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쳐줘, 스즈카 선생님!

벨스즈

리틀 가든 by 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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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판타 뮤지카에 합류하고 나면 월차는 고사하고 연차 역시 꿈도 꾸기 힘들다는 것은 입사 서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따지자면 블랙기업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입사하고 싶다는 소망들이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불거지는 이유는 예술인에 대한 존중 역시 다른 극단에 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이야기 역시 같이 돌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쉴 틈 없는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 측면에서.

그러나 그런 소문이 무색하게 이번 여름은 판타 뮤지카에도 나흘 정도의 짧은 휴가 공문이 내려왔다. 이유인즉, 극단 프란치스코의 스탠드 업 코미디가 거리 전역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며 판타 뮤지카의 고급 뮤지컬 선전에도 잠시 막이 내려왔기 때문. 단장인 벨벳이 한 때의 유행에 휘둘릴 생각이 없었기에 별 다른 계획 변경 없이 여전히 여름철에 공연할 극을 연습하는 일정을 강행시켰지만, 싸구려 길거리 극으로 시작했던 극단 프란치스코가 사람이 가장 미어터질 시기인 여름의 한 주에 뮤제의 대극장 공연권을 따내는 기염을 발휘. 기존 공연할 예정이었던 판타 뮤지카를 밀어내기까지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기에 내부에서도 역시 유행을 맞춰 극을 선정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방향의 공연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잠시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빈 스케쥴을 어떻게 활용할지 말이 나오던 그때 벨벳이 극단원 전원에게 휴가를 내주겠다 선포하며 그런 소란도 사그라들었다. 좀처럼 없는 여유 시간을 가능한 빽빽하게 즐기기 위해, 혹은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휴가 전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짐을 싸는 단원들의 입에 주로 오르락내리락한 이야깃거리의 주제는 이거였다.

과연 단장도 휴식이란 걸 할까?

세워진 지 채 몇 년, 여기까지 판타 뮤지카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6살의 벨벳이 쉴틈 없이 달려와서가 컸다. 각본에 대한 경매부터, 수준급의 기구를 들여오는 것, 재무 관리, 표의 선전, 극단원의 역할 선발까지를 모두 도맡는 (사실은 스즈카가 절반은 한다) 같은 인간이 아닌 듯한 무시무시한 단장님이 나흘간 늘어져서 잠을 자는 꼴이라니…. 쓴소리 한 번 씩은 들어본 단원이라면 그 모습을 상상해 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날 이야기의 결론은 어딘가에서 또 다음 극을 준비하실 거라며 매듭지어진 채로 마무리. 결전의 휴가 첫 날, 단원들은 어젯밤 챙긴 짐을 한 품에 끌어안고 극단에서 지원해준 기차표를 손에 쥔 채 저마다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해지는 친구들을 만나러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남은 벨벳과 스즈카는.


“벨, 눈 나빠진다고 비디오 볼 때는 최소 일 미터 이상 떨어져서 앉으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스즈카. 적어도 조언할 거면 너부터 잘하고 나서 해. 네가 얼굴에 걸치고 있는 건 뭐지? 장식이니?”

“어이, 어이. 내 쪽이 나이 먹고 후회하고 있으니 알려주는 거잖냐……!”

전날 대여해온 네 편의 비디오테이프들을 차례로 감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벨벳만. 스즈카는 저 안 쪽 주방에서 프라이팬에 팝콘용 옥수수를 볶으며 귀동냥으로 내용을 듣기만 했다. 스즈카, 선반 위 카라멜도 반드시 넣어. 너, 먹고 꼭 양치해라…. 그렇게 툴툴거리며 스즈카는 왼손으로 옥수수를 볶으며 선반에 있는 카라멜 한 통을 오른손으로 꺼내 프라이팬에 집어넣는다. 저렇게 전부 위에서 지시하는 성질머리는 어디서 배워온 건지. 사실은 그 성질머리를 전부 받아주는 스즈카가 옆에 있는 것도 벨벳의 그러한 성격 형성에 큰 기여를 했지만 스즈카가 그걸 알 일은 없다.

