煥
신기루 안에서의 7년. 윤년을 고려하면 최소 2,556일. 그걸 다시 시간으로 환산하면 61,344시간.
사각사각. 김래빈은 펜으로 적어 내린 숫자들의 나열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몇 개의 숫자로 표현된 누군가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아득할지 그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길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면 짧다고 할 수도 있는 세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루 안에서 누군가 버틸 수 있는 기간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7년의 세월을 말하는 박문대 앞에서 그는 머뭇거렸다. 그의 앞에는 7년간 누군가의 생존을 간절히 바랐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앞에서 그 고통을 모르는 그가 함부로 가능성을 운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문대는 그의 망설임을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7년. 긴 시간이지. 그래도 전해오는 고사들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어.’
박문대는 덤덤하게 몇 개의 예를 들었다. 신선과 잠깐 바둑을 두었다 돌아왔더니 도끼자루가 썩어있었다는 이야기, 다른 세계에 잠깐 갔다 왔더니 인간 세계에서는 100년이 흘러있었다던 사람의 전설. 신기루에서는 인간 세계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면, 어쩌면 이곳의 7년도 그 속에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 않을까 하고.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꿋꿋하게 말을 끝맺은 박문대에게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에게 동조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박문대의 이야기는 아주 최선의 가능성만을 골라 엮은 것처럼 들렸다. 다만 그는 그 결론을 존중했다. 7년 동안 각종 이야기를 수집해 사례를 끌어모으고 신기루의 흔적을 쫓아다니며, 누군가의 생존 가능성을 가장 치열하게 의심하고 저울질했을 사람은 아무래도 그일 테니까.
그래서 지금 여기, 박문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래빈은 신기루 앞에 섰다. 익숙하고 오래된 무시 대신 그 세계를 똑바로 마주하기를 선택하며.
오랫동안 옆에 두었지만 들여다보지 않아 낯선 세계가 거기 있었다. 낡은 물건들이 쏟아질 듯 위태하게 쌓인 공간에 간헐적으로 길고 뾰족한 날개 그림자가 드리웠다. 현실의 빛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중첩된 어둠 속에서 등불이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그는 그가 오랫동안 반복해왔던 주문을 떠올렸다. 신기루는 허구다. 그러므로 물리적 실체에는 간섭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무언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먼저 그게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신기루의 허상은 그에게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다. 그의 손은 항상 물그림자처럼 일렁이는 신기루를,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그 세계를 그대로 통과해 그 뒤편 현실에 닿곤 했다. 하지만 지금, 적어도 그가 신기루를 실재하는 무언가로 인지했을 때.
그가 믿어오던 물리법칙이 깨졌다. 존재하지 않는 물체들이 질량을 품고 그의 감각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김래빈의 손이 신기루와 맞닿았다.
*
“김래빈 그럼 이제 신기루 조정? 조종? 해?”
가을 하늘을 만끽하기 좋은 날이었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학생 식당에 가는 대신 샌드위치를 사 들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의 손에는 샌드위치 한 개, 차유진은 샌드위치 두 개. 샌드위치 하나를 몇 입 만에 해치운 차유진이 나머지 하나를 대충 갈라 그에게 작은 쪽을 건네면 그는 차유진에게 초코칩 박힌 커다란 쿠키를 넘겼다. 그러면 둘 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식사가 가능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찾아낸 요령이었다.
차유진과 그가 점심을 함께하는 것도 꽤 간만의 일이었다. 바야흐로 대학교는 축제 기간이었고, 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인 차유진은 그 때문에 좀 바빴다. 건물과 건물을 잇는 길목마다 과별 부스 공간을 표시한 차양이 나풀거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서관에 들러 그를 보고 가는 일도 크게 줄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그를 찾는 과 사람들에게 불려, 김래빈에게 먼저 가라며 양해를 구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비단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학교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중간고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다들 들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 분위기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차유진은 그가 보기에도 신나 보여서, 김래빈은 그럴 때마다 나중에 기숙사에서 보자며 손이나 흔들어주었다. 어차피 그도 바쁜 시기였다. 축제라고 사람이 드물 때 잽싸게 작업실을 선점해 집중적으로 멜로디를 쌓아두어야 별도로 외부 작업실을 대여하지 않아도 과제가 쏟아지는 기간을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일 년 반 동안의 대학 생활이 알려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고로 신기루에 대해 대화하는 것도 그만큼 오랜만이었다. 신기루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말에 차유진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지만, 김래빈은 둘 다 틀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여전히 신기루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어.”
신기루에 접촉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그가 신기루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마다 그 세계는 풍경처럼 보이던 광경을 낱낱이 분해하여 그 세계를 이루는 얼개를 희미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그의 신기루는 거대했고 꼭 그만큼 깊어서, 잠깐 들여다보는 걸로는 신기루를 이해하고 제어할 수 있는 어떤 법칙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완전히 꺼내서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김래빈이 신기루 일부분을 끄집어내면 차유진의 시선이 기민하게 그쪽을 향했다. 쿠키를 입에 문 채로 신기루를 향해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던 차유진이 흠, 하고 목을 울렸다.
“지금도 신기루 나와 있는데?”
입에 있는 건 다 먹고 이야기하라며 타박을 던진 김래빈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다 꺼낸 게 아냐.”
이제까지 한 번도 다 꺼내 본 적 없어. 덧붙이며 그는 다시 신기루를 내리눌렀다. 온전히 꺼내고자 한다면 못 할 건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걸 완전히 꺼내놓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
“문대 형을 돕는 일도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그걸 떠나서도 항상 곁에 두고 살아왔으니까 최대한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신기루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한데….”
다 먹은 포장지를 접어 갈무리하며 그는 새삼스레 신기루를 인지한 지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신기루를 제대로 꺼내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왜였을까. 어릴 적에는 그가 신기루에 대해 내색하기만 하면 질색을 하던 그의 누나가 있었고, 더 큰 다음에는….
더 큰 다음에는?
“김래빈은 신기루가 무서워?”
테이크아웃 컵의 덮개를 열고 녹다 만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 먹던 차유진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천천히 과거를 되짚던 그의 의식이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 나왔다. 다 먹고 남은 부산물을 하나로 대충 뭉치던 차유진을 기겁하며 말린 김래빈은 제가 먹은 것까지를 합쳐 재활용이 가능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리하며 대답했다.
“무섭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다는 게 문제야.”
Well. It’s so Picky. 어깨를 으쓱하며 목을 한번 툭 꺾은 차유진이 그가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모아두었던 걸 휙 낚아채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가 어어, 하고 말을 잃은 사이 포물선을 예쁘게 그리며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간 뭉치를 본 차유진이 휘파람을 휙 불었다.
“난 안 무서운데.”
그 자신만만한 얼굴은 그의 불안을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김래빈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뭘까 가늠하다가 그는 깨달았다. 차유진의 태도는 편안했다. 다른 사람들이 친구에게 시험, 성적, 아르바이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치 그가 그에게 아주 평범한 고민거리를 이야기했다는 듯이.
신기루라는 현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공기. 그는 그걸 기쁘게 호흡했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며 그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신기루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귀여운 손주가 하는 말이니 일단 귀를 기울였던 그의 할머니와도, 유사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그의 입을 막고 대화를 차단하려 했던 그의 누나와도 달랐다. 보고 겪은 일을 그대로 털어놓아도 상대가 그걸 믿을 거라는 안도감.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데서 오는 친밀감.
“차유진.”
그의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뜬 차유진이 천진함을 가장하며 갸웃했다.
“내 잘못 없어. 김래빈 어차피 버리려 했어!”
그새 그의 잔소리에 부단히도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름을 불리자마자 잽싸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신기루를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서 좋다고. 어쩌면 너라서 더 즐거운 걸지도 모르겠다고. 쑥스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을 내리누르고 나면 신기루로 들어가던 그와 박문대 뒤에서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차유진을 돌아보며 느꼈던 알 수 없던 그 감정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이름표가 붙었다.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아쉬움. 나는 어쩌면 그것까지도 차유진과 당연히 함께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나머지 재활용품을 모아 몸을 일으킨 김래빈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재활용품 수거함에 종이와 플라스틱을 나누어 쏟아부으며 말했다.
“그냥. 너라도 신기루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싶어서.”
파도 같다던 그 한마디가 그의 오랜 외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면 한 번쯤은 직면해봐야겠지. 그는 마지막으로 냅킨으로 손가락을 닦아 쓰레기통에 버리며 신기루의 입구를 봉인하는 역할을 한다던 이세진의 진을 떠올렸다. 외부에서의 접근을 막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가능성을 떠올린 그가 휴대폰을 꺼내 이세진에게 안전하게 신기루를 꺼내 볼 방도가 없는지 여쭤보는 문자를 보내고 있는 사이 그를 끔벅끔벅 바라보던 차유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오늘 뭐 잘못 먹었어??”
김래빈이 잔소리를 안 해! 장난스럽게 외치며 그에게 다가와 과장된 몸짓으로 부산스레 기웃대는 차유진을 이리저리 몸을 돌려 피하다가 결국 그는 그의 이마를 꾹 눌러 밀어냈다.
