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시, 달의 종장

축적가학미학론

 

 

곧 연극의 클라이맥스였다. 최고조에 달한 갈등은 금방이라도 툭 터져 쏟아질 것만 같았고, 무대 위 한쪽 벽면을 온통 장식한 붉은색 등이 장력張力처럼 절정의 물방울을 감싸고 있었다.

종려는 무대 바로 앞 특등석 탁자에 홀로 앉아 차를 한 모금 목에 흘려 넣었다. 긴장의 최고조를 달리는 무대의 분위기에 압도된 관중석은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 연극의 주제는 암왕제군의 일화를 각색한 것이었으므로 이제 어떤 식으로 극중 긴장을 풀어나갈지 훤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종려는 홀로 태연했다. 이 연극의 흐름은 식상했지만 무대 도구는 전부 훌륭하게 격식을 지킨 것이었으며, 호금胡琴을 연주하는 자의 실력도 뛰어나 반주 음악도 흠잡을 데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짜인 무대는 미의식을 향한 인간의 욕심과 지혜를 보여준다.

각본은 식상할지라도 탐미를 갈망하는 자들의 욕구가 모여 완벽한 형태의 극劇이 완성되는 순간을 그는 좋아했다. 이 자리에 변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상연되는 순간에만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찰나의 미학이 완벽하게 끝맺을 것을 기대하며 종려는 한 모금 마신 찻잔을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긴장감으로 응결되어 있던 객석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흘러나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무대 위에 흰 비단옷을 걸친 여인이 등장하자마자, 살얼음이 깨져 그 아래에 흐르던 물이 배어 나오듯 객석에는 감탄이 넘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여인이 아니었다.

푸른 눈에 흰 피부를 가진 이국의 청년이 여인의 복장을 하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극의 역할에 맞추어 가발을 썼는지, 흰 비단을 타고 흐르던 긴 머리카락이 그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훤칠한 키의 어린 청년에게는 여장도 제법 잘 어울렸다. 놀랄 일이 있을 거라며 초대장을 주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이전에도 술을 마시면서 연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 말을 여기서 실천하여 직접 보여주는 걸 보면 역시 썩 대단한 인간이었다.

 

연인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기쁜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다음에 이어질 장면을 예상한 종려의 심경은 그렇지 못했다. 암왕제군이 천하의 질서를 정립하고 이 땅을 다스리며 여러 마신을 제압하는데──그중 하나가 무대 위에 선 흰옷의 여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간에 인간들은 비극에서 비롯되는 극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을 좋아한다. 인간을 사랑해서 지혜를 베풀던 아름다운 마신을 살해함으로써 극대화되는 카타르시스가, 극의 갈등을 해소하며 대미를 장식하리라는 각본가의 의도는 예상이 갔다.

 

종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은 무대 위로 못 박은 채, 오른손으로 아까 탁자에 내려놓은 찻잔을 매만졌다. 암왕제군 역을 맡은 배우가 창을 든 채 여인에게로 다가갔고 타르탈리아 또한 전투 장면을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두 배우의 일전은 훌륭했다. 타르탈리아는 긴 가발과 무거운 여성용 비단옷을 걸치고도 유려하게 움직였으며 그 모습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교전이 끝나갈 때쯤 빨라진 음악이 긴장을 더하고 붉은 조명은 흰옷에 스며들어 번지는 피를 연상하게 했다. 이제 곧 절정이다.

종려는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찻잔을 천천히 가슴 정도의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항상 흐트러짐이 없던 그의 자세는 평소와 다르게 어느새 삐딱해져 있었다. 한쪽 다리는 꼰 채로 팔은 팔걸이에 걸친, 다소 방탕해 보이는 자세.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암왕제군 역 배우가 창을 높이 들어 올려 타르탈리아에게 찌르려는 순간, 종려는 들어 올린 찻잔에서 주저 없이 손가락을 떼어버렸다.

바닥과 충돌하여 날카롭게 깨지는 도자기 소리에 무대의 시간이 멈추고 극장에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놀라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종업원의 목소리도 무시한 종려가 무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무대 위의 타르탈리아를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노려보았다. 극이 진행될 때와는 다른 질감의 긴장감이 흐르고 소란이 일던 극장 안의 이목이 집중되며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팽팽해진 긴장의 끈을 먼저 당긴 쪽은 종려였다.

“이리 와, 타르탈리아.”

 

무대 아래에서 배우를 올려다보며 팔을 뻗은 자세는 마치 청혼이라도 할 때 써먹을 법할 정도로 낭만적이었지만, 그의 시선과 몸에 두른 분위기는 지극히 날카롭고 묵직한 것이어서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그 시선을 온전하게 받아내야 할 타르탈리아는 가만히 선 채 한동안 침묵했다.

 

“아직 연극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예우를 갖춰줄 때 얌전히 내려오시오.”