위로 아래로 프라이팬을 들들 볶다, 기름종이를 깔고 접시에 팝콘을 준비하는 데에 17분 가량을 쓰고 나서야 스즈카는 겨우 그 날의 첫 테이프를 같이 감상할 수 있었다. 전부 아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집중할 필요도 없었지만. 예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던 스즈카. 그가 거기에까지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이러했다. 필사적으로 세상을 관찰한다. 생계를 위해 하는 아르바이트의 자리에서건, 신인이라 무대를 등단하기 전 그 밑에서 사람을 접객하는 일이건, 한 사람 한 사람 분의 인생을 빼곡하게 메모지에 적어 외워둔다. 실생활에서 할 수 있는 관찰의 한계에 다다를 때 즈음 모르는 영역에서 이어나가 관찰을 쉬지 않을 수 있게 해준 건 지금은 타계하신 벨벳의 아버지였다. 당시에는 상당히 고가의 물품이었던 비디오 테이프를, 공부하는 데에 사용하라며 서너 주에 한 번씩은 꼭 어딘가에서 구해 손에 쥐어준 것이다. 지금 벨벳이 보고 있는 테이프는 그 때에 스즈카가 봤던 것 중 하나.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곤 할 수 없지만 순위를 매길 때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받은 테이프가 닳을 정도로 보고, 또 보고…. 수십번은 반복해서 봤기 때문에 시작할 때 나오는 이 싸구려 효과음도 이제 와서는 익숙하다. 그 때의 향수를 줄 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스즈카가 턱을 괴려고 하던 그 때.

“재미 없어.”

“너 말야, 네 눈 앞의 영화가 내 추천작인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

“그럼 최대한 돌려 말하는 성의라도 보여라……!”

“하지만 정말로 재미 없어. 이거, 액션 영화인거지? 그런데도 배우의 액팅이 깔끔하지가 않아. 나는 영화에 대해선 모르지만 이 쪽도 예술의 업계 중 한 갈래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적어도 액션 영화의 타이틀을 내걸 정도라면 지켜야 하는 최소 선이란게 있는 거잖아. 봐. 바로 지금 촬영자가 배우에게 있어서 실례를 범하고 있지 않아? 기본적인 부분은 그렇고, 미감이 말하기 민망할 정도야. 대체 방금 전 몬스테라 화분에 카메라를 들이댄 이유는 뭐야? 결말 부근의 무언가를 암시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만, 그만해……!”

벨벳은 나 참, 하고 볼멘소리를 내며 스즈카를 뚱한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내가 짓고 싶은 표정이다, 이 자식아. 뭐, 스즈카도 이 정도 불평불만은 감수하고 있었다. 그야 벨벳은 로맨스에 관련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벨벳의 추구에 맞춰 판타 뮤지카의 간판 극들도 대부분 동화 원작의 내용이거나 하고, 잔인하거나 자극적인 내용 보다는 가족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내용을 주 소재로 삼고 있다. 반면 스즈카가 예전 섰던 공연들은 8할 정도가 성인 관객들을 위한 것. 상간녀에 대한 극의 남편 역으로 주역 자리에 섰을 때, 등장인물과 배우를 분간하지 못하는 어르신들에게 한동안 길거리에 나갈 때마다 꾸중을 들었던 기억 역시 있다. 벨벳의 아버지, 스즈카가 부르길 어르신은 그런 극에 서는 스즈카를 위해 이십 대 초반의 남성들이 즐길 법한 비디오를 건네주었으므로 16살인 벨벳이 그걸 본다고 해도 큰 호평을 받지 못할거란 생각이야 이미 스즈카도 한 지 오래였다. 당초에, 이런 것보다는 평범하게 유원지나 저번 판타 뮤지카 전원이서 갔던 수족관을 예매해주려고 했는데. 급하게 잡힌 휴가 일정이라, 이미 티켓은 전 매진 상태. 벨벳이 스즈카는 쉴 때 뭘 하냐는 질문에 넌 봐도 이해 못할 것들을 본다고 대답해버렸고, 그걸 들은 벨벳의 심기가 울컥울컥 솟구치는 바람에 지금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을 늘어놓던 와중 영화는 점점 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저기, 좋아하는 장면이었지. 여자 주인공인 캐서린을 지켜주기 위해 주인공인 윌리엄은 일부러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다. 너 따윈 필요 없어, 자기가 특별한 줄 알고 있었나. 캐서린은 그 말을 묵묵히 담아두고 듣다, 윌리엄이 마침내 떠나려고 걸음을 옮길 때에 뛰어가 그를 확 안아버린다. 그리고 나서 하는 말. 당신의 거짓말은 너무나도 상냥해서 가슴 이 부근이 아파와. 명대사로 꼽히지 저거. 벨벳이 말한 대로 화면의 구성은 그 때 그 시절이라 조악하다면 조악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감정선이 기막히게 공감이 간다. 윌리엄은 그 말을 듣곤 침묵. 화면에는 두 사람만이 담기고 허리를 다른 손으로 끌어 안는다. 실루엣으로 두 사람은 점점 포개지며 두 사람의 입은 맞닿게 되고……. 이런 내용, 벨벳이 봐도 괜찮을까? 잠깐 고민을 하던 찰나 스즈카는 옆에서 계속 나던 팝콘 씹는 오독오독 소리가 멎은 것을 알게 됐다.

“…….”

