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 2차

도망자, 변곡점 1

올리기 3일 전에 절단 당한 날조 연성

뜰팁_전용 by 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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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바다의 날 기념, 진짜 바다와 관련은 없지만 호칭이 바다니까 하는 바다조 연성


사람이 총이라면 동그란 눈동자는 총구요, 마주친 시선은 이미 쏘아 보낸 총알이다. 다 타고 남은 화약의 잔해가 뭉개진 잿가루처럼 흔적을 남겨 새카맣게 침잠한 눈알 두 쌍이 결연하게, 어쩌면 느슨한 굴곡을 그리면서 서로에게 총탄을 날리고 뻔뻔하게 재보기까지 한다.

맞췄는가, 아니면 비껴갔는가. 목표를 조준하고 쏘기까지 한 포식자와 교활한 사냥꾼이 이제부터 할 일은 사냥감을 추적하고 찾아내어 만일 살았다면 상태를 지켜보다 찾아온 최적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이므로 아직 서로가 멀쩡하게 살았음을 알게 된 이래 함께 다니기 시작한 두 사람의 눈동자는 계속해서 곁을 힐끔거릴 테다. 목덜미에 혹은 갈비뼈 사이 흉곽으로, 어쩌면 턱 아래 어딘가 났을 박탈흔을 몰래 찾아가면서.

발포가 남긴 은은한 화약내가 코에 들어가지 않도록 적당한 명분으로 만든 설탕물을 한 겹 바르니 꼬이는 벌레로 정신을 흩어 놓고 나란히 서서 시선을 맞출 때마다 묘하게 꿀렁이는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를 메우고 부글거렸다. 시각이나 청각으로 느낄 수 없는 어떠한 것이 계속해서 끓다가 한계까지 부풀어 끄트머리 구석에 조그마한 균열이 이는 순간, 모양을 유지 못 해 그대로 터지면서 비산하는 소리의 연속이 계속 스멀거리는 게 한계까지 붓고 겨우 녹인 질척한 설탕물 혹은 팔팔 끓는 시멘트 같기도 하다. 말 몇 마디에 금세 묻히는 어떤 기미, 들키지 않게 겨누는 새까만 총구가 서로의 급소를 곁눈질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에 움푹 파여 갈라진 골에서 뭉근하게 끓는 점액질 같은 것이 느린 박자로 퐁, 퐁 터지고 스러진다.


“맛있냐?”

“어. 웬일로 달달하니 맛있네.”

작게 베어 문 자국, 소리의 높낮이가 계속해서 달라지는 아삭거림. 아닌 척 흘깃거리던 중에 우물거리는 입술을 발견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질문과 그런 상황이 익숙한 듯 평이한 여자의 대답이 일상처럼 이어진다.

조그맣고 반투명한 거품 방울과 번들거리는 과즙이 허옇게 드러난 과육에서 바로 아래에 남은 새빨간 껍질 위로 툭 흐르고, 이제껏 보던 정수리에서 고개 돌려 제 눈동자보다 선명하고 뚜렷한 색으로 반짝이는 사과 한 알을 멀거니 바라보던 라더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더니 돌연 그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래를 감싼 상처투성이 손바닥은 끈적한 게 묻어도 망설임 없이 머리꼭지를 향해 쭉 올라가고, 도중에 당연하게도 닿은 사과 주인의 허술하게 감싸 쥔 얇은 손가락을, 느릿느릿 나아가는 인파를 비집고 먼저 가는 사람처럼 살갗을 스치면서 지나간 그가 봉우리처럼 볼록한 사과 윗부분을 마디만 불거진 얇은 손가락 두 개로 잡아서는 그대로 힘 주어 빼냈다. 쑥 빠진 동시에 아삭거리며 무언가를 크게 물어 씹는 소리, 이게 무슨 일인지 인식하는 데 시간 걸리는 사람처럼 얼탄 표정으로 빈손만 멀뚱하게 보던 잠뜰은 두 번 아삭거리는 소리가 들린 뒤 제 손아귀로 돌아온 사과를 아까와 똑같은 얼굴로 가만히 바라본다. 윗부분에 생긴 큼직한 구멍 두 개가 눈동자에 검은 공동으로 맺히고, 그제야 무슨 일이 저에게 일어났는지 자각한 사람처럼 얼떨떨하게 뜬 눈동자가 반쯤 내려온 눈꺼풀에 가려져 매섭게 변하더니 우그러뜨린 입꼬리와 주름 잡힐 정도로 찡그린 눈썹이나 어이없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얼굴로 ‘먹고 싶었다면 애초에 자기 몫을 하나 챙기는 게 대뜸 먹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라며 최대한 평온을 가장해 타박하는 잠뜰을 향해 몰래 훔쳐먹은 과일의 흔적을 핥아 먹다 걸린 장난꾸러기처럼 키들거리던 그는 노력은 해보겠다며, 웃음기 때문에 영 성의 없게 들리는 대답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냥으로 얼버무리려 하더라.

줘도 안 먹는대서 내 거만 샀는데 이럴 거면 살 때나 말하지. 어지간히 귀한 게 아닌 이상 물건이든 뭐든 오래 미련 두는 편이 아닌 데다 일정 선을 넘거나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 아니면 한마디로 끝내고 넘기는 잠뜰치고 퍽 오래 이어진 투덜거림이다. 특정한 상황이 아니면 말 자체가 많은 사람이 아니어서 평소보다 두세 마디만 더 붙인 게 전부라 그마저도 짧게 끝날 참이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가 입술을 다물면서 실질적인 온점이 붙이기 전에 속을 살살 긁는 깐족거리는 말만 꺼내던 라더는 저가 건드린 횟수가 늘어날수록 길어지는 잔소리를 피해 유독 화창한 날이 어울리게 생긴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킬킬거리며 재빠르게 앞서기 시작했다. 거뭇하게 자리 잡은 다크 서클이나 여전히 생기 없이 검붉게 죽은 눈동자, 전보다 펴졌다고 한들 아직 구부정한 어깨와 등, 창백한 피부색 따위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춥지 않고 온난한 날씨와 더운 바람의 뜨끈함으로 식을 길 없이 데워진 공기로 드러난 과육이 삽시간에 칙칙한 갈색으로 변해 물러져도, 심지어 그렇게 물러진 자리에서 누구든 맡자마자 인상 찌푸릴 정도의 기분 나쁜 달달한 내음이 사방을 압도하는 짙은 바다 냄새처럼 훅 끼쳐도, 다른 때처럼 바닥으로 내던지지 못한 채 가만히 들어 고민하던 잠뜰은 이내 비장한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고개 숙여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죽어가는 과육에 이를 박았다. 최초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제 동료가 숨겨둔 곳에서 바로 앞까지 끌고 와 대령한(라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트럭에 오르기 전, 기어코 하얀 부분까지 다 긁어 먹고 유일하게 남은 씨앗과 대를 도로 바깥의 잡초 더미로 던지고, 그러면 트럭을 가지러 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연신 실실거리며 웃음을 가리지 못하던 라더가 타인의 인기척으로 흔들리고 푹 꺼지면서 조수석의 공백이 채워지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양 자동차 열쇠를 연신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시동을 끄고 근처에 둔 먼지떨이를 쥔다.

닫히는 소리와 문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누구 눈처럼 담백한 회색 털 뭉치를 다리와 함께 내밀어 내린 그는 숨긴 동안 창문 여기저기에 들러붙은 연녹색 이파리를 떼어내며 어딘가를 계속해서 구경하는 거다. 알고 보니 평범한 흙바닥이 아니라 바닥이 없어 계속해서 빠지는 늪이고, 진창인 자리에 타의로 불시착한 불그스름이 저와 상반된 색을 붙잡은 채 수렁 아래로 사라지는 광경을

빛을 등지고 서서 새까매진 눈동자 반절이 내려간 눈꺼풀 사이로 사라지고 마지막 잎사귀가 팔랑거리며 바퀴 앞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 아래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자, 몇 입만 더 먹을 걸 그랬다는 중얼거림이 흘렀다. 조절 실패인지, 부러 들으라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혼잣말치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을 사람까지 선명하게 들을 정도로 큰 소리를 냈으니 당연하게도 빈틈없이 꽉 닫은 창문 너머 공간에 앉은 사람에게 들린 모양이다. 사이드미러에 숨은 나뭇잎까지 마저 털어낸 라더가 가뿐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운전석에 앉자 이제껏 의자 등받이에 기대 삐딱하게 앉은 채 따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잠뜰이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박자로 팔짱 낀 팔뚝을 툭툭 건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문득 입을 여는 걸 보면 말이다. 하나 사주리?

“이걸 듣네.”

“그게 혼잣말이냐. 하도 크게 말해서 나한테 들어달라는 건 줄 알았지. 그래,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 주마. 내 입에 좋으면 너한테는 얼마나 더 끝내줄까. 그래서 사주랴?”

“일 끝나면.”

