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을 사르며 돌이켜 널


산에 인접한 길목의 나무는 벌써 반 이상이 울긋불긋했다. 바야흐로 단풍철이었다. 옛 성곽의 흔적을 따라 놓인 산책길을 걸으면 하늘은 파랗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광경이라. 평소대로라면 답답함이 확 가실만한 조건인데도 여전히 마음이 착잡했다. 단풍과 어울릴 색을 가진 누군가가 계속 떠올라서일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상념이야.’

그는 잡념을 밟아 없애고 싶은 것처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기, 래빈이…, 맞지?”

그래서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심스레 어깨를 건드는 손길이 더해지고 나서야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딴생각의 부작용이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트렌치코트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훤칠한 인영이 그를 보고 반갑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선아현이었다. 그가 급하게 단서를 찾아 뛰쳐나갔던 그 밤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후로 제대로 연락을 드린 적이 없었지. 신기루, 중간고사, 그리고 차유진과의 문제가 그의 정신을 다 잡아먹은 탓이었다. 제 실수를 알아차린 김래빈은 뻣뻣이 굳어 허리를 굽혔다. 몸 둘 바 모르겠다는 심정이 군기 든 목소리에도 그대로 묻어나왔다.

“앗, 예! 제가 잠시 딴생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현 형께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선아현은 그의 각 잡힌 인사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 아냐.

“생각에 잠긴 걸, 봤으면서도 부른 건… 나니까. 그날 그렇게 가고 나서, 조금, 걱정했거든.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반가워서.”

이렇게 밖에서 만난 건 처음이니 커피라도 사겠다며 아현은 근처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을 가리켰다. 둘 사이에서는 잠깐 사양을 담은 실랑이가 오갔지만, 길진 않았다. 어른이 주시면 감사히 받는 거라던 할머니의 가르침이 여전히 그에게 굳건한 탓이었다. 연락을 잊어 형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게 마음에 걸린다는 게 그다음 이유일 테고.

둘은 손에 음료 한 잔씩을 든 채 산책길을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높지 않은 산은 길이 완만해 대화를 나누며 걷기에도 좋았다.

“나는 공연 관련으로 이 근처에 들렀다가, 이쪽 산책로가 좋다는 추천을 받아서, 잠깐 들렀어. 래빈이 학교는… 여기서 좀, 거리가 있지 않아?”

사람이 많지 않은 산책로에 선아현의 목소리가 조곤하게 울렸다.

“넵. 그렇지만 여길 온 게 처음은 아닙니다! 이 성곽길은 차유진의 과제를 돕다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 근방은 예전에 피팅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주 들렀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 근처에는 아직 전통시장의 모습이 남아있는 꽤 큰 규모의 시장이 있었다. 그 내부에 좌판을 펼치고 앉은 상인의 모습이나 떠들썩한 호객 소리 같은 게 고향에서 할머니와 장 볼 때를 떠올리게 해서, 김래빈은 그 공간을 퍽 좋아했다. 서울살이를 하다 마음이 힘들면 시장에 들러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걸 위안 삼을 만큼. 오늘도 사실은 시장길을 걸을까 하고 나왔다. 정작 시장에서는 마음이 갑갑하여 이쪽으로 빠져버렸지만.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차유진과의 기억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공간도 하나 정도는 남겨둘 걸 그랬지. 그러나 과거의 김래빈이 차유진과 싸우게 될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늦고 의미 없는 후회였다.

 

  

차유진과 시장에 들른 건 중간고사를 보기 전이었다. 차유진에게 전공 과제가 내려졌을 때였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소를 찾아 방문하고 도시계획의 측면에서 앞으로의 활용방안을 논하는 보고서를 작성할 것. 

차유진은 서울이 낯설고 혼자서는 사진을 남기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김래빈을 반강제로 그의 과제에 참여시켰다. 그에게도 서울은 낯선 공간임을 알면서도. 둘은 꽤 오래 머리를 맞대고 티격태격하다 오래된 도시로서 서울이 가진 면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성곽길이 선택되었다. 

지도에서 위치를 찾아보다가 시장이며 근처 골목길을 같이 돌아다녀 보자는 제안은, 그래. 김래빈이 먼저 던지긴 했다. 성곽길이 놓인 위치가 그에게 익숙한 동네임을 알아차리고 나자 차유진과 제가 좋아하는 거리를 함께 공유해도 좋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과제를 핑계로 평소의 동선을 벗어나 친구와 학교 밖으로 놀러 갈 기회였다. 은근히 신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날은 과연 즐거웠다. 시장부터 시작해 좁은 골목들을 누비며 걷고, 다시 성곽을 따라 쭉 돌다가 마지막에는 현대적인 공간에서 난해한 전시를 보았다. 골목에서는 신기루를 사이에 두고 장난을 쳤고 시장에서는 온갖 간식을 물고 돌아다니며 끼니를 때웠다. 보고서에 올릴 용도가 아닌 사진들이 사진첩에 쌓이는 만큼 둘 사이에서는 온갖 시답잖은 이야기가 다 나왔다. 김래빈은 막힌 천장이 만들어 내는 음향의 울림을 설명했고, 차유진은 시장의 천장을 가리키며 아케이드 형식의 유행에 대해 떠들었다. 성곽길에서는 도시를 내려다보던 차유진의 옆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복잡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꾸리는 게 좋다고, 사람들이 만든 도시와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던.

장소 곳곳이 차유진의 흔적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러 들렀는데 예상만큼 잘되지 않아 곤란한 참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선아현에게 그간의 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유진이랑 싸운 것 같다. 그런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뼈아픈 인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적당히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사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시간을 공유하는 빈도가 줄었다. 잊을 만하면 삐걱거림이 느껴지고, 대화를 하다가도 말이 끊긴다 싶으면 가끔은 긴장이 감돌았다. 과제가 끝나고 해보자던 차유진과의 이야기는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차유진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우면 고작 다섯 발짝의 거리가 새삼 멀었다. 해답은 알고 있었다.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런데 무서웠다.

그는 자신이 눈치가 빠르지 않고 화술은 더 서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섣불리 꺼냈다가는 오해만 더 깊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차유진이 그때 왜 화를 냈는지를 구체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채였다. 이대로라면 대화를 하더라도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적인 반응을 하게 될 게 분명했다. 결국엔 도돌이표였다. 차유진은 대체 왜 그때 화를 냈는가.

“형께서는 차유진과 자주 대화를 하셨으니 혹시 실마리가 될 만한 게 있다면 들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최근엔 나도, 유진이에게 따로 들은 게, 없어.”

선아현이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래빈이를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봤을 때 너희 둘은, 충분히… 서로를 아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걸. 그렇다면, 잘 대화를 나누면 좋지 않을까?”

“분명 저는 차유진을 친우로써 퍽 걱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그렇게 보이는군요. 그는 약간의 우울함을 담아 읊조렸다.

“차유진도 과연 그럴까요? 저는 간혹 차유진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차유진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저와 너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판단이 들 때가 있어서, 어느 쪽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제가 옳다고 확언하는 건 아무래도 자만이겠지만…. 그래도 안전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거 아닙니까?”

