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L***

메이블 스튜어트와 악의 기원, 그리고 읽히지 않은 편지 (1)

※ 이 글에 등장하는 분과 학문적 지식은 단순히 서사 진행과 주제의식 표현을 위한 도구로, 전혀 학문적으로 고증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학문의 방법론과 연구 윤리를 밥 먹듯이 어깁니다. 판타지 아동 소설 기반의 2차 창작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고 절대 현실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 오픈리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가 아닌 인물들이 미래 세대에 의해 미스젠더링(바이너리 패싱)됩니다.

※ 7학년 기간 중 역극 로그(https://glph.to/uiem2e) 일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해당 부분은 *로 표시했습니다.

※ 창작 고유명사는 대부분 챗GPT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미래에서 과거에로 보내는 이야기.

해가 드는 곳에서 가라앉은 어둠 속을 끈질기게 들여다보는 이야기.

들을 수 없는 것듣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친애하는 레아,

당신이 이 글을 보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 없이 여기에 와 있다면 그건 내가 결국 당신을 혼자 남게 했다는, 마지막의 마지막에까지 또 한 번 실패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치 못해 한밤중 물 속에 뛰어들던 어린아이가 아니고, 그 사이 인생이 내게 충분히 호되게 가르친 바가 있으니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리 씁니다.


“모르겠어어어~~~~”

메이블이 식탁 위에 엎어졌다.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들여다보고 있던 기사 위로 곱슬거리는 당근색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온통 담배 냄새를 휘감고 뒷문으로 들어오던 세이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보고 있는데 그래? 검열 때문에 너무 많은 내용이 잘린 나머지 이게 왜 기사가 됐는지도 모르게 된 옛날 기사?”

“어…… 검열 때문이려나. 그러니까 이게 1981년에, 헨 블루웰스가 쓴 윈필드의 인터뷰인데…… ‘이 윈필드 같은 자식!’ 할 때 그 윈필드 말이야.”

“뭐? ‘야훼’가 인터뷰도 땄어? 그것도 인터뷰이가 위키드 윈필드Wicked Winfield? 야, 그런 걸 발견했으면 이 몸한테 제깍 알려줘야지! 내가 친구를 잘못 키웠어 아주. 아이고, 20년 우정이 다 뭐냐~ 부질없다~”

익살맞고 과장스러운 농조로 말하면서도 스크랩을 채가는 손길이 제법 진짜로 다급해서 메이블은 웃어버렸다. 세이지는 80년대에 활동한 이 칼럼니스트를 열광적으로 좋아해서, 그가 나오는 책이며 기사 따위는 안 찾아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하게 놔두면 “그는 이 시기부터 이미 철두철미한 급진주의자였으며 현재 머글본과 이종족 권리 및 마법부의 체계에 관한 개혁정책들의 대부분은 그의 글에서 이미 정초되었거나 최소한 시사되었다” 같은 과감무쌍한 주장을 진지하게 열변하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은 다들 두 손을 든 지 오래였다. 세이지가 머글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기까지 한 데에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았다.

메이블은 약간의 희망을 담아 세이지를 올려다보았다. 세이지는 기사를 통째로 잡아먹기라도 하듯이 눈으로 훑어내려가고 있었다. 메이블로서는 도무지 아무런 새로운 정보도 없는 벽이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기사라도, 자기 입으로 팬을 넘어서 ‘야훼의 신자’를 자처하는 세이지라면 무언가 행간에 숨겨진 의중을 읽어내줄지도 몰랐다. 적어도 ‘헨 블루웰스’가 ‘야훼’의 본명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던 메이블보다야. 기대감이 커진 메이블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세이지의 시선을 쫓았다.

세이지는 기사를 끝까지 읽고, 내용을 다시 거슬러올라가 몇몇 단락에만 한참씩 손가락을 대고 시선을 붙박고 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사 전체를 쭉 넘겨보고서야 낡은 신문을 내려놓았다.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는 악동 같은 짖궂은 웃음이 온 얼굴에 가득했다.

“요컨대, 문학적 경지에 이른 과잉순응. 총평,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헨 홉킨스, 랄밖에. 소감, 사악한 레아Wicked Leah에게도 어수룩한 시절은 있었군요.”

“알아듣게 말해줄 수 없어?”

메이블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세이지의 나쁜 버릇 중에 하나는, 생각에 심취하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그냥 두고 가버린다는 것이었다. 걸어서는 올라갈 수도 없는 곳에 쌩하니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선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와서 이것 좀 보라고 성화를 부리는 격이었다. 메이블은 평소에는 이 소꿉친구의 급한 성질에 웬만치 적응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 메이블은 메이블대로 답답하고 마음이 급한 상태였다. 메이블의 표정을 본 세이지가 손사래를 쳤다.

“미안, 미안. 너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지. 그러니까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내가 보기에 이 기사의 필자는 마왕을 엿먹이려고 이 기사를 썼다는 거야.”

“평범하게 가민을 찬양하고 있는데?”

“평범한 사람은 납치당한 척하고 아버지를 유인해서 적에게 팔아넘긴 다음 익일 새벽부터 그 동료들을 지하실에 가둬놓고 고문하고 비밀을 캐내지 않아. 평범한 사람은 그걸 가긍할 패륜이라고 생각하고 충격을 받지. 봐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한 메이블을 향해 돌아서서 세이지가 말했다.

“네가 만약 사악한 독재자야. 그래서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복종을 표시해라.’라고 한단 말이야. 내가 마지못해서 빳빳하게 고개를 숙이면 너는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무서워서 말을 듣지만, 사실 복종하기 싫구나?”

메이블이 고개를 갸웃하며 어정쩡하게 말끝을 올렸다. 의도했던 반응인지, 세이지가 활짝 웃었다.

“그렇지. 그럼 만약에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고 손등에 이마를 댄다고 하면.”

“음…… 순종적…… 이구나?”

상상만으로도 왠지 좀 불편해진 메이블이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세이지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죠, 아니면 적어도 열과 성을 다해 그렇게 보이고 싶거나. 그럼 이제 내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너의 신발을 핥으면 어때.”

“뭐어어어어?”

메이블은 질색하고 몸을 움츠리며 앉아 있는 의자 위로 발을 올렸다. 세이지가 정말로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기 때문이다. 괴상망측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자세로 메이블을 올려다보는 세이지의 눈빛은 그러나 평소 이상으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좀 더 해볼까? 일가친척과 이웃들의 심장을 모두 뽑아 당신에게 가져왔습니다. 당신은 별로 시킨 적도 없지만 제가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당신의 위대함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부디 받아주십시오. 필요하시면 더한 것도 언제든 하겠습니다.”

“뭐야, 그게~! 무서워! 이게 뭐야? 광신도야? 이런 사람이 어딨어?”

세이지가 쓸데없이 장중한 연극조로 읊는 바람에 더 소름이 끼쳤다. 메이블의 비명소리에 거실에서 이상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레모르가 결국 일어나서 식탁으로 다가왔다.

“너네 뭐 하냐.”