새빨갛게 질려서 입을 꼭 다문 벨벳. 스즈카는 정말 오래간만에 하여간 어리긴 어리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일을 할 때의 벨벳은 예전 스즈카의 극단 단장보다 더 모질게 스즈카를 대하는 경우가 많아 눈 앞의 녀석은 16살 밖에 안 된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의 단장, 고집불통인 정도가 심해 그 때에는 꼰대라는 생각을 분명 했는데 가까운 곳에 그것보다 더 한 꽉 막힌 자식이 있을 줄은……. 그것보다 계속 상영하고 있을 틈이 아니다. 기억이 맞다면 이 다음은 자세하겐 나오지 않지만 분명 커텐으로 가려진 채로 실루엣만 나오는 베드씬. 2년 전 이 맘때 즈음에도 스즈카가 보는 건 나도 볼 거야 스즈카가 봤다면 나도 볼 수 있어 종알종알 말하길래 마일드한 쪽으로 빌려와 같이 봤다가 비슷한 일이 일어나 도중 중단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대여할 때는 괜찮다고 엄포를 놓길래 두 살 더 먹은 지금에 와서는 괜찮으려나 하고 빌렸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나잇대에 이 정도는 럭키, 하고 봤던 것 같은데 말이지…… 시덥잖은 과거 회상에나 좀 잠기다, 스즈카는 손을 놀려 상영 기구를 삑 멈췄다.

“뭐, 뭐야.”

“네가 더 못 볼 것 같아서.”

“지금 나를 어린애로 아는 거야? 이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어. 연인간의 프렌치 키스, 저번에 읽은 책에서 이미 본 지 오래야.”

무슨 책을 읽은 거냐?

“연인 사이에 저런 스킨쉽을 하는 건, 보통인 거잖아. 그, 뭐랄까. 입술을 맞닿는 거라던가. 피부 접촉에서 친밀감이 생기는 거지. 알고 있어 그 정도는. 판타 뮤지카의 극에도 언젠가 사랑 얘기가 나올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견본으로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그러니 다시 재생해 스즈카.”

“뭐, 판타 뮤지카에 저런 내용의 극이 오를 일은 없지 않을까…….”

벨벳의 입가가 꿈틀거린다. 아마도 스즈카는 이 즈음에서 비위를 맞춰줬어야 했다.

“흐응. 왜 그렇게 생각해? 우리 극단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단 걸 너도 알텐데.”

“네가 힘드니까, 저런 내용은.”

말하고 10초 뒤 스즈카는 이런 말은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됐다는 걸 깨닫는다.

“당장 틀어.” “아니, 싫다고……!”

스즈카가 손에 쥔 리모컨을 빼앗기 위해 벨벳이 그 위로 덤벼든다. 스즈카는 재빠르게 다른 손으로 리모컨을 옮겨 벨벳의 손이 닿지 않는 벽장 위로 그것을 올리려고 했으나 스즈카의 손을 빠르게 후려친 벨벳에 의해 실패. 리모컨은 바닥으로 놔뒹굴어지고, 벨벳은 그걸 낚아채 재생 버튼인 세모 모양을 삑 누른다. 스즈카의 위에 앉은 채로. 그리고 재생된 것은, 스즈카가 방금 생각했던…….

“…….”

“…….”

여기서 나오는 교성이 이렇게 적나라했던가? 분명 혼자 볼 때는 캐서린과 윌의 사랑이야기에 눈물 찔끔 흘리느라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기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그 직후 바로 자기 위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 으, 어, 읏……!!!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안 봐도 괜찮다고! 마음이 급해져 거칠게 손을 뻗어 벨벳의 리모컨을 빼앗으려 했지만 벨벳은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다. 아니, 오히려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때에도 봐야겠다 결심하면 멈추지 않겠다는 거냐, 고집 한 번 알아줘야 한다니까! 힘을 줘 억지로 빼앗으려 하면 당연히 몇 초도 되지 않아 가져올 수 있었지만 한 번도 벨벳의 앞에서 주먹을 휘두른 적 없는 스즈카였기에 정말로 깊은 고민에 빠지던 찰나.

“아아 윌리, 좀 더 세게 안아줘……!”

스즈카는 심각성을 느끼고 그대로 벨벳을 자빠트려 손에 든 리모컨의 네모 버튼을 눌렀다.


“…….”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벨, 내가 이 나이 먹고 너한테 이렇게까지 사과해야겠어?”

