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비프레] SS 3
하얀 것은 눈이고 까만 것은
한기가 들어 눈을 떴다. 낯선 냄새. 얼어붙은 공기와 먹먹한 고요함. 무언가를 예감하고 프레미네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 앞에 섰다. 새파란 눈이 설렘으로 일렁였다. 천지가 온통 하얀색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저택 문 바깥으로 나서면 방에서 본 것보다 눈이 더 소복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조심조심 발을 디디면 특유의 뽀득 소리와 함께 자국이 났다. 잿빛 하늘은 그칠 기미 없이 눈을 뿌리고 있었다. 뒤늦게 찾아오는 추위에 방으로 다시 되돌아 와 이불을 꼭 뒤집어썼다. 프레미네는 눈이 언제까지 내릴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폰타인의 겨울에 눈이 내리는 건 흔하지만 쌓이는 건 흔하지 않았다. 올해는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하늘이 조용해졌다. 프레미네는 코트에 머플러, 장갑까지 무장한 채로 다시 바깥에 나왔다. 사람들도 눈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나와보니 아침과는 달리 길바닥이 군데군데 지저분했다. 저택 주변에도 가족들이 만들어 둔 눈사람과, 눈싸움한 흔적이 있었다. 프레미네도 눈싸움하자는 소리를 들었지만 내키지 않아 거절했다. 구석진 곳에는 깨끗한 눈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눈 뭉치를 굴리기 시작했다. 크게 만들 생각이 없어서 금세 눈사람이 생겨났다. 나뭇가지로 된 팔이 앙상했고 추워 보였다. 무심코 눈사람을 꼭 안아주면 프레미네가 추웠다. 안으면 따뜻해진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멜모니아궁 방향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계실까? 계시지 않는다고 해도, 얼음 원소를 강화해 책상 위에 놓고 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프레미네는 다시 눈을 뭉쳤다. 이번에는 춥지 않아 보이는 게 좋겠다.
*
밖에 눈이 왔다는 모양이다. 종일 서류작업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가도록 느비예트는 책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반납하는 것도 익숙한 일이지만, 자그맣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리웠다. 당연한 듯 나약한 생각이 고개를 내미는 것에 의아함이 든다. 사랑스러움이란 감정은 좋은 것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변화가 싫지는 않았다. 애초에 삶에 그 아이를 끌어들인 건 느비예트 자신의 충동이었기도 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물러져만 간다. 제 표정이 봄 들판을 내리쬐는 햇살처럼 풀려있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느비예트는 서류를 봤다.
눈이 쌓였다는 소리가 들리건 말건, 집무실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공문 발송을 위해 잠시 접수대로 나가면 세드나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눈 구경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둘러보면 오늘따라 멜모니아궁이 휑했다. 다들 눈 구경을 나간 모양이다. 질책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기분 전환은 중요한 동기였다. 세드나에게 10분 정도 휴식을 권했다. 작은 멜뤼진은 기뻐하며 접수대에 부재중 표식을 올려놓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느비예트는 텅 빈 접수대를 잠깐 쳐다보다가 다시 집무실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집무실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이었다. 손볼 건 많았다. 맞지 않는 절차의 서류와, 이게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결재가 올라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서류를 확인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리기 때문이다. 풀렸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미간에 진 주름을 펴줄 사람은 없었고 느비예트는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얼마 전에 들여온 몬드산 물을 잔에 따랐다. 잔을 들고 불투명한 창가에 다가가면 겨울 특유의 냉기가 흘러들어온다. 햇볕이라도 비치는 날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옅은 금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이들은 눈을 좋아하는 법이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상상해 보면 피곤함이 조금 가셨다. 미지근한 물에서는 평화로운 맛이 났다.
잔의 반을 비워갈 때, 작은 소리가 났다. 무심코 느비예트의 귀가 쫑긋했다. 들릴 듯 말 듯 했지만 확실한 노크. 반가운 소리였다.
“들어오십시오.”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밝은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빼꼼, 그리고 두리번. 눈이 마주치자 방문객은 바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조심스레 눈이 맞았다. 오늘따라 뭐가 그렇게 껄끄러운 걸까. 은잔을 책상 위에 놓고 손짓하니 뺨이 발그스름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들어왔다. 머플러까지 하고 도톰하게 옷을 차려입은 프레미네는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태도의 원인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바깥이 추운 모양이군요.”