“오오냐. 그나저나 이젠 사양도 안 하네. 많이 뻔뻔해졌다?”

두 번째 트럭과 세 번째 위조 번호판, 몇 번째 채운 건지 모를 한 입 크기의 솜사탕 병. 정식으로 손잡은 이래 중간에 바꾸고 채운 물건이 원래 있던 물건을 밀어내고 자연스레 들어찬 자리에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뜰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슷한 순간에 눈동자만 들어 조그마한 백미러 안에서 시선을 맞추고 가만히 침묵한다. 3초는 지났을까. 찰나보다는 길고, 그렇다고 마냥 길다고 칭하기에는 짧은 어중간한 시간 가운데 아주 잠시 찡그리다 펴진 미간과 강제적인 떨림으로 흔들려도 눈을 피하지 않는 눈동자를 보던 둘은 돌연 같은 순간에 피식거리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각자의 앞쪽으로 시선을 내린다. 누구 덕분에. 와, 그게 내 덕이라는 거? 그렇게 들린다면야. 뭐 맞겠지. 운전대를 잡은 채 간헐적으로 달달 떠는 손가락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라디오 노랫소리에 맞춰 검은색 핸들 커버 위를 두드렸다.

세상은 불확실의 연속으로 꾸며진다. 무한정 늘어나던 것이 어느 날은 한 마디의 늘어짐도 이겨내지 못하고 찢어지거나, 영속성을 가진 완전한 구성이라 여긴 게 돌연 타올라 하루살이보다 못한 생을 마치거나, 절대로 변하지 않고 어떤 기준이 되리라 생각한 개념이 하루아침에 변질되어 다른 정의 혹은 그 이하가 되는 일처럼. 여느 때 같이 시답잖은 이야기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일 듯 유쾌한 농담과 오로지 둘만이 알 비밀 몇 가지를 담아 이어가던 소소한 대화가 허리 잘린 볏짚처럼 갑작스럽게 잦아들고, 이야기가 끊겼으니 자연스레 지도나 품에 안은 라디오에 얼굴을 기울이면서 이따금 갈림길이 나오면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어디가 빠르다며 알려주는 손가락과 자동차 거울로 바깥과 안을 동시에 흘낏대는 모습이 어떤 식으로도 교차하지 않는 게 마치 대본 있는 극처럼 자연스럽다. 우연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서로 외면하는지, 두 사람이 말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길은 없지만.


보스 낌새가 이상해. 하는 소리나 시키는 걸 보면 떠보는 건 없는데……. 제대로 아는 건 없어도 뭔가 냄새를 맡았어. 예정에서 벗어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빨리 나가야 해. 이제야 여유 나기 시작했는데 뭘 더 알아볼 새도 없이 상황 자체가 급박하게 돌아간다면서 악몽 꾼 날처럼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며 앉은 잠뜰은 가시지 않는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조그만 신음을 흘리곤 눈썹 옆을 꾹꾹 눌렀다. 그래서일까. 통증으로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옆에서 몇 번을 불러도 뚝뚝 끊어진 문장을 혼잣말로 흘리면서 관자놀이부터 이마까지 부산스럽게 누르던 손은 금세 머리에서 내려와 자기 손가락 마디마디를 누르고, 종국에는 손톱을 세워 이제까지 만지던 살갗을 신경질적으로 긁기까지 하던 그는 그만하라는 말 대신 아예 잡아 말리려던 라더의 손이 어깨로 올라올 때야 혼자 중얼거리던 걸 멈추고 숨을 크게 삼키며 바짝 굳은 동시에 제 어깨 위로 앉은 손을 다급히 내쳤다. 귀 바로 옆에서 들릴 날카로운 소리가 스위치 켜고 끄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게 자극이 되어 자기가 하던 말부터 당장의 상황까지 모든 게 머리로 들어오는지 느슨하게 벌어진 옷 목깃을 바투 잡고서 새빨갛게 차올라 헐떡이는 숨부터 진정하던 잠뜰은 자기가 뭘 한 건지 뒤늦게 인지한 사람처럼 목을 울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마른세수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성질 죽일 때 특유의 앓는 듯 가늘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리저리 삐죽하니 불규칙하게 지저분한 갈색 머리카락 끝단과 자수처럼 길게 이어진 붉은 줄, 그 줄을 따라 도톨한 딱지가 다닥다닥 붙은 목덜미와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앉은 자세를 유지하기 힘든지 잘게 떨리는 옆구리를 살피던 라더가 벌겋게 달아오른 손으로 이번에는 어깨를 눌렀다. 짜증을 내면서도 배려 없이 누르는 손이 이끄는 대로, 죽상으로 완전히 누울 때까지 숨을 멈추고서 넘어가듯 제자리에 누운 잠뜰이 반쯤 감긴 눈꺼풀을 파르르 떨어가며 고통 섞인 소리를 흘리고, 그제야 일어날 때부터 풍랑에 흔들리는 물결처럼 파도치던 감정이 정리되면서 긴장으로 쥐어짜던 힘까지 죄 빠졌는지 환자 특유의 병색이 깊어진 채 입술까지 창백하게 질려 가쁜 숨만 색색거리는 얼굴은 반송장처럼 사는 라더와 비교하지 않아도 완연히 한계에 도달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다만, 옆에서 그렇게 되기까지 전말을 전부 지켜본 한 명만이 엄살 피운다며 중얼거릴 뿐

 

“너, 왜 그랬어.”

정신 차린 걸 봤으니 갈 법도 하건만 몸이 틀어져도 상관없다는 양 침대 모서리에 기댄 팔에 턱을 괴고 삐딱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과할 정도로 집요했다. 뭘 생각하는지 무광 색종이처럼 바삭하게 메마른 눈을 하고서. 그러니 가파르게 움직이던 가슴팍이 차차 느려지기에 누구라도 잠자고 있겠거니 생각했을 잠뜰이 갑작스레 눈을 홉 뜨고서 캐보듯 물어도 다른 때처럼 놀라는 대신 태연하게 되물은 걸 테다. 뭐가.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지나치게 침잠되어 고요하다.

“칼 두 개나 있는 걸 아는데 왜 하나만 버려 놓고 안 썼냐고. 내가 괜히 가만히 있은 줄 알아?”

“……그랬나.”

“제대로 방심한 놈한테 총이나 맞길래 내가 잘못 알았나, 실은 없었나 해서 봤더니 멀쩡히 있더만. 왜 그랬는지 얘기나 들어보자.”

“니 환자다. 잠이나 자.”

