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을 사르며 돌이켜 널

데못죽 유진래빈 AU

 *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사건, 현상, 장소는 현실과 관련이 없습니다. 각종 설정 역시 깊은 조사와 명확한 고증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읽는 데 주의를 요합니다. 

* * 序 - 幻 - 煥 - 還 - 널 - 喚 순입니다. 


낡은 아파트 복도에 어느 순간 작은 흥얼거림이 스며들었다. 걸음걸음 점점 더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뒤이어 해 드리운 복도 바닥에 불쑥 그림자가 지고, 노래에 가려 들리지 않던 발소리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시 또 한 걸음. 그 모든 소리와 그림자를 앞세웠던 주인공이 드디어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염색한 머리에 생동감 어린 표정을 한, 아직은 얼굴에 앳된 기가 남아있는 청년이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스스로 흥얼거리는 노래의 리듬에 발을 맞춰 경쾌하지만 때로 불규칙한 스텝을 밟던 그는 아파트 복도의 가장 마지막 문에 다다르고 나서야 발을 멈추었다.

411호.

눈높이에 ‘포교 사절’이라는 쪽지가 붙어있는 그 문은 이 아파트만큼 세월을 먹었다. 호수를 표시한 숫자들도 시간의 풍파를 그대로 맞아 금박이 다 벗겨진 채로 간당간당하게 달려있는데, 손잡이 위의 키패드만은 바꾼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새것이었다. 그는 키패드 위로 손을 올렸다. 키패드 숫자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그 숫자를 건드리기도 전에, 문이 먼저 잠금쇠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청년은 그 문에 코를 박기 직전에 가까스로 양손을 든 채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Ooch~! 나 부딪힐 뻔했어요. 세진 형 나 마중 나와요?”

그는 문을 열고 나온 사람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직후, ‘세진 형’이라고 불렀던 사람의 차림새를 보고는 급격히 김샌 얼굴을 했다.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목에는 귀여운 목베개를 건 것이 아무리 보아도 어딜 나가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놀랐잖아! 차유진.”

문을 열자마자 보인 얼굴에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부릅뜨고 문과 청년을 번갈아 보던 배세진은, 제가 벌컥 연 문에 상대가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야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냐. 오랜만에 의뢰받고 나가는 길이야. 그, 큰 판 벌일 일이 생겨서…!”

청년, 그러니까 차유진은 판을 벌인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곤 해도 그가 한국에 온 지는 아직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눈치껏 상대에게 중요한 일이 생겼음을 알아채고는 캐리어를 빼내기 편하게 문을 잡아주었다.

“세진 형 잘 가요! 올 때 맛있는 거 사 와요!”

힘차고 붙임성 있는 인사와 함께 덧붙여진 말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담겨있다. 눈웃음은 덤이다.

“아니, 놀러 가는 게 아니래도….”

떨떠름한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차유진은 배세진이 나중에라도 못 이긴 척 그 지역 특산물이라며 그에게 간식거리를 건네줄 걸 알았다. 그는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 뒷모습에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배세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정작 그 인사를 본 건 문 너머에서 이어 등장한 두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양손에 캐리어 두 개를 동시에 든 채로 문과 차유진 사이로 몸을 빼내다가, 눈이 마주치자 작게 눈인사를 건넸다.

“유진이 왔니? 고마워. 문 잡아줘서.”

배세진이 끌고 가던 것보다 더 크기가 큰 캐리어 두 개가 복도에 묵직한 소음을 울리며 튀어나왔다.

“청우 형도 짐 많아요. 안 힘들어요?”

“이번에 내려가는 곳은 거리가 있는 지방이라 며칠 걸릴 거거든. 그리고 이번에 세진이가 갈아입어야 하는 무복이 좀 많아.”

“Oh. 형 고생해요.”

하하, 변죽 좋게 웃으며 문밖으로 두 개의 캐리어를 완전히 끌어낸 류청우가 허리를 쭉 폈다. 류청우는 배세진을 돕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차유진은 그렇게 이해했다. 때로는 북을 치고, 때로는 귀신을 잡았다. 그는 등 뒤에도 큰 짐처럼 보이는 가방을 하나 메고 있었다. 차유진은 이제 저기에 한국식 북이 들어있음을 안다. 저번에 그가 궁금해했을 때 청우가 직접 꺼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소가죽을 씌운 북은 표면이 매끄럽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서 청우가 팔을 크게 휘두르면 묵직하고 단단한 소리를 냈다. 아파트 벽의 방음이 썩 좋지 않다며 그는 그 뒤로 더는 아파트 안에서 북을 꺼내지 않았지만, 차유진은 그 북 가방을 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렸다.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 유진아.”

