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

[느비프레] I promise you, honey. 3

여행 전날, 새벽에 저택 앞으로 마중을 나오겠다는 느비예트의 말에 끄덕이며 이것저것 준비를 위해 프레미네는 평소보다 일찍 귀가했다. 물론 짐 꾸리기 등은 진작에 끝난 상태로, 저택에 보수할 것이 있으면 하고, 청소도 하는 평소와 같은 일이 일어날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간 상태였다. 평소 갈 일이 거의 없는 등방울 항구에 가는 것만 해도 설레는데, 내일은 거기서 배를 타고 리월에 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어 가족 모두와 함께 식사하고, 오늘은 일찍 자야 한다는 생각에도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다. 그런 프레미네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자정이 조금 지나자 리넷이 찾아와 갓 끓인 차를 건네주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니 긴장한 마음도 풀려, 몸이 노곤해졌다. 몇 시간 뒤면 바로 깨어나야 하지만 그래도 잠들 수 있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삑, 삐빅. 시간이 되자 페어와 닮게 만든 펭귄 모양의 알람 시계가 그리 크지 않은 소음을 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시계의 알람을 끄고, 당분간 들을 일이 없으므로 태엽을 풀어두었다. 피로나 수면 부족은 느끼지 않았다. 새벽의 저택은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모두가 깨어나지 않게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느비예트가 올 시간이 되어 작은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왔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잠옷 차림으로 프레미네에게 말을 걸었다. 리니였다.

“벌써 가는 거야?”

“응, 등방울 항구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그렇구나. 잘 다녀와.”

몬드에 간다고 말했을 때, 리니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디든 다닐 수 있을 때 다녀오는 게 좋다고, 뼈있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리니와 프레미네에게 많은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같이 저택을 지지해 온 사이다. 리넷도 마찬가지지만,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다.

“……응, 갔다 올게. 얼른 다시 자.”

“알았어. 그래도 마중은 나오고 싶었어.”

“고마워…….”

리니가 제 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와 저택의 문을 열었다. 새벽 특유의 이슬을 담은 공기가 느껴진다. 지금껏 몇 번이고 들이마셨던 그 공기는, 오늘따라 낯설었다.

멀리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길쭉한 키와 실루엣을 보면 느비예트였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서두르면, 평소의 갑갑한 옷과는 달리 가벼운 차림새의, 그럼에도 고급 맞춤 의상인 것이 어쩔 수 없이 티가 나는 옷을 입은 느비예트가 있었다. 최고심판관이라기보다는, 어디 잘 사는 도련님처럼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느비예트 님.”

“좋은 아침입니다, 프레미네 군. 음, 프레미네 군이 일할 때 입는 것과 다른 옷을 입은 건 처음 보는군요. 잘 어울립니다.”

프레미네는 프레미네대로, 잠수복 위의 코트가 아닌 평범한 긴 상의와 반바지를 입은 채였다. 첫 여행 선물이라고 「아버지」께 특별히 받은 옷이었다. 알아주어서 기뻤다. 그래도 낯선 칭찬에 바짝 긴장해 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느비예트 님도……, 처음 보는 옷이지만, 무척 잘 어울려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가벼운 옷은 오랜만인지라 오히려 조금 어색하더군요.”

“…….”

프레미네는 생각했다. 평소에도 저 정도로 입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최고심판관이라는 직업은 한여름에도 꽁꽁 껴입는 모양이니, 그걸 느비예트가 덥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일이라도 조금은 편의성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도 가벼운 옷을 입은 걸 본 적이 없으니, 어른의 사정은 어렵다.

“일단 항구까지는 이동 수단을 수배해 놨습니다. 성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도록 하지요.”

프레미네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느비예트가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가 손에 든 짐이 없다 싶더라니, 이동 수단 쪽에 미리 실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시간이라,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느비예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프레미네는 이 고요가 편안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느비예트에게 얼마나 자유가 한정적인지를 생각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 한정적인 자유를 프레미네와 보내겠다고 생각해 준 일은.