그래도 그는 차유진을 이해하고 싶었다. 차유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차유진, 그 바보에겐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 그가 대체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건지.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산을 낀 산책로의 난간 너머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랫동안 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낡은 건물이 무질서하게 얽혀있는 그 골목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이제는 하도 들여다봐 익숙해진 신기루의 풍경이 떠올랐다. 이어 차유진을 집어삼키려던 신기루의 그 집념도.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온 적도 없는 신기루를 의식적으로 다시 또 내리눌렀다. 차유진과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마치 그가 고삐를 느슨하게 하는 그 순간 그가 위험에 빠질 것처럼.

“래빈아.”

다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한 발짝 앞에서 선아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중압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김래빈은 선아현이 그를 굽어본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때 처용이 그들을 그렇게 보았듯. 이내 그 감각은 착각처럼 사라졌다. 다시 바라보면 평소의 선아현이었다. 유진이가 나랑 이야기를 많이 한다면, 그건 그냥 영어 때문일 거야.

“유진이의 마음을, 내가 설령 짐작하더라도… 아마 둘이 직접 이야기하는 게 제일, 빠를 거고. 래빈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지만….”

선아현이 난간에 느슨하게 팔을 기댔다.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세진이랑 문대도, 처음에는 엄청 많이 싸웠어. 사실은, 둘 다 서로를 걱정하고 있는데도. 나는, 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심 세진이 편을 많이 들었던 것, 같아. 나는 세진이랑 입장이 비슷하니까. 기다리는 것 말이야.”

아직 그들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어느 날이 선아현의 입에서 가만히 흘러나왔다. 스물하나, 스물둘. 익숙한 나이였다. 딱 그와 차유진 또래의 나이. 서로 서툴던 형들의 그때를 엿보는 심정으로 그는 조용히 선아현의 말을 경청했다.

“유진이랑 너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희는 이제 막, 맞춰가는 셈이니까. 그러니까 대화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지만 이것도 내가 넘겨짚는 것뿐이라고, 쑥스럽게 웃는 선아현을 따라 김래빈은 다시 걸었다. 걸음마다 다시 생각이 쌓였다. 능숙한 차유진, 친구가 많은 차유진, 무엇이든 자신만만하던 차유진, 신기루를 두려워하지 않는 차유진…. 그 위로 조심스럽게 선아현의 말이 덮였다.

‘어쩌면 유진이도 혼란스러울 거야.’

그 말을 따라 새로운 차유진이 생겨난다. 당황한 차유진, 어쩔 줄 몰라 하는 차유진, 서툰 차유진. 낯설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표정을 가다듬으면서도 손끝을 떨던 차유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선아현 형의 말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다음 물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형. 말씀하신 대로 제가 차유진을 아끼고 있고 차유진 역시 마찬가지라면, 왜 서로 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선아현이 그의 등을 가만히 도닥였다. 실은 우리 모두 그럴지도 몰라.

 

*

 

두 번째 신기루가 나타났다는 연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이번에 신기루가 나타난 곳은 근교의 유명한 놀이공원이었다. 그 이름을 액정 너머로 더듬다 그는 말을 골라 조심스레 답장을 보냈다.

[혹시 차유진을 제외하고 일을 진행하는 건 어렵겠습니까.]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알림이 뜨자마자 전화가 왔다. 박문대였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형. 전화 받았습니다.”

- 네가 무슨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럴 순 없어. 걔도 성인이고 우리 일원이니만큼 일방적으로 정보에서 소외시킬 순 없다. 알지?

“예. 저도 압니다. 그래도 가급적 차유진은 신기루에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번 일로 미루어볼 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래. 너도 걱정하니까 그렇겠지. 네가 그렇게 요청했다고 차유진한테 말해줄 수는 있어. 그래도 난 오지 말라고는 못 하겠고. 너야말로 같은 방도 쓰면서, 한번 직접 말해보지 그래?

“제가, 직접이요?”

그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너 혹시 차유진이랑 싸웠냐. 김래빈의 침묵을 묵묵히 기다리던 박문대가 조용히 물음을 던졌다. 선아현은 박문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말끝이 흐렸다. 선아현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서로의 내심이 다른 게 아니었다면 그걸 싸운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의견차가 있는 건 확실합니다만 싸웠는지는……. 별 건 아닙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제가 먼저 차유진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러면 곧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유진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벌써부터 패배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감대로 그는 차유진을 말리지 못했다.

‘그때는 김래빈 신기루 불러냈어. 지금은 열린 신기루 가. 저번 학교에 신기루 나왔을 때 나 아무 문제 없었어. 이번에 문제 생기는 정확한 이유 있어? 없으면 김래빈 나, 가지 말라고 못 해.’

차유진은 냉담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논리적으론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부글부글 끓는 마음에, 그는 약간의 복수를 계획했다.

  

 

“차유진은?”

자고 있어서 그냥 놔두고 왔습니다. 불퉁하게 말하면 박문대는 의외라는 듯 그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흠. 박문대가 목을 울렸을 때 김래빈은 혹시 형께서 한 소리 하실까 긴장으로 몸을 굳혔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준비는 다 끝났고, 걔 없이 들어간다고 문제 될 건 없지만. 깨고 나면 화낼 텐데?”

거기에 대해서는 김래빈도 할 말이 많았다.

“그러면 자업자득이라고 해 줄 겁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자는 습관 좀 고치라고 이제까지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고치지 않은 건 차유진 쪽이니까요. 그리고 낮잠도 적당히 자라고 했는데 지키지 않은 것도 차유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잘못인데 왜 저에게 화를 냅니까?”

저는 그냥 알람을 대신 맞춰주는 걸 그만두었을 뿐입니다. 마지막 말은 조금 쭈삣대듯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켕기는 점이 아주 없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유진은 그가 깨워줄 거라고 믿었겠지. 김래빈은 이를테면, 차유진의 신뢰를 살짝 저버린 셈이었다.

너희 싸운 거 아니라며. 박문대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던 류청우가 장난감 총을 들었다. 그가 방아쇠를 꾹 누르자 총의 입구로부터 비눗방울이 방울방울 뿜어져 나왔다. 여기저기 시험하듯 총을 쏴 보던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도 효과는 나쁘지 않은데? 오늘은 세진이도 있으니까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나는 아직도 지워야 할 업이 많아서, 오늘은 주변 정리하는 일을 할게. 이곳은 언제 와도 참… 정리할 게 많아서 큰일이다.”

정확한 원리는 몰라도 류청우는 비눗방울 총으로도 귀신이니 하는 것들을 잡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그저 입을 벌렸고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 듯 그를 배웅했다. 공중에 떠다니는 비눗방울을 한 무더기 남긴 채 하하 웃으며 청우가 사라지면, 옆에서 배세진은 고개를 젓고 이세진은 길게 하품했다. 어우, 놀이공원 지겹네요, 진짜.

지하상가와 놀이공원은 신기루가 단골처럼 출연하는 장소라고 했다.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여기 온다는 다른 사람들은 늦은 저녁 놀이공원의 화려하고 신나는 분위기에도 별 감흥이 없는 눈이었다. 그 속에서 이런 곳에 올 기회가 별로 없었던 김래빈만 이리저리 주의가 팔렸다.

