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세여, 꽃놀이
퇴고x
만두님 연성 보고. 달달한 만두님 연성도 봐주시기
길던 겨우내 움튼 새싹이 기어코 봄처럼 피었다. 우수가 지나고, 경칩을 넘겨 따사로운 것치고 이따금 따가운 게 심상찮은 햇볕, 겨울이 묻어나 코끝 시린 바람을 모두가 겨울용 겉옷 하나로 넘기면서 은근하게 돌아온 봄이 남긴, 화단에 핀 연두색과 하얀 목련 꽃봉오리에 정신을 판 여럿 중 누군가는 한눈 팔 새 없이 곧장 정문을 넘어 현관으로 들어갔다.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뒤꿈치, 벗은 운동화를 주워 드는 손가락 뒤로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 끝단이 바람에 쓸려 다가오다 떨어지는 사이에 누군가 그 뒤를 가볍게 건드린다. 좋은 아침! 묘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살랑살랑 교복 사이를 유영하며 아직 자라기 바빠서 여물기엔 때 이른 어린 마음을 열기구처럼 동실동실 부풀려 데우더라. 그래봤자 시험 기간인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정이 다 끝나면 어딜 먼저 가볼까 상의하기 바쁜 아이들 속에서 단정한 차림으로 자리에 앉은 잠뜰은 가장 먼저 오늘 볼 과목 위주로 미리 넣어둔 필기 공책을 책상 아래서 꺼낸 뒤 부러 집에서 가져온 줄 이어폰을 귀에 낀 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전원도 켜지 않은 MP3에 연결된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나 영어 단어는 없지만 적어도 어딜 가자며 아침부터 가슴 술렁이게 만드는 이야기에 저를 끼우지 않는다고 일부러 낀 거였다. 어쩔 수 있나. 이번 중간고사에서 받아야만 하는 점수가 있는 학생의 비애다. 콕콕
“어? 어, 좋은 아침이야. 라더야”
“응, 좋은 아침.”
옆자리에 앉는 파란 머리의 짝꿍이 묵묵하게 교과서를 꺼내 읽는 척 몇 번 페이지를 넘기다 귀퉁이를 손톱 끄트머리로 긁다가 구기다 나중에는 둥글게 말면서 얌전하고 부산스럽게 굴어가며 눈치 보는 게 보지 않아도 선하게 느껴져, 똑같이 정신 사납게 딸깍거리던 샤프로 괜스레 공책 빈 곳을 찌르며 검은 점 여러 개를 새기던 잠뜰은 눈 마주칠 상대가 놀라든 말든 불시에 고개를 옆으로 틀어 할 말이라도 있느냐고 채근했다. 다행히 말로 꺼내기 좀체 어려운 게 내용의 중대함은 아니었는지 두 번 정도 더 주저하긴 했으나 결국 공룡이 연락 좀 봐달라는 말을 전하며 증거처럼 제 휴대폰을 꺼내 눈앞으로 들이민 라더 덕에 고개를 뒤로 은근슬쩍 빼면서 지극히 공룡다운 문장의 나열을 대강 훑어본 그는 어차피 시험 끝나면 볼 텐데 왜 애를 채근하냐며 쥐던 샤프를 놓는다. 화면을 덮어버리기 위해서다. 어차피 12시에 시험 끝나잖아. 그럼 어련히 볼 텐데.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같이 공부하자며 지난주에 곁눈질로 슬쩍 본 쪽지 시험 점수와 동아리 고문 선생님이자 영어 담당인 수현의 부탁을 떠올린 잠뜰은 제 손바닥으로 덮은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나 까맣게 꺼졌을 휴대폰을 한 번 보더니 여전히 고민하는 손을 잡고 책상 위로 이끌고, 들어올 때까지 안절부절못하던 라더가 아직도 잡고 놓지 못하던 걸 정말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툭 떨궜다. 혹시 불쾌하게 여기진 않을까 슬쩍 바라본 얼굴에는 편안함만이 남았고, 어려울 거라 지레짐작했던 첫인상과 함께 다른 또래와도 섞였으면 했다는 수현의 바람이 떠올라 멀뚱하니 눈만 깜빡이던 아이는 갑자기 간지러운 기분에 괜스레 입술을 삐족거리다 자기만 믿으라며 손등을 두드린다.
