幻
발랄하고 활기찬 음악이 조용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울리기 시작했다. 뒤척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부스스한 얼굴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든 김래빈이 알람 종료 버튼을 밀었다. 한 삼 분쯤은 더 누워있을 수 있지 않을까.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시계를 확인하며 시간을 가늠해보던 그는 이내 포기한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차유진, 일어나.”
방의 건너편으로 넘어가 여전히 꿈 속을 헤매는 상대를 잡아 흔들어보지만 돌아오는 건 명료한 대답 대신 아직 잠에서 덜 깬 웅얼거림이다. 짧은 한숨을 쉰 그는 휴대폰을 익숙하게 조작한 뒤 팔만 뻗어서는 닿을 수 없는 선반 위에 올려두고는 세면도구를 챙겨 욕실로 향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욕실 안으로 들어가면, 한층 더 웅장해진 알람 소리와 차유진이 진저리 치는 소리가 욕실 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Good morning.”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로 들어온 차유진이 여전히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칫솔을 입에 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마주하며, 김래빈 역시 똑같이 인사를 돌렸다. 잘 잤어. 차유진?
개강 3주 차. △△ 대학 International 기숙사에서 근 2주간 반복되어 온 아침이었다.
“그러면 이따 교양수업 때 봐.”
“김래빈도 일 잘해. See ya!”
저지를 걸친 차유진은 체육관 쪽 샛길로 빠지고, 가디건을 대충 주워 입은 김래빈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오른다. 개강 3주 차의 대학생은 각자의 일로 바쁜 법이다. 그는 오전 동안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했고 차유진은 대학생 대상 아침 수영 강좌를 수강했다. 아침에 그렇게 약한 주제에, 뭐든 몸을 움직여야 하루가 찌뿌둥하지 않다고 했다. 함께 아침을 먹은 후 김래빈의 하루가 근로와 수업, 과제로 채워질 때 차유진의 하루 역시 운동과 수업, 과제로 채워졌다. 아. 사교활동은 덤이다. 한국에 온 지 이제 2년째라면서 어디서 그렇게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들었는지.
그러다 보니 룸메이트라곤 해도 하루에 공유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공도 서로 달라서 수업이 겹치는 것도 고작 비잔틴 예술을 다루는 교양수업 하나뿐이었다.
‘이래서야 차유진이랑 얼마나 친해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는데.’
또래 관계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어느 정도까지 친해져야 진정 친한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다. 김래빈은 반납함에 쌓인 책을 책 수레에 실으며 박문대를 세 번째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로 사과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때는 많이 놀라셨을 테니까요.’
그는 차유진을 대동하더니 마치 강아지를 변호하는 주인처럼 김래빈에게 사과했다. 덤벼들어서 죄송합니다. 근데 우리 애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요.
‘…저번에도 이 녀석에게 들었겠지만 일단 얘 이름은 차유진입니다. 나이는 당신과 동갑이고요. 이제까지 우리 중 또래가 없어서 새롭게 또래를 만난다고 하니까 지나치게 설렜던 모양인데,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일단은 미국에서 와서 스킨십에 좀 스스럼이 없는 편입니다. 놀라셨을텐데, 죄송합니다.’
어딘가 해탈한 얼굴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으며 박문대는 차유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꾸벅. 차유진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 반가워서 그랬어.
‘그, 렇습니까? 분명 그때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저, 제가 이제 함께 일하게 된 이상 말씀을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한참 어리기도 하고….’
양쪽이 다 저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에 깜짝 놀란 김래빈이 함께 고개를 숙이자 박문대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사람은 희미하게 웃고는 몸을 바로 세웠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예. 박문대가 그에게 존대를 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교우관계에 내가 이래라저래라하긴 어렵지만 이왕 같은 학교에 동갑이니까 친하게 지내봐라. 얘도 신기루를 볼 수 있거든. 그렇지만 영향은 받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좀 더 마음 놓고 대할 수 있지.’
박문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에게 차유진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차유진이 추임새를 넣었다. 친구 좋아요!
정신을 차려보니, 김래빈은 어느새 그들에게 설득당해 입학한 지 일 년 반 만에 겨우 들어간 학교 기숙사에서 차유진과 룸메이트를 위한 신청서를 함께 작성하고 있었다. 차유진이 머문다는 인터내셔널 기숙사는 신축인데다 다른 기숙사동보다 관리가 덜 빡빡하고 식당 운영을 잘한다는 이유로 경쟁률이 센 곳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을지는 긴가민가했지만, 이렇게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걸 보면 제출했던 신청서가 효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좋은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어.’
게다가 차유진은 꽤 괜찮은 룸메이트였다. 거리를 좁히는 방식이 종종 당황스럽긴 해도 원하는 바가 명확하고 뒤끝이 없었으며 공간을 깔끔하게 썼다.
어쩌면 이미 조금은 친해졌는지도. 김래빈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허리를 쭉 펴고 반납함의 문을 다시 닫아걸었다. 월요일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아직 본격적인 과제 기간이 아니어서인지, 평소보다 책 수레에 담긴 책이 적었다. 그는 책 수레를 힘주어 밀었다. 돌돌돌. 울퉁불퉁한 복도에 수레바퀴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도서관에는 해가 잘 들지 않아서 아직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전등이 어스름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엇비슷하게 이어진 복도를 그는 걸었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주변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 아래에서 먼지처럼 보이는 작은 부스러기들이 굴러 나왔다. 넝쿨을 닮은 음영이 드리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 언뜻 이 세계의 것이 아닌 잡동사니들이 비치고, 작은 녹색의 빛이 그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책들 사이로 곰팡이 끼듯 이계의 문양이 침범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다시 호흡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풍경은 그 호흡에 맞춰 팽창했다 축소하기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주변은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그러다 그가 문득 의식적으로 힘주어 크게 숨을 들이켜면 그 세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졌다.
박문대가 신기루라고 불렀던 것.
그러나 김래빈은 ‘그것’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의도적이고 오래된 무시였다. 그는 대신 정리해야 하는 책더미로 손을 뻗었다.
*
도서관 일은 익숙했다.
중학교 때며 고등학교 때에도, 그는 채워야 하는 봉사활동 시간을 굳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는 도서관에서 일하며 채웠다. 도서관이 제일 편하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은 조용하고,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실수할 일이 많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책과 음반이 많았다. 처음에는 암호처럼 보였던 도서관의 분류체계에도 익숙해지는 덴 금방이었다. 도서관마다 코드 부여 기준이 조금씩은 달라서 같은 책에 항상 같은 코드가 붙는 건 아니었지만 김래빈은 이제 책의 태그만 보고도 얼추 서지정보를 짐작할 수 있었다.
‘832.0365 h27j c.2….’
문학 섹션, 독일 문학, 희곡, 저자의 이름은 H로 시작하고, 작품명은 J로 시작하는 책 중 한 권.
규칙을 알면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악보도, 컴퓨터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한번 익히면 어긋나지 않는 세계란 확고하고 편안했다. 김래빈은 그런 시스템 속에서 안정을 느꼈다. 근로 장학생을 신청하면서 도서관에 지원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원 가능한 범주 안에 도서관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
그러니 오늘도 특별한 일 없는 그런 날일 줄로만 알았는데.
아까 차유진을 생각해서였을까. 잠깐 빈 시간에 로비로 내려가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고 올라오는 길에 그는 차유진을 발견했다. 각 층 라운지에 놓인 테이블이며 의자, 소파 사이에 눈에 익은 형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일하다 그를 마주치는 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여기는 도서관이었고 차유진은 학생이었으며, 그는 김래빈이 일하는 날이면 책을 빌리러 오든 친구들과 함께 찾아오든 짬을 내어 그와 잠깐 대화를 하고 갔으니까. 가끔 여유가 있으면 그의 일을 돕고 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자고 있네.’
김래빈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차유진이 소파에 대충 기대어 졸고 있었다. 고개는 곧 꺾어질 것처럼 불안정했지만 감긴 눈은 유순했다. 테이블 위에는 책이 잔뜩 올려진 채였다. 반 정도는 영어로 된 책이었지만, 한글로 된 책과 한영사전이 먼저 눈에 띄었다.
차유진은 국제학부였다. 국제개발과 도시학 관련 융합 전공이라고 했던가. 전해 듣기로는 아주 필수적인 몇 개의 강의를 빼고는 전부 영어강의라고 했다. 그러니 한글로 된 책은 어쩌면 읽을 필요 없을 텐데도.
그는 뭐든 열심히 했다. 그가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과는 정반대였다.
‘한국에는 어쩌다 오게 된 거야?’
그가 차유진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차유진은 그냥, 하고 팔을 쭉 뻗으며 침대에 드러눕더니 입을 열었다.