“지나치게 열렬한 복종은 오히려 반항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뇨리따.”

세이지가 무릎을 펴고 일어서며 추파를 던지는 바람둥이마냥 윙크했다. 레모르는 신경질난다는 얼굴로 세이지를 째려보았다. 메이블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놓인 기사와 세이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반항을 하려고 이런 기사를 썼다고? 하지만 이건 인터뷰잖아. 헨…… 블루웰슨지 홉킨슨지, 아무튼 그 사람이 쓴 게 아닌데.”

“오- 이런. 친애하는 메이블, 신문이 ‘있는 그대로’를 싣는 곳이라면 왜 대학에 언론학과라는 것까지 있겠어.”

세이지가 키득거렸다.

“진짜 ‘예술’은 행간에, 형식에, 구도에, 길이와 배치에…… 그리고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거거든. 예를 들어 봐봐,”

여기저기 갈라지고 부르튼, 잉크로 얼룩진 손가락이 한 단락을 짚었다.

“이 로비에서의 전투를 묘사하는 부분 말야. 읽고 있으면 그려지지 않아?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쳐들어온 공포terror, 도망치는 대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분투하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과 개성과 서사가 있는 사람들…… 절망적이고 승산 없고 무력한 상황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하게 말이지. 그걸 비웃는 화자의 태도까지 더해지면 거의 풍자문학이라고, 이거. 이게 진짜 마왕에게 아첨하려는 글이면 테러리스트한테 이름을 주면 안 되지. 그리고 나라면 뻥을 좀 넣어서라도 불사조들을 무시무시하게 만들겠어, 이렇게 마왕 군단은 막강하고 기사단은 짚단마냥 픽픽 넘어갔다고 쓰는 게 아니라. 사실 여부를 떠나서 뭐랄까, 돌팔매를 든 소년들을 탱크로 깔아뭉개버리는 듯한, 그런 일방적 폭력과 유린의 느낌이 나잖아.”

“어.”

메이블이 눈을 깜박였다. 세이지의 손가락이 기사 중앙의 사진 쪽으로 움직였다. 단추며 소맷단을 온통 금으로 장식한 정장 차림의 레아 윈필드가 사진 가득히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진 구도만 봐도 아주 대놓고 조롱이 느껴지지 않아? 아니, 누가 이걸 보고 ‘아비의 흉계를 저지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고발에 나선 장하고 용감한 소녀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냐. 슬퍼 보이면서도 결기가 느껴지게, 좀 가련하면서도 심지 굳고, 순수하고, 그렇게 연출이라도 해봐야 할 거 아냐. 보면 뭐…… ‘가슴아프지만 이게 맞으니까요’ 같은 소리를 하는데 이래서야 하나도 신빙성이 없지요. 하-필이면 이 문장이 또 ‘공교롭게도’ 사진 바로 아래 배치돼서 두 배로 가증스러워.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슬픔과 결기가 느껴지는 사진이 있기는 하다. 요 아래쪽 불사조 기사단 본부‘였던’ 빈집을 찍은 사진 봐. 뭔가 카르타고의 멸망을 보는 듯한 애상감이 느껴지지 않냐. 정의의 편이 신나게 쓸어버린 흉악한 폭도들의 죽음에 연민을 일으켜서 어쩌잔 거야.”

“사람들이 그런 걸 다 생각하면서 신문을 봐?”

“그렇진 않지.”

삽시간에 세이지의 얼굴에서 맥이 풀렸다. 정곡을 찔렸을 때의 반응이었다. 메이블은 세이지가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모르는 세이지가 가리키고 있던 사진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문 전체의 편집 논조라는 게 있고, 사회에 통용되는 인식이나 규범이라는 게 있고, 사람들의 평소 신조나 세계관도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기사 하나만 이렇게 떼놓고 보지도 않고. 나는 ‘야훼’의 가장 큰 패인도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지금 하고 있던 얘기는, 그러니까 레아 윈필드는 자기PR의 수단을 단단히도 잘못 골랐다는 거지. 호그와트 동기라는 연고를 믿은 건지. 솔직히 이것 때문에 윈필드에게 밉보여서 박해받게 되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야.”

세이지는 또 습관처럼 ‘야훼’의 야망과 기획과 좌절에 대한 장광설 쪽으로 빠지려다가 메이블의 세모눈을 보고 황급히 선회했다. 레모르가 메이블의 뒤에 붙어서서 의자를 짚었다. 아마도 어깨너머로 기사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메이블은 아랫입술을 씹기 시작했다. 방금 들은 해석을 정리하기 위해 애써보았으나, 너무 많은 내용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얼떨떨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별 의도 없는 레모르의 질문이 메이블을 구제했다.

“그래서, 이걸 왜 보는 건데?”

“아, 그거야! 있지, 레아 윈필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는데…… 이게 그 사람이 했던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길고 중요한 거거든?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할까, 1980년의 불사조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알게 되었다. 레아 윈필드에 대해서는, 뭐, 알고 있던, 알려져 있는 그대로. 사악하고, 교활하고, 뻔뻔하고, 잔인하며, 양심이나 선의 따위는 조금도 모르는 악랄한 여자. 도싯에 있는 그녀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잊을 만하면 파헤쳐지고 더럽혀진 채로 발견된다고 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메이블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특별한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느닷없이? 왜?”

세이지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치켜올라갔다. 메이블은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세이지의 할머니는 머글태생등록위원회에 의해 지팡이를 빼앗기고 마법 세계에서 쫓겨나 홀몸으로 세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하고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세이지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일들’을 종종 겪었음에도 호그와트에서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굳이 조사해본 사람은 없으나 아마도 같은 위원회의 작품일 것이라고 메이블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렸을 때까지 마법 세계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으나 망각 마법으로 지워진 것일 수도 있었다. 세이지의 어머니는 이상할 정도로 어릴 적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그러니 세이지가 레아 윈필드에 대해 날을 세우는 것도 당연했다. 어쩌면 세이지 앞에서 이 주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생각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그, 이종족 권리 단체 쪽에서 리서치를 하고 있잖아.”