읽지 않아도 무엇 때문에 채근했는지야 뻔한 일이다. 팔도 구석구석에 벚꽃 개화 날짜와 위치를 적어둔 꽃 지도를 본 다음부터 중간고사를 앞둔 잠뜰에게 놀러 가자며(어차피 나머지 둘은 동의했을 게 뻔했기에 자기 쪽으로 먼저 와도 놀라지 않았다더라.) 갖은 떼를 썼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더라. 그래도 학생인데 시험 볼 때는 제대로 봐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연필 쥔 손이 스리슬쩍 아래로 빠지는 걸 못 본 체하면서 기억하는 출제 범위와 예상 문제를 짚어주던 아이는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기를 아예 뒤집어 놓고 다시 짚어주기 시작했다.
“누가 안 간댔나. 시험 다 끝나고 가자는 거 자기도 동의했으면서 저래.”
“……그래? 그럼 오늘 가겠네.”
“그치.”
마음이 들뜨면 들어올 것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벌써 꿈지럭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집중하라며 교과서 위를 두어 번 두드린 아이가 뚜껑 열지 않은 굵은 형광펜 머리로 길게 이어진 문단 중 하나를 문지르며 말을 잇는다. 이거 꼭 기억해둬. 이 용법은 수현 쌤이 나온다고 다섯 번은 강조한 듯? 그리고 대답 대신 열심히 적어가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이제껏 틀었던 몸을 바로 하고 공책에 시선을 둔 잠뜰은 아까보다 조금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구름 없는 하늘을 힐끔거리는 거다. 비 내릴 기미 없이 말끔한 하늘색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옅은 흰 구름 몇 개가 안개인 양 걸려서 흘러가는 날. 제아무리 평일이어도 한창 꽃이 피어나는 기간에는 이 좁은 땅에 이만치 살았나 싶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기 마련이라 가만히 샤프 뚜껑을 입술로 물고서 생각에 잠긴 잠뜰은 대체 어딜 가려고 저렇게 보채나, 사람 많아서 끼는 곳은 별로라며 혼자 중얼거리다 아래로 고개 숙인다. 구불거리는 긴 곱슬머리가 커튼처럼 스르륵 늘어졌다.
“띠~띠이, 대체 선택과목은 왜 있는 걸까?”
“떠니, 오늘도 시험 망했어?”
“흐이잉! 문제가 너무 어려운 거라구.”
됐어 됐어. 이제 중간고사 끝났으니까 놀러 가자, 띠띠! 둘의 자리가 한참 먼 곳에 있는데도 선명하게 들리는 대화가 목소리 때문인지, 친구여선지 가만히 생각해보다 역시 전자겠거니 단정 지으며 이제껏 꺼둔 전화기 전원을 켜는 동시에 책상 정리하던 잠뜰은 그새 가방을 다 쌌는지 자기 자리로 와선 먼저 가본다는 두 사람에게 잘 나온 사진이 있으면 보내달라며, 다음 주에 보자고 대꾸하곤 마지막 OMR 카드 작성 이후로 여전히 이마를 댄 책상에서 일어나질 못하는 짝꿍의 등을 두드린다. 라더야, 일…….
“후배들아, 선배님이 직접 데리러 오셨다! 뭐어가 그렇게 바쁘길래 선배 문자를 아침부터 안 보는 거니. 응? 그래도 시험 다 끝났다고 가방 싸는 걸 보니 기억은 하고 있구나. 맞지? 가려는 준비인 거지? 난 또 우리 비행ㄱ, 아니 잠뜰이가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며 나랑 약속한 걸 다 까먹고 집에 가려는 줄 알고 서운할 ㅃ…….”
“선배, 나가요. 나가!”
다음날이 주말이어도 일주일 내내 끊어둔 독서실은 가야 했기에 영어 담당인 고문 선생님을 내걸면서 시험지 가채점과 오답 노트 작성을 도와주시기로 했으니 독서실 대신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것 같다고 핑계를 댔기에 챙겨온 쫄대 파일에 급한 대로 오늘 본 시험지 전부 넣고서 끼운 잠뜰은 옆에 선 덕개가 시끄럽다며 등을 때려도 여전히 의기양양한 낯으로 재잘거리는 선배를 노려보았다. 지우개 똥 먹일까. 그리고 속으로 한다는 게 그만 툭 내뱉고 만 한 마디에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은근하게 말리는 라더를 힐끔. 보란 듯 긴 한숨을 내쉬며 금방 갈 테니 동아리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손을 휘휘 내저은 잠뜰은 그때까지 여즉 두 사람 옆이 아니라 제 옆에서 빨간 책가방을 등에 멘 채 멀뚱멀뚱 기다리던 친구를 끔뻑거리며 의뭉스럽게 바라본다. 선배가 너보고 나 데려가래?