시작은 무덤덤했으나 점차 날카로워지는 질문이 날아와도 뾰족함을 모르는 사람처럼 둔하게 답하던 그가 처음에는 멀쩡했으나 이젠 거죽이 푹 꺼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스툴에서 일어났다. 나무다리가 돌바닥을 득득 긁으며 마녀의 비밀공간에서나 들을 법한 음침한 소리로 밀려나고, 어쩔 수 없이 천장 조명등 하나에 모든 걸 의지하는 지하 비밀 쉼터 중간에 드리운 그림자 하나가 부기맨처럼 침대를 가로질러 길게 깔린 순간. 계속해서 죽치고 있을 것처럼 눈 감은 순간부터 직전까지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는 일어난 이의 질문 한 번에 이제까지의 기미를 갈무리하더니 더는 볼 일이 없다는 양 미련 없이 뒤돌았다.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팔뚝과 따라 경련하는 두터운 손이 손잡이를 쥔 찰나 누군가 던진 조그마한 조약돌처럼, 그에게 익숙하고 의미 없을 도망치냐는 말이 붕대로 둘둘 싸맨 몸통 위로 헐렁하게 덮어 일렁이는 검은 셔츠의 등을 때리고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면 정말 그대로 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재빠른 모습이었다. 통증을 애써 삼키는 한숨과 속에서 끓는 잔기침 뒤로 바닥에 무언가를 뱉으며 하는 작은 욕지거리, 상체를 돌리면서 덤덤하게 무언가 묻은 입가를 손목으로 닦던 그가 제 눈앞에 누운 환자보다 더 창백한 낯을 하고서 버거운 무언가를 감내하는 이처럼 눈꺼풀을 느리게 꾹 감고 떴다. 한 명이 잠에서 깨어나 혼잣말을 주절거릴 때부터 내내 빗나가고 마주치지 않던 두 쌍의 시선이 겨우 서로를 마주 볼 때, 먼저 따지고 들던 게 있으니 가장 먼저 본론을 꺼낼 줄 알았던 잠뜰은 빛이 닿지 않아 어둑한 윗공간의 얼굴을 무감하게 올려다보면서 아까부터 달싹대던 입술을 감쳐문 채 침묵을 지켰지만, 덜 닦여 턱선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고이기 시작한 핏물이 기어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건 참기 힘들었는지 낮은 한숨과 함께 꾹 물던 입을 열었다. 진짜 말 안 할 거야? 한탄처럼 불시에 터진 목소리와 마른세수, 답답함이 똘똘 뭉쳤다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억누른 어투가 느리게 침대 시트를 긁지만, 그래봤자 돌아온 답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덮여 빛이 들어도 어둡게 침잠한 눈동자와 다시 돌아가 영영 짐작할 수 없게 된 등, 여느 때처럼 바닥으로 힘없이 늘어진 어깨 따위만 보여준 그가 문 바깥으로 나가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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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슷한 자리에 앉아 지루한 낯으로 앞이나 무언가를 만지느라 꿈지럭거리며 각자 할 일로 바쁜 두 사람이 고요하게 숨만 내쉬는 트럭 안. 주요 도로 상황과 범죄 속보, 온갖 흑색선전 속에서 신청곡과 신청자의 사연으로 돌아가는 채널 주파수를 찾기 위해 제법 열심히 다이얼을 돌리던 잠뜰은 마침내 찾던 채널 대부분이 공통으로 하는 어투와 문장을 잡아내자마자 가장 먼저 잡음이 끼지 않는 구간을 찾아 좌우로 다이얼을 굴리며 움직였다. 다이얼의 눈금이 오뚜기처럼 왔다 갔다 움직일 때마다 구식 빨래판 긁는 소리처럼 지직거림이 커졌다 작아지는 가운데 디제이의 노래를 듣고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나온 10년 전 노래를 돌림 노래처럼 한 박자 느리게 흥얼거리면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손이 기다란 막대와 짧은 막대 사이에서 멈추고 움직임이 멎자, 인과처럼 어설프게 다문 입술 새로 들리던 뭉개진 가사와 목소리가 점차 커지며 자동 기어와 센터패시아가 있는 중앙을 제하고 모든 게 붙은 트럭 머리를 메운다. 들어찬다고 해봤자 경적 한 번, 두꺼운 바퀴가 돌멩이를 밟아 덜컹거리면 진작 묻히고 이후에도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고요한 허밍이라서 사위가 조용해질 때마다 전부 듣고 있을 바로 옆자리의 운전자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최고의 효율을 따지느라 생긴 우연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셈이 있는지 보스의 시험 이후로 부쩍 단독 임무 횟수가 늘어나면서 시간이 나도 일 끝낼 궁리나 하고 골머리 앓느라 잡담처럼 실없는 소리 할 겨를도 없던 두 사람이 실로 간만에 받은 협동 임무다. 잠뜰이 덕개를 조르고 박박 긁어서 따낸 일감에는 두 사람의 가장 첫 번째 속셈인 해독제 사업의 물꼬도 준 사람 모르게 은근슬쩍 들어갔고. 물론 그런 속임수 역시 설명을 듣자마자 동시에 서로를 곁눈질하고 소리 없이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보스의 의중을 가늠할 정도로 별것 없는 일이라 가능한 짓이었다. 신뢰를 얻자마자 모종의 이유로 조직 바깥에서 활동하던 덕개의 수족 이름을 어떻게 알아내어 그걸 팔아먹고 받은 어마어마한 투자금을 들고 나른 소규모 조직의 내부로 들어가 분탕 좀 치고 그대로 궤멸하거나 자멸하도록 만드는 일. 산업 스파이 짓 외에도 물밑에서(스파이도 물밑인 건 마찬가지지만) 엇비슷한 일로 해 먹고 산 잠뜰에게 시간과 약간의 정보만 있으면 쉬이 끝날 일이라는 추론쯤이야 범죄자 세계에서 크게 해 먹는 조직의 머리가 모를 리 없으니 더 찜찜하다는 게 그의 의견이고, 덕분에 일 자체는 금방 끝냈지만 역시 무언가 눈치챈 건 아닐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누가 봐도 머리 굴리고 있을 게 뻔한 여자가 가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니 흘끔거리며 좌판에 놓인 생선 훔치기 직전의 길고양이처럼 표정부터 살피던 남자는 짧은 숨을 한숨처럼 내쉬고 대부분의 정보를 블랙스톤 스트리트에서 아예 얻고 출발했겠다, 보스가 수현을 언급한 걸 보면 도움받을 걸 염두에 두고 준 일이니 순조롭게 끝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니까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말라며 가벼운 어투로 말을 맺고는 은근슬쩍 팔꿈치를 어깨에 걸쳐 기대어 너스레 떨었더란다.

오랜 시간 함께 다녀 물들기라도 한 걸까. 네가 잠뜰이라 해내는 거지 준 일에 비해 임무 기간을 지나치게 짧게 줬다며 담백한 어투로 과장하며 말하는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다. 그걸 알아챈 건지, 아니면 모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생각에 빠져 얌전히 선 잠뜰이 한참 생각하다 겨우 납득한 사람처럼 끄덕일 때까지, 기댄 자세 그대로 입 한번 벙긋거리는 일 없이 옆얼굴만 뻔히 보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생각하길 포기한 듯 뒷말을 흐린 긍정과 여전히 삐죽빼죽 규칙 없이 빼곡한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걸 보며 짧고 쾌활하게 킥킥거리더니 기댄 팔을 내리고서 앞섰다. 정작 바닥으로 내려갔다 겨우 올라온 회색은 트럭에 타고서 라디오에 주의를 기울일 때까지 여전히 미심쩍어 죽겠다며 잔뜩 찡그린 채지만, 상태보다 본인이 납득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는 현상이 중요한지 이제는 무슨 표정으로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지 한쪽 입꼬리가 불쑥 올라간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라더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 때까지 장난이든 농담이든 저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젯 검문소. 가장 악명 높은 곳이나 도망친 검문관의 후임을 여즉 구하지 못해 사실상 뚫린 거나 다름없다는 트와일라잇 다음으로 들리는 이야기나 뉴스 속보가 흉흉하기 짝이 없는 도시, 하운드로 들어갈 유일한 입구를 막은 핵심 검문소다. 트와일라잇이나 옆의 대도시로 빠질 수 있는 큰 도로와 로터리가 미로처럼 얽혀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로 악명이 높지만, 그만큼 이점도 있어 평범한 민간인보다 다양한 범죄자가 도주 경로로 사용해서 괴담보다 더 괴담 같은 일화가 무성해도 자체의 특성으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어떻게든 돌아가는 도시. 범죄 그 자체에 얽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잠뜰 때문에 다른 때라면 어떻게든 우회할 곳을 찾아 피했을 길이지만, 블랙스톤에서 나와 도주할 때 안전하게 추격자를 따돌릴 수 있는 인근 지역이 여기 하나뿐이라며 뚜껑도 열지 않은 형광펜으로 지도 속 현재 본인들 위치를 툭툭 건드려 보여주던 잠뜰은 누구처럼 한쪽 입꼬리를 당겨 비식비식 웃더니 오는 길에 미리 별표 친 장소를 펜 뚜껑으로 찌르며 안전과 신속을 강조한다.

“안쪽 길이 꽤 복잡하게 생겨먹었어. 아직 보스가 준 기한까지 사나흘 남았겠다, 잠깐 들어가서 길이나 여기 바깥으로 아예 나가는 경로 미리 봐두는 게 나을 거로 생각하거든.”

“내가 요즘 짐칸에 뭘 뒀더라.”

“큰 거 배달 의뢰는?”

“받은 적 없어. 요즘은 그 건으로 연락 안 하더라. 알바 구했나?”

“뭔 소리야. 그게 다 이 누나 덕이다, 자식아. 그렇게 해달라고 내가 그 아저씨한테 찔러준 재밌는 게 몇 갠데. 아, 뭔지 물어보진 말고. 알면 다치니까.”

애초에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는 대꾸를 누가 봐도 무시하는 태도로 들은 체도 안하던 잠뜰이 트럭 창문 바깥 풍경을 바삐 뜯어보더니 문득 어느 구석을 가리키며 글러브 박스 위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기 시작한다. 저기, 저기! 저쪽이 좋겠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이어진 짧은 정적 이후 가타부타 설명 없이 뜬금없이 돌출된 목소리는 규칙성을 비집고 드러난 불협화음처럼 갑작스럽고 제멋대로지만, 누구 하나 그걸 미안하게 여기거나 불편하게 받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더라. 서로를 죽이고 죽이려 했던 첫 만남부터 불가결한 필요의 이해관계로 한 배를 타게 된 지금까지 두 사람이 보인 모습은 규칙보다 불규칙에 가까웠고, 시간이 지나며 은근하게 선을 넘나들어 친한가보다 생각하게 만들어도 실상 달라진 것 하나 없이 그대로인 잠뜰과 점차 늘어나는 장난기에 비례하는 순응을 보인 라더까지, 처음 보는 사람만이 느낄 미세한 기류를 품은 채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도록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리거나 못 들은 척하면서 지금까지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터다.

