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제로] 아이의 기록
*본 소설은 제팡님(트위터@0707x1209)(원문 링크: https://twitter.com/0707x1209/status/1350806973181161472?t=rG4CB9rtz1YrfIJDhjo50g&s=19 의 그림을 소재로 삼아 허락을 받고 작성했습니다. 내용 자체는 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총 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속 글까지 읽으셔야 이야기가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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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날씨 맑음.
저택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여태까지는 아버지와 나 둘이서만 살았는데, 앞으로 생활하는 데에 도움을 주실 거라고 했다. 이름은 디오라고 했다.
오늘 저녁밥엔 처음 보는 음식이 나왔다. 따뜻해서 먹는 게 아닌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따뜻한 음식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따뜻한 음식도 있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먹으면 되는 건지 몰라서 조금 실수를 했었던 것 같다. 디오라는 분이 조금 화나신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나중엔 크림 스튜라는 음식이라고 알려주신 걸 보면 상냥하신 분 같다.
디오라는 분은 손톱도 길고 뿔도 나있었다. 같이 오래오래 지내고 싶지만, 그분이 아프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아버지에게 부탁하면… 들어주실까?
3월 7일. 날씨 맑음.
오늘은 아버지의 기분이 많이 좋지 않으셨다. 내 팔이 찢어져있는 걸 보고 디오님이 지혈이라는 걸 해주셔서 그랬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 만에 회복되는 건지 기록을 하셔야 했기 때문에 화를 냈다. 디오님은 왜 아버지 일을 방해하신 걸까? 난…… 디오님도 좋고 아버지도 좋은데.
두 사람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33월 1100일
아파
아파
아파
머리. 아파. 그란이.
그란이 부르고 있어
가야 해
3월 17일. 날씨 흐림.
내가 열이 나는 동안 계속 디오님이 옆에 있어 주셨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디오님은 이게 자신이 할일이라며 계속 나를 재워 주셨다.
그래서 며칠간 일기를 못썼다.
일기는 상관 없지만, 나 때문에 디오님의 시간이 뺏겼을까 봐 걱정이 된다.
3월 18일. 날씨 비.
디오님의 뿔 끝이 조금 잘려있었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하셨다. 디오님께 물어봤다. 뿔이 다시 자라거나 하나요? 디오님은 열 밤 자면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열 밤 자고 나면 다시 자라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디오님의 뿔, 멋있었는데.
3월 28일. 날씨 모름.
오늘 저녁 식사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서 죄송했다. 디오님이 열심히 만들어 주신 건데…. 내가 맛을 모르겠다고 하니 다시 화난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오늘이 딱 열 밤이 되는 날인데. 다시 물어보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자기 전까지도 뿔은 다시 자라있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자라지 않으면 어떡하지.
혹시 아버지라면…….
4월 1일. 날씨 맑음.
아버지에게 디오님의 뿔을 고쳐 주실 수 있을지 여쭤보았다. 먼저 말 잘 듣고 얌전히 있는 것부터 하라고 하셨다. 내가 착하게 있었다면 바로 들어 주셨을 텐데. 그래서 다음부터는 소리 지르지 않고 조용히 있겠다고 했다. 아픈 건 싫지만... 내가 조용히 있어야 아버지도 좋아하시고 디오님의 뿔도 원래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4월 5일. 날씨...
"또 일기를 적고 계신 겁니까?"
"…아."
두꺼운 표지의 노트가 소년의 책에서 건장한 청년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일기장을 뺏어갔음에도 내용을 읽으려던 의도는 아니었는지 글씨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며 책 커버를 덮었다.
"작은 어르신.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디오님……."
귀를 기울여야지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가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위치로만 본다면 소년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너무 높은 존칭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저택에선 남들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디오는 이제 익숙해진 손길로 책을 정리하고는 소년을 거뜬히 안아올렸다. 소년이라고는 했지만 결코 왜소한 체구는 아니었다.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또래에 비하면 발육이 좋은 편인데도 마치 솜털을 들듯 가뿐하게 들어올린 그가 침대 위까지 제로를 옮겨다 주었다.
조명을 끄기 전, 그의 시선이 제로의 허벅지 위 깊숙이 새겨진 자상에 머물렀다. 지혈을 제대로 하지도 못해 우둘투둘하게 딱지가 달라붙어 있었다. 조금만 스쳐도 아플 상처인데도 소년은 찍소리 하나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이불을 덮었다.
"…또 어르신께서 그러신 겁니까."
"저, 저는 괜찮아요..."
제로는 얼버무리듯 답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답을 하든 안 하든, 디오는 이미 답을 알고서 물어본 것이라는 걸.
"하아……."
깊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로는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디오님, 다시 화나신 걸까. 내가 대답을 안 해서? 내가 말을 잘 듣지 않아서 디오님까지 여길 떠나버리시면 어떻게 하지? 그건 싫은데. 그건…….
늦게라도 대답하기 위해 이불을 걷어내리고 고개를 들자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디오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에 마음이 서늘해진 제로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보다는 디오가 한 발 더 빨랐다.
"제로."
쿵.
한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원체 무언갈 가진 적 없이 태어난 제로는 누군가가 자신을 깍듯이 대해주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러니 디오가 자신을 작은 어르신이라고 부르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끝이 올 줄은 몰랐다. 디오는 한 번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제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렁그렁 눈가에 물이 맺히려 했다. 안 돼. 울면, 아버지도 싫어하고 분명 디오님도 싫어하실 거야……. 제로는 빠르게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따끔한 아픔과 함께 눈가에 들어찬 물기는 가라앉았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떠…."
제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면 끝이다.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해, 귀찮게 하지 않아야 해...
하지만 어린 소년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떠나지…… 마세요……."
"뭐...?"
"제…제가, 밥도 안 남기고, 말도 잘 듣고, 청소도 도울게요. 그러니까…."
제로는 디오의 표정을 더 바라보는 것이 덜컥 겁이 났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데,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했더니…."
아, 나에게 단단히 실망하신 모양이다. 제로는 더이상 차오르는 설움을 참아낼 수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자신의 울음은 고요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저 조용하게, 뚝뚝 흘러 떨어지는 눈물이 침대 시트 위에 스며들 뿐이었다.
이제 고개를 들면, 제 방을 나가는 디오의 뒷모습을 마주하리라.
"…제로."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디오는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몸을 낮춰 제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소년의 뺨을 다정하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제로에게 있어서 이런 손길과 온기는 난생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디오가 양손으로 소년의 뺨을 감싸쥔 채 속삭였다.
"나와 떠나자."
이곳에서.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내가 너를 데리고 가 줄게.
제로는 한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로는 아버지를 '떠난다'라는 것 자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니까.
제로는 이곳이 '지옥같다'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있는 곳이니까.
제로는 그를 '따라간다'라는 것을…….
"집을… 왜 떠나야 해요?"
마지막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제로는 디오에게 물었다. 디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모든 사람들은 언젠간 집을 떠나."
그것은, 제로가 알지 못하는.
"그리고 자신만의 집을 새로 만들지."
알 수 없었던.
"네가 원한다면… 바깥에 너의 집을 만들어 줄게."
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바깥 세계의 대한 지식이었다.
...
4월 5일. 날씨 맑음.
아이의 기록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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