“…아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럼 먼저 가 있을래? 난 아직 정리 덜해서 조금 더 걸릴 거 같거든. 겸사겸사 뭐라고 하면 금방 간다고 한마디만 전해줘.”
점수나 내신만 엮이면 유독 날카로워지는 걸 자주 본 것도 아니면서 느리게 내쉬는 숨으로 무언가 억누르듯 말하는 제 짝꿍을 묵묵한 모습으로 바라보던 라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걸 곁눈질로 잠시 본 아이는 그제야 놓고 갈 것과 챙길 걸 구분해서 어떤 건 책상 서랍에, 어떤 건 사물함에, 단번에 넣고 싶은지 하나씩 분류해 정리한다. 막상 전부 끝내고 가방을 어깨에 멘 아이가 제 친구에게 말했을 때 어렴풋이 느껴진 것처럼 길게 걸리진 않았더라. 5분이 넘기는 했을까. 그래도 제 핑계 때문에 안 되는 시간을 겨우겨우 빼서 기다리고 있을 선생님과 동아리방에서 투덜거릴 하나, 그걸 듣고 있을 둘이 마음에 걸려서 아직 남아 있는 반 친구들 몰래 실내화 신은 발을 동동 구르던 잠뜰은 급하게 다음 주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곤 뒷문으로 나간다. 아마 문 바로 옆에 선 인영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위층 올라가는 계단까지 달려갔으리라.
라더야?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다 내리면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번드러운 신코만 구경하는 애가, 부를 때까지 계속 거기서 기다릴 것처럼 가만히 있기에 정황을 따진 머리가 저를 기다리고 있겠거니 생각은 해도 썩 납득이 가진 않아서 어리둥절한 낯으로 시선을 맞춘 아이는 일단 가는 게 먼저라며 빨리 가자고 제 친구를 떠밀기 시작했다.
먼저 가라니까. 어차피 같이 가잖아. 이러나저러나 똑같은걸.
이걸 말해도 되나, 아니면 삼키는 게 좋을까. 보는 사람이 내용까진 몰라도 고심하는 게 빤히 보이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술만 달싹거리다 결정을 내렸는지 가방끈을 꽉 움킨 채 올라가는 계단 첫 번째 칸을 밟은 잠뜰이 몸을 기울여 어깨로 빨간 남자 교복 마이로 감싼 팔뚝을 건드리듯 툭 치고는 빠르게 올라간다. 그러고서 별말이 없으니 라더로선 이게 시비인지, 아니면 무언의 표현인지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고.
“선생님, 진짜 오셔도 괜찮아요?”
“물론이지. 선생님은 괜찮아. 오히려 중간에 갈 수 있어서 미안할 따름이란다. 공룡아, 알람 맞췄지?”
잠뜰아, 너 때문은 아니니까 아무 생각 말아. 말랑한 이팔청춘은 온화하다가 때로 차가워지는 봄날이 오면 멜랑콜리에 쉬이 빠져 제 것이 아닌 탓을 껴안은 채 질척한 흙바닥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나이가 처음인 그들이 그런 까닭을 알 리 없으므로, 이런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이게 괜히 제 탓인 기분이라 하얗게 질린 손끝을 꾹 쥐던 잠뜰의 어깨를 가볍게 쥔 덕개는 떴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위치의 눈꺼풀을 깜빡이며 그렇게 속삭였고, 혹시 노골적으로 티가 나는지 물어보면서 괜히 고개만 옆으로 돌려 입술 비죽이던 아이는 아무도 모를 거라는 위로에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능력 써서 알아낸 건 거 같은데, 하여간 고마워요. 뭘 이런 걸로.
“둘이서만 뭐라고 속닥거리냐. 라더야~ 쟤네 둘이서만 말하는 게 아무래도 우리 욕인가 보다.”
“해도 너를 욕하지, 라더를 욕하겠냐?”
“그만, 그만 좀 싸워요. 그래서 공룡 선배, 갈 곳이 어딘데요. 해외?”