“이런 데 와 본 적 없어?”

“한 번도 없는 건 아닙니다! 어릴 적에 조부모님과 함께 가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 데다, 그 후로는 거리도 멀고 몇 군데 없기도 해서 기회가 없었습니다.”

난 다 커서 왔더니 환상이 다 깨졌어. 놀이공원이라는 게 생각보다 낡고 허술하더라고. 박문대가 고개를 저었다. 박문대의 말에서 은연중 묻어나온 그의 과거를 눈치채지 못한 김래빈만이 슬그머니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다 같이 놀러 오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그건 괜찮을까요?”

“아. 그건 문제없어. 여기는 이런 거에 익숙하거든~. 자체적으로 접근금지 처리도 다 해줘서 오늘은 세진이도 할 게 없네?”

신기루가 깃들었다는 어트렉션 앞에는 말마따나 내부 시설 점검 중이라는 안내판이 커다랗게 부착되어 있었다. 캐슬 오브 판타지아. 촌스럽고 흔한 이름을 건너뛰면 안내 표지판에는 어트렉션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거울 미로. 과연 신기루가 생길만한 곳이었다. 이세진이 손가락에 걸린 열쇠를 휘 돌리더니 관계자용 출입문을 열었다.

“그러면, 자자. 출발할까요? 오늘도 어트렉션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운행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유원지의 안내멘트를 따라한 익살맞은 말과 함께 이세진이 물러나면 조명이 켜진 수많은 거울이 그들을 맞았다.

그는 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신기루의 입구는 그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주변으로 이세진의 부적이 드문드문 원형을 그렸다. 별다른 도구 없이 서로 다른 각도로 맞닿은 거울을 통해 수없이 복제된 상이 진을 완성하고 있었다. 거울이 쪼개는 건 부적뿐만이 아니었다. 여럿으로 나눠진 자신이나 박문대의 상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김래빈은 거울에 지나가듯 비친 붉은 빛에 어,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보았나 했는데 그 상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차유진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열려있는 관계자 출입문 너머로 차유진이 달려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온 것처럼 곱슬진 머리가 엉망이었다. 박문대 역시 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차유진 왔네. 생각보다 일찍 깼는데?”

농담처럼 덧붙여진 말과 함께 기다려줄까, 하고 넌지시 건네진 제안을 그는 고개를 저어 물렸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이대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다시 앞을 보면 좀 더 커지고 뚜렷해진 차유진 여럿이 거울 속에 있었다. 김래빈은 거울을 통해 잠시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성급하고, 뭐에 그렇게 화났는지 분에 찬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그는 신기루와의 경계로 앞장서 들어갔다. 점점 주변이 변해갔다.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벌리던 차유진의 모습 역시 흐려졌다.

  

 

여전히 밀도가 높은 세계였다. 수없이 많은 거울이 존재했지만, 공간의 왜곡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문대가 신기루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요한 거울미로 위로 꽃잎이 팔랑이는 나무가 솟아올랐다. 김래빈의 주변에서는 이미 곰팡이 핀 서고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쪼개진 거울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와 박문대와는 달리, 나무나 곰팡이 같은 건 거울에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의 거울에는 비치지 않는 환상 같은 세계.

“이번에는 빠진 사람은 없고.”

그 광경을 확인한 박문대가 고개를 주억였다.

신기루 내부로 들어와도 주변 환경이 딱히 변하지 않고 그들의 신기루가 그대로 드러난다면 그 안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없는 것. 저번에 들어 익혔던 내용을 그는 다시금 되새겼다.

“잘됐네. 할 이야기도 많은데 남은 시간 동안 대화나 좀 해보자고.”

박문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신기루의 낡은 캐비넷을 의자 삼아 걸터앉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는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연장자를 바닥에 두고 그 혼자 높이 앉을 수는 없었다. 박문대는 그가 캐비넷을 끌어당길 때부터 김래빈을 빤히 보고 있었다. 물리적인 접촉도 가능, 이라. 그의 중얼거림을 김래빈은 듣지 못했다. 그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박문대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죄해야 할 게 참 많았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연락드린다고 이야기해놓고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변명하자면 형들의 염려를 결코 모르거나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생각이 정리되었다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혼란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탓인데…”

“됐어. 너라고 일부러 그랬겠냐.”

줄줄이 이어지려는 그의 말을 손을 내저어 끊어낸 박문대는 안경을 소매 단으로 대충 문질렀다. 다시 안경이 얹힌 시선이 주변의 신기루를 쭉 훑었다. 그 자신의 것을 한 번. 김래빈의 것을 한 번. 샅샅이 위아래로 움직이던 눈동자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지다가 말 없는 결론이 한숨으로 튀어나왔다.

“하나씩 정리해보자. 지난번에 확인할 게 있다고 했던 건?”

“……확인은 했습니다.”

썩 만족스럽지 않은 결론에 눈썹이 슬그머니 처졌다. 지귀. 그 곡을 찾고 나서 그는 그 근래에 자신이 남겼던 모든 흔적을 뒤졌다. 물론 탐색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차유진의 자취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건 그 곡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신기루 역시 언제 제 의미를 드러냈냐는 듯이 잠잠했다.

“그런데 불완전한 형태라고나 할까요. 형, 아무래도 신기루가 제 기억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에 중요한 단서가 있는 것 같고요. 제가 차유진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뒷받침할 만한 근거도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만 그 후로는 어떻게 해도 그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죄송합니다. 형이나 차유진에게 명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건 찾지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무릎을 모아 안고 어깨를 옹송그리면 바닥에 나뒹구는 잡동사니에 시선이 가 닿았다. 비석, 석판, 죽간, 두루마리, 책, 레코드 테이프, LP, 디스크…. 인류가 만들어 낸 다양한 기록장치가 망가지고 파손된 채 널려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어떤 기억을 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잃어버린 기억도 저 더미 어딘가에 남아있을 텐데.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김래빈. 나지막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박문대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느슨하게 웃고 있었다.

“자책할 필요 없어. 네가 보여준 건 네 생각보다 중요한 단서니까.”

본래라면 그날 말해줬어야 했는데, 사정이 있어 그러지 못했지. 몸을 일으킨 박문대가 그에게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김래빈의 신기루가 갈라져 길을 내고 꽃잎이 그의 앞에 뚝뚝 떨어졌다. 흩날리는 꽃잎은 그의 머리에는 앉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를 대신하듯 박문대가 쪼그려 앉으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내가 네게 말하지 않은 게 많아.

“들어봐. 네가 기억을 뺏긴 것처럼 나도 신기루에게 뺏긴 게 있어. 심지어 난 두 개였다. 몸, 그리고 시간.”

그의 눈이 당황으로 커지는 걸 확인한 박문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사실 이 몸은 원래 내 몸이 아냐. 그날 사라진 실종자의 것이지.

“7년 전에, 너와 차유진 사이에서 그날 일어났던 일이 나와 내가 찾는 실종자, 그러니까 박문대 사이에서 그대로 일어났어. 그리고 너희와는 달리, 걔는 삼켜지고 나서 그대로 나오지 못했고.”

