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일야 정접지몽秋壱夜 晶蝶之夢

유언을 들었어요.

딱히 길게 대화해보지도 않았고, 그래서 친한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유언이었죠.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은 데다 친한지도 모르겠다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그런 사이도 있는 법이에요. 어쩌다가 마지막을 지켜보게 되었는지, 그 사람은 왜 제게 유언을 남겼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하룻밤 사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당신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네요.

몰랐으면 좋겠어요. 말해봤자 당신은 모를 테고요. 말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겠지만, 그저 사실을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건 많이 다르니 당신은 다 알고 있어도 아는 게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죠.

헤아려달라는 뜻이 아니에요. 저는 숨기고 싶거든요. 그러니 알고 있더라도 모른 척해주세요. 그런 거 잘하잖아요?

돌이켜 보면 당신은 그저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말하면, 숨기는 게 많았죠. 시답잖은 이야기가 많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던 것 같네요. 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싫지 않았어요. 평범하게 사람 사귀는 것 같았거든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어요. 만나서 가볍게 대화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달을 올려다보며 당신이 읊는 시를 듣고, 역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술을 마시다 웃음이 흘러나오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게 많으냐, 조용히 들으라는 듯 눈치 주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그때는, 당신도 웃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잔을 채우기 위해 부드럽게 떨어지는 술에서 울리던 간지러운 소리, 달콤한 향기──술 향기가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 달콤했던 향은 당신에게서 났어요. 달빛이 녹아든 술을 목으로 넘길 때마다 스며들던 그 향기는 분명 술에서 나는 거라고, 그렇게 거듭해서 자신을 속여야 당신의 목소리에 똑바로 대답할 수 있었죠.

지금 서로의 입장이 아니라, 아니, 당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몰랐더라면 아주 평범하게, 스쳐 지나가던 이름 모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 여기고 손에 잡히지 않을 듯 모호한 호감만을 가진 채, 그렇게 지내다 헤어졌을 거예요. 임무를 마친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곳에 남은 당신은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 항구를 내려다보겠죠. 군중 속에, 속세 안에 있으면서도 당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어요. 모든 걸 누리면서도 섞이는 것 같지 않은, 동떨어진 사람 같았죠. 그렇게 당신의 곁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처럼 내가 떠나고 혼자 남은 당신은, 나를 기억할까요?

기억할 거예요. 모든 걸 기억한다고 했으니 아주 잠깐 곁을 스쳐 간 저도 기억하겠죠. 그저 아주 잠깐,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간 사람이 있었다고, 그렇게만 기억하겠죠. 스네즈나야로 돌아간 나도 당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기억할 테고, 바쁘게 매일을 보내다 보면 기억은 옅어지기 마련이니 당신의 모습도 나중에는 어렴풋하게만 남을 거예요. 이따금 과거를 회상할 때 바다 건너 아름다운 항구도시에 그런 사람이 있었지, 정도의 추억으로 남겠죠. 아마도, 점차 잊어갈 거예요.

잊고 잊히는 게 당연한 사이는 없어요.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망각해 버리니까, 서로가 특별하지 않다면 그렇게 잊히죠. 제가 당신을 잊고, 당신은 절 기억하고──그러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과 저는 똑같아져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당신을 향하는 게 당연했겠죠. 우러러보고, 존경하고, 믿고, 그리고 사랑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일방적으로 받는 일 말이에요. 사람 사이에서 이런 감정이 생길 땐 보통 상호작용을 바라거든요. 마음을 보낸 상대가 답해주면 기뻐하고, 아니면 실망하죠. 하지만 이런 마음을 신에게 바치는 사람들은 굳이 일대일로 답해주길 기대하지 않아요. 자신들의 일상과 안녕을 지켜주는 신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는 개념으로 생각하니 당연한 일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전 그들과 달리 당신이 대답해주길 바란다는 거예요.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닿기 위해 뻗은 손끝이 주저하며 힘을 잃고 아래를 향할 때 마주 잡아주었으면 좋겠고, 앞서서 걸어가는 뒷모습 사이사이로 흩날리는 낙엽이 당신을 가리는 게 안타까워 바로 옆에서 걷고 싶고, 함께 걸을 때 둘만 고립된 것 같은 세상에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더 부드러운 피부에 닿고 싶다는, 그런 식상한 바람이지만 말해봤자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바치는 찬사와 기도 아래에 묻혀버리겠죠.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말을 입에 담는 저를 특별히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망설임 끝에 어렵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해도 허사가 되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말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그저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 즐겁다고, 거기서 끝났으면 내가 나를 속이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날 북국은행 안으로 들어서서 그 여자와 서 있는 당신을 보자마자 머릿속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애초에 서로 속이고 이용해도 어쩔 수 없는 관계였다는 걸 다시 떠올렸죠. 나 역시 당신을 이용했으니 크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만, 그날 당신은 나를 향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요. 볼일 끝났으니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사랑을 깨닫는 순간은 보편적으로 아름답게 그려지잖아요. 세상의 색이 바뀌고, 그 사람만 빛나 보이고, 마음속은 충만감으로 가득 차고……, 대충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어요. 내게도 언젠가 찾아올 그 순간이 동화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따뜻하고 행복하면 좋겠다고. 여태까지 함께했던 간질거리고 느긋한 시간들이, 어떠한 계기로 인해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을 깨닫는 순간 사랑으로 바뀌는 거라고.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자각한 인간은 보통 고양되니까, 그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겠죠.

그런데 기대와 현실은 다르더군요. 이런 게 업보일까요? 사랑을 할 때 조금은 행복하고 싶다는 게 분에 넘치는 기대였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마음을 자각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 당신은 인간이 아니었고, 함께하던 시간 속에서 가볍게 주고받던 대화와 접촉도 그저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착각에 빠져 결국 놀아난 저를 당신은 조롱하듯 무시하고──이 모든 게 한꺼번에 밀려오니, 아무리 저라도 머릿속이 멈출 수밖에요.

제가 사랑을 깨닫던 순간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처참했어요.

“신병들 확인하고 바로 나갈 거야.”