뭐가 미안한지 알기나 하는 거야? 벨벳은 그렇게 말하곤 스즈카에게서 시선을 홱 돌린다. 사죄용으로 방금 스즈카가 막 타온 코코아를 홀짝거리면서. 그 위, 마시멜로는 벨벳의 기호에 맞게 너무 달지 않고 딱 적당한 양인 두 개가 올라가 있다. 잠깐. 어제 빌려 준비한 비디오도, 방금 먹다 더 못 먹을 걸 서로간 합의해 깔아 둔 기름종이로 포장해 넣어둔 카라멜 팝콘도, 지금 마시고 있는 마시멜로 코코아도 전부 내가 준비해준 거잖아. 대체 내가 여기서 뭘 더 사과하라는 건데? 여기까지 이르러서야 스즈카는 드디어 자신의 정당한 권리 주장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항의를 좀 해야겠다는 스즈카의 마음이 점차 곧게 서는 것과는 다르게 벨벳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스즈카는 마음 속에서 벨벳의 그러한 분노의 원인을 애 취급을 해서라고 적당히 뭉텅그렸지만 사실은 구체적인 원인은 이랬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스즈카는 이미 한참 전에 발을 디딘 후라는 사실이 열이 받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다른 원인이라고 하면, 자신은 분명 힘을 잔뜩 주었는데 맥 없이 손 안에서 리모컨이 흘러 나가버린 것. 판타 뮤지카에 로맨스극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를 단장인 자신이 그런 분야를 모르기 때문이라며 알지도 못하며 일축시킨 것. 하나 더 꼽자고 하면 자기가 요구한 마시멜로 양은 분명 세 개 였을텐데 오늘은 이미 카라멜을 질릴 정도로 먹지 않았냐며 딱 잘라 거절한 것. 뭐 그 정도가 있다. 사과용으로 내놓겠다는데 거기서 하루 권장섭취 당류의 양을 왜 고려하고 있는 건데?)

16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시선의 간극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걸 벨벳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다. 예로 스즈카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 교류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얘기하는 스즈카에게 벨벳은 때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과 시간을 보낼 때에 그 누구보다 즐거운 아이로 만들어주려 늘 고생이었기 때문에 스즈카가 회상할 때에 말하는 애틋함이나 슬픔이란 감정이 벨벳의 추억에는 묻어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모르는 감정. 판타 뮤지카의 단장으로써, 나아가 환상흥행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자신은 그 누구보다 감정이란 단어에 기민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최근 판타 뮤지카가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 스즈카에게 수정 지시를 내렸다 다시 되돌리게 한 그 각본도 슬픔이란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뻔 했었지. 그런 걸 생각하면, 역시 스스로가 조금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져서…… 그 순간 벨벳은 결심이 섰다.

“스즈카.”

스즈카는 순간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나에게 가르쳐. 연인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예감은 그다지 틀리지도 않았다.

코코아를 타는 김에 준비했던 자신의 에스프레소를 갑작스럽게 뿜어내는 바람에 뜨거운 증기가 목 구멍에 잔뜩 달라붙어 스즈카는 컥컥하며 콜록거린다. 벨벳은 쇠뿔을 단번에 뺀 김에 후련해져 그걸 진정시키는 데에 드는 2분 남짓의 시간 정도는 기다려주기로 양보하고 그 동안 가만 서서 스즈카를 빤히 들여다본다.

“벨. 농담이지……. 농담이라고 해주라. 부탁할게.”

“난 농담같은 건 하지 않아.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때 시덥잖은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그게 지금이라고 해달라는 거다……! 내가 너랑 그런 걸 왜 해야하는데! 너, 연애 상대는 없어? 관심 가는 상대는?”

“무슨, 있을 리가 없잖아…!!!!!”

스즈카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벨벳은 바로 직전 베드씬이 간신히 꺼졌을 때와 비슷한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내지르곤 몸을 바들바들 떤다. 이런 녀석이 지금 나에게 연애를 알려달라고 하는 거냐. 전 여자친구라고 해도 자신보다 나이 차이가 심한 여자를 만난 적은 좀처럼 없고 대부분이 동갑, 또래, 비슷한 나이였던 스즈카에겐 나름 신선한 반응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니, 벨을 전 여자친구들과 비교하고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스즈카의 냉담한 자기 비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연 건 벨벳 쪽.

“너는 지금 나에게 켄트와 연애 공부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

“그게 아니라면 히스와 연애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래도 그 녀석, 인기는 제법 있잖아. 팬레터라던가, 수두룩하게 받는 거 봤단 말—”

“스즈카, 진심?”

“……. 연애 측면에서 히스가 너를 교육시키는 건 힘들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길거리의 어중이 떠중이 시정잡배와 내가 연애 공부를 해야할까? 네가 말해봐.”

“아니, 그렇게 놔둘리가 없잖아? 네 아버지와 너를 지키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럼 결정이네. 스즈카, 당분간은 선생님으로 부탁해.”