박문대의 이야기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본래 이름은 류건우. 나이는 서른. 정신을 차리고 보니 3년 전, 스물한 살 박문대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고 했다.

“삼켜지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현상이 그때부터 보였지.”

꽃이 흩날리고 언제나 푸른 하늘을 가진, 온화한 세계의 환상. 그 온건한 세계에서 박문대와 그를 집어삼켰을 때의 집념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 세계였다. 류건우, 혹은 류건우의 몸을 입은 박문대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단서는 기이한 환상뿐이었다. 이 사회에서 무리 없이 살아가기 위해 박문대의 이름을 빌린 류건우는 그때부터 그 세계에 신기루라는 이름을 붙이고 실종자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했다. 제게만 보이는 환상이라는 덧없는 단서에서 시작해 여기에 이르기까지, 듣기만 해도 실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그럼 다른 분들께서도 형께서 …그러니까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충은 알지. 직접 말한 사람도 있고 알게 될 수밖에 없던 사람도 있고. 보자. 차유진은 알려나? 걘 모르겠다.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는데 알려면 알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렇습니까….”

“그래. 아무튼, 적어도 내가 겪은 일이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라는 걸 얼마 전 너와 차유진이 알려줬지. 그 전엔, 솔직히 가끔은 박문대가 진짜 존재하는 사람이었나 싶기도 했고.”

슥슥. 박문대의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내가 기댈 수 있는 첫 사례야. 그 말을 들으니 서서히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그렇구나. 내가 아주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구나. 그에게는 딱 그만큼의 확신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서 덧붙여지는 말에도 이전만큼 긴장되지는 않았다.

“단서 맞춰가는 거야 이제까지도 줄곧 해왔으니 할만하겠지.”

“예. 제가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박문대는 소리 내어 웃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한 시간 동안 어디 한번 끝장을 내 보자고.

“미리 말하지만, 너희들이 무사한 건 천운에 가까워. 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추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정하자면, 왜 나랑 똑같은 일을 겪은 너희들에겐 아무 일도 없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지.”

항목은 셋. 박문대는 손가락 세 개를 쭉 빼어 흔들었다.

첫 번째. 너와 나의 차이. 두 번째, 박문대와 차유진의 차이. 세 번째, 나와 박문대, 그리고 너와 차유진 사이 관계의 차이. 말과 동시에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나갔다. 각 항목은 그가 보기에도 합리적이었다. 박문대는 술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첫 번째 항목도 그럴듯하지. 나는 그때부터야 신기루를 느꼈지만 넌 훨씬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두 번째도… 그래. 그때 박문대한테 차유진 같은 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휘말리지 않았겠지.

“셋 다 차이가 확연하긴 한데 마지막 걸 좀 자세히 볼까. 그때 우리한텐 이세진의 진이 있었으니까. 그 뒤 내가 그 진을 가지고 수없이 실험해봤는데 진 자체엔 전혀 문제가 없었어. 그렇다면 이세진의 진을 무시하고 신기루가 곧바로 차유진 그놈을 향할 만한 일종의 인과관계가 있고, 그게 우리가 제일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 단서는 잃어버린 기억에 있겠지? 하는 물음에 김래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과거에 저와 차유진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신기루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만 많은 기억 중에서도 굳이 그 기억이 사라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신기루에도 일종의 의지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신기루가 저에게 드러냈듯이요.”

“그런데 그게 차유진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러니까 왜 차유진인지는 아직 모르는 거고?”

“기억을 찾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서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계속 의혹은 있었으나 채 꺼내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모릅니다.”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니었다. 그는 손에 닿는 무언가를 갉작이듯 쥐었다. 그러자 그 주변의 신기루가 무겁게 울렸다. 신기루는 그의 행동, 감정, 생각에 반응한다. 차유진을 생각했을 때 신기루가 동요해본 경험이 있었는가? 예. 김래빈이 고민하다 내놓은 대답은 그랬다. 이미 여러 번의 사례가 있었다. 그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더라도 차유진과 신기루 사이에서 일종의 매개 역할을 했음은 분명했다. 일례로 박문대의 신기루는 차유진에게 그런 식으로 달라붙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주변을 맴돌더라도 일정한 거리 안으로는 들어간 적이 없다고.

“그 비슷한 생각, 나도 해본 적 있지.”

내가 없었다면 상대한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김래빈 곁에 다시 편하게 주저앉은 박문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일을 겪은 그만이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나랑 박문대도 제법 가깝게 지냈거든.”

그러나 박문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김래빈에게는 없는 게 있었다. 7년. 그만큼의 고뇌. 그 모든 걸 겪고 난 단단함.

“근데 그런 생각을 한다고 일어난 일이 바뀌진 않더라. 그러니 길게 빠져있진 마라. 그래도 너희는, 어쨌든 한 고비는 넘기기도 했고.”

차유진이 그런 능력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박문대는 그 말을 농담처럼 건넸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 없었다.

“김래빈?”

박문대가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박문대는 마음 편해지라고 한 이야기겠지만 그 말은 하필이면 그가 고민하는 지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차유진의 능력. 불. 신기루를 태우는 무엇. 그의 입이 고집스러운 선을 그렸다.

“저는 차유진이 그걸 최대한 안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 능력이요.”

그날 이후 신재현과 처용의 말을 곱씹으면 계속 같은 의문이 맴돌았다. 불이 항상 무언가를 태우는 존재라면, 이제까지 신기루가 차유진을 침범하지 못한 게 차유진의 그 능력 때문이라면, 그 불은 대체 무엇을 연료로 타오르고 있는 걸까. 그는 매일같이 생각했지만 어떤 답을 떠올려도 긍정적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차유진이 신기루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게 가장 안전한 방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원인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그러면 다시 잃어버린 기억으로 결론이 회귀했다. 그는 제 신기루를 뒤돌아보았다. 기억만 생각하면 그는 저 심층부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박문대의 시선이 그를 쫓았다. 그러다 가만히 또 다른 신기루로 옮겨갔다.

“너나 나나 저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있구나.”

박문대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둘은 각자의 신기루를 고요히 응시했다. 깜박, 깜박. 초록의 불똥이 군데군데 깜박였다. 김래빈은 팔을 겹쳐 고개를 기댔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신기루를 바라본 건 퍽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엔 계속해서 의심하고, 분석하고, 매달리기만 했다. 신기루는 그에게 적의가 없다. 이세진의 진 안에서 신기루를 꺼냈을 때 그 안에서 편안했던 감각을 김래빈은 여전히 기억한다. 하필이면 차유진에게만 위험했다.

저건 대체 뭘까. 그는 반복된 질문을 습관적으로 속에 담았다.

허상. 허구. 그림자. 이해할 수 없는 것, 꺼렸던 것, 한편으론 아름다웠던 것. 낡은 서고, 도서관, 아주 오래된…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문대가 갑자기 뱉어낸 말은 그로서는 통 맥락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상대를 의문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대신 박문대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그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뭐. 뭐든 찾으면 좋지. 근데 난 너도 아끼니까, 무리하면서는 하지 마라.”