“네, 전원 대기 중입니다.”

북국은행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외부에 출장을 가야 하지만, 오늘은 신병이 보충되는 날이라 어쩔 수 없었다. 마신 오셀 사건 이후 사람들은 우인단을 한층 더 경계했고, 그에 따라 입국 관리도 삼엄해졌기 때문이다. 우인단 소속이라는 이유로 입국도 못 한 채 발이 묶였다가 일주일 만에 허가가 떨어진 게 어제저녁. 아무리 바쁘더라도 신병들의 얼굴 확인은 해야 했다.

부하와 함께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으며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훑는 사이, 신병들이 대기 중인 방에 도착했다. 총 여덟 명,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목소리와 신체적 특징으로 개인을 구분하는 건 가능하다. 평소 같으면 신병을 고무시키고 기강도 잡는 의미에서 연설 비슷한 걸 했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형식상 확인만 마치고 생략하기로 했다.

“어디로 다녀오십니까?”

“리사교 근처. 오후에는 돌아올 테니까 서류 업무 준비해줘.”

“네.”

신병들을 훑어본 뒤 방을 나서려던 타르탈리아는, 부하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고 지시까지 내린 다음 거의 뛰다시피 북국은행을 나섰다.

계단, 계단, 계단.

전 같으면 훌쩍 뛰어내렸겠지만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은 시기에 경박한 행동을 할 수는 없다. 나선처럼 교차한 붉은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아침 항구의 활기찬 소음이 귀에 들어왔다. 한데 모인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이따금 공기를 찢는 환호성, 박수 치는 소리, 개점을 위해 가게 앞을 비질하는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활기와 생동감으로 가득한 아침이다. 하늘 아래 바닷바람을 머금은 단풍이 하늘거리며 비행하다 붉은 난간 위에 내려앉고, 햇살에 안겨 더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 은행잎이 군데군데 걸린 등을 스치는 선명한 광경.

이 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는 이 극적인 아침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숙소의 창을 연 채 멍하니 내다보며 감상에 젖기도 했다. 오늘 아침 역시 타르탈리아를 그런 감상에 빠뜨릴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 최근, 암왕제군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어 흉흉한 나날을 보낸 탓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일이 바쁘다는 게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를 향해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을 아예 무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계단을 다 내려온 청년이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머금은 항구의 부드러운 공기가 청년의 몸에 닿아, 비말을 흩뿌리며 대기를 장식하는 것 같았다. 거리를 달리는 그의 움직임은 아침의 항구와 어울리게 생기로 가득했으나 그런 그를 보고 밝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타르탈리아를 목격한 사람들은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이야기를 주고받기 바빴다.

돌이 깔린 길을 지나고, 통통 경쾌한 소리가 울리는 나무다리를 건너 흘호암의 만민당으로 향한다. 빠르게 지나치는 타르탈리아에게 ‘박석으로 운세 한 번 보고 가라’라는 호객 멘트가 날아든 걸 보면, 해취항의 주인도 어지간한 장사꾼이다. 마지막으로 세 대포 주점을 지나면서 귀를 스친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만민당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요. 가지고 갈 거예요. 좀 급해요.”

타르탈리아를 본 만민당의 묘 사부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명성재 근처를 지날 때처럼, 감히 암왕제군을 해하려 들었을지도 모르는 천하의 몹쓸 놈 취급은 아니다.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묘 사부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침에 조식을 해결하러 식당에 들르는 일이 드문 건 아닐 텐데, 그는 타르탈리아를 이 시간에 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는 듯 대했다.

“어……, 안 되나요?”

아침도 못 먹고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래도 정당하게 모라를 지불하겠다는 손님이 아닌가. 이 항구 사람들이 거래를 마다할 리 없다. 그러나 오셀 사건 이후로 자신을 향하던 따가운 시선을 떠올리고, 타르탈리아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든 상관없지만 거래에 지장이 생긴다면 이미지 개선을 고려해봐야 하니, 일이 번거로워질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에 혼자 오셨네.”

“하하……, 혼자 오니까 이상해요?”

“아무래도 평소에는 둘이 왔으니까 하는 소리지.”

희한해서, 라는 말과 함께 건네는 모라육을 받아 들고 대금을 지불한 뒤, 이번에는 다리 건너 문 쪽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돌린다.

「평소에는 둘이 왔으니까.」

누구랑 식당을 그렇게 드나들었더라. 이 나라에 와서 그런 식으로 친밀하게 지내던 누군가가 있었던가. 이곳에서 눈에 띄는 외모이니 만민당의 사장이 사람을 잘못 봤을 리도 없는데.

한쪽 손에 든 모라육을 먹는 일조차 잊어버린 채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던 타르탈리아의 귀에 또다시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에도 들은 적 있는 목소리, 그것도 여러 번. 세 대포 주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직 아침이라 텅 빈 탁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지금 시선이 닿는 저 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모습을 자주 본 것 같았다. 미리 도착해 자리 잡고 앉은 그 사람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올리는 데 거부감이 들어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문지르고, 아침 식사를 입속에 욱여넣은 뒤 타르탈리아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사고를 비집고 들어온 기시감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흰 종이에 떨어진 먹 한 방울이 머릿속의 어딘가에 까맣게 구멍을 뚫어 점점 스며드는 것처럼, 기묘하고 갑갑하고 간질간질하기도 한 그 감각이 타르탈리아의 신경을 거쳐 손끝까지 타고 퍼져 갔다. 평소와 똑같다고 자신을 속여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아침이었다.

하루 종일 단단한 땅에 발붙이고 걷는 것 같지 않았다. 매일 보던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느낀 위화감은 발밑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세상에서 타르탈리아만이 불완전한 것 같았다.