“차유진. 내가 하는 건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이야. 그리고 네가 평소에 제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잔소리, 아니, 조언할 일도 없잖아!”
결국엔 언성이 높아진다. 그가 그렇게 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귀를 막고 고개를 휘젓는 시늉을 하던 차유진은 다음 순간 익숙하게 그에게 팔을 걸치며 웃었다.
“그래서 결정했어?”
“응. 해보려고.”
Wow. 김래빈 용감해. 마치 어린아이 칭찬하듯 그의 등을 툭툭 치는 손길에 그가 떨떠름한 얼굴을 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차유진이 경쾌하게 외쳤다.
“신기루 꺼내면 나도 구경할래!”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뭐가 보이는 건 아니라며?”
“그래도 나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김래빈 신기루 궁금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제게 팔을 걸친 그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기루를 느끼지만,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차유진. 그는 조심스럽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입에 올렸다.
“차유진.”
“왜?”
“너는 신기루에 못 들어가잖아. 혹시 섭섭하지는 않아?”
차유진은 어쩐지 아주 엉뚱한 질문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김래빈 그거 걱정했어? 하고 되묻고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더니 망설임 하나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렇구나, 하고 심상하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그 말을 듣고 어딘가 잔여물이 남은 것처럼 까끌하게 정돈되지 않는 제 마음에 당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유진이 그 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런데 조금, 아마도, 자신은 서운한 것 같았다.
‘설마 차유진이 섭섭하다고 말해주길 바랐던 걸까?’
그는 다시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축제 때 자기 부스에 놀러 올 거냐고 묻는 차유진은 방금의 질문은 기억에 남겨두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차유진이 섭섭했으면 좋겠다니. 차유진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그는 제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나 그날 과제 해야 해. 그는 툭 끊듯 대답을 던졌다. 왜- 하고 말을 길게 끄는 차유진의 투정은 못 들은 척했다.
*
김래빈은 헤드폰을 벗었다. 집중이 자꾸 깨졌다. 방음이 잘 된 작업실에 헤드폰까지 착용해 외부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도 축제를 맞은 학생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대여한 작업실의 사용 가능 시간은 아직 종료까지 한참 남아있었다.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했다. 국제대학교 단과대의 축제 부스가 운영되는 게 바로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나면 우리 부스 와. 내가 딜러야! 내 이름 말하면 참가비 면제!’
그 후로도 차유진은 만날 때마다 그의 부스에 놀러 오라며 김래빈을 꼬셨지만, 그는 확답을 주지 못했다. 과제 준비도 그러려니와 애초에 둘은 축제를 즐기는 방식이 너무 달랐다. 차유진이 맛있는 음식과 많은 사람,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길 때 김래빈은 연극영화과에서 주관하는 실험적인 단편 영화 상영회처럼 정적이고 예술적인 행사를 좋아했다. 서로의 취향이 그렇게나 차이 난다는 걸 알았을 때는 둘 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끝났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차유진이 힘써 준비하던 그 부스가 궁금했다.
정확히는 그 안의 차유진이 뭘 하고 있을지가 보고 싶었다.
잠깐이면 되겠지. 결국 그는 이제까지 하던 작업물을 정리하고 짐을 그대로 둔 채 살금살금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서자 멀리서 쾅쾅대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 밴드를 초청한 모양이었다.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한동안 귀 기울여 듣다가 그는 발을 돌려 국제대로 향했다. 길목 입구부터 길게 늘어진 꼬마전구가 아직 다 어두워지지도 않은 교정에 이른 반짝임을 더하고 있었다. 부스와 부스 사이 그늘에서, 또 전구가 엮인 전깃줄을 타고 흘러내리는 세계를 그는 슬그머니 내리눌렀다.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느끼지 못한다 해도 신기루가 나와 좋을 게 없었다. 김래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며 걸린 현수막들을 눈에 담았다. 삼삼오오 모여 걷는 사람들 사이로 호객 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새 유독 줄이 긴 부스가 있어 그는 그곳이 차유진의 과 부스일 거라고 짐작했다. 과연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붉은 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그럴 줄 알았지.’
신기루가 유독 잘 붙는다고 했던가. 차유진이 끌어당기는 건 신기루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 역시 그를 좋아했다. 김래빈은 종종 무모하다고 평가하는 그의 서슴없음과 낙관적인 언행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매력처럼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차유진의 행동에 입을 대는 것과는 별개로 그 역시 차유진이 시선을 끄는 류의 인간임을 인정했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 편이니까.’
크게 웃는 차유진에게서 눈을 뗀 김래빈은 부스에 걸린 규칙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부스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주제로 간단하게 변형된 리버시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게임에 참가하려면 소정의 참가비를 내야 했는데, 대신 이기든 지든 간단한 기념품을 받을 수 있었다. 이긴 사람에게는 마그넷이나 열쇠고리처럼 세계 각 도시에서 가져온 기념품이, 진 사람에게는 작은 쿠키가.
김래빈에게 내내 장담했던 대로 차유진은 잘했다. 정확히는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줄 끝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살펴본 바로 차유진의 승률 자체는 반 정도였다. 어느 한쪽이 크게 유리하지도 않고 이기든 지든 나름의 결과물이 있으니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차유진은 유쾌하면서도 얄밉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 모습은 과연 축제에 잘 어울려서 왜 그의 과에서 그를 딜러로 뽑아갔는지 알 것 같았다.
“참가하시려면 참가비를 내셔야 해요.”
어느새 줄이 거의 줄어 있었다. 참가비를 수금하던 다른 딜러가 그에게 통을 내밀었다. 차유진의 이름을 대고 참가비를 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별말 없이 주머니를 뒤적여 통에 돈을 넣었다. 그 틈을 타 신기루의 넝쿨이 손끝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걸 반사적으로 다시 밀어 넣다가, 그는 차유진을 한 번 보고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슬금슬금 뻗어나간 신기루 일부는 그의 예상처럼 곧바로 차유진을 향했고 언제나처럼 그에게 감기기 직전 산산이 사라졌다. 신기루의 기척을 느낀 차유진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를 확인하곤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마침 앞사람의 게임도 딱 끝날 때여서 김래빈은 곧 그의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차유진 너 아는 사람이야? 다른 딜러와 차유진 사이에 짧게 영어로 된 대화가 오갔다. 몇몇 단어를 제외한 태반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마 그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았다.
“김래빈 참가비 냈어? 내 이름 말하라니까.”
“친분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이 지키는 규칙에서 혼자만 예외가 될 순 없으니까.”
그는 퍽 진심으로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차유진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막 웃으며 게임판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또 다른 진행자가 게임 규칙을 설명해주겠다며 다가왔다. 이미 줄을 서 기다리는 동안 게임을 지켜보며 짐작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그 설명을 경청했다.
딱딱. 말이 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설명 끝났어?”
고개를 들면 깔끔하게 정리가 끝난 게임판이 보였다. 평소보다 신난 차유진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끝났으면 가위바위보부터 시작해.
가위바위보는 차유진이 이겼다. 그렇지만 차유진은 그가 참가비를 냈다는 명목으로 상대적으로 불리한 쪽의 진영을 선택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기가 막혔다.
“이거 골라도 김래빈은 내가 이겨.”
뭐지. 졸지에 시비가 걸린 김래빈이 미간을 슥 모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발언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 역시 승부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묘하게 발끈한 탓에 평소보다 손에 힘을 준 모양이었다. 딱, 하고 큰 소리를 내며 게임판 위에 올라간 그의 말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차유진이 히죽 웃으며 말을 집어 들었다.
“Ok. It's my turn.”
오래 걸리는 게임이 아니었던 만큼 승부는 금방 나왔다. 초반에 둘의 진영이 비등했을 때는 제법 접점이었지만 얼결에 그가 놓은 말이 차유진이 예상했던 수를 가로막은 이후로는 금방 전세가 기울어졌다. 차유진의 도발에 그가 발끈했을 때부터 둘의 승부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진행자가 이내 참가자의 승리를 선언했다.
“축하합니다!”
진행자가 빠밤, 하고 입으로 팡파레 소리를 냈다. 김래빈은 반사적으로 차유진의 표정을 확인했다. 방금 패배가 확정되었는데도 약 오른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퍽 맥 빠지는 기분에 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는, 결국 그도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이것도 재밌지?”
“……그래.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했어.”
“그래서 김래빈, 어느 도시가 좋아?”
모르겠다. 차유진과는 달리 그는 도시에 큰 관심이 없었고 아주 유명한 몇몇 도시조차 추상적인 이미지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벽면에 붙은 상품들을 훑어보았다. 낯선 풍경 여럿 중 눈에 걸리는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별 고민 없이 손을 들어, 김래빈은 그 엽서를 가리켰다.
“California?”
차유진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걸려있던 엽서를 순순히 들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전단지와 함께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부스를 나서며 받은 엽서를 앞뒤로 살펴보았다. 키 큰 야자수와 푸른 바다, 높고 낮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캘리포니아. 차유진이 나고 자란 주. 사시사철 파도가 치는 곳.