“이……”

벨, 너랑 그런 공부를 하는 것도 지킨단 측면으로 봤을 땐 약속을 어기는 것과 다름 없거든? 그런 소리를 입 밖으로 내기엔 오늘 하루 벨벳의 기분이 나빠질만한 일이 이미 수 번 반복 되었다는 걸 스즈카는 알고 있다. 여기서 한 발자국 걸어 나가면 그땐 정말로 지뢰밭이겠지.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는 수 밖에 없어. 끔찍하게 거절하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참고 적당히 둘러대겠다고 다짐하며 위에서 아래로 고개를 간신히 끄덕인다.


휴가가 시작된지 이틀 째.

스즈카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후라 좀처럼 잘 수 없어서 자기 전 들은 말이 제발 거짓말이길 벽 천장의 고사리 무늬를 하나 둘 세다 눈을 감은 뒤 겨우 쪽잠을 자고 일어났다. 물론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 잘 부탁해 하는 벨벳에게 간절하게 빌었던 간밤의 소망마저 저지당한 채로 아침 세안을 하고 있다. 애초에 연인 사이를 가르친다고 해도 뭘 가르친단 말인가. 비누로 점차 늘어만 가는 것 같은 눈가 주름을 꼼꼼하게 닦으며 벨벳이 어디까지 아는 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만물을 알고 유행을 빠르게 치고 달려 나가는 그 판타 뮤지카 극단의 단장님이다. 판타 뮤지카의 극단 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매입하면 십만에서 삼십만 언저리이지만 반드시 구하고 싶을 때에 암표상을 통하면 여덟 자리를 호가한다는 말은 귀뜸으로 전해들어 알고 있다. 그 비정상적인 가격 수요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오늘 아침 자신에게 연애를 가르쳐달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한 망할 꼬맹이. 그런 녀석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누가 믿겠는가. 벨벳의 학교 성적은 항상 위에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는 걸 꼬리표 뗀 것을 어르신에게 보여줬을 때 곁눈질로 봐서 대강은 알고 있다. 이후 초등 수준을 졸업하던 때에 이제 이런 건 필요없다는 말과 함께 자기 스스로의 결정으로 홈스쿨링으로 전환. 그 날에 스즈카가 한 거라곤 자리에 가서 인주를 묻히고 지장을 대신 찍어준 것 뿐이다. 하기사, 벨벳이 교내에서 시간을 보내면 그것만으로 천문학적인 손해가 되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라고, 그 때는 생각했지만…….

그 때 이후로 별다른 성교육을 한 적이 없다는 걸 불현득 스즈카는 깨달았다.

“…….”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즐거운 것만 보여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어르신이라고 해도 장차 아이가 자라나갈 순간에 있어 그런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부모된 마음으로 언제까지나 순수하기를 바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그것은 욕심이니까. 그러니 언젠가 가르쳐줬을 테고 모를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던 스즈카는 어르신이 마지막으로 벨벳을 돌보던 건 다서여섯 살 무렵이라는 걸 드디어 떠올려냈다.

“………………”

그러니까 혹시 지금의 벨벳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본인의 귀책인 걸까. 정말로 이번 휴가를 틈타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걸지도 몰라. 어제 했던 말. 뭐. 시정잡배? 정말로 그런 놈팽이에게 홀라당 마음을 빼앗겨서 어디 사는지도 모를 규수와 혼인하겠다고 그 어린 놈이 말한다면. 자기가 속은 지도 모르고 그 고집으로 바락바락 주장한다면, 자신은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려야 하지? 눈 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정말로 선생님이 되어줘야 하는 건 나일지도 몰라. 차라리 각오를 하자.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주자…… 묻은 비누 거품을 흐르는 물로 전부 헹궈내고 세면대 위 올려뒀던 안경을 고쳐 쓰며 거울을 다시 본다. 말끔한 얼굴. 뭐 내가 말하기도 뭐하지만 이 나이에도 아직 죽지 않은 외모. 그래, 차라리 내가 열심히 하자…… 이른 아침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스즈카 역시 결심이 섰다.


“있지. 그래서 뭐부터 하면 돼?”

아침으로 간단한 프렌치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는 둘. 방울 토마토의 꼭지를 따거나 양상추를 말끔하게 씻는 일은 벨벳이 했지만 대부분의 요리는 스즈카가 전담했다. 증거로 샐러드에는 평소엔 좀처럼 벨벳이 먹지 않는 채소들이 잔뜩 들어가 있다. 벨벳이 아침을 맡았다면 샐러드라고 해도 양상추 조금과 토마토, 깨 드레싱만 가득했을 테니까. 물론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스즈카가 당근을 숭덩숭덩 채썰어 샐러드에 집어넣을 때 이런 건 굳이 넣지 않아도 되냐고 벨벳이 투정을 부려왔지만…… 오늘만큼은 스즈카도 그 정도는 가뿐히 무시했다. 선생님이 되어달라며. 안 먹으면 그만둔다. 그렇게 말하자 온갖 귀책을 써가며 야채 먹는 일에선 술술 빠져나가던 벨벳이라고 해도 어느정도는 수긍. 녀석, 자기가 어제 내게 얼마나 억지를 부렸는지는 깨달았나보지. 어제 이해해줬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스즈카는 샐러드에 넣어둔 케일을 두 겹 포개 입에 집어 넣으며 답변한다.

