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Time

Space Time 00

나도 먹히겠구나.

고글을 쓴 청년은 걸음을 멈춰 하늘을 올려다본다. 현실이라면 존재하지 않을 색으로 찬란하게 변해가는 모양새를 두 눈에 담고 있노라면 하늘은 제멋대로 오묘한 빛을 사방으로 퍼트려 나갈 뿐이다.

때로는 녹빛이었다가 서서히 보랏빛으로, 그러다 결국 주홍빛으로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색으로 변해간다.

멍하니 하늘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기 어깨를 누군가가 그리 거치지 않은 손길로 툭 건드렸다, 홀리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다. 으레 미지를 탐험하는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탐험가에게 경고한다. 그 무엇에도 홀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그리고 청년은 언제나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탐험가였다.

“아, 네. 시정하겠습니다.”

청년은 자기 어깨를 치고 간 동료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동료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한 손을 슬 흔들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손짓에 청년은 동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오묘한 빛으로 빛나는 하늘은 돌아보지 않았다.

 

투박한 정체 모를 재질의 바닥을 걸을 때마다 발에 어떠한 것의 파편 같은 것들이 발에 채였다. 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라 청년은 굳이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을 택했다. 애초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파편에 관심을 두어봐야 이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정리는 다 됐어?”

누군가가 크게 외치며 물었다. 청년은 그것이 대장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곳곳에서 동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이상 무! 이제 돌아갑시다, 대장! 여기에 2주나 갇혀있었다고요! 슬슬 돌아갈 때도 됐잖아요! 등등. 청년은 대답하지 않고 무너진 유적으로 추적되는 곳의 중앙에 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 중년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끼고 있는 주황빛 렌즈의 고글이 유독 밝게 빛을 반사하는 것만 같아, 청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기고 제 고글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하늘의 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고글에 빛이 잘 반사되는 것이라 여겼지만 유난히도 그 빛이 거슬려 청년은 계속해서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습관적으로 확인한 고글에는 이상 같은 건 없었다. 확인할수록 자신이 착실하게 고글을 잘 착용하고 있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한종수! 주변 탐색은 어때!”

“아무것도 없어, 대장! 적어도 반경 50M 내로는.”

자신의 어깨를 쳐주었던 동료가 크게 외쳤다. 어깨를 으쓱이며 다들 그렇게 알아라~, 너스레를 떠는 그를 보며 청년은 그제야 다들 지쳐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하는 행동임을 알아챘다. 그는 이런 사회생활 쪽으로는 영 눈치 없었지만, 그가 생각해도 이곳에서 버텨낸 이 주라는 기간은 모두가 아슬하게 생과 사의 갈림길을 버텨내며 지내느라 너무나도 버거운 기간이었다. 안전지대라고는 하나 없는 곳에서 이 장소를 찾아낸 것도 아주 우연에 가까웠고.

문득 누군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예민한 청년의 귀에 잡혔다. 동료 일부가 아주 지쳐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 신호에 조심스레 청년도 동의했다.

“이곳에서 저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청년의 외침에 동료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친 당사자를 바라본다. 오히려 그 덕에 심각했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는 것을 청년만 몰랐다.

“그래그래, 우리 더 이상 못 버텨~.”

“대장, 식량도 거의 다 떨어졌어!”

웅성웅성, 일행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직전보다는 활기찬 분위기에, 중년인은 일행을 한번 쓱 훑어본 그가 자신의 메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중년인이 보기에 멀쩡한 사람은 저기 홀로 서 있던 청년뿐이었는지 그가 깊은 한숨을 쉬고 청년에게 외쳤다.

“래빈아, 가서 망 좀 봐줘라. 다른 놈들 잠시 휴식하고 괜찮은 것 같으면 돌아가자.”

청년, 김래빈은 대장의 말에 허리를 꾸벅이며 일행이 자리 잡은 곳을 살폈다. 무너져 있는 유적의 중앙부, 천장이 무너져 훤히 보이는 저 진득한 하늘과 태양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듯한 건물.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유적의 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유적의 입구로 추정되는 부분에 서서 주변을 훑어보면 펼쳐진 풍경은 온통 모래다.

곳곳에 진득한 보랏빛의 체액들이 모래에 흩뿌려져 있음에도 액체는 색을 잃지 않고 여전히 짙고 강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모래에 스며들지도 않고 뿌려진 그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는 체액들은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 현상이 너무 기이하다고 하기에는 김래빈은 이러한 다양한 현상이 이루어지는 환경에 적응한 이였다.

드넓게 펼쳐진 모래로 이루어진 광야, 모래의 색은 옅은 푸른빛이라는 것만이 상식과 다르다. 이 푸른 모래사막에 유일하게 있는 문명의 흔적, 입구 근처에 세워진 검은 색의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성질의 기둥 조각. 그 기이한 성질의 기둥 조각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자는 자신들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문자다.

김래빈은 문득 손을 뻗어 음각을 쓸어내려 본다. 만지는 것 정도는 위험하지 않다고 했으니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당연히 그가 만진다고 이를 해석할 수도 없었고, 팀 내의 번역가가 해석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럴 체력도, 실력도 되지 않았고.

음각을 매만지고 있노라면, 문득 걸리는 한 문장. 분명 읽지도, 읽을 수도 없는 것 이것만 김래빈은 그것을 해석했다. 단 한 문장.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영어인가? 나는 영어를 읽지 못하고, 탐지와 해석 능력을 지닌 종수 형님께서는 이 문자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셨는데…. 김래빈이 심각하게 미간을 구기며 조각을 더 쓸어내리며 다른 글자를 읽으려 할 때였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우리는 할 만큼 했다, 귀환한다! 전원 준비해!”