신기루가 그의 곁에서 너울거렸다. 차유진이 앉아있을 그곳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다시 그에게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잎사귀와 곰팡이들의 사각거림 사이로 바닥을 구르는 두루마리와 책들이 달각이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동안 저들끼리 적막을 채우도록 내버려 두던 그는 이내 발끝으로 책더미를 툭 치는 것으로 신기루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김래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돌아가는 길을 되짚어 걷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부스에 있어야 할 차유진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물음표를 채 띄우기도 전, 거리를 좁힌 차유진이 그에게 무게를 싣듯 몸에 매달려왔다.
“뭐야, 차유진? 너 왜 따라왔어?”
“나 많이 일했어. 친구 왔다니까 좀 놀아도 된대.”
차유진이 없어도 괜찮을까. 그가 떠날 때까지도 부스에 길게 늘어져 있던 줄을 떠올리다가 그는 곧 고민을 그만두었다. 그 걱정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게 문제였다.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그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차유진.
“미안하지만 나는 작업실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부스만 잠깐 보고 올 생각으로 나왔던지라 그의 짐이며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기기들이 그대로 작업실에 널려있을 터였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작업실을 오래 비울 순 없었다. 예약을 해놓고 제대로 쓰지 않는다면 그 작업실을 쓸 수 있었던 다른 사람이 억울할 일이었다. 왜 도서관에서 자리만 맡아두는 사람을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차유진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I know.
“김래빈 그럴 줄 알았어. 괜찮아. 나 김래빈 작업실 놀러 가.”
김래빈 우리 부스 왔으니까 나도 김래빈 작업실 가. 차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면 그 두 개를 똑같은 걸로 볼 수 있나 하고 의아해하던 그가 얼떨떨한 한 마디를 추가했다.
“작업실은 노는 곳이 아닌데?”
“Well. 그럼, 구경!”
구경하는 곳도 아니라고 할까 하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차유진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또래 관계에 익숙하지 않아도 이게 차유진 나름대로의 양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멋쩍은 허락이 떨어지면 차유진은 맛있는 걸 사 가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둘은 푸드 트럭에서 파는 타코야끼 봉투를 하나씩 들고 작업실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엄청 좁아!”
차유진이 입을 벌린 채 작업실을 돌아보는 사이 그는 잽싸게 여기저기 널려있던 기기며 자료들을 거둬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넓지 않은 작업실 내부에 그에 이어 체구가 작지 않은 차유진까지 눌러앉자 마치 꽉 찬 것 같았다. 작업실 내부 기기를 건드리지 않고는 어떻게 해도 공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 결국 둘은 긴 작업 책상에 나란히 앉았다.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이면지를 바닥에 깔고 타코야끼 포장지를 주섬주섬 벗기던 차유진은 그가 혹시나 양념이라도 떨어질까 대충 밀어둔 자료 뭉텅이를 퍽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California 말한 거 과제 때문이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차유진이 턱짓으로 자료 뭉치 가장 위에 놓인 그림을 가리켰다.〈라라랜드〉의 포스터가 인쇄되어 있었다. LA. 차유진이 양손으로 큰따옴표를 만드는 시늉을 했다. 그 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라라랜드의 배경이 LA였던가. 잠깐의 검색과 그보다 더 긴 침묵 끝에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어, 아니. 부끄럽지만 거기가 캘리포니아 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는 것도 방금 깨달았어. 음. 저 엽서를 고른 건 그냥, 아는 도시가 별로 없어서.”
그래도 캘리포니아는 저번에 네가 이야기 해줬으니까. 그는 차유진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영화 OST 작법을 배우고 있는 사람이 영화 촬영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대로 찾지 않았다는 걸 자기 입으로 인정하고 나니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특히 차유진처럼 알게 모르게 열심히 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입가에 불쑥 타코야끼가 닿았다. 반사적으로 받아먹고 나서야 뒤늦게 김래빈은 시선을 들었다. 꼬치에 타코야끼를 요령 좋게도 알알이 꿰어 타코야끼 세 알을 한입에 넣는 묘기를 선보인 차유진이 입에 있는 걸 대충 삼키고는 운을 뗐다.
“너 알아? 김래빈이 가져간 엽서, 내가 가져왔어.”
California Sunset. 노을이 예쁘게 진 해변의 사진엽서를 들어 올린 차유진이 올드 팝에 가까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캘리포니아의 정경을 설명하던 차유진의 이야기는 다시 부스에서 있었던 일로, 그의 전공 이야기로, 나중에 가 보고 싶은 도시로까지 흘러갔다. 너라면 꼭 좋아할 것 같다고, 차유진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서관이 있었던 도시를 소개해주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의 입 속에서 낯선 도시의 이름이 소리 없이 맴돌았다. 연습실은 좁아 간혹 차유진이 제스쳐를 크게 하면 팔꿈치가 부딪혔고, 그 와중에 차유진은 김래빈에게서 힘겹게 사수한 마지막 타코야끼를 바닥으로 툭 떨구었다. 타코야끼 하나에 신을 부르짖는 차유진을 지켜보면 그저 웃음이 나서.
“김래빈.”
그는 차유진이 꽤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 눈치채지 못했다.
“왜?”
여전히 입가에 달라붙은 웃음을 갈무리하며 그의 말을 기다리면 뜬금없는 말이 돌아왔다.
“김래빈 왜 자꾸 나 뚫어서 봐?”
뚫어지게야. 습관적으로 차유진의 말을 고쳐주면서 그는 조금 뜨끔했다. 그렇게 바라보면 인상이 나빠 무섭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몇 번 들었는데도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경청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워서.”
“알아. 김래빈 내 말 조심히 들어. 그거랑 달라. 나 말하는 건, 음….”
젓가락 대용으로 썼던 긴 꼬치를 까닥이던 차유진은 뒷말을 더 잇는 대신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의자 뒷다리로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채 용케 버티며 목을 쭉 빼 천장을 보던 그는 음, 하고 말꼬리를 길게 끌다 다시 고개를 기울여 그와 눈을 마주했다.
“…….”
“……?”
“…….”
눈이 깜박, 또 깜박.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차유진의 눈동자에 전등에서 반사된 빛이 이지러졌다. 한동안 가만히 김래빈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상대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평소보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그 움직임이 유독 잘 보였다. 눈이 깜박일 때마다 좌로 우로 구르던 눈동자가 다시 그를 곧게 응시했다. 그 시선을 다시 시선으로 돌려주고 있다 보면 차유진의 입이 소리 없이 벙긋댔다. 그러다 다시 피하듯 눈이 내리깔리고.
“…Que los ojos más que mil palabras.”
영어와는 또 다른 느낌의, 좀 더 억양이 센 언어가 차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할머니가 했던 말인데. 무언가를 더 설명하려던 입이 닫히더니, 머리를 제 손으로 두어 번 헝클어뜨린 차유진이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작업 책상으로 엎어졌다.
“혹시 파파고 필요해?”
Noooooope. 말을 질질 끌며 팔에 고개를 묻던 차유진이 슥 고개를 돌려 여전히 상체는 책상에 엎어진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김래빈 이야기 듣고 싶어.”
“갑자기?”
나 많이 말했어. 이제 김래빈 차례야. 막무가내로 우긴 차유진이 팔을 끌어 좀 더 거리를 좁혔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를 올려다보는 그 눈동자에 재촉당해 입을 열었다.
“세진 형께서 답장을 주셨어. 아마 다음 주쯤에는 시도해볼 수 있겠다고 하셨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차유진이 끼어들었다.
“신기루 이야기 아냐. 나 김래빈 이야기 듣고 싶어.”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신기루 말고 내 이야기? 차유진에게 되물어도 그는 단호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갑자기 본인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해도 별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의 눈에 엽서가 걸렸다. 노을 진 캘리포니아의 바다. 그걸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원래 살던 곳은. 그는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 차유진이 답답하지 않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게끔.
“한국의 동쪽에 위치해서, 네가 살던 곳과 반대로 아침에 뜨는 해가 유명해. 나는 바다보단 산에 가깝게 살지만. 거기는 여기처럼 큰 도시가 아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게 된 건 내가 아주 오랜만이라고 해.”
서울살이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었다. 간간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여전히 집에서 보내주는 돈을 보태지 않으면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김래빈은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아무 말 없는 뒷받침이 그를 향한 애정으로부터 왔음을 알았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초조했다. 그런 이야기들이, 아주 날것의 속내는 감춘 채로 흘러나왔다.
“사운드트랙은 이야기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잘 쓰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살려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 물론 고용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공모전을, 포트폴리오를, 아직은 불안한 미래 계획을 이야기하며 그는 말없이 저를 바라보는 차유진의 시선을 느꼈다. 혹시 차유진도 저로부터 이런 느낌을 받았던 걸까. 눈을 통해 그에게 그 순간 온전하고 오롯한 집중이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과 언어를 넘어, 누군가와 완전하게 교감하는 것이 꼭 가능할 것만 같은 그런 순간.
