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유리유리流離琉璃羐里

축적가학미학론

눈꺼풀 안으로 비쳐 들어오는 이른 아침의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도 당장 눈뜨고 싶지 않은 날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법이다.

오늘은 유독 그랬다. 자는 사이 체온이 내려간 피부에 내려앉는 햇빛이 바닷속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을 안겨주었다. 밖에서 은은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이 밀려들어서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물보라 소리가 자장가처럼 다정하게 쏟아졌다. 평온한 아침이다. 세상의 모든 축복을 다 모아다가 햇빛에 지긋이 녹여서 붓는 달콤한 아침이, 이곳에는 매일같이 찾아왔다.

얕은 잠에서 깬 듯 덜 깬 듯 몽롱한 의식 속에 잠겨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햇빛의 온기를 녹여서 따뜻해진 바닷물 속에 가라앉았던 의식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대로 지상에 떠오르기를 거부하여 물속에 머물면 그대로 잔잔한 죽음이 될 것 같았다. 죽음이라. 나는 매일같이 이렇게 죽음에 잠겨 있었구나, 죽음을 밑바닥에 남겨두고 떠올라 비로소 눈을 떴을 때 망막에 맺히는 백색의 빛이야말로 오늘도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바닷속은 피안彼岸의 세계이다. 깨달음을 모르거나 혹은 거부하는 여느 인간들처럼, 당장 눈앞을 밝혀줄 빛을 갈구하며 차안此岸으로 떠오른다. 속세가 아무리 괴로워도 인간은 가라앉기를 거부하기에 그 틀을 벗어난 존재가 될 수 없어, 떠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매일을 반복하다가 끝내 가라앉는다. 현명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순간은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며 극적이어야 한다. 이 인생에서 죽음은 단 한 번, 특별한 그때에는 아침에 쏟아진 백색을 머금고 황혼의 금빛을 몸에 두르고, 짙게 깔린 감색의 밤하늘 아래 검은 바닷속에 추락하는 달처럼 우아하고 고결해야 한다.

결국 이번에도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러나 밤에 피는 유리백합처럼 하루를 인고한 끝에 만개하여 떨어져내리는 곳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서 있는 땅끝 저 아득한 곳이야말로 윤회의 경계선이다.

“두 배가 안 된다면 세 배를 낼게요.”

“말씀드린 대로 선생님께서는 선약이…….”

“저는 더 급하다고요. 대체 무슨 약속이기에 돈을 더 낸다고 해도 안 된다는 거죠? 위약금까지 내겠다니까요.”

“선생님께 의뢰를 맡기기 위해 날짜에 맞춰 입항하신 분입니다. 이미 몇 달 전에 계약이 되어 있어서……. 부디 다른 날을 잡아주세요.”

“안 돼요. 그럼 다섯 배.”

“…….”

오전의 왕생당에서 가벼운 언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계약을 중시하는 이 나라에서 돈을 더 얹어줄 테니 이쪽을 우선시해달라, 이런 억지를 부려봤자 잘 먹히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 때문에 평소처럼 합당한 이유를 들며 조리 있게 협상할 수 없었다. 오늘 일정을 전부 팽개치고 왕생당으로 달려왔다. 금 같은 시간을 전부 써가며 이곳으로 온 목적을 반드시 이루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시지요.”

언쟁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뒤덮듯이 낮게 울리는 음성을 좇아 뒤돌아보니, 무미건조한 표정의 키 큰 남자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종려 씨.”

“「타르탈리아」와의 계약이 우선이오. 후처리를 부탁하네. 당주에게도 그리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뒤로하고 종려는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청구는 북국은행 앞으로. 그럼 저도 이만.”

무슨 바람이 불어 웃돈을 내고 우선권을 사겠다는 억지에 어울리는지, 종려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으나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타르탈리아는 종려를 뒤쫓아 문밖을 나섰다. 그는 타르탈리아가 왜 이 시간에 굳이 찾아와서 억지를 부렸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며 무거운 문을 열고 종려가 걷는 길을 따라간다. 저편에서 오전의 빛을 한껏 머금은 바다의 수면이 생명력에 넘쳐 일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았으면서 결국 오는 곳이 여기라니요.”

“하하……, 제 맘이에요. 여기가 좋아요.”

“무슨 용건이실까.”

타르탈리아가 묵는 백마여관의 방 안을 천천히 걷다가 의자에 앉으려는 종려를 황급히 제지했다. 마주 보고 허리를 와락 끌어안아 힘을 실어서 침대 쪽으로 이끈다. 갈 곳 잃은 두 팔을 엉거주춤하게 벌린 채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하던 종려는 이내 타르탈리아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침대 모서리에 도달하여 풀썩 주저앉은 종려의 윤곽을 확인하며 타르탈리아는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대로 종려의 다리 사이, 바닥에 내려앉아 그의 왼쪽 허벅지에 고개를 기댄다. 포근함과는 거리가 있어도 이제는 익숙한 감촉이었다.

“연인 사이에 이렇게 돈까지 내고 데려와야 한다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밤에 만나면 되잖소.”

“못 기다리니까 그렇죠.”

“이유는?”

위에서 종려의 왼손이 조용히 내려와 타르탈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커다란 것치고 의외로 모양이 섬세한 그 손을 떠올리면서 타르탈리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

“이나즈마에 가야 하기 때문인가?”

