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이미 악에게 바친 심장입니다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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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디오메데스가 경쾌하게 박수를 치자 다들 환호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가족들이 전부 정원에 모인 까닭은 ‘게이트볼’라는 공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격하지 않은 운동인지라 노인이나 여성, 아이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스네즈나야에선 무척 대중적이다. 무엇보다도 시합의 규칙이 간단해서 누구라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르탈리아는 이 공놀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작은 공원에서 조그만 스틱으로 공을 톡톡 쳐대는 것이 재밌을 리가. 협소한 공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역시 승부욕이 뛰어나고 제법 호전적인 타르탈리아가 선호하는 운동이라면,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격구라든지 승부가 빠르게 갈리는 펜싱 따위였다. 그럼에도 유치한 공놀이에 참여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가족이 화합하는 과정 중 하나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 모임에 빠질 정도로 싫어하진 않았다.

“처음 해보시는 것인데 정말 잘하시는 군요.”

“규칙이 간단명료해서 좋군요. 접근성이 아주 좋습니다. 리월에서는 이런 대중적인 스포츠가 없어서 아쉽네요.”

“오. 암왕제군께선 그 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흠. 일단 스포츠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대중적이어야 하는데….”

바로 이런 점이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종려는 경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떠들기 시작했다. 저 사내는 원체 말이 많아서 귀에 딱지가 앉을 법도 한데, 가족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치 새처럼 모여 종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딱히 급할 것도 없기는 하다. 원래 게이트볼 자체가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단지 타르탈리아만 왜인지 잔뜩 심통이 나있는 상태다. 스틱으로 공을 톡 쳐서 종려의 공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이었다.

누구는 스틱만 휘둘러도 기립박수를 쳐주더니….

“이봐요. 얼른 좀 쳐요.”

타르탈리아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또다시 날아온 건 나디아의 등짝 스매시였다.

“아약스!”

“아오! 왜 자꾸 때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말이 많았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려는 이내 미소 지으며 스틱을 들고 왔다. 그의 옆으로 조르르 다가온 토니아가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저리 손짓하며 가르쳐준다.

“보세요, 암왕제군. 아약스 오빠의 공이 골대 근처에 있으니 우리가 쳐서 날려 보내야겠어요.”

“네. 흠.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맞추실 수 있을 거예요! 이 거리에선 스윙을 할 때 이렇게 허리를….”

말괄량이처럼 스틱을 휙휙 휘두르는 토니아의 모습을 보던 종려가 미소 짓는다. 그녀는 곧 얼굴이 발갛게 물들더니 곧 도도한 아가씨처럼 다시 바른 자세로 서서 종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디아가 힘을 주어 타르탈리아가 잡아당긴다. 지고 있는데도 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약스는 짜증스럽게 눈알을 굴렸다.

“누나. 일부러 져주고 있는 거 아니지?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해야 해.”

“너무 보기 좋다, 그렇지.”

“대체 뭐가.”

“잘 어울려. 토니아 정말 아기새 같아, 그렇지?”

“…뭘 그렇지야, 자꾸.”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저택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더욱더 놀라운 것은 정원까지 냉기가 들이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벽난로와 벽돌이 있는 저택 내부에 비하면 비할 바 아니지만, 정원 앞까지는 불 원소의 순환을 이용한 기술력으로 어느 정도 온기가 유지될 수 있다. 그 기술은 대빙벽에서는 사치스러운 것이어서 타르탈리아는 언제나 코트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셔츠와 베스트만 걸치고 있어도 추운 줄 몰랐다. 덕분에 타르탈리아가 스틱을 양손으로 쥔 채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참 잘 보였다. 아주 날씬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는데.”

경쾌하게 도로록 굴러가는 공을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공이 정확히 자신의 공을 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쯥. 저 양반 정말 오늘 처음 하는 거 맞아?”

“너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응? 토니아 일로?”

“….”

“왜 그렇게 암왕제군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암왕제군이? 왜?”

“어렵게 생각할 일도 아니야. 딱 봐도 그렇잖아, 누나. 우리랑… 다른 사람이야. 사는 세상이 너무 다르니까. 분명히 토니아가 상처 받는 날이 올 거야. 나는 그게 걱정되는 거지.”