메이블은 눈치를 보면서 머뭇머뭇 꺼냈다. 마법 인류, 인격체, 그리고 트롤의 이해와 권리 연맹, 약칭 C.R.U.M.P.E.T. (Coalition for the Rights and Understanding of Magical People, Entities, and Trolls)은 메이블과 레모르가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메이블은 그 곳이 마법 세계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지만, 면면들이 어찌나 다채로운지 하나로 뜻을 모아 무언가 같이 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메이블은 머글 대학에서 민족지학을 전공했다. 대학 진학 자체는 머글 세계에 한 발은 걸쳐두려는 보험의 성격이 강했지만, 전공 과목은 주로 이종족 권리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내린 선택이었다. 물론 머글 대학에서 상정하는 연구의 대상과 메이블의 눈앞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메이블은 생각했다. ‘그럼 우선 이 각양각색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그녀는 혈통이나 종족을 가리지 않고 연맹의 모든 회원들에게서 구술을 수집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소책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좋아서, 그녀는 이후 뜻있는 후원자를 주선받아 몇몇 이종족이나 이종족 혼혈 회원들을 대상으로 보다 심도 있는 작업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이번 연구는 이제 과거로까지 확장하여, 현재 연맹에 대표되어 있지 않은 종족들의 이야기를 채워나가려는 시도였다. 형식은 마찬가지로 구술사였다. 인어를 다룬 장의 주인공이 핀갈 모이레 모레이가 된 것은 거의 뻔할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장본인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프러드 허니컷이 옥중에서까지 쉬지 않고 작업해 출간한 그의 전기 《핀갈 모이레 모레이: 비틀거리며 두 세계 사이를 걸어간 전사》는 2024년 현재에까지 여전히 개정증보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을 탈고했을 때의 그 탈력감과 해방감을 아는 메이블로서는 존경스러울 정도의 정력이었다. 그가 2011년에 건립된 ‘어둠의 마법 박물관’ 관장으로 재임하고 있어, 여차하면 찾아가 물어볼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이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기억 그 자체가 열람할 수 있는 자료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핀갈》의 주인공은 전기 저자에게 있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협력을 제공했다. 그의 생애를 집약하는 기억들을 마법으로 추출해 건넸던 것이다. 뿌연 안개 속을 꾸물거리는 은빛 실타래 같은 그것들은 지금까지도 조금도 바래지 않고 박물관의 특별보관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 있었다.

허니컷의 책이 이종족 권리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너무 필독서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메이블은 사실 오히려 망설이기도 했다. 모두가 이미 읽은 책의 독후감을 쓰라고 연맹의 이름을 빌려주고 연구비를 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누군가의 입을 거치지 않은, 심지어 당사자 자신의 입조차 거치지 않은 날것의 경험에 접속할 기회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뭐…… 나는 허니컷과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이걸 보면 또 다른 내용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말로 스스로 합리화하며, 메이블은 박물관으로 걸음했다.


친애하는 레아, 아시다시피 우리는 육성이 실리지 않은 글줄이라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 역시 말에는 재간이 없는지, 편지라는 것은 도통 능숙해지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내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까마득한 종말을 앞에 둔 지금은 하는 수 없이 시간을 건너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어지는 글자의 힘에 의지해봐야 하겠습니다.

적절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를.


“그런데?”

세이지가 여전히 마뜩잖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채근했다. 레모르가 허공에서 손을 한두 번 저었다.

“말하게 둬라. 지금 얘기하잖아.”

“그러니까……”

메이블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찾지 못해 잠깐 머뭇거렸다. 펜시브라는 것은 정말로 구술과는 달랐다. 말이란, 마주보고 눈빛을 살피고 몸짓과 휴지를 주고받으며 말없는 유대를 구축한다 해도 결국은 하나의 텍스트였다.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화자의 해석이었다. 그것도 지금 이 시공에, 이 청자에 맞게끔 재단된 해석이었다. 공감하고 경청하고 이해하려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 해석에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검토하는 일은 가능했고, 또 필수적이었다.

펜시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선 사건들이 그냥 일어났다. 그 공간에 메이블을 둔 채로, 메이블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반응하든 관계없이 눈앞에서 무참하게 벌어졌다. 펜시브에서 본 모든 사건들을 이미 몇 번이나 읽어서 알고 있었는데도, 메이블은 펜시브를 들여다보는 며칠 동안 저녁마다 눈이 빨개지도록 울면서 집에 갔다. 펜시브에 담긴 것은 과거의 기억으로 그 안에서 무얼 하든 바뀌기는커녕 존재조차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똑똑히 알면서도 공포와 수치심에 숨을 죽이고 도망쳐다니는 소년을 꼭 끌어안아주려 들거나, 그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잡혀간 심문실에서 고압적으로 그를 취조하는 오러에게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치는 등 사건을 바꾸려는 헛된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 배겨낼 수가 없었다. 펜시브를 보는 일을 묘사하는 데는 ‘경청’은 물론이고 ‘관음’이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사태를 목전에서 보면서 방관하는 것만 같은 경험이었다.

‘인면어’는 말했다. 핀갈 모이레는 죽었다. 여기 있는 것은 그러고 남은 찌꺼기라고. 메이블은 그 말을 이해했다. 그가 어떻게 한 군데씩 망가지고 무너지고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는지를 본 지금은 그 말이 단순한 자조나 자기혐오의 발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당신들이 나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목이 꺽꺽거리도록 울면서 메이블은 생각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여놓고서 죽게 해주지도 않고 있다고. 사람답게 살 수도 없게 만들어놓고 인어답게 죽지도 못하게 한다고.’ 그 안으로 파고든 규탄이 너무 아프게 가슴을 찔러서 숨쉬기가 힘이 들었다. 모든 움직임에서 원망과 비난을 읽으면서 메이블은 그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보았다.

1980년 4월, 죽음을 먹는 자들은 레아 윈필드의 밀고를 받고 불사조 기사단 본부를 야습한다. 1차 마법사 전쟁의 판도를 결정짓다시피 한 이 습격에서 ‘인면어’는 첫 ‘공개 데뷔’를 한다. 바꿔 말해, 핀갈 모이레 모레이라는 인간은 이 날 사회적으로 완전히 죽는다. 그가 남겨놓은 기억에서 이 사실에 대한 불안이나 유감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는 본부 건물을 인간이라면 불가능할 속도와 기세로 종횡무진하면서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맹수처럼 웃었다.

《핀갈》을 읽은 사람들은 심해에서와 육지에서 죽음과 살해의 의미는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바다에서 투쟁과 생명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도.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오랫동안 육지의 방식만을 강요당해온 핀갈이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은 그러니까 그에게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물에 달려드는 것과, 혹은 좁은 방에 묶여서 갇혀 있던 죄수가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것과 같다는 것도. 그가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역겨운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 이후에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남은 평생을 고독한 은둔자처럼, 참회라도 하듯이 조용히 보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측은히 여김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가 짓고 있는 저 얼굴은 버거웠다. 메이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즐겼잖아.’ 지르지 못한 비명이 머리속으로만 울렸다. ‘즐기고 있잖아, 당신.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고 죽이면서 즐거워하고 있잖아요!’

이 연구를 시작할 때 메이블은 이 ‘비틀거리는 전사’에 대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사색적이고 청빈했으며 삶의 철학과 긍지를 가지고 있던 인물에 대해 일정 부분 존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책을 읽은 누구나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저 존재를 ‘우리들 중 하나’처럼 소개하고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 맞나? 우리 역시 저렇게 될 수 있었다고, 될 수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대상일까?

그러던 중에, 딱 한순간이었다.

레아 윈필드의 불운한 아버지, 아이작 윈필드가 있는 방향이다. 아이작 윈필드는 당시 불사조 기사단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로, 레아 윈필드가 기사단 본부의 위치를 알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여기서 레아는 붙잡힌 척하고 아버지의 주의를 끌어 탈출할 기회를 빼앗고 확실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으로 모르가나 가민의 휘하에 들어갈 공을 세운다. 그러니까 이 날 밤에 일어난 온갖 일들 중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려는 중인데.