가자, 하고 박문대가 그를 일으켰다. 그는 옷가지를 툭툭 털었다. 그의 손길에 맞춰 곰팡이들이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간만에 마음이 좀 편안했다. 그마저도 이어진 박문대의 말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넌 나가면 차유진 맞닥뜨릴 준비 하고.”

아, 맞다. 김래빈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차유진은 화 많이 났을까요, 물으면 박문대는 조금 더 힘을 담아 그의 등을 탁탁 쳤다. 정 안 되면 치고받고 해서 풀어.

*

나가는 길은 박문대가 앞장섰다. 신기루와 현실이 닿아있는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그림자는 두터워지고, 반대로 신기루의 형상은 서서히 흐릿해졌다. 이대로 나가면 차유진이 있겠지 싶어 김래빈은 신기루를 한 번 더 꼼꼼히 감추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트렉션의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배세진이 그들을 보더니 한가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그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차유진은 조금 떨어진 벽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서 있었다. 그동안 다듬은 것처럼 어느새 머리와 옷매무새가 말짱했다. 신기루의 입구를 진으로 완전히 봉하기 위해 교대하듯 어트렉션 안으로 들어가던 이세진이 김래빈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잠시 멈추어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아까보단 감정이 가라앉은 것 같으니까 둘이 잘 이야기해봐. 근데 오늘 저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 문대문대? 거의 한 시간 꽉 채웠던데? 나 너무 안 나와서 둘이 같이 봉인되어 버리는 줄 알았잖아~.”

이세진은 자연스럽게 박문대에게로 고개를 돌려 대화를 이었다. 이것저것. 별일은 없었어. 평온한 목소리가 말을 받는다. 그 목소리들이 어트렉션 안으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동안 고개를 든 차유진이 그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이세진의 말처럼 한층 차분한 얼굴이었다. 다만 낯설었다.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눈썹 역시 고요한, 평소의 차유진에게선 쉽게 볼 수 없는 그 웃음기 없는 얼굴이.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아까의 제 행동이 부끄러워져 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차유진이 급히 달려오는 걸 봤으면서도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고 신기루 안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던 건 유치한 화풀이였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귓가가 화끈거렸다. 그래서 김래빈은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본 차유진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리는 건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게 척척 다가온 차유진이 선포했다.

“이제 김래빈 나랑 이야기해.”

이 이상은 피할 수 없음은 그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는 형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배세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차유진이 더 빨랐다.

“핑계 안 돼. 형들에게 내가 이야기했어. 김래빈은 나랑 가.”

“그래! 나도 어차피 다른 애들 기다려야 하니까 그동안 얘기하고 와!”

배세진이 맞장구치듯 끼어들더니 그들에게 대충 손짓했다. 다 끝나면 연락하고. 차유진과 어떻게 이야기가 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걱정하는 기색 없이 퍽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핑계가 아니라, …그래. 가.”

잠시 항변하던 그는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을 생각이었다. 한 발짝 뒤에서 자박거리는 걸음 소리가 따라붙었다. 곧 퍼레이드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놀이공원의 스피커를 타고 발랄한 목소리가 안내를 읊었다. 그 안내를 따라 인파가 한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 흐름을 둘은 묵묵히 역행했다.

그들은 어느 구조물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외진 데다 음악 소리가 커다란 판넬에 한 겹 가로막혀 방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돌아보면 차유진은 약간 뚱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하지. 떠오르는 게 없어 멀뚱히 차유진을 응시하고 있으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나 안 깨우고 그냥 갔어?”

차유진이 던진 첫 질문은 충분히 그의 예상 범주 안에 있던 내용이었다. 사실은 답변도 얼추 생각해 두었다. 형들에게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건 네 생활 습관의 문제이며 널 꼭 내가 깨워줘야 하는 건 아니다 운운하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여러 번이니 거짓은 아니었다. 그런데 가라앉은 차유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덩달아 침착해진 속으로 그는 제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본래의 이유를 끄집어냈다.

“차유진 네가, 여기 오지 않았으면 해서.”

깜박. 주변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사위가 천천히 어두워지는 시각에 맞춰 공원 여기저기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구조물의 그림자로 어둠이 살짝 드리워졌던 차유진의 얼굴에 다시 빛이 닿았다. 차유진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미 그 답을 예상했던 것처럼, 차유진은 화를 내는 대신 그에게 다시 물었다.

“김래빈 저번에 설득 실패했어. 그거 foul이야. 그럴 정도로 싫어?”

그랬다. 저번의 신기루에 문제가 없었으니 이번 신기루도 문제없을 거라던 차유진의 논리를 그는 반박하지 못했었다. 당장 오늘도 그랬다. 그는 그들이 걸어온 방향을 되돌아보았다. 저기 거울 미로엔 아직 다 닫히지 않은 신기루가 남아있겠지. 차유진이 그들을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기루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차유진의 말이 옳다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중얼거렸다. 알아. 나도 반칙인 거. 그래도.

“오늘은 괜찮았다고 쳐. 그렇지만 앞으로 어떨지는 아무도 몰라. 확률은 장담할 수 없어. 그날도 그랬잖아.”

신기루가 차유진을 덮치던 그때도,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차유진은 놀러 간 것처럼 즐거워했고 그는 신기루의 법칙이나 골몰하고 있었으니까. 이세진의 실력은 믿음직스러웠으니 원래대로라면 위험할 확률은 지극히 낮았을 터였다. 그러나 김래빈의 신기루가 차유진과 예전부터 맺어왔을지도 모르는 관련성,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 작은 변수 하나가 모든 확률을 뒤엎었다.

김래빈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말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냐! 그대로 삼켜졌다면… 넌 못 나올 수도 있었어!”

신기루에서 박문대의 사정을 들었을 때, 그는 그게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박문대의 상황을 자신에게 이입해 상상해보았다. 만약 그때, 그가 조금만 더 제어에 서툴거나 차유진에게 능력이 없었거나 하는 식으로 뭔가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그래서 그대로 차유진이 삼켜졌더라면 자신은 과연 차유진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순간 김래빈은 오싹함을 느꼈다. 박문대의 7년이 얼마나 무거운 시간인지, 그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얼마나 두려운 일일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도 찾을 수 없었다면, 영영 그게 마지막이었다면. 몸서리쳐지는 상상이었다.

“위험하지 않아. 나 그거 handle할 수 있어. 김래빈 봤잖아. 신기루는 나 못 삼켜!”

차유진이 한 발짝 다가왔다. 마치 삼키려면 삼켜보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유진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신기루를 한 번 더 갈무리한 김래빈이 뒤로 물러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차유진에게서 불이 일렁이는 환상이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능력은! …뭔지 모르니까 자제하자고 형들께서 그러셨잖아! 내 생각에도 안 쓰는 게 나아!”

“몰라. 나 이거 control 못 해. Like passive skills, huh?”

차유진은 익살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익살맞은 건 동작뿐으로, 표정은 어쩐지 더 골이 났다. 조금 더 물러서려는 그의 어깨를 차유진의 손이 붙들었다. 김래빈. 도망가지 마. 나지막하던 목소리에 조금씩 감정이 얹혔다. 그는 그걸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신경 쓸 수 없었다. 불타오르던 차유진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잠을 이루기 어려운 밤마다 뱅글뱅글 돌아가던 기억이었다.