“오, 아약스. 너 정말 내가 사랑하는 아약스가 맞니? 내가 결혼할 때 네가 나에게 뭐라고 해주었는지 난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어.”

“….”

“나를 봐, 아약스. 누나를 보렴.”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누이 나디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신분 차이로 인해 결혼할 때 온갖 구설수의 오른 누이였다. 재력도 권위도 없었던 블라드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디아가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왜 저렇게 가진 것도 없이 못난 남자하고 결혼하는지. 대놓고 힐난하진 않았지만, 탐탁지 않은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스네즈나야의 신문기자들은 나디아를 취재하기 위해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허락되지 않은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본래 그들은 유서 깊은 명문가인데,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예법으로 인기가 무척 많았다. 안 그래도 이목이 끌리는 가문의 권세를 최고치로 끌어올린 것은 다름 아닌 타르탈리아다. 삼남인 아약스가 최연소 집행관으로 임명되자 그들의 가치는 끊임없이 올라갔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나디아의 행보가 당연히 기괴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 심지어 친척들까지 왜 하필 그런 남자에게 시집을 가느냐고 나무랐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약스만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누나, 왜 망설이는 거야? 사랑해서 하는 결혼 아니야? 혹시 자금이 부족해? 아니면 권세가 부족해? 누가 뭐라고 하면 이렇게 말해. 내 동생이 ‘귀공자 타르탈리아’라고. 그거면 됐잖아.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나는 너무 기뻤어. 왜냐면. 사실 그때 나한테 필요한 건 재력도 권력도 아니었거든.”

“…아하하.”

타르탈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디아를 바라본다. 자신이 그런 허세 가득한 말을 생각했었나. 아마 그때 당시에는 11번째 집행관이 된지 얼마 안 된 때라서….

부끄러움도 잠시, 타르탈리아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나디아의 손길에 가만히 팔짱을 꼈다. 나디아는 그에게 하나뿐인 누이여서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훌쩍 커져버린 탓에 저보다 한참 작은 누이를 내려다보는 주제에, 타르탈리아는 조금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일부러 머리를 크게 숙였다. 그러자 이번엔 누이의 손이 타르탈리아의 북슬북슬한 머리를 서슴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누나의 손길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달달했다.

“토니아를 좀 더 응원해주면 안 되겠니?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있어?”

“…실은.”

토니아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나디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다. 솔직히 타르탈리아는 신분이나 문화, 계급의 차이로 인해 따라오는 문제들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그 역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토니아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죽음을 택했다. 사실 이제는 정말로 있었던 일이 맞는지, 혹시 꿈을 꾼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런 일은 없었던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외면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조금만 방심해도 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내온 그였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신뢰하고 의뭉스러운 것은 안일하게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엔….

“….”

“응. 그러니까.”

마치 길가에서 만난 야생여우를 쓰다듬듯 사정없이 헤집어주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즐거운 짐승처럼 눈을 감고 손길을 음미하던 아약스는 서서히 눈을 떴다가 이내 바로 옆에 서 있는 종려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흐트러졌을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깜짝아.”

“…누님과도 사이가 좋으시군요. 머리도… 쓰다듬으시고.”

“아하하. 우리 누나가 손맛이 좋거든. 여러 가지 의미로. 벌써 제 차례입니까?”

“네.”

“으음~. 지고 있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누나, 잘 좀 쳐봐. 실력이 너무 녹슨 거 아냐? 누나 때문에 점수 다 뺏겼어.”

“어? 어. 어어….”

“…누나?”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던 아약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디아는 종려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아약스를 바라본다. 그녀는 곧 아약스의 팔짱을 끼고 그의 몸을 잡아당겼다. 그 모습이 즐겁다는 듯 미소 지으면서도 종려는 따라오지 않는다. 오도카니 서 있는 종려와 다시 거리가 멀어졌다. 아약스는 거의 질질 끌려가며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팔을 꽉 꼬집는 누나의 손길에 아픈 소리를 내었다.

“아, 아야. 또 왜 이래, 갑자기!”

