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12
고양이 그림자
종이가 펜촉에 닿아 사각대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청각이 예민한 만큼 집중력은 떨어져서, 펼친 동화책은 그저 알록달록한 무늬가 그려진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레, 혹여나 시선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까 경계하면서 책상 쪽을 보았다. 서류를 보는 표정은 평소 프레미네를 볼 때와는 달리 차갑기만 했다. 예상 밖의 잔업. 벌써 집무실 창문 바깥은 어둑어둑한데 오늘도 멜모니아궁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프레미네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이 책은 집무실에 찾아와주는 프레미네를 위해 느비예트가 준비해 둔 것 중 하나였다. 귀하고 고마운 책이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눈이 마주쳤다. 프레미네는 깜짝 놀라서 책을 방패로 얼굴을 숨겼다. 한참 있다가 눈치를 보며 책을 내리면 느비예트는 다시 서류를 보고 있었다. 프레미네는 침울해졌다. 그만 돌아간다고 이야기해야 할까? 일을 방해하는 것 같고,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제 속내를 어떻게 직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외롭다고 생각하는 건 나쁜 일인데도 자꾸 못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무의식에 또 그를 보고 있었는지 이제 느비예트는 프레미네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프레미네는 숨을 삼키고 책에 코를 박았다. 그런다고 숨어지는 것도 아닌 걸 알면서도.
느비예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미네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꼼짝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대체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한다는 말인가? 폰타인에서 그를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있기는 하던가?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이상하다. 프레미네는 조심조심 얼굴에서 책을 내렸고,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선명한 두 개의 눈동자. 삼켜내지 못한 괴성이 삐이, 하는 소리가 되어서 목을 타고 울렸다. 그러더니 딸꾹질이 났다. 히끅.
“프레미네 군.”
“저기, 힉, 바, 방해하려던 게, 히끅.”
딸꾹질이 안 멈춘다. 빚어낸 듯한 비현실적인 얼굴이 당장 입술이라도 닿을 듯 가까웠다. 프레미네는 최대한 뒤로 물러섰지만 등 뒤에 닿는 것은 소파의 등받이였다. 하도 움츠린 탓에 신발 신은 발이 소파 위에 있었다. 고개를 뺄수록 느비예트의 얼굴도 가까워졌다. 프레미네는 새빨개져서 딸꾹질만 계속했다. 느비예트는 평상시 표정이 그렇게 풍부한 편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뭐가 원인인지도 모르겠고, 프레미네는 독에 든 쥐처럼 구석에 몰려서, 어떻게든 세로로 찢어진 눈에서 느껴지는 압력을 피해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프레미네를 괴롭히던 느비예트가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한다고 했지요?”
“앗, 그게…….”
이럴 때라니 어떤 때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프레미네는 반쯤 울고 있었다.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얼굴이 너무 가까운 데다 뚱한 표정이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느비예트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혼나면 어쩌지. 프레미네는 그 와중에 느비예트 눈치를 봤다. 몸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들려온 느비예트의 목소리는 예상을 깨고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잘 듣고 따라 하십시오. 같이 있어 주세요.”
프레미네는 얼굴을 감싸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몰라주었으면 했는데, 결국 다 들켜버렸다. 장갑 낀 손이 상냥하게 프레미네의 뺨을 간질이며 재촉했다. 프레미네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눈을 꼭 감고 말했다.
“가, 같이……, 같이 있어 주세요…….”
“좋습니다.”
느비예트가 웃었다. 그리고 어느 틈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책을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프레미네의 옆에 앉았다. 아니, 앉는 줄 알았더니 프레미네의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그 무릎에 제 머리를 올리고 반쯤 드러누워 버렸다. 허벅지에 무게가 실리고 머리카락이 닿아서 간지럽다. 프레미네는 어느새 딸꾹질이 멈춘 걸 알았다.
“피곤하군요.”
“……저, 저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음? 불편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프레미네 군은 불편합니까?”
살이 없어 그리 말랑하지 않은 다리가 눕기에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프레미네는 머뭇거리다가 느비예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었다. 머리에 타인의 손이 닿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지 그는 항상 이런 행동을 하면 눈에 띄게 굳었다. 싫으신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이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말하면서 왜인지 시선을 피했던 기억도. 내키지 않아 하는 건 틀림없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무심코 자꾸 만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제가 느비예트 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응, 뭐든 좋아요.”
때때로 부려오는 서툰 어리광이 기뻤다. 도움이 되고 있구나, 이 사람은 나를 꾸준하게 사용해 주는 사람이구나. 그런,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정말로 혼날 것 같은 생각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평소라면 감히 만질 용기가 나지 않는 고운 뺨을 콕콕 찌르면 물끄러미 시선을 돌려 올려다본다. 오묘한 빛깔의 아름다운 눈동자, 길고 신비로운 속눈썹, 굳게 다문 입술. 그 모든 조화에 익숙한 무언가를 떠올렸다. 물 아래에서 올려다본 수면.
“……곧 돌아갈 시간이로군요.”
그렇게 말하며 느비예트는 프레미네의 손을 잡았다. 그 손에 마주 깍지를 끼면서, 프레미네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아요.”
“그렇습니까?”
두근두근, 심장이 마음대로 뛴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용기를 내는 건 익숙해질 날이 없었다.
“그러니까……, 에헴, 따라 해주세요.”
“예.”
“……가, 같이 있고 싶습니다.”
“…….”
무릎 위의 무게는 대답 없이 눈을 깜빡인다. 프레미네는 얼굴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프레미네를 흥미롭게 보던 느비예트가 말했다.
“같이 있고 싶습니다. 프레미네 군과.”
“응, 같이 있어요.”
환하게 웃으면 어째서인지 느비예트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 좋을 대로…….”
“뭐든, 좋아요. 하고 싶은 거 해요.”
“…….”
무릎이 가벼워졌다. 조금 낮은 곳에서 입술을 부딪쳐 오는 건 낯설어서, 프레미네는 눈을 감지 못하고 가만히 입맞춤을 받았다. 눈을 뜬 채로는 부끄럽지만, 느비예트의 속눈썹이 조명 탓에 그림자가 지는 게 잘 보이기도 했다. 떨어져 나가면서 혀가 프레미네의 입술을 핥았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느비예트는 다시 프레미네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는 눈앞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게으름 피우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더 푹 쉬어도 괜찮아요.”
느비예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프레미네도 말없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쭉한 몸을 한껏 구겨서까지 붙어있는 게 무릎 위를 좋아하는 고양이 생각이 났다. 실례되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역시 닮아서. 한참이나 어른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불경한 일이 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고, 그냥 불경죄를 저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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