지귀. 그리고,

‘불은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힘이지요. 그게 시전자 자신이든, 다른 이든.’

신재현의 말에 겹쳐 울리는,

태우는 것이 너든 다른 이든 항상 경계하려무나.

처용의 뜻까지.

“그래도 쓰지 마. 너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신기루를 태우면 괜찮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차유진 너야말로 그 힘을 쓰는 게 위험하지 않다고 증명할 수 없잖아!”

그도 그의 말이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도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 얹힌 차유진의 손이 그의 것보다 체온이 높다는 걸 느낄 때마다, 차유진의 반짝이는 눈과 넘치는 에너지를 떠올릴 때마다 그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차유진은 불을 닮았다. 그에게 꼭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언젠가 그가 불로 화한다면, 차유진이 그 자신을 남김없이 태우고 나면 그 자리에는 뭐가 남을까.

김래빈은 그 자신이 또래 간의 의사소통엔 퍽 재능이 없음을 알았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필사적으로 차유진에게 가 닿았다. 시선으로나마 뜻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

퍼레이드의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근처를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활기차고 화려한 음악이 공간을 채우는 사이 둘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다른 세계의 것처럼 그들 사이를 메웠다가 천천히 다시 멀어졌다. 헷갈려, 김래빈. 중얼거린 차유진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대로 세수하듯 연거푸 아래로 쓸어내린다. 저녁이 되며 서늘해진 공기가 상대의 손이 사라진 어깨 위를 맴돌았다. 몇 개의 단어가 차유진의 입으로부터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상대가 지금 익숙지 않은 언어로부터 말을 골라내고 있음을, 차유진과 벌써 몇 달을 함께 한 김래빈은 알았다.

차유진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후, 하고 단번에 뱉어냈다. OK.

“김래빈 말 정리하면 이거야. 나는 신기루에 가까이 가면 안 돼. 능력도 쓰면 안 돼. 그럼 나 할 수 있는 거 뭐야?”

“…….”

“나는 그냥 김래빈 기다려? 언제까지?”

말문이 막혔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는 더듬더듬 답을 찾아 헤맸다.

“기억을 다 찾으면, 아마…”

자신감 없이 흐려진 그 말은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차유진도 알았다. 잃어버린 기억이 차유진의 완전한 안전을 장담할 수 있는가? 아니오.

“말이 돼? 김래빈 모순이야. 내 능력 위험하다면서 김래빈은 기억 찾겠다고 신기루 계속 들여다봐!”

“그거야, 너랑 나는,”

“Stop! 안 달라! 똑같아!”

결국 차유진으로부터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기세에 입을 다문 김래빈은 퍼렇게 날이 선 차유진의 눈으로부터 시선을 떨구었다. 이를 꽉 악문 턱을 지나, 그는 차유진의 손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딘가 치고 싶다는 것 마냥 힘이 들어간 주먹이었다. 손목을 따라 힘줄이 파르라니 섰다가, 천천히 다시 손가락이 쭉 펴졌다. 손을 쥐었다 펴는 그 움직임을 따라 조각난 영어단어들이 거칠게 떨어졌다. 썩 좋은 뜻이 아님은 어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화가 저를 향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그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문대 형 말마따나 한번 드잡이라도 하면 이 모든 게 잘 풀릴까 하는, 평소대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만큼 막막했다.

“김래빈은 뭐가 그렇게 무서워?”

전부 다. 그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신기루도, 차유진의 능력도, 지금 상황도. 김래빈은 언제부턴가 자신이 부쩍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시선이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졌다. 차유진이 신은 운동화의 앞코가 보였다. 반 발짝의 거리.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면 투명한 벽이라도 사이에 있는 것처럼 닿기 어려운 상대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모든 게 너처럼 쉽지 않아, 차유진. 이걸 너에게 일방적으로 이해해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니. 두 번째로 말이 끊겼다. 틀렸어, 김래빈. 지금 나 세상에서 김래빈 제일 어려워.

“나도 이거 싫어. 저번처럼 도망가 버리고 싶은데 참는 거야! 김래빈은 말 안 하면 모르는 바보니까!”

그가 말을 잃은 사이 차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차유진의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진다. 아니다. 점점 가라앉는다.

“…나 정말 김래빈 모르겠어. 나 김래빈 친구라고 생각했어. 좋은 파트너 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김래빈은 나 그렇게 생각 안 해.”

망설이듯이, 차유진의 손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까의 화는 어디로 보내버린 것처럼, 다시 마주한 차유진의 얼굴은 그가 읽어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얼굴이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차유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그가 천천히 물러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김래빈한테 나는 팀 아니야. 파트너? No way. 그러니 위험한 것도 힘든 일도 같이 안 하지.”

이제는 시간도 같이 안 보내고. 차유진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거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초조해져서, 그는 상대의 팔을 붙들었다. 차유진은 그에게 얌전히 잡혀 주었지만, 표정은 여전했다.

“그런 게 아냐.”

차유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어쩌면 유진이도 혼란스러울 거야. 선아현의 말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차유진을 오래 혼자 두었다. 혼자인 게 너무 익숙해서 혼자 신기루를 파고드는 게 그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고려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능력을 쓰지 말라고만 했다. 신기루에 너무 오래전에 노출되어서 알 수 없는 힘이 갑자기 생겼을 때의 불안이 어떤 건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나는 분명 너를 걱정해서 한 행동들이었는데, 그게 네게는 전부 야속할 일이었을까. 내 마음은 너에게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을까. 나는 그냥, 하고 겨우 말을 꺼내면서 김래빈은 자신이 했던 모든 언행이 결국 하나의 기원으로 수렴된다는 걸 깨달았다.

“너를 잃기 싫었어.”

벌거벗은 진심이 툭 흘러나왔다. 지나치게 날것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얼굴에 훅 열이 올랐지만 다시 주워 담고 싶진 않았다. 말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면 차라리 부끄럽더라도 솔직한 게 좋았다. 다만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서 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차유진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 주춤주춤 힘이 빠져나가다가 상대의 손에 다시 붙들렸다. 여전히 그보다 체온이 높은 손이었다. 그게 더 말해보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는 힘겹게 마저 입을 열었다.

“너를 아끼니까. 차유진 네가, 나한테는 특별했어. 그래서 너무 어렵고 소중하니까, 네가 위험한 건 싫은데, 그런데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자꾸 흘러가고…”

그는 서툶을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면접부터 발표까지, 중요한 자리에서는 전부 해야 할 말을 미리 준비해 왔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그럴 수 없었다. 말이 자꾸만 헛돌았다. 스물한 살이 되면 정말 어른일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전전긍긍하고 못난 모습이 한가득이었다. 형들처럼 스물여덟, 서른이 되면, 그러면 이런 일들도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김래빈은 서둘러 자라고 싶었다.