해 질 무렵의 계단을 오른다. 오늘 아침, 만민당을 지나고 천형산 방향의 다리를 건너 조금 더 나아가자 평소 그 근방에서 본 적 없는 수정나비가 날아다니는 광경을 보았다. 푸른 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던 두세 마리의 수정나비들은 작게 빛을 흩뿌리며 길 안쪽으로 궤적을 남겼다. 그 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걸음을 늦춘 시선은 홀린 듯 나비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기묘하게도 그 길에 드문드문 늘어선 나무들은 가을의 색에 물들지 않아 푸르렀기에, 하늘하늘 날갯짓하는 수정나비를 쉽게 좇을 수 있었다. 빛의 입자를 따라 길 안쪽을 걷던 타르탈리아에게 또다시 기시감이 엄습했다.

점차 가슴속이 술렁이고, 간질간질한 동요가 전류처럼 혈관을 타고 내려가 손끝이 저릿해지는 감각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나아가기 힘들어졌다. 본능은 이끌렸지만 이성이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마주해서는 안 될 무언가가 그 앞에 있다는 듯이.

──링, 링, 링…….

해 질 녘의 불그스레한 대기가 진동했다. 누군가가 금속을 두드리면서 일어난 파문은 바람을 타고 낙엽에 실려 타르탈리아의 귓속에 날아들었다. 샤오라小锣 소리였다. 북국은행으로 돌아가는 계단 중간에 서서 오른편 아래의 화유다관을 내려다보자, 오늘 밤 공연이라도 있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들은 샤오라 소리는 악단 사람들이 곡을 맞춰보다가 난 것 같았다. 평소에는 이야기꾼 한 명의 강담이라 준비가 조촐한데, 오늘은 여러 명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 유명한 운 선생의 공연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혹시 보러 오려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아는 사람 중에서 운근의 공연을 일부러 찾아 볼 정도의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타르탈리아 역시 어떻게 그녀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명성이 자자한 배우이니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래, 일단 은행에 돌아가서 남은 업무에 몰두하자. 이상한 하루였지만, 밤에 기분전환을 하고 내일 눈뜨면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결국 어젯밤은 일에 치이다 보니 공연을 볼 생각이 싹 가셔,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 잠들었다. 운근의 공연은 매일 같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 분명 훌륭한 연극이었을 터라 아쉬웠지만, 아침부터 느꼈던 생소한 피로감 때문에 지쳐 있었다. 오늘은 심기일전해서 시답잖은 생각은 아예 담지 않기로 했다. 은행으로 가기 전에 만민당에 들러 아침 식사를 사고, 오전에 서류 업무를 해치운 다음 조정이 필요한 채무자의 우선 목록을……, 하루의 업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길을 걷는다. 한데 모인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이따금 공기를 찢는 환호성, 박수 치는 소리, 개점을 위해 가게 앞을 비질하는 소리,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박석으로 운세 한 번 보고 가라는 해취항의 주인. 매일 듣는 활기찬 소음과 자신에게 꽂히는 달갑잖은 시선을 뒤로하고 만민당으로 향한다.

“간단한 걸로요. 오늘은 별로 안 바쁘니까 천천히 주셔도 됩니다.”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왜요, 자꾸 오니까 별로예요?”

“그게 아니라.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에 혼자 오셨네.”

“네?”

“아무래도 평소에는 둘이 왔으니까 하는 소리지.”

“…….”

희한해서, 라는 말과 함께 건네는 모라육을 받아 들고 타르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하도 급하게 받아 가서 기억을 못 하나, 매일 장사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어제도 오지 않았느냐’라며 묘 사부가 잊은 일을 상기시켜주고 싶었지만, 또다시 가슴에서 손끝으로 스멀스멀 타고 흐르는 불안감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오른쪽에서 들리는 이야기꾼의 목소리. 음식을 한 손에 든 채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던 타르탈리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세 대포 주점을 향했다. 오늘 아침도 손님용 탁자는 비어 있었다. 저 자리가 비어 있는 풍경은 자주 보지 못했다. 항상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타르탈리아를 제외하면 완벽한 풍경, 타르탈리아만이 떠올리지 못하는 무언가, 그를 내버려두고 매일 반복되는 항구의 일상 한복판에서 피어오른 이질감은, 다른 누구도 아닌 타르탈리아 내면의 것이었다.

“타르탈리아 님!”

은행에 들어서자마자 다급한 부하의 목소리가 꽂혔다. 오늘 아침은 타르탈리아를 급하게 찾을 정도의 일이 없을 텐데, 돌발 상황이라도 일어났을지 모르니 일단은 들어보기로 하고 다가간다.

“무슨 일인데?”

“아까부터 신병들이 대기 중입니다.”

“……또?”

“입국을 통제당하다가 일주일 만에 들어오는 신병들입니다. 여기 리스트입니다.”

“무슨 소리야? 신병이라면 어제 봤잖아, 여덟 명.”

“여덟 명은 맞습니다만, 어제 들어온 신병은 없었습니다. 여태 입국을 못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보셔야 합니다.”

다급해 보이는 부하를 더 추궁할 수 없어, 타르탈리아는 받아 든 서류를 훑어보며 신병들이 대기 중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전원이 어제와 같은 인물들이었다.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 한동안 서류를 처리하던 타르탈리아는 펜을 내려놓은 뒤, 고개를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지금 책상에 올려진 서류들 전부 어제 처리한 것과 똑같았다. 이미 결재한 서류이니 다른 걸 올려달라고 부하에게 말해보았지만, 그녀는 곤란하다는 듯 오늘 처음 올린 서류라고 대답했다. 매일 보는 부하가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은 오랜만이었기에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제 다 처리한 일 전부가 없었던 게 되다니. 말도 안 된다며 한숨 쉬던 그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소리로 누구인지 알아차린 타르탈리아의 “들어와”라는 허락이 떨어진 후 문을 열고 들어온 부하는 여전히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타르탈리아 님.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오늘 급한 채무 처리 건이.”

“나가야 하는 일인가? 어디?”

급한 건이라면 타르탈리아가 잊을 리 없다. 그 점을 아는 부하이기에 말을 꺼내기까지 조금 망설인 모양이다.

“채무자는 현재 리사교 근방에 있다고 합니다.”

그거 어제 해결했잖아.