“김래빈 항상 열심히 해. 나 그거 알아. 그런 사람 앞으로도 잘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며 그를 바라보는 차유진의 두 눈을 마주 보면 그 눈빛은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만하고, 여유롭고, 얼마간 호기심으로 반짝거렸고, 무엇보다 그 눈엔 그 모든 것들을 웃도는 온기가 있어서.
그는 하던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다. 차유진. 그를 부르고.
“인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지만, 가끔은 네가 맞는 것 같아.”
“Oh. 김래빈 이제 알았어?”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눈을 찡긋하는 차유진에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하는 게 당연한 사람. 그는 언젠가 차유진이 그 자신을 수식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가 차유진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한 걸까.
그는 차유진에게로 자꾸 향하려는 신기루를 재차 꼭꼭 숨겼다. 그 움직임이 꼭 제 맘 같았다.
*
‘김래빈 신기루 더 세졌어?’
언젠가 차유진이 지나가듯 물은 적이 있었다. 그가 신기루를 만질 수 있게 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때 그는 그래?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가 느끼기로는 별 차이 없었던 탓이었다. 무심코 넘겼던 그 말을 김래빈은 이제야 후회했다. 어쩌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낌새는 예전부터 있었다. 왜 신기루는 차유진에게 닿으면 그 즉시 바스라져 흩어지는지, 왜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그를 찾아 그에게 닿고자 하는지.
눈앞이 밝았다. 타오르는 불 속에 차유진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가 팔을 들어올렸다. 불이 그 팔을 따라 흘렀다. 꼭 그의 몸이 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불길이 솟아나고 있었다. 주변의 풀들은 멀쩡했다. 오로지 그때까지도 차유진의 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신기루만이 이지러지고 뭉그러지며 고요하게 사그라졌다.
“차유진 괜찮아?”
그의 질문은 그가 듣기에도 맥없이 들렸다. 무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그가 해도 되는 말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이 양어깨를 눌렀다. 그는 차유진 쪽으로 어정쩡하게 뻗었던 팔을 거두어들였다. 불붙은 제 손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차유진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응. 평소보다 짧은 대답이 들어왔다.
차유진도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었다. 불안한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자신도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사실은 김래빈조차 혼란스러웠다. 여기 모인 사람 중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시작은 이세진의 연락이었다. 진과 장소가 마련되었다는 연락이었다. 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쟤 신기루 규모 커. 박문대의 증언에 이세진과 박문대를 제외한 사람은, 그래봤자 차유진밖에 없었지만, 진의 범위 바깥으로 물러나기로 했다. 차유진은 가까이서 보지 못하는 게 저 혼자라는 사실이 좀 불만인 것 같았지만 선선히 저 멀리 물러났다. 그가 시험 삼아 신기루를 일부 꺼내 보았을 때도 진은 문제없이 작동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 거라고 더 생각하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김래빈은 진 중앙에 섰다. 가만히 숨을 고르고, 신기루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그 어떤 내리누름 없이. 진 내부에 점점 하나의 세계가 차올랐다.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지고, 무거워지는 신기루 속에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기루 안에 들어갔을 때의 묵직함이 그를 눌렀지만 놀랍도록 편안했다. 신기루의 규모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것 같아서, 그 규칙을 해독할 생각에 막막해진 정도가 그가 느낀 불편함의 전부였다.
고요히, 아스라이, 그리고 은밀히. 신기루가 제 속을 김래빈에게 드러냈다. 풍경이 얼개로, 얼개가 다시 또 흐릿한 의미로, 의미가 낱말로. 그는 입을 벌렸다. 그가 신기루를 들여다보고자 했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신기루 쪽에서 그에게 접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루가 그에게 전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에 코를 박고 있느라 그는 묘한 불협화음이 그를 감싸고도는 것을 몰랐다. 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건 끼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고 무한히 중첩되어가던 세계 전체가 떨릴 때였다.
신기루가 범람하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는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신기루가 한 점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해진 신기루는 평소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마치 더 강한 자력을 향해 쇳가루가 요동치는 것처럼, 사냥감을 찾은 사냥개들이 마구 달려가는 것처럼 신기루가 날뛰었다. 그 끝에 차유진이 있었다.
“차유진!!!”
고작 이름을 외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는 신기루가 다른 사람은 무시한 채, 노린 듯이 차유진에게만 쏟아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 녹슬고 어두운 세계가 제 친구를 집어삼키려는 듯 달려드는 데에 경악했고, 그걸 제어하지 못해서 당황했다.
차유진은 이세진과 박문대보다 더 기민하게 이상함을 알아챈 것 같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온통 까만 덩어리들이 차유진을 짓눌렀다. 잠시간 세상이 온통 느리게 흘러가다가, 신기루가 해일처럼 쏟아져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덮어버리는 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무언가 귀에서 와글거렸다. 천만의 소리가 섞여 뒤섞였다. 신기루가 기쁨, 슬픔, 아픔, 분노, 후회, 성공, 죽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차유진에게로 뛰어가면서 김래빈은 그 속에서 실마리처럼 스치는 이미지를 저도 모르게 읽어냈다. 편지, 도서관, 누군가의 실루엣.
삼켜지는 차유진, 그리고 이제까지 보여주지 않던 걸 드러내는 신기루에 정신이 팔려 그는 박문대와 이세진이 무엇을 보며 재차 경악하는지는 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차유진에게로 손을 뻗었을 때.
갑자기 바뀐 세상의 빛깔이 예상치 못하게 그를 덮쳤다.
검고 그악스러운 것들을 헤치고, 찬란하게 일렁이며.
어둑한 것으로 가득했던 그의 시야에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확 번져 올랐다.
불이 제 앞으로 확 치솟았을 때 그는 피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서 불이 날름거렸지만 피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질 수 없었다. 뜨겁지 않았다. 마치 예전의 신기루처럼, 불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를 통과해갔다.
세계를 태우는 불길 너머로 그는 보았다. 그 안에 차유진이 있었다. 차유진이 그를 덮친 신기루를 불태우고 있었다.
박문대와 이세진이 무언가를 급박하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뭉그러졌다. 그는 망연하게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차유진은 간혹 형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형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느꼈지만 그 역시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는 제 손이 떨리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잔뜩 놀란 심장이 아우성을 쳤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면 아주 느리게 사고가 돌아왔다. 그는 한참은 뒤늦게야 다시 제어를 할 수 있게 된 신기루를 그러모아 내리눌렀다. 아직 타지 않은 신기루의 잔해들이 진저리 치듯 그에게 모여들었다. 차유진의 불은 얼마 남지 않은 잔해들마저 다 태워버리고는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타닥. 재를 타고 흩날린 불씨가 잉걸불처럼 차유진의 얼굴을 비추면 그 눈에 반사된 빛이 등불처럼 떠올랐다.
김래빈은 깨달았다. 자신은 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단순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언젠가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러나 대체 언제? 그는 제 기억을 뒤져보았다. 분명 어디에도 차유진과 만난 기억이 없었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두렵고 아름답고 망연하고 슬펐다. 서로 다른 감정들이 동시에 물밀듯 밀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그 감정들이 그를 두들겨 위화감을 끌어냈다. 유독 눈이 가던 차유진의 모습이 있었다. 빛이 투과하는 눈동자, 리듬을 타며 스텝을 밟아 걷는 습관, 그리고 지금. 그의 기억 속 차유진의 모습에 그가 모르는 언젠가의 차유진이 겹쳐졌다.
선뜩한 감각이 김래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평소에 사고하는 방식을 무시하고 직격으로 꽂히는 직감이었다. 그는 분명 차유진과 만났던 적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 기억이 어떤 이유에선가 사라진 거라면 그 원인이 될 만한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억지로 누르고 갈라 가라앉기 시작하는 검은 세계가 보였다. 여전히 아가리처럼 벌어진 균열에서 나동그라진 채 잘그락대는 낡은 것들 사이로 그를 유혹하듯 푸른 불이 희끗하게 깜박였다. 김래빈은 그 어둠이 제 뜻대로 내리눌려 흐릿해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 아득한 세계 어딘가에 그가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다.
*
아지트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신재현은. 연락했어. 이세진과 박문대 사이에 드문드문 대화가 오가다 그 둘마저 입을 다물자 그대로 적막이 감돌았다. 툭. 차유진의 손등이 그의 손을 건드렸다. 멍하니 차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김래빈 손 떨려.”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에 그는 시선을 내렸다. 자잘하게 떨리는 손끝이 보였다. 그는 손을 쥐어 떨리는 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감췄다. 놀라서 그래, 하고 답하려다가 그는 다른 말을 먼저 끄집어냈다. 차유진에게 입을 연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이었다.
“차유진.”
“듣고 있어.”
“…미안해.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어. 아니면 조금 더 조심하거나.”
그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마음의 무게만큼 고개가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제 실책을 곱씹고 있었다.
신기루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렸던 불안감을 좀 더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의 세계는 차유진을 침범하지 못한다고, 차유진은 신기루를 꺼리지 않는다고. 신기루가 그들 사이에서 연결고리, 동질감의 이유, 소통의 주제, 일종의 위안이 될 거라고. 그 알량한 믿음이 제 눈을 가렸다. 처음부터 신기루가 차유진에게로 향하는 걸, 조금만 주의를 빼앗기면 어느샌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귓가에 차유진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울렸다. 김래빈은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 너머로 그들을 향해 흘끔 시선을 던졌던 박문대가 이내 반대쪽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래빈이 신기루한테 나 먹으라고 시켰어? 알고 보니 김래빈 villain이야?”