“너!”

“아니. 왜. 왜 그러는데. 알았어. 내가 점수 낼 테니까. 나만 믿으라니까.”

“…아약스!”

갑자기 매섭게 자신의 두 팔을 붙드는 손길에 아약스는 어리둥절하게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렸다가 또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 변화에 마음이 동당동당 뛰었다.

“그래…. 알겠어. 확실히 알겠어.”

타르탈리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디아의 얼굴이 황망함에 물들었다.

“너는 알고 있지. 그래, 알고 있구나. 내 눈은 못 속여.”

“뭐. 뭐가.”

“저 남자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지만, 타르탈리아에게는 거의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에 눈앞이 새하얗게 질렸다. 얼어붙은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던 나디아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아약스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더욱더 거세졌다. 그 기세만으로도 타르탈리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팠다.

“내게 거짓말 하지 마. 아약스. 내 말이 맞지?”

“누나.”

“그래서! 그래서 넌 저 남자가 싫었던 거야. 그렇지? 저 남자가 토니아를 좋아하지 않을 걸 알았던 거야. 맙소사. 우리는,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누, 누나.”

“세상에!”

혼란스러운 듯 거의 아약스를 밀쳐낸 나디아는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그녀는 들고 있던 스틱마저 바닥에 내던졌다. 몸을 휙 돌리곤, 치맛자락을 붙들고 뛰기 시작했다.

“누나!!! 자, 잠깐!!!”

“…아약스?”

“나디아?”

유모차 안의 아이를 돌보던 블라드가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난다. 가족들이 서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바라보다가 아약스를 응시한다. 쏟아지는 시선에 타르탈리아는 헐떡이며 숨을 멈추었다.

타르탈리아는 부들부들 떨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스틱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속력을 내어 뛰기 시작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나디아를 쫓아가기 위해서였다.


“아약스. 너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 사람이, 너에게 뭔가 요구했어? 뭔가를 해달라고 했니? 바른대로 말해.”

“….”

차가운 물을 마신 후에 한결 차분해진 나디아가 아약스에게 물어본다. 소파에 앉아있던 타르탈리아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말한 대로야.”

“….”

“별일 없었어.”

“정말이야? 아니. 내가 보기엔 아니야.”

“…전부 끝난 일이야. 누나가 걱정할 일 따위는 없어.”

“우리는 저 남자에게 빚을 졌어. 그리고 저 남자는 너를 좋아해. 그런데 끝난 일이라고? 안 되겠어. 가족들에게 전부 말해야 해. 아약스. 적어도 가족들은 모두 알고 있어야 해.”

“제발, 제발. 내가 갚을 수 있어.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맙소사!!! 아약스. 왜 우리 가문의 일을 너 혼자 감당해? 아약스. 너 왜 저 남자가 스네즈나야까지 왔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저 남자는 자기 반려를 찾으러 왔어. 결혼 상대를 찾으려고 스네즈나야에 온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는… 여왕님이 초대해서… 왔을 뿐이야. 친구니까. 도와주려고.”

“아아, 아약스. 왜 이렇게 세상물정을 모르는 거니. 리월이 왜 우리를 도와줘? 친구라서? 그렇다면 왜 암왕제군이 왜 500년 가까이 우리 스네즈나야를 외면했겠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정략결혼을 조건으로 리월의 삼안오현선인들을 전쟁에 지원해주기로 한 거야. 온유하신 여왕님께서 왜 연회를 열었다고 생각해. 왜 귀족들을 전부 한 자리에 모았다고 생각해? 그냥 축하연이라고 생각한 거야? 왜 너만 모르는 거야. 응? 왜 너만 몰라!!!”

타르탈리아는 호화로웠던 연회를 떠올렸다. 군사 정치에 치중되어있는 스네즈나야에서 이토록 큰 연회는 역사상 처음이었다. 여왕님께서는 스네즈나야의 모든 귀족을 초대했고 암왕제군은 상석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가? 아니. 그는 이미 ‘찾은 것처럼’ 행동했다. 어느 순간 그 남자는 그저….