‘나 예전부터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었어! 여러 나라 생각했는데, 한국이 제일 맘에 들었어.’
그날 그는 차유진이 고등학교 때부터 한글을 공부하기 시작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한국으로 왔고, 반년간의 언어원 생활을 거쳤으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여전히 방학 때마다 언어 특강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래빈의 눈이 다시 한영사전을 훑었다. 볼펜이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볼펜을 떨어지지 않게 테이블 위로 올려주고는, 그 옆에 조용히 제가 뽑았던 솔잎 향 음료수를 올려두었다. 아무래도 잠을 깰 만한 건 저보다 차유진에게 더 필요해 보였으니까. 메모는 따로 남기지 않았다. 그래도 차유진은 그 음료수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금방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일을 마치고 안내데스크로 돌아왔을 때 사서 선생님이 내민 콜라 캔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김래빈 역시 금방 알 수 있었다. 갓 뽑은 것처럼 서늘한 캔에는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김래빈 음료 취향 특이해 X0]
…그게 그렇게 취향을 타는 음료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김래빈은 콜라 캔을 포스트잇과 함께 가디건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주머니의 묵직함이 새삼스러웠다. 역시 좀 친해졌는지도 모르겠어. 김래빈은 조심스럽게 차유진에게 친구라는 라벨을 붙여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에 그는 괜히 휴대폰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박문대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교양 강의를 함께 듣기 위해 도서관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차유진은 그의 의문에 간단하게 답을 내렸다.
“원래 신기루 자주 없어. 문대형 필요하면 연락해. 김래빈 그거 신경 쓰여?”
차유진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혹시 내가 미덥지 않아 보여 부르시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
무릇 제대로 일을 하려면 상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말이었다. 마치 농작물을 잘 기르려면 그 땅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그러니 김래빈이 판단하기로는, 본격적으로 신기루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쯤 그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들어야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가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지, 신기루라는 것에 정확히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그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쪽에서 막무가내로 찾아가 묻기도 어려운 일이다. 질문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김래빈 이상한 걱정해. 그렇지만 걱정 많으면 이번 주말에 가!”
보고 싶으면 우리가 먼저 놀러 가면 돼. 차유진의 말에는 구김이 없었다.
그는 그보다 딱 반년 일찍 그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 차유진은 그 ‘형들’과 차유진이 오래된 사이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아마 그건 차유진이 모든 사람에게 곰살맞게 굴기 때문이겠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신과 차유진 사이만 봐도 뻔했다. 이제 만난 지 고작 한 달.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진정으로 정신없는 교우관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태반은 차유진의 공이다. 덕분에 김래빈은 오랜만에 또래와 더불어 사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어색함 한 점 느낄 새가 없었다.
“음. 그보다는 미리 연락을 드려서 언제 시간이 되는지 여쭤본 뒤에 약속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주말엔 형들 있어.”
“그래도 남의 집에 방문하려면 그 전에 연락을 드려 허락받는 게 예의야, 차유진.”
“나도 가기 전에 연락해!”
눈을 빠르게 깜박인 차유진이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렇지만 김래빈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일 아침에 연락하는 건 미리라고 할 수 없어. 내 생각에는, 적어도 사흘 전에는 연락을 드리는 게 맞아. 당일 아침에 연락했다가 혹시라도 형들께 일정이 있으시다면 어떡하려고. 꼭 그런 부분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방문하는 거니까 예의를 지키려면 역시 사흘 전쯤에는 미리 용건을 밝히는 편이….”
주절주절 주장을 늘어놓는 그의 말을 차유진이 끊었다.
“Ohhhh…. Stop. 그거 아냐. 김래빈은 친구가 갑자기 고민 상담하면 곤란해?”
“…?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왜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종류의 고민인지에 따라 다를 순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차유진 지금 나한테 상담해야 할 고민이 있어?”
What a…. 감탄사를 흘리며 멈춰 선 차유진이 멀뚱히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 역시 영문도 모른 채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뭔가 잘못 대답했던가 되짚어봐도 별다르게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김래빈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던 걸 멈추고 절 바라보는 차유진의 눈동자나 마주 보았다. 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차유진의 눈은 해가 잘 어울렸다. 김래빈은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노을이 지는 시각이어서, 넘어간 해가 비스듬한 각도로 눈 안쪽 깊이까지 빛을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그와 그렇게 가까이 서 있던 게 아니었는데도 홍채의 빗살까지 볼 수 있을 것처럼 투명했다. 나오라던 그의 말에 선선히 한 걸음 내디뎠던 것도 어쩌면 그 눈동자 탓이다. 웃음기를 머금은 채 빛을 받은 그대로 반짝이던 눈동자는 마치 차유진을 세계의…
…
…래빈. 김래빈.
…
“김래빈?”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뭔갈 생각할 새도 없이 일단 제 발아래서부터 뻗어나가려는 것을 사정없이 잡아 눌렀다. 녹슨 철필과 흩어진 죽간, 깨진 레코드와 망가진 책들로 이뤄진 긴 복도가 차유진을 향하다가 멈추었다. 이끼 낀 벽이 사방에 어둠을 드리운다. 그래도 물리적 실재를 침범하지 못해서 차유진의 눈에 드리운 햇빛은 여전하다. 혀가 날름거리듯, 그림자가 차유진의 얼굴을 반쯤 가리다가 다시 사라진다. 김래빈은 발악하듯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허구를 누르고 압축하고 밀어 넣었다.
“미안. 요새 자주 이러네.”
“It's OK. 나 괜찮다고 했어.”
신기루를 감지할 수 있다고 했으니 제게 밀려오는 것들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차유진은 오히려 태평한 기색이었다. 차유진에게로 잎새를 뻗치던 덩굴이 그의 몸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까맣게 먼지로 흩어져버리는 것을 김래빈 역시 보았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차유진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그는 종종 불안했다. 아마 너무 오랫동안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그 이유를 그렇게 추측했다. 감추고 내리누르고 못 본 척하는 삶을 그는 제법 오래 지속해왔던 것이다.
김래빈이 어물거리고 있으면, 차유진은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항상 인기 많아! ‘신기루’도 나 좋아하는 거 당연해.”
“…엄밀히 말하자면 신기루는 유기체가 아닌 것으로 추측되니까, 감정이 있다고 확답하기 어려운 현상으로서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는 표현은….”
그 와중에도 김래빈은 차유진이 인기 많다는 말은 부정하지 못했고, 그가 말을 채 다 잇기도 전 어깨에 휙 팔을 걸친 차유진은 그를 질질 잡아끌었다.
“그거 안 중요해. 한국어 강의 이따 해. 생각 길었어, 김래빈. 우리 교양 늦어-!!”
차유진의 힘에 끌려가면서도 시계를 확인한 김래빈의 몸이 퍼득 뛰어올랐다.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도 휴대폰의 시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기는 교양관까지 걸어서 10분, 뛰어서 4분 거리의 오솔길. 교양 시작 시각은 오후 세 시 반.
휴대폰이 말하는 현재 시각은 오후 세 시 이십칠 분.
“으악, 차유진! 왜 그걸 지금 말해??”
“나도 지금 봤어!!!”
한가하게 걷는 학생들 사이로 타다닥, 요란한 뜀박질 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흩날린다. 각자 가방을 죽을 듯 부여잡은 차유진과 김래빈은 그날 오솔길과 교양관의 3층 계단을 도합 5분 만에 주파했다. 둘은 헉헉대며 강의실에 도착해, 맨 뒷자리의 빈 의자를 각각 잡아 앉아 그대로 뻗었다. 담당 교수가 정각에 딱 맞춰 도착하는 편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결국 김래빈은 평소 그의 신념과는 다르게 주말을 고작 하루 앞둔 금요일, ‘실례지만’으로 시작하는 장문의 문자를 박문대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박문대의 답장은 짧고 간결하게 도착했다.
[그래. 내일 보자.]
*
“이야~ 그건 박문대가 잘못했네. 지금 신입을 유진이한테만 맡겨놓고 모른 척한 거야?”
거실의 폭 좁은 다탁을 한쪽으로 밀어 치우고 대신 넓은 탁상을 꺼내며 이세진이 깐죽대었다. 부엌에서도 용케 그 말을 들었는지 박문대가 덤덤히 받아쳤다. 이세진. 안주 없는 술상이 받고 싶은가 보지? 이세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문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래빈은 그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뻘뻘대고 있었다. 탁상 꺼내는 걸 도와드리려던 시도는 어허, 하며 양팔로 탁상을 번쩍 들어버린 이세진에게 가로막혀버렸고, 부엌에서의 일을 도와드릴까 하고 다가갔을 땐 차유진과 나란히 쫓겨났다.
‘막내는 이런 거에 손대는 거 아냐.’