“차유진,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냐.”
나도 농담 안 해. 풀죽은 상태에서도 타박을 던지던 그에게 다시 한숨을 푹 내쉰 차유진이 그의 손을 다시 건드린다. 톡톡. 손가락이 손등을 두드리다 틈을 파고들어 꾹 숨겨둔 손가락을 찾아 펼친다. 체온이 닿고, 차유진의 손가락이 그의 손을 감아쥐면 김래빈은 그 손 역시 조금은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심장박동보다는 불규칙하게, 그러나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나 많이 놀랐어. 나지막한 말이 떨어진다.
“근데 김래빈 일부러 한 거 아냐. 나 알아. 그러니까 사과 필요 없어.”
내가 다 태웠어. 그러니까 괜찮아. 평온한 목소리, 차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얼굴, 그리고 떨리는 손끝. 불안과 평온 사이에서 서로 엇갈리는 신호가 그를 교란했다. 어쩐지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에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 순간 김래빈은 서로 반대되는 신호 중 한쪽을 선택했다. 차유진은 괜찮지 않은 게 맞아.
‘내가 붙잡아야 해.’
위로. 김래빈은 차유진의 엇갈리는 신호가 마치 위로 같았다. 그러나 위로받아야 할 건 자신이 아니었다. 천천히 그의 손에서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는 힘주어 차유진의 손을 감쌌다. 상대의 체온을 부여잡고 있으면 그 각오가 옮겨간 것처럼 차유진의 손끝 역시 서서히 조용해졌다.
“차유진.”
응. 하고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손의 떨림은 가라앉았는데 그의 마음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선팅된 차창에 차유진의 얼굴이 비쳤다. 어떤 차의 헤드라이트가 차 안을 밝혔다. 여느 때의 차유진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다 다시 닫았다.
차유진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방심에 대해서도, 신기루가 삼킨 기억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는 결국 낡은 아파트 411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종종 제게 닿는 차유진의 시선은 침묵으로 흘려보낸 채.
자신을 신재현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침대에 앉은 차유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던 그는 그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무엇인지 모를 주문을 읊조렸다. 그의 손끝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떠올랐다. 차유진은 그걸 보면서도 태연했다. 표정은 조금 뚱했지만, 아까의 혼란은 이제 완전히 갈무리했는지 차분한 기색이다. 도리어 안절부절못하는 건 그걸 지켜보는 김래빈이었다.
“별일 없을 거야.”
그를 달래듯, 그의 옆에 서서 신재현의 행동을 함께 지켜보던 선아현이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예.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만약 그가 조금만 눈을 돌렸더라면 문에 기대선 이세진이 손가락으로 팔짱 낀 제 팔을 빈번하게 두드리는 것을, 입을 꾹 다문 선아현이 웃음기 없이 방 안을 응시하는 것을, 식탁에 앉은 박문대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모르는 긴장감이 아파트 내부에 감돌고 있었다. 그 긴장감이 향하는 방향은 물론 차유진이 있는 방 안이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동하는 빛의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곧 손을 떼고 허리를 일으키더니 제게 쏠리는 모든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산뜻하게 웃으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교대하듯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선아현이 차유진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지만 뒤따라갈 타이밍을 놓친 김래빈은 거실에 어색하게 머물렀다.
거실에서는 신재현과 박문대가 대화 중이었다.
“현장은 멀쩡하던데. 일단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현재로선 문제 될 만한 게 없어요.”
공무원 씨가 원하는 게 이런 답변은 아니었겠지만? 가벼운 어조로 덧붙는 말에 짧게 미간을 찌푸렸던 박문대가 식탁에서 몸을 일으켜 상대에게 물을 건넨다. 행동은 친절하게, 목소리는 부드럽게, 그러나 그 어조는 매듭짓듯 단호하게 박문대가 대꾸했다.
“그것도 포함해서, 죠.”
“하하. 예. 뭐, 그렇다면 안심이겠어요.”
박문대가 건넨 물을 쭉 삼킨 신재현이 눈만 굴려 주변을 쭉 훑었다. 느긋한 태도와는 다르게 웃음기 없는 시선이 그를 향하다 잠시 멈추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또 위로. 그에게 길게 머무는 그 무기질적인 시선을 받으며 그가 의아해하고 있노라면 컵을 식탁에 내려놓은 신재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질은 충분한데. 새로 들였나 보죠?
“결국 힘의 근원은 보지 못하셨나 본데요. 바로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걸 보니.”
그 시선을 가로막듯 박문대가 웃는 낯으로 신재현을 추궁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신재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가에 얕은 짜증이 어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부른 건 그쪽이면서 대우가 야박하네요. 결국 그쪽이 볼 수 없으니까 날 부른 거 아닌가?”
“…….”
“저라도 본인도 모르는 내력과 근원까지 다 꿰뚫어 볼 순 없어서요. 저주, 악령, 악마, 정령, 이종족 쪽은 아니라고 확언할 순 있으니 적어도 저게 ‘인간’이긴 하겠지만.”
신재현이란 사람의 존재를 오늘 알게 된 김래빈은 쫓아갈 수 없는 말들이 오간다. 입을 다문 박문대를 바라보며 ‘인간’이라는 단어를 강조해 발설하는 신재현의 눈이 서로 한 번씩 긁은 이 상황이 제법 만족스럽다는 듯 나붓이 접혔다.
“그 밖의 일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어요. 불이라. 신화의 가장 흔한 모티프죠. 저 수많은 신 중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는지, 가계에 전해 내려오는지, 아니면 그저 초능력인지. 심지어는 자연 발화인 경우까지. 그래. 가짓수가 너무 많고 단서는 너무 적어요. 그건 당신들의 무당이 이 자리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렇지만 ‘당신들’ 쪽은 아니라는 거잖습니까.”
“예. 공무원 씨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음. 알겠네요. 불은 위험한 힘이라고들 하죠. 그게 시전자 자신이든 주변의 것이든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힘이라는 점에서. 특히 근원을 모르면 조절하기가 어렵지. 게다가 저런 상대라면요. 뭐, 유감이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한 손엔 웃옷을 챙겨 들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인 신재현이 속삭였다. 당신은 항상 정보가 부족하니까. 내가 말했던 대로 전담 부서에라도 들어갈 걸 그랬지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들지 않나요?
그 말에 거실로 나오던 선아현이 멈칫했다. 이세진이 팔짱을 풀고 다가서려는 걸 박문대가 한 손으로 제지한다. 이세진은 심드렁한 박문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다시 쿵, 소리 나게 문에 기댔다. 선아현의 뒤에서 거실로 걸어 나오던 차유진이 그새 몇 마디를 주워듣고는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그 속에서 김래빈만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는 것도 그만둔 채 가만히 신재현의 말을 곱씹었다.
불은 무언가를 태우는 존재라.
“…신재현 씨가 신부 그만두고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면 생각해본다니까요. 거기도 조직은 전국 단위잖습니까. 종교단체라 영향력도 크고. 안 그런가?”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받아치는 박문대의 말에 신재현은 소리 내 웃더니 다음에 또 일 있으면 연락하죠, 한 마디와 함께 떠났다.
“음? 일종의 협력관계긴 해. 그치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랄까~? 초반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거든. 지금은 해결된 상태니까,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말야~”
형들이 이끄는 대로 식탁에 둘러앉아, 김래빈은 이세진의 설명을 들었다. 현관 쪽을 향해 팥 낱알을 던지며 하는 말치고는 상당히 발랄했다. 그 옆에서 박문대가 한 마디를 더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짭 신부야. 짭 신부. 그 말에 일순간 분위기가 풀렸다. 제게 의자를 내주려던 박문대를 대충 말린 차유진이 접이식 의자를 펴 앉으며 양손을 이용해 큼직한 제스쳐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부정적인 함의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 말 이상하게 해요! 한국인 맞아요?”
“아니. 말을 너무 잘해서 문제인 거지.”
의도적인 발화라는 거다. 그 말에 차유진의 미간이 조금 더 구겨진다. 나 그 사람 싫어요. 놀랍게도 그 아이 같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하나, 둘, 셋이다. 이세진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자. 그 사람은 돌아갔으니 일단 그 이야기는 그만두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지. 문대! 그 분께도 한 번 확인은 거칠 거지? 마침…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청우 형도 안 계시니까.”
“음. 그 분께서 괜찮다고 하시면.”
박문대가 착잡한 한숨을 쉬자 이번에는 모두의 고개가 선아현에게로 돌아갔다. 또 뭐 있어요? 차유진이 질린 얼굴로 기겁하며 덩달아 선아현을 바라보았다. 김래빈 역시 다른 이들을 쫓아 선아현을 향했다.
‘그 분?’