함께 얼음 빙판 같던 복도를 걸으며 예술품을 감상했던, 그 차가운 복도가 생각나 두통이 밀려왔다.

“불쌍한 토니아!”

흐느끼는 듯한 나디아의 목소리에 아약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토니아가 종려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종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다. 타르탈리아는 변명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남자가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할 뿐이야. 하지만, 난 싫다고 했어. 정말이야. 저 남자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진짜야….”

“….”

“…그러니까. 토니아에게는, 말하지 말아주라. 누나. 난… 토니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안 돼. 말해야 해. 아약스. 그 남자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토니아도 알아야 해.”

“누나…. 토니아가 상처 받을 거야. 부탁할게. 내가 다 정리할게. 응?”

괴로워하던 나디아가 일순 멈칫했다.

“아약스…. 너. 너 말이야. 너는. 너는 혹시. 좋아하는 거 아니지?”

순간 황당해진 타르탈리아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안 돼. 아약스. 아약스. 좋아하면 안 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나디아를 바라보던 타르탈리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다.

침묵을 유지하는 누이 때문에 타르탈리아는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울 수 있는 사람도 어쩌면 누이 밖에 없을지 모른다. 어느 순간 억울한 마음이 솟구쳤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대체 왜 종려를 좋아하는 것이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걸까. 그를 좋아하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자신은 처음부터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감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일방적이었다. 무슨 진눈깨비마냥 녹지도 않고 얼지도 않고 그저 질척거리며 신경 쓰이게 제 마음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디아가 손을 뻗자 타르탈리아의 상념이 멈추었다. 까맣게 죽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아약스는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결국, 먼저 자리를 옮긴 것은 나디아였다. 그녀는 타르탈리아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타르탈리아의 머리를 잡아당기자 그녀의 어깨에 얼굴이 닿았다. 손가락을 꾹 붙든 채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기대었다. 시집 간 누나의 품…. 오랜만이었다. 아약스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렸다.

“아약스.”

“…응.”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아.”

그것은 대체 누굴 지칭하는 말일까. 토니아? 아니면… 종려?

환생하기 전. 즉 심장을 바치기 전의 삶에서. 편지 속 토니아는 언제나 행복한 듯이 이야기했었다. 그녀는 무척 사랑받고 있으며 기쁘고 행복하며 리월이 즐겁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종려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종려는 정말로 토니아를 사랑했는지. 토니아가 좋아서 결혼한 게 맞는지. 만약 토니아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면… 그 편지의 모든 내용이 다 거짓말이었다면…. 지금처럼, 단 한 번의 눈길도 준 적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대체 왜? 토니아의 운명의 자리는 카나리아다. 그가 찾는 ‘봉황’까지는 아니어도, 붉은새자리는 맞다. 알고 있던 게 아냐? 그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토니아와 결혼한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을 발판 삼아 예상해보자면, 아마 종려가 토니아의 운명의 자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에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말 좋아한 건지. 결혼하자고 말해준 건지. 어떻게 대우해줬는지 등등….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니아의 비밀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신이 찾던 그 운명의 자리의 주인공이 바로 토니아라는 이야기를 굳이 말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려는, 적어도 지금의 종려는 토니아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운명의 자리에 이끌리는 것이 맞다면, 곧바로 사랑에 빠졌음이 옳지 않나….

“누나 말 똑똑히 들어. 그분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저택에서 내보내야해. 모두를 위해서.”

“….”

“아약스! 내 눈 똑바로 봐. 누나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 이 일은 너만 할 수 있어. 토니아는 당분간 내가 데리고 다닐 테니까. 이해했어? 내 말이 정말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한 거지?”

“…응.”

“빚은 깨끗하게 청산할수록 좋은 거야.”

그래. 이제 정말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토니아만 잘 숨긴다면, 종려는 계속 자신의 운명의 자리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찾지 못하면 리월과 스네즈나야의 계약은 어찌 되려나…. 거기까진, 타르탈리아는 신경 쓸 수 없다.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고 리월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만큼 자신이 집행관으로서 여왕님께 충성과 헌신을 바치면 된다. 아무튼 암왕제군과 여기서는 더 엮이지 않는 편이 좋다.