성 입구에는 사람 넷 정도가 탈 수 있을 것 같은 이동 수단이 있었다. 기계 태엽 장치가 상용화되기 전인 한참 옛날에는 주로 말을 동력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마차, 라고 여전히 불리는 탈것이었다. 그 당시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개량되었기에 승차감은 말이 끌고 다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정적이다. 물론 당시의 끔찍한 승차감을 체험해 본 일이 없는 프레미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느비예트가 체험한 이야기니까.

“먼저 올라가십시오.”

“네, 고마워요.”

이미 마부에게 이야기가 되어있으므로, 느비예트가 올라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조용히 성을 나서기 시작했다. 작게 난 창문으로 폰타인 성이 멀어진다. 레일 보트는 등방울 항구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섬과 섬을 잇는 다리를 찾아 이동하는 루트인 모양이었다. 다리가 없다면 마차는 간이형 배로 형태를 바꾸어 이동한다는 사실을, 프레미네는 잘 알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느비예트에게 버릇처럼 몸을 기대자,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피곤하진 않습니까? 무척 이른 시간입니다만.”

“조금 긴장해서……. 아직은 졸리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배의 출발 시간이 예정대로라면 유롱항에 도착하는 건 정오 조금 전이 됩니다. 리월의 음식은 폰타인보다 향신료가 강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샌드위치를 준비해왔으니 허기가 지면 말하도록 하십시오.”

마치 소중한 것을 만지듯, 느비예트의 손길이 프레미네의 머리카락을 빗었다. 평소 손끝까지 감싸는 장갑을 착용한 것과는 달리 손가락이 노출된 반장갑이었다. 두피에 손톱이 닿아 조금 간지럽다. 이런 취급에는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부끄럽다. 몸을 움츠려도 느비예트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프레미네가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꿈같아요.”

“그렇습니까?”

“느비예트 님이랑, 여행이라니. 그것도 멀리…….”

“프레미네 군이 잠들었다 일어나도 현실이니 안심하십시오.”

“……네.”

분명 졸리지 않았는데, 느비예트의 손길은 언제나 프레미네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끔뻑, 끔뻑.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점점 시야가 좁아졌다. 평소처럼 듣기 좋은, 귀에 잘 꽂히는 목소리가 무언가를 이야기했는데 대답했는지 가물가물했다. 희미한 물 냄새, 조금 서늘한 체온은 기분이 좋다. 프레미네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파도 소리. 눈을 뜨자 어째서인지 전혀 모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딘가의 실내. 그러나 왜인지 흔들리고 있었다. 시야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느비예트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고 있다는 것도.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느비예트의 손길에 모든 행동은 수포가 되었다.

“저, 저기, 느비예트 님……?”

“조금 더 쉬십시오. 유롱항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금세 이해했다. 이곳은 선내고, 마차에서 잠든 이후로 등방울 항구에서 배를 탈 때까지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내내 느비예트 님이 안고 돌아다녔다는 말인가? 프레미네는 당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제 무릎에 누운 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채 숨기지 못한 귀와 목이 새빨간 프레미네를 보고, 느비예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미네는 가벼우므로 하등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왜 고뇌하는지 느비예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같은 일에도 느끼는 게 다르다. 물론 그 사실조차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에 느비예트에게는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왜 사과합니까?”

“하지만, 저기, 마차에서부터 여기까지……, 계속 자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편이 제 마음이 편합니다. 요 며칠 프레미네 군, 무리하고 있었다는 자각은 있습니까?”

“예? 저, 저기…….”

프레미네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할 말이 없어져서 느비예트의 바짓자락을 쥐었다. 느비예트의 앞에서도, 느비예트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재중에 최대한 다른 사람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노력한 기억은 있었다. 그건 무리를 자초한 걸까.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고……, 그럼요. 이 일주일은 프레미네 군을 위한 시간이지 않습니까.”