타르탈리아는 이 말을 하지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

리사교로 향하는 길목에 날아다니는 수정나비까지 똑같았다. 눈으로 좇을 시간도 없어 이번에는 곧장 목적지로 가야 했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 모른다. 어제 수정나비를 봤을 때 느낀 묘한 감각은 분명히 본능적 경고였으므로,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지나쳤다. 시야 끝에서 사라질 것처럼 번져 가는 수정나비의 빛이,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 내려앉았다. 심장에서부터 퍼지는 이질감 속에서 타르탈리아를 부르듯 작게 소리 내는 것 같았다. 나비에게는 목소리가 없는데도.

출발한 시간이 늦었기에, 채무자와 관련된 일을 대강 처리한 뒤 리월항에 돌아왔을 때는 어제와 달리 거의 해가 떨어져 있었다. 붉게 물들었다가 감색으로 가라앉은 하늘 아래에 등이 켜지고, 거리는 아침과 또 다른 활기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링, 링, 링…….

또 샤오라 소리다. 북국은행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기 직전, 눈앞에 들어온 화유다관에서는 이제 막 연극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미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온 터라 무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발길을 돌리거나 난간에 붙어 내려다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시야에 들어온 감색의 하늘과 그 아래로 펼쳐진 바다를 보니 조금은 정신적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하늘에 걸린 달에서 쏟아진 빛이 바다 위에 맺혀 기다랗게 길을 그렸다. 홀린 듯 빛의 길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곳에는, 초연히 홀로 객석에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객석이 그리 많지 않은 화유다관이 오늘은 운 선생의 공연 덕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구와도 섞이지 않은 채 큰 탁자 하나를 독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소녀 배우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어로 노래하는 소녀가 무엇을 연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객석에 홀로 앉은 남자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어두운 밤하늘 한가운데, 주홍빛 등불이 남자의 눈에 비쳤을 때 그의 눈동자가 어두운 황금색을 띠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째서 그를 잊었을까. 만민당의 주인장이 왜 혼자 왔느냐고 의문을 표한 것도, 세 대포 주점이 텅 비어 보였던 것도, 이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항구도시 여기저기에서 들려 오는 소음을 어느 날부터 의식하게 된 것도 그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있을 때는 이 항구에서 위화감을 느낀 적 없었다. 목소리를 듣고 옆에서 걸으면, 적어도 한 공간에 있으면 속세와 동떨어져 오로지 둘만 색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를 의식하자마자 손끝에 고여 있던 위화감과 불안이 감미롭게 바뀌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심장에서 매초 뿜어져 나오는 피가 달콤한 온기를 온몸에 흩뿌렸다. 높고 가늘게 울려 퍼지는 소녀의 노랫소리가 실처럼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빠른 박자로 두드리는 북소리, 거기에 맞춰 숨 가쁘게 따라오는 샤오라 소리, 진득하게 달라붙는 호금의 선율이 난폭하게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늘의 달빛과 지상의 불빛이 뒤엉키고, 흩날리는 색색의 낙엽이 그 경계선을 더 모호하게 하여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의 모습만이 선명했다.

“……종려 씨…….”

타르탈리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아침 먹으러요.”

“그래?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에 혼자 오셨네.”

“다음엔 같이 올게요.”

“아무래도 평소에는 둘이 왔으니까 희한해서.”

반복되는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모라를 지불하고, 받아 든 모라육을 베어 물으며 걷다가 오른쪽을 곁눈질하자 빈 객석이 눈에 들어온다. 저 자리에는 종려가 앉아 있어야 했다. 타르탈리아에게는 그 풍경이 더 익숙했다.

만민당으로 오기 전, 먼저 북국은행에 들러 신병들을 확인했다. 역시 같은 사람들이었다. 부하가 건네는 말도 거리 사람들의 소란도 똑같았다.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어제와, 그제와 똑같은 풍경 속에서 다른 건 종려뿐이었다. 그를 만나야 한다. 하루를 반복한 덕에 오늘 차례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파악했고, 변수가 있다 해도 예상한 범위 안일 것이다. 전부 해치우고 저녁에는 종려를 만나러 화유다관에 가자. 공연을 감상하는 도중 방해받아 맥이 끊기는 걸 끔찍이도 싫어할 그를 위해,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에.

늦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미 몇 번 봤던 서류라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루가 반복된다는 걸 알았으니 팽개치고 와도 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루를 대충 보내기는 싫었다. 정신없이 해치우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은행을 나서자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다급한 마음에 성큼성큼 걸어 발코니 끄트머리에서 화유다관을 내려다보니 객석에 홀로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종려가 내려다보였다. 바로 내려가면 될 텐데, 굳이 그의 모습을 확인한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공연 중간에 들어가면 언짢아할지 모르는데, 거기에 합석까지 요청할 생각이니까.

종려의 모습을 확인한 타르탈리아가 난간에서 손을 떼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한 번, 두 번 심호흡을 했다. 낮때보다 서늘해진 저녁 공기는, 그래도 가을을 머금어 부드럽게 폐에 들어찼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조바심이 나는 걸까, 예의를 지켜야 할 상황임이 틀림없긴 하지만 타르탈리아에게는 명백히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 종려에게서 그걸 얻어내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그래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드는 누군가가 자신이 된다는 점이 그저 싫었기 때문이다.

공연은 아직 도입부일 테니 조용히 들어가서 목례만 하고 옆에 앉자. 합석에 대한 건, 공연이 끝난 뒤 식사를 권유하며 슬쩍 해명하면 된다. 식사하면서 장황한 그의 이야기라도 실컷 들어주면 아마도 그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타르탈리아는 되도록 소리 나지 않게 계단을 내려가, 화유다관의 주인장에게 입장료를 내고 종려가 앉은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조용히 종려 옆의 의자를 빼는데도 그는 무대에 열중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기척을 느끼고 누구인지 파악했어도 모른 척 시선을 주지 않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을 때 거부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대로 함께 연극을 감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탁자 앞에 놓인 등불의 빛이 얼굴을 비추어, 종려의 옆얼굴에는 깊은 음영이 새겨졌다. 따스한 색의 불빛이 눈동자에 스며들어 곱게 가라앉는다. 밤하늘에 뜬 달과 그 아래 펼쳐진 바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바닷물 표면에 맺혀 찬란하게 빛나던 그 풍경을 떠올렸다. 바닷속에 갇혀 쌓이고 쌓인 달빛의 입자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등불의 빛은 금색의 동공에 갇혀 반딧불이처럼 떠다녔다.