부드럽게 핸들을 꺾어 잠뜰이 가리킨 곳으로 트럭 머리를 넣자마자 잦은 떨림으로 힘이 들어가 파랗게 핏줄 선 손이 기어를 바꾼다. 속도를 죽여도 심하게 덜컹거리는 오솔길 사이로 들어가 연신 창문 바깥 길바닥을 눈알 굴리면서 훑어보던 라더는 적당한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꺽꺽거리던 엔진을 죽이고, 열쇠를 돌려 완전히 시동을 꺼버림과 동시에 트럭에서 내달리듯 나와 짐칸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갈색 머리꼭지를 눈길로 따라가더니 돌연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인 그가 글러브 박스 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깊은 곳까지 들어가 몇 번 뒤적거리던 손목이 스르륵 나오자 얄팍한 금속이 절그럭거리며 패브릭과 얇은 플라스틱 긁는 소리, 얼마 안 가 바깥에서 누군가 차체를 퉁퉁 두드리는 진동이 울리면 가져가는 걸 까먹었으면 돌아와서 챙기지 왜 사람 귀찮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투덜거림과 그런 주제에 앞서 내린 사람이 가뿐하게 뛰어내릴 때와 똑같은 모양새로 훌쩍 뛰어내리는 홀가분한 어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옴폭 파인 잔 상처로 지저분한 손가락을 중심으로 둥글게 돌아가는, 허연 이름표 스티커 하나만 달랑 붙은 열쇠가 꼭 공 같다.

조용히 자기 혼자 살아남을 길을 고르고, 먼저 선택한 자기 때문에 안전에서 밀려나 곧 추락할 발판에 선 아무것도 모르는 남을 외면한 채, 어쩌면 즐거움을 느끼면서 앞만 보고 걸었을 여자와 발 들인 순간부터 앞이 아닌 무수한 등과 외면만 봤을, 그게 당연한 자리에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남자는 기이할 정도로 그네들의 일상에 선 상대가 옆자리에 못 박혀 다른 곳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을 없애려는 듯 굴었다. 그나마 잠뜰은 분위기가 너무 정답게 흘러가면 은근슬쩍 제 파트너를 편리한 수족이나 계기로 만들겠다는 욕망을 인위적인 친밀과 우호적인 어투로 드러나지 않게 내보이며 거리를 두지만, 라더는 말 그대로의 상황으로 만들 요소를 찾는 것처럼. 당장에 잠뜰이 한 부름처럼 조금 있으면 라더 역시도 어떠한 변명을 가지고 제 동업자를 찾으리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산 적이 없다는 걸 모르는 양, 심지어 어디로 치우쳤을지 모를 저울과 양쪽 접시에 담긴 각자의 진실한 속내가 어찌 됐든 함께 움킨 채 말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버리지 못한 지금, 두 사람은 여전히 포식자이자 교활한 사냥꾼이므로. 어쩌면 잡는 일에 열중하느라 혹은 다른 셈이 있어서 그렇게 보이게끔 행동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거만 잘 덮으면 되겠는데……. 어떨 거 같아? 넌 검문 당해봤잖아.”

“당했다고 하니까 어감이 이상한데. 그래도 이거면… 아니다. 덮으면 들춰볼 듯? 차라리 귀금속류 유통증 위조하는 건 어때.”

“특수 도장 복사가 쉬운 줄 아네. 그거 아님 설마 사장님 도움받자는 건 아니지? 아서라, 너무 기대는 것도 안 좋아.”

지금까지 받은 도움의 대가로 보낸 정보와 가치만 해도 자기 허리는 이미 휘어서 굽었다며 쥔 주먹으로 보란 듯이 등허리 두드리는 잠뜰을 열린 짐칸으로 고개 돌리는 것으로 외면한 라더는 짐칸 입구를 양손으로 누른 채 훌쩍 들어갔다. 세 번 더 봤는데 역시 안될 듯? 가끔이긴 해도 정기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잠뜰 덕에 퀴퀴하고 고약한 썩은 내나 수상쩍은 분위기가 많이 가셔 전보다 훨씬 평범해졌지만, 하던 일이 늘 같으니 뭘 어째도 수상쩍은 기미만큼은 환기되지 않는 트럭 짐칸은 어떻게 가리고 꾸민들 의심스럽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그가 이것저것 얹어보던 손을 멈추고 침음한다. 그러다 문득 겹겹이 쌓은 상자와 맨 뒤쪽에 처박힌 빨간 컨테이너를 보더니 긴 숨을 뿜어내며 제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르더라.

검문관은 대대로 수감자 중 자원자를 추려 그 안에서 뽑아냄, 사망률이 가장 높은 곳, 매번 적임자를 고용하지만 그렇다고 치안이 나아진 적 없는 곳. 수현에게 얻어온 정보를 굳이 입으로 꺼내 하나씩 꼽아보면서 바깥으로 나온 그가 습관처럼 입맛을 다시며 자기 턱을 손바닥으로 쓸더니 긴 고민 끝에 입술을 달싹인다. 트와일라잇에서 쓴 방법 그대로 써볼까? 암만 일이나 목적이 중요하대도 그게 자기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겠지. 정확히 하자면 예의 검문소에서 쓴 건 ‘방법’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웠지만, 전말을 알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그게 아닌지 자기 해결책이 어떠냐면서 묻는 제 동업자 옆쪽의 수풀을 가만히 보던 잠뜰은 두 번 반복된 질문을 듣자마자 구부린 손가락 마디로 자기 입술을 누르며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몇 분이 지나도록 조용히 있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결국 떨떠름한 감정을 폴폴 풍기는 얼굴로 끄덕였지만 말이다. 나 못 믿어? 그건 아닌데.

“대신 숨어있어. 내가 소리치면 들릴 자리에는 꼭 있고. 너 돌발 상황에 강하잖아. 일 틀어지면 신호 줄 테니까 나와서 나 대신 잘 좀 해 봐.”

“진짜 뻔뻔하네.”

“안 할 거?”

“아니, 누가 안 한대? 할 건데 너 뻔뻔하다고”

“어~ 칭찬 감사.”

가장 뻔뻔하게 구는 사람을 둘 가운데서 뽑자면 모든 걸 고려해도 눈살을 찌푸린 잠뜰 쪽이지만, 이럴 때마다 매번 당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양 우습고 유치하다는 표정으로 흘겨보던 그가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지겹다고 중얼거렸다. 지겹다 정말. 차곡차곡 접어 질깃해진 감정으로 차오른 목소리가, 오랜 시간 괸 물방울이 대롱거리다 떨어지듯 은연중에 떨어졌으나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가벼운 투닥임에서 방법 논의로 넘어가 이야기를 나눈다. 하기야 블랙스톤 스트리트에서 몇 달 지낸 다음부터 감탄사처럼 흔히 쓰던(본래 잠뜰만 썼으나 어느 순간 두 사람 다 함께 쓰기 시작한) 조건부 지겨움이니 문득 말한 본인이나 그걸 늘상 들었을 옆 사람이나 별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을 만도 했다.

숨어서 지켜볼 자리와 간략한 계획 핵심을 설명하는 내내 맞장구치는 잠뜰의 평이한 어투나 덤덤한 표정과 달리 말이 길어질수록 제 셔츠 목깃 아래에 닿는 얼굴에서 빛이 사라지는 걸 발견한 라더는 결국 자기 목덜미를 신경질적으로 두어 번 문지르다 허공을 흘기면서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지 물었고, 그러면 키 차이 때문에 새초롬하게 치켜뜬 눈을 길게 깜빡인 잠뜰은 누가 입을 막고 협박하는 양 소리가 되다 만 숨을 연신 내쉬다 결국 포기한 사람처럼 일단 해보자는 말 하나만 겨우 내뱉고 미리 일러준 자리로 걸어가는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못 할 말이어도 하면 했지, 이렇게 뜸 들이다 결국 만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찝찝해 죽겠단 표정으로 점차 멀어지는 등을 보던 그가 왜 죽으러 가는 소처럼 죽상인지 모르겠다며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투덜거리다 자국 남은 땅을 서둘러 따라갔다. 말이 끝나고서도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볼 일은 없더라. 불만 있으면 차라리 말하라는 요구가 있어도 짧은 곁눈질과 됐다는 손짓이 전부였다. 시종일관 덤덤해도 기분 좋게 펴진 얼굴에 다른 표정이 그어지는 순간.

바다가 내륙으로 성큼 다가온 듯 하루가 다르게 습윤해지는 날씨 때문에 보는 사람이 다 더울 정도로 껴입은 재킷 안쪽을 창백한 손을 얹어 몇 차례 더듬거리며 무얼 찾으면서 한 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던 라더가 사람 하나 부족한 트럭을 몰고 젯 검문소 입구로 향할 때였다. 산에서 평지로 넘어가는 평탄한 길목에서 돌멩이 같은 단단한 흙덩어리 몇 개와 바닥에 떨어진 마른 가지가 말랑하고 단단한 고무 타이어에 짓눌리는 찰나 으스러지는 진동마저 묻혀 소리도 없이 잔해만 남은 건. 황토가 섞였는지 붉은빛을 띤 어두운 흙 조각, 바짝 짓눌려 죽은 신록과 나무껍질 조각의 생은 바닥을 해가 뜨고 지기 전까지 종일 그 위만 덮은 볕뉘만이 알 테다.

