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비프레] 잿불과 데자뷰 3
당신의 의미
멜모니아 궁의 불이 꺼지는 날은 없다. 정규 업무시간이 끝났음에도 야근을 자처하는 행정관은 많았다. ‘공정’을 위해 이리저리 일을 돌려야 하는 업무 특성상, 아무리 사람을 충원해도 일감이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지옥이었다. 그런 저녁, 프레미네는 느비예트의 집무실 소파에 혼자 앉아있었다. 이 방을 벌써 몇 번 왕래했지만, 이 장의자 말고 다른 곳을 돌아본 기억은 없었다. 집무실 안과 주변의 책장을 밝히는 가스등과 촛불의 따스한 빛이 푸른 눈동자를 함께 비췄다. 조금 지루함이 느껴져 옆자리에 있는 등받이 쿠션을 끌어안았다. 세드나의 말에 의하면 곧 느비예트가 집무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프레미네는, 어른은 바쁘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프레미네가 아는 어른들은 얼굴을 보기가 참 힘들었다. 쿠션을 안은 채로 소파의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신발을 신은 채로 발을 올리다니 불경한 걸까, 하지만 신발을 벗는 건 더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예의 운운할 사람은 여기에는 누구도 없었지만, 부프 데테 저택의 아이인 프레미네는 엄격한 예의범절 교육을 받았다. 어느 쪽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니, 비행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슬쩍 의자 아래로 다리만 내렸다가 다시 되돌렸다. 시간은 어린아이에게는 비정하게도 느리고,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흘러간다. 프레미네가 그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나도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소파 구석에, 머리에서 흘러내린 모자가 구겨져 끼어버렸다.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느비예트의 집무실에 오면 언제나 나른해졌다. 분명 긴장감을 가져야 할 공간인데.
얼마 전 갑작스레 「아버지」와 면담이 있었다. 프레미네는 올 게 왔다고 생각하면서, 묵묵히 「아버지」의 방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최고심판관의 이야기를 했고, 프레미네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너무 깊이 발을 들이지 말라는 말씀만을 건넸다. 검붉은 눈이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프레미네를 보았다. 친구가 생겼다니 다행이구나, 그런 생각지도 않은 말과 함께.
친구라니, 조금, 아니 많이 주제넘은 말이었다. 느비예트가 프레미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본 바는 없었다. 말 상대? 그것도 친구라면 친구인가. 반쯤 감긴 눈으로 책상 옆 괘종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곧 돌아가야 하려나. 10시 전에만 돌아간다면 저택에서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끔뻑, 끔뻑. 심해로 가라앉는 것 같다. 이러다가 정말 잠들어 버릴지도 몰랐다. 늦은 시간에 저택에 돌아가느니 세드나에게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게 나을 텐데.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보그르르, 입가에서 공기가 거품이 되어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착각. 실제로 입에서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이 기다림은, 의미가 없다.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머리를 스칠 무렵. 복도 저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요한 발걸음. 그것만으로도,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프레미네가 원하는 보상이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당장 잠들 것만 같은 눈을 비비며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비예트와 눈이 마주쳤다. 기력을 회복하기라도 한 듯 천천히 잠이 깼다. 자리에서 일어나 쿠션을 내던지고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최고심판관님, 저기, ……고, 고생하셨어요.”
막상 말하려니 조금 말문이 막히는 건 왜일까. 한심하다. 내심 자신을 힐난하는 프레미네에게 느비예트는 아주 조금 눈썹을 내리며 한쪽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췄다.
“미안합니다. 늦었군요.”
“어, 저기…….”
조금, 아주 조금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은백의 눈에 혼란스럽다. 프레미네는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걸 느꼈다. 무심코 제 머리의 모자를 쥐어짜려 더듬지만 모자는 저 멀리 소파에 있었다. 손가락만 서로 갈 곳을 몰라 얽혔다.
“괜찮아요, 저 많이……, 많이 안 기다렸어요.”
거짓말이다. 사실은 많이 기다렸지만 이 얼굴에 대고 어떻게 그런 불평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프레미네는 그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필사적으로 바랐다. 마음이 전해졌는지, 느비예트는 희미하게 웃으며 프레미네의 두 손을 안심시켜 주듯 잡았다. 천천히, 시선이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제 위치에 돌아가 프레미네를 내려다보는 눈은 마치 시린 달빛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손을 잡아준 게 부끄럽고 기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프레미네를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이내 체온은 멀어져 버렸다.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밖이 많이 어둡습니다. 혼자 돌아가기는 위험해요. 저택에 전갈을 보내둘 테니, 오늘은 여기에 머무는 게 어떻습니까?”
“예? 아, 저, 저어.”
“걱정됩니다.”
신의 눈이 있는 사람이 밤길이 무서울 리가 없었다. 의아했다. 프레미네가 알 리는 없었지만, 느비예트는 푸리나가 늦은 밤 이유도 말하지 않고 틀어박혀 울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즘 치안이 좋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느비예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푸리나가 당한 모종의 일은 공교롭게도 프레미네의 「아버지」가 자행한 것으로, 폰타인의 치안은 변함없었다. 그런 사실은 둘 중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느비예트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기 때문에, 물론 그가 진지하지 않은 적이 있기는 했냐마는, 프레미네는 내심 갈등했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건 기쁘다. 하지만 「아버지」와 면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버지」께서 실망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하, 하지만 여기에 머무는 건 최고심판관님께 실례가 될 것 같아요.”
“제가 아니라, 프레미네 군 자신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부탁입니다.”
“……아…….”