어쩌면 또 몰라. 진짜 운명의 상대가 이 스네즈나야 전역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을 염두에 둔 것처럼, 암왕제군은 스네즈나야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다가 서서히 멀어지면 된다. 의도치 않게 조력자가 생겼으니 자신만 잘 해내면 된다.

소란이 줄어들고, 작은 방에 틀어박혀 한참 대화를 나누던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디아는 약간 운 것처럼 눈가가 벌게진 채였고 아약스는 드물게 정색한 채였다. 나디아는 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계단 위로 올라갔고, 아약스 역시 일단은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서재로 향했다.

서재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나디아와 아약스의 싸움은 아무래도 ‘게이트볼 경기 점수’ 때문이라고 오해 받은 것 같았다. 사실 가문에서 게이트볼을 가장 잘 치는 건 나디아인데, 그녀가 오늘 점수를 너무 못 냈기 때문에 아약스가 한껏 화를 냈다가, 그만 감정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둘이 소리를 지를 정도로 싸우게 되었다는 식으로 와전된 모양이었다.

반쯤 열린 문 틈 사이로 둘의 대화가 흘러 나왔다.

“음. 죄송합니다. 저희 팀이 점수를 많이 내서 그런 건가요.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절대 아닙니다. 암왕제군. 아약스랑 나디아는 제대로 화해했을 겁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하군요. 아. 말도 타고 활도 쏘려고 했는데. 아하하. 분위기가 이래서. 이런이런. 정말 죄송스럽네요.”

“아닙니다. 저는… 즐거웠습니다, 네.”

쩔쩔 매는 형의 목소리를 듣던 타르탈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것이 다 짜증나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주제에 모른 척하는 어린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다해야 했다.

일부러 소란스럽게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둘의 대화가 끊겼다. 디오는 놀란 듯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다가 빠르게 그에게 다가왔다. 아약스, 너 괜찮아? 라고 속삭이는 형의 말에 응, 하고 대충 대답하며 종려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의외라는 듯 타르탈리아를 바라본다. 황금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던 타르탈리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접대할 테니까, 형은 가서 좀 쉬어.”

“아약스.”

“누나한테 가줘.”

“….”

눈치를 살피던 디오는 결국 서재에서 나갔다. 단 둘이 남게 되자 타르탈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정말 게이트볼 점수 때문에 싸우신 겁니까?”

“그럴 리가. 아니에요.”

“그럼요?”

“신경 끄세요. 누나랑 내 일이니까.”

“아, 그렇군. 알겠소.”

“…내 말은, 종려 씨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는 의미니까요.”

“종려 씨?”

“아. 미안합니다. 암왕제군. 그러니까.”

“아뇨. 그렇게…. 그 이름을.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

타르탈리아는 뒤늦게 자신이 그를 제대로 불러본 적이 없음을 인지해야 했다. 종려는 그에게 너무나 애매한 존재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불러도 좀 부족하거나 넘치는 감이 있었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사실 ‘종려’라고 알려준 그 이름이야말로 가장 부르기 편안한 것도 맞다. 사실 격식을 따져가며 바위 군주로 치켜세워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무표정에 가까운 그 얼굴은 이따금 변화하긴 하지만, 감정을 읽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제 누나가 대체 종려의 어느 면을 보고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궁금했다. 그저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어쨌든 타르탈리아는 그에게 자신의 그 무엇도 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제 뭐하고 싶어?”

“네?”

“우리 집에 놀러왔잖아요? 그러니까 놀아야죠. 말 타기? 활쏘기? 얼음낚시? 저번에 그, 하층민들 보고 싶다고 했던가?”

“….”

“솔직하게 말할게. 가족들하고 함께 있으면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요. 특히 토니아랑 함께 있을 때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둘이 놀죠. 최대한 재밌게 해줄게요.”

눈웃음을 짓는 타르탈리아와 달리 종려는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하군요. 좀… 바뀌신 것 같네요.”

“아아. 누나한테 잔소리 들었어요. 종려 씨한테 친절하게 좀 대하라고 하더군요. ‘친구’니까요.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저는 ‘친구’에게는 늘 상냥하게 대하거든요. 종려 씨는 어떤가요. 친구에게 어떻게 대하나요?”