박문대는 단호했다. 물론 김래빈과는 달리, 차유진은 만들어지는 안주를 몇 개 집어먹으려다가 쫓겨난 게 맞다. 그는 문제의 발단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이 모든 사단은 차유진의 한 마디로부터 벌어졌다. 형. 김래빈 술 마셔본 적 없어요. 우리 오늘 마셔요.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유진 뭐해, 너도 빨리 한 마디 해봐.”
“김래빈이 그랬잖아.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며?”
“아니, 할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지만, 제 말은, 이렇게 갑자기 형들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는 뜻으로, 물론 술을 가르쳐주시겠다면 당연히 감사하게 배우겠습니다만, 술은 언제든지 배울 수 있는 건데 미리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찾아온 걸로도 모자라서 형들께서 술상까지 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으응. 그렇구나. 음, 래빈이는 여기 앉을래? 아직 난방은 필요 없지?”
김래빈의 말은 그대로 묻혔다. 차마 팔을 잡아 이끄는 것을 뿌리칠 수 없어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그의 양옆을 선아현과 차유진이 각각 차지하고 앉았다. 김래빈은 이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을 한 채 탁상 위에 맥주 캔과 탄산수, 과일주스와 물, 그리고 위스키가 하나둘 올라오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휙휙. 차유진이 그의 눈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김래빈 고장 났어?”
세상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울컥했다.
“나는 오늘 진지한 대화를 하러 온 거란 말이야, 차유진.”
“술 마시면서 진지한 이야기 못 하는 거 김래빈 편…파야?”
“편파가 아니라 편견이겠지! 그리고 편견이라니! 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잖아!”
“영어 하면 나 말 잘해. 내가 김래빈 맞춰주는 거야…!”
성량은 죽인 채로, 그러나 기세는 죽지 않은 말들이 둘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둘이 그새 많이 친해졌네. 냄비 받침 위에 아직도 지글거리는 팬을 올려놓은 박문대가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져 둘의 공방을 끊어냈다. 팬 위에는 소세지 야채볶음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옆으로 간단한 카나페와 과일 모둠이 척척 얹힌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휴대용 버너 위에 놓인 건 맑게 끓인 버섯전골이었다. 차유진은 벌써 뻥튀기 과자 한 봉지를 끌어안았다.
“크…! 문대문대.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
“과일이랑 과자 리필은 네가 해라.”
각자의 자리에 각각의 취향에 맞춘 술이 놓였다. 술을 처음 마신다는 김래빈에게는 맥주가 한 캔 주어졌다. 맥주가 도수가 가장 낮고 보편적이니 한번 마셔보고 괜찮으면 다른 술도 조금씩 마셔보라는 이유에서였다. 차유진은 어디에서 큰 컵을 하나 가져와서 과일주스와 탄산수, 위스키를 신나게 섞었고, 선아현은 술을 사양하더니 탄산수로 건배 분위기만 맞추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레 맥주를 입에 머금어보았다. 약간 씁쓸하고 탄산이 느껴지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조금 밍밍했다. 책이나 영상매체에서 접했던 것처럼 맛있거나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쌉싸름한 끝맛이 의외로 괜찮았다.
“마실만 하냐?”
자리를 옮긴 선아현 대신 옆으로 다가와 앉은 박문대가 말을 걸었다. 서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첫 술을 음미하며 긴장을 풀고 있던 그의 어깨가 다시 바싹 굳었다.
“예…! 감사합니다, 형.”
“아니, 뭐. 우리도 한 번 마실 때 되었다 싶긴 했어. 그러니 편하게 있어.”
박문대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자신부터 시범을 보이려는 것처럼 반쯤 누워 편하게 등을 기댔다. 그는 한 손에 그처럼 맥주 한 캔을 든 채 다른 쪽 손으로 카나페를 하나 집어 입에 물었다. 그가 말없이 음식을 우물거리는 모습은 어딘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데가 있어서, 김래빈 역시 천천히 어깨의 힘을 뺐다.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서 설명이 늦었어. 그건 내가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준비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기도 해. 나도 알고 있는 게 적고.”
차유진과 이세진이 서로 즐겁게 떠드는 목소리, 선아현이 웃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배경음으로 깔리는 가운데 김래빈은 박문대의 나지막한 말에 집중했다.
“저번에 신기루가 뭔지 대략적인 설명은 했었지. 기억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식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는 박문대가 물병에 맺힌 물방울을 젓가락에 찍어, 식탁에 몇 개의 선을 긋는 걸 바라보았다.
‘일장춘몽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 고사성어 아닙니까? 한 생애를 살았다가 깨어보니 잠깐의 꿈에 불과했다는.’
‘맞습니다. 그 외에도 남가지몽이나 몽유도원도의 고사도 있고요. 중요한 건, 사람들이 실제라고 착각할만한 허구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며, 어떤 사람들은 꿈의 형태로 그 허구의 세계에 머물다 온다는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전해 내려온다는 겁니다.’
젓가락이 움직인다. 원 하나를 그려 이쪽 세계를 표현하고, 일부가 겹치는 다른 원 하나를 덧그린다. 사람으로 추정되는 점 하나가 두 개의 원 사이를 오갔다. 김래빈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다가도 의아함을 머금은 미간이 주름을 그렸다.
‘분명 유사한 이야기를 여럿 들어본 적 있긴 합니다만…. 박문대 씨께서 하고자 하시는 이야기가, 제가 겪고 있는 괴현상이 그런 고사들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 대답은 침묵 끝에 나왔다.
‘저는 그걸 신기루라고 부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겪고 있고요. 물론 당신과 제가 겪는 건 다른 사람들이랑은 양상이 좀 다를 겁니다. 저희는 꿈을 통해 허구의 세계에 가는 게 아니라,’
방금 그렸던 물방울 그림의 옆으로 박문대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좀 더 겹치는 면적이 많은 원 두 개였다. 신기루와 현실이 겹치는 영역이 더 넓은, 마치 그들 같은 사람들. 그는 그림을 그려가는 젓가락 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물방울들의 연이은 궤적으로만 남은 흔적, 젓가락의 움직임을 응시했던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암호가 연이어 이어졌다.
‘…허구의 세계가 이미 실제의 세계를 침식하거나, 덮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둘은 같은 현상이 맞습니다. 신기루 현상이 출몰했을 때 그 틈으로 들어가면 주위를 맴도는 그 세계로도 연결된다는 걸 경험했거든요. 그러니까 동일한 현상으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다만 그 영향을 상시로 받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겠지요.’
젓가락이 처음에 그렸던 원과 나중에 그렸던 원을 이었다. 그 주변으로 무수한 원들과, 그들을 잇는 작은 선들이 덧그려진다. 표현하고자 하는 건 통로다. 젓가락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때로는 멈칫하고, 때로는 탁상 위를 두어 번 두드린다. 마치 말을 잇는 박문대조차 자신이 세운 가설을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신기루 현상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기루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대개는 꿈에서 이상한 곳을 헤매는 정도로 끝나지만 어떤 경우에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겪거나, 아주 극단적으로는 실종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빠진 사람들을 현실로 되돌려 보내는 게 우리의 일차적인 목표, 인데.’
지이익, 하고 식탁에 긴 흔적을 남기던 젓가락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 끝에 맺힌 물방울을 잠시간 바라보며 그는 이어질 설명을 기다렸다. 보통 ‘일차적’이라는 말이 붙으면 이어지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박문대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톡, 다시 톡. 젓가락이 느리게 식탁을 두드렸다. 젓가락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이 안경테 아래의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는 김래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박문대의 시선이 식탁 모서리 언저리를 떠돌았다. 그는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일차적인 목표라고 하심은, 다른 목표도 있다는 뜻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적이 무색하게 대답은 선뜻 나왔다.
‘신기루 속에 있어야 할 물건이 현세에 돌아다니지 않는지 살피는 일도 있고요. 그리고 지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제 개인적인 용무도 있긴 합니다. 저는 김래빈 씨가 여기에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요청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애초에 길게 설명할 요건이 안 되기도 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명함을 드리고 가겠다며, 그날 박문대는 그에게 명함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김래빈은 고심 끝에 그로부터 사흘 뒤, 서울로 올라가며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안녕하십니까. 저 김래빈입니다. 혹시 기억하실까요? 저번 제의해주셨던 것과 관련하여 답변을 드립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씀해주신 취지에 깊이 공감한 바 가능하다면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그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다음 만남 때에는 차유진과 박문대를 함께 만났고, 또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여기가 되었고…. 짧은 회상을 마친 그에게 박문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다면 거긴 넘어가고.”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8월 이후 지금까지 그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룸메이트 겸 친구가 생기고, 아는 형들이 생기고, 제가 이제까지 의도적으로 눈 돌려왔던 현상을 다시 가까이하게 되고.