잘 모르겠다. 프레미네에게 이 사람이 이렇게 걱정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지만 명령과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이 자라버렸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생겨서 정말 다행인 걸까요, 아버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와중 느비예트의 표정이 풀려 그 감정마저 잊어버렸다. 소파에 안내받아 다시 앉았다. 구석에 처박힌 모자를 이번에야말로 손안에 잡았다. 곁에 앉은 느비예트는 프레미네에게 겉옷을 벗어 걸쳐준 뒤 찬장으로 향했다.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 늦은 다과회의 시작이었다.
입안을 채우는 물은 조금 미끄러운 맛이 났다. 물어보니, 광물 성분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에서 채취한 물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느비예트는 프레미네가 맛의 차이를 느낀 것이 꽤나 기쁜 듯 눈에 띄게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알기 쉬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요새는……, 물 마실 때마다 조금씩 최고심판관님 생각이 나요.”
“호오?”
“아,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이상한 말을 해놓고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설득력이 있을까. 하지만 프레미네는 생각만큼 당황하지 않았다.
“자주, 닮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잠수할 때랑, 최고심판관님……, 이.”
“음, 그것 말입니다만.”
“예?”
“느비예트라고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좋아요.”
“……아, 네, 네. 느비예트……, 님.”
“그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요. 편한 대로 불러주십시오.”
직위가 아닌 성으로 불리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은, 프레미네에게는 우호적인 말로 들렸다. 프레미네 자신도 ‘잠수부’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이름을 불리는 게 더욱 친근감이 들었으니까. 이름. 눈앞의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을 아는 이가 폰타인 어딘가에 있을까. 호기심이 든들,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용기는 프레미네에게 없었다.
“저, 남이랑 얘기를 잘 못해서. 말주변도 없고. 항상, 혼자가 되고 싶어서 물속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최……, 느, 느비예트 님은, 신기해요. ……편안해서. 오래 같이 있었던 사람 같아.”
“마음 편하게 생각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그날 기분 따라 물맛이 조금 다를 때가 있어요. 그때 느비예트 님 생각이 나요. 옛날엔 그런 거, 신경 안 쓰였을 텐데.”
“미각이 스트레스의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흐르는 물처럼 공정하게. 프레미네는 그런 말이 생각났다. 다음에 오페라 하우스의 공판에 참석하고 싶어졌다. 이전에는 의식하지 않던 말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공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입 안에 밀어 넣은 쿠키는 부드럽고 진한 맛이 났다. 사치스러운 맛이었다. 익숙해질지 겁이 날 정도로.
“고마워요. 친구……, 가, 되어줘서. 그런 건, 책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가족이 아니라, 친구. 태어나서 처음 손에 쥐어 본 글자. 쭈뼛거리며 마음을 고하자, 느비예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프레미네는 조금 후회했다. 괜히 말했나 보다. 느비예트 님은 프레미네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기분이 침울해져서, 아름답게 세공된 은잔을 손에 들었다. 목이 탔다. 그 순간,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뺨을 감싸고 고개가 돌아가 눈앞에 느비예트의 얼굴만이 보였다. 이채로운 색의 눈동자. 한 번 눈을 마주치면 시선을 뗄 수 없는.
가볍게 부딪치더니 입 안을 훑는 것은 제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찌릿, 하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손에서 은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쏟아진 물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맛을 보듯, 프레미네의 입 안을 탐색한 뒤 멀어지는 체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가스등의 빛이 멀게 느껴졌다. 정말로 다정하게, 다정하게 웃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
“저도 프레미네 군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어 기쁩니다. 알고 있습니까? 인간의 몸에 있는 수분도, 거짓말을 할 줄 모르지요.”
“…….”
붉어진 프레미네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는 이는 누구였더라. 누구인지 몰라도, 아주 유혹적인, 따뜻한 체온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프레미네에게 제 체온을 공유해 주는 유일한 상대. 바다 이슬 꽃의 부드러움과, ‘바다’보다 따뜻한 인간의 체온.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눈앞의 사람을 끌어안았다. 제 등에 걸친 그의 외투도, 안긴 품도 따뜻하다. 이대로 녹아들 것 같았다.
“……미, 안해요.”
“사과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따뜻한 손이 등을 쓸어주었다. 심장이 아려왔다. 욕심, 욕심. 인간이 가진 가장 당연한 욕심. 따뜻한 것에 닿고 싶다는 욕심.
“저, 같은 게. 느비예트 님을……. 친구라고, 생각해서.”
“어떠한 이름을 명명하건, 그것은 프레미네 군의 자유입니다. 아무것도 틀리지 않았어요.”
“……왜…….”
셔츠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 아주 약간의 소금 냄새가 났다.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의문을 입 밖으로 내보내는 데에, 생각만큼 큰 용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왜, 저에게 그렇게 친절하세요?”
“흠, 글쎄요. 저는 물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요.”
“…….”
“항상 혼자 몰래 울고 있었지요. 프레미네 군은.”
“……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니까요. 본 순간 알았을 뿐입니다.”
신비한 말. 그러나 왜인지 이해가 갔다. ‘바다’의 깊은 곳에서 혼자 조용히 있을 때, 항상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건 아마도.
“외로움을 알려준 건, 프레미네 군입니다.”
“……응. 그렇네요.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말하면, 미안한 일만 늘어난다고 합니다.”
“저, ……아, 그……, 고, 고마워요. 저를, 생각해 줘서.”
“예, 저도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야 비를 맞고 싶은 이유를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느비예트는 말이 없었다. 프레미네를 가만히 끌어안은 채로 있을 뿐이었다. 그게 따뜻해서, 정말로, 정말 프레미네를 위한 체온임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일까, 심장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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