깃 보니 새파란 달을 담은 눈은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문득 며칠 전 오페라 하우스에서 본 최고심판관이 떠올랐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같은 사람이다. 조금, 동경하게 될 정도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요. 일은 정리가 끝났습니다.”
책상에서 벗어나 프레미네의 곁에 앉으며 느비예트가 말했다. 그러면서 프레미네를 슬쩍 일으켜 품 안에 꼭 집어넣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프레미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많이 피곤하신가요? 제가 방해하는 거라면, 혼자 시간을 보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아닙니다. 그냥……. 프레미네 군을 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그렇다고 등 뒤에서 목덜미를 있는 대로 맡는 것은 어떠한가 싶다.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는 저택에서 쓰는 그리 비싸지 않은 비누와, 세제 냄새뿐일 텐데. 프레미네는 제 체취가 이상하진 않을지 꽤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조금 간지럽지만. 등줄기를 타고 이상한 소름이 올라온다.
“며칠 만나지 못한 탓에, 조금 지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문제였는데 말이지요.”
정확히 느비예트의 말대로, 그의 업무 사정 때문에 요 며칠간 얼굴조차 서로 마주 보지 못했다. 그래서 프레미네는 최고심판관의 재판을 볼 생각을 한 것이다. 일방적으로라도 좋으니 보고 싶었으니까. 그를 보러 간 이야기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부끄럽고, 철없는 짓을 한 것 같아서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 재판을 보러 와준 건 기뻤어요.”
그랬는데, 역시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심판관의 자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런 구석까지 보일 줄은. 프레미네는 자책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만 벌이는 걸까.
“……죄송해요, 일하시는 데 신경 쓰게 한 것 같아서.”
“아닙니다. 정말로 기뻤으니까요.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덕분입니다. 시간을 내서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
조금 더 세월을 알차게 보냈다면, 지금 느비예트의 말에 성숙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레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리를 감싼 느비예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메로피드 요새의 관리자를 만났습니다만, 놀림당하고 말았습니다.”
“공작님이요?”
“예. 어떻게 알았는지, 메로피드 요새에서 진짜 복역해야 할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저기이, 정말 농담인가요, 그거?”
“확실히,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진담이 섞인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그러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무의미합니다만. 조금 생각한 바가 없지 않기도 합니다.”
등 뒤에서 목덜미에 뺨을 비비적거리는 느낌이 났다. 느비예트의 피부는 부드러워서, 간질간질했다. 맨손에 닿고 싶어서 그의 장갑을 벗겨 손을 잡으면, 마치 만들어 빚기라도 한 듯 형태가 완벽한 손이 프레미네의 손가락을 맞이했다.
“인간의 관점이라는 건 어렵습니다. 저에게는 프레미네 군도, 메로피데 요새를 관리하는 그도 크게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만.”
“……먼저 떠나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을지도요.”
“예, 저는 남는 자가 됩니다. 프레미네 군은 저를 두고 가겠지요.”
그는 프레미네를 놓고 떠나지 않는다. 잔인한 사실에 안심하고 만다니, 스스로의 이기심에 프레미네는 조금 우울해졌다. 그런 프레미네의 배를 토닥이며 느비예트는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어려운 이야기도, 슬픈 이야기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100여 년, 프레미네 군과 함께 한 일들로 제 일상은 지난 천년에서 더욱 바뀌겠지요. 그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떠나간 자들도, 남기고 가는 게 있답니다.”
“……느비예트 님의 얼굴, 보고 싶어요.”
느비예트는 프레미네의 몸을 돌려 마주 보았다. 프레미네는 평온한 표정을 한 느비예트의 하얀 뺨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 사람의 무릎 위는, 편하다. 곁에 있으면 물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 때문일까.
“만날 수 없을 때도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기억할게요. 그러니까, 느비예트님도……. 잊지 말아 주세요.”