우렁차게 울린 말에 김래빈을 제외한 모두가 환호했다. 짝! 누군가가 망을 보다가 딴짓하고 있던 김래빈의 등짝을 힘껏 친 것도 그때였다.

“여! 우리 막내, 뭐 하고 있었는감?”

갑작스러운 기습에 김래빈이 휘청이다 균형을 잡는다.

“그, 그냥 이걸 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것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김래빈은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다들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하시는 겁니까? 슬쩍 그의 뒤로 안쪽을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던 동료도, 애써 밝게 행동하던 이들도 들뜬 모습이 보였다. 안쪽을 보고 있자니 바닥에 대 자로 뻗어있다시피 한 박종수가 외친다.

“이제 집에 돌아가자, 꼬맹아!”

그가 그리 외치자, 김래빈은 당황해서 허리를 크게 꾸벅였다. 이제야 김래빈의 차례였다, 긴장하지 않고 평소처럼만…. 그러면 된다.

“예! 이만 준비하겠습니다. 다들 적정 거리를 유지해주시고 혹여 휘말릴 수 있는 사태에 대비하여 파트너의 손을 놓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김래빈은 ‘우우, 말이 너무 길다! 이미 알고 있으니 축약해라!’ 동료들이 그리 외치는 소란 속에서 군말 없이 귀환 준비를 시작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약 열 명의 팀원이 두 명씩 짝을 지어 서로의 옷이나 팔 따위를 잡는 것을 확인한 김래빈이 외쳤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김래빈이 허공에 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부드럽게 접었다. 마치 건반을 누르는 듯한 손짓이 허공을 가벼이 두드리자 그와 반대로 묵직한 충격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일행을 기둥 삼아 서서히 기어 타고 오르는 뱀처럼 휘감는다. 누구인지 모를 이가 참지 못하고 잇새로 신음을 흘려낸다. 그것이 시작이다. 서서히 소리가 사라져가는 감각이 그들을 해일처럼 덮쳤다. 그 고요한 해일 속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건 그 중심에 서 있는 김래빈뿐이다.

아니다, 그는 고요한 세계에 있지 않았다. 김래빈의 주위는 누구보다 소란스러웠으므로.

맑은 금속이 서로 맞닿아 울리는 듯한 소리가 고요를 깨트리는 순간 거대한 폭풍이 그들을 삼키듯이 휘감는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아주 거대하고 위협적인 폭풍일 터였으나, 그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폭풍의 여파라고는 고요를 찢어버린 바람 소리만이 감돌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잡아, 찢어버릴 것처럼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것을 참아냈다. 그들이 듣는 것은 그러한 바람의 소음뿐이었으나, 그 중심에 서 있던 김래빈의 귀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확실히 들려온다. 그래, 그것은 김래빈의 연주다. 김래빈이 가진 능력이다. 단점은 그 누구도 듣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러나 관객이 없어도 어떠한가. 누구도 듣지 못하는 자신의 연주가, 자신이 만들어낸 선율이 눈앞을 나돌아다니는 감각이 자신을 가득 적셔오면 그것으로도 족했다. 이런 순간만큼은 김래빈은 자신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아직, 아직, 아직. 보랏빛 렌즈 너머의 눈동자가 허공을 훑는다. 이 음도 아니야, 저 음은? 이 선율은? 그의 연주가 계속될수록 주변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들을 휘감던 폭풍은 기어코 일행을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나마 들어내고 만다.

제 몸이 떠오르는 것에도 김래빈은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을 놀렸다. 분주하게 허공을 누르는 그의 섬섬옥수가 일정한 곡조를 연주하자, 그 모든 소음을 뚫고 선명하게 유리가 깨지는 듯한 큰 소리가 세계를 울린다. 아, 마침내 저 하늘에 금이 간다. 이 세계에 존재치 않을 색으로 빛나던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청년을 둘러싸고 서 있는 이들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저항하듯이 파트너에 의지해 서 있을 뿐이다.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갈라진다, 그것은 마치 정상적이지 않은 것을 처분해버리는 것과도 같은 현상이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여전히 그 누구도 들어주지 못하는 외로운 연주는 이어진다, 점점 공간이 좁아진다.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연주의 하나로 장식된다.

기어코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까지 갈라지더니, 무너져내린다. 마지막 건반을 누른 김래빈이 다급하게 고개를 들며 외쳤다.

 

“낙하 충격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김래빈을 포함한 모든 인원이 칠흑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겁먹었을지언정 그곳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4개월 만의 귀환, 기적을 일으키는 대한민국.》

《전멸 우려, 이게 웬걸. 전원 생존 귀환.》

《A+의 균열의 위험, 아직 남아있어 조만간 새 수색대 파견 예정…》

 

인터넷을 켜 보면 하나같이 같은 사건에 대해 줄기차게 기사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만큼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의미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헤드라인을 눌러 기사를 확인해본다. 기사뿐만 아니라 온갖 SNS에도 소란을 일으킨 내용은 바로 어제 오후, 4개월 만에 균열의 수색을 시도하러 들어갔던 수색대가 전원 생존하여 돌아왔다는 별 특별한 것 없는 내용이었으나 해당 수색대의 평균 등급이 C라는 것과 그들이 수색하러 들어간 균열이 A+의 균열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생존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나게 크게 일어났다. 지난 4개월간 그들은 공식적으로 실종으로 분류되었고, 그 기간 전국적으로 뜨거운 감자였던 탓이라.