“후후~ 아니! 이번에는 국내야.”
장난이 과하다. 관계자 사이에 끼인 이방인이라는 감각이 아득할 정도로 입부 이후 줄곧 가시지 않는 저를 향한 세계 여행 동아리 또래의 지대한 관심을 사무치게 알게 된 일이 몇 번 있었기에,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앓던 잠뜰은 항상 몸이 자유롭던 세 사람의 등에 대롱거리며 달린 배낭을 힐끔거리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선생님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잘 다녀오렴. 조금 이따가 보자.’
장황한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지만, 벙긋거리는 입으로 선생님과 한 차례 대화를 나누느라 한 귀로 흘린 지 오래인 잠뜰과 나머지 둘은 이제 자기 쪽으로 모이라는 말만은 찰떡같이 듣고서 출발하겠다며 나침반을 쥐고 자기 쪽으로 다가오라는 지시를 따라 한 발자국씩 공룡을 향해 다가갔고, 간다며 씩 웃는 입꼬리가 도로 내려왔을 때 눈을 질끈 감고서 바로 옆에 선 인기척이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슬쩍 실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이르게 더운 해가 뜬 곳일까. 아침부터 거하게 먹는 대신 말아온 시리얼을 와작거리며 은근슬쩍 곁눈질로 본 일기예보에서 봉오리가 터지긴 했어도 만개까진 아닐 거라는 기상 캐스터의 말을 기억해서 감흥 없는 얼굴로 주변을 보던 잠뜰이 소리 내며 들판을 달려가는 바람에 한들한들 움직이는 나뭇가지 사이 활짝 피어난 꽃송이를 감탄하며 바라본다. 반응이 좋으니 열심히 알아본 사람으로서 면이 서는지 의기양양하게 저 보라며 덕개에게 뻐기던 공룡은 그래서 편의점이 어딨을까 따위의 말을 조잘대며 갑작스레 자리를 물색하러 떠났고, 자긴 그냥 볕 좋은 곳에 드러누워 자고 싶다면서 버둥거리던 덕개는 억센 손길에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더라. 어떻게 이런 예쁜 곳에서 잘 생각을 할 수 있냔 이유 때문이었다. …같이 갈까?
바람에 계속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누른 채, 저에게 말을 걸었을 때야 곁에 남은 존재를 인지한 사람처럼 가벼운 감탄사와 함께 돌아본 얼굴이 가끔 세차게 부는 바람 타고 날아오는 꽃잎처럼 산들산들 흔들리며 봄에 젖어있다. 묘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때 이른 어린 마음을 부풀렸나. 금방이라도 떠오를 모양새다.
“난 살 게 없어서. 갔다 오게?”
“그건 아니고, 앉을 자리 찾아둘까 했어.”
“아, 그런 같이 가자구나. 난 또 편의점 따라간다는 줄”
그럼 같이 가자는 말이 뒤따르고, 각자 괜찮아 보일 곳을 찾자길래 고개 저어 같이 가는 게 낫겠다고 말한 라더는 별생각 없이 그러겠노라 말한 이가 제 옆에 오기 전까지, 꼭 잠뜰이 하늘이라도 날고 있다는 양 푸른 시선이 갈색 정수리에서 오센티미터 가량 위로 올라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뭐라도 있어? 떠오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라서 가끔 휘도는 바람에 한 번 붕 뜨고 마는 머리카락만 보이던 허공에서 다시 동그란 정수리로 눈을 옮긴 라더는 머리에 벚꽃잎 여러 장이 죄 굴러가며 스치다 문득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걸린 두어 장이 엉클어질 때까지 말없이 지켜보다 실은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느린 어투로 발뺌하더란다. 사진기가 없는데도 버튼 누르면 나는 셔터음이 끊이질 않는 시간이, 같이 둥실거리며 대화 없이 떠올라도 어색하지 않은 때가 봄바람에 사뿐히 굴러갔다. 온종일 시끄러워도 먼저 내미는 기미가 많아 대하기 편한 공룡이나 잠잘 때가 대다수긴 하나 잠자지 않아도 묘하게 거북하고 어려운 덕개와 달리 있어도 없는 듯, 이야기 나눌 때보다 조용히 옆에 존재만 하던 순간이 더 많은 동갑내기 같은 반 짝꿍이 어려울 법도 한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고작 두 마디 이어지고 끊어진 대화가 어렵거나 부담스럽지 않은지 둘 다 자연스럽게 주변만 두리번거리다 괜찮겠다 싶은 자리가 보이면 저쪽으로 가자고 가리키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선배 둘 다 같이 갔으니 여기 가방 놓고 놀고 있으면 알아서 오겠지 뭐.”