“죄송, 아니, 저, ……고마워요.”

“예, 그거면 됩니다.”

어디까지고 다정한 느비예트 때문에, 어쩐지 프레미네는 울고 싶어졌다. 미숙하다. 너무나도 미숙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울었다간 정말 미숙한 사람이 된다. 반성하되 실수에 잡아먹히지는 않아야 했다. 왜냐하면 프레미네는 느비예트와의 「다음」을 벌써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배는 고프지 않습니까? 벌써 성에서 떠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조금, 고파요.”

“그러면 잠시 일어나도록 하지요. 준비해 온 건 햄과 치즈, 그리고 잼을 바른 단순한 샌드위치입니다만. 일단 맛은 보았습니다만, 역시 음식의 맛은 잘 모르겠습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요.”

프레미네가 무릎에서 머리를 일으키자, 느비예트는 작은 짐꾸러미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어째 위화감이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완벽하게 식빵 귀퉁이까지 제거한 깔끔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면서 동시에 프레미네는 깨닫고 말았다.

“응? ……저기, 혹시 이거, 느비예트 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가게는 진작에 닫았으니 말입니다. 재료는 신선했을 터인데, 혹여나 맛이 이상합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맛있어요. 정말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빵, 그 식빵에 수분이 필요 이상으로 닿지 않도록 안에 바른 버터, 풍선귤 잼과 차가운 햄, 녹은 치즈.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의 수제 요리를 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아껴먹고 싶었지만 배 속은 텅텅 비어서, 얼른 음식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쳤다. 깔끔하게 비우면, 느비예트가 보온병에서 차를 따라주어 입가심까지 완벽하게 끝내버렸다.

“맛있었어요. 저는 초콜릿밖에 가져온 게 없는데…….”

“저라면 괜찮습니다. 그건 프레미네 군이 필요할 때 먹도록 하세요. 리월의 요리는 아마 입에 맞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오후에 교영 마을에 도착하면 되도록 대중적이라고 알려진 음식을 사도록 하지요.”

“네. 아, 그 요리는 궁금해요. 스팀버드 사에서 취재했었던 고기만두.”

“그거라면 확실히 대중적인 요리지요. 저는 현지의 물이 신경 쓰이는군요. 갓 나온 요리가 맛있다고 하듯, 저번 여행의 경험에서는 물도 수원지와 가까운 곳에서 마시는 게 더욱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여전히 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도 여행에서 기대하는 게 있다니 다행이었다. 프레미네는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두근두근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마음속에서도 잘 표현할 수 없었다.

이내 취항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선실 밖으로 나가자 정말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완연한 이국異國의 모습. 리월 사람의 의복 등은 폰타인에서도 드문드문 볼 수 있었지만, 건물의 양식은 바로 옆 나라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낯설고 개성이 있다. 공기의 냄새마저 달랐다. 그러나 프레미네는 그 냄새가 싫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코 느비예트의 손을 꼭 잡으면 긴장하지 말라며 다독여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걸까? 아니면, 그저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저번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건을 사버렸기 때문에…….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리월은 목적지가 아닌 과정이므로, 짐이 되니 물건은 되도록 사지 않도록 합시다. 산다면 폰타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리넷이 좋아할 만한 장신구가 있다면 그런 건 그리 짐이 되지 않으니 사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리월에서 폰타인으로 오는 여성들은 예쁜 꽃 모양 장신구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넷에게 어울릴 장신구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라도 뭔가 살 수 있다면 좋겠는데.