 

4개월 전, 서울 강남 한 가운데 난데없이 차원 균열의 생성이 확인되었다. 해당 균열은 일반적인 균열의 등장처럼 주변의 물체를 흡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로 생성되었다. 누가 봐도 저 등급의 균열이었던 탓에 본래라면 고작 C~D등급의 각성자로만 이루어진 탐험대가 서울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지역의 수습을 맡을 수는 없는 게 당연했으나,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마침 김래빈의 탐험대가 팀원 전체의 신체검사를 위해 강남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세간에 그리 크게 알려지지 않은 탐험대였지만, 균열의 크기가 작아 임시 등급 판정에서도 C~D등급으로 판정되었기도 했고 탐험대의 총인원이 하급 각성자 11명이라는 충분히 공식 수색대를 구성할 수 있는 인원을 충족한다는 이유와 신규 생성된 균열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그것의 수습 및 수색을 떠맡게 되었다.

애초에 하급 각성자가 균열 관리국에 거부를 표할 수도 없었을 테니, 사실 그들이 그 일을 떠맡은 것은 강제와도 같았다.

“저희 안 들어가면 안 됩니까?”

“관리국 말 무시하면 우리한테 균열 입장권도 안 줄걸. 그냥 들어가는 게 낫다.”

가장 먼저 균열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 것은 의외로 막내인 김래빈이었으나, 탐험대 대장 박동훈이 고개를 저으며 막내의 등을 팡팡 쳤다.

결국 균열 관리국에서 판정한 균열의 공식적인 등급 또한 그들이 무난하게 확인할 수 있는 C등급으로 확정되자마자, 그들의 탐험대는 균열 관리국에서 인정한 공식 수색대로 임명되었다. 일이 다소 급하게 진행되는 것에 수색대원들은 지레 겁을 먹었으나, 균열 관리국에서 그들을 밀어붙였다.

“선생님들, 여기 강남이예요. 빨리 진압해야 할 거 아닙니까. 선생님들이 영웅이 되실 수도 있는 거고요.”

균열 관리국 직원들이 수색대를 재촉했다.

그들이 재촉하는 이유는 균열을 진정시키는 게 최우선인 탓이었으나, 수색대는 그를 이해한다고 해도 균열 관리국에서 자꾸만 재촉하여 제대로 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허겁지겁 어설피 준비를 끝내고 균열로 진입했다.

그건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있었을까. 굳이 따지란다면 균열 관리국이 아닐까? C급이라 생각하려 수색대를 밀어 넣듯이 넣고 보니, 수색대가 들어가기 전에는 얌전하던 균열이 수색대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듯 속에 담고 나서 서서히 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할 것이라고는 그들도 생각하지 못했을 터였으니.

 

성인 남성 한둘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던 균열 입구가 버스 한 대가 들어갈 정도로 몸집을 부풀리고서야 확장을 멈추었다. 조급하게 균열 관리국은 균열의 등급 판정을 다시 시도했고, 고작 C에서 D등급의 각성자로만 이루어진 공식적 수색대가 들어간 균열의 위험등급이 A+로 재조정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실이 남아있는 이들에게 거침없이 떨어진다.

사실상 그들이 떠민 수색대가 들어간 균열에 ‘더블 트릭(Double Trick)’이라 불리는 균열 재판정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더블 트릭, 균열 등급 재판정 현상이 일어난 횟수는 세계에 균열이 처음 등장한 후부터 지금까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 생긴 데다가, 균열이라는 것은 원체 한번 입을 닫으면 들어간 그룹의 전멸이 아닌 이상, 사실상 아예 입을 열지 않는 것이기에 그들을 구할 방법이라고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이건 명백하게 균열의 등급을 확실하게 판정하지 못한 관리국의 책임이었다. 어차피 수색대가 빠르게 전멸할 테니 균열 관리국은 아무 일도 아닌 척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려 했지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던가. 한번 정보가 새어 나가자 전국적으로 이 ‘불쌍한 수색대’의 전멸을 애도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심도 식는 법이지만, 그들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그야, 균열이 도로 열리지 않은 탓이다. 수많은 네티즌은 이 수색대가 사 개월 동안 생존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으로 소란스레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답은 언제나 나오지 않았으나, 이것이 하나의 이슈로 그 기간 자리 잡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니 그들이 사라진 사 개월간의 기간 동안 전국에서는 이 균열 수색에 참여한 수색대가 전멸 날지, 아니면 생존해 나올지 알 수 없어 종일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C-에서 C등급의 균열을 해결할 수 있다 평가되는 수색대에서 균열 앞에 떨어지듯 탈출한 것이 전례 없던 일임은 확실해서, 어쨌거나 수색대의 생존 소식에 대한민국은 온통 축제인 것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정작 해당 탐험대이자 수색대에 속해있던 김래빈은 그러한 것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지만.

“사 개월이라니요,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는 그곳에서 정확히 십사 일 하고도 열일곱 시간 삼십사 분 체류했었습니다.”

“김래빈 각성자, 그렇지만 이곳에서 사 개월이 지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균열과 이곳의 시간이 비이상적으로 차이가 난 것이 아닐까요?”

눈을 부릅뜬 김래빈은 시간이 그렇게 차이 날 리 없다며 열띠게 말을 이어갔지만 제 앞에서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안내원을 보며 무어라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공방이 시작된 지 십여 분이 흐른 후인지라, 자신이 아주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이는 김래빈이 말을 조금 더 잇자 결국 성을 내었다. 김래빈 각성자, 억지는 다른 곳 가서 부려주시면 안 될까요? 한층 짜증이 가득 묻은 목소리에 김래빈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결국 축객령을 받은 김래빈이 발을 느릿느릿 끌듯이 창구를 벗어났다.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국제 이능력자 기관 ‘스피릿(Spirit)’은 언제나 그랬듯이 분주했다. 등급 판별실은 물론, 이능을 확인할 수 있는 판별실, 본격적으로 각성을 도와주는 개화실까지도.

