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향기와 자물쇠

청우문대, 캠퍼스au, 라일락과 커피와 다이어리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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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우문대 13회 전력: 카페인, 일기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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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때문인가? 부정맥이라도 왔는지 의심했다. 벚꽃이 정말 예뻤다.

 

류청우가 박문대의 다이어리를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급하게 나가느라 놓고 가기라도 한 건지 책상 위에 웬 노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본 건 류청우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게 박문대의 다이어리라는 것을 알아본 것 역시, 류청우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 펼치기로 결심한 순간은 분명 그의 잘못이었다.

한참 전에 헤어진 전 연인의 일기를 본다니, 본래의 류청우였다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류청우는 죄책감이란 것을 좀 버려보기로 결심했다. 비밀번호가 걸려있긴 했으나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넣어본 제 생일로 그 얄팍한 보안은 쉽게도 깨져버렸다. 꼬이는 심기를 뒤로 하고, 자물쇠를 열어 도톰한 종이들 사이를 아무렇게나 펼치자 가장 처음 보인 날짜는 류청우도 쉽게 잊기 어려운 날짜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아주 오랜만에 박문대의 얼굴을 보았던 날이어서. 류청우는 노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매끄러운 노트 표면이 손끝과 마찰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그 날의 일기는 단 세 문장 뿐이었기에, 류청우는 조심스레 뒷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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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새x는 헤어지고서도 다정한지 모르겠다. 소문 좀 더럽게 나도 딱히 정정할 이유도 없잖아. 너를 찬 머저리쯤은 그냥 좀 무시하고 지나가라고. … 오래 못 갈 거 빤히 알면서 받아준 내가 제일 멍청하다만.

 

심장이 저 바닥 너머로 추락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류청우의 머릿속에 문득 그 날이 떠올랐다. 남들 앞에서 저가 먼저 함부로 거리를 두었다간 박문대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까 무서워 부러 인사를 건넸던 날. 저를 물끄러미 보다가도 조금 떨떠름하게 인사를 돌려준 박문대는 아무래도 류청우와 굳이 인사 따위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음 장을 보려던 류청우는, 제 손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쓰인 문장을 조금 늦게 발견했다.

 

그래도 찬 걸 후회하진 않는다.

 

왜 그랬을까. 저가 차인 입장이었기에 류청우는 사실 자신이 왜 차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그의 잘못이라면 고치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껏 명료한 세상에 살던 류청우는, 제 인생에 처음으로 끼어든 난제에 지금까지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짙은 아카시아 향이 밀려들어왔다. 아니, 라일락인가? 찰나를 스친 그 향이 너무도 달았다.

 

“그래도 난 네가 보고 싶은데.”

 

4/20

내가 찬 주제에. 감당 못 할 걸 꿈꿨던 주제에 왜 이제껏 그러고 있냐.

 

4/25

작작 좀 생각해, 네가 지금 그런 데 한눈 팔 때야? 아니 근데 시x 저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데 어떡하라고.

 

류청우는 또 뒷장을 넘겼다. 다른 일상이 적혀있을 법도 한데, 어디를 펼쳐도 거기엔 류청우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대충 요약하면 자꾸 생각난다, 내가 찬 주제에, 뭐 그런 내용들. 류청우의 기억 속에 남은 박문대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어조. 그렇게 펼친 마지막 장에서, 류청우는 참고 참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5/1

보고시ㅍ어

 

술에 취한 건지, 무언가에 홀린 건지. 단 한 문장만이 남은 그 날은 바로 어제였다. 누가 보고 싶은 건지는 상관 없었다. 아니, 굳이 따지면 답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그 문장을 명분으로 삼아 류청우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금 자물쇠를 걸었다. 그의 존재를 비밀번호로 삼은 자물쇠가 찰칵이며 노트를 잠갔다. 바람이 살랑거리며 피부를 스쳤고, 다시금 밀려든 달콤한 향이 이성을 잠시 뭉그러뜨렸다. 류청우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 안녕하세요.”

 

제대로 마주한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뇌리를 스치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류청우 역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문대와 다시 마주하면, 같잖게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안녕, 문대야.”

 

어림도 없었다. 류청우는 눈밑에 짙은 그림자를 단 채 마지막 기억 속에 남은 것보다 훨씬 수척해진 박문대를 보며 생각했다.

 

“혹시 그거 보셨나요.”

“아니, 안 봤어. 자, 여기.”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

“잠깐만, 문대야.”

 

아주 진한 커피라도 마신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류청우는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류청우는 박문대를, 그 어느 순간에도 원망할 수 없었다. 박문대가 대었던 마음이 식어서 그렇다는 그 얄팍한 핑계는 더 이상 류청우에게 먹히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그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나? 류청우는 손을 뻗었다.

 

“문대야, 잠깐만. 시간 있어?”

 

없다면 그가 만들어 낼 것이다. 류청우는 까맣게 죽은 눈으로 저를 물끄러미 보다, 서서히 젖어가는 눈으로 고개를 모로 돌린 채 희미하게 끄덕이는 박문대의 손목을 잡았다. 몰랐다면 모를까, 그의 진심을 알아낸 이상 류청우는 망설임 없이 목표를 겨눌 수 있었다. 잡힌 손목에서 거센 진동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 속, 원하는 점수에 정확히 명중한 화살을 보는 그 순간이 아스라이 느껴지는 데자뷰. 류청우는 기꺼이 제게 이끌리는 박문대를 당겨 안았다. 맞지도 않는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돌듯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맞닿은 옷깃 너머로 팔딱거리는 고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 품에 얼굴을 부비는 박문대가 너무도 그리웠다. 희미하게 젖은 숨소리가 그의 몸을 덥혔다. 저깟 다이어리가 아닌, 류청우라는 인간을 다시 박문대에게 쥐여줄 시간이었다. 달콤한 향 대신, 박문대가 항상 달고 살던 진한 커피 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류청우는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박문대가 가장 원했을 마음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어떤 순간이라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하듯 단단하게.

 

“나도 보고 싶었어, 문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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