유롱항은 항구이니만큼 이동 수단을 구하기에는 쉬웠다. 동력원은 달랐지만, 마차와 닮은 이동 수단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었다. 유롱항에서 출발해 교영 마을에서 잠시 쉬고 몬드와 이어지는 국경까지 마차를 타기로 했다. 듣기로 몬드는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몬드 내를 여행한다면 도보로도 충분히 오늘 저녁 안에 몬드성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교영 마을에 도착하면, 현지의 차와 함께 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 확실히 느비예트의 말대로 향신료가 강하기는 했지만 육즙이 가득하고 짭짤한 것이, 맛있었다. 양 볼 가득 만두를 우물거리는 프레미네를 보며 느비예트는 만족스러운 듯, 근처 수원지에서 떠왔다는 물을 마셨다. 프레미네가 보기에 리월에 도착한 이후로 느비예트는 표정이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감정을 크게 드러낼 수 없는 최고심판관이라는 위치에 있는 건 아무리 느비예트라도 알게 모르게 부담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비슷해지는 걸까. 바깥이니까,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일을 하기에는 부끄러워서 꼭꼭 참았지만, 프레미네는 느비예트를 끌어안아 주고 싶어졌다. 업무와는 관계없는 땅에 도착해 그가 조금 편안해졌다면 다행이다.

다시 마차를 타고, 느긋한 여로가 시작된다. 창틀 너머로 보이는 높은 산은 계속 봐도 새로웠다. 리월은 바위 신의 영향이 미치기 때문인지 지형이 독특한 모양이다.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가 프레미네는 마음에 들었다. 중간에 츄츄족 무리나 보물 사냥단을 만나는 일도 없이, 마차는 점점 국경에 다가가고 있었다. 마차 바깥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 멀리 자그마하게 보이는 설산 끄트머리를 보라고. 그 유명한 몬드의 드래곤 스파인이라고 한다. 반대편 창틀에 보이는 계단형 농지는 경책 산장의 일부라고 했다. 경책 산장. 프레미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느비예트가 이곳에서 길어오는 물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음.”

느비예트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경책 산장 근처에서 익숙한 폰타인 물의 느낌이 났다. 저쪽 어딘가에 물의 정령이 자리를 잡고 있다더니, 그 탓인가. 고향을 떠난 이는 그 나름의 이유와 고충이 있을 것이다. 자극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렇게 판단하며 신경을 거두었다. 수원지에서 떠나간 물이 비구름이 되어 반드시 원래 장소로 돌아온다는 법은 없었다. 아이가 독립하여 떠나가듯,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점점 설산이 가까워졌다.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주변 온도가 약간 낮게도 느껴졌다. 근처에 저택 하나가 보였고, 주변 원소의 분위기도 명확히 달랐다. 마차가 멈춰 섰다. 국경인 모양이었다.

“내리도록 합시다.”

몬드는 기후가 변덕스러운 면이 있다더니, 다행히 지금 날씨는 온화했다. 마차가 떠나감과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저택과는 반대편에, 흐릿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풍마룡. 느비예트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느비예트 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이 좋아서 다행이군요. 저기 포도밭이 있는 저택을 지나면 몬드성까지는 금방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도록 할까요.”

“네.”

프레미네가 눈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풍마룡에 관한 일은 정말 제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기왕 걷는 길이다. 작은 손을 잡으면 깜짝 놀란 파란 눈이 느비예트를 보았지만, 작게 웃어주자 상기되어서 시선을 피했다. 때때로 그는 그랬다. 놀라서, 붉어지고, 도망가려고 한다. 지금은 손을 꼭 잡고 있으니 도망갈 일도 없었다.

주인 있는 포도밭을 지났다. 포도는 일부 영글어 있고, 일부는 수확된 모양이었다. 와이너리라더니 그에 걸맞은 생산 규모를 지닌 곳이다.

“이곳의 와인이 유명하다더니, 포도의 품질을 보아하니 이유를 알겠군요.”

“땅에서 원소력이 넘쳐나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비옥한 땅에 비옥한 작물. 이 정도로 원소력이 밀집된 땅은 리월에서는 찾기 힘들겠군요.”