“….”


“오빠…!”

둥근 나선형 계단을 내려오는 토니아의 외침에 타르탈리아는 움찔 멈추었다. 조금 전 나갈 채비를 완벽하게 끝냈지만, 잠시 멈춰서 크라바트를 정돈하는 척 했다. 종려는 일부러 모르는 척 뒷짐을 진 채 저택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단 둘이 떠날 모양새인지라 토니아의 마음이 달았던 모양이다.

“어디 가?”

“토니아!”

매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것은 타르탈리아였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디아는 난간에 손을 올려둔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들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마렴.”

“….”

아쉬운 듯이 종려를 바라보던 토니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축 늘어졌는데,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한 타르탈리아가 먼저 양손을 뻗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안, 미안. 언니 기분 좀 풀어줄래?”

“뭐야. 싸운 건 오빠랑 언니면서….”

토니아는 아무래도 아약스가 나디아와 싸운 탓에 저택에서 잠깐 나간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해해주길 원했지만, 사랑하는 여동생을 떨어뜨리는 일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입술을 비죽이는 토니아의 어깨를 잠시 다독여준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종려에게 다가갔다. 갑시다. 작게 속삭이며 종려의 팔을 이끈다. 동시에 뒤를 돌아본다. 서서히 닫히는 저택 문 사이로 꼼지락거리는 토니아가 눈에 들어왔으나 애써 외면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타르탈리아는 빠르게 마차 위에 올라타며 심드렁하게 손으로 턱을 괴었다. 맞은편에 앉은 종려의 시선이 느껴졌다. 타르탈리아는 일부러 품속에서 몇 가지 책자를 꺼내들었다.

“그,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 좋아하죠? 전시회 몇 개를 하고 있더라구. 흠. ‘산드로네 작품 전시회‘? 이건 또 뭐야?”

“…타르탈리아 씨는 전시회를 안 좋아하지 않나.”

“뭐. 그렇긴 한데.”

“‘친구’끼리 하는 걸 함께 하기로 한 거 아닙니까?”

“흠. 솔직히 말하자면, 암왕제군께서 그런 저급한 취미 생활에 즐겨주실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군.”

“그래요?”

일부러 도발하는 듯한 종려의 발언에 타르탈리아는 다시 품속으로 입장권을 욱여넣었다.

솔직히, 타르탈리아에게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14살 때 우인단에 징병되었고, 스네즈나야의 군대는 엄격한 위계질서로 상하 관계가 몹시 뚜렷한 곳이었다. 심지어 그는 말도 안 되는 재능과 노력으로 승승장구하였으므로 또래 친구 대신 제게 복종하는 수많은 부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전장에서는 때때로 전우애라 칭하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도 관등이 같아야 생겨나는 것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11번째 집행관에게 우정 따위는 없었다. 같은 집행관끼리도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타르탈리아 본인은 그다지 엄한 편은 아니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집행관은 그 본질을 숨길 수 없어 매번 살랑거리는 말투로 부하들을 대했고, 그래서 그들의 부하들은 마치 친구처럼 타르탈리아에게 가벼운 장난이나 농담을 해대고, 가끔 내기나 놀이 같은 것도 권유하곤 했다.

아, 세르게이에게 편지를 해야 하는데, 잊고 있었다.

‘원래’ 타르탈리아라면 이미 대빙벽에 돌아갔을 시간인데, 토니아의 일로 생각보다 오래 수도에 머물고 있다. 물론 그의 부하라면 절대 방심하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 늦는 것을 보니 정말 타르탈리아 님이 정략 결혼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며 지들끼리 쑥덕대고 있을 테니까. 당장 돌아가서 훈련을 시키며 군기를 잡아둬야 하는데.

“타르탈리아 님?”

놀란 듯 타르탈리아를 바라보던 사내는 절뚝거리며 천막을 걷어냈다.

“연락도 엄시 어쩐 일이심미까?”

“음? 내가 연락까지 하고 와야 하나?”