이후는 적어도 잠뜰에게 따분할 정도로 순조롭고 평화로운 시간이었으리라. 두 사람이 합의한 순간은 오로지 라더가 지정한 방법으로 신호를 보낼 때고, 그럴 기미의 예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음기와 스코프를 장착한 권총에 혹시 문제는 없는지, 챙긴 여분의 총알이 몇 개고, 동업자 모르게 챙긴 유사시 사용할 물건은 잘 있는지를 여섯 번째 확인하면서 티 나게 보이는 지루함과 사이에 섞인 감정을 삼키는 게 전부이니 말이다. 가끔 시체를 자기 옆까지 끌고 온 라더가 트럭을 가지고 떠나기 전, 본인이 미리 파 놓은 구멍에 지고 온 덩어리를 쓰레기처럼 던지고서 그냥 가려고 할 때 소리로 붙잡아서 손수건을 얼굴에 던지는 동시에 절대 안 쓸 거니 그걸로 얼굴 닦고, 손도 닦으면 아무 데나 버리라고 한 다음 부자연스러운 흙더미 위에 여태 썩지 않고 쌓인 낙엽이나 갑작스러운 추위 혹은 더위로 말라죽은 잡초 따위를 뽑아서 뿌리는 일 따위도 딱 한 번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누군가의 억눌린 단말마를 들으면서 안전핀을 풀었다가 다시 잠그는 걸 반복하며 한숨 쉬는 일이 더 많았다. 편하긴 개뿔.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와서

도덕성과 선한 마음이 마모된 선택으로 이뤄진 삶을 산다고 하여 사람이 실시간으로 죽거나 직전까지 가는 걸 오감으로 계속해서 느껴지는 지금, 익숙하거나 멀거니 모르는 척할 수 있는 건 아닌지 불쾌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얼굴로 툴툴거리며 손부채질만 하던 잠뜰은 지금껏 앉아서 기다린 거대한 바위 맞은편, 동그란 모양 일부가 검은색으로 얼룩져 축축하게 젖은 땅을 곁눈질하다 앉은 자리의 다리 사이 텅 빈 곳으로 미식거리는 숨을 게워 내곤 도저히 못 참겠다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미동도 없는 가슴팍, 꽉 맞물린 입술 사이가 언젠가처럼 지나치게 창백하다.

난 기다린다고 했지. 참아준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괜찮아. 

어디 엿듣는 사람이라도 있다는 양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누르며 혼자 있는 자리에서 과장되게 떠벌거리던 잠뜰이 한숨 한 번으로 창백한 얼굴을 지우고 금세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짓더니 버릇처럼 크게 숨을 내쉬고 만다. 그러면 표정 관리한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헛구역질과 함께 제 코를 누르면서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고 말이다. 넓은 보폭으로 거침없이 내려가느라 앙상하고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다리를 할퀴어 바지 올이 나가도, 둥그런 돌멩이를 밟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기어가듯 몇 발짝을 엉거주춤 걸어도 멈추지 않던 그는 평소 같지 않게 푹 가라앉은 사람 하나가 총을 겨누고, 머리 한쪽에 장식처럼 붙은 총구 때문인지 바짝 얼어붙은 사람 하나가 엎드리다시피 무릎 꿇은 현장에 도착하고서야 점차 속도를 줄였다. 내려오는 사이에 묻은 진흙이 말라 검댕처럼 여기저기 묻은 하얀 스니커즈 앞코가 울퉁불퉁하게 뒤집어진 아스팔트 바닥을 스치며 나아가다 꿇은 무릎 앞에서 멈추고, 그에 따라 두 발짝 떨어진 자리까지 물러난 생채기 가득한 워커는 서성거리며 반 뼘씩 들어오다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안 불렀는데 왜 왔냐. 무슨 흥에 취했는지 일부러 낮추는 목소리나 쾌활한 어투가 아닌 목을 울리고 그르렁거리며 포식자처럼 말하는 상대가 무서울 법도 하건만 여러 번 문지른 듯 길게 번진 피가 딱지처럼 말라붙어 기이한 턱을 한 번, 동아줄 발견한 사람처럼 벌벌 떠는 손으로 제 신발 언저리를 짚는 인간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던 잠뜰은 여상한 목소리로 몇 가지를 물으면서 자기 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여섯 번 하고도 몇 차례 더 확인한 총을 허리춤에서 꺼내 검문관의 관자놀이에 그 대신 겨눈다. 그런 순간에도 얼굴에 비장하거나 어떤 결심을 한 기미는 찾기 힘들더라.

“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너도 그 검문관 데리고 튀었다며”

“그때는 예외 상황이고.”

“지금도 예외 상황인 셈 쳐. ‘잘’ 나오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려면 어쨌든 우리도 우리편이 있어야지.”

“우리 편?”

“그래. 자자, 쟤가 저래 보여도 팀 먹으면 기회 두 번은 더 주거든요? 어쩔래요. 그냥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협조해서 목숨이라도 부지할래.”

바로 옆에서 영문 모르겠단 소리를 사납게 꿍얼거려도 못 들은 척 당당한 태도로 어쩔 거냐 묻던 잠뜰이 허리에 얹느라 제 손바닥에 가려 무릎 꿇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을 검지를 까딱거리는 모양새가 바로 뒤쪽에 있을 라더에게 신호를 보내려던 모양이지만,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서너 번을 더 까딱거리다 무언가 말아쥔 듯 구부리던 나머지 손가락을 펼쳐 손아귀에 있던 것을 던지고 제 허리에서 손을 떼더라. 아야. 파트너의 위치를 본 건 처음 한 번이 전부인데도 순간 펼치는 손아귀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날아가 검은 옷을 슬쩍 구기고 떨어졌다. 하찮은 결과와 다르게 제법 옹골차게 맞고 떨어지는 듯 둔탁한 소리, 탄성 같은 비명이 들리자마자 은근하게 뒤로 기운 어깨가 앞으로 돌아가는 동시에 정신 차린 듯 하릴없이 갈색 정수리만 보던 생기 없는 눈이 옆으로 비껴간다. 말 그대로니까 알아서 잘 선택하라는 협박을 곁들이던 동업자의 말을 멍하니 들을 때만 해도 둘 사이에 끼어들 순간을 재보는 것처럼 발을 가만두지 못하던 그가 앞뒤로 흔들거리던 몸을 다 잡고 아예 뒤로 빠지자, 짧게 자른 단면이 고스란히 보여 원래보다 더 짤똥하게 보이는 머리카락이 덩치가 물러나며 부는 잔바람에 부자연스럽게 흐느적거린다. 그곳으로 쏠린 시선과 무얼 던져서 맞췄는데도 반응이 없자 그냥 포기한 건지 영영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을 셈인지 바르고 곧게 펴진 등, 쏴 본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면서 반동에 날아가지 않도록 노련하게 총을 쥔 손 같은 게 유독 짙어진 볕에 반짝였다. 

방금까지 세상을 환하게 덮어 솜털까지 비추던 빛은  물결치는 자리를 전부 물들이고 물러나는 사해의 파도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수위가 내려가 진하게 응축된 무언가처럼 점차 붉은 놀로 변해 위에서 아래로 된 밀가루죽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줄기처럼 끊어지지 않고 떨어지던 빛 일부가 상어 모양 모자며 턱 아래 목덜미에 닿은 덕분에 반절은 길바닥에 깔린 어두운 땅거미고, 나머지 반절은 검붉은 노을로 덮여 음울하게 반짝이던 라더는 여전히 제 앞에 선 조그마한 어깨와 머리통을 의뭉스럽게 내려다보지만, 곁눈질 한번 없이 앞만 보느라 바쁘니 뒤쪽 사정을 알 리 없던 잠뜰은 그저 겨눈 총신을 뭉툭한 손톱으로 두드리며 협박만 이어갈 뿐이다. 