“그것도 있고요.”

“그리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 짜증 나려고 하거든요.”

“무슨 말인지.”

“시간이, 없잖아요.”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었다. 중요한 순간에만 화제를 빙빙 돌리며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던 종려가 말을 고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청산유수처럼 길게 늘어놓는 평소와 다르게 무겁고도 짧은 한마디가 떨어진다.

“그대는 전에도 같은 말을 했어.”

피안의 바다에 잠긴 채 파도에 실려 흔들리는 동안 죽음을 자각한다. 빛을 싣고서 계속, 계속 바위에 부딪치며 단말마처럼 비말을 흩뜨리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자신과 같았다. 푸른 만월의 인력에 이끌려 금빛 항구를 가득 채운 바다, 빛을 머금어 눈부시게 빛나는 수면에 잠식된 끝에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가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오늘 아침이었다.

죽음을 맞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 잠에서 완전히 깨기 전, 몽롱한 의식 속에서 창 너머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무의식에 끝없이 부딪쳐 영혼에 새겨진 각인을 기어이 드러내었다.

“지금의 저는 몇 번째예요?”

“첫 번째죠.”

“농담하지 말고요.”

“정말입니다. 이 이름으로 「타르탈리아」와 만난 건 처음이니까.”

“만날 때마다 이름을 바꿔요?”

“그렇소.”

“……왜?”

굳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한 마디씩 눅진하게 떨어지는 목소리와 달리 무표정하리라고, 타르탈리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가두기 위해서지.”

“뭘요?”

“기억을.”

깊게 한 번, 숨을 내뱉은 종려가 말을 이었다.

“이 이름은 「타르탈리아」가 부를 때 의미가 있소. 이름이란, 타인이 목소리를 내어 불러줄 때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어 정체성과 자아를 만들어낸다오. 내가 가진 추억 속 과거의 수많은 그대를, 짧은 시간의 기억을 이름에 담아 쌓아두려는 겁니다.”

“ 「타르탈리아」를 위한 이름이에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날 아약스라고 안 부르는 거네요.”

“리월에 올 때는 이미 「타르탈리아」이지 않았습니까. 나 역시 때를 맞추어 인간의 이름으로 속세에 내려와 계약을 실행할 뿐이라오. 지금의 이름은 「타르탈리아」에게 불리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이번’ 계약도 완수하면 ‘다음번’에는 또 다른 이름으로 만나게 될 테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종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쓰다듬던 손이 다시 움직여 귓가에 덮인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나는 계약의 대가로 그대가 생애마다 젊은 나이에 명예와 재물을 얻도록 해주었소. 그 명예가 준 이름을 가지고 이곳에 온다는 건 때가 되었다는 뜻이지. 그래서 나는 「타르탈리아」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전에 맺은 계약이오. 그대는 기억 못 하겠지만.”

“혼자만 기억하는 건 비겁해요.”

“그래.”

“그리고 아직 죽기 싫어요.”

“그렇겠지.”

호소해봤자 소용없다. 종려는 오래전의 계약대로 때가 되면 직접 타르탈리아를 죽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예전의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바위신과 계약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고 종려 역시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에게 자신을 새기는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고,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와 수없이 부서지며 그의 기억에 흠집이나마 하나씩 새기는 수밖에 없다고,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른 이의 칼끝이 닿아서는 안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도 안 된다. 종려는 오로지 자신의 손으로 타르탈리아가 가진 ‘신의 눈’을 깨뜨려 그 영혼이 정토 淨土에 이르지 못하도록 끌어내리고 윤회를 반복하게 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피안의 경계에 찾아온 연인을 ‘휴가’라는 명목으로 맞이했다.

연인은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길 싫어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울 때, 신의 망막에 가장 찬란하게 맺힐 경지까지 완성되었을 때 직접 죽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건 본능이다. 본능을 압도할 정도로 극적이고 낭만적인 살해가 아니면 안 되었다.

“계약에 추가해주세요.”

“들어보고 결정하겠네.”

“하아…….”

매정한 대답에 질렸는지 타르탈리아는 기댄 허벅지에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화려하게 죽고 싶어요.”

“…….”

과거에 같은 사람에게서, 타르탈리아이지만 타르탈리아가 아닌 자의 입에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찰나의 인생을 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 윤회를 반복하여 신의 곁으로 돌아오는 인간은 항상 같은 말을 했다. 과거의 기억이 없을 텐데도, 그 또한 본능이라는 듯이.

“밤이 좋아요. 만월 밤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한판 붙어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하나 더.”

“?”

타르탈리아가 고개를 들어 종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죽음을 논하면서 초연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다음번’에도 같은 이름을 써주세요.”

“이유는?”

“‘이번’에는 서로 바빴잖아요. 많이 못 부른 것 같아서요.”

“‘이번 휴가’가 유독 그렇기는 했지요.”

“들어줄 거예요?”

“예외이긴 하지만, 그러지요.”

“그리고 바람피우면 안 돼요.”

“……여전히 농담을 잘하는군요.”

대답하는 종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소등은 같이 못 보겠지만, 반드시 돌아올게요.”

“기다리는 건 익숙하다오.”

“── 종려 씨에게 죽기 위해서.”

종려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 숙여 타르탈리아에게 입 맞추었다.

만조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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