김래빈은 그 분주한 공간에 멍하니 서 있다가 도로 발을 옮겼다. 이유 모를 초조함이 그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발길이 늦다, 무겁다. 큰 바위를 다리에 매고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 그런데도 무언가가 어긋난다는 감각,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그러한 본능적인 확신을 뒤로한 채 그는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내달렸다. 그렇게하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는 것처럼, 제 두 다리를 움켜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라 믿으며.

 

세계에 균열이라는 것이 생긴 지는 십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십사 년. 사람들이 새로운 이변에 적응하고 대응할 만한 시간은 충분히 되었다. 전 세계에 불규칙하게 등장하는 균열이라 통칭하는 차원 균열.

균열이라 하는 미지의 공간은 개체마다 특징이 전부 달랐다. 똑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들은 나타나는 형태만은 다른 균열과 비슷했다. 주로 생성되는 경우는 갑자기 어느 곳에서든 공간을 가르고 나타나 기괴한 생명체를 쏟아내 기존의 환경에 침범하는 형태거나,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고 나서 그 자리에 생성되는 형태 등이 존재했다.

균열은 자신이 만들어지는 위치 따위는 어느 곳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하늘에 생성되기도 하고, 도심에 있는 학교 내에 나타나기도 했다. 균열이라는 것은 그랬다. 인류가 있는 그 어느 곳이건 가리지 않고 나타나 인류를 멸종시키려는 듯이 몰아치듯 생성되었다. 인류는 그에따라 속절없이 이변에 휩쓸렸다, 균열 생성 극초기 중엔 인류의 멸종까지 거론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큰 재앙으로 치부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절망이 생긴다면 그를 타개할 방법도 생기는 법이다. 균열이 나타남으로써 이능을 깨우친 이들이 바로 그 해결책이 되었다. 현재는 ‘트레이서(Tracer)’라고 불리는 이능력자들은 어느 날 불현듯 이능을 각성하고 자신의 각성 의의를 균열의 제압에서 찾아냈다. 균열에 대한 절망은 이능을 각성한 사람들의 존재가 희망이 되어 인류는 가능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균열은 트레이서의 활약으로 쉬이 제압되었고, 각성자의 이능은 곧 세계 곳곳에 스며들었다. 균열 내에서 가져온 에너지원이나 부자재는 둘째치더라도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열광했고, 그것을 수식화하는 것에 몰입했다. 그래야만 인류의 실패를 가릴 수 있었으므로. 결국 그 행위는 성공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 각성자는 순조로이 늘고 있고 모든 균열과 모든 각성자는 등급이 매겨졌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듯이.

균열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그 원리와 생태, 등급 측정의 지표 등을 연구했으나 아직도 수많은 미지를 품은 것이다. 결국 알아낸 것은 균열 내부가 다른 차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담고 있다는 것. 각 균열이 담고있는 세계는 인간을 닮은 생명체가 존재하기도 하고, 식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 주를 이룬 세계가 있거나, 때로는 기괴한 생명체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공통점으로는 모든 균열에는 핵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정도일까.

균열이라는 곳은 핵을 지닌 존재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극초기, 균열에 삼켜진 인류가 돌아올 수 없던 이유기도 했다. 그렇다고 균열을 방치한다면 균열은 수많은 사람을 다시 끌어당겼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블랙홀과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균열 내부는 사건의 지평선이나 다름없기에 우리 인류는 그 어찌할 수 없는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김래빈은 젖은 머리카락에 대충 수건을 얹어놓고 TV를 틀었다. 어느 채널이건 제 수색대원들이 줄지어 늘어서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래빈은 양해를 구하던 때를 떠올린다.

“대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참여가 어려울 듯싶습니다.”

다들 긴장한 태를 있는 대로 내고 있으면서 막내가 그리 말하니 대장은 김래빈의 등을 세게 팡 두드리며 웃음을 지었다.

“너 하나 없다고 우리가 인터뷰도 제대로 못 할 듯 싶냐? 괜찮다! 들어가서 쉬어라, 래빈아.”

그들이 웃는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연하다. 다정하고 친절한 이들이다, 김래빈은 제 심장이 꽉 쥐어지는 감각에 비틀거리며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들이 이렇게 늦게 나오게 된 것은 다 제 탓이었는데.

 

때마침 어느 기자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더블 트릭… 클리어가 안 됐다고요?>

<예. 저희 수색대 전원, 2주간 균열 입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밖에 갈 수 없었습니다.>

전 국민이 주목하는 생방송 기자 회견에서 수색대의 대장, 박동훈은 덤덤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전멸할 뻔했노라고. 그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한 것은 살아남기에 급히 집중하느라 돌아올 방법을 사용하지 못한 것임을 밝힌다. 이렇게 세간의 집중이 모이면 숨겨놓고 싶었던 것을 밝혀야 하는 법임을 김래빈과 그들은 알았다. 그래서 결정 내린 것이다. 김래빈의 기이한 능력에 대하여 밝히기로.

<알려진 사실로는 균열 내에 진입하면 빠져나올 방법은 핵을 지닌 일명 보스를 처치하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드물지만 다른 방법은 있습니다.>

<아, 혹시 서포터 트레이서의?>

화면 안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박동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드물게 알려진 공간계라고 칭해지는 서포터의 능력은 균열에 강제적으로 틈을 내, 균열에서 사람을 구조할 때 쓰이기도 했다. 적기는 해도 확실히 공간계 서포터는 존재했으니 저렇게 포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속이 불편한 느낌에 김래빈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이를 바라보다 결국 TV를 꺼버렸다. 이렇게 일이 커지는 바람에 밝히기로 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알려지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단지 자신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에 양심이 쥐어짜지듯이 아파와서.

