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2

그래서 나는, 결국에는.

잘 다린 화려한 외투를 곱게 접어서 종이가방에 넣었다. 저택을 나와 멜모니아 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갈수록 프레미네는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옷을 무슨 정신으로 받아왔더라. 비가 내리던 날, 느비예트 님과 처음으로 대화한 날, 어쩌면 비를 너무 맞아 자기도 모르게 머리에 열이 났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지? 생각할수록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미 옷은 빌려버린 뒤였다.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 옷을 방안에 두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척 귀한 천을 사용한 걸 문외한인 프레미네도 알 수 있었고, 옷걸이에 이런 게 걸려있다면 볼 때마다 느비예트 님이 생각날 것이다. 그런 건 많이 곤란했다. 비로 인해 물비린내만이 남아있던 옷에서는 이제 저택에서 쓰는 세제의 냄새가 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떠오르고 말았다. 일어나라며 내밀어 준 손과 그 온기가. 인간의 체온이란 프레미네가 좀처럼 독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꿈에서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프레미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심장 부근이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상상으로라도 과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프레미네가 욕심을 부리면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가장 확실한 예였다. 그저 물건처럼 마음을 버리고 명령을 수행할 뿐인 존재가 되어야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당연하다고, 외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무거운 걸음이 멜모니아 궁의 앞으로 프레미네를 옮겨 거대한 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 머리가 복잡했다. 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다음을 생각하느라 이제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아무 생각도 남지 않았지만.

멜모니아 궁 로비에는 행정관들이 머리를 싸매며 타자기를 두드리거나 생각에 골몰해 있거나, 서로 이야기하거나 하며 바빠 보였다. 그곳에서 어린아이인 프레미네는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 두리번거리며 접수대로 보이는 곳으로 향하면, 멜뤼진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옷에 단 명찰에 세드나라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멜모니아 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저어, 느, 느비예트 님……, 옷을 돌려드리러 왔어요.”

그러자 세드나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그리고 어디 어디, 하고 반대편 책상을 뒤지며 무언가 메모를 찾아냈다.

“아! 프레미네 님이시군요? 심판관님께서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오른쪽 방향이 심판관님의 집무실이므로, 시간이 되신다면 들어가서 잠시 대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심판관님께서 스케쥴이 맞으면 얼굴을 만나 뵙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침 곧 집무실로 돌아오실 시간이랍니다.”

“어어, 저……, 응, 알았어요. 안내……,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저희 멜모니아 궁은 언제나 폰타인 국민의 안녕과 편의를 위해 존재한답니다!”

친절함이 부담스럽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느비예트 님께서 프레미네를 보길 원한다는 말이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그러나 걸음은 착실히 느비예트 님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그곳은 조용했고, 책상은 주인의 성향을 반영하듯 많은 서류에도 깔끔한 정리가 되어있었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방 주인의 손길이 배어있는 넓은 공간.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폰타인 「바다」의 밑바닥에는, 이런 고요한 주인을 알 수 없는 저택이 있곤 했다. 누가 가져다 두었는지도 알 수 없는 축음기와, 책들. 집무실의 풍경이 그것과 겹쳐 보였다. 넓고 긴 통로 덕에 바깥의 소음은 들려오지 않아 더더욱. 책상 앞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용 소파에 조심스레 앉아 주변을 둘러보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종이가방을 품에 안은 채로 프레미네는 점점 끔뻑이는 눈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마치 물속 같은.

정신이 들면 옆으로 기울어진 책장이 보였다. 어라, 하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제가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을 무언가가 덮고 있었다. 화려하고 질감이 좋은 외투.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느비예트 님께서 조용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눈에 띄었는지 흘깃 시선을 던진 그 아름다운 눈과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그가 약간이지만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린 은백의 눈은 의아하게도 따뜻한 심해가 떠올랐다. 무심코 제 몸을 덮은 느비예트 님의 외투를 꼭 쥐었다.

“저, 아……, 안녕하세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매우 지루했나 보지요.”

“아, 아니요!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저기, 왠지, 그, ……편해서…….”

열기가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푹 익은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 그가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프레미네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느비예트 님은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미네의 옆에 앉았다. 프레미네는 제 품 안의 종이봉투가 그대로인 것과, 느비예트 님이 가벼운 차림새인 걸 보고 몸을 덮은 옷의 출처를 알았다. 비에 젖지 않은 옷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소금 냄새가 났다. 느비예트 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어 프레미네는 계속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빨갛습니다만……, 혹여나 그날 일로 정말 감기에 걸린 건 아닙니까?”

“…….”

조용히 도리질을 쳤다. 느비예트 님은 잠시 침묵했다. 불편하지 않은 적막이 깨진 건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비에 젖으면 큰일이 나는 인간도 있는 법입니다. 애써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프레미네 군에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인간이 맞기에는 많은, 비가 내렸으니까요.”