그 말대로, 포도밭에는 원소력이 충만한 곳에만 날아다니는 투명한 수정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프레미네는 꽤 장관이라고 느꼈다. 이 풍경을 보관할 수 있는 장치가 문득 생각났다. 물론 그 기계는 원산지인 폰타인에서도 그렇게까지 보급되지는 않았다. 직업 기자나 예술인이 종종 쓰고는 하지만, 일반인이 쓰기에 카메라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물품이다. 프레미네가 넋 놓고 포도밭과 저택의 조화로운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잠시 잡은 손이 떨어지나 했더니 곁에서 느비예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미네 군, 잠시 이쪽을 봐주겠습니까?”

“네?”

찰칵. 부담스러운 분홍 머리 기자를 만날 때마다 들리는 익숙한 소리. 느비예트가 들고 있는 건 마침 생각하고 있던 그 기계였다.

“……엇.”

“갑작스레 미안합니다. 피사체가 딱 좋다고 생각해서. 흠, 원장님께 부탁받았기 때문도 있지만, 개인적인 용도로도 충분하군요.”

“「아버지」께서요?”

“되도록 프레미네 군의 기록을 많이 남겨달라고 하셨습니다. 딱 적당한 물건이 수중에 있어서 지참해 왔지요. 이건 최근에 연구되고 있는 다중필름을 이용한 카메라의 시제품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찍으면 두 장의 필름에 같은 사진이 투영된다고. 느비예트의 말은 그런 것이었다. 프레미네가 방금 찍힌 사진도 두 장이 나타난다면, 하나는 「아버지」에게, 하나는 느비예트에게 전해진다는 것일까.

“……조금 부끄럽네요.”

“필름은 많으니, 프레미네 군도 원하는 걸 찍도록 하세요. 여행자의 조언으로는 되도록 많은 사진을 찍는 게 좋다고 합니다. 풍경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법이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느비예트에게 또 다른 사진기를 건네받았다. 생긴 걸 보아하니 이건 평범한 사진기였다.

“찍어도, 돼요?”

당신을, 이라고는 어째서인지 말을 못 하겠다. 느비예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다시 프레미네의 손을 잡았다. 이러면 말과는 달리 사진을 찍을 수 없다. 하지만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눈으로 느비예트를 가득 담을 수밖에 없었다. 몬드의 풍경은 어딘가 익숙해서, 그렇지만 역시 낯설어서, 그런 곳에서 드물게 들뜬 듯 느비예트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바뀌는 표정을 프레미네는 빠짐없이 기억에 담아두었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프레미네를 보고,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앞을 보고. 투명하고 긴 머리카락이 붉은색에 젖어 바람에 날렸다. 그때야 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몬드성이 코앞이었다.

성 입구에서는 별다른 검문을 받지 않았다. 풍마룡 사태 이후 평화를 찾았다더니, 실제로 그러한 모양이었다. 우선 모험가 길드 앞에 있는, 기념품점에 맡겨놓았다는 방의 열쇠를 받았다. 기념품점 주인은 상세하게 둘이 사용할 집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프레미네에게 길 찾기를 맡기다시피 했지만 피크타임을 맞이해 근처에서 바쁘게 풍겨오는 음식 냄새 덕분에 대강 어디에 방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니 디어 헌터에서 간단한 스테이크와 물을 포장했다. 몬드성은 그렇게 붐비지 않아, 한적했다.

여행자가 수배해 준 방은 적당한 크기에 아늑하고, 거실과 주방이 따로 있는 곳이었다. 짐을 풀고 잠시 소파에 앉아있자, 프레미네는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걸 느꼈다.

“왠지 실감이 안 나요.”

“그렇습니까. 내일이 되면 다를지도 모르지요.”

“으음……. 후후.”

찰칵. 프레미네는 뒤늦게 느비예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프레미네는 이 카메라의 모델명을 알고 있었고, 실내에서도 선명하게 필름에 투영되는 걸 판매 전략으로 삼은 최신 기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분명 몬드 양식의 방도, 느비예트의 모습도 예쁘게 찍혔을 게 틀림없었다.