그나저나 여기 산속 같은데 어디서 편의점을 찾겠다고 간 거람. 보나 마나 주변 시내로 날아갔을 게 뻔하다고, 들을 사람이라곤 과묵한 동갑내기 친구 하나밖에 없는데 누가 듣기라도 할까 한껏 소리 죽여 쑥덕거리는 잠뜰은 잔뜩 긴장해 어깨가 올라간 아침에 비하면 퍽 편안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킥킥거리며 펼친 돗자리 위로 뻗어 누웠다. 그냥 놀러 오면 혼나니까 아빠 보여주려고 시험지 챙겨왔는데…… 진짜 하기 싫다. 가끔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잘 흘려들으면서 흔들리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하기 싫은데 왜 열심히 해?”
“해야 하니까. 의대 가려면, 그렇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뿌예서 그럴까. 세계 여행부에 들어오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꾹꾹 눌러온 속내를 더듬거리며 말하는 자신이 낯설고, 자신 없게 하는 말이 부끄러워 괜스레 끊어 말하던 잠뜰은 다른 애들처럼 대단하다거나 힘들겠다고 맞장구치는 것 없이 그렇구나를 끝으로 옆에 앉아 고요히 있는 라더를 곁눈질했다. 그냥 다른 친구에게 그러듯 자기에게 둘 관심이 없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진작 처음처럼 둘을 따라가거나 혼자 있을 거라는 걸 당장 확신할 수 있던 아이는 이게 나름의 위로인가 보다 생각하며 턱을 위로 들고서 쨍한 하늘을 바라본다. 걱정 마. 선생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거든. 힘든 일이 생기면 그건 다 꿈이라고. 금방 깨어나서 괜찮아질 거라 하셨거든. 뒤늦게 이어진 위로의 말은 제법 이상하고 도움도 안 됐지만
“그게 뭐야. 다 꿈이면 행복할 땐 어떡하려고.”
“글쎄…….”
“아, 모르겠다. 그래. 지금은 라더 네 말대로 걱정하지 말고 그냥 놀아야지. 꽃도 저렇게 예쁘잖아. 그치?”
환하게는 아니어도 입꼬리 한 번 당겼다고 금방 벙싯거리며 환해진 얼굴로 눈부터 맞춘 잠뜰은 제 말에 느려도 착실하게 답하려는 듯 끄덕인 친구의 팔뚝을 장난스레 뒤로 당기면서 생긴 반동으로 저는 도로 앉고, 갑작스러운 당김에 넘어갈 뻔했으나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힘으로 어찌어찌 버틴 라더는 장난스러운 표정과 자기 옷깃 붙든 손을 연신 번갈아보며 이게 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낸다. 너도 같이 놀아야지. 함께 놀려고 온 거잖아. 시선 맞춤도, 곁에 누가 있든 자연스레 자기 쪽으로 편승시키는 것도 버릇이고 성향일 게 뻔했다. 감정 기복으로 능력의 세기가 정해지는 아이니 늘 자제하기 위해 억누르고 잊히는 게 마음 편한 라더에게 아마도 기껍지 않을 사람. 허나, 그래도 한 번쯤은
“시험 다 끝나고 있던 일이 너무 괘씸하니까 사진도 찍고 자랑해야지. 내가 공룡 선배 우는 소리 꼭 들어야겠거든? 협조 잘하자.”
사그락거리며 온갖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돌풍에 꽃잎이 흐드러졌다. 지금이라고 벌떡 일어나 녹화를 켜고 달려가는 작달막한 등과 여전히 앉아서 그걸 지켜보다 주섬주섬 따라 일어나는 소년. 혼자가 아니라 둘이고, 둘이 아니라 넷이었다가 이제는 다섯이 되었으니 이전보다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을 거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으면서 아이는 적어도 바로 앞까지 길을 먼저 걸어서는 여기로 오라고 손짓하는 사람이 있으니 덜 무섭다고, 기꺼이 꽃무덤으로 발을 디딘다. 모두가 처음으로 선택한 길 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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