왜 그를 잊었을까, 한순간이라도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면 잊을 리가 없는데. 다시 떠오른 의문이 가슴속에 퍼져 가던 그때, 종려가 고개는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만을 돌려 타르탈리아 쪽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공연 도중에 난입하여 허락 없이 곁에 앉은 행동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을 헤집어 엉망진창으로 뒤섞는 감각에 어지러워질 때쯤 종려는 시선을 다시 무대 쪽으로 돌렸다.

겨우 허락받은 듯한 안도감에 작게 숨을 내쉬고 눈에 담은 무대 위, 그곳에는 인형처럼 춤추고 화미조처럼 노래하는 소녀 배우가 있었다. 소녀는 그야말로 새처럼 무대를 날아다니며 오래전의 언어로 노래했다. 전에 종려 씨와 공연을 보러 갔을 때는 공용어로 번역된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 고어로 연기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가슴속을 울리는 연기였다.

한동안 무대를 지켜보던 타르탈리아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소녀 혼자만 계속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의 기량에 기대어 난이도 높은 연기를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다른 배역은 등장하지 않은 채 한 소녀만이 무대 위에서 춤추었다. 그녀의 노래는 고어라서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타르탈리아는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좁혔다. 옆에서 뜨거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 걸 보면, 다관의 직원이 타르탈리아 몫의 차를 가져다준 것 같았다. 뜨거운 물이 찻잔에 고이는 소리가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왼쪽으로 뛰어간 소녀가 무어라 노래하고, 그다음은 샤오라와 북이 한 번 울리는 소리, 그러면 소녀는 다시 오른쪽으로 뛰어가 받아치듯 다시 노래했다.

무대 위의 한 소녀는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객석에 앉은 그대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종려가 말을 건네 왔다.

“……그러게요. 좀 바빴거든요. 그래도 오늘…….”

“나를 잊은 줄 알았습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당황했지만, 타르탈리아는 자신이 다행히도 처세에 능한 편이라 여겨왔기에 꽤 자연스럽게 받아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곡을 찔려서인지, 머리보다 마음이 앞선 탓에 입 밖으로 나온 건 횡설수설한 말이었다.

“그럴 리가요. 정말 바빴다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왔잖아요.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 시간 괜찮죠? 같이 저녁 어때요? 종려 씨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요.”

종려는 대답이 없었다. 타르탈리아를 조용히 응시하던 그가 한쪽 손을 들자 사람이 다가와 빈 잔에 차를 채웠다. 뜨거운 물이 흘러서 찻잔에 고이는 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아까도 들었던 그 소리가 유독 강렬하게 귓가에 울렸다. 종려와 함께 있어서일까, 그와 있을 때는 항상 차를 마셨던 것 같다. 차를 따르는 소리 같은 건 수도 없이 들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거북하게 의식에 달라붙는지 알 수 없었다.

대답 없는 종려와의 어색한 분위기도 피할 겸 신경을 돌리려고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공연을 끝낸 배우에게 한창 환호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커튼콜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온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꽃처럼 돋보였다.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흰색……, 형형색색의 꽃잎 세례가 쏟아지는 가운데 금색 꽃가루가 섞여 하늘하늘 떨어졌다. 쉴 틈 없이 흩뿌려지는 꽃잎들, 떠들썩한 박수 소리, 환호성이 쏟아지는 무대 한가운데에 선 소녀는 객석 쪽으로 고개를 돌려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무대와 객석은 아예 동떨어진 세계 같았다. 무대 저편의 하늘과 바다처럼. 강렬한 색채가 시각을 온통 지배하여 무대와 객석을 채운 사람들의 동작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달빛을 받을 때 바다가 잔잔한 이유도 그래서일까, 빛나는 무대 위에서 발하는 빛과 화려한 색채 전부가 객석 뒤편의 타르탈리아에게로 쏟아졌다. 객석을 둘러보던 소녀의 움직임이 멈춘 곳, 타르탈리아의 시선 끝에 머무른 붉은 눈동자는 등불이 스며들어 열기를 머금은 금빛으로 비쳤다. 무대와 객석을 나누듯 공중에 수놓아진 꽃잎들 사이로 금색의 꽃가루가 한 장 떨어져 내렸다.

대기를 가볍게 나는 듯이 하늘하늘 춤추는 그것은 마치 수정나비 같았다.

또다시 느껴지는 거부감에 손끝이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 타르탈리아는 그제야 자신이 호흡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거부감 때문에 가슴속이 울렁거리는데도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숨을 몰아쉬느라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점차 흐려졌다. 옆에서 차 따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 나는 그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여기에 왔는데.

──누구에게?

사고가 정지했다. 기억하길 거부하고 있다. 무겁게 떨어지는 액체 소리가 머릿속을 온통 잠식했다. 들은 적 있다. 어둑어둑한 공간, 높은 천장 위에서 일렁이는 바다가 흘려보내는 달빛만이 하늘의 전부였던, 공허하고 화려하고 은밀했던, 그 고독한 곳. 무겁게 흐르는 액체는 그곳에서 녹인 황금을 아래로, 아래로 흘려보낼 때 나는 끈적한 소리와 비슷했다. 리사교로 가는 길 왼편에 작게 새겨진 샛길 저편, 그곳에 있을 리 없는 수정나비가 날아가 사라졌을 그곳.