다정한 인사가 떨어지고, 두 개의 캐리어가 나란히 복도를 지나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흘끔 보던 차유진은 그제야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도 안쪽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몇 가지 나무 조각이 올라가 있는 신발장과 부적이 붙은 중문이 거실을 한 번 더 가리듯 닫혀있는 탓이다. 차유진은 그 앞에서 잠시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경쾌하게 중문을 열어젖혔다.

“Hey! 나 왔어요!”

그는 시끌벅적한 마중을 기대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번에도 실패였다. 거실은 조용했고, 집중해서 책을 읽던 선아현만이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두 박자는 늦게 그 부름에 반응해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응. 유진이구나. 오늘 강연은 잘 듣고 왔어?”

“Well. 오늘 강연 주제 흥미로운 거 많았어요! 하고 싶은 질문 많아서 조금 늦었어요.”

뭐 좋다. 그는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던 말이 있었고 아현은 항상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상담 상대였다. 소파에 제 가방을 내려놓고 아현에게 끄덕이며 차유진은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언어는 쓰면 쓸수록 익숙해지는 게 사실이라 가급적 한국어를 쓰려고 노력은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급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복잡하면 영어가 편했다. 더욱이 선아현은 그가 영어를 써도 물 흐르듯 소통이 가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시간을 활용해 질문을 던지는 게 당연해요. 아니면 나중에 스스로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방법도 좋죠. 내 말은, 교수가 배워야 할 걸 떠먹여 주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여기 학생들은 왜 토의 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어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여기, 이곳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에요. 내 고향에도 그런 사람 많았어요. 그렇지만 대학이잖아요?]”

쏟아내듯 제 속을 털어놓으며 차유진은 부엌으로 향했다. 이곳의 식탁에는 항상 과일, 견과류, 아니면 과자 같은 간식들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 모이는 사람 중 그나마 간식을 자주 찾는 건 차유진밖에 없었다. 그러니 준비된 간식이 어떤 의미인지는 자명했다. 그를 위해 늘 신경 써 간식을 준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역시 그를 위한 포도 한 송이가 잘 씻어진 채로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형들의 이런 면모를 좋아했다. 드러나지 않는 작은 배려들이 집 여기저기에 배어있는 모습은 일견 고향의 할머니 집을 떠올리게 했는데, 차유진은 그런 점이 그가 이곳을 편하게 여기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포도 접시를 든 채 돌아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감정이 많이 누그러져 표정이 한층 편해진 채였다. 조곤조곤하게 공간을 울리는 선아현의 말이 여기에 더해졌다. 그가 부엌에 다녀온 잠깐 사이 생각을 정리한 것처럼 정돈된 답변이었다.

“[네 말이 틀리지 않아, 유진아. 그런데 여기는 다수의 직장이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는 나라야. 많은 학생이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로 대학에 가기를 선택하지. 슬픈 일이지만, 그래서 아마 네 생각보다 더 많은 학생이 공부에 열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거야. 대학 등록금을 망설임 없이 낼 수 있는 사람도 드물고. 물론 그들이 잘했다는 뜻은 아니야. 그렇지만 삶에 지친 그들에겐 좀 더 융통성이 필요하겠지.]”

Ye-ah. 포도를 입에 넣으며 차유진이 다시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주워섬겼다.

“형 말 알아요. 이해했어요. 맞아요. 불안해하는 친구들 많아요. 그래도 더 많이 도전하는 게 좋아요.”

그 정도로 말을 맺은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가장 오래, 그리고 자주 있는 사람들이 어쩐 일로 보이지 않았다. 그 형들에게 말할 게 있어서 찾아온 건데. 차유진은 다시 선아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문대 형, 세진 형. 오늘 없어요?”

차유진에게 포도알을 몇 개 따서 건넨 선아현이 서재로 통하는 한쪽 방문을 가리켰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공손하게 포도알을 받았다.

“좋아요. 나 가요. 아현 형 내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는 포도 한 알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서재로 향했다.

문은 닫혀있었다. 똑똑. 노크한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어 일단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들 있어요?”