 

묵직하고 차가운 금빛 시선을 거스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잠시 후 입을 뗀 그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상식적이었으나, 단칼에 거절한 종려가 이번에는 무대 위로 올라와 타르탈리아의 팔을 세게 잡아끌었다. 거기에 묵묵히 끌려가면서도 타르탈리아는 뒤돌아보며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연기했던 배우들에게 살짝 목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객경의 심기를 거슬렀는지는 남겨진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각본에 고증이 부족했다느니, 귀빈에게 대접한 차를 우리는 법이 잘못되었을 거라느니, 오래된 마신 역에 외국인 청년을 세운 것이 잘못되었다느니. 결과적으로 무대를 엎기까지 하고 「귀공자」를 데려갔으니 마지막 의견에 힘이 실린 꼴이 되었다.

 

 

끌려오다시피 들어온 방 안에서 타르탈리아는 가발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암왕제군을 주제로 한 연극에 여성 역할을 맡을 배우가 필요했고, 극중 장면을 위해 무예에 뛰어난 사람이 적격이라기에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바닥에 처박힌 자신의 평가도 끌어올릴 겸 연인의 탐미적 욕구도 채워줄 수 있는 훌륭한 이벤트였는데, 애초에 맡은 역할이 잘못된 걸까. 그렇다면 극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참아주었다면 좋았을걸. 날이 밝으면 같이 연기했던 그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모든 판을 망쳐놓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처럼, 지금은 등을 돌린 채 창가에 선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대체 왜 이래요?”

 

종려는 대답 대신에 짧게 한숨을 토했다. 창가 옆의 큰 화병에 꽂아둔 꽃 그림자와 그의 윤곽이 벽에 새겨짐으로써 자아낸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이 공간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가 뒤돌아 있어도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 끌어내릴 때 자신을 향했던 고압적인 시선이 떠올라 오싹해졌지만, 정성 들여 준비한 판을 뒤엎었으니 이유는 제대로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버텼다. 오랜 과거의 지인을 모욕했다고 여긴 끝에 한 행동이라면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런 면으로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라 이성으로는 사과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대에게는…….”

 

침묵은 길고도 짧았다. 무겁게 입을 뗀 종려가 간극을 두고 말을 이었다.

 

“그 누구의 칼끝도 닿아서는 안 돼. 그것이 아무리 여흥이라 해도.”

 

이 말을 끝으로 종려는 성큼성큼 다가오는가 싶더니 타르탈리아의 옆을 스쳐 방에서 나가버렸다. 짧은 순간 곁을 지나갈 때 비친 것은 분명한 독점욕이었고, 그는 그저 타르탈리아가 얌전히 누군가의 칼날을 기다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무대 위에 만들어진 판, 한순간의 여흥을 위한 것이라도 타인이 연인에게 손끝이라도 대는 순간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무대 위에서 춤추는 연인의 모습이 치가 떨릴 만큼 싫어서 그만큼 신경질적으로 전부 뒤엎고 자신의 손아래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그에게 유쾌하지 않은 연극이라는 최고의 변수를 안겨준 셈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머리끝까지 흥분이 치밀어 오르고 환희로 가득 찼으며 고양감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넘치는 황홀감에 소리 내어 웃으면서 타르탈리아는 창가로 다가갔다. 종려가 서 있던 자리 옆의 화병에 든 꽃을 전부 뽑아 한 아름 안고 창을 열자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고양감과 행복감이 다시 뇌를 난도질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가벼운 경악이 사금처럼 어렸다.

떨어질 거야.

 

꽤 높은 층에 위치한 방이라 보일지는 알 수 없어도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고, 제대로 전해졌는지 타르탈리아의 입이 다시 닫히기도 전에 종려는 땅을 박차고 달렸다. 타르탈리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팔에 안았던 꽃을 사방으로 뿌리고 곧바로 창틀을 넘어 아래로, 아래로 낙하했다. 곧 멈출 것 같은 시계처럼 세상의 풍경이 흐르는 속도를 늦추었다. 따스해 보이는 주홍빛의 등불, 열어젖힌 창문, 낙하하기 전에 뿌려놓은 꽃이 떠 있는 것을 보니 착실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땅 위에서는 사람들의 비명,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는 여러 발걸음 소리. 시선 위에는 흩날리는 금색 은행잎,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건 푸른 달빛── 마치 땅을 향해 가라앉는 금색의 은행잎을 쫓아 쏟아지려는 것처럼. 그대에게 쏟은 갈등과 애정과 분노와 기쁨, 그 모든 것은 가장 아름다워야 할 이 순간을 위해.

 

세상이 본래 속도를 찾았을 때 타르탈리아는 지상에서 종려의 품에 안긴 채였다. 허공을 춤추던 은행잎도 함께 낙하하던 형형색색의 꽃들도 황금을 쫓아 스스로 떨어지던 달빛도 조용히 두 사람의 위에 내려앉았다. 등불 아래 말없이 끌어안은 두 사람만이 세상에 존재했다.

 

이것이야말로 피날레. 가장 탐미적이고 가장 극적이어서 당신의 기억에 유독 깊은 흠집을 남길 나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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