 

서포터로 각성한 C급 트레이서, 김래빈. 각성시기는 꽤 오래전이다. 아니, 사실 언제 각성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릴 적, 그가 각성한 능력이 그 누구에게도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심지어 스피릿의 우수한 판별 능력자조차 그의 능력을 알아챌 수 없었다. 조모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허공을 누르면 소리가 들린다는 아이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망상으로 치부한 것이다. 실제로도 소리가 들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도 했고….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와중, 그나마 조모님을 제외한 가족들의 경우는 그냥 아이가 음악을 좋아하나보다 하고 그쪽 진로로 꿈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김래빈은 정말로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확신을 가진 채 제게 능력이 있다고 주장을 해도 조모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의 각성을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매년 2번씩, 꼬박꼬박 검사하러 센터에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래빈은 공인으로 인증된 각성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균열 사고로 가족을 전부 잃었을 때조차.

가족을 잃은 것에 절망하며, 마지막으로. 그 아집의 끝을 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간 각성자 개화실에서 열일곱 살이던 일 년 전, 한 번 더 각성하면서 김래빈은 마침내 각성자, 트레이서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와 인정받을 수 있게 각성했냐고 자신을 질타하기에는 새로운 능력조차 애매모호하였으니 뒤늦게 각성했다며 자책하는 일은 없었다. 이미 많이 지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흔하지 않다는 다중 각성자가 본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유일하게 믿어준 이는 이미 균열에 흡수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으므로.

 

각성자는 흔히 각성 당시에 자기 능력의 이름을 명명 받고, 능력의 각개 평가치 또한 기록함으로써 트레이서로서의 등록을 거친다. 그것이 바로 등급을 나뉘는 기준인데, 결국 김래빈은 수 없는 검사 끝에 자신의 새로운 능력인 진정이라 불리게 되는 참 애매모호한 이능을 지닌 서포터 트레이서로 분류되었다. 검사 결과로서는 김래빈의 능력만 따지면 아주 우수한 정도였다.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고 능력의 효과 또한 즉발적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안정도가 최하인 E를 넘어 F를 찍은 그 순간, 김래빈은 대놓고 트레이서로서 활동하기에는 쓸모없다는 평가를 내려받았다. 사실 쓸모없는 이란 잘못된 표현이다. 진정이란 무엇인가? 결국 무언가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치료 분야 각성자가 그리 없는 와중에, 그나마 아픔을 가라앉히게 할 수 있다는 능력은 꿩 대신 닭이라고 많이들 선호하는 서포터일 텐데도 김래빈을 그 누구도 찾지 않던 이유는 안정도 때문이었다. 김래빈 스스로가 능력을 조절할 수 없는 편이었던 탓이다. 아무리 아픔을 진정시켜봐야 진정시키는 와중에 멋대로 끊겨버리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김래빈이 지금 함께하는 탐험대에 참가할 수 있던 것도 위급 시 균열을 탈출할 수 있다는 특수성이라도 필요했던 탐험대 덕이었지, 그들이 아니었다면 김래빈은 아마 지금도 일반인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김래빈은 트레이서가 되고 싶다던 꿈도 아주 예전에 접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무뎌진 탓이었다. 차라리 균열에만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각성에 연을 버리고, 일반인으로 살았더라면―. 무심코 차오른 생각을 억누르며 그는 눈을 감고 만다.

 

김래빈이 자신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의 효용성을 알게 된 건 균열 내부에서다.

균열은 보스를 토벌하면 두 가지의 분류로 나뉘었다. 보스를 잡고 나온 핵을 부수면 그대로 사라지는 균열과 핵을 깨부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닫혔다가 보스 없이 새로 오픈되는 형상을 보이는 균열.

사람들은 후자의 균열을 선호하며 환영했다. 재균열이라 불리게 된 이 균열은 보스만 없다면 새로 생겨난 기존의 마물들이야, 이미 정형화된 패턴에 두려워 않고 사람들은 균열 내부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자원을 노렸지만, 재균열은 무한대로 열려주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보스가 다시 도래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예 소멸하고는 했다. 게다가 재균열의 경우, 보스가 다시 도래하지 않는 이상 출입구가 늘 열려 있었으니 사람들이 환호하기엔 당연한 환경이었다.

재균열은 보스가 다시 나타난 균열의 경우에 입구 색이 달라지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후자의 경우는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제멋대로의 공간인 탓이라.

연구원들이 연구하여 발표하기를 이 정체 모를 균열이란 공간은 핵이 무너지면 그 안에 존재하던 세계가 멈췄다. 그러니 재균열의 발생 시 핵에 에너지가 남아있던 상태에서 깨진다면 그 남아있는 에너지가 세계의 존속을 잠시나마 지속해, 핵을 재생하여 보스가 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균열이 파괴되는 경우는 무엇인가? 영국의 물리학자 루멘은 핵이 부서질 당시 에너지의 소모가 커, 세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 무너질지는 운에 맡겨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결국 예측할 수 없이 부서지는 경우는 대비하는 시간도 없다. 이미 세계는 멈춘 지 오래일 테고, 부서진 핵의 에너지가 세계를 유지하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전자와 달리 후자의 경우는 세계를 유지할 힘조차 없어 부서지는 것이니.