방문 안으로 크게 한 발짝을 밀어 넣으려던 그는, 다음 순간 멈칫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뒤로 물렸다. 안 그래도 책장이 삼면에 빼곡해 넓지 않은 서재 바닥에 괴황지가 온 바닥을 덮은 채 부채꼴 모양으로 좌르륵 펼쳐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세필을 쥔 채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건 그가 찾던 이세진이었다. 옆에 놓인 오목한 종지에는 주사를 갠 물이 담겨있다. 또 부적을 그리는 작업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도무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문대조차 서재 한쪽 책상에 겨우 걸터앉은 채였다.

“확실해?”

“그래. 신재현으로부터 직접 들어온 정보야.”

차유진이 들어온 걸 눈으로 보고도 박문대는 차분하게 하던 말을 끝맺었다. 신재현이라는 말에 세진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다 서재 문간에 서 있는 차유진을 보고는 물 흐르듯 웃는 상을 만들어냈다.

“유진이 언제 왔어?”

지금요, 하고 답하며 그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신재현이라는 이름만은 그도 여러 번 들어보았다. 종종 박문대에게 정보나 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그래도 그보단 제 말이 먼저였다. 아니,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바로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형. 저 학교에서 그거 봤어요. 근데 형 또 일해요? 신재현이라는 사람 또 일 가져와요? 세진 형 부적 그려요? 그런데 많아요! 힘든 일이에요? 부적 많이 필요해요?”

아이고, 우리 유진이 숨넘어가겠네. 큭큭대며 웃은 이세진이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더니 바닥에 온통 널린 종이를 제 주변부터 하나둘 거둬들여 발 디딜 공간을 마련해주기 시작했다. 종이와 종이 사이 공간을 겅중겅중 디뎌가며, 차유진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뭐, 그래. 안 그래도 부를까 했는데 잘됐네. 지금 들어온 제보가 네 학교 관련이야. 네 얘기도 들어봐야겠지만 같은 건인 것 같은데. 이세진 부적 그리는 거야 이것 때문만은 아니고.”

일단 너부터 말해봐라. 도수 없는 안경을 쓴 박문대가 천천히 턱을 문질렀다. 차유진은 자신이 본 걸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보았다’라는 단어는 썩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다. 차유진은 만약 자신이 단어를 골랐다면 ‘건드린다’ 내지는 ‘끌어당겼다’라는 동사를 고를 거라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단어조차도 아주 정확하지는 않았다. 언어의 경계를 넘어선 기묘한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들은 무언가를 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차유진은 그들이 쫓고 있는 게 뭔지는 알았다. 그렇지만 그게 실제로 무엇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그냥 그거였다. 박문대는 그걸 ‘신기루’라고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그 단어의 뜻을 들어도 그는 여전히 그게 정확한 이름 같지 않았다. 어쨌든 차유진은 오늘 학교에서 그 ‘신기루’의 흐릿한 흔적을 감각했다. 그가 평소에 갈 일이 거의 없었던 예술대 쪽이었다.

“예술대 쪽이면 아무래도 겹치지?”

“그렇지. △△ 대학에 예술대. 사람이 특정된 건 처음이지만.”

이세진과 박문대 사이에 그가 모르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잠깐을 못 참은 차유진이 끼어들었다.

“형 이번에도 신기루 열려요? 사람이 특정? 무슨 뜻이에요?”

글쎄, 하고 박문대는 말끝을 흐렸다. 고민보단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에 더 가까운 표정이었다.

“사람이 하나 개입된 모양인데 그저 빠진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찾던 사람인진…. 만약 그쪽도 뭔가 있다면 여기 좀 데려올까 싶고.”

돌아온 대답에는 이제까지 차유진이 들어본 적 없는 꼬리가 달려있었다. 이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동료가 한 명 더 생길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같은 대학이라면 그와 비슷한 나이일 터. 여기 모이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를 낮추는 데 그간 본의 아니게 일조해왔던 차유진은 그 소식이 퍽 반가웠다.

“Wow! 끌어들이는 거 좋아요! 우리 빨리 찾아요! 대학 나 잘 알아요.”