당신이 할 일은 딱 하나야. 나중에 전서든 뭐든 보낼 테니까 그걸 보면 이인용 차 하나만 저기 숲 근처에 숨겨. 그리고 우리가 거길 들어가서 갈아탔는데 아차! 사고가 난 모양새만 만들면 돼. 흔적 처리는 알아서 하고. 이전, 이후는 서로 유리한 상황이 되도록 알아서 만들 테니까. 말이 이어질 때마다 군용 나이프 손잡이를 연신 만지작거리던 손이 움칠거리더니 돌연 멈췄다. 증언하면서 어떤 부류에게 무슨 말을 하면 되는지, 어떤 내용이면 안전할지 그런 것까지 전부 알려주겠으니 자기 말대로만 하라며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한껏 숨죽여 이야기하던 잠뜰이 중간부터 부동 상태로 고요히 있는 그를 건드린다. 원래 자리에서 몇 발짝 물러나는 게 그저 장난이라는 듯, 신발 근처에 짚은 손과 닿고 싶지 않아 그러는 척해가며 라더의 손등과 팔목을 쿡쿡 찔러 무언으로 종용하기 시작했고, 보지도 않으면서 움직이는 자리 바로 아래나 옆에 번들거리는 날붙이를 피해 제 살갗만 정확히 건드리는 손가락 끝을 멀거니 구경하던 그는 기어코 신코를 밟힌 뒤 집어삼킨 숨 때문에 들린 사레로 한참 쿨럭거리다 억울하다고 웅얼거렸다. 그래도 단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나 작게 죽인 목소리가 시키는 협박 같은 암시와 명령대로 고분고분하게 앞으로 걸어가 잠뜰을 지나치고 꿇은 무릎 근처까지 닿았지만 말이다.

짧은 새 점차 거멓게 죽어가는 저녁놀과 어두운 그늘을 발걸음 하나로 성큼 건너는 다리, 날카롭게 반짝인 신코 너머로 내민 억센 손이 그새 한쪽 무릎을 떼고 일어나기 시작한 검문관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당기고, 드러난 목덜미에 이제껏 만지작거리던 칼의 면을 지그시 누른 라더가 미세하게 고개를 틀어 어딘가를 곁눈질하고 끄덕이더니 이내 당겨지느라 희번덕하게 뜬 검문관의 눈을 뻔히 바라보면서 고개 숙였다. 지평선 어드메만 새빨갛게 타오르는 순간이면 늘 찾아오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에 각인된 오랜 공포가 길게 늘어져 한 인간을 덮는 찰나.

“두 번만 물어볼 생각이니까 지금이 마지막이네. 어쩔래요? 검문관으로서 죽을 건지, 똑같은 검문관인데 사소한 일 하나 하고 살 건지. 이거 선택할 자유 정도는 줄게요.”

근데 나 같으면 일 하나 하고 살겠다. 아유, 목숨 아까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차피 지나가면 자기들도 여기에 남은 볼 일이나 휴가 계획의 히읗도 없으니 다시 얼굴 볼 일도 없을 거라고 순진한 얼굴로 웃던 잠뜰이 여봐란듯이 라더를 팔꿈치로 건드리며 재차 대답을 재촉한다. 안 그래? 그때가 되면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렇지. 틈새가 갈라진 새까만 점이 찍힌 홍채 속, 수정체 너머까지 뚫어볼 것처럼 고요히 바라보는 시선에 눌렸는지 타의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못해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끄덕였다. 잡혔으니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고개 대신 눈동자가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이고,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바지춤을 잡고 늘어지는 손에 급하게 더듬거리며 이어가는 말, 잡은 머리를 놓자마자 그제야 위아래로 흔들리는 고개를 옆 사람과 비슷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잠뜰은 여전히 스산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말을 아끼느라 조용한 라더가 그림자를 지고 옆으로 빠지자 그 자리에 저가 들어가고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헝클어진 더벅머리에 손을 얹었다. 얼굴 다 기억하니까 우리 잘하자고요. 그렇게 말하며 쥔 총의 방아쇠를 틱틱 건드리는 손가락이나 낮게 깐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양 이질적이기 그지없다. 평상시나 이전 방식을 아는 사람이 본다면 기름종이로 누군가의 모습을 고스란히 베껴 가면처럼 쓴 미묘한 이질감까지 느낄 정도로 완벽한 타인의 형태지만, 그 진위를 알만한 사람은 침묵으로 옆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기어코 확실한 약속의 증표 혹은 어긋나도 자신은 손해 보지 않을 무언가까지 얻어낸 여자는 기분 좋은 걸 숨길 생각 자체가 없는 얼굴로 돌아가는 한참 동안 내내 네 방식은 필요 이상으로 귀찮고 자기가 할 일이 많다며 짤막해도 끈질기게 투덜거리는 남자에게 그래서 안 할 거냐고 짧게 대꾸하곤 창문턱에 팔꿈치를 걸쳐 턱을 괸 채 콧노래만 흥얼거리더라.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며 구시렁거리면 기분 망칠 생각 말고 운전에 집중이나 하라고 새침하게 쏘아 말하더니 금방 주제를 바꿔 어떡하면 보스에게 수고금을 더 뜯어낼 수 있을지 따위를 조잘거리던 얼굴이 문득 운전석 바로 뒤쪽 공간으로 돌아간다. 항상 앞으로 바짝 당긴 덕에 가방 두어 개를 넣어도 들어갈 정도로 넉넉한 공간 사이에서 검은 서류 가방 귀퉁이가 빼꼼 고개 내민 게 시야로 들어온 모양이다. 원래 저기였나. 나지막한 혼잣말, 주파수가 어긋난 건지 지직거리는 노이즈에 갈라지다 돌부리를 밟았는지 차체가 덜커덩 흔들리자, 가위로 테이프 줄을 자른 것처럼 뚝 끊어져 사라진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

“우리 사업 아이템은 잘 있지?”

“어허, 어딜 은근슬쩍 우리래. 내 가방은 당연히 잘 있지.”

“에이~ 쩨쩨하게 그러기냐. 동업자라매요.”

“파트너지. 니가 깨지만 않으면 계속”

“같이 다닌 지 벌써 12개월 넘었는데 이쯤 되면 믿을 만도 하지 않아? 억울해서 헛웃음 나온다야.”

“그거 아니어도 거래잖아. 내 거다 인마. 사업은 공동이어도 내용물은 내 것, 이 말이야.”

어차피 자기 아니면 가방 열지도 못 하면서 맞는 말이나 해댄다고 투덜대던 잠뜰이 이제껏 앞으로 바짝 당긴 등받이를 뒤로 물렸다. 할 말은 없고, 딱히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 졸리지 않아도 눈 감고서 잠자는 시늉이라도 해보겠다는 신호(과거에 본인이 직접 말했다.)에 덩달아 운전자까지 입을 다물자 가끔 덜컹거리며 차체 흔들리는 소리나 몇 번 지직거리다 다시 켜진 순간부터 끊이지 않는 뉴스 속보를 전달하던 라디오 속 아나운서의 둥글지만, 묘하게 중간세가 각이 져 그 부분만 도드라지는 발음이 점차 선명해진다. 쟤는 잘 거면서 이건 왜 틀었대. 검은 핸들 위를 느리게 건드리며 필요할 때만 조금씩 돌아가던 오른쪽 손끝이 고민하듯 느리게 가죽을 긁으며 움찔거리다 기어코 옆으로 떨어졌다. 툭 튀어나온 믹서를 잡아 미세하게 돌리고, 그렇게 좌우로 몇 번 돌려가며 주파수를 맞추자, 돌부리 밟은 자동차가 위로 튀어 오를 때마다 함께 튀던 라디오의 잡음이 점차 줄어들다 마지막엔 또렷하게 변하더라. 미동 없이 고요한 옆자리를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눈동자와 무언가 말하려는 듯 벌어지고 그대로 멈추더니 몇 번 버끔거리기만 하고 닫는 입술, 선바이저를 넘어서 들어온 반대 차선 차량의 쨍한 헤드라이트 때문에 잠시나마 선명하니 맑게 갠 붉은 눈동자가 지나침과 동시에 평상시로 돌아갔다. 잠꼬대처럼 창문 쪽으로 돌아눕고는 가늘게 뜬 눈꺼풀 새로 보이던 잠뜰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검푸른색으로 침잠한 것과 다르게. 웅크리느라 얼굴 근처에서 덜렁거리던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가 일정한 간격으로 하얗게 변하고 붉어지길 반복한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본 일기장 기억하냐.”

그거 여전하다. 잠든 사람에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자는 척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건지. 장난감 동전만 한 크기로 촘촘하게 뭉친 솜사탕을 입에 넣고 녹여 먹듯 번갈아 입꼬리를 삐죽이며 씰룩거리던 그가 문득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비뚜름한 미소 짓고 무어라 중얼거리자, 얼굴에 바짝 붙어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주먹을 말아 쥐고 틈새 안쪽으로 더 기어든다. 그리고 여전히 잠든 척. ‘여우를 잡습니다.’ 커다랗고 긴 간판에 그려진 여우와 엽총을 든 사냥꾼 그림과 그 옆에 굵은 글씨체로 적은 커다란 문장이 차창 사이로 빠르게 사라진다.