“글쎄, 보통은 손 잡는 게 첫 단계겠지.”

“손잡기라.”

흐응 하고 벨벳은 골몰한다. 이윽고 입을 열길,

“이미 너랑 손잡는 것 정도는 했는걸? 네가 살던 홍매국으로 가서 그 쪽 나라 축제를 구경할 때 전통 신발이니 체험해보라고 여종업원이 건네 준 게다가 좀처럼 안 맞아서 넘어질 것 같다고 말하니까 걷는 내내 네가 손을 잡았었잖아.”

“그거 대체 언제적인데…….”

“내가 일곱 살이던 때.”

갑자기 입에 넣어 둔 케일이 신문지 씹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곱 살이니 뭐니 그런 말을 확확 내뱉지 말라고. 새삼 내가 어린애랑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단 말이다 벨!

“그래도 다르지. 연인으로써의 손잡기와 단순히 친구 사이에 손을 잡는 건.”

“뭐가 어떻게 다르단 거야?”

벨벳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지금의 저 표정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뜻. 입으로 백 날 얘기하는 것보단 실전으로 알려줄 테니까 설거지도 마저 도와. 그렇게 말하자 동그랬던 눈이 치켜뜨는 형상으로 바뀌었다. 저건 불만 많다는 뜻. 알면서도 모르는 척 먹은 그릇을 모아 세면대에 넣어둔 뒤 까딱 손짓하니 군말 없이 자기가 먹은 그릇을 들고 이 쪽으로 쫑쫑 걸어온다. 지금의 나는 선생님이니까 나름대로 말을 들어준다는 건가? 자기가 했던 말은 어기지 않으려고 하는 고지식한 녀석답다. 저 시건방진 꼬맹이가 나름 순순히 말을 들으니 귀엽기까지도 한 걸. 그런 생각을 하며 스즈카는 거품을 짜내 접시를 닦는다. 벨벳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옆에서 컵을 닦는다.


“벨. 손은 제대로 씻고 왔겠지.”

“으… 으응.”

벨벳은 소파에 앉아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현장체험활동도 아니고 손을 먼저 씻고 오라고 하다니. 뭐 그런 류 불만이 가득한 눈. 하지만 말이다 벨, 스킨쉽을 하기 전 깨끗한 몸상태가 되는 건 필수불가결이라고. 선생님이 시키는 지시를 듣겠다는 결심은 아직 유효한지 평소라면 바로 입 밖으로 불만을 뱉었을 벨벳이 입을 열기 전 먼저 스즈카 쪽에서 말해오니 벨벳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깨끗하게 씻는 데에 집중했다. 그건 그렇고 좀처럼 긴장한 모양새다. 사실 벨벳과 스즈카에게 손을 잡는다는 것은 9년 전 그때가 아닌 지금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스즈카는 종종 벨벳이 경매를 나서거나 할 때 넘어지지 않도록 먼저 손을 건네오거나 한다. 벨벳이 그런 스즈카의 손을 나 혼자서도 걷을 수 있다고 무정하게 쳐내서 그렇지. 그러나 스즈카가 말한 것과 같이 친구 사이 손을 잡는 것과 연인 사이 손을 잡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는 법이다. 상대방의 손을 다루는 마음가짐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잘 봐둬.”

스즈카는 작달막한 벨벳의 손을 스스럼없이 포개 잡았다. 키가 큰 남성들은 손도 따라 크다고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거칠게 살아 온 스즈카의 손은 그것보다 조금 더 크다. 그런 손이 아직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얗고 부드러운 벨벳의 손을 깍지를 껴 적당한 세기로 꽉 밀착하여 붙잡아온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 잡는 방식이 다르단 거다. 스즈카는 한 번도 벨벳의 손을 이러한 방식으로 잡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잡을 때라고 해봤자 그가 예전 만난 전 여자친구들을 에스코트 할 때라던가, 사귀기 전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어프로치를 할 때라던가. 켄트를 대할 때나 신인 스태프를 대할 때의 그를 표현할 말을 굳이 고르자면 우악스럽다는 단어가 어울린다는 것을 벨벳은 알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스즈카의 모습이라고 해봤자 그 쪽이 더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은 손을 잡자고 선언해도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스즈카는 굉장히 진중하다. 섬세한 손길로 자신의 손을 상냥하게, 기분 좋게 잡아오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벨벳은 어쩐지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어제 생각했던 것 중 하나인 스즈카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잔뜩 걸어왔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조금 무서워서. 미지의 영역을 걷는 것이 하늘 위를 붕 뜨는 것 같아서……