기묘한 호칭이었다. 그는 그제야 선아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는 411호. 평범한 사람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한 발짝씩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박수무당인 배세진, 귀신을 보고 잡을 수 있는 류청우, 주술과 진을 다루는 도사 이세진, 신기루의 존재를 알고 출입이 가능한 박문대, 신기루를 감지할 수 있는 차유진, 그리고 신기루를 다루는 그까지.
그 속에서 선아현의 역할만이 불분명했다. 의문도 가져본 적 없었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기에 어련히 무언가 있겠지, 하고 그가 그저 넘겨짚었던 탓이다. 차유진은 혹시 알고 있었을까? 잠시 어색해하던 것도 잊고, 그는 호기심을 못 이겨 슬그머니 차유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칼같이 차유진의 시선이 되돌아왔다. 서로의 눈이 딱 부딪친다. 뜨끔한 김래빈이 얼른 눈길을 돌렸다. 차유진의 눈초리가 다시 의심을 담고 가늘어질 무렵.
선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 바로 오신대.”
선아현이 손을 모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건 그 형 전공인데. 동명이인의 부재가 아쉬운 듯 혀를 찬 이세진이 긴장한 것처럼 자세를 반듯하게 고치며 타령과 비슷한 음조의 노래를 중얼중얼 읊는다. 설명도 없이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가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누군가를 간절히 청하고 부르고 기원한다. 그 대상은 인간이 아니다. 신이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노래.
기이한 바람이 불었다. 공기에 습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마중하듯 공간 그 자체의 성질이 서서히 바뀌어 간다. 좀 더 맑아지고 보다 정결해진다. 선아현이 변모한다. 머리 위에서 뿔이 돋아나고, 피부에 다닥다닥 비늘이 붙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덩달아 허리를 곧게 세우던 김래빈이 제가 본 광경을 믿지 못해 눈을 홉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선아현에게 덮어씌워진 듯 형상은 흐릿했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아현이, 혹은 선아현의 모습을 빌린 누군가가 시선을 들었다. 세로로 길게 갈라진 동공이 좌중을 향했다. 곧은 시선인데도 마치 모두를 굽어보듯 그 시선만으로 압도적인 무게를 자랑하는 존재가 거기 있었다.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호흡이 가빠지고 공기가 물거품처럼 맺힌다. 물속에 잠긴 듯 웅웅대는 뜻으로 그 존재가 고했다.
들어라, 간청한 이들이여.
“처용을 뵙습니다.”
이세진이 정중히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얼결에 이세진의 동작을 따라 한 김래빈은 뒤늦게 제 귀를 의심했다. 교과서, 혹은 옛 이야기에서나 등장하던 이름이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와 있었다.
처용. 신라로부터 전해지는 설화의 주인공. 동해 용왕의 아들. 노래와 춤만으로 역신을 물리친 존재. 차마 신에 가까울 이에게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한 김래빈이 소리 없이 경악해 박문대 쪽을 바라보면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고.
선아현이, 처용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대기가 울렁였다. 그걸 알아서인지 그 존재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 한 번 달싹이지 않고, 음성을 거치지 않은 뜻이 귀를 거치지 않고 머리에 새겨졌다.
안타깝다. 내가 입 댈 것이 없구나. 삿된 것은 아니나, 하늘은 고요하고 운에도 명에도 얽힌 게 없다.
이름의 무게를 아는 이들이 용의 앞에서 시선을 들지 않을 때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 차유진만은 존재의 압박을 이기고 고개를 들어 용을 직시하고 있었다. 처용의 시선이 차유진을 잠시 스쳤다. 그걸 곁눈질로 살펴본 김래빈이 질겁하며 손을 뻗어 차유진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미쳤어? 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른다. 종교와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신성한 존재에 대한 오만은 죄로 치부된다. 신에게는 아무것도 통하지 않아. 오로지 정성뿐이지. 누나에게 어릴 적부터 들어온 것이 있는 그에게 신은 두려운 존재였다.
손을 붙들린 차유진이 용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채 왜, 하고 입 모양만으로 벙긋거리는 차유진에게 짧게 고개를 저은 김래빈이 잡은 손을 꾹 아래로 내리누른다. 입을 비죽인 차유진이 어설프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양새를 처용은 전부 보고 있었다.
천 년도 넘은 옛것이 인간의 일에 대해선 무엇을 알겠느냐. 나머지는 너희들의 몫이다. 그러나 불이라.
처용의 뜻이 짧게 허공을 울린다. 웃는 것 같았다.
서라벌에선 오랫동안 지귀가 악명이 높았지. 불은 잘 쓰면 이롭지만 지나치면 그만한 화가 없다. 네가 재앙이 되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니 태우는 것이 너든 다른 이든 항상 경계하려무나.
덕담인지 경고인지 모를 그 뜻을 남긴 채, 용은 사라졌다.
공기가 다시 가벼워진다. 처용의 뜻이 고요해졌을 때부터 신을 보내는 노래를 입속으로 외고 있던 이세진이 진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탁 내려놓는 듯한 한숨이 선아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박문대가 그대로 흘러내리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개입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역시나 별로 얻은 게 없네.”
“신들이 그렇지 뭐~ 그래도 범위는 조금 더 좁혀졌잖아. 이쪽 계통의 신은 아냐. 아현아. 넌 괜찮아?”
“으응. 이 정도는 괜찮아. 부담이 되는 건, 아니야.”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는 걸 듣던 차유진이 더는 인내하기 어렵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척 올렸다.
“나 형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신재현이라는 사람 참았어요. 근데 이번엔 형들 설명 안 하고 막 했어요! 내 문제에요! 나는 알 권리 있어요! 그러니 형들은 나한테 설명해야 해요!”
따따따 쏘아붙이는 말이 제법 매섭다. 평소라면 그를 말렸을 김래빈은 조용했다. 그의 정신은 지금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지귀, 그리고 불. 태우는 것. 타는 것.
‘그렇지만 무엇을?’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연장자들은 잠시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작은 눈짓과 고갯짓이 오간다.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그들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유진아. 힘의 근원을 아는 건 네 생각보다 더 시급한 문제야. 그래야 제어할 수 있으니까. 형들은 물어볼 수 있는 상대에게는 다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방법이 무례했지. 그래. 잠깐이라도 설명했으면 좋았을걸. 미안하다.”
말에서 평소의 웃음기나 너스레를 전부 뺀 이세진에 이어 단단한 얼굴을 한 선아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니까, 일종의 그릇이야.
“신은, 나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해.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사에 재앙이 내려 신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그냥, 일반인이랑 똑같아.”
선아현은 배세진과는 다른, 좀 더 직접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신과 소통한다. 그 외의 능력은 없다. 그러나 때로 신과 통하는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간청밖에 없다고 해도 탐욕의 존재가 되는 법이다. 선아현의 말에 차유진이 한풀 꺾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나 문대나, 너희에게 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어디서 내 정체를 말하지 않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다 끝나고, 설명해도 된다고 멋대로, 생각했어. 급한 상황이었다 해도, 네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배려하지 못했지. 그건, 내 잘못이야.”
차근히 이뤄지는 설명에 차유진의 기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세가 편하게 바뀐다. 추궁에서 의문으로, 말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저게, dragon, 용이 신? 이에요?”
“기독교 관념에서의 신하고는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일단은 그래. 처용 정도면 인간에게 매우 관대한 편인데도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아냐. 이때를 놓치면 다시 부르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지.”
박문대가 교대하듯 설명을 이었다. 그가 이제 설명이 다 끝났다는 듯 차유진에게 고개를 한번 까닥이면, 차유진은 턱을 괸 채로 흠, 하고 목을 울리더니 손으로 OK 사인을 그렸다.
“좋아요. 형들 걱정 알겠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용서해요.”
하지만 다음번엔 안 돼요.
앞에서 마구 쏟아낸 만큼,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자 빠르게 풀린 차유진이 시원하게 양팔을 벌렸다. 웃음을 머금은 이세진이 아이구, 우리 막내 하며 차유진의 머리를 막 헝클어트렸다. 박문대가 슬며시 웃는다. 몸은 괜찮은 거지? 뒤늦은 안부가 도란도란 오간다. 나 이제 Supernaturel power 있어요? Wow! 이제야 무언가를 실감할 만큼 여유가 생겼는지, 차유진의 감탄이 공간을 울렸다. 그래도 아직 어떤 힘인지 모르니까 함부로 쓰면 안 돼. 이세진이 검지를 척 들어 올리곤 양쪽으로 까닥대었다.
다시 찾아온 평화로운 소란 속에서 김래빈만이 고요히 제 기억 속에 빠져있었다.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침잠해 흔적을 더듬는다. 잃어버린 기억이다. 그러나 분명 실마리가 있었다. 지귀. 그건 분명 고등학교 때였지.
“근데 나 궁금한 거 있어요. 나 다른 말은 다 알았어요. 뜻 통해요. 신기해요. 그렇지만 ‘지귀’? 그건 몰라요.”