 

일의 특수성 덕인지 툭하면 품에서 띠지로 묶은 현금다발을 꺼내 책상 위로 던지기만 하던 덕개가 웬일로 책상 위에 올려둔 검은 현금 가방을 챙기면서 이번 일의 목표던 조직 우두머리의 이름을 양각으로 새긴 칼 한 자루를 테이블 위에 올린 잠뜰은 나선 자리에서 간략한 설명을 읊었고, 계절 때문에 축축하고 눅눅한 공기를 연신 손등으로 내젓다 자기가 필요하겠다 싶으면 끼어든 라더가 추가 보충하는 식으로 보고까지 마친 두 사람은 이만 들어가라는 이야기에 각자의 가슴을 쓸어냈다. 무거우니 네가 들라는 말에 콧노래 부르며 가방 손잡이를 붙잡아 드는 손, 비밀 출입 통로의 개폐 장치를 익숙하게 건드리던 잠뜰이 마지막 위치로 손을 옮기던 찰나. 최근 우리 쪽 녀석 중 하나가 죽지 않는 약에 손을 댔더군.

“어쩌다 그 마약보다 독한 걸 건드렸는지 원.”

“예에? 뭐 불로불사를 꿈꾸다 일찍 뒤진 왕 이야기는 들어봤는데 그건 또 뭐람.”

“그런 게 있어. 끝까지 몰린…… 너는 걔 발을 갑자기 왜 밟아? 어이구, 아프겠다.”

“아유, 갑자기 가방을 제가 들고 싶어졌지 뭐예요. 내놔, 빨리”

“악, 씨… 그럴 거면 진작에 니가 들어야지. 성질 더러워서…… 자, 앞으로도 네가 들어.”

뭐, 그래서 건드린 녀석은 치워버렸지. 결국 그 비싼 약에 손댄 사람이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불투명한 쓸모는 앞서 말한 대로 조직 사정이 좋지 않은지라 혹시 모를 리스크까지 감당하기 힘들다며 일상 넋두리처럼 평이한 목소리로 툴툴거리던 블랙스톤 스트리트의 주인은 꼰 다리를 바꾸며 소파 등받이에 느른하게 기대어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본다. 자네들도 아나?


“이름에 개만 들어갔지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코랑 촉까지 개네. 예정보다 더 빨리 떠야겠다. 네 일이나 내 일이나 이러고 계속 있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야.”

수긍과 부복 연기를 잘하는 라더 대신 부정, 거부,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특출난 잠뜰이 두 발짝 앞으로 나서 손사래를 치고, 계속 그런 건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접견 공간에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소리 죽인 채 꿍얼거린 불안이다. 한 손에는 가방, 다른 손에는 그새 해진 베이지색 반소매를 쥐고 아무도 없는 술집 구석까지 가서 무어라 이야기 나누던 두 사람은 이쪽으로 쏠린 바텐더와 보안 직원의 눈길을 발견하자마자 동시에 손을 휘젓더라. 자기 일 보라는 무언의 신호다. 온전히 조직에 소속된 게 아니라 건당 보수를 받고 움직이는 용병처럼 생활하던 두 사람이라 벨벳의 술통에서 거주하다시피 하는 조직의 일원은 여전히 가까워지지 않은 채 무시로 일관하지만, 오른팔과 왼 다리가 되겠다는 첫 만남의 장난스러운 말을 사실로 만들겠다는 양 구는 보스 덕에 서로 어정쩡한 입장이 되어 마찰만 일으키지 않는 관계. 고분고분 말 듣는 것처럼 고개 돌려도 카운터 테이블 아래, 정장 재킷 속에 숨긴 총을 여전히 쥐고 있음을 아는지 각자의 무기를 움키고 힐끔거리며 무어라 키들거리던 두 사람은 이내 빈손을 흔들고 저녁놀이 앉은 바깥으로 나간다. 점차 잦아드는 출입문 종소리와 일정한 크기로 잔잔하게 흐르는 레코드판 재즈 노래가 방금까지 있던 사람의 소리를 지우고, 관련자만 남은 세상은 둘이 있을 때와 똑같이 돌아간다. 어쩌면 그보다 더 평화롭게


한 사람만 느꼈을 불안한 보고 이후 이어진 일상은 특정한 부분을 자른 도돌이표 악보처럼 다른 때와 똑같지만 미묘하게 어딘가 달라진 평화의 연속이었다. 딱 일상으로 익숙해진 어려움만 반복되는 나날이 너무 무난한 나머지, 이곳에 들어오고 다듬었던 머리가 다시금 눈이나 목덜미를 넘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길어졌으니 서로 잘라주겠다며 진심 없는 우스갯소리를 부러 해가면서 풀어진 모습으로 여기저기 간 볼 정도로 말이다.

그사이에 더운 계절이 지나가면서 후덥지근한 공기가 함께 물러나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창문에 찬 이슬 맺히는 한로가 성큼 다가온 때. 이제껏 입었던 시원한 평상복을 벗고 길어진 소매, 어두운 갈색부터 검은색과 짙은 청색이 주색인 깔끔한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사람은 이번에도 포인트로 쓸 장신구를 골라 추천하는 사장에게 괜찮다며 손사래 치다가 큐빅 대신 줄만 있는 심플한 목걸이 두 개를 가지고 거리로 나선 두 사람은 원래 끼던 자리에 목걸이를 차거나 두르면서 자기 옷차림을 구경한다. 이전에 입던 검은 코트처럼 길게 늘어진 갈색 겉옷에 검은 와이셔츠를 걸친 라더, 전체적으로 어두워져도 한색인 건 똑같은 캐주얼 정장 차림의 잠뜰은 이전보다 퍽 단정한 제 차림을 훑어보더니 발목까지 길게 퍼진 바지와 겉옷을 털어가며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해가 지평선을 완전히 넘지 않아 여전히 차가운 공기와 새벽이슬이 결에 아롱진 양 살얼음 낀 물방울처럼 시린 바람이 날개뼈를 넘어 길어진 머리카락을 계속 흔들며 지나는 사이에 이전보다 더 심하게 떨리는 손가락 위로 떨어진 낙엽이 마디에 걸려 몇 번 술렁거리다 날아갔다. 아직도 삐쳤어? 팔랑거리는 마른 이파리가 세 번 뒤집히며 지나간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두 갈래로 나눠진 길목에서 멈춘 잠뜰이 허리춤에 찬 권총집을 만지작거리며 라더 쪽으로 슬며시 모 꺾어 선 채 시선을 올리자 제법 발랄한 부정이 돌아왔다. 내가? 애초에 신경 쓴 적도 없는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가늘게 뜬 한쪽 눈이 미심쩍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샅샅이 훑어보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검붉은 눈동자는 평소처럼 무덤덤한 대신 서먹한 분위기를 풍겼고, 다른 때 같으면 무어라 더 추궁하거나 은근슬쩍 돌려서 물었을 잠뜰도 무슨 생각인지 캐묻는 대신 짧게 수긍하고는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이번 임무, 계산해 보니까 우리 둘 다 비슷하게 시작한다손 쳐도 다른 때처럼 누구 하나가 먼저 끝내고 백업하러 가는 식으로 못 하겠더라. 어쩔 수 없이 이번엔 진짜 혼자서 해야 해. 얌전히 보스 말 듣는 건 이번 임무까지니까 꼬투리 안 잡히게 잘하고. 알지?”

“누가 들으면 만날 같이하는 줄 알겠네. 아~ 알겠다니까.”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든 장난치는 습관은 여전해서, 저번도 대답만 잘했다며 금세 표정을 바꿔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실실거리기 시작한 잠뜰은 과장된 손동작으로 라더를 가리켰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비슷한 실수는 지도 많이 했으면서 아닌 척 말이 많다고 맞장구치듯 유하게 투덜거리던 그가 먼저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걱정이면 오시든가요. 걱정은 내가 아니라 님이 하는 거겠지. 차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나중에 보자고 흔드는 손이나 인사보다 휘적거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대강 흔들던 손을 주머니에 걸어가는 뒷모습이 퍽 유쾌하더라. 마지막, 새로운 보금자리, 둘이 함께 벌이는 새로운 사업. 많은 끝과 시발점이 담겼을 갈림길 끝이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말장난처럼 순탄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말이다.

혹자는 인생이 불공정한 탁구라 하고, 다른 이는 인생을 절벽처럼 깎아지른 내리막길로 가득한 산등성이라 부른다. 절호의 기회를 타도 운이 좋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득점 이후로 내리 실점하거나 산 중턱까지 힘겹게 기어서 올라가도 발 한 번 잘못 내디뎠다는 이유로 바닥까지 추락하고 마는 게 현실이므로. 침대에 미동 없이 누워 새하얗다 못해 언뜻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채 늘어진 팔뚝 위로 연결된 링거는 색의 대조처럼 불투명한 빨간색으로 선명하기 그지없고, 압박 붕대 하나와 파란 구급상자 한 통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온 라더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미처 지우지 못해 불그스레한 제 입가를 손목으로 문질러 마저 지운다.

“그 사람이 뭐래요?”

“고비는 넘겼는데 다리 근육 손상이 심해서 깁스하고 적어도 사 개월은 움직이면 안 된다데.”

