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11

비, 그대를 데리고

우산은 투명한 게 좋다. 비가 흐르는 걸 볼 수 있으니까. 투명 우산을 돌돌 돌리면서 프레미네는 오늘의 잠수 스팟을 찾아 인적이 드문 길을 걸었다. 우라니아 호수 주변, 독특한 형태의 은방울꽃이 시선을 끈다. 우라니아 호수는 담수로 이루어졌음에도 「바다」라고 불리는 일반적인 폰타인의 수중환경과 달리, 호수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물이 고여있기 때문이다. 수중생물도 많지 않아 고요함이 극에 달했다. 즐겨 찾는 곳은 아니지만, 가끔이라면 좋다.

비가 시야를 가리지 않을 만큼 쏟아지고 있었다. 프레미네는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때때로 불안하기까지 했다. 울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생각할수록 잔인했다. 내가 마음이 아프니 너는 감정을 숨기라고 하는 말 같기도 하다. 물의 용은 울보니까, 분명 마음이 여릴 것이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했다. 병이 되지 않도록.

느릿느릿 걷던 걸음을 멈춰 선다. 올려다본 그대로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비를 맞고 있었다. 쓴웃음이 났다.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았더니, 똑같이 사람이 적은 곳을 선호하는 이가 먼저 와 있다니. 그의 손에 우산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우산을 든 걸 본 적이 없다. 다가가도 될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기척을 들켰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감기 걸려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기쁘군요.”

말과는 달리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프레미네 또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비 탓일지도 모른다. 가라앉은 공기가, 들리지 않는 저 멀리의 소음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이 낯설었다.

거리를 좁혀도 느비예트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축 처져 있었다. 프레미네는 가만히 올려보다가, 손에 든 우산을 그에게 반 양보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얼굴은 여전히,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역시 비 올 때 우산을 쓰지 않으면 이상해 보입니까?”

프레미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비가 느비예트 님을 데려가는 건 싫어요.”

정적이 흘렀다. 잠수할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잠수하지 않아도 세계는 적막하고, 물과 같은 느낌이 나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유독 그가 생각났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만나서 정말 기뻤다. 끌어안고 싶었다. 체온을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평소와 달랐다. 낯설다. 프레미네는 태생이 사람의 감정에 예민했다. 지금 그에게서는 그저 지친 기색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를 위해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느비예트를 녹여버릴 것 같았다.

“저기, ……돌아가지 않을래요? 어디든, 어디든 좋아요. 저택에 느비예트 님을 초대해도 괜찮아요. 느비예트 님의 방이어도 좋아요. 저, 요리는 잘 못하지만……, 따뜻한 거, 만들어 드릴게요. 그러니까…….”

스윽, 하고. 정중한 손길로 우산 반절의 공간이 프레미네에게 돌아왔다. 그것은 일종의 거부처럼 느껴져서, 프레미네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런 프레미네에게 느비예트는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입술은 차가웠고, 혀가 얽히면서 우산이 바닥을 뒹굴었다. 느비예트의 손가락이 프레미네의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었다. 서로 눈을 감지 않았다. 느비예트의 긴 속눈썹이 빗물에 젖어있어서, 마치 눈물이라도 흘린 것처럼 보였다. 정말로 울고 있는 건 프레미네였는데도.

“사실 우산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입술이 떨어지고, 프레미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느비예트가 말했다. 그 눈에 담긴 두 개의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다. 그치지 않을 것 같았다.

“비를 맞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프레미네는 두려웠다. 불안하고, 싫었다. 그가 지금 지친 상태인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는 이미 프레미네의 몸을 침식했다. 서로 같아졌다. 마음은 무겁고, 빗물은 차갑고, 눈은 뜨거웠다. 이제야 느비예트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몸이 멋대로 떨고 있었다. 비에 젖은 무거운 코트는 역시나 차가워서, 프레미네는 목 안이 죄이는 걸 느꼈다.

“……방해해서 미안해요…….”

“방해되지 않았고,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로 사과했다가는 사과할 일만 일어나곤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는 입버릇처럼 사과하는 사람이었다. 프레미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계속 외면 해 왔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 어디까지 알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 다정한 사람. 외로운 사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느비예트는 아이를 안아 들듯 프레미네를 안아 올렸다. 눈이 가까이에 마주쳤다. 울상인 소년은 시선을 피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보고, 인간 아이에게는 이 비가 가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만 돌아가지요. 프레미네 군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프레미네를 안아 들었음에도 느긋하고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우산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프레미네는 느비예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비는 차갑지만, 느비예트의 몸도 차갑지만, 그래도 곁에 있게 해준다는 게 기뻤다.

“……느비예트 님, 있잖아요…….”

“예.”

“……욕심, 부리면 안 되지만. 그렇지만…….”

“괜찮습니다. 프레미네 군은 조금 더 욕심을 배울 필요가 있으니까요.”

“……느비예트 님을, 많이 좋아해요.”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해도, 좋아한다는 말마저 어쩌면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도. 지난 모든 나날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는다 해도. 느비예트는 언제나 프레미네를 찾아내 주었고, 품에 안아주었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좋아, 좋아해. 많이 좋아해. 어느 밤의 선명한 체온, 프레미네를 보고 웃어주는 얼굴, 그 모든 것 또한 현실이었다.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눈이 시릴 정도로 다정했다. 풍경이 바뀌어 가는 사이에,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말하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속앓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에 했던 말을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

“프레미네 군을 좋아한다는 말로는 표현이 모자란 모양이군요.”

“그런 건, …….”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때때로 생각하곤 합니다.”

흘러가던 풍경이 멈췄다. 느비예트는 프레미네에게 시선을 맞췄다. 부끄럽지만, 피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직도 실감 나지 않지만, 다정하게 웃는 예쁜 눈은 프레미네만을 위한 것이다.

“말주변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전부 처음 있는 일인지라, 요령이 없어 상처 주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프레미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모든 접촉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이 좋아. 같이 있게 해줘. 같이 있고 싶어.

“다만, 프레미네 군이 주는 모든 것이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공정하지 못하고, 답지도 안 하게 들떠서, 추한 모습을 보인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신뢰할 수 없겠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도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이기심을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좋아.

서툰 입맞춤. 길어질수록, 서로 천천히 체온을 되찾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마주 본 얼굴, 눈에 띄게 빛나는 두 개의 달, 숨쉬기가 버거웠다. 잡아먹힐 것 같아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잡아먹힌들 어떻단 말인가? 차라리 잡아먹어 주었으면 했다. 살갗을 빠짐없이 그 입에 삼켜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그렇지만, 짐승의 눈을 갖고도 그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요리, 자신 없으니까요. 놀라면 안 돼요.”

“예, 기대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만.”

“…….”

풍경이 바뀌어 간다. 사람 눈이 많아지는 곳에 가면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비가 그친 걸 깨달았다.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비가 그쳤을 뿐 조금 흐린 하늘. 잃어버린 우산 생각이 났다. 새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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