김래빈은 운 안 좋게도 후자의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트레이서가 된 후 두 번째로 진입했던 D+등급의 균열에서 일어난 일이다. 생활비가 다 떨어져 헐값이라도 벌어 생활비를 보탤까 싶은 마음에 흔히 쓰이는 재료를 캐가기 위해 해당 균열에 재료를 캐러 들어가는 D등급 채굴대에 합류한 김래빈은 예고 없이 무너지는 균열에 뒤를 돌아 출구로 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만치 멀리, 같이 들어왔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출구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으나 다리가 벌벌 떨려 움직여지지 않았다. 달려, 달리라고. 김래빈, 달려야 살아! 스스로를 재촉해도 다리가 영 움직이지 않는 그 상황에서 김래빈은 무심코 허공을 짚어버린 것이다. 그가 바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음색이 들렸을 때 균열이 선율에 따라 진동하는 것을 느낀 김래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음악이 나를 살리겠구나. 하고. 극한의 상황에서 제 생을 걸고 연주를 한 감각을 김래빈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다.

그 순간 연주를 한 것은 본능적인 선택이자 필연이었을 것이다. 가장 처음 균열에서 연주했을 때 김래빈은 알아버리고 만다.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던 자신의 능력이 균열을 강제로 찢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자기 능력이 다른 공간계 능력과는 결이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챘다. 굳이 다름을 설명하자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김래빈, 자신의 능력은 공간과 공간을 뛰어넘어버리는 것을 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김래빈은 확신했다. 자기 능력이 공간계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 굳이 자신이 이름을 명명하자면 차원계라고.

균열과 현재를 잇는 공간계와는 다르게 김래빈은 자신이 균열에서 균열로 이동할 수 있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괜찮았다. 삶의 80%를 함께해온 능력의 효용성을 깨닫는 순간의 기쁨은 직후 일어난 일로 인해 가라앉았다.

하나의 공간을 도약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김래빈이 난생처음 공간을 찢고 도약하여 탈출에 성공했을 때 그는 분명 무너져 가는 균열 안에서 1시간밖에 머물지 않았음에도 공간에서 내동댕이쳐진 후 확인해보니 밖은 9시간이 지나있다.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긋남의 시초다. 그는 균열에서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자꾸 시간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소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김래빈은 공간을 부유하는 부랑자일 수밖에 없다. 그가 도약하는 것은 결국 차원과 차원이다. 하나의 우주와 하나의 우주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부수고 찢어 새로운 세계로 도약한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이 얼마나 무수한 공간을 찢어버렸는가?

그럼에도 공간을 찢어버릴 때마다 김래빈은 간절하게 바라고는 했다. 제발 내가 나의 우주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자신의 유일한 좌표를 잃고 싶지 않다고. 이 공간을 벗어나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던 공간이기를.

다행히도 김래빈은 지금까지 제 우주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단지 무수하게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김래빈의 능력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현 탐험대조차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어주는 어른은 흔하지 않기도 했고, 자신만이 아는 이러이러한 능력이 있으니 데려가달라 부탁하는 미성년자를 폭넓게 수용해준 탐험대였다. 그들과 몇 번이나 생사를 오가며 공간을 뛰어넘었는가, 그런데도 그런 그들에게까지 말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불안정함이다. 어느 누가 살아가고 있는 우주를 잃어버리고 싶겠는가?

김래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른다, 내일부터는 분명 무언가가 바뀔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사고하는 머릿속이 복잡해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잔잔하게 누르니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의 울림과는 다른 울림, 그보다는 깊은가? 가벼운가? 김래빈은 언제나 이 소리를 구현하려 애를 써왔으나 그 울림을 현실에서 재현할 수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김래빈, 그 혼자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미쳤다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던 음색이다. 심각성을 외면하고 있는 지금도 결국은 포기하지 못한다.

“더는 사용하면 안 될 텐데….”

결국 방으로 들어와 푹신하지도 않은 침대에 몸을 던진 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김래빈이 웅얼거린다. 그런데도 손은 끝까지 그 신비로운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김래빈은 문득 울고 싶어졌다. 가장 사랑하는 소리를 놓을 수가 없어서, 놓아버리면 자신이 영영 이 공간에서 이방인이 될까 봐.

사실, 김래빈은 지금도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이 공간에서 튕겨 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요란스럽게 벨 소리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결에 미간을 구기며 핸드폰을 들어 살펴보니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김래빈이 공손히 양손으로 전화를 받아서 들었다. 예, 김래빈입니다. 누구십니까?

그리고 지금, 김래빈은 어제 들렸던 스피릿 기관 정문 앞에 서서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걸려 온 전화에서는 아무런 설명 없이 기관으로 김래빈을 호출했을 뿐이라, 김래빈은 눈을 부릅뜨며 건물 안으로 긴장한 채로 걸음을 옮긴다.

 

 

스피릿 측에서 왜 자신을? 의문으로 가득 찬 생각을 억누르며 기관 내에 들어선 그는 다짜고짜 상층으로 안내받았다. 이렇게까지 높은 층에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고, 간신히 C등급 판정을 받은 자신이 이곳에 올 곳이 아니라는 압박만이 느껴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마음을 다잡은 후, 눈앞에 있는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목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로 앞에 탁 트인 전경이 가장 먼저 소년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김래빈 트레이서.”

“아, 예!”

유리창 너머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가 들려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김래빈이 빠릿빠릿하게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부담스럽게도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가죽재 소파와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듯한 낮은 테이블, 그리고 마주 앉은 서울을 담당하는 스피릿의 지부장.

이전이었다면 이런 곳에 오지도 못했을 하급 트레이서 김래빈은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접견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김래빈 트레이서. 우선 등급이 상향 판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금일 부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탄생한 S급 트레이서가 되셨군요, 최초 타이틀도 받으신 건 압니까? 대한민국 최초의 듀얼 트레이서라고들 하더군요.”