몇백 년이 지나도, 몇천 년이 지나도. 잊지 말아 주세요. 차마 말하지 못한 잔인한 말은 그의 마음에 닿았을까. 프레미네는 느비예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솔직히 몇십 년 뒤는커녕 몇 년 뒤도 모르겠다. 어렵다.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느비예트가 지켜주겠다고 한 이상, 프레미네는 분명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어른이 되는지는,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오늘 리니와 리넷이랑 새 마술을 구상했어요. 몇 달 뒤면 제가 조수로 일하는 첫 공연이에요. 저기, 시간이 나신다면 보러 와주시지 않을래요?”
“벌써 그렇게 될 만큼 시간이 지났습니까. 반드시 가겠습니다. 반가운 제안에 감사를 표합니다.”
하얀 손에 손을 잡혀, 입술이 닿았다. 간지럽다. 그리고 어느새 가스등에 가스가 들어와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오늘은 돌아가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고. 미안해요. 이런 말 해서.”
여전히 제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아이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크나큰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쩌면, 하고 느비예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거절당하는 게 너무나도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느비예트가 그의 말을 무엇 하나 거절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그렇다면 오늘은 멜모니아 궁에 있는 제 방에서 함께 있도록 할까요. 저택에는 연락을 넣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명령인가요?”
“부탁입니다.”
“…….”
프레미네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비예트의 방은 집무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단지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을 뿐, 서적과 서류가 가득한 건 같았기 때문이다. 목욕을 끝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느비예트의 방에 안내받은 프레미네는 눈을 깜빡였다.
“침대가 엄청나게 크네요.”
“덕분에 프레미네 군을 초대하는 게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좁으면 미안하니까요.”
“느비예트 님의 미안하다, 는 가끔 이상해요.”
“그렇습니까?”
“……싫은 건 아니에요. 제가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매일 아침 베드메이킹을 받는 침대는 오늘도 푹신푹신할 것이 틀림없었다. 가스등의 가스를 전부 소등될 때까지 줄이고, 협탁에 놓은 촛대 하나에 시야를 의지했다. 느비예트의 눈에는 대개의 것이 그대로 보이지만, 프레미네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느비예트 님.”
“예.”
“……조금만, 더 가까우면……, 안 돼요?”
“제대로 말할 줄 알게 되었군요. 잘했어요.”
“……헤헤.”
답답하지는 않을까 싶어 거리를 두어 누웠는데, 괜한 배려였던 모양이다. 품 안에 꼭 프레미네를 끌어안자 소년은 안심한 듯 웃었다. 낯선 공간이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겠지. 아직도 그를 다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그것은 느비예트에게 있어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끔 꿈이 아닐까 생각해요. 느비예트 님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로 너무 상냥하니까.”
“이게 꿈이라면 저는 상당히 풀죽을 겁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어둠 속, 작은 목소리는 정적을 깬 탓에 또렷하게 들렸다.
“예, 말씀하십시오.”
“굿나잇 키스, 해주면 안 돼요?”
“그런 건 부탁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자란 금색 앞머리를 쓸어올려, 입을 맞췄다. 그러면 프레미네는 만족한 듯, 느비예트에게만 보이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느비예트 님에게도, 해도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제 얼굴에 낙서한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조금……. 응, 잠시 실례할게요.”
프레미네는 손끝으로 느비예트의 얼굴을 더듬어 이마가 어디 있는지 조심스레 찾아냈다. 짧은 입맞춤.
“이건, 좋은 꿈을 꾸라는 마법이래요. 엄마가……, 말했었어요.”
“그렇군요. 이렇게 기쁜 걸 보니, 분명 잘 듣는 마법일 겁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조금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대로 잠들기 싫다, 는. 그 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느비예트는 프레미네를 끌어안은 팔로, 작은 등을 위아래로 쓸기를 반복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기를 바라듯이. 효과가 있었는지 프레미네의 숨이 천천히 느려졌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프레미네 군.”
“……일어나도,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모르겠다. 느비예트는 여기에 있다고 하는데도. 이해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곁에 계속 있음을 알려줄 수밖에. 작은 몸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느비예트도 금세 잠의 유혹에 빠져버렸다. 내일 일어나면 프레미네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걸까. 그건 조금, 아니, 많이 기다려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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