벅차오르는 환희와 가슴 먹먹한 슬픔이 교차해 떠오르는,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 이 순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마음을 정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메이블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건 죽은 사람이 할 얼굴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거의 소리내 말할 뻔했다. ‘그건 당신이 할 얼굴이 아니잖아요.’

책으로 읽은 쪽이든, 펜시브에서 본 쪽이든, 그녀가 알고 있던 핀갈 모레이는 단단하고, 야성적이며, 자신까지도 포함한 사람의 생사를 냉정할 정도로 분명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연약함을 배우고 이해해보려 몇 번이고 시도하고 성취하면서도 끝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방인이었다. 저렇게 희끔하게 섬약한 모습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법사들 사이에 가장 잘 녹아들어 있던 시기에조차도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았다. 가장 약하고 무력하게 쫓겨다니던 때에도 저런 얼굴은 하고 있지 않았다.

메이블은 그 펜시브를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에서 외워 틀 수 있을 정도로 몇 번이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확신만 그만큼 더 굳어질 뿐이었다. 핀갈 모레이는 그 날 살인 저주가 날아다니는 전투 한복판에서 아주 애틋하게 사랑에 빠진 사람이 기적에 감격하는 듯한 얼굴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누군가를 눈으로 쫓느라 눈먼 주문에 맞을 뻔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레아 윈필드라고.”

세이지는 이제 의자를 비스듬히 뒤로 물리고 다리를 길게 꼬고 앉아 있었다. 예기가 가라앉은 대신 말이 없었다. 그저 누렇게 뜬 손톱 끝이 나무로 된 식탁 상판의 모서리를 성마르게 반복해 두드릴 뿐이었다. 레모르는 그저 물끄러미 메이블을 보고 있었다. 마법 세계에 통용되는 고유명사의 태반을 남들보다 늦게, 머리로 습득해야 했던 레모르는 다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면 질문하거나 설명을 요구하는 대신 조용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마치 그 말들에 따라붙는 감정과 시간들도 그런 식으로 서서히 학습해 보충하려 하는 것처럼. 메이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윈필드 쪽이나, 그 근처에 있던 다른 누군가는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해봤거든. 그녀가 맞아. 그 장면 뒤에는 퇴장해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지만.”

그리고 핀갈 모레이는 두 번 다시 그런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그 다음날에, 레아 윈필드가 기사단원들을 심문하잖아. ‘인면어’가 문을 지키고. 상황도 너무 비극적이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했고, 아무튼 엄청 유명한 장면이거든? 마법사 가족의 아이들은 그림책으로도 읽고 자란단 말이야. 고문이나 레질리먼시 이야기는 적당히 순화돼서 나오긴 하지만. 사악한 배신자와 무시무시한 괴물과 죽음을 먹는 자가 어두운 지하실에서…… 같은 느낌으로. 그 장면을 보면 좀더 내막을 알 수 있을까 해서 찾아봤는데,”

“찾아봤는데?”

“없어. 그 다음 펜시브는 심문해서 행적을 알아낸 기사단원들을 추적해서 살해하는 장면으로 넘어가.”

메이블은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의자 위에서 돌아앉으며 세이지가 추측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 아냐? 당장 누굴 죽이거나 뭘 불태운 게 아니라 문 앞에 서있기만 한 셈이니까,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엄청 중요한 사람들, 신문에도 계속 실리고 사회적으로 화제였던 유명한 사람들을 납치해서 고문했는데? 그 사람 수배당할 때 주요 혐의에도 들어갔는데? 그리고 그 펜시브 모음 있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책하고 비슷해. 책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사건들은 대부분 펜시브에도 있어. 가끔은 있지, ‘너희들 이것도 알고 싶겠지?’ ‘이건 이렇다고 생각했겠지?’ 같은 말이 들리는 기분이 들어. 그런데 그게 큰 사건으로 남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

그러고 보면, 메이블은 말하면서 깨달았다. 펜시브 역시도 ‘누군가가 보게끔’ 만드는 한에서는 구술과 다르지 않기도 하구나. 세이지는 메이블의 말에 수긍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 양반이 그렇게 상식이 없진 않겠지. 그 유출 사고 전까지만 해도 공부도 제법 잘 했다는데. 그러고 보니 헨 홉킨스와 같은……”

“그리고 더 믿을 수 없는 게 뭔지 알아? 다른 어디에도 그 여자가 안 나와. 같은 기숙사 같은 학년이었는데, 막 연회장 같은 데 모두 모여 있다거나 이런 장면이 아니면 학교 다니던 때도 없고, 죽음을 먹는 자들하고 손잡고 범죄를 감춰주는 하수인과 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관계였는데 둘이 말 섞는 기억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서 그렇게까지 하찮은 존재일 수가 있어?”

메이블은 사정없이 말을 끊었다. 말이 끊기는 데도 이골이 난 세이지는 항변하지 않았으나, 저대로의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식탁 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메이블은 여전히 관찰하듯이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레모르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어떤 복잡한 사정을 가진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평생을 돌아보며 마음속을 이야기했어. 수치스럽고 괴로웠던 일들도 털어놓았고, 살면서 지은 큰 죄들도 다 고백했어.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이 집에 있던 당신의 물건들은 전부 없앴습니다. 당신을 마음에서 정리하려 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남겨두고 가지 않으려 함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떠드는 말들이 싫었습니다. 나로 인해서 또 한 층의 억측과 모욕이 거기에 더해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장副葬의 관습이 없습니다. 삶은 흘러와서 흘러가는 것이라고, 창잡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걸치지도 손에 쥐지도 않은 채로 세상에 와서, 또한 나신으로, 빈손으로 떠나갑니다.

하지만 레아, 당신은 내 처음이자 마지막 영원이었고, 나는 당신이 여기에 와 머무르는 시간들이 좋았습니다. 그 가치를 조금도 알지 못할 이들에게 편린조차 내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금은보화도, 힘도, 영예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나 그것만큼은 언제까지고 품에 두어도 해가 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있을 곳이 치워진 줄 여기지 마시고, 내가 욕심이 사나워 가져갔노라고 생각해주십시오.


“독점하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지.”

세이지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니면 덮어주려는 의도거나. 읽어보니까 그 양반 정말 그 시대에도 보기 드문 진성 가부장이던데. ‘자기 여자’를 고발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을 하겠어? 지켜준답시고 있는 기억도 지우는 판국에.”

“기억을 지워?”

메이블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누구의? 레아 윈필드의? 일단, 비단 펜시브 이외에도 핀갈 모레이의 생애에 관한 자료라면 구할 수 있는 대로 살펴봤지만 그가 망각 마법을 구사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세이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야사라고 할까, 뜬소문이라고 할까. 1981년 언제더라, 헨 블루웰스와 ‘인면어’가 달밤에 탭댄스를 추고 민달팽이를 토하며 기억을 돌려주네 마네 싸웠다는 목격담이 있어. 너무 황당무계해서 술이라도 먹고 꿈 꾼 게 아닌가 싶지만, 원래 이런 이야기는 있을 법한 게 꾸며낸 상상이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리는 게 사실인 경우가 많거든. 게다가 그 직전의 몇 주간 ‘야훼’의 문체가 미묘하게 무너져 있어서 신도로 하여금 많은 상상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단 말이야.”