황금옥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반복되는 하루를 확인이라도 하듯 만민당에 들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습관처럼 들르는 쪽은 타르탈리아뿐, 항구를 둘러싼 가을 풍경과 그 안의 사람들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인데도. 타르탈리아만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고 기억하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새로웠다. 차라리 그들처럼 잊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아니다. 망각에 의지해서 현실을 잊고 속 편하게 사느니, 현실을 깨닫고 타개책을 찾아볼 수 있는 쪽이 낫다. 정작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장 황금옥으로 향하지 않고, 북국은행에서 신병 파악까지 마친 뒤 평소보다 미적거리다가 만민당에 온 참이지만.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딱히 말을 걸지 않아도 듣는 말은 항상 똑같았다. 곧 꺼림칙한 곳으로 향해야 하기에 대답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웬일로 이 시간에 혼자 오셨네.”

“바쁘니까 간단한……. 아니, 역시 됐어요.”

그리고 타르탈리아는 덧붙였다.

“나중에 다시 오죠. ……혼자 식사하니 재미없더라고요.”

“아무래도 평소에는 둘이 왔으니까…….”

묘 사부가 말을 끝내기 전에 발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세 대포 주점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꾼의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로 멀어져 갔다. 비록 반복되는 아침이라도 활기로 가득한 항구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은 타르탈리아뿐이었다. 벌써 모호해진 기억을 더듬어 어제였던 오늘을 떠올린다. 달빛과 낙엽과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무대, 그 가운데 선 아름다운 소녀, 소녀의 붉은 눈동자를 가로질러 나비처럼 떨어지던 꽃가루, 그에 맞춰 유독 무겁게 흐르던 차 따르는 소리. 타르탈리아가 호흡도 잊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동안, 그는 찻잔을 들어 안에 담긴 차를 평소처럼 목 안으로 넘겨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저 무심하게, 무대를 관망하면서. 무정한 눈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아도 고개 돌려 그를 보고 싶었으나, 가로막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잊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 없던 일로 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처음 이 항구에 내려섰을 때, 따스한 바닷바람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을의 절정에 머무른 풍경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긴 했어도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의 곁에 있을 때만 멈추는 시간 속에서 만끽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하늘과 바다를 등지고 홀로 그림처럼 앉아 있던 남자, 그자야말로 타르탈리아를 잠식한 모든 상실감의 주인이다.

여기에 이렇게, 아무도 없었던가?

길목에 날아다니던 수정나비를 따라 걸어오니 어느덧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자리한, 화려한 건물 앞이었다. 황금옥에 오는 건 그날 이후 처음이다. 굳이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볼일이 끝나기도 했고,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고 싶어 했다 쳐도 삼엄한 경비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때는 문 앞을 지키고 선 병사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들어갔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기에 주위를 둘러보며 느릿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다가오는 이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중후하고 화려한 건물 안쪽으로 나비는 사라졌다.

끼이이익, 둔중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깊이 가라앉았을 때 타르탈리아는 아래로 추락했다.

“왜 이제 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황금옥 지하에는 타르탈리아가 있었다. 선조의 허물이 보관되었던 제단, 그곳에 앉아 있던 청년이 훌쩍 뛰어내리더니 산뜻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둑어둑한 황금옥 깊은 곳에서 걸어 나오는 인영과 함께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잊은 줄 알았습니다」……라.”

흠칫 소름이 돋았다. 어제 화유다관에서 들은 말이다. 왜 같은 말을 하지, 어떻게 알고 있지, 타르탈리아라서? 타르탈리아는 나인데, 그럴 리가 없는데, 같은 목소리와 눈동자를 가진 「타르탈리아」는 미소를 띤 채 다가와 타르탈리아의 눈앞에 멈춰 섰다.

“너 때문에 삐쳤잖아. 어떻게 할 거야?”

대체 누가. 그가? 「타르탈리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타르탈리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정말로 화가 나서 기분이 저 밑바닥에 처박혔을 때다. 황금옥 안에 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존재하는지, 왜 화가 나 있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

멱살을 잡힌 상태로 주먹이 날아오는 것도 몰랐다. 눈앞이 암전될 정도로 세게 얻어맞았다. 공격당하자 본능이 움직여, 멱살을 쥔 「타르탈리아」의 팔을 붙잡고 떼어내려 했다. 순순히 떨어지지 않으면 발로 찰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타르탈리아」는 쉽게 손을 놓았다.

“기분 풀어주려면 돈 많이 든단 말이야. 넌 나한테 다 떠넘겼으니 모르겠지만.”

“떠넘겨?”

“그래.”

“대체 뭘.”

“…….”

「타르탈리아」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터진 입안에서 배어난 피의 비릿한 맛이 불안처럼 스멀스멀 퍼져 갔다.

“이봐, 타르탈리아.”

대답 대신 똑바로 서서 「타르탈리아」를 쏘아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지은 얼굴로 타르탈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움직임에 맞추어 부드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뒤의 푸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타르탈리아」가 말을 이었다.

“사랑을 하려면 많은 게 필요하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사회적 지위도 고려해야 하고, 상대와의 상성도 있고, 성격 차이나 나이 차, 다른 수많은 조건들을 따져 봐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해야 해피엔드가 될 수 있지. 때로는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하고, 배려도 할 줄 알아야 해. 마음을 숨기거나 속일 수도 있어야지. 생각해 보니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하려면 정말 복잡하겠더라고. 하지만,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한 채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다 따질 필요가 있어. 그런데…….”

「타르탈리아」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다시는 오기 싫던 꺼림칙한 곳에 일부러 와서 들어야 할 말치고는 사족이 길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꿈이라 치부하고 돌아가서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 하나도 없이, 그저 사랑하는 감정만 남으면 어떨 것 같아?”

「타르탈리아」가 순식간에 만들어내어 휘두른 수형검을 반사적으로 막아내었다. 타르탈리아의 몸이 반동으로 흔들리는 그 짧은 사이, 「타르탈리아」는 다시 뒤로 훌쩍 물러났다. 검을 받아내면서 확신했다. 눈앞의 「타르탈리아」 역시 틀림없는 타르탈리아 본인이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신과 싸워야 한다. 전투를 위해 숨을 깊게 내쉬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대답 안 할 거야?”

“…….”

“물어봤잖아, 그럼 대답 정도는 해야지. 나한테 다 떠넘길 때 기본적인 사교성도 갖다 버렸나?”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먼저 대답해.”