“지귀는-”
생각에 잠긴 그의 귀를 뚫고 단어가 꽂히듯 들어왔다. 무심코 입을 연 건 그도 그때까지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쩌면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마음이 급해졌다.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를 내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형. 아무래도 저는 지금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급히 확인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오늘 일은 죄송합니다. 제가 섣부른 판단을 해서 모두를 번거롭게 해드렸습니다! 말씀드려야 할 게 많은 건 알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다음에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건 평소와 똑같지만, 허리를 굽혔다 펴는 그 사이에 시간의 지체가 없다. 그의 기세에 순간적으로 눌린 선아현이 눈을 댕그랗게 뜨고 박문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 김래빈은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중에 연락하자. 박문대의 인사가 뒤늦은 꼬리처럼 그에게 따라붙었다. 영문 모른 채 형들과 현관을 번갈아 보던 차유진이 허겁지겁 그를 뒤따랐다.
“김래빈! 왜 그렇게 서둘러?”
낡은 아파트의 계단을 반쯤 뛰듯 서둘러 내려가는 그의 뒤를 차유진은 금방 따라잡았다. 그의 팔을 잡아채며 던져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아파트 단지 앞에서 유턴하던 택시를 잡아탔다. 고지식하게 대중교통을 고집하던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대학교 후문 앞으로 부탁드립니다. 김래빈이 정중하게 목적지를 읊는 사이 그의 옆에 낑겨 탄 차유진이 얼결에 챙겨온 그의 가방을 던져주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왜 그래? ‘지귀’가 뭔데?”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야. 여왕을 너무 사랑하던 지귀라는 사람이 절 앞에서 여왕을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실수로 잠들어버린 탓에 만나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 불귀신이 되어 절을 태우는 이야기.”
“잔 건 자긴데? He is such a JERK. Huh? 그러고는 화내는 거야?”
“그것보다는 정염,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에 대한 아주 깊은 열망을 불에 비유하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일 거야. 어쩌면 실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김래빈은 그 이야기 어떻게 아는데? 그리고 갑자기 기숙사는 왜 가?”
아파트에서 대학교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차가 막히는 일도 없어 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대답을 뒤로 미뤄두고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도 멈추지 않았다. 기숙사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제 노트북을 꺼냈다. 부팅을 하는 잠깐도 기다리기 어려워 노트북의 몸체를 초조한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그는 바탕화면이 뜨자마자 백업용 폴더를 찾아 클릭해 들어갔다.
다른 폴더는 다 정리했어도 아직 거기에는 고등학교 시절의 파일이 남아있었다. 지귀(志鬼)라고 이름 붙은 폴더를 찾았다. 작업의 초고, 완성본, 레퍼런스, 제출용 양식 글이 일률적인 형식으로 정리된 채 그를 맞았다. 그는 완성본 파일을 우클릭해서 파일의 정보를 불러왔다. 파일의 생성 날짜는 20xx. 09. 04. 22:56.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커서가 참고 자료 폴더로 향한다. 그 안에 있는 파일 중 하나를 클릭해 상세 정보를 열어보았다. 생성 날짜가 보였다. 20xx. 09. 05. 00:49.
옆에서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차유진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긋이 무게가 가해진다. 김래빈. 무슨 일이야.
“차유진. 너, 고등학교 때, 아니, 열일곱 살, 열여덟 살인가. 아니다, 20xx년 9월 4일, 아니면 5일…. 이때 별일 없었어? 혹시 나를 만난 기억이나….”
“Wait, 잠깐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김래빈 미국 온 적 있어? 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국 처음 왔어!”
김래빈은 단 한 번도 미국에 간 적이 없다. 외국에 간 적 자체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김래빈이 차유진을 고등학교 때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그는 제 작업 스타일을 알았다. 그는 다른 작업물의 파일을 찾아 연달아 클릭했다. 파일의 정보가 주르륵 떴다. 다른 작업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레퍼런스로 참고하기 위해 모아둔 것들의 파일 생성 날짜가 작업 완성본의 생성 날짜보다 한참 앞이었다.
그래.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꼼꼼히 참고 자료를 모으고, 찍어두었던 비트와 멜로디를 조합하고,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곡을 만들기 위해 수십 번을 갈아엎는다. 오로지 지귀만, 지귀 설화를 찾아 정리해두었던 파일이 완성 파일보다 생성시간이 뒤였다. 지귀를 떠올리고 작업을 완성한 게 아니다. 그때의 자신은 곡을 먼저 완성해두고 어울리는 제목을 찾아 비슷한 느낌의 이름을 붙인 거였다. 어디의 전통문화 단체의 공모전 주제에 맞추기 위해 옛 설화를 뒤져가면서.
원형이 되는 모티브도 없이 즉석에서 작곡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곡을 클릭해 재생했다. 헤드폰을 연결하지 않은 노트북에서 바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김래빈은 그 곡의 리듬을 더듬었다. 멜로디는 달랐지만 그 리듬은 차유진이 흥날 때 밟는 스텝과 공교롭게도 유사했다. 제목은 지귀. 자신을 불태운 가엾은 남자.
그는 음악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의문에 찬 차유진이 있었다.
“차유진.”
“왜!”
“지귀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공모전에 냈던 곡 제목이야. 그래서 알았어.”
So? 이해가 안 된다는 어조로 그가 몸을 기울인다. 노래는 좋았어. 그치만 김래빈이 달려간 이유 모르겠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어. 근데 그게 아무래도 이 곡을 만들 때쯤에 일어난 것 같고, 무엇보다도 너랑 관련된 기억인 것 같아.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말하면서 그는 반쯤 확신했다. 차유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겠지.
“한참 전 일이야! 당연히 기억 못 해. 그래도 별일 없었어. 김래빈 필요하면 나, 가족한테 물어봐?”
그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손을 모아,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린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신기루가 차유진의 기억까지 먹어버린 거다.
김래빈의 속에서 근거가 없어 채 말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날뛰었다. 사실은 내가 예전에 너를 만났던 것 같아. 어쩌면 오늘 일어난 일의 원인이 나와 내 신기루에 있는지도 모르겠어, 차유진. 만약 오늘 신기루가 너를 덮친 게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면, 아주 처음부터, 내가 너에게 뭔가 잘못해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거라면, 나는 대체 너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차유진이 아직 방 안에 있었다. 오늘 신기루에 덮쳐진 그의 앞에서 다시 세계를 꺼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오래 보아 익숙한 풍경을 떠올렸다. 모든 게 멈춘, 녹슬고 어두운 세계. 답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그 안에 있을 터였다.
결국엔 다시 신기루였다.
*
세계가 뒤집어져도, 차유진이 원인 모를 불을 내뿜어댔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직 대학생 두 명에게는 어김없이 중간고사 기간이 닥쳐왔다.
고사 기간의 도서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단 열람실과 세미나실, 그리고 로비 한정으로, 그가 일하는 서가 부근에는 앉아서 공부할 만한 공간이 없어 인구밀도가 여전했다. 그래도 반납함에 쌓이는 책은 대폭 늘었다. 중간고사 대체 과제에 골머리를 앓는 대학생들의 흔적이었다. 그 역시 중간고사를 과제로 대체하는 과목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그는 비교적 고른 작업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학기 초부터 시작해 축제 기간에 작업을 집중적으로 끝낸다는 전략은 이번에도 제법 잘 먹혀들어서 축제 기간이 끝난 지금은 비교적 한가하기까지 했다.
차유진은 중간고사 기간에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Oh! 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야!’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며 그가 우쭐대면 도서관까지 그를 따라온 그의 친구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른 친구와 장난스럽게 불손한 손짓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김래빈은 그 전보다는 자주 차유진을 도서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주로는 세미나실에서였다. 책 수레를 끌고 지나가다 보면 세미나실 출입문에 뚫린 좁은 창 너머로 책을 쌓아둔 채 과격한 제스쳐를 남발하며 같은 과 동기들과 수다인지 토론인지 모를 대화를 나누는 차유진이 건너다보였다. 그러면 그는 책 수레를 잠시 멈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다가 눈치 빠른 차유진이 고개를 돌리기 전 다시 수레를 돌돌돌 끌며 이동했다.
지난 사건 이후 그는 계속 차유진을 피하고 있었다. 바쁜 일 핑계를 대고 의도적으로 식사 시간을 건너뛴다던가, 일부러 차유진이 한가한 시간을 노려 과제 작업을 한다던가. 어쩔 수 없었다. 신기루가 까맣게 차유진을 덮치던 그때를 떠올리면 자꾸 초조했다. 언제고 제 몸에서 다시 신기루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신기루에 매달렸다.
아무도 그를 호출하지 않는 빈 시간, 그는 서고에 처박혀 신기루를 끌어냈다. 서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제어할 수 있을 만큼 조금, 그러나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그의 손이 신기루 안을 파고들었다. 그 손이 바닥에 떨어진 책과 두루마리 사이를 휘젓는다. 쥐고, 끌어당겼다가 그대로 없앤다. 이제는 누르는 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신기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그 전체를 끄집어내어 읽을 수 없다면 일상에서의 통제라도 완벽해야 했다. 적어도 차유진과 같은 공간을 쓰는 한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더는 그를 위험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신기루를 불러내고, 구현하고, 잡아채고,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쥐고 흔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기루를 누를 수 있게 된 데 걸린 시간이 10년. 그래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목적의식도 없이 신기루를 외면하는 데 바빴던 그때와 지금은 달랐으니까.