“일리가 있다.”

메이블이 기가 찬 나머지 세이지의 등짝을 내리치며 타박을 하려던 참에 레모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메이블은 물론 세이지조차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레모르를 쳐다보았다. 지금 레모르가 ‘야훼’와 ‘인면어’의 달밤 민달팽이 탭댄스 대결설을 지지한다고 말한 거야?

“숨기는 것이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어.”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메이블은 재확인된 신뢰를 담아 미소지었다. 레모르가 메이블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서 손을 떼자 등받이가 반동으로 가볍게 흔들렸다. 깊고 느싯한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그 사람은…… 겉모습에서 다, 드러났다며. ……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고. …… 상대가 자기와 그런 쪽으로 얽혀 거론되는 게 반갑지 않겠지.”

메이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세이지의 눈이 잠시 이채를 띄었다가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메이블은 고개를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레모르는 메이블과 세이지의 등 뒤를 돌아 주방 쪽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장 성분을 생략하거나 추상적으로 표현을 흐리는 것은 감정이 격앙되려 할 때에 레모르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식 중의 하나였다. 메이블은 조금 울컥해서 말했다.

“멋대로야. 상대는 전혀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 대화의 원래 주제는 ‘그’ 레아 윈필드이니 아마도 상관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리고 이것이 쌍방향의 관계인지 일방향의 감정인지는 물론 애초에 그런 관계나 감정이 진짜로 있기는 있었는지조차도 전부 가설적이고 불확실할 뿐이지만. 이 순간에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이지가 어정쩡하게 중간에 낀 얼굴로 둘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레모르로부터는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다. 주방에 들어서서 고무장갑을 끼면서야 레모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인데 말하지 않는 이유에는 다른 것도 있어. 제일 흔한 건……”

수도꼭지를 틀고 온도를 맞추느라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알맞은 온도로 물을 틀어놓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며 레모르가 말을 이었다.

말해도 이해할 리 없다고 생각할 때.”

메이블과 세이지 둘 다 레모르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레모르는 그저 조용히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돌아서서 표정을 숨기고 주의를 돌릴 작업을 찾는 것도 레모르가 감정을 다스리는 또다른 방식이었고, 메이블도 세이지도 그걸 알았기에 집안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세이지가 저대로 여러 가지의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메이블은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놓인 기사를 뜻없이 가만 바라보았다.

‘과잉 순응.’ 메이블은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지나치게 열렬한 복종을 통한 반항.’ 앞뒤가 맞지 않아보이는데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기묘하게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핀갈 모레이는 ‘인면어’로서 죽음을 먹는 자들 앞에서 ‘목소리가 듣기 불쾌하실 것’이라며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없이 기계처럼 시키는 일만을 했다. 그의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헨 블루웰스는 인륜과 인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먹는 자들의 승리를 찬미함으로써 그들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드러냈다. 분노하고 슬퍼하는 도덕적으로 옳은 글은 신문에 실리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폭력과 속박이 너무나 빈틈없이 숨막혀서 거스를 힘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람임을 주장한다. 살아있음을, 마음이 있음을, 분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메이블은 손끝으로 가만히, 식탁의 상판 위에 삼각형을 그렸다. 헨 블루웰스는 그러기 위해서 레아 윈필드를 인터뷰했고, 핀갈 모레이는 기계처럼 움직이던 와중에 눈을 돌려 레아 윈필드를 보았고, 이것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여서 생각해도 생각해도 제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데…… 혹시, 헨 블루웰스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공모했던 거라면? 레아 윈필드 또한 그녀의 방식으로 무언가에 ‘과잉 순응’하고 있던 거라면? 그러면 이 모든 게 좀더 말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발상이었기 때문에, 메이블은 레모르를 도우러 일어나면서 금세 그것을 잊어버렸다.


당신이 언젠가 내게 일러주신 바, 어린 당신은 호그와트로 처음 향하는 기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행동거지가 습속에 어긋남을 지적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내 스승이자 안내자였던 셈입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에 대하여 생각을 거듭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신이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서, 얼버무릴 수도 없을 만큼 어긋나 있다는 자각을 무거운 짐처럼 안고 있는 자가 아니고서야 그 때의 당신처럼 모든 행동거지의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엄준히 재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니까 당신도 꽤나 이상한, 어쩌면 나만큼이나 이상한 꼬마였던 겁니다.

하지만 그 때의 나에게 그런 인간의 표리 따위를 헤아릴 깜냥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나에게 당신은 그냥 편리할 만큼 단순하고 명확하게 적부適否를 일러주는 사람이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서 이 낯선 세계의 성원으로 어엿하게 노릇하고 있는 선현이었습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모방하고 배우면서 어쩌면 나는 내심 당신이 잘못된 곳에서 태어난 나와 같은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호그와트의 교장 로잘린드 에실은 메이블의 요청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호그와트에 올 수 있도록 사냥터지기를 마중 보내기까지 했다. ‘마마B’라고 불린다는 이 살갑지 않은 인상의 중년 여인은 만나자마자 메이블에게 숲의 꿀과 견과를 넣어 만들었다는 쫀득쫀득한 밀과자를 권했고, 머글들의 놀이공원 청룡열차마냥 널을 뛰는 구조버스 안에서 메이블을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고서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이 시기 호그와트 숲에서 볼 수 있는 수목과 마법 생명체들에 대해 끝없는 수다를 늘어놓았으며, 검은 호수를 건너는 길에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볕살이 들자 간단한 주문으로 물을 뿜어올려 무지개를 만들어보였다. 그녀의 출신이나 내력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사실, 메이블은 그녀가 호그와트 학생조차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건 영국의 마법 세계에 살면서 호그와트 학생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의 직감이었다.

메이블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호그와트에서는 M.U.G.G.L.E.(Mentorship for Understanding and Guiding Guardians in the Learning of Enchantment)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와 마법사의 방문으로 처음 마법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된, 어안이 벙벙한 머글 학부모들에게 호그와트 재학 중인 자녀가 있는 마법사 가정을 짝지워주어 마법 세계로의 입장과 적응을 돕게 하는 일종의 멘토링 프로그램이었다. 막 호그와트에 갈 나이가 된 딸을 둔 마빈과 엘리자는 의욕에 가득차서 안내자 역할에 자원했다. 모든 일이 잘 흘러간다면 두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특별한 친구를 얻은 채로 호그와트 급행열차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프로그램은 그들에게 인근의 비좁은 머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편모 가정을 연결해주었지만, 메이블이 그 집의 4남매 중 맏이라고 하는 또래 입학생의 손을 잡고 기차를 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칼에 형형하게 빛나는 마찬가지로 새까만 눈동자를 한 머글 가정의 아이는 순조롭게 입학통지서를 받았는데 정작 마법사 가정의 아이는 받지 못했던 것이다. 마빈과 엘리자가 호그와트와 마법부를 번갈아 드나들며 소란을 피웠지만 호그와트 측의 입장은 완강했다. 메이블 스튜어트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마법의 자질을 시사할 만한 어떠한 현저한 마법적 발현도 보인 적이 없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가족들의 아우성과 생애 처음 맛보는 무거운 낙심 속에서도 메이블은 언제나 느껴왔던 불편한 위화감이 비로소 이치에 맞게 설명된 듯 마음 한켠에서 어딘가 편안해졌다. 아무리 어린 마법사들은 원래 그렇다고는 하지만, 본인이 구사했다고 하는 ‘마법’에 대해 스스로 지나치게 짐작조차 안 간다는 의구심을 그녀도 실은 남몰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격정과 흥분이 지나가고 난 뒤 보다 차분히 되짚어본 결과 밝혀지기로, 그것은 몇 가지 우연과 당연한 기대, 혹은 소망사고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해프닝이었다.