“──네가 잃어버린 건 다 내가 가지고 있어.”

하루를 반복하면서 느꼈던 상실감을 떠올렸다.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서 불안정하고 초조한 감각. 「타르탈리아」는 자기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밖에 없다는 뜻이지. 네가 다른 건 다 빼고 그것만 넘겼으니까 당연한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 기울이는 사이, 「타르탈리아」는 손에 든 수형검을 빙글빙글 돌리는 여유까지 보이며 물었다.

“네 차례. 그래서, 어떨 것 같은데?”

검이 엄습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격렬하게 검이 맞부딪치고, 둘의 주위에는 물보라가 몰아쳤다.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물이 붉은 등불을 머금고서 황금옥의 어둑어둑한 대기를 장식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알고 싶지도 않아!”

“비겁하긴. 그래서 지금 너나 나나 이 꼴인 거야.”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타르탈리아」의 공격을 받아내기가 버거웠다. 실력도 완력도 완전히 대등한 상대와의 싸움은 분명히 즐겁고 흥분되어야 하는데, 「타르탈리아」의 검은 그의 웃는 얼굴과 달리 처절하고 무거웠다.

“역시 내가 나가야겠어. 널 죽이고 내가 다 받아 갈게.”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걱정 마. 난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훨씬 더 꼴사납고 절망적인 기분이 뭔지 알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너와 달리.”

「타르탈리아」의 눈이 휘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속눈썹에 가려 화사하게 휘어지는 눈꺼풀 안쪽의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웃는구나. 문득 타르탈리아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웃어본 지도 오래되었다. 언제부터 잘 웃지 않게 되었을까, 원래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금 더 자주 웃고, 여유롭고, 그래서 원인 모를 감정에 휘둘리며 초조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격렬하게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 사이사이로 가라앉는 건 묵직한 액체가 뒤편에서 흐르는 소리였다. 뜨겁게 녹여 열기를 품은 황금이 느릿하게 흘러서 고이는 소리. 그때 옆에 있던 그의 찻잔을 채우던 향기로운 찻물처럼. 황금에서 향기가 날 리 없다. 이건 「타르탈리아」의 참격으로 물보라가 흩뿌려질 때마다 나는 잔향이다.

「네가 잃어버린 건 다 내가 가지고 있어.」

찬란한 황금으로 빛나는 어둡고 고독한 공간, 그 공허한 대기에 섞여들어 잊고 있던 감각을 자극하는 향기. 그건 타르탈리아가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였다.

검을 받아내기만 하던 타르탈리아가 반격을 시도했다. 속도를 붙여 밀어붙이는데도 「타르탈리아」는 여유롭게 받아 흘리며 빈틈을 찔러 왔다. 대기에 흩뿌려져 신경을 자극하는 향기는 그립고 달콤한 것이어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박차를 가했다. 되찾으려면 나 자신과 싸워야 하고,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

“이제야 좀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래, 덕분에!”

“안됐지만 넌 나를 못 이겨.”

“시끄러워. 어떻게 확신하지?”

“너에게는 ‘맹목’이 없으니까.”

한순간 말려들었다. 방심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타르탈리아」가 칼등으로 왼쪽 손목을 거세게 내리쳤다.

“윽……!”

다음 순간, 배를 걷어차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예상외로 통증이 무거웠다. 웬만한 고통은 견딜 수 있다고 여겨왔는데, 역시 본인이라 어떻게 공격해야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자, 수형검을 쥐고 천천히 걸어오는 「타르탈리아」가 시야에 들어왔다. 허점을 파고들었을 때 베었어야 했다. 칼등으로 내려치기만 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안 베었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인데?”

“…….”

“지금의 넌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분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상처 나는 걸 싫어하거든.”

“그게……, 무슨.”

궤변인가. 전사에게 흉터는 훈장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다. 「타르탈리아」가 떠맡은 것이 뭔지는 몰라도 전투에서 얻은 상처를 싫어하는 건 자신이라고 할 수 없다.

“너나 나 말고, 종려 씨가.”

「타르탈리아」의 입에서 나온 건 그날 화유다관 옆의 계단을 오르면서 그의 눈을 봤을 때, 악기 소리가 어지럽게 귀를 두드리고 하늘과 바다가 뒤섞이던 그때 소리 내어 불렀던 이름이었다.

“성가신 완벽주의자라서 흠집이 나면 싫어해.”

「타르탈리아」는 그야말로 행복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 자신은 모른다. 조금 전까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저건 ‘맹목’이다. 단 하나만을 바라고 좇는 자의 절실한 마음이다. 「타르탈리아」는 자신에게 ‘맹목’이 없다고 말했다. 원래는 타르탈리아의 것이었을 텐데.

「사랑을 하려면 많은 게 필요하잖아.」

「그저 사랑하는 감정만 남으면 어떨 것 같아?」

비참하겠지. 다른 데로 신경을 돌릴 수도 없으니 오로지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혀, 잠식당한 끝에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이 고독한 황금옥 깊숙한 곳에 남겨진 그의 흔적이라고는 벽을 타고 흐르는 황금뿐. 바다가 삼킨 달빛을 토해내는 것처럼 빛이 쏟아져도 홀로 갇힌 이 고독한 공간에서 미쳐버릴 것 같았겠지. 그날, 처참한 형태로 연심을 깨달은 날 타르탈리아는 종려와 엮인 모든 것을 「타르탈리아」에게 떠넘기고 황금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 결여되어 있었다. 가장 아름답고 추하고, 환희로 가득하면서도 비극적인 모든 것을 바닷속 깊숙한 곳에 떨어뜨린 대가는 상실이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생동감 넘치는 것을 잃고 불완전해진 타르탈리아에게, 종려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매일을 되돌리면서 타르탈리아가 올바른 방법으로 완전성을 되찾기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원래 그런 존재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타르탈리아」가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창에 꿰뚫리면, 타르탈리아는 죽고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은 「타르탈리아」가 리월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고독한 공간에서 벗어나, 종려가 기다리는 가을의 한복판으로. 머리 위에서 넘실거리는 바다가 달빛을 쏟아내어도, 평생 눈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황금이 호화롭게 흘러내려도 이 황금옥 지하는 시간이 멈춘, 그야말로 얼어붙은 공간이다. 이런 곳에 자신을 가두어놓고 태평하게 지내려 했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타르탈리아의 오른손 주위에 물방울이 맺혔다. 한 손은 아까 공격당했기에 양쪽을 쓸 수는 없다. 불리한 상황이지만, 끝내야 한다.