“신기루가 때때로 열리는 건 확실한데, 열리는 규칙은 아직도 잘 몰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열리는지. 그래도 신기루가 자주 출몰하는 곳은 알지. 이를테면 길을 잃기 쉬운 곳이나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곳? 그런 데서 괴담이나 실종과 관련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차유진이나 내가 가서 한번 보고, 신기루가 맞으면 그때는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
이제까지의 걱정이 무색하게, 박문대는 김래빈에게 술술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소문을 모으고 정리하는 과정이 가장 길고 지루하다고 했다. 지금은 아직 그 작업의 막바지 단계에 불과해서 그에게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차유진과 함께 있으니 궁금하면 먼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에는 김래빈도 허를 찔린 듯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군요.”
차유진이 맞았다니. 그는 내심 차유진의 상황 판단력을 기존보다 조금 더 상향 조정했다. 평소 김래빈보다는 눈치가 있다고 자부해왔으며, 심지어 형들은 그보다 더 오래 보아왔던 차유진이 알면 황당해할 일이었다. 그러나 차유진이 김래빈의 생각을 어떻게 들여다볼 것이며, 김래빈 역시 차유진의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여전히 조금 북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는 다시 박문대의 말에 집중했다. 길을 잃기 쉬운 곳,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곳. 그 조건에 맞을 만한 장소로는 어디가 있을까 그가 무심코 떠올리던 때였다.
“뭐야~ 지금 둘이는 술자리에서 일 이야기 하는 거야?”
평소보다 높아진 톤의 목소리가 훅 끼어들었다. 좁은 틈새를 용케 비집고 들어와 어이쿠, 하며 주저앉은 이세진은 턱을 괴며 그들을 빤히 바라보더니 잔망스러울 만치 눈꺼풀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응? 뭔데. 왜 둘만 세상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왜. 우리 막내 뭐가 궁금한데요~?”
이세진. 너 술 몇 잔 마셨어. 양손으로 턱을 괸 채 그들을 바라보는 이세진의 눈빛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탁상 위 비워진 술병을 세기 시작한 박문대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별로 많이 마시지도 않았네?”
“누가 이런 자리에서 취할 때까지 마셔? 즐기려고 만든 자리에서.”
“근데 왜 난데없이 끼어들어서 부담스럽게 그러고 있냐.”
“뭐. 너랑 이야기하느라 애 편하게 술도 못 마시는 거 아닌가 싶어서 왔지~ 아, 근데 실망이야, 문대문대. 내가 부담스러워?”
어. 단답형의 대답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이세진은 으하하학, 하고 탁상 위로 엎어졌다. 그러더니 엎어진 채로 손만 뻗어 김래빈의 앞 접시 위로 안주를 올려주었다.
“술만 마시면 속 버리니까 이거 먹으면서 마셔. 물론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박문대 얘 요리 잘해서 이거 맛 안 보면 네가 손해일걸?”
식탁 위의 음식이 골고루 접시 위에 오른다. 장난스러운 말이 덧붙긴 했어도, 김래빈에겐 익숙한 형태의 다정이었다. 종종 그의 가족으로부터도 건네받곤 했던.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감사합니다, 하고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는 일생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다정을 물리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차유진이 말했던 대로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신기루에 들어가게 될 텐데,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해주고 있었어.”
“아, 그치그치. 조금 있으면 막내도 출동이구나. 새삼스럽네, 박문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누가 같이 간다고 하니까. 음… 그래도 이번에 신기루가 출몰한 곳이 아마 익숙할 곳이라 좀 편하지 않을까~?”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긴 이세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아직 듣지 못한 김래빈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하나, 둘 띄웠다. 그러나 그가 채 질문을 던지기도 전, 술자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난입했다. 다른 일로 외출했던 배세진과 류청우였다.
중문을 열고 들어온 배세진은 영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왠 술판이야.”
오셨어요! 술보다는 분위기에 취한 선아현이 평소보다 텐션 높은 인사를 건넸다.
“늦으셨네요.”
“그게 어쩌다 보니…. 오늘 무슨 일 있어?”
배세진이 중문 앞에서 오래 서 있자 무슨 일이지, 하고 뒤에서 고개를 쭉 뺀 류청우가 술상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막내들 술 가르쳐주고 있었죠. 이세진이 넉살 좋게 설명해도, 배세진의 얼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 술을…, 가르칠 게 없어서 어린애들한테 그런 걸 가르치냐?”
“세진 형. 김래빈 오늘 술 처음 먹어요. 김래빈 할머니가 술 어른한테 배우는 거래요!”
차유진은 김래빈의 첫 음주를 온 동네에 소문낼 기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선아현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듣고는 휙 끼어든다. 스물한 살이라며, 하고 그를 보며 의아해하던 배세진이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그렇긴 합니다만, 하고 말을 늘이는 김래빈을 향했다가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그대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다시 그를 향했다가, 이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온 얼굴로 결심한 표정을 내보였다. 배세진은 한 손에 가득 든 짐을 대충 주변에 내려놓더니 그대로 빈자리에 앉아 비장한 얼굴을 했다. 맨 처음의 불만 가득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네. 나도 하나 줘봐.”
배세진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서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조금 더 좁아졌다. 맥주 캔을 받아 든 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이왕 배워야 한다면 잘 배우고 가는 게 여러모로 낫지. 괜히 선배들이 가르쳐준답시고 먹이다가 응급실 실려 가는 것보단.”
“어, 그렇습니까? 술을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마시는 게, 그러니까, 보편적인 행태입니까?”
“당연히 그러면 안 되지!”
저도 모르게 정색해버린 배세진이 탕, 하고 소리 내어 탁상에 맥주캔을 내려놓자 선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자기 주량을 파악하는 게… 중요해. 그러면, 조절할 수 있게 되거든. 그래도 래빈이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잘 모르는 게 당연해. 음…. 혹시, 실수하더라도, 우리가 수습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 할머님께서는, 그래서, 연장자와 함께 마시는 걸, 권장하신 게, 아닐까…?”
청우 형은요. 뒤에서 박문대가 물으면 류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운전해야지. 그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의 손에는 그래서 술 대신 과일주스가 들렸다. 그걸 배경음 삼아 김래빈은 배세진의 음주 예절 강의를 들었다. 술은 낮은 도수부터 높은 도수 순으로 마시라느니, 중간중간 물을 많이 마시라느니 하는 충고가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형 오늘도 굿했어요?”
거기에 차유진이 끼어들었다.
“아니. 텄어.”
배세진이 혀를 끌끌 찼다. 김래빈은 그를 잠시 응시했다. 그의 누나는 배세진을 가리켜, 높은 신을 모시는 걸 보니 영력이 높을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텄다니?
“딸한테 귀신 들렸대서 갔더니 귀신이 아니라 마음에 울화가 제대로 끼었던데. 솔직히 그 지경까지 갔으면 한두 해 일도 아닐걸? 근데 그 꼴을 보고 그 가족들은 무당이나 부른 거잖아! 그게 말이 돼? 가족 상담이나 받으라고 말하려다 듣겠나 싶어서 그냥, …살이 꼈다고 해버렸어. …같이 살면 서로 죽이는 살이라고.”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세진이 나도 알아, 하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담할 순 없지만 몇 년 안에 똑같은 일 또 일어날걸. 그 탄식을 들으며 맥주 캔을 다 비운 김래빈의 손에 차유진이 새 잔을 들이밀었다. 이거 맛있어. 속삭이며 내민 잔에는 술에 뭐를 섞었는지 달디 단 냄새가 퐁퐁 풍겼다. 얼마나 마신 건지 차유진의 숨결에도 알콜이 제법 묻어나서 그는 답례하듯 물잔을 내밀었다. Thanks. 차유진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차유진이 내민 무언가를 머금어보았다. 맥주보다는 좀 더 화하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달달한 맛이 섞여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꽤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몇 년을 함께한 사람들 사이의 일화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술자리를 마칠 때쯤엔 김래빈도 보다 편하게 그들 사이에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아주 조금 알딸딸한 정도로만 술을 마신 채였다. 애초에 그들의 술자리에는 술보다는 안주가, 그보다는 이야기가 더 많기도 했다. 신기루는 마시는 내내 틈틈이 새어 나왔지만, 괜찮았다. 그는 여전히 신기루가 아주 크게는 튀어나오지 않도록 억누를 수 있었다.
김래빈과 차유진이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박문대는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는 미처 듣지 못한, 신기루에 대한 정보였다.
“너희 대학교 예술대쪽에 조만간 열릴 것 같으니까, 곧 연락할게.”