놀랍게도, 세이지는 그 사정을 전부 듣고서도 메이블을 만나러 왔다. 두 아이는 여름마다 다이애건 앨리 대신 세이지가 사는 동네의 허름한 상점가를 걸으며 낡은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머글 유행가를 들었다. 매점에서 먼지 쌓인 머글 잡지를 뒤적거리다 주인의 눈길이 사나워지면 색 바랜 비닐 포장지에 싸인 공산품 하드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잔디가 누렇게 시들어가는 공원의 더러운 개울가를 산보하며 사람들이 먹을 것을 버리고 갈 때마다 모여드는 살찐 비둘기들을 구경했다. 세이지는 또한 메이블의 오빠들인 밴과 앨런에게 과제를 도움받고 있다며 메이블의 머글 학교 편입 준비와 이후의 학업을 도와주었다. 세이지가 멀린이니 로웨나니 모르가나니 하는 이름들이 입에 붙어갈 즈음에는 메이블도 학교에서 사귄 머글 친구들과 머글 유행어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댈 정도로는 ‘그쪽’의 세계에 녹아들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세계에 익숙해지는 데에 도움이 필요했던 시간들을 한참 넘어서도.


당신이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언제부터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돌이켜보건대 그 시절 괴팍해 보일 만치 표정이 드물었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들에게 마음놓고 웃고 울 만큼 편안한 시공이 드문 까닭입니다. 창잡이들도 위험을 물리쳤을 적에는 즐거이 웃고, 싸움이 끝난 후 폐허를 정리하면서는 기탄없이 눈물 흘립니다. 그 마음짓은 평소 인고하고 때를 기다리는 만큼 몇 배로, 몇십 배로 더 진하고 강렬합니다. 이토록 눈물에 헤퍼지기 전의 나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하므로……

당신에게 그러한 때가 찾아오지 않음을 깨닫기 전까지 나는 알아도 모르는 것이나 진배없었겠습니다.

아십니까, 레아. 그 때의 나는 그저 죽기로 붙들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고 말 만큼이나 당신의 미움을 사는 것이 겁이 났습니다. 당신은 조르지도 화내지도 않고 그저 모든 것을 간직하고 감내하므로, 당신의 마음에 상한 데를 만들었다가는 언제까지라도 그 순간의 그 모습으로, 상한 마음의 조각인 그대로 당신의 마음속에 내내 남게 될 것만 같아서.

당신이 그토록이나 소리도 없이 체념하는 일에 익숙했던 것을 그 때는 몰라, 철없는 마음에는 그저 그런 것만 무서워할 줄 알았습니다.


어느 세계도 다른 것보다 못하다거나, 실패해서 밀려나는 곳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모두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를 혼자서만 모른다는 것, 어느 기숙사였냐, 언제 학교를 다녔냐는 질문을 매번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것은 이따끔 생소한 사물로 가득찬 교실 구석자리에 잔뜩 긴장해서 앉아있던 머글 학교의 첫날을 연상시키는 선명한 소외감을 마음에 드리웠다. 머글 학교도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는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지만, 천 년도 더 되었다는 신비와 기적으로 가득찬 고성에서 벌어진다는 온갖 놀랍고도 기상천외한 모험과 사건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동경과 부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까, 메이블의 이번 방문에는 어쩔 수 없이 다분한 사심이 섞여있는 것이다. 메이블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고 심호흡을 했다. 바야흐로, 마침내, 메이블 스튜어트의 기념할 만한 첫 호그와트 내왕인 것이다!

눈앞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그 유명한 호그와트의 성채가 마침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메이블은 뜻없이 고개를 돌려 방금 내린 조각배가 떠 있는 검은 호수를 뒤돌아보았다. 어떤 빛이든 삼켜버리는 것만 같은 광대하게 펼쳐진 수면과 튀어나온 벽돌 굴곡 하나하나마다 역사를 담고 있을 듯이 위풍당당하게 솟은 낡은 성의 풍경이 웅장한 대비를 이뤘다.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갗을 후려치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길게 울었다. 그 사이에서, 메이블은 어쩐지 멀리서 메아리쳐오는 것 같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외로운 건 싫어.

‘뭐지…… 누구지?’ 메이블은 귀를 쫑긋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저만큼 앞서간 ‘마마B’가 메이블을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메이블은 마지막으로 호수를 한 번 힐끔 돌아보고, 이내 종종걸음쳐서 안내자를 뒤쫓았다.


당신의 세계를 처음 본 순간은, 지금도 전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넷째 해의 가을이었습니다. 이 세계가 전화에 삼켜지리라는 것을 당신도 나도 알고 있었고 나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눈을 잃은 메르체에게 너희들의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 의리는 없다고 매정하게 쏘아붙인 차였으나, 그리고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 때는 그것이 순전한 진심이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또한 원했든 아니든 이미 뭍에서 만들어버린 은원들이 발목을 붙잡는 기분을 느끼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뭘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당신의 세계를 지켜주면,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전사들이 더 오래 곁에 있게 되면 좋겠느냐고요. 그 때의 나는 물정도 미래도 몰라, 내가 하려고 하면 뭐라도 될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되지 않더라도 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면 내게는 충분한 지침이 되었을 겁니다.

나의 레아. 당신이 무어라 대답하셨는지 기억합니까.