“집에 가서, 그, 바로……, 따뜻한 물로 씻었어요. 저, 저기, 정말 괜찮아요. 이건 그때 옷인데……, 세탁법이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화, 확인해 주실래요?”

종이봉투를 내밀면서 무심코 고개가 올라가고 말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다정한 얼굴이 프레미네를 향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조금 뒤로 주춤하고 말았다. 그래봐야 등에 닿는 것은 소파의 등받이였지만.

느비예트 님은 프레미네가 건넨 봉투를 정중히 받은 후 내용물을 꺼내, 접힌 옷을 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보았다. 그 반응에 프레미네는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저, 뭔가……, 문제가 있나요?”

“아, 아닙니다. 옷에서 당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조금 낯설군요, 이런 건.”

“으아.”

더 달아오를 곳도 없는데 이젠 아예 얼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낯부끄럽지? 옷을 얼굴에 가까이해 향을 맡는 느비예트 님은 이번에는 프레미네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흠, 역시 맞군요.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냄새입니다. 세제입니까?”

“아, 아아, 아, ……네……. 저, 미, 미안해요.”

“왜 사과합니까?”

과도할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어.

“……지, 집에서, 쓰는 세제, 그, 그렇게……, 질이 좋은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귀한 옷인데…….”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당신의 성의에 감사합니다, 프레미네 군.”

“……아, 우우…….”

그대로 어딘가로 가라앉고 싶었다. 느비예트 님은 붉어졌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하는 프레미네의 얼굴을 흥미롭게 보았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져도 좋겠군요. 프레미네 군, 뭔가 마시겠습니까?”

“예? 아, 저기…….”

“지인이 추천한다며 선물한 과자가 있습니다. 내오도록 하지요. 입에 맞으면 좋겠군요.”

대답도 듣지 않고 느비예트 님께서는 구석의 찬장에서 무언가를 준비했다. 이윽고 눈앞에 내려온 화려하고 우아한 컵에 담긴 것은, 투명한 물. 멍하니 보고 있으면, 느비예트 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월의 경책 산장에서 공수해 온 물입니다. 부드럽고, 특유의 향취가 있지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수원지입니다.”
“…….”

만지는 것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예술품 같은 컵을 입에 대고 조심스레 흘려 넣은 물은……, 물이었다. 폰타인 어디서든 마실 수 있는 물과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이거 조금, 톡톡, 쏘는 느낌이 들어요.”

“호오, 훌륭한 미각을 갖고 있군요. 천연 탄산 지대의 물입니다. 물론 폰타인까지 운반하는 도중 탄산은 거의 다 날아갔지만……, 혀가 예민하다면 느낄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조금 매운 느낌도, 나고.”

“탄산이 통각을 자극했나 봅니다. 과자로 입을 달래도록 하세요.”

손수 쿠키를 들어 가져다주는 느비예트 님의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 프레미네는 저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입으로 받아먹었다. 설탕의 함량이 높은 것인지, 파삭 하는 느낌과 함께 입안에서 과자가 부드럽게 부서졌다. 질리지 않을 정도로 달고, 버터가 풍부한 사치스러운 맛이었다.

“……맛있어요…….”

“다행이군요. 흠, 하나 부탁을 할까요.”

“네?”

“프레미네 군만 괜찮다면, 가끔 찾아와 말 상대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가 부재중이 아니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물과 과자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프레미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심판관을 주의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문득 머리를 스쳐 심장 한구석이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리니와 리넷이 벽난로의 집 소속임을 푸리나 님께서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느비예트 님도 분명, 프레미네 또한 벽난로의 집 사람임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이 접근은, 어떤 의미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느비예트 님은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무언가, 실수한 것 같았다. 상처를 준 듯한, 알 수 없는 착각.

“「바다」를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폰타인에서도 드문 법입니다. 물과 가까운 자는 더더욱 드물지요. 조금 호기심이 일었을 뿐입니다. 물론 부담이 된다면 거절해도 좋습니다.”

「바다」가 느껴지는 사람은, 물과 닮은 사람은, 그런 편안한 사람은. 프레미네는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잊고 말았다. 그래서, 입에서는, 어리석은 말이 나오고 말아서.

“저, 저라도 괜찮다면……, 가끔, 올게요.”

말이 끝난 순간 조금 맑아진 느비예트 님의 표정에, 수면 아래로 빛이 들어오는 풍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척 따뜻하고 숨이 편안한 풍경이었다. 「바다」에 숨어있을 때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 손끝에 닿는 햇볕의 온기는, 너무나도 유혹적이어서.

“예를 표합니다.”

정중히 왼손을 잡아 올려 끄트머리에 마주 댄 입술 온도가 지금만은 프레미네만을 위한 체온이라면.

……고개를 드는 욕심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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