잠든 얼굴을 난처하다는 양 뒤통수를 문지르면서 내려다보던 라더를 보면서 혹시 당장 움직일 정도로 급한 일이 있는지, 아니면 도와줄 건 없나 물어보는 수현은 아주 잠시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들어올 때부터 붕대 감은 팔뚝에 아슬아슬하게 얹어서 가져온 걸 4인용 나무 책상에 내려놓고 느리게 고개 젓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보고 하러 갈 건데 얘 좀 부탁해요. 구급상자도, 자기 쓰려고 가져왔는지 몇 뭉치 바리바리 싸 온 듯 보이는 붕대도 전부 책상에 내버려둔 채 필요한 게 있다면 깨어날 쟤한테 말하라면서 작별을 고한 라더는 당장이라도 블랙스톤 스트리트로 갈 것처럼 한쪽 발과 몸을 90도로 튼 것치고 선 자리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새 힘이라도 들어가 상처가 터져 피가 새는지 진하게 물드는 붕대 위를 누르며 압박하는 손바닥이나 주머니에서 진통제 몇 알을 꺼내 물도 없이 삼키면서, 하릴없이 출입문만 지켜보던 그는 왜 그러는지 옆에서 물어볼 때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더라. 자기 방으로 돌아가 품이 넓은 옷을 낚아채 꿰어 입고 중요한 물건을 바지나 겉옷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바삐 밖으로 나간 라더는 문 안쪽에 있을 때 한참을 미적거리며 걸음 떼지 못하던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민하게 트럭에 올라타더니 뒤돌아보는 일 한번 없이 그대로 버니 모텔을 떠났다. 힐끔거리지 않는 눈,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가는 얼굴과 솜사탕 유리병 바로 옆에서 절그럭거리던 아니머스 한 알을 익숙하게 꺼내 삼키는 내내 한 번도 깜빡이지 않는 눈꺼풀. 피 냄새를 맡고, 심지어 제 발치에서 무력하게 쓰러진 걸 봤으면서도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는 대신 옷자락을 물고 임시거처에 내던진 포식자는 부글거리는 물거품 같은 얼굴로 액셀만 밟을 뿐이다.


“저런, 그래서 라더 너 혼자 온 거였구나.”

벌써 일어날 수 있을 때 여기로 돌아오자마자 생명 수당이니, 치료 비용이니 다양하게 가져와 자신을 물어뜯을 게 선하다 못해 피곤해 죽겠다고 한탄하는 덕개와 맞장구 비스름한 짧은 답을 하며 잘게 끄덕이던 라더는 시간차를 두고 텅 빈 원형 스툴 의자를 힐끔거린다. 보스, 근데…….

“라더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뭐 생각도 생각이지만, 이 자리에 앉아서 인간을 고용해서 다루고, 써보고, 사업도 벌여가며 내가 얼마나 다양한 사람 성격을 보고 겪었는지 너라도 예상이 갈 거야.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말이지. 박쥐처럼 여기저기 붙어 다니던 녀석 옆에서, 안전 담보를 얼마나 모으고 쟁여도 어째 좋은 끝을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검은 페도라가 온더락 잔 옆으로 툭 떨어지면서 줄곧 테이블만 보던 눈이 뾰족한 모자챙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네 능력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야. 그래, 저번에 보니 우리 애들이랑 어울리지도 못하고 겉도는 모습이 안타깝던데 ‘혼자서’ 이 조직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건 어떤가? 기회는 이번처럼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평온한 목소리에 구부정하게 내려간 등과 목이 점차 올라간다. 에이, 어떻게 그럽니까. 근데 몰래 해주는 거 맞나요? 앉은 자리에서 한껏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어차피 밖에서 들리지 않을 대화를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 죽여 속닥거리던 그가 덕개와 함께 허허실실 웃었다.

“바로 대답은 어렵고, 잘 정리해서 나중에 또 혼자 돌아올 일이 있으면 그때 대답할게요.”

“그래그래. 수족 될 녀석이 매사에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만, 너를 위해 내가 보장할 것과 경고할 것 하나씩 말해줄까.”

테이블을 짚은 반장갑 위로 기울인 몸과 한껏 소리 낮춰 속삭이는 말을 무던한 낯으로 얌전히 듣던 그는 생각보다 긴 문장 중간중간에 추임새 비스름한 걸 넣으며 반응하다 말이 끝났는지 앞으로 기울어진 몸이 소파 등받이로 돌아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 갑작스러운 경쟁 조직의 기습 사건으로 바뀐 장치를 늘 풀던 사람이 이곳에 없어선지, 아니면 푸는 법을 잊었는지 잠기기 직전까지 틀리다 리셋 직전에 잠금 여는 것까지는 성공해 가게 내부로 통하는 비밀 문을 힘으로 밀고 나온 라더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제 입매를 매만지는 척 손등으로 가리고서 소리 없이 뻐끔거리는 동시에 느리게 닫히던 문을 등으로 눌러 밀었고, 아직 덜 닫힌 문 너머로 자긴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면서 너스레 떠는 말소리가 강제로 닫힌 문 사이에 끼어 허리가 잘린다. 빠른 시일 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만 남긴 채.



“너 녹음기 단 목걸이 아직도 가지고 있지.”

“당연하지. 그걸로 배팅 걸었는데 어떻게 버리냐.”

말이 끝나자마자 달라고 내미는 손이 뻔뻔하다 못해 당연해서 희미한 숨을 턱 내뱉으며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은 잠뜰은 별다른 말 없이 저가 건넨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쥐는 라더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본다. 별 내용 없는 걸 보스가 안다는 건 너도 알지? 그렇게 물어도 잘 안다는 대답만 하고 누구처럼 목적을 숨긴 채 필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어설프게 얼버무리기만 하니 찡그린 얼굴도 쉬이 펴지지 않더라. 이불 경계 너머로 드러나는 자리에서 일부 튀어나온 손가락이 쥐락펴락 움직이는 걸 무심코 곁눈질로 봤으면서도, 입술만 몇 번 달싹거리다 끝내 다문 남자는 전처럼 제 의도를 흘리는 대신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삐딱하게 팔꿈치를 대고 앉아서 시답잖은 농담으로 말머리만 돌리고 자기 얼굴로 시선이 올라오면 그제야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는 게 전부였다. 잘게 떠는 몸뚱이 때문에 눈동자의 위치가 미세하게 달라져도 그 안에 박힌 동공은 어딘가에 박혀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고 몸을 덮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헐렁한 옷 하나와 카디건만 걸친 채 시선이 박힌 자리에 앉아 있던 잠뜰은 머리 위 조명과 회백칠한 벽 때문에 반사된 빛으로 번들거리는 죽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딘가 익숙하고 불쾌할지도 모를 상대의 모습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곱씹고 있으리라. 아까까지 쥐락펴락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갑자기 가장 짧던 순간보다 더 짧아진 머리카락 끝단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더니 허공에 선 뾰족한 부분을 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건 오래 곱씹어볼 생각이나 생각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고민이 생길 때마다 잠뜰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걸 잠뜰도 이전처럼 무어라 달래거나 살살 긁어 속내를 끄집어보려 하진 않았고, 애초에 주제가 없으면 먼저 말하기보다 자기 생각에 집중하는 데다 심지어 숨기는 일이 생긴 라더가 먼저 말할 리는 없으므로 두 사람은 대치에 가까운 형태로 서로를 뻔히 바라보기만 한다. 변화보다는 단단한 진흙 내지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바위가 물꼬를 막은 것에 가까웠지만 누구도 그걸 언급하지 않아 결국 소리 없이 이어지던 대치가 화제 돌리기로 단절된 순간 비껴간 표정이 실망인지 안도인지는 본인만, 어쩌면 본인도 모를 터다.

원치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죽인 요 몇 달간 임무는 오로지 라더의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만 파트너의 도움을 받아 트럭에 올라타 뒤쪽에서 상황을 살피다 무전으로 돕던 잠뜰이 문득문득 손톱 거스러미를 물면서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고 불만을 토해내고 비밀리에 수현과 작당을 꾸밀 때였다. 겨우 깁스를 푼 날 득달같이 블랙스톤 스트리트로 돌아간 잠뜰은 덕개의 근심대로 가장 먼저 보스의 사무실로 쳐들어가 생명 수당이며, 위험이며 온갖 이유를 대고 한계치까지 완수금을 뜯어낸 다음 부족해진 물자와 도구를 구하러 떠나는 척 뒷세계 큰 손인 덕개의 영향권 바깥으로 정보를 구하고자 라더에게 자신이 의도를 가지고 경계 바깥으로 나갔음을 가리기 위해 뭐라도 해보라며 등을 떠민 채 그가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훌쩍 떠나고, 아는 거라곤 어차피 정보는 노출됐을 테니 알아도 신경 쓰지 않을 무언가를 던지면 된다는 게 전부였던 남자는 결국 본의지만 본의가 아닌 이유로 덕개와 두 번째 단독 면담을 요청하고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마른세수만 연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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