아투르 아스테르는 친절하지만 어딘가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초상화’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생전의 평판과 다르지 않게 시종 온유하고 친절한 태도로 메이블의 질문에 답해주었지만, 받아적은 것을 훑어보자니 새롭게 알게 된 게 뭐가 있는지는 아리송한 느낌이랄까……. 초상화가 이 정도로 속을 알기 어렵다면 아스테르 본인은 얼마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던 걸까? 소득이라면 예언자일보에 그 기사가 나간 뒤에 핀갈 모레이를 계속 학교에 두기 위해서 아스테르 교장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압력을 받아내야 했다는 것 정도였다.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였으니까요.” 아스테르가 어딘가 먼 데 가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친구들에게서 최악의 면모들을 보게 되었죠.” 메이블은 물끄러미 시선을 들었다. 충동적인 질문이 새어나왔다. “레아 윈필드처럼요?” 어두운 시절의 호그와트 교장이자 불사조 기사단장은 가만히 메이블을 보았다. 뜻을 읽기 힘든 눈빛이었다. “예, 그렇죠. 레아 윈필드처럼.” 메이블은 내심 기대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아스테르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학창 시절에는 조용한 모범생이었다가 7학년 즈음부터 레질리먼시로 다른 학생들의 머리속을 멋대로 헤집는 우려스러운 경향이 생겼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배신하기 전까지 어떤 전조도 없었다는, 그야말로 어디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들뿐이었다. 메이블이 약간 더 용기를 내어 혹시 특별하게 가까운 친구는 없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으나 아스테르는 교사들의 눈에 띌 만큼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다는 밍숭맹숭한 답변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왜 궁금한 거죠?” 메이블은 잠깐 움츠러들었으나, 노인의 눈에서 따뜻하게 반짝이는 호기심에서 그것이 추궁이나 비난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 질문은 사실 처음 받는 것이 아니었다. 세이지도, 어쩌면 메이블 자신도 똑같은 의문을 가졌다. 머글 대학에서 배웠던 방식대로라면, 크게 중요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 알아내기도 어려운 이런 부분은 각주로 한계를 밝히고 그냥 제쳐두어도 학문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은 ‘알아낼 수 없는 부분’을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 자체가 방법론과 윤리 모두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머글 학자들은 이렇게, 대상의 특정한 측면만을 부감한 것처럼 분석적이고 건조하게 글을 쓰고, 독자들은 그것을 감안하고 대상 자체의 재현이 아닌 하나의 해석으로서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달랐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부피와 영혼을 가지고 살아움직였다. 머리로 다 알 수 없는 것이라도 마음으로는 이어지는 길을 찾아내야만 한 발이라도 디딜 수 있는 곳이 마법 세계였다. 이 세계의 주민들의 눈을 붙들려면 마치 움직이는 초상화처럼 글의 주인공을 눈앞에 불러내야 했다. 메이블 역시도 머글 세계의 방식을 체득하고 몸에 익혔음에도 이 ‘마음을 제하는 방법’에는 좀처럼 완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핀갈 모레이라는 사람을 메이블의 마음으로 알아야 했다.

그런데 레아 윈필드라는 조각을 뺀 핀갈 모레이는 아무리 애를 써서 짜맞춰봐도 어딘가 멋대로 상상해 만든 가짜 같았다. 아무리 봐도 어딘가 비어있어서 다른 곳에서 얼기설기 채워넣은 듯한, 조잡하고 겉만 그럴듯한 느낌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 허수아비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는 메이블의 마음속을 서걱거리는 의문이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어서는 맞지 않는다. 반대로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다고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빈곳을 적당히 상상으로 채워 꿰어맞추는 짓을 그에게 두 번이나 하고 싶진 않았다. 마법 세계가 그에게 한 번 그랬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빴다.

흥미로운 듯이 연신 눈을 깜빡이며 메이블의 말을 듣고 있던 아스테르는 주름진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교우관계나 연애사까지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생활하는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돌보았던 보호자라면 나보다는 많은 걸 보고 들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자, 내 기억이 맞다면 4층 동편 복도 두번째 사무실에 당시 래번클로의 사감이었던 미들폰드 교수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중앙 계단 1층에서 오른쪽 통로로 빠지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빠르겠네요. 에실 교수에게는 내가 말해둘 테니 걱정 말아요.” 마지막 말은 30분 전 잠깐 화장을 고치겠다며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에실 교장의 책상과 교장실 문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에 띄게 안달하고 있는 메이블을 향한 것이었다. 메이블은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감사의 말을 주워섬기며, 소지품을 챙겨 부리나케 교장실을 뛰쳐나가 중앙 계단을 향해 달렸다.


당신은 그 때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노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울지 않고 웃지 않고 언제까지나, 먼 수평선만을 바라보면서…….

그건 내가 처음 만난 영원이었습니다.

레아, 우리는 모든 불멸성과 절대성에 대한 욕망을 완악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소화시킬 수도 없는 보석을 삼키려다 목이 막혀 죽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유한자에게는 걸맞지도 않은 허상을 좇다가는 자신은 파멸하고 남을 희생시키는 법이라고요.

약해지지 않는 힘이든, 줄지 않는 재보든, 죽지 않는 생명이든, 어떤 형태이든 영원을 탐내는 자는 하나같이 끝이 좋지 못함을 배우며 자라났으므로 나는 순리에 맞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장된 승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슬픔이 부르는 소리를 뿌리치는 법만큼은 배우지 못했기에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거기에 속절없이 사로잡혔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서 푸른 수평선을 내려다보면서도 그 너머에서 나타날 배만을 하릴없이 기다리는 당신이, 영영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받아도 여전히 거기에 서 있을 것만 같아서. 거기에 서서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먼곳의 언덕에 홀로 선 당신의 영원이 너무 정결하고 외로워서 평생을 그 뒷모습에서 돌아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또 구제불능이라 하실까요.


메이블이 그 초상화 앞에서 멈춰선 것은 순전히 그녀가 C.R.U.M.P.E.T.의 수호성인(들 중 하나)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라벨라 플렁킷은 빨간 머리에 축 처진 눈썹, 두드러진 광대뼈와 주근깨와 두툼한 입술을 가진 울적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마법사 아이들이 좋아하는 개구리 초콜릿 카드에 등장했으며, 커다란 물고기를 안은 그녀의 초상화는 머글 만화처럼 단순한 형태로 캐리커처화되어 연맹의 사무실에 장식되어 있었다. 몇 개의 색과 꼬물거리는 선만으로 표현된 미라벨라는 기분에 따라 물고기와 함께 물 아래서 헤엄치거나 육지에 나와서 새초롬히 서 있었다.

이 미라벨라는 개구리 초콜릿 카드에서 보았던 것보다 어쩐지 더 우중충했고, 더 뚱하고 성격이 나빠 보였다. 어쩌면 실물 크기의 진짜 초상화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명 때문이거나. 메이블은 눈앞에 멈춰선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는 미라벨라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생각해보니 이 성에서 아이들을 지켜본 게 교수들만은 아닐 것 같았다.

“저, 혹시 핀갈 모레이를 아세요?”

“걔는 누구나 다 알잖아.”