“즐거워 보여서 다행입니다.”

“……느비예트 님은 배, 안 고프세요?”

“식사 먼저 준비하도록 할까요?”

“저기, 제가……, 제가 할게요. 오늘 너무 고생하시게 한 걸요.”

프레미네는 얼른 일어나 테이블 위에 포장해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느비예트는 고생한 건 없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프레미네의 마음이 불편했다. 항구에서 내내 잠들어 있던 걸 다시 생각하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물론 식사를 준비한다고 해도 음식은 전부 프레미네를 위한 것이고, 느비예트는 물 한 병만을 제 몫으로 삼았지만, 어쨌든.

폰타인에 있을 때는 해산물을 주로 먹었기 때문에, 고기는 약간 낯설었다. 그러한 것도 여행의 일부겠지. 동봉된 나이프와 포크로 작게 썰어 입에 넣은 스테이크는 아직 따뜻하고, 육즙이 그대로 있었다. 피로와 공복이 함께 해서도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굉장히 맛있었다.

“엄청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수원지가 근처라 그런지 물 또한 신선하군요. 입 안에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아주 깨끗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조금 미끌미끌한 느낌이 드는 것 같지만요…….”

“물 안의 광석이 풍부한 모양입니다. 확실히 샘물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하군요. 마침 근처이니, 내일은 그쪽으로 가볼까요?”

“좋아요. ……후아…….”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니 눈이 끔뻑거렸다. 느비예트는 프레미네를 먼저 욕실로 보냈으나, 어떻게 목욕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앉아, 나중에 들어간 느비예트를 기다리며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몸에 힘을 빼면 풀썩 이불 위로 넘어졌다. 노곤했다. 가스등 특유의 희미한 어둠. 공기에서 폰타인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한 번 깜빡, 두 번 깜빡, 눈을 떴다가 감을 때마다 눈꺼풀에 새로이 무게가 더해졌다. 느비예트 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앞으로 일주일이나 더 같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지금 꼭 끌어안고 싶은데. 너무 졸렸다. 결국 프레미네는 눈꺼풀에 지고 말았다.

느비예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고요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프레미네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고개를 숙여 작은 입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가스등의 가스를 적당한 밝기로 조절했다. 프레미네를 제대로 눕혀, 옆에 같이 누워 끌어안으면 작은 몸은 품 안에 꼭 수납되었다. 느비예트는 말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같은 비누의 냄새가 났다. 그 사실이 기분을 상기시켜서, 프레미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하얀 살결은 부드러웠다. 느비예트는 크게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몸을 갖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프레미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어느 틈엔가 창문 너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에 프레미네의 예민한 눈꺼풀이 반응했다.

“……우……. ……느비예트 님……? 안 주무세요……?”

“저는 충분히 잤습니다. 프레미네 군이야말로, 조금 더 자도록 하세요.”

“……네에…….”

마치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던 프레미네의 몸이 옆으로 누워, 느비예트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팔은 자연스럽게 느비예트의 몸 위로 겹쳤다. 느비예트는 눈을 깜빡였다. 혼자 그를 끌어안고 있을 때보다, 더욱 충족감이 든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저 프레미네의 규칙적인 숨소리였다. 손끝에 닿는 프레미네의 감촉이 마치 바다 이슬 꽃과 닮았다. 그것은 일종의 그리움이었다. 물이 담고 있는, 기억. 어째서 그런 것을 지금 떠올린 걸까. 때때로 느비예트는, 이 소년과 있을 때 제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에 대해 불가사의하게 생각하고는 했다. 예상 밖의 사태란 언제나 재미있고, 설레는 법이다. 작은 등을 토닥이며 오늘은 어디에 갈지 천천히 생각했다. 일단 프레미네가 어제 식사를 꽤 마음에 들어 했으니, 아침은 디어 헌터에 가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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