“아, 아뇨. 절대 그럿지 않슴미다. 수도로 오셨다는 말은 들었슴미다. 그런데 이 분은?”

“이쪽은,”

“종려라고 부르시게.”

“…이쪽은 마시코프 하사입니다.”

“이제 은퇴했으니 하사는 아니죠. 아무튼. 그럿군요. 일단 들어오시죠.”

“마시코프. 수도에서 지낸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사투리야?”

“허허. 고치기가 쉽지가 않슴미다.”

마시코프는 대빙벽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 중 한 명이다. 그는 글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슈나이제비치로, 혈혈단신으로 대빙벽으로 자원입대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전투 중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더는 싸울 수 없게 되었고… 타르탈리아는 그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스네즈나야 수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은밀히 도움을 주었다.

마시코프와 세르게이는 빈 시간마다 ‘스파링’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 그 취미가 밥벌이로 이어졌다. 그는 싸움 잘하는 몇몇을 고용하여 기술을 가르쳐주고 싸움판을 벌여 티켓을 팔거나 배팅을 유도하며 돈을 벌었다. 본래는 불법이지만, 암암리에 벌어지는 경기를 몰래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있어도 신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 가문의 삼남인 타르탈리아는 이 불법 경기장을 눈 감아줄 뿐만 아니라 스파링을 즐기러 종종 찾아오기까지 했다.

대충 천막을 두른 이곳은 마치 서커스장 같았고, 네모난 무대 위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무대를 둘러보며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한다. 마시코프는 지팡이를 붙든 채 차를 대접해주기 위해 움직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르탈리아가 급히 움직였다.

“아~. 정말. 느려터졌군. 내가 해?”

“그럿게는 안 되지요. 타르탈리아 님! 손님이니깐 가마니 앉아 계십시오!”

“내가 너보다 더 잘 끓이는데. 아, 그렇지. 찻잎 몇 봉지 보내줘?”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됨미다!”

마시코프가 한사코 거절하기에 실랑이는 마무리 되었다. 타르탈리아는 멀뚱히 서서 한숨을 내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종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머쓱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은?”

“음, 보면 몰라요. 스파링장이지. 한판 시원하게 붙어볼래?”

“…저요?”

“우리 제대로 싸워봐야 되지 않아?”

타르탈리아는 곧바로 코트를 벗었다. 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자 종려는 놀란 듯 눈을 깜빡일 뿐이다. 그러다가 절뚝절뚝 쟁반을 들고 오는 마시코프를 발견한 타르탈리아가 후다닥 달려간다.

“이봐, 마시코프! 넘어질 것 같아!”

“괜찮슴미다. 세르게이는 잘 지냄미까?”

“물론이지. 조만간 대빙벽으로 돌아갈 거야. 이곳은 나랑 잘 안 맞잖아. 무엇보다 세르게이가 지금쯤 나를 가지고 소설을 써서 대원들하고 돌려보고 있을 테니 반드시 찾아서 압수해야지. 그 녀석은 뭔 그렇게 낯 뜨거운 소설을 써대는지.”

“아직도 그럼미까? 솔직히 그 녀석은 소녀 같은 면이 있잖슴미까. 저도 그 녀석이 책 보면서 눈물콧물 짜는 게 꼴 뵈기 싫어서, 맨날 싸우자고 한 검미다.”

“아하하하. 맞아, 맞아~. 마음이 좀 여리다니까~.”

허리를 접어가며 웃던 타르탈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종려에게 찻잔을 휙 건네었다. 싸구려 머그잔에 담긴 차는 아무리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려는 별다른 반응 없이 뜨거운 차를 호로록 들이켠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지 몇 모금 더 마실 뿐이다.

“스파링 하러 오신 검미까? 제가 심판을 봐드리겠슴미다.”

타르탈리아는 이 모든 것에 익숙해보였다. 그는 아직 채 마시지 않은 찻잔을 아무렇게나 올려두고 무대 위로 올라선다. 무대를 빙 두른, 탄력적인 끈과 끈 사이로 유연하게 들어간다. 그는 어깨를 툭툭 털더니 이내 손에 붕대를 휙휙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종려를 도발한다.