*
술기운으로 상기된 뺨에 조금씩 서늘해지는 9월의 밤공기는 도리어 반가웠다. 늦은 밤이었다. 빈 도로를 속도 내어 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굉음이 드문드문 거리를 채웠다. 인적 하나 없이 어두운 밤거리를 술에 젖은 20대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걸었다.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평소보다는 감정도 몸짓도 느슨했다. 제 상태를 스스로 체크해보던 김래빈은 이유 없이 비집고 나온 웃음을 모른 척 흘려냈다. 옆에서 차유진은 보는 사람이 시원해질 만큼 팔을 길게 뻗더니 주욱 기지개를 켰다. 탁, 타탁, 탁. 리듬을 타는 차유진의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얼결에 박자를 맞춰 허밍하면 이쪽으로 시선이 돌아왔다.
“거봐! 김래빈 즐거워해.”
내 말이 맞지? 하고 우쭐하는 얼굴에도 별다른 타박을 돌려줄 마음이 일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시인했다. 술김으로 한층 자유로워진 혀가 속엣말을 줄줄 뱉어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형들을 번거롭게 해드린 것 같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즐거워 보이셔서 한시름 놓았어. 그리고 술자리와 음주에 대한 실용적인 고견을 여럿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술을 형들에게 배우자던 네 제안은, 실로 탁월하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아. 물론 즉흥적인데다 타인의 동의를 사전에 얻지 않았다는 부분은 개선이 필요할 테지만….”
어디까지 이야기하나 보자,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길고 긴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차유진이 끝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다. 어려운 말 너무 많아! 그 뒤로 이어지는 영어는 김래빈이 알아듣기에는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차유진 역시 약간은 취한 탓이다.
“…뭐라는 거야?”
“Well. 너 재밌다는 말이야!”
“차유진, 너는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오. 나 그 말 이해 못 해. 그건 내가 모르는 말 쓰는 김래빈 잘못이야! 그냥 김래빈이 웃긴 걸 어떡해?”
아, 맞다. 그는 멈칫했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좀 넘은 것치고, 차유진은 때로 너무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아쳤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도 종종 차유진 앞에서는 단어를 골라 써야 한다는 걸 놓치곤 했는데, 지금은 술기운으로 편하게 입을 열면서 아예 주의를 잊어버리고 습관대로 말한 모양이었다.
‘쉬운 표현으로 다시 바꿔서 말해줘야 하나?’
그가 다시금 고민하고 있으면 다음 순간 어깨에 퍽 하고 충격이 가해졌다. 제 어깨로 그의 어깨를 그대로 들이받은 차유진이 휘청거리는 그를 붙잡아주며 키득였다.
“김래빈 또 생각.”
이어 손가락이 뺨을 꾹 찔렀다.
최근 차유진은 그의 뺨에 있는 점을 누르는 데 재미들인 모양으로, 그가 아무리 사람 얼굴의 점을 버튼 취급하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구구절절 말해도 듣지를 않았다. 말을 중간에 끊지도 않고 그 긴 말을 내내 듣고 있다가, 싫으면 김래빈이 손을 피하면 된다고 적반하장격으로 우기는 데에는 오히려 그의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 뒤로도 이어졌던 수많은 공방에서 먼저 항복 선언을 한 건 김래빈이었다. 그래. 맘대로 찔러라. 그렇게 포기하자 오히려 편했다. 물론 포기와 이해는 다른 영역으로, 김래빈은 여전히 차유진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뺨은 얌전히 차유진에게 내주면서도 꼭 말꼬리가 붙었다.
“대체 네가 왜 그걸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거 김래빈 생각 On-Off 스위치야. 김래빈 생각 많아서 고장 났을 때 이거 누르면 움직여!”
“…? 아니, 무슨…, 차유진! 지금 너 나를 기계나 로봇 취급했어?!”
OH-! R2B-2! 모 SF 영화에 나오는 로봇의 이름을 이상하게 비틀며 겅중겅중 도망가는 차유진의 뒤를 김래빈이 후닥닥 뒤쫓는다. 바짝 약 오른 김래빈의 목소리와 달리면서도 여유로운 차유진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핑퐁처럼 튀어 올랐다. 그 아닌 밤중의 달리기는 둘이 기숙사 건물에 들어오고 나서야 멈췄다. 아니다. 멈추지 않았다. 우스운 말이지만 둘은 기숙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가며 다퉜다. 살금살금 숨죽여 걷는 발소리 사이로, 서로 쉿, 쉿을 반복하면서도 투닥거리는 소곤거림이 한참을 이어졌다.
결국 다툼이 완전히 멎은 건 그들이 씻고 나와 침대에 각자 드러누웠을 때였다. 이제야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김래빈은 반 바퀴 몸을 굴려 차유진 쪽을 향했다.
고요한 기숙사 방 안으로 밤의 도시의 소음이 어렴풋이 흘러들어왔다. 어둠에 파묻힌 채로 김래빈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전에 살던 그의 자취방에서는 이것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바깥소리들이 들려오곤 했다. 차의 엔진 소리, 술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어디서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 골목의 고양이가 우는 소리. 그러면 그는 혼자 가만히 누워 그 소음들 사이에 생각을 흘려보내다가 잠들곤 했다. 지금 여기는 그때보다 훨씬 소리가 적고, 또 그 소리 사이에 섞인, 같은 공간을 울리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있었다.
차유진. 술로 느슨해진 정신이 저 너머에 누워있을 상대를 불렀다. 부르면 아마 예아, 하는 차유진 특유의 대답이 돌아올 터다. 그 대답이 돌아오면…
“Yeap.”
대답이 돌아온다면. 제게 대답을 돌려주는 누군가가 저 너머에 있다면.
김래빈은 이제까지 입 밖으로 꺼내어 내본 적 없던, 진솔한 속내 한 가닥을 끄집어냈다.
“나는 살면서 신기루를 볼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그러니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해본 적도 없고.”
같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를 생각해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서로 공유하는 세계가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궁금해한 것도 그 무렵에서부터였다. 그의 요청으로 박문대가 그의 누나를 만나러 강원도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때의 광경을 떠올렸다.
박문대는 그날 차유진과 함께 오지 않았다. 대신 지금 그 근처에 머무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방문해도 되냐고 김래빈에게 정중한 문자를 보내왔다. 먼저 강원도에 내려가 있던 그는 누나에게 그 말을 전했고 그의 누나는 고심 끝에 약속 장소를 그의 집에서 그나마 번화가인 역 근처 시내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바꾸었다. 피차간 초면인 사이니,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쪽이 더 안전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때야 이름도 몰랐지만, 박문대와 함께 온 건 배세진과 류청우였다. 류청우는 한사코 카페 바깥에 남기를 고집해 카페 안에는 김래빈, 그의 누나, 배세진, 박문대가 들어갔다. 사람이 북적이는 늦은 오후의 카페 한구석에서 그들은 조금 어색하게 음료를 주문했다. 그게 그나마 그가 편하게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던 마지막 때였다. 음료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은 순간, 배세진이 숨돌릴 틈도 없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너, 보이는 사람이지?’
당황한 김래빈이 예? 하고 물었지만, 배세진의 표적은 그가 아니었다. 시선이 그의 누나를 향해있었다. 누나 역시 심각한 얼굴로 배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긋한 응시가 둘 사이를 오간다. 배세진은 이어 말했다.
‘보자. 눈이 보여도 귀도 입도 트이지 않았으니 신내림은 못 받았겠고, 신내림은 못 받았어도 귀신에 눌린 기색 하나 없으니 본디 기는 좀 센 편인가 본데. 그래도 어지간하면 뭐 하나 달고 있을 법도 한데 주변이 맑아. 평소 이런저런 치성은 빼놓지 않고 드린 모양이지? 부엌에 물그릇 하나만 잘 둬도 자잘한 액은 물릴 수 있으니까…. 잘했네.’
그의 누나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은 그도 어렴풋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 어리둥절한 채 김래빈은 누나, 배세진, 박문대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일종의 기선제압인가 싶었는데, 박문대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그가 그의 이마를 짚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하는 상황에서, 묘하게 웃은 배세진이 의자에 깊이 등을 파묻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반말하니까 놀랐어? 그래도 참아. 지금은 일종의 대변인 역할이라서 아무리 초면이라도 인세의 관습에 절절맬 수는 없지.’
그의 누나는 그 말에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김래빈의 손을 순간 꾹 쥐었던 힘이 가만히 풀린다. 한층 단단해진 표정으로, 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저한테도 어렴풋하게는, 당신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가 보이니까.’