근데 누구에요? 그제야 그가 던진 질문은 좀 늦은 감이 있긴 했다. 누군가 한 명 더 들어온다는 말에 차유진이 지나치게 흥분했던 탓이다. 희희낙락한 차유진을 손짓으로 부른 박문대는, 다시 징검다리 건너듯 신중하게 빈 곳을 디뎌 서재를 가로지른 그에게 서류 한 장을 넘겨주었다. 종이에는 누군가의 간략한 인적 사항과 증명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다.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차유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진으로 직행했다.

‘눈이….’

그저 사진 속 인물인데도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이었다. 눈동자는 작지만 마치 그 안에 모든 게 응축된 것 같은 눈빛, 치켜 올라간 눈매와 굳게 닫힌 입술이 고집스러운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인상에 압도되어 그는 한쪽 뺨에 찍힌 점을 늦게, 아주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그 작은 점만이 언밸런스하게도 어딘가 연약했다. Impressive. 무심결에 영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단정한 차림새. 인상으로 짐작건대, 나이는 아마도 제 또래. 그는 눈을 옆으로 돌려 이름보다도 더 먼저 나이를 확인했다. 역시 제 또래가 맞았다. 심지어 동갑이었다. 스물하나. 대학교 2학년.

“김…래빈?”

차유진은 천천히 이름을 읽어보았다. 곡선 하나 없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발음은 부드러웠다.

“유진이는 이 사람 본 적 없어?”

그새 그럭저럭 바닥을 치워낸 이세진이 여분의 주사를 새 병에 조심스레 밀봉하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요. 한 번이라도 마주쳤다면 잊지 않았을, 그 정도로 쉬이 기억에서 지우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그래도 찾을 수 있어요. 우리 학교니까 물어봐요. 나 학교에 아는 사람 많아요. 나 먼저 만나요?”

말하다가, 그는 결정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오늘 그가 학교에 간 건 특별 강연 때문이었다. 대학교는 지금 방학이었다. 고로 다른 학생들은 학교에 없었다. 김래빈도 학교에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운이 나쁘다면 지방에 사는 다른 학생들처럼 김래빈도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생각났어요. 우리 방학이에요. 좀 기다려야 해요.”

차유진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나 바닥이 치워지길 기다렸다 책상에서 내려온 박문대는 그 말에도 그저 픽 웃을 뿐이다.

“아니. 지금 갈 거야. 넌 따라와라. 서류상으로는 아직 서울에 있는 것 같으니까, 말 나온 김에 오늘 확인해야지.”

설명을 끝낸 박문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아주 잠깐 그의 설명을 곱씹어 이해한 차유진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형 추진력 멋져요! 감탄한 그가 재빨리 박문대를 뒤따랐다. 서재를 가로지르던 박문대가 손을 내밀자 말 한마디 없어도 그 손에 부적 세 장을 건네준 이세진이 그 뒤를 따르며 장난스레 말을 건다.

“문대문대. 요즘 부적 재료 가격 장난 아닌 거 알지? 그래도 세진이가 문대한테는 파격 할인가에 넘겨주는 거 알지? 그러니까 잘 써야해용. 어? 만든 내가 보람차게.”

아마도 그 말에는 장난이 반 기원이 반. 그러나 박문대는 그래,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걸로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곤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던 선아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 차유진은 소파에 내려놓았던 제 가방을 잽싸게 챙겨 들었다.

“문대도, 유진이도… 조심히 다녀와..!”

선아현이 손을 흔든다. 그 인사를 뒤로하며 그들은 집을 나섰다. 차유진은 느리게 닫히는 문을 흘긋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도움, 시선만으로 주고받는 안부.

그는 이들 가운데 가장 늦게 합류했다. 가장 어리기도 했다. 당장 다음으로 어린 박문대와도 7살이나 차이가 났다. 그래서일까. 차유진은 종종 저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기류에 끼어들기가 어색했다. 그건 형들의 친절이나 제 사교성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공유하는 기억의 절대적 차이에서 오는, 본인들은 오히려 잘 느끼지 못하는 강력한 연대감.

그게 그가 제 또래라는 누군가에게 기대를 더 걸고 있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형, 같이 가요!”

어느새 복도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는 박문대를 향해 차유진은 뛰었다.

 

*

“이거 한 장 받아라.”