“엇……. 안 나가보셨어요? 밖에 눈 오는데…….”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일정을 생각하면 저녁에나 흔적을 구경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
프레미네는 우물쭈물하며 상자에 시선을 내렸다.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저렇게 신경을 쓰는 걸까. 느비예트의 시선을 깨달았는지 프레미네는 테이블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혹시, 혹시나 바쁘실까 싶어서……. 눈 구경, 못 하셨을까 봐 가지고 왔어요. 내일까지는 안 녹을 거예요…….”
미덥지 못한 동작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기에 보니, 그곳에는 눈 덩어리가 있었다. 동글동글 예쁜 형태로 뭉쳐져서, 기다란 초록색 잎 두 개가 장식처럼 붙어있었다. 느비예트가 흥미롭게 바라보자 프레미네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눈 덩어리를 꺼내 가까이에 가져왔다.
“눈사람은 크면 방해될 것 같아서, 눈토끼를 만들었어요. ……저, 저기. 제가 느비예트 님을 귀찮게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척 기쁩니다. 덕분에 저도 눈을 볼 수 있게 되었군요.”
정중히 받아 든 눈토끼의 자그마하고 미덥잖은 모습은 왜인지 눈앞의 소년과 닮았다. 눈을 모아다가 자기 같은 걸 만드는 모습을 생각하니 꽤 유쾌한 풍경이었다. 녹는 게 늦춰지도록 얼음 원소를 열심히 밀집해 놓은 게 느껴져 마음속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어른스럽지 못한 충동이 들었다. 망가지지 않도록 상자 안에 눈토끼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충동에 따랐다. 생각만 했던 따뜻한 온기가 품에 들어오자, 지금까지 느꼈던 업무 스트레스가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느, 느비예트 님……?”
당황하면서도 마주 안아오는 모습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으면 프레미네는 말랑한 뺨을 느비예트의 가슴에 꼭 밀착해 왔다. 얼핏 보이는 귀가 새빨갰다.
“괜찮으시다면 저녁까지 여기에 있다가 함께 나가지 않겠습니까?”
“어, 저기……, 있어도, 괜찮아요?”
“적적한 곳입니다. 말 상대를 해주신다면 저야 영광이지요.”
어렵게 품에서 놓아주면 프레미네는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 내내 작은 새가 곁에서 속삭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을 마무리 지으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멜모니아궁 바깥으로 나오니 아직 눈은 다 녹지 않아서, 느비예트는 겨울을 실감했다. 프레미네의 손을 잡고 밟는 눈은 뭔가 간질간질해서, 표정이 멋대로 풀리는 걸 알았다. 아이가 사는 저택의 앞까지는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즐거운 시간도 금세 끝이었지만.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그러니까…….”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프레미네의 표정이 흐려졌다.
“시간 엄청 빨리 가네요…….”
“그렇군요. 즐거울수록 빨리 흐르는 게 시간이지요.”
“……응, 즐거웠어요. 들어가 볼게요. 느비예트 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손이 멀어진다. 느비예트는 머뭇거리며 돌아서는 프레미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프레미네 군.”
“예? ……와앗.”
그림자가 내려오더니 입술과 입술이 짧게 닿았다. 프레미네는 펄쩍 뛰어오르며 입을 양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느비예트는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기, 바깥, 아니, 집, 아니, 가족이, 저, 아, ……우웃…….”
원망하듯 노려보는 파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랑스럽기도 하다.
“좋은 꿈을 꾸길 바랍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시치미를 떼며 등을 돌리면 이번에는 느비예트의 팔이 잡혔다. 내려보니 프레미네가 목에 두른 머플러를 푸는 게 보였다. 발돋움하는 걸 얌전히 기다려 준 결과 머플러는 느비예트의 목에 엉성하게 자리 잡았다.
“……그 애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같이……, 있고 싶대요.”
사랑스러움이란 무엇일까. 대답을 듣지 않고 저택 안으로 뛰어 도망가 버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움이라고 한다면, 부정할 방도가 없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었다. 느비예트는 한참을 폰타인 성 내에서 배회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최고심판관의 목격담이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건 알지도 못한 채로.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