결국 두 사람은 손을 포개 잡은 채로 이 분간 아무도 입을 열고 있지 않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

벨,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을 해라. 지금 내가 엄청나게 민망하다는 거 알기나 해? 말이 좋아 선생님이지 타인에게 자신의 연애에 대해 낱낱이 까발릴 일은 좀처럼 많지 않단 말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밤자리 사정이 어땠는지를 줄줄 떠드는 건 스즈카에게 있어 그다지 성미가 맞지 않았다. 분명 고향 친구 몇 명은 남자끼리 뭐 어떻냐며 좋아하는 여자와 자고 난 감상을 시시콜콜 계속 입 밖으로 내뱉는 놈이 있었지만, 나는 그런 놈들과는 다르다고. 스즈카는 그러한 자리가 있으면 늘상 자긴 컨디션이 안 좋다며 슬쩍 한 발자국 빠지곤 했다. 점잔을 떨거나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침대 위까지의 프라이빗한 영역을 공유하는 것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스즈카였지만 한 발 양보해 지금은 벨벳에게 자신이 여자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실전으로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기분이 나쁘다던지 굉장하다던지 스즈카를 다시 봤다던지 이런 말은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그저 묵묵히 포개잡은 두 손을 가만 응시하고 있는 벨벳은, 스즈카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부끄럽다! 결국 처음에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던 스즈카도 손을 잡은 시간이 길어질 수록 손에 땀이 흠뻑 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벨벳이 놓칠 리가 없다.

“스즈카.”

“어? 응. 왜?”

“혹시 긴장하고 있어?”

스즈카는 답변할 말을 찾다 자신의 손에서 난 땀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만다. 결국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들이밀어진 이상 스즈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밖에 없다. “그래, 그렇다. 왜!” 그 말을 들은 벨벳은 오늘 중 가장 기분 좋은 미소를 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이윽고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입을 떼기를,

“남은 이틀도 잘 부탁해, 스즈카 선생님?”

스즈카의 머리 속에는 앞으로 이 녀석에게 질 일 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는 확신이 가득찼다.


삼일째 아침.

눈을 감는 일이 두 번이 되고 나서야 스즈카는 지금의 나는 벨벳의 별장에 있고 거기에서 은인의 아들에게 연애 강좌를 하고 있다는 걸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여기는 이전 어르신이 살던 곳. 따로 정리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생전에 입었던 옷도 식기도 그대로 있다. 지금 스즈카가 덮고 있는 이불도 어르신이 썼었던 여름나기용 린넨 이불이다. 나는 그러한 공간에서 어제 그 사람의 아들과 손을 잡다 긴장한 건가…… 손을 잡기 전 준비를 하면서도 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하지 못하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다시금 누구 앞에서든 절대 운을 떼지 않겠다고 스즈카는 다짐한다.

이부자리를 개고, 어제와 같이 세안을 한 뒤 하품을 쩍 하며 나가자 식당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났어?”

웬일로 이 녀석이 일찍 일어나 기특하게 식사 준비 두 명 몫을 해준거지. 아침부터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벨벳을 보고 이 쪽이 먹을 것까지 준비했다 생각해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았는데 뭐해? 네 건 없어, 스즈카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그대로 일어난 적도 몇 번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제대로 깅엄체크 식탁보가 두 개 깔려있는 채다. 나름 요리도 여러 개 준비했는지 크림 수프가 그 위에 올려져 있고 다른 접시를 벨벳이 분주히 들어 나르고 있었다. 스즈카는 도와줄까도 생각했지만 모처럼 이렇게 준비해주는 데 감사한 마음으로 받자 생각하고 앉아 수프 한 숟가락을 든다. 후추가 듬뿍 쳐져있는 벨벳 가의 독특한 크림 수프 풍미. 향신료 맛이 강해 처음에는 놀랐지만 차차 익숙해진 스즈카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어린 벨벳도 만들 수 있는 요리였기에 자기도 한 몫 거들고 싶다고 벨벳이 투정을 부릴 때면 어르신이 받아줘 항상 상 위에 수프가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잠깐 머금다 꿀꺽 삼키면 그 때의 추억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그리고 다음 먹을 샐러드가 상 위에 등장하는 순간…… 스즈카는 벨벳이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 대한 진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너, 그냥 야채가 먹기 싫었구나.”

“아닌데?