아직 한참 더운 여름밤이었다. 해가 길었다.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인데도 사위가 밝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그 후덥지근한 거리를 걸으며 박문대는 차유진에게 부적 하나를 건넸다. 평범한 사람이 신기루에 빠지거나 잠식되지 않도록 작용하는 부적이었다. 아직 김래빈이 신기루에 빠진 건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니, 혹시 그를 ‘구해야’ 할 때를 대비한 물품이었다. 이세진이 박문대에게 부적을 건넨 것이 아까 전이니 따지고 보면 늦었다. 그래도 차유진은 탓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그게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나 이거 필요 없어요. 아니에요?”

“너야 신기루에 빠질 일 없는 거 알지. 그래도 일단 넣어 둬. 혹시 아냐. 필요할지.”

그래도 박문대는 다시금 덤덤한 목소리로 그에게 부적을 밀어냈다. 고마워요. 차유진은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누군가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그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이미 신기루로 많은 걸 잃어버렸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차유진이 이들을 만난 건 대략 반년 전이었다. 차유진이 이들이 ‘신기루’라고 부르는 기묘한 낌새를 세 번째로 마주쳤을 때였다. 그는 몰랐지만 이미 두 번째로 신기루를 마주쳤을 때부터 그들은 차유진을 주목해왔다고 했다. 그가 대단히 예외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것. 소수의 사람만이 인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현상. 그러나 차유진은 한국 땅을 막 밟았을 때 이미 그 감각을 처음 느꼈다. 

2년 동안 세 번. 신기루를 인생에서 접하는 소수의 사람 중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였다.

한 가지 더. 신기루는 차유진을 건드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차유진은 신기루에 빠져 본 적도, 신기루에 잠식되어 본 적도 없다. 박문대조차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다. 차유진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들은 후 그는 내려진 결론에 한참 침묵했다. 해답 없음. 단서 없음. 아무튼 박문대는 앞으로도 그의 주변에서 신기루 현상이 자주 일어날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가 곤란할 일이야 없어도 그 주변 사람들이 휘말릴 순 있으니, 말하자면 차유진은 관리 대상이다. 그 덕에 이 흥미로운 집단 가운데 속하게 되어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박문대와 그 주변 사람들이 그를 살펴보는 만큼 그 역시 이 이상한 무언가를 뒤쫓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 결말까지 보기를 바랐다.

차유진은 부적을 가만히 매만졌다.

“형. 그 ‘김래빈’이라는 사람, 형 같은 사람일 것 같아요?”

모르겠어. 박문대는 그 대답을 하곤 잠시 침묵했다. 평소 그는 단단하고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답만은 대단히 불안하게 들렸다.

“나 같은 사람이면 좋지. 지금 우리는 사례가 너무 부족하니까.”

낡은 아파트 411호에 모인 이들 중에서도 신기루와 직접 맞닿아있는 건 오로지 박문대 하나였다. 그들 집단은 그러니 박문대의 경험과 증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셈이었다. 그 점을 그는 종종 답답하게도, 부담스럽게도 여기는 모양이었다. 서재 삼 면에 꽂힌 책은 대개 박문대가 저와 비슷한 누군가라도 찾아보려 노력했던 과정의 결과물이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정보를 얻은 당일이라는 무리수까지 두어가며 직접 움직이는 이유도 아마 초조함 때문일 거라고, 차유진은 감히 추측했다.

“싫다고 하면요?”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설득은 해보겠지만 이게 의욕 없이 할 일이냐?”

너도 알잖아. 슬슬 해가 져 가는 거리를 걸으며 박문대는 읊조렸다.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보람차지도, 화려하지도, 주목받는 종류의 일도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단조롭고, 지루하고,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어쩌면 사람들을 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냥 자기 위안일지도 모르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하나둘, 지상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가로등보다 노을이 더 밝았다. 걷고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버스로 약간 떨어진, 오래된 주택가들이 모인 좁고 복잡한 골목이었다. 

노을의 붉은 빛이 오래된 다세대 주택의 벽돌 담장을 더 붉게 물들였다. 마지막으로 주소를 확인한 박문대가 계단을 올라 벨을 눌렀다.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한 번 더 버튼을 누른다. 여전히 벨은 울리지 않는다. 고장 났나. 미간을 찌푸린 그가 문을 손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계십니까.”

박문대의 등을 따라 노을이 흘러내렸다. 짙은 노랑, 주황, 선홍, 짙은 보라…. 차유진이 뒤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직후에야 제 행동의 이유를 깨달았다. 선뜩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이 맺힌 것, 경계가 흐린 것, 단단하게 몽우리 져 방울방울 흐느끼듯이, 서로 다른 고유값과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서로 중첩되고, 얽히고, 서로를 이끌고 밀어내면서, 아주 복잡한 구조물처럼 쌓이고 허물어지고 또 쌓인다. 