미라벨라는 구부정한 어깨를 더 움츠리며 방어적으로 대꾸했다. 여전히 메이블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메이블은 말문이 막혀 잠깐 머뭇거렸다. 전에도 누군가 미라벨라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어쩌면. 그리고 그건 악의적인 호기심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미라벨라는 인간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 마음을 주었고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계를 가차없이 버리고 떠난 사람이었다. 마법 세계가 핀갈을 대우한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었다. 질문에 좀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마법의 성에 들어와 들뜨는 바람에 머글 세계에서 배운 윤리와 진리를 깜빡 잊었다. 메이블의 논문을 봐주셨던 교수님이 지금 이 장면을 봤다면 기함하다 못해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지도 몰랐다. 메이블은 잠깐의 갈등 끝에 그냥 마법 세계의 방식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저는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대책없이 진심을 말해버리기로 했다는 뜻이다.
미라벨라는 그때야 비로소 고개를 돌려 메이블을 보았다.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심이 생긴 눈빛이었다.그 빛이 언제 사그라들까, 메이블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가 말하는 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부드러운 부분 같은 건 없었던 사람 같은데, 제가 본 것은 달라서……”

그래서 찾아왔어요. 메이블이 숨차게 토해냈다.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미라벨라는 다시 시선을 돌리고 먼데를 보았다. 한순간 메이블은 그녀가 흥미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천천히 입술이 열리고, 그녀는 느리게 말하기 시작했다.

“걔가 여기 있을 때도 그랬어……. 아가미를 드러내고부터 다들 괴물처럼 봤지. ……그 애는 하루종일 도망만 다녔어. 나는 비밀 통로에 그 애를 숨겨줬어…….”

미라벨라의 초상화 뒤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방금 처음 알았지만,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메이블은 대신에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라벨라는 여전히 그녀를 보지 않는 채로, 허공을 향해 혼잣말처럼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 있었어. 여기 호그와트에, 좋아하는 애가. 이름이 뭐였더라…… 그 때 반장이었는데. ……파란 리본으로, 이렇게 머리를 묶고……. 그 리본만 보이면 숨었어. 항상 숨었지만 그 애한텐 더 그랬어……. 그 애는 화가 나서 잡으러 다니고……. 그러면 더 꼭꼭 숨고……. 근데 창피해서 그런 것 같았어.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지는 않으셨어요?”

메이블의 목소리에는 기쁨의 환성과 아쉬움의 한숨이 반반씩 섞여나왔다. 미라벨라는 코를 찡그렸다.

“그런 걸…… 왜 물어봐. …… 다들 걜 괴롭혔어. …… 그런데 나까지 그러면 어떡해.”

상상할 수 있었다. 펜시브에서 본 병든 핀갈이 고름투성이의 몸으로 허덕이며 달려오면, 미라벨라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초상화를 돌려 남들은 모르는 곳으로 피신시켜주는 장면을. 학생들에게는 관심도 보이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배경처럼 보이는 초상화에게 캐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메이블은 어딘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미라벨라. 대답해주신 것도…… 다른 것도 모두.”

미라벨라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메이블을 쳐다보았다. 말하고 싶은 마음은 잔뜩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메이블은 그냥 웃었다. 긴장해 떨리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최대한 활짝. 어설프고 미숙하더라도 지금 느끼는 것이 전해지기를. 미라벨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 ……뭐……. 졸업 때쯤엔…… 좀 나아 보였어. …… 힘낼 거라고 했어. …… 친구가, 일자리를 소개해 주기로 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주 나쁜 곳이었다며.”

메이블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미라벨라는 핀갈의 고통을 이해했다. 그를 지켜줬다. 눈에 띄지 않는 한켠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 소년이 이 곳을 떠나 무엇이 되었는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떤 말이 그 심정을 위로할 수 있을까. 하물며 핀갈을 만나본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의 말이. 메이블은 작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다치게 했죠.”

그녀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라벨라는 시선을 외로 비낀 채, 복도 바닥의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픔도 분노도 떠오르지 않은 무표정인데도 그 얼굴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그는 용서를 빌어야 할 거에요……. 그렇지만 저는 다른 모두가…… 그러니까, 그가 ‘나쁜 곳’ 말고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게 한 저희가…… 저희 모두가 먼저 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제가 혼자 정할 수가 없어서 미안해요. 메이블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라벨라의 품에 안긴 물고기가 메이블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미라벨라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눈을 들었을 때 미라벨라는 고개를 아까전과 다른 쪽으로 돌려 복도 저편의 빈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슬픔의 감정이 확연한 얼굴이었다. 창백한 뺨을 타고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흘러내려 물고기 위로 떨어졌다. 물고기까지도 슬퍼 보였다.

“……있지, 졸업하던 해에는…… 피하지도 않고 종종 둘이 같이 있었어. ……나는 그래서…… 둘이 결혼할 줄 알았어. 걔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줄…….”

미라벨라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애는 핀갈과 같은 존재가 됐겠지. 메이블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사실인데 어쩐지 바로 와닿지가 않았다. 핀갈 모이레 모레이가 받은 대우는 미라벨라의 지나간 미래에 있었을지도 모를 그녀의 아이가 받게 될 대우, 그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그녀의 아이에 대한 시선이다. 진짜 미라벨라 플렁킷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여기에 있는 ‘이’ 미라벨라는 미래를 모르는 그대로, 막 사랑에 빠진 젊은이인 그대로다. 아니, 그대로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일화를 표현하는 초상화로 단순화된, 결혼에 관한 것 이외의 다른 모든 측면들이 흐려지고 지워진 미라벨라의 축소 복제. 그렇다면 ‘이’ 미라벨라에게 그 일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깊게 남아있을까.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녀의 사랑을 혐오하는 세계의 예증이 되어.

“그 때보다 지금은 더 많아요, 미라벨라. 그 때도 있었지만, 적고 약했을 뿐이에요…….”

더 많아질 수 있게 제가 노력할게요. 마지막 말은 속으로만 되뇌었다. 앞으로는 분명 더 많아질 거라고 말할 만큼의 자기확신이 메이블에게는 없었다. 세이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미라벨라는 그저 부드럽고 간곡하게 말을 붙이는 목소리에 위안을 얻는 듯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훌쩍였다.

“그래. ……궁금증은 풀렸어?”

“아직요.”

메이블은 솔직하게 말했다. 최초의 의심이 확정된 지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의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호그와트 시절부터 그런 관계였다면, 핀갈은 레아 윈필드가 장래 하게 될 일을 알고 있었을까? 혹은 레아 본인도 몰랐을까? 핀갈이 사랑한 건 호그와트 시절의 레아 윈필드인가, 아니면 그 이후의 레아 윈필드인가? 그 시대에 인어 혼혈을 남자친구…… 아니, 일단 일방향의 감정이었을 수도 있으니 그냥 친구라고 쳐도, 가까운 관계로 문제없이 받아들일 만큼 개방적이었던 사람이 왜 모르가나 가민의 추종자가 되어 모두를 배신한 거지? 그래놓고 나중에는 왜 모르는 척한 거고? 당초에 레아 윈필드는 진짜로 어떤 사람인 걸까?

사실 다른 무엇보다, 여전히 최악의 순간에 핀갈이 지은 표정이 이해되지 않는다. 메이블은 숨을 들이쉬었다. 먼길을 와서 이제야 겨우 도입에 들어선 듯했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한 걸음을 어디로 디뎌야 할지는 알겠으니까. 그리고 아주 기쁘게도 그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고마워요. ……약속할 수는 없지만, 알게 된다면 미라벨라에게도 이야기해줄게요.”

잘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미라벨라를 등지고, 메이블은 아스테르가 알려준 계단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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