“맞아. 자, 올라와. 종려 씨. ‘남자들만의 시간’을 보내야죠.”

종려는 무대 아래에 서 있다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싸우지 않겠다고 빼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전시회를 관람하는 것보다 스파링하는 쪽이 더 재밌기도 하니까. 그가 재킷을 벗기 시작하자 타르탈리아는 연극배우처럼 양손을 벌리고 경쾌하게 규칙을 설명한다. 그 사이에 종려는 베스트 단추를 풀고, 커프스를 풀어 셔츠를 팔꿈치까지 올린다. 타르탈리아는 크라바트를 모조리 풀어헤쳐 느슨하게 앞가슴을 드러낸 채다.

“이곳은 그 어떤 권위도 통하지 않아. 잘 싸우는 놈이 최고인 세상이야. 그래서 귀족도 서민도 모두 겸허해지는 곳이죠. 룰은 하나야. 먼저 패배를 인정하는 쪽이 지는 거지.”

“흠. 좋습니다.”

마시코프가 땡 하고 소리 내어 종을 치자, 경기는 시작되었다.

어느새 마시코프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경기를 잠깐 구경하던 마시코프가 제 친구와 선수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점수라고 할 만한 유효 공격이 종려에게 들어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오로지 타르탈리아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그의 무술이 어찌나 깔끔하고 깨끗한지 마치 수려한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종려가 타르탈리아의 옷깃을 잡고 한 바퀴 굴려 그대로 내리꽂자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아래에 깔린 타르탈리아는 분하다는 듯이 버둥거렸다.

“아~~~! 진짜!”

“오 대 영!”

“아악~~~!!! 잠깐만. 난, 나는 졌다고 말 안 했어!!!”

“하하하. 졌다고 외치게 해줄까요.”

“젠장!”

조금 전, 종려가 팔을 더 꺾었다면 보통 사람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을 자세였다. 하지만 타르탈리아는 제 팔이 부러져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 종려가 부러 멈춰준 것이다. 승패의 여부에 반론이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경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보는 사람은 감탄밖에 할 수 없다.

타르탈리아가 아이처럼 칭얼거리든 말든 심판을 포함한 모든 이는 이미 종려에게 홀린 듯하다. 여태껏 스파링할 때 타르탈리아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져본 적이 없는데, 그 11번째 집행관을 너무나 쉽게 제압하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분한 마음에 타르탈리아는 대자로 뻗어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새 회복한 그는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흔들며 근육을 풀었다. 이윽고 그는 자세를 잡고 다시 종려를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긴장감이 훅 느껴졌다.

황금색 눈동자는 싸늘하게 굳은 채 타르탈리아에게 고정되었다. 동공의 변화에서 그의 감정 변화가 느껴진다. 이번엔, 진심이다.

“돌아갑니까?”

“응?”

“원래 있던 곳으로요.”

“…가야죠.”

“결혼도 정말 합니까?”

“…할 수 있다면?”

“….”

그때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순간에, 이미 무언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채였다. 깔끔한 한 방. 턱인지 코인지 후려친 손길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이윽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 다리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무력함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강하다. 정말, 정말 강하다! 이 남자… 자신이 살아생전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강하다!

그러나 느껴지는 즐거움은 잠깐이고,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니, 그럴 뻔 했다. 무너져 내리는 타르탈리아를 붙든 것은 다름 아닌 종려였다. 그는 두 팔로 타르탈리아를 잡아주다 못해 완전히 품에 넣었다.

일반인 눈엔 보이지도 않는 속력이어서 좌중이 조용했다.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려가 쓰러진 타르탈리아를 추스르며 안아 올리자 뒤늦게 마시코프의 특이한 억양이 들려왔다.

“유, 육 대 영!”

“***….”

잔뜩 꼬인 혀로 욕설을 내뱉는 타르탈리아를 안아 올린 종려는 차분하게 말했다.

“잠시 쉬어야겠네요.”

“어, 어엇. 네네. 이, 이쪽으로 오심시오.”

그리고 종려는 축 늘어진 타르탈리아의 몸뚱어리를 들춰 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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