길고 또 짧게, 가까워졌다가 또 멀어지듯이. 세게, 그러다가도 아주 연약하게. 손끝이 저렸다. 거부감이 일었다. 그런데 두렵지 않았다. 속 끝까지 조여들었다가 모든 신경이 그쪽을 향해 쏠린다. 차유진은 이 감각을 안다. 바다에 서핑보드 하나로 떠다니면서 제게 오는 큰 파도를 볼 때와 비슷했다. 파도가 저를 끌어당기는지 제가 파도를 끌어당기는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올라탈 수 있을지 아니면 쏟아지는 파도에 휘말릴지를 가늠하는 그 감각. 점차 고조된다. 조밀해진다. 숨이 막힌다. 곧 쏟아질 거야.

그리고 홀연히.

모든 것이 사라졌다.

차유진이 홀린 듯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신기루였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웠다. 그에게 이제까지 다가왔던 신기루는 항상 그의 곁을 맴돌다 다가오지 못하고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니 이렇게, 허탈감마저 느껴지도록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마도. 

그의 생각이 끊겼다. 계단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 윤곽선을 헤매었다. 그늘에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 차유진은 제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뒤늦게 박문대의 발소리가 들렸다. 상대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늘이 서서히 상대의 목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더 길어진 머리. 여전히 굳게 다물린 입. 그래도 사진과 똑같은 얼굴. 키가 제법 크다는 건 그때야 알았다. 목에는 헤드폰을 건 채 커다란 가방을 비스듬히 멘. 

김래빈은 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차유진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상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기대가 피어올랐다. 한 번만 더. 그는 저도 모르게 기원했다. 

차유진의 간절한 마음을 느낀 것처럼 다시 신기루가 나타났다. 수런거린다. 사각거린다. 하지만 본래의 세계에선 여름밤의 공기는 흔들림조차 없다. 차 소리,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소리. 일상의 작은 소음이 공간을 메울 뿐이다. 마치 레이어로 분리된 것처럼 오직 둘, 아니 셋만이 공유하는 다른 세계. 느슨하게,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것처럼 다시 세계가 다가온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한 채로 차유진은 김래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어느새 멎었다가 단단해지고는 또.

공백이었다.

아. 차유진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제가 느낀 게 맞았다. 자신에게로 오려는 신기루를 상대가 막고 내리눌렀다. 박문대가 침음을 뱉었다. 그 소리로 그는 확신했다. 이제는 박문대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방식은 거칠어도 거기에는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신기루의 불완전한 제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고 가정했으나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걸 현실에서 구현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문대 형 저 사람 형과 같은 사람이에요. 우리 새로운 동료예요. 나랑 동갑이에요. 말하고 싶은 게 넘쳐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김래빈?”

차유진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되뇌어 봤는데도 마치 처음 불러본 것 같았다. 이름에 실체가 실리고 구체적인 양감이 덧씌워진다. 차유진은 그를 인지했다. 서류를 넘어 그제야 온전히.

“누구십니까?”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제게 건네진 존재를 동등하게 돌려주기로 했다. 악수든 포옹이든 뻗어나가려는 손을 일단 억누른다. 한국인들은 의외로 자기 스페이스가 확실해서 설명도 없이 대뜸 손을 내미는 걸 낯설게 여겼다. 그러니 시작은 마찬가지로 이름부터다.

“나 차유진이야.”

그 외의 설명은 없다. 예? 하고 김래빈이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시선이 저를 향했다가, 뒤의 박문대를 향했다가, 다시금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진에서는 그를 쏘아보는 것 같았던 그 눈동자가 실은 시선의 움직임을 그렇게 뚜렷이 보여주기도 한다는 걸 그는 처음 알게 되었다.

웃음이 샜다. 너를 기다렸다. 아. 그렇네. 나 너를 기다렸어. 그는 실감했다. 비슷한 나이. 같은 세계와 시간을 공유할 그 누군가. 막연한 기대가 현실로 등장하는 그 순간은 그의 예상보다 더 세게 아드레날린이 돌았다. 충동을 이기지 못한 차유진이 결국 그를 끌어안았다.

“뭐, 이건 대체…!”

김래빈이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 박문대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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