그 뒤로 대화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영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박문대가 끼어들면서는 더욱 그랬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것처럼 말소리는 작았지만, 말이 오가는 속도는 빨랐다. 김래빈 혼자만이 그 흐름에 끼어들기 어려웠다. 그는 반쯤 남의 일을 대하는 것처럼 셋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
‘제가 겪은 일이 있으니까, 보이는 게 있어도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가르쳤어요. 우리가 사는 곳은 시골이고, 소문이 빨리 도니까.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데도 네가 보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이 네가 판단했을 때 사리에 어긋나지도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면 그땐 제게 연락하라고 했어요. 내가 같이 만나보겠다고.’
사기꾼이어도 걱정이지만 사기꾼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더 걱정이었노라고. 무언가를 보는 게 항상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너무 뼈저리게 알고 있어서였다고. 그의 누나는 이제까지 감춰왔던 속내를 그들 앞에서 털어놓았다. 박문대와 배세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 그는 보았다. 예. 압니다. 박문대가 소리 내어 재차 동의했다.
‘걱정하시는 바를 이해합니다. 저 역시 같은 현상을 겪는 사람으로서, 이 현상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김래빈 군을 찾아왔습니다만, 결코 해 되거나 위험한 상황을 만들려는 건 아닙니다.’
그건 둘 사이에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박문대와 그의 누나 사이에서 몇 가지 문답이 오갔다. 대체로는 그나 신기루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언제부터 다른 걸 보았다고 하던가요?’
‘여덟 살 때부터로 기억하곤 있는데 확실하진 않아요. 래빈아. 맞아?’
‘응?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어릴 때라 그런지 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몇 살 때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흐린 기억이 있었다. 그가 누나에게 저기 이상한 게 있다고 말했을 때였다. 누나는 처음엔 나도 알아,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가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고는 얼굴이 굳었다. 뭐야, 너? 왜 저기야?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당혹스러웠던 감정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는 사이 배세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용케 애가 정신이 나가서 환각을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보네. 그리고 제게 쏠린 시선에 오히려 당황한 것처럼 섬세하게 생긴 눈썹을 슥 치켜올렸다.
‘왜? 나 땐 그랬어. 엄만 울고 아비라는 작자는 저런 놈은 정신병원에 쳐넣어야 한다고 하는데….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박문대 넌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잖아!’
침묵이 흘렀다. 김래빈은 누나가 제 손을 다시 찾아 쥐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때로 그의 누나는 그가 본 걸 말할 때마다 크게 화를 내며 무조건 모른 척하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걸 보면 안 된다고 엄하게 다그쳤다. 김래빈은 누나의 화가 무서워서 이유를 물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말을 따랐다. 예전에는 알 수 없었던 이유를 지금은 그도 알았다.
‘…한두 번은, 솔직히, 네. 그런 쪽을 염려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면서, 제가 보지 못하는 게 보인다고 말한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그건 치료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손을 통해 말 없는 온기가 전해진다.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도,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할머니와 더불어 제 인생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사람이 언젠가 했을, 그에게 티도 내지 못했던 고뇌를 뒤늦게 알게 된 김래빈은 그 손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 덕분에 자신은 괜찮았노라고. 때늦은 감사와 위로를 담아.
둘 사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박문대가 실례지만, 하고 말을 던지며 그 분위기를 끊었다.
‘여기서부터는 보다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라, 가급적 누나분과만 대화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으실까요.’
괜찮은 것 같으니까 나가 있어. 누나는 안심시키듯 말하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 마시지 못한 음료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그는 카페 밖으로 나갔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를 맞이하듯 들이닥쳤다. 카페 밖에는 여전히 류청우가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쳐서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만한 목례가 돌아왔다. 그는 아까는 없었던 웬 지팡이 같은 걸 양손으로 단단히 짚고 있었다. 어딘가 불편하신 걸까. 의아해하다 그는 조심스레 앉기를 권유해보았다.
‘여기는 덥고 불편하니, 혹시 다리가 아프신 거라면 안으로 들어가셔서 앉아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상대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지만, 짚고 있는 지팡이를 치우지는 않았다. 안에서 배세진과 박문대, 그리고 그의 누나가 대화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계속.
김래빈은 여전히 그 때의 류청우가 왜 그러고 있었는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카페에서 나온 사람들, 정확히는 배세진과 그의 누나가 보인 반응과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로 그 일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혹시 너를 쫓아온 걸까봐 붙잡고만 있었는데.’
‘아냐. 저주도 아니고. …이 근방 어딘가에서 꼬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잡귀?’
‘그러면 그냥 처리해야겠네.’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던 청우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가 힘주어 내리찍었을 때 누나가 짓던 그 표정. 이어 소리 없이 입을 손으로 막는 광경을 보고야 김래빈은 깨달았다. 저기에서, 그 잠깐 사이에, 그들만이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어떤 일이 일어났었던 거라고.
자신은 간접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저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노라고.
“그럼 김래빈 보이는 사람 만나서 좋아?”
두서없이 쏟아진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차유진에게서 그 물음이 돌아왔을 때,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들이 부러웠었나? 처음엔 반가운지 아닌지를 논하기 전에 너무 놀랐고,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신기루를 아는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그의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 모두와 제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명확한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게 더 많았고, 때때로 이유 없이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좋았다. 그렇지만 좋다는 한마디로 봉합할 수 없는 많은 모호함이 존재했다. 그의 말에 차유진은 웃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툭, 하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사실, 나 김래빈 신기루 안 보여.”
의외의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뜨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으로, 김래빈은 차유진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했다.
“보이진 않고, 나 느껴. 김래빈 신기루 특이한 느낌 있어. 지금도 조금 나왔어. 맞아?”
아. 그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인지하지 못했던 신기루의 기운이 어느새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방심하고 있던 사이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놀라서 다시 신기루를 내리누르려 했다. 그러나 차유진의 말이 더 빨랐다.
“김래빈 신기루, 파도 같아.”
그 말이 김래빈을 멈춰 세웠다.
처음부터 그랬어. 쏟아지는 줄 알았어. 완전히 똑같지 않아. 그런데 조금 비슷해. 샌디에이고 바닷가, 큰 파도치면 그런 느낌이야. 그럴 때 서핑하면 좋아. 내 가족은 다 파도 잘 봐. 그래서 나는 김래빈 신기루 좋아. 물론 무서운 기운 있어. 위험한 기운도 있어. 근데 파도도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차유진의 말이 어둠을 더듬더듬 건너와 그를 건드려댔다. 그는 반쯤 일으켰던 몸에서 차츰 힘을 빼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댄 채 차유진의 말을 들었다. 차유진은 일찍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주었지만, 고향에 대해서 자주 말하지는 않았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듣는 내용도 많았다. 말과 함께 뒤섞여 전해지는 그 감정을 더듬어보다가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유진, 혹시 고향이 그리워?”
Not much. 가볍고 단호한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말은 그러나, 영 반대의 내용이다.
“…아주 가끔.”
김래빈 역시 종종 서울에서 강원도를 생각했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세상에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그 적막함을 알았다. 그는 차유진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 고삐를 풀었다. 신기루의 일렁임이 차유진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그로써 위안이 되기를 바랐다. 아주 완전히는 아니었다. 다 내리누르지 않아 신기루의 아주 일부분이 풀려나올 정도까지였다.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기숙사의 단조로운 천장에 녹슨 풍경이 넘실거렸다. 그러다가 차유진의 침대가 있을 저편까지 건너가면, 김래빈의 세계는 그를 침범하지 못하고 천천히 바스라져 사라졌다. 잎사귀가 피어났다가 지고, 곰팡이가 번지듯이 뒤덮고, 무엇인지 모를 것이 어둠보다 더 까만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그 울렁거림을 보며 김래빈은 차유진이 한때 누볐을 파도를 상상했다. 상상 속 파도 소리와 현실의 정적 사이에서 천천히 잠이 몰려왔다.
차유진. 그는 다시 상대를 불렀다. 응. 어김없이 대답이 들려왔다.
잘 자, 하고 인사를 건네면, 저 너머에서 다시금.
“…Sweet dream.”
약속한 듯 인사가 돌아왔다.
*
△△ 대학교 예술대 건물은 재학생들에게 종종 반우스갯소리로 던전이라고 불렸다. 그 구조가 지극히 복잡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두 개 동으로 시작했던 예술대의 규모는, 시간이 흘러 과도 재학생도 늘어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필요한 공간이 늘었으니 제대로 리모델링을 하면 좋을 것을. 학교에서는 낡은 건물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대공사를 감행하기보단 기존 건물을 증축하거나 새 건물을 추가하는 식으로 공간만 야금야금 늘려놓았다. 예술대는 아무래도 법대나 정경대보다는 ‘잘나가는 동창’이 드물다 보니 기부금이 들어오지 않아 학교에서도 투자를 덜 해서 그렇다는 게 선배들 사이에서 흔히 도는 음모론이었다. 워낙 경사진 곳에 지어지다 보니 건물 자체 단차도 큰데, 작업실이며 연주 공간, 학생 라운지를 그때그때 건축 유행대로 끼워 넣어서 각 층의 천장 높이도 통일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예술대는 연결 통로를 따라 돌다 보면 계단 한번 안 올라도 3층에서 시작해 5층에 가 있기도 하고, 바깥과의 출입구가 2.5층에 만들어져 있기도 한 요상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3월에 길 잃고 헤매는 신입생들에겐 그 어떤 재학생이라도 인간적으로 친절해지는 곳이라고 할까.