그는 숨도 죽인 채 집중했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신기루를 뜯어내고 분해하고 그 가닥 하나하나를 더듬어도 여전히 법칙은 모호하고 기억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조급함이 그를 바짝 뒤쫓았다. 그의 손에서 신기루가 조각났다. 곰팡이가 그의 팔을 감싸고, 눈앞에 세계의 구조가 언뜻 드러난다. 더 깊이. 조금 더. 조금만 더. 그의 몰입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에.
삑-!
짧고 거친 알람 소리가 울렸다. 알람 소리와 함께 신기루를 완전히 거둬들인 그가 이마에 잘게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쉽지만 복귀할 때였다. 몸이 축 쳐졌다. 신기루를 운용하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그는 비척비척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돌아왔다.
“오늘도 래빈 학생 친구 왔더라고요. 왜. 그 잘생긴 친구 있잖아. 한참 기다리다가 가던데.”
이제는 제법 친근하게 그를 대하는 사서가 웃으며 그에게 캔을 내밀었다. 그는 양손을 모아 공손하게 그 캔을 받았다. 한때 주인을 잘못 찾았던, 소나무가 그려진 초록색 캔이 그를 맞았다. 그는 손안에서 어색하게 캔을 굴렸다. 취향을 고려하면 음료가 적절한 사람에게 도달한 게 맞는데도, 제 손에 들린 게 콜라가 아니라는 게 낯설었다.
[김래빈 요새 많이 바빠 :( ]
이번에도 캔에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차유진의 축 처진 얼굴이 그린 것처럼 그 위에 떠올랐다. 그는 이모티콘 부분을 잠시 더듬어보다가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떼어 제 노트 표지 뒤에 붙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차유진. 미안하지만 오늘도 식사는 다른 사람과 해야 할 것 같아. 과제와 관련해서 약속이 잡혀 있어.’
그는 보내기를 잠깐 망설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정말이었다. 과제 곡의 제출을 위해 가이드보컬 역할을 해 줄 동기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판을 눌렀다. 다음에, 같이….
그는 자신이 쓰려던 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액정을 두드려 그 말을 지워낸 후 문자를 전송했다.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데구르르. 손에서 캔이 돌았다. 이상하게 묵직한 감각이었다.
“녹음실 남은 대여 시간을 쓰고 싶다고? 나야 상관없는데 뭐 더 할 거라도 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 어, 뭔지 몰라도 열심히 해. 파이팅!”
그는 부리나케 녹음실을 나가는 동기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뭔가 더 말하려고 하지 않았나. 자신이 무심코 인상을 썼던 걸 모르고 갸우뚱한 그는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걸로 제 궁금증을 지워버렸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기억난 모양이었다. 말마따나 녹음작업은 다 끝났으니 그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혼자만의 공간과 넉넉한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동기의 이름으로 빌린 녹음실에서 다시 신기루로 침잠했다. 겉으로 보이는 시각적 정보를 넘어, 세계를 얽어 받치고 있는 고리를 풀고, 더 아래로. 그리고 더 아래로. 이해할 수 없는 자취를 쫓고 그 언어를 해독하려고 노력하면서.
방해가 없다면 언제까지고 잠겨있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순연한 집중은 신기루가 확 쏠리는 기색을 느끼자마자 깨어져 나갔다. 김래빈은 그런 쏠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차유진이었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공간을 채우던 신기루가 그에게 억눌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빼꼼, 문이 열렸다.
“김래빈 여기 있어?”
“…응. 그런데 차유진,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실용음악과 친구한테 물어봤어. 그랬더니 여기 말해줬어!”
실용음악과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구나. 상황에 맞지 않는 감탄이 잠시 스쳤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연스럽게 녹음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이 천천히 녹음실 안쪽을 훑었다. 전원이 다 꺼진 녹음기기, 불 꺼진 녹음실 안쪽, 닫혀있는 노트북, 아무것도 써진 게 없는 노트까지. 김래빈 과제 하는 거 아니었네. 가라앉은 차유진의 목소리가 조용한 녹음실 안을 울렸다.
그가 고개를 들고 천장부터 벽면까지를 쭉 돌아보는 모습을 김래빈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차유진의 시선이 닿는 곳은 신기루가 퍼져나갔던 곳들이었다. 차유진은 신기루의 흔적을 알 수 있었지.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차유진은 그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다 알아챈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슬픈 것 같기도, 화난 것 같기도, 실망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김래빈 나 피해?”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 알고 있어. 차유진이 중얼거렸다. 김래빈 나 피해.
“김래빈 그때 많이 놀랐어. 피하는 거 괜찮아. 근데 나 김래빈 안 태워….”
말끝이 잦아들었다. 녹음실 바닥을 의미 없이 문지르던 차유진의 발끝이 멈췄다. 그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주눅 든 것처럼 보이는 차유진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건 차유진이 아니었다. 차유진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누군가 잘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면 그건 나여야지. 네가 아니라.
“아냐. 나는 그냥… 신기루를 보고 있었어. 네가 있는 곳에서 하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으니까 최대한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고. 그뿐이야.”
“그럼 나 피하는 거 아냐?”
차유진이 그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방금까지 집중하고 있어 신경이 곤두선 몸에 신기루의 기척이 느껴졌다. 또다. 차유진이 가까워지면 신기루가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그가 뒤에 놓인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순간적으로 멈칫한 차유진이 다시 발을 물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김래빈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차유진. 방금은, 아니, 나부터도 벌써 신기루니 뭐니 하는 이상한 게 붙어있는 마당에 왜 내가 네 능력이 불이라고 널 피해! 나는 너 하나도 안 무섭고, 그때도 놀란 이유는 네 불 때문이 아니었어. 이건 그냥 차유진 네가 가까이 오니까 신기루가…!”
달래듯 시작했던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결국 외침처럼 끝났다. 녹음실이라 방음이 되어 다행이었다. 제가 얼결에 꽤 큰 소리를 냈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잠깐은 웃는 것 같았던 차유진은 이어지는 말에 다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번 일로 깨달았어. 신기루는 너한테 위험해, 차유진.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기루가 어떤 작동원리로 움직이는지 알기 전까진 최대한 조심할 거야. 기억 문제도 있고.”
지금 해답을 찾고 있으니까. 얼버무리듯 덧붙이며 김래빈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차유진이 그를 응시했다. 침묵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눈은 그대로 마주친 채로, 그는 시선이 닿자 와글거리기 시작하는 신기루를 다시금 내리눌렀다.
“저번 일은 왜? 저번 일 끝났어. 문제없어.”
차유진이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그와 짝을 맞추듯, 다시 그는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 넓지 않은 녹음실에서 기묘한 술래잡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차유진이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지 마. 김래빈은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았어. 저번 일도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약속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차유진. 그때 네가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더라면,”
“저번 일은.”
길게 이어지려던 그의 말을 차유진이 툭 끊었다.
“나도 무사하고 김래빈도 무사했어. 그게 끝이야.”
한 단어씩 끊어서, 내리누르듯이 차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김래빈 뭐가 진짜 중요한지 몰라.
“우리 시험 끝나면 놀자고 했어. 나 시험 이미 다 끝났어. 김래빈 그것도 신경 안 썼어! 나 저번에 친구들이랑 뒷풀이도 하고 왔어. 김래빈 그날도 늦었지? 요즘 김래빈 맨날 늦어!”
그동안 맺힌 게 많은 듯 말을 쏟아내던 차유진은 끝내는 영어로 몇 마디를 덧붙이고야 말았다. 물론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차유진은 지금, 그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 같았다. 김래빈은 힘겹게 인정했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건 차유진의 안전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다. 우선순위를 착각하고 있는 건 차유진이었다.
“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노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가 중얼거리면 차유진은 이마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차유진은 더 이상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신음에 가깝게 목을 울리며 좌우로 몇 걸음을 반복해 걷던 그가 양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마치 항복 자세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굴은 싸늘했다.
“김래빈 언제까지 몰라?”
“내가 뭘 모르는데?”
“……. 김래빈 과제 한다고 했어. 끝나고 다시 말해.”
End of discussion! 차유진은 녹음실 문을 쾅 닫고는 사라졌다. 영문 모를 화였다. 녹음실 안에는 이제 그 혼자 남았다. 남겨졌다.
닫힌 문 안에 정적이 고였다. 김래빈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의자를 끌어 주저앉았다. 연필이 노트 위에 뜻 없는 선을 끄적이다 멈췄다. 그는 책상에 엎어져 팔에 머리를 묻었다. 차유진은 가버렸지만 다시 신기루를 불러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게 어떤 일을 일으킬 줄 알고 그걸 문제없다 해. 신기루가 뭔 줄 알고. 어쩌면 그대로 신기루에 삼켜져 버렸을지도 모르면서. 불이 가장 위험하다던데 뭔지도 모를 능력이나 막 쓰고.
연필이 다시 노트 위에 몇 개의 선을 그려냈다. 차유진 바보. 그 위를 다시 검은 선이 빠르게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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