양상추 조금과 토마토, 깨 드레싱만 가득한 샐러드가 식탁 위에 놓여진다. 이런 걸 샐러드라고 부르면 딜레당트에서는 분명히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 스즈카가 내 쪽이 선생님이니까 말을 들으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을 벨벳은 어제 당근을 미역미역 입에 넣으며 몸소 체감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수쳐서 아침 메뉴를 준비해버렸다 이건가. 머리 꽤나 썼는데. 스즈카가 뚱한 눈으로 벨벳을 가만히 응시하면, 벨벳은 안 먹을 거야? 하고 역으로 되묻는다. 무슨 어두운 속셈이 있다 하더라도 이른 아침부터 스즈카를 위해 요리를 준비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 샐러드도 썰어 내온 바게트도 크림 수프도 깔끔하게 비운 뒤 스즈카가 앞치마를 매고 오늘의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얘기하자 그제서야 벨벳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두 사람은 어제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벨벳은 먹고 싶은 걸 잔뜩 먹어 만족한 눈치로 스즈카를 쳐다보며 다음은 뭐야? 하고 당당히 물어온다.

“허그.”

“허그? 포옹을 말하는 거지. 그거라면…… 그건 히스도 종종 하잖아. 오늘의 음악은 정말로 기분 좋았어. 모두가 있었기 때문이야. 저기, 벨 씨. 끌어안아도 될까? 으음. 전해지지 않았을까. 지금의 내 기분을 전해주고 싶어서라고 하면서.”

말하는 중간마다 특유의 상쾌한 미소를 넣어가며 벨벳은 히스를 흉내낸다. 연기자가 잔뜩 있는 판타 뮤지카에서 우두마리를 맡는 벨벳 답게 간단히 재현한 것임에도 꽤나 히스 본인과 닮아있었다. 이어지는 성질 머리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너,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

“또 무슨 말을……”

“손을 잡는 것도 포옹하는 것도 아버지와 해 본 것들이야. 지금 나를 속이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잘 모른다고 해서 친우 사이에도 하는 표현을 연인간 하는 표현으로 속이고 있다던가. 그런 거면 가만 안 둘…… 우왓.”

더이상의 실랑이는 관두고 싶었던 스즈카는 과감하게 벨벳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로 올린다. 사실은 뒤에서 끌어안는 것으로 백허그야, 백허그 하며 적당히 넘기려고 했지만 여기에선 어른의 연애를 티스푼 정도는 맛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투정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사실은 이 건방진 꼬맹이에게 어제처럼 당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슬그머니 들어가있긴 했다. 팔다리를 어쩔 줄 몰라하며 위에서 바둥거리는 벨벳을 위해 스즈카는 손으로 들어 벨벳의 양다리를 자신의 등 뒤로 빼준다. 양팔 역시 들어 가볍게 자신의 목 뒤로 연결시켜준다. 그러고 나니 벨벳은 사지로 스즈카의 전신을 끌어안은 모양이 된다.

스즈카의 단단한 장딴지 위에 앉아 벨벳은 가만 안겨있다. 평소의 배로 밀착한 자세이기에 심장 고동도 전부 들려져온다. 상대가 지금 여기 내 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전신으로 느낄 수 있는 안정적인 자세. 예전 배우를 해 몸이 좋다는 건 원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품이 단단하다곤 벨벳은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도 의식해서 기댄 적이 없었으니까. 스즈카의 몸이라고 해도 자신이 다룰 때는 배우의 특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여배우들이 몸이 좋다, 안기고 싶다고 한 것 정도야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때에는 그런 기분을 야기하는구나. 그런 역에 배치해야겠어. 하는 생각 정도를 하다 말았기 때문이다. 같이 씻을 때야 몇 번 봐 머리에 있지만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대가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에 새로움마저 느껴진다. 벨벳은 그런 생각을 하다, 계속 모습을 바꾸는 스즈카가 자신의 품 안에서 떨어져나오지 않을 수 있도록 목 뒤로 감은 두 손에 자연스레 깍지를 꼈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곧잘 따라하는 벨벳에게 스즈카는 역시 배움이 빠른 아이라 잠시간 감탄했다. 말 수가 없는 시간이 어제와 같이 이 분 남짓을 넘어갔지만, 이제 스즈카는 벨벳이 그럴 때에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려 하는 것보다 천천히 행위를 긴밀하게 곱씹으며 배우고 있다는 걸 알기에 별 다른 말로 흐름을 끊지 않는다. 그저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며 주는 안정감에 박차를 더할 뿐. 그러려고 했는데, 눈 앞의 녀석은 가볍게 손으로 등을 두드리자 히익 하는 비명을 짧게 지른다. 설마 지뢰를 밟은 건가 싶어 스즈카는 당황하며 벨벳의 얼굴을 본다.

“뭐, 뭐하는 거야?”

“뭐 하냐니, 네 등을 쓸어준 것 뿐…….”

“그게 아니라!”

“아니라니, 뭐가?”

“손이, 조금.”

“조금”

“야하지 않아……?”

눈 앞의 녀석이 새빨갛게 질린 것을 그제서야 스즈카는 눈치챈다.

<나중에 마저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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