“그럼 재학생들은?”
“보통 몸에 의식을 맡긴다고 합니다. 생각을 비우고 걷다 보면 몸에 익은 루트를 따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달까요. 물론 어디와 어디가 연결되었는지를 항상 의식하고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가며 걷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Wow……. 그런 사람 있긴 해?”
김래빈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의 말 대로였다. 학기 중의 음대생이나 미대생들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럴 정신력이 있다면 과제에 쏟을 거다, 는 것이 비교적 성실하며 과의 아웃사이더에 가까워 소문에 무지한 그조차 동의하는 통설이었다.
그들은 지금 예술대 나동과 다동을 잇는 4층 통로 위에 서 있었다. 확실히 박문대의 분석대로라면 신기루의 통로가 열리기 좋은 곳이었다. 그는 조금 허망해진 채 복도를 바라보았다. 하루에 적어도 두세 번은 오갔던 곳인데도 신기루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박문대가 위로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야 평소엔 네 기운 감추기도 급급했겠지.
모 대학 커뮤니티에도 예술대에 대한 소문이 꽤 올라왔던 모양이다. 야작을 하고 밤늦게 돌아가려는데 불 꺼진 복도 유리문 너머로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거나, 분명 평소대로 움직였는데 평소랑 다르다 못해 아주 이상한 곳으로 나왔다던가. 그런 커뮤니티에 별반 관심이 없는 차유진이나 그런 걸 알아도 말 그대로 강의평이나 정보 검색용 정도로만 써왔던 김래빈은 물론 몰랐다.
“교직원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져있어서 학교로부터 협조를 얻기는 좀 편했어.”
“야아. 문대 말 믿지 마. 그거 쟤 기준에서나 편했던 거니까. 솔직히 소문 수집하는 것보다 협조 얻는 게 더 오래 걸린다니까? 필요한 서류가 왜 그렇게 많은지~.”
복도에 ‘공사 중 출입 금지’ 입간판을 세우며 이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위아래로 복도를 가로질러 접근금지 테이프를 붙이던 류청우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지. 그 말에 정작 놀란 건 김래빈이었다.
“문대 형께서는 이런 현상을 도맡아 처리하시는 공무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아닙니까?”
명함을 받았을 때 적혀있는 공무원의 직함에 으레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 의문에 박문대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니. 이건 개인적인 일이야. 대충 일과 후에 하는 부업? 물론 수입이 없으니까 부업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참고로 그쪽 부서로 들어갈 생각 추호도 없다. 무언가 맺힌 게 있는 것처럼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쩐지 형들 불금? 하고 주말만 출동했어요!”
청우를 도와 테이프를 주섬주섬 정돈하던 차유진이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입을 벌린다. 그 말에 류청우와 이세진, 박문대가 동시에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어른들의 비애가 담긴 웃음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이세진이 바닥에 부적과 문자가 새겨진 납작한 나무패들을 죽 늘어놓았다. 이것 또한 하나의 안전장치였다. 학교의 협조를 얻어 출입 통제 공문을 붙이고, 인파가 적은 늦은 시간을 고르고,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입간판과 출입금지 테이프까지 붙여놓고도 한 겹 더 주술적인 처리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존재와 신기루로의 통로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진을 통해서.
일정한 간격과 모양을 그리며, 부적과 나무패가 복잡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저기에도 어떤 규칙이 있는 거겠지. 방해되지 않도록 주변에서 목을 죽 빼 기웃거리면서 그는 전체적인 흐름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김래빈의 그런 행동은 이세진의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왜. 이쪽에 대해서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그건 아닙니다. 그냥 신기하다 보니, 앗, 혹시 제가 들여다보는 게 방해가 된다면 제가 빠지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문외한의 눈으로 보면 이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
“아. 그렇군요! 저야 잘 모르지만 반복되는 구간이 있다는 것만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패와 저 부적이 연결되는 것 같긴 한데….”
그가 손을 뻗어 진 사이의 부적과 나무패를 가리켜 연결하면, 이세진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오, 그래도 제법 눈썰미가 좋은데? 혹시 이쪽에 관심 생기면 연락해. 나도 제자를 키우긴 해야 하거든.”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세진은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도사였다. 한때는 진과 부적을 다루는 도술 쪽으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지금은 전승이 끊겨서 이세진 밖에는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본인의 자질과 남아있는 자료의 독학만으로 전승이 끊긴 도술을 살려냈으니, 어지간한 수준을 넘은 재능이 있는 건 확실하다고 박문대가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 재능이 고작 받쳐주는 가문이 쇠퇴했다는 이유로 협회에서 무시당하는 게 안타까운 일이라고도.
“뭐. 막내를 위해서 이 형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자면, 이 진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 두 개의 진이 복합적으로 얽힌 방식이야. 하나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걸 막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혼의 좌표를 일정한 시공간에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거랄까.”
이거 만들어내느라 고생 좀 했지. 아련하게 턱을 쓰다듬던 이세진이 히죽 웃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 안에 나오지 않으면, 혼이 영영 이 진을 맴돌다 한 장의 부적 안에 갇히게 되어 있어. 봉인 진을 응용해서 만든 거니까. 그럼 이제 우리는 지푸라기 인형 안에 그 부적을 넣고는 흑흑, 이게 래빈이구나 하면서….”
박문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끼어든 건 이세진의 설명을 대단히 몰입해서 듣고 있던 김래빈이 저도 모르게 지푸라기 인형으로 남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오싹해 할 무렵이었다.
“이세진. 김래빈 그만 놀려.”
“예? 그럼 그게 사실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집중하던 김래빈이 순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면, 이세진이 호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제 웃음이 조용한 복도를 다 울리자 손을 내저으며 애써 웃음을 삼켜낸 이세진이 뒤늦게 사과한다. 미안, 미안. 아니, 너무 집중하길래 그만. 김래빈의 눈에 그제야 조용히 웃고 있는 청우와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은 차유진이 들어왔다. 속은 건 그 혼자뿐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적에 갇히는 거랑 지푸라기 인형 부분 빼고는 진짜야. 부적에 가두는 게 아니라, 신기루 입구를 강제로 닫아버리는 거지만…. 그러니까 그 안에서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된다?”
그래도 앞으로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텐데, 이런 거라도 있어야 나도 힘을 내지. 끝까지 한 마디를 덧붙이며, 이세진은 망연해진 얼굴로 서 있는 그의 손에 부적 몇 개를 넘겨주었다. 박문대에게 준 부적과 같은 모양새였다.
“자~. 문대. 이쪽은 끝났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박문대가 김래빈에게 모자를 내밀며 류청우를 바라보았다.
“귀신도 사람도 지나가지 못하게 잘 지켜볼게.”
손목의 염주 알을 만지작거린 청우가 침착한 얼굴로 단언했다. 차유진은 용케도 복잡하게 얽힌 진의 선을 다 피해 진 안쪽 복도에 주저앉아 손을 흔들었다.
“너는 안 가?”
“나 저 안 못 들어가.”
그가 모자를 눌러쓰며 고개를 갸웃하면 차유진은 해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의외의 말이었다. 당연히 차유진도 들어갈 줄 알았는데. 박문대에게 이끌려 신기루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알 수 없는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차유진은 복도에 주저앉은 채 잘 다녀와, 하고 손을 흔들었다.
*
밀도가 다른 공기가 그를 덮쳤다. 무겁다. 김래빈이 신기루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처음 떠올린 감상이었다. 모든 게 바깥보다 훨씬 두터운 느낌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양감을 가진 공기가 제 폐를 드나드는 것 같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기루의 내부는 여전히 대학교 복도의 풍경이었지만 눈을 깜박일 때마다 허상의 이미지가 겹쳐 보였다. 타일로 깔끔하게 마감된 바닥 위에 돌바닥의 풍경이 어른거리고, 페인트가 꼼꼼히 발린 벽은 짧은 순간 나무로 된 가벽으로 변했다 돌아왔다. 짧았던 복도가 무한히 늘어난 것처럼 길어지고, 좌우로 덕지덕지 강의실이 붙었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사람 인영이 그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발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세계.
저 멀리서 박문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묵중한 울림이 몸을 진동시키다 흩어져 사라졌다.