“예?”

어제 생중계 중 TV를 꺼버린 후로 인터넷도 접하지 않았던 터라, 저도 모르는 새 큰 소란이 일었던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김래빈은 눈을 부릅뜨면서 미간을 한껏 구기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너무 놀라 입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김래빈은 시선을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두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놀라 혼란스러운 탓이었다. 사고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는 잔에 손을 뻗었다. 안에 담긴 짙은 색의 액체는 조금 시큼한 카페인의 향을 풍겼다. 산미가 강한 원두를 사용한 아메리카노 같았다. 잔을 쥐자 달그락, 들어있던 얼음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김래빈은 빈속에 아메리카노를 때려 부은 후, 제 앞의 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김래빈을 마주하고 앉아있던 지부장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갑작스레 커피를 한꺼번에 마셔버리고 눈을 마주하는 소년의 얼굴이 한껏 기분이 나쁘다고 티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부장은 상대가 18살밖에 먹지 않은 미성년임을 자각했다, 얼굴만 봐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떤가. 원래 이런 거래는 연륜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만만하게 상대를 회유할 계획을 머릿속으로 가늠했다. 물론, 저 살벌한 눈동자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지만.

지부장은 잠시 외워둔 상대의 정보를 되새긴다. 김래빈, 강원도 출생. 18세, 가족 없음, C급이나 안정도가 극도로 낮아 D급 취급받는 트레이서. 측정된 능력은 ‘진정’…. 스피릿의 주의할 인물로 주시 대상이던 인물. 그리고…. 지부장의 생각이 더 이어지는 것을 끊어낸 것은 그가 직전까지 정보를 떠올리던 이다. 상대가 입을 열어 허점을 짚어낸다.

“측정조차 되지 않는 능력에 그리 과한 등급을 부여한단 말입니까?”

김래빈이 서늘하게 내뱉자, 지부장은 웃는 낯 그대로 테이블에 늘어두었던 서류 중 하나를 건넸다. 소년의 기분이 상한 것 같으니 우선 빠르게 달래고 넘어가려는 심산이었다. 소년이 어찌하여 요주인물이 되었는가? 그는 몇 번이고 이능 검사를 신청했던 이력이 있는 트레이서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작년 각성하기 직전까지 무려 스무 번이 넘는 검사를 받았음에도 작년의 결과를 제외한다면 다른 이능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았던 것이 특이 사항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보통은 호기심에 검사받아보고,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면 다시 찾지 않는 게 일반적이나 김래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를 받으러 왔던 것이다. 지부장은 소년이 능구렁이를 속에 키우고 있다고 여겼다.

이건 엄연히 자신들의 실수다, 소년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도 이것을 지적한 것이니까. 너희의 무능함으로 이곳에 얽매려 하지 말라는 경고인지도 모르지. 지부장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쳐냈다.

지부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김래빈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류를 보았다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써진 0이 몇 개지? 소년이 눈을 부라리며 상대를 보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동자가 상대를 뚫어버릴 듯이 직시한다. 김래빈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더욱 혼란스러웠다. 측정조차 되지 않는 능력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데 등급을 주는 것 하며, 스피릿의 전속 트레이서로 계약할 수 있는 계약서를 내미는 것까지. 게다가 상세히 읽어보니 연봉부터가 자신이 아는 S급 트레이서들의 연봉의 몇 배였다.

“이건 너무….”

과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김래빈이라도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만은 깨달았다. 다행이려나, 알 수 없었다. 거절하려 입을 여니, 제 말을 끊고 상대가 말을 이어온다.

“아니요,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래빈 트레이서, 김래빈 트레이서의 능력은 동료분들께 상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공간계 서포터의 경우는 아무래도 등급의 상향조정을 받는 편이니까요.”

구구절절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지부장은 소년을 회유하려 들었다. 소년은 어른의 말씀을 끊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요약하자면 공간계 서포터는 귀하니 제발 S급으로 활동해달라, 당신만큼 많은 인원수를 한 번에 옮기는 서포터는 없다 등. 그러한 사탕발림 뒤에 숨겨진 용건은 하나다. ‘네 능력을 공개적으로 인증해달라. 전 세계에 네 능력을 널리 알리고, 널리 위상을 세우자.’ 그것이 자신이라는 보석을 앞세워 자신의 출셋길에 이용하려는 음침한 이의 속셈이란 것까지는 김래빈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러한 회유에도 김래빈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조차 짓지 못한 이 능력을 계속하여 사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여태 그것을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사용하지 못한 것은 강제적으로 공간을 찢어버리면 찢을수록 돌이킬 수 없는 어떠한 것이 뒤틀리고 있다는 감각 탓이었다. 무언가가 어긋난다는 감각, 이대로면 분명 잘못되어 버릴 것이라는 본능적인 확신.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가 나온다, 딱딱하게 굳어 날 선 어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신경 쓰기에는 김래빈은 아주 불안했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초조했다.

“불가능합니다. 제 능력은 정말 위급사항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균열이 아닌 곳에서는 사용해도 발휘되지 않습니다.”

“균열 내부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김래빈 각성자가 발동시키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글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김래빈은 무수히 자신이 왜 이곳에서 능력을 쓰면 안 되는지를 설명하려 했으나 지부장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꾸 ‘단 한 번만’이라는 조건을 걸며 늘어지기에 결국 김래빈은 졌다. 선천적으로 어른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는 성향 탓이 컸다.