“김래빈 계속 말해봐.”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고개를 다시 들면 어느새 가까워진 차유진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어려운 것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순간 그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

“결단코 널 따돌리거나 하려던 건 아니야. 이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어서 초조했던 건 사실이지만 너랑 이전처럼 지내고 싶어서 그랬어.”

차유진을 내버려 둔 것처럼 된 건 그저 그가 하나에 열중하면 다른 걸 보지 못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던 탓이다. 신기루가 차유진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김래빈은 차유진을 신기루의 영역에 더 깊게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그건 차유진이 김래빈 외의 사람과는 공유할 수 없는 특별한 부분일 테니까. 그럴 때가 아닌데도 김래빈은 문득 궁금해졌다. 누군가에게 유일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면, 이런 건 평범한 친구와는 좀 다를까. 그 혼란이 그대로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너는 나한테 특별한데, 아니…, 오히려, 나는, 아무래도 널 특별하게 여기는 걸로 끝인 게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나도 너한테 특별해지고 싶어서…”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렸다. 이윽고 팡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형형색색의 빛이 그 구석까지 찾아들었다. 불꽃 놀이었다. 퍼레이드가 끝을 맺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색의 빛이 차유진의 얼굴로 번져 들었다. 잠시 할 말도 잊고, 김래빈은 그 색에 빠져들었다. 차유진의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기시감의 흔적이었다. 덜거덕. 빗장이 풀리는 환청이 들렸다. 그는 차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몽롱하게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열일곱 때부터 줄곧 네가…”

열일곱. 위화감이 잠시 입을 막았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차유진이 아까보다 가까웠다. 목과 턱 언저리에 그의 손이 닿아있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그의 뺨을 두어 번 문질렀다. 재촉하는 말은 없었지만 집요한 눈이 줄곧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투명하게 빛나는 눈으로부터 일렁이는 불의 환영이 다시 나타났다. 세계를 태울 것처럼 거대한 불꽃이 타올랐다. 그 아래 지금보다 어린 차유진이 서 있다. 그가 씩 웃었다. 이건 환영이 아니야. 김래빈은 그 순간 깨달았다. 기억이었다. 열일곱 때의 기억. 신기루에게 먹힌 줄 알았던 기억. 그 위로 스물한 살 차유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기억이 돌아왔어. 그가 속삭였다. 차유진이 의아한 얼굴로 갸웃했다.

“김래빈?”

‘래빈?’

먼 기억 속에서 어린 차유진이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Eugene Ignacio Cha. 그가 경쾌하게 스스로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낯선 공간에서도 아무런 불안이 없는 것 같았다. 김래빈은 선한 사람도, 재능 있는 사람도, 자신의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저마다 빛난다고 생각해왔지만 사람 자체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차유진이 양팔을 한가득 벌리고 자신만만하게 등을 편 채 빛을 이고 웃던 그때 기억이 떠오르면,

“나는 네가 항상…”

넘치듯이 고백이 흘러나왔다.

“…내 세계의 주인공 같았어.”

마치 맞춘 것처럼 다시 팡, 하고 불꽃이 터졌다. 그 소리가 방아쇠 역할을 했다. 신기루가 기억을 삼킨 게 아니었다. 기억을 숨긴 건 그 스스로였다. 한번 고삐가 풀린 기억은 무섭게 몸집을 불리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신기루 역시 그의 제어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희미하게 떠올렸다. 이럴까 봐 열일곱의 나는 애써 기억도 신기루도 외면했구나.

이제는 이미 늦었다. 신기루가 계속해서 몸집을 불렸다. 주변이 어둠으로 자욱했다. 서가의 높이가 끝을 모르고 치솟고 넝쿨이 서로 얽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신기루는 그대로 차유진을 삼킬 것이다. 그리고 배부른 짐승처럼 웅크려 사라져버리겠지.

신기루의 기운을 느낀 차유진이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보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열일곱 김래빈이 이해했던 신기루의 규칙을 따라 그는 팔을 뻗어 일정한 방식으로 신기루를 감아 끌어당겼다. 몇 년 전의 김래빈은 신기루와 기억을 저 구석에 처박아두는 걸로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다시 차유진과 재회하게 될 줄은 모르고.

멀리서 흐릿하게, 달려오는 박문대 일행이 보였다. 박문대가 있었으니 신기루의 기척을 느꼈을 터였다. 그는 잠시 박문대에게 시선을 두었다. 형. 우리가 세운 가정은 전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전할 방법이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영민한 그라면 금방 추론해낼 수 있으리라. 그게 그에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차유진을 향하던 신기루의 방향이 서서히 바뀌었다. 이제 그에게 쏟아질 일만이 남아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김래빈은 제게 여전히 닿아있는 차유진의 팔에 손을 얹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차유진. 그 능력은 제발 쓰지 마. 너 스스로를 다 태워버리면 안 돼. 부탁이야. 나는 돌아올 거니까 형들 말 잘 듣고.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너는 이 결정에도 화를 내겠지. 벌써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했다. 그의 예감이 맞았다. 신기루가 차유진을 노리게 된 건 다 그의 탓이었다. 기억하지 못했던 열일곱, 그때 그가 차유진을 지목했다. 그러니 이건 오로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더 늦지 않게 떠올릴 수 있어서. 

그는 제게 얹어진 차유진의 팔을 떼어냈다. 그리고 힘껏 밀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김래빈은 제가 차유진을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은 알았다. 상관없었다. 아주 약간의 틈만 벌리면 되니까. 

그가 만든 작은 틈 사이로 신기루가 물밀듯이 제 몸을 구겨 넣었다. 순식간에 차유진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김래빈!!!!”

그게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다. 그를 붙든 신기루가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모든 낡은 것들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점점 더 아래로,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

이 세상 어딘가 인간의 감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 편지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눈을 뜨면, 그는 신기루의 심층부에 서 있었다.

열일곱의 기억을 받으면서 김래빈은 눈이 트였다. 이제 그는 이 세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풍경처럼 보이는 사물들을 헤집으면 이야기가 있었다. 온 이야기들이 각각의 밀도를 가지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잊힌 이야기, 읽히기를 바라는 이야기, 전해지지 못한 이야기와 감정들이 거대한 서고를 이루고 있었다. 

세계의 무게가 그를 눌렀다.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차유진을 노리던 신기루의 고리는 그가 대신 잡아먹히면서 끊어졌다. 이제는 나갈 길을 찾는 게 관건이었다. 할 수 있어. 그는 그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신기루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억이 살아나니 이전보다 신기루를 읽어내기 쉬웠다. 그가 정해진 순서대로 서가를 열고 틈을 비틀면 신기루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익숙한 줄거리였다. 김래빈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의 손을 잡고 놀러간 도서관에서 발견한 동화였다.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 편지들이 모이는 곳. 그곳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하나둘 쌓이다가 갈 곳 없는 사연들이 어느 한 곳에 또아리를 틀게 된 것이 시작이 아닐까, 추측할 수는 있겠지요. 사연은 사연을 끌어당기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 닿지 않은 편지들은 하릴없이 많아 자그마한 또아리로 시작했던 그곳은 점차 커져 몇 개의 장서관을 가진 공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운 내용이어도 어린 그는 그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그는 그 나이부터도 제 양육자가 조부모라는 점에 주눅 들지 않았지만, 어버이날에는 받는 사람의 주소가 적히지 못한 카드가 꼭 한 통씩 쌓였다. 결국 하나둘 버리게 된 그 카드도 어딘가 갈 곳이 있다고 믿는 건 어린 마음에 꽤 위안이 되었다. 