“계속 대학교 모습이라…. 우리 말고도 누가 이미 여기 들어와 있기는 한가 본데.”
“그렇습니까? 만약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평소에 보이던 신기루의 모습으로 바로 변해. 사람을 내보내도 마찬가지고. 이번에는 너랑 나 둘이 들어와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며 박문대가 설명했다. 그도 주섬주섬 마스크를 착용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을 이 안에서 만나거나 이 안에서 만났던 사람이 바깥에서 그들을 알아볼 경우를 대비한 물건이었다. 물론 다른 목적도 있었다. 환상과의 구분이었다. 신기루에 빠진 사람은 이 환상을 현실처럼 인식한다. 그렇더라도, 그 속에서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2인조의 수상한 남성들은 금방 위화감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도드라질 것이 분명했다.
반투명한 현수막이 허공에 너울거렸다. 머리에 띠를 맨 그림자들이 우르르 뭉쳐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그 그림자들은 박문대와 김래빈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다. 그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그들은 강의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줄었다가 늘어나기를 반복하는 그 공간 속에서, 그림자들은 평범한 대학생처럼 강의를 듣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누군진 몰라도 어디 있으려나.”
시간을 확인한 박문대가 여전히 길게 뻗은 대학교 복도 너머를 응시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 박문대는 손목에 아날로그 형식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크게 공명했다. 그는 제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액정 위의 디지털 숫자가 마치 공간의 풍경처럼 1초에도 몇 번씩 제멋대로의 숫자로 바뀌었다. 이걸로는 시간 확인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손목시계를 따로 차신 거군. 김래빈은 납득했다.
“만약에 못 찾으면 어떻게 됩니까?”
“공간은 그대로 봉인해 두고, 내일 다시 와야지.”
그런 적도 여러 번 있었던 것처럼 허허로운 말투였다. 내일 다시, 하고 박문대의 말을 따라 읊으며 박문대와 함께 반투명한 창문 너머로 강의실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김래빈은 저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시간이 늦었는데 차유진은 지금쯤 졸고 있을까. 그러자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러고 보니 차유진은 여기로 들어올 수 없는 겁니까? 신기루를 느낄 수 있다고 해서, 저는 차유진도 같이 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걘 여러모로 흔치 않은 경우지.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신기루에 빠져 본 적도 없고, 너나 나처럼 신기루가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신기루를 느낄 수 있긴 한데 정작 신기루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주변에 신기루를 겪어본 사람도 따로 없었던 것 같고. 걸음마다 중얼거리던 박문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이유, 너도 모르겠냐?”
“예.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이전에는 신기루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요새 들어서야 계속 의문이 듭니다. 신기루라는 게 뭔지,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왜 어떤 사람은 연결되고 어떤 사람은 연결되지 않는지.”
“아까부터 질문이 많은 걸 보니 이제는 신기루가 궁금해진 모양인데.”
“헉, 혹시 답변해주기 번거로우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막상 들어와 보니 궁금한 게 많아져서….”
귀찮을 정도는 아니고. 박문대의 선선한 부정에 안도하던 김래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멈칫했다. 그가 무심코 스쳐본 강의실 속, 다른 이들과는 달리 채도가 선명한 사람이 있었다. 형. 그가 박문대를 불렀다.
“혹시 저게 사람인지 확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 맞는 것 같다. 어디 있나 했더니 저기 있었네.”
눈을 가늘게 뜨고 인영을 바라보던 박문대가 김래빈의 어깨를 꾹 눌렀다.
“너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기만 해.”
그리고 박문대는 성큼성큼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박문대는 강의실 안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왁자지껄한 강의실 안에서, 유일하게 현실 세계의 사람인 둘이 나누는 대화는 여과 없이 그에게 들려왔다. 여긴 현실이 아니라고. 꿈속 세계지만, 여기가 너무 좋아서 오래 있으면 현실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당황한 것처럼 보이던 학생은 박문대의 차근한 설명에 느리게 몸을 일으키며 그가 건네주는 부적을 받았다. 박문대가 손을 튕겼다. 부적에 불이 붙었다. 불붙은 부적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학생은 박문대의 가, 한 마디에 마치 그게 신호탄이 된 것처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스쳐 지나가, 복도 저 멀리로.
김래빈은 서서히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박문대가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제 저 사람은 꿈에서 깨어나겠지. 홀가분한 말투였다.
“만약에 끝까지 나가려 하지 않으면요?”
“그런 경우도 꽤 많아. 최대한 설득해 봐도 나는 초면의 사람일 뿐이니까 항상 잘 될 리 없지. 그래도 부적은 줘. 원하는 때에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그렇군요. 설득에는 자신이 없긴 하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잠깐 대화를 하는 사이 그 대학생은 무사히 이 공간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천천히 배경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새로운 환상들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박문대를 감싸고 꽃잎이 흩날렸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하늘이 열렸다. 파란 하늘로부터 맑고 따스한 빛이 쏟아졌다. 거대한 나무들, 그 가지마다 피어난 흰 꽃들, 계곡의 물소리, 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 그는 처음 본 박문대의 신기루를 찬찬히 눈에 새겨 넣었다.
‘저런 광경이라 몽유도원도나 일장춘몽 같은 고사를 근거로 드셨던 거구나.’
그의 신기루와는 전혀 달랐다. 김래빈의 주변 역시 변해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어둠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어두침침한 그늘, 늘어뜨려진 넝쿨, 깨지고 녹슬고 찢어진 잡동사니들, 그 사이를 오가는 깜박거리는 초록색 불빛, 기울어진 천장, 번지고 침식하는 곰팡이들. 제 주변을 둘러싸는 익숙한 기운에 김래빈은 반사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러면 천장으로부터는 무언가 툭툭 굴러떨어지기 시작하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끼익, 하고 들려왔다.
“이래서, 처음에는 내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군.”
박문대는 김래빈의 신기루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그 역시 그의 신기루를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일 터였다. 박문대의 신기루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박문대가 걸음을 옮겼다. 하늘거리는 꽃잎이 그의 걸음마다 따라붙었다. 그가 김래빈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그늘이 사라지고 꽃이 피어났다.
둘이 섞이진 않네. 박문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신기루를 처음 본 지도 한 7년쯤 되었는데 아직도 한 번도 이걸 제어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네가 신기루를 누르는 걸 봤을 땐 솔직히 많이 놀랐고.”
꿈 같은 세계를 등 뒤에 인 채로 박문대는 안경 렌즈 너머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는 어떻게 이걸 누를 수 있게 된 거지?”
누른다기보단. 김래빈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 등 뒤의 세계를 돌아보았다. 최소 13년, 어쩌면 그 이상. 제 곁에 항상 존재했던 허상이 거기에 있었다. 누나는 아예 들여다보는 것조차 하지 말라고 했었지. 어린 김래빈은 대체로 누나의 말을 잘 들었다. 그래도 바로 옆에 있는 걸 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김래빈은 신기루를 혼자서 오래 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규칙입니다.”
막연히 규칙이라고 말하기엔 그가 사는 세계와 너무 달라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김래빈은 그 배열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의 할머니가 언젠가 보여준 편물처럼, 그 배열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얽힘이 신기루에도 분명히 존재했다.
“저도 명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복잡한 규칙의 극히 일부분만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니까요.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구조를 느끼게 되면 그 꼬리를 잡아서, 연결점을 분해한다는 느낌으로…….”
손을 휘적거리며 허공에 대략적인 과정을 그리던 그는 박문대와 다시금 눈을 마주치고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는 박문대의 눈빛을 읽을 수 없었다. 그건 그가 잘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이걸 길게 설명할 때가 아니라는 직감이 언뜻 들었다. 박문대는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내가 저번에 말하지 못한 게 있었지. 말꼬리가 길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한 목적으로만 이 일을 하는 게 아냐.”
7년 전 저곳에서 실종된 사람이 있어. 박문대는 손을 올려 등 뒤의 신기루를 가리켰다.
“그 사람을 찾으려 안 해본 게 없어. 그러다가 이해하든, 분해하든, 없애버리든,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이걸’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솔직히 네 도움이 필요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처럼 거침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오는 건 약간의 망설임을 담은, 본연의 다정함이다.
“그래. 그래도 강요는 할 수 없지. 그러니까, 김래빈. 네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면,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나를 좀 도와줘.”
7년 동안 단 한 가지를 찾아 헤맸던 남자는 지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가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꽃잎이 떨어졌다. 얼굴에서 안경을 끌어 내린 손이 그 다리를 곱게 접어 쥐었다. 애초에 도수 없는 안경이었다. 렌즈를 투과하지 않은, 정직한 시선이 김래빈을 향했다.
난 이걸 알아야겠어. 박문대는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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