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연추색戀戀秋色
축적가학미학론
종려의 시선은 눈앞에 내밀어진 어두운 색의 나무 상자에 고정되었다. 상자 표면에는 경첩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었지만,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이따금 칠흑색 위에 금빛을 흩뿌렸다. 이 상자를 눈앞에 내민 장본인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흥미롭다는 듯 종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직접 상자를 열어보기를 원하는 시선에 응하기로 마음먹은 그가 오른손을 뻗어 경첩을 살짝 잡아당겼다.
찰캉, 하고 맞물린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상자와 같은 칠흑색의 피리가 들어 있었다. 한 척 반 정도 될 법한 그 피리는 불투명한 광택을 발하며 상자에 온전히, 아주 소중한 물건이라는 듯 담겨 있었다. 상부와 하부에는 음각으로 옛 시를 새겨놓았는데, 만든 이는 외형의 화려함을 절제하려 했는지 다른 가공은 일절 없었다. 장식을 위해 아랫부분에 묶어둔 술 장식 역시 검은색이었으며, 그 술 장식 중간에 매달린 호박석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부분이었다.
종려는 그 피리를 정중히 들어 천천히 살펴보았다. 금색의 눈동자와 햇빛을 반사한 호박석이 어우러져 어두운 목조건물 실내를 고즈넉하게 장식했다. 어디서 났는지, 이 물건의 유래가 무엇인지 묻는 듯한 시선에 타르탈리아는 여전히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하러 갔다가 받아 왔어요.”
지난밤에 그가 채무자를 쫓았다는 사실은 이미 아는 바였다.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매일 밤의 약속을, 어젯밤에는 드물게도 지킬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구두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건만, 이 젊은 청년은 연인의 오랜 버릇을 배려해서인지 거듭 사과해왔다. 후일 반드시 보상해 주겠다는, 계약과도 비슷한 약속도 함께.
그리고 오늘 종려가 업무상 북국은행의 개인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선물로 눈앞의 이 피리를 내민 것이었다.
타르탈리아는 덧붙였다.
“굉장히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기에 도대체 뭔가 했는데 피리더라고요. 빚은 다 회수했지만, 추가 수당이라고 해두죠.”
종려 씨는 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라고 이어지는 목소리가 낮게 깔리고 얼핏 홍조를 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의 발밑을 맴돌았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아직 어렸고 종려는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아주 능숙했다. 타르탈리아의 유독 흰 피부는 그의 감정이 고양될 때 떠오르는 희미한 홍조도 숨기지 못하는 데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귀까지 붉게 물든 상태였다. 고개를 들도록 지시하면 분명히 연심으로 가득한 어린 눈동자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새하얗고 창백한 눈밭에 떨어진 피가 점점 퍼져나가 생명력이 어리듯이, 잘 벼린 칼날처럼 섬세한 청년의 내면에 한 방울씩 자신의 피를 떨어뜨릴 때마다 종려는 전에 없던 희열을 맛보았다.
악기는 오랜만이지만 타르탈리아의 짐작대로 연주할 수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청년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어도 자신의 취향대로 그를 다소 강압적으로 대해왔을 뿐, 시를 읊는다거나 악기를 연주해주는 것처럼 낭만적인 선물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워 짓눌릴 것만 같은 감정을 쏟아붓느라 쓴맛밖에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어린 연인은 이 관계에서 제대로 종려의 달콤한 부분을 찾아내어 요구하는 중이었다. 우인단의 일이란 사람을 해치는 것이었을 텐데, 그런 자리에서도 착실히 연인을 떠올렸다는 점이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밤에는 눈도 못 붙였겠군요.”
그래도 오늘 밤에는 시간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다급히 외치는 타르탈리아를 뒤로하고, 종려는 한 손에 든 피리를 든 채 집무실 한구석에 놓인 간이 침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쪽 끝에 걸터앉아 무릎을 한 번, 툭 두드리며 눈빛으로 이리 오라는 듯 채근했다.
타르탈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종려의 의도에 따라 천천히 다가오더니 옆에 앉았다. 여태 이런 식으로 대해준 적이 없어서인지 앉은 자세 그대로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타르탈리아의 얼굴이 새삼 앳되어서, 종려는 내심 쓴웃음을 삼켰다.
“누워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동그래진 푸른색 눈을 보니 실없는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어르고 부드럽게 대해 주었더라면 즐거운 순간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매우 섬세하고 인간적이므로 오랫동안 신위神位에서 살아온 종려에게도 분명히 긍정적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었다. 그 증거로, 종려는 기특한 자신의 연인을 위해 유례없던 포상을 주려 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 대가도 없이.
말없이 눈매를 가늘게 좁혀 눈웃음만으로 그를 채근하자, 타르탈리아는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머뭇머뭇 자세를 낮추었다. 이 상황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릎에다 온전히 무게를 싣지 못하는 타르탈리아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편하게, 위를 보고 누워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며 타르탈리아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방 안에 떠다니던 금색 입자가 눈동자에 반사되어, 평소 바다색으로 보이던 눈에 금빛이 어렸다. 연인의 몸이 자신의 땅에서 내린 무언가를 품어 본래 색을 바꾸는, 이런 순간이 종려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건 그대가 얻은 대가이니 내가 받을 수 없소.”
“왜요? 전 쓸 줄도 모르는데.”
곧바로 항의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원래 선물이란 받는 사람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법인데, 거절당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흉흉했을 채무 처리의 현장에서 자신을 생각해준 마음은 매우 기특하지만, 이 물건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이 검은색 피리는 타르탈리아가 대가로 취한 물건이며, 그와 이질적이기 때문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대신 그대를 만나러 올 때마다 연주해 드리지요. 이러면 만족하겠습니까?”
대답을 듣고 안심했는지 작게 소리 내어 웃는 타르탈리아를 내려다보면서, 종려는 피리를 기울여서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방 안에 낮게 깔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곡조는 아주 오래전의 것이라 지금은 아는 이가 없는 노래였다. 오래된 신의 연주는 지금 이 순간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고, 피리 소리는 인간의 귀에 스며들어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애정과, 선망과, 경이와, 다른 온갖 감정이 뒤섞인 시선으로 종려를 올려다보던 타르탈리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혀감에 따라 심장의 고동도 느릿해졌다.
연주를 마쳤을 때 자신의 무릎 위에서 고르게 숨 쉬는 연인을 내려다보며, 종려는 한쪽 손으로 조심스럽게 타르탈리아의 눈을 덮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지금 이 시간만큼은 그의 휴식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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