 

결국 지부장의 조건을 수락하자마자 지부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일에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것이 지금 김래빈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스피릿 기관 지하에 펼쳐진 훈련장까지 이동해, 혹시 모를 위험 상황을 대비해 설치된 안전유리 너머에 바글바글하게 있는 기자들을 마주하며 서 있는 이유였다.

지부장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해보라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곱씹다 보니 김래빈은 제가 가진 또 다른 이능이 어떠한 능력인지도 모르면서 사용해보라고 한 지부장이 떠올라 심란한 마음으로 눈을 꾹 감았다. 이곳에서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면 결국 그도 포기하겠지.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었으나, 김래빈은 진실로 혹시 모를 위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다만 이곳은 균열 내부가 아니라, 어떠한 현상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음을 알립니다.”

수런수런, 기자들이 술렁였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우리가 굳이 이걸 찍어야 해요? 어떤 사람이 속닥이는 목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에 푹 박혔다. 저 말이 맞았다, 나는 왜 여기에 서 있어야하나. 그러나 김래빈은 제 앞에 펼쳐진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애써 초조함을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연주해도 그 누구도 듣지 못할 것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그러나 문득 궁금증이 치민다. 그건 누군가가 질문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너의 능력을 최대로 써보면 어떤 느낌일까? 네가 세계를 찢어 튕기기 전에 멈추면 되지 않을까? 달콤하고도 어쩌면 다정한 무형의 목소리. 김래빈은 무형의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보라색으로 코팅된 고글을 쓰며 결심한다. 그래, 어차피 균열 안이 아닌 곳에서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도 않잖는가? 그렇다면 자신이 만들어낸 곡을 연주해봐도 괜찮지 않은가? 알 수 없는 설렘에 소년이 허공에 손을 올린다.

기감이 예민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손가락을 누른다. 신비한 음색이 소년의 귓가를 경쾌하게 울린다. 문득 무의식적으로 조율하던 정체 모를 악기가 한없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여태 동안 그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래빈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색으로.

아!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영감이 소년의 뇌를 후려치듯이 꽂혔다. 소년은 바닥을 향했던 고개를 들어 눈앞을 직시한다. 수많은 카메라가 보랏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소년은 평소답지 않게 즉흥적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자신은 지금 당장 곡을 만들어야 했다!

이전에 만들어낸 곡들은 이 음색을 받아낼 수 없다는 확신. 그래! 그동안 그에게 필요한 건 아마 작은 계기였을 것이다. 소년의 기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누른다. 기타 소리인가, 피아노 소리인가, 오르간? 바이올린? 첼로일 수도 있고 플롯 같기도 하다. 관악기인지 현악기인지, 그로서는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보에 유리 너머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소년의 귓가에 당연하게도 들리지 않았다. 소년은 이미 자신의 음악에 빠져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연주?’

‘아까랑 분위기가….’

공간이 떨려온다, 피부를 뒤흔드는 파동이 그 좁다란 곳에 갇혀버린 인간들을 매만진다. 수없이 늘어진 카메라의 렌즈에 금이 간다. 곳곳에서 어, 하며 갑작스러운 상황에 반응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사방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균열 내부에서 균열이 금이 가는 소리와도 같아 저도 모르게 소년은 입꼬리를 올린다.

기자들의 앞에 있는 안전유리에 금이 가는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년을 보았다. 그들의 감각이 경고하는 듯했다. 저 이를 말려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김래빈 트레이서! 지금 당장 능력을 중단하세요!”

안전을 위해 따로 훈련실 입구 쪽에서 대기하던 A등급의 전투계 트레이서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소년을 향해 외쳤다.

그는 이 소름 끼치는 감각을 알았다.

이 감각은, 이 파동은.

“…균열이 열립니다!”

소년의 머리 위로 시커먼 빛의 균열이 나타난다. 김래빈은 제가 만들어낸, 혹은 불러낸 균열을 바라본다.

귓가에 감미로운 음색이 울리는 와중에 그는 웃어버리고 만다. 아, 맙소사. 김래빈이 상상했던 결과는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언제나처럼 자신이 튕겨 나가리라 생각했던 소년은 상상하지 못한 재앙의 등장에 연주를 멈출까 고민한다.

지금 멈춘다면, 그렇다면 분명 저것은 소멸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것은 확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뇌를 강타한 번개 같은 영감을 손에서 놓아버릴 수는 없어서. 아, 결국 소년은 연주의 끝을 선택하고 만다.

그래,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버린 것은 저들이지 않은가? 평소의 김래빈이라면 하지 않을 사고가, 열망이 자신의 뇌 한쪽을 망가트리는 기분이었다. 섬뜩하리만치 감미로운 선율이 김래빈의 몸을 감싼다, 자신을 끌어당기는 인력이 느껴진다. 자신이 만들어낸 선율이 불러내진 균열에 하나둘 먹혀가고 있었다.

김래빈은 직감한다, 나도 먹히겠구나.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반드시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이다. 소년의 양손이 건반을 한 번에 누르듯이 허공에 내려앉는다. 상반된 화음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다.

연주가 끝난다. 박수갈채 대신 속이 시커먼 균열이 아가리를 벌렸다. 선율마저 삼켜버린 그것은 아귀와도 같이 연주자마저 탐을 낸다.

문득 김래빈은 그것이 블랙홀을 떠올리게 한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탈력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이 인력에서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고 너무 몸이 피곤했다.

김래빈 트레이서! 김래빈 트레이서, 정신 차리십시오! 김래빈…!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흐릿해지기만 한다. 그러고 보니 블랙홀은 강한 중력으로 빛까지 삼켜버린다는데, 나는 그러면 이제 으깨져 죽는 것일까? 의식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따뜻하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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