창이 가슴을 꿰뚫기 바로 직전, 타르탈리아는 「타르탈리아」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물빛의 수정나비가 무수하게 흩어졌다. 금빛을 머금어 금색으로 보였던 수정나비는 물처럼 투명한 날개를 살랑이며 저 위의 빛이 쏟아지는 바다로 날아갔다. 시간이 멈춘 황금옥의 얼어붙은 대기를 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나비들의 날개가 깨져 타르탈리아의 머리 위와 어깨 위에 쏟아지고, 「타르탈리아」를 꿰뚫었던 검이 작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투명하게 터졌다.

“이제 만날 수 있겠네.”

아직도 오른팔을 뻗은 채 숨을 몰아쉬는 타르탈리아에게 다정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타르탈리아」의 몸은 점차 빛의 나비로 변하여 바다 위를 향해 날아올랐다가, 다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타르탈리아.”

대답할 수 없었다. 빛의 입자로 깨져 몸 위에 내려앉은 나비는 그대로 몸에 스며들어, 기억 속의 제자리를 찾아갔다.

“종려 씨는 다 아는 듯 잘난 척하면서, 사실 아무것도 모르잖아.”

나비는 타르탈리아가 한 번 버리려 했던 기억이자 영혼의 한 조각이었다. 잃었던 기억이 몰려드는 데 압도되어, 그저 사라져가는 「타르탈리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투과하여 내리쬐는 빛에 감싸인 그를 잡으려 손을 뻗는다.

“그러니 사랑해줘.”

너는 인간이니까.

「타르탈리아」의 죽음은 슬프지 않았다. 한 번 버리려 했던 영혼의 조각을 되찾았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타르탈리아」에게 떠넘겼던 것들이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바람에,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타르탈리아」는 사라지기 전에 종려를 사랑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날을 기억한다. 가장 절망적인 형태로 깨달아버린 연심은 그저 괴롭기만 했다. 종려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아마 영원히 모르는 채일 것이다. 이렇게 질식할 정도로 무겁고, 쓰디쓸 만큼 달콤한 것이 사랑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상으로 통하는 황금옥의 둔중한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서서 기다리던 종려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새벽을 맞아 유리색으로 만개한 하늘을 등진 그가, 이번에는 똑바로 타르탈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극도의 피로감에 젖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하늘의 한가운데에 선 그에게로 다가간다. 빛을 등지고 선 종려의 얼굴에는 음영이 드리워져, 금색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두워 보였다. 그 동공 안에 맺힌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종려의 눈이 좁혀졌다. 그는 웃는 것 같았다.

동이 트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짧고도 길었던 꿈의 끝, 해가 뜨는 하늘에 안기듯 타르탈리아는 종려의 품속에 무너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힘없이 늘어져 종려의 등에 업힌 채였다. 다시 눈을 감고 목에 감은 팔에 힘을 넣고, 그의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가 걸으면서 느껴지는 반동과 함께 묵직하고 달콤한 향기가 기분 좋게 퍼졌다. 술에서 나는 향이라고, 차의 향이라고 치부하며 잊으려 했던 향기는 종려의 것이었다. 고요한 새벽 아침, 그의 등에 업혀서 온기를 느끼는 이 순간이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고 생각할 때쯤 피식 웃음이 터졌다. 타르탈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름대로의 배려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종려는 황금옥에서 리월항까지의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등 뒤에서 웃는 기척을 느낀 종려가 한 번, 타르탈리아를 받친 팔에 반동을 넣었다. 종려의 목을 더 깊이 끌어안고 고개를 들어 귓가에 대고 말한다.

“유언을 들었어요.”

종려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걸음이 아주 약간 느려졌을 뿐이었다. 그에게 쏟아내고 싶은 말을 다 삼키고 장난치는 것처럼 묻는다.

“안 궁금해요?”

“타르탈리아 씨가 말하고 싶다면 들을 것이고……,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됩니다.”

“그렇게 대답하실 줄 알았어요.”

“굳이 내게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나와 관련 있는 내용이겠지.”

“역시 궁금하죠?”

종려가 말할 때마다 밀착된 몸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이 기분 좋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나중에…….”

“…….”

“종려 씨.”

“오늘은 말이 많군요.”

“그러지 말고요. 저랑 계약 하나 해요.”

“무슨?”

“제가 필요로 할 때, 단 한 번만 거짓말해주세요.”

이번에는 종려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어려운 계약이군요. 대가는?”

“종려 씨가 원하는 건 뭐든지. 아, 제가 드릴 수 있는 걸로요.”

“설 수 있겠소?”

어느새 흘호암의 단풍나무가 보이는 언덕까지 와 있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바닷바람과 몸을 부축해주는 종려의 손에 의지하여 타르탈리아는 땅 위에 내려섰다.

“계약은 눈을 보고 해야 하는 법입니다.”

눈앞에 선 종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타르탈리아는 자신도 역시 그의 앞에서 밝게 웃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평소처럼, 무정했던 그를 보고 연심을 깨닫기 전처럼 다시 한자리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타르탈리아의 유언에 따라서.

“저녁에 만나서 계약서 쓸까요? 유리정에서 식사하고……, 오랜만에 술도 한잔해요.”

“좋습니다.”

질식할 정도로 무거운 건 결국 인간의 마음이다.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워 숨이 막혀올 때 신이 선사하는 감미가 쓰게 느껴지더라도, 그건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채 영원처럼 살아갈 그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 견뎌야 할 일이다.

꿈에서 벗어난 타르탈리아가 종려의 곁에서 맞이한 아침은 유독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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