그 책은 찾는 사람이 그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 같은 책을 뽑아 들고 후- 하고 입김을 불면, 도서관 창으로 드는 햇빛을 따라 먼지가 반짝이며 흩날렸다. 그 주변의 책들도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것처럼 책등과 책장이 빳빳했다. 어린 김래빈은 그 모습을 눈여겨보며 읽히지 않는 이야기들이 모이는 장소를 상상했다.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 편지들이 모이는 것처럼 이야기들도 어딘가에 모이지 않을까. 그러면 그 곁에는 하나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어렸던 그는 그게 이상한 줄도 몰랐다.

이상함을 느낀 건 그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부터 김래빈은 신기루를 인지했다. 그는 누나의 충고를 잊지 않았지만 이미 이야기가 이야기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그가 자라는 만큼 신기루도 점점 더 자라났다. 환상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때로는 이야기 속의 화자들이 유령처럼 공간을 돌아다녔다. 그 광경은 퍽 경이로워서 의식하지 않으면 그 세계로 주의가 자꾸만 기울었다.

 

옷장이나 서랍장, 문 틈새 속 어두운 곳에는 빼꼼이가 살아. 그들은 오래된 가구를 좋아하지. 분명 옷장 문을 닫았는데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려있거나 서랍장을 밀었는데 다 안 닫히고 틈이 벌어질 땐 빼꼼이가 거기 살고 있다는 뜻이야. 그들은 인간 세상을 좋아하지만, 강한 빛에 쏘이면 먼지덩어리가 되어버려. 가끔 서랍장을 확 잡아 뺐는데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커다란 먼지덩어리가 나왔다면 넌 빼꼼이의 시체를 본 거지.

 

그의 옆에서 곰팡이를 닮은 까만 덩어리들이 굴러다녔다. 더 내부로 들어갈수록 보다 온전한 형태의 서가와 기록물이 그를 맞았다. 그는 손을 들었다. 신기루로부터 만들어진 등불이 그 손에 걸렸다. 어두운 초록색의 불빛들이 모여들더니 깜박깜박 공간을 비추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면 수많은 서가로 이루어진 층들이 겹을 이루며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의 신기루는 이야기들이 모이는 거대한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도서관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가 알렉산드리아라고 했었나.’

김래빈 도서관 좋아하니까 그 도시 고를 줄 알았어. 김래빈은 차유진이 축제날 그의 작업실에 놀러 와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후 그는 개인적으로 그 도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찾아보았다. 거대한 제국과 제국 황제의 이름을 따 몇 개고 건설된 도시, 그중 가장 번성했던 곳. 모든 지식이 그 도시로 흘러들었고 거대한 도서관이 세워졌으며 전 세계의 학자가 그곳을 선망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도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는 발끝에 걸리는 것들을 밀며 걸음을 옮겼다. 음유시인이 썼을 법한 거대한 두루마리가 서고의 구석으로 굴러갔다.

 

꿈들이 전해준 이야기 중에는 계속해서 악몽을 꾸는 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꿈들의 왕은 깃털이 검은 악몽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자꾸 그 남자에게 찾아가니. 그러자 악몽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야. 그가 우리를 부르는 거지. 그 말을 들은 그는 그 남자가 궁금해져서 그의 꿈에 들어갔다. 그러나 실수였다. 남자는 그를 붙들었고 그를 찾으러 온 다른 꿈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남자의 꿈은 점점 넓어졌지만 그 꿈 안에 갇힌 다른 꿈들은 조금씩 부패해갔다. 그는 남자가 인간 외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없이 꿈을 삼키는 커다랗고 검은 뱀. 그리고 그 뱀은 그대로 세계가 되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읽어달라고,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 달라고, 서서히 잊혀 간 모든 이야기들의 염원이 공간을 스산하게 맴돌았다. 우리에겐 주인공이 필요해. 이야기들이 와글거렸다. 네가 그를 주인공으로 명명했잖아.

“불가능해. 여기와 차유진의 연결은 끊어졌어. 내가 끊었어.”

박문대가 신기루라고 불렀던, 이 공간의 구멍은 그가 억지로 당겨 봉합하면서 완전히 닫혔다. 연결이 끊겼으니 이제 차유진은 신기루를 느끼지 못할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었다. 차유진과 신기루의 인연은 그로부터 비롯된 게 맞았다. 그러나 그 능력만큼은 그가 열일곱의 기억을 찾았어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신기루를 감각하는 차유진의 직감 역시 타고난 것일지도 몰랐다.

김래빈은 책장을 닫고 두터운 커튼을 내렸다. 그러면 이야기들의 와글거림은 점점 먹먹해지다가 이내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인생을 되짚었다. 여덟 살, 열세 살, 열다섯 살을 지나 열일곱 살이 된 김래빈은 신기루에 숨 쉬듯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때 알았던 출구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신기루에 눈 돌리고 살았던 4년의 세월 동안 이곳은 미로처럼 꼬여버렸다.

 

시한부가 된 남자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다. 그건 별의 시계였다. 하나의 별이 태어나고 죽는 시간을 가늠하는 시계. 그들이 살던 시간 축은 아직 인간이 요정을 볼 수 있고 짐승이 말을 하며, 신비가 경이로, 그러나 당연하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그 시대에선 별에 소원을 비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별들은 소원을 먹고 자라 그 별이 죽을 때면 자신이 먹었던 것 중 가장 아름답고 간절한 소원을 찾아 이루어준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 시계가 아이에게 되도록 오랫동안, 삶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남자가 시계 안에 넣은 것은 얼마 전 지상에 떨어진 죽은 별의 사금파리였다.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 이 별의 시간을 쫓아 이 시계는 움직일 것이고 아이는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며 매일 별에게 소원을 빌 터였다. 비록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만을 기다리는 삶이라도, 남자는 아이가 조금 더 오래 살기를 바랐다.

 

그는 책장을 덮었다. 끈으로 책을 묶어 봉하면 내부에 펼쳐졌던 밤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두운 서가로 변했다. 박문대는 잃어버린 지인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7년을 살았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신기루가 그에겐 이 이야기의 별의 시계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저곳으로부터 누군가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 힘든 과정을 지극히 낮은 확률을 믿고 견뎌야 한다면 그건 희망일까 기만일까.

“그래도 나는 아직 희망을 믿어.”

김래빈은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어둡고 그는 배가 고프지도, 졸리지도 않아 무엇으로도 기준을 삼을 수 없었다. 그는 박문대를 본받아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마치 핸드폰 시계 때처럼 손목시계의 바늘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찾다가 그는 이세진의 말을 떠올렸다.

‘이 진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 두 개의 진이 복합적으로 얽힌 방식이야. 하나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걸 막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혼의 좌표를 일정한 시공간에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거랄까.’

김래빈은 상황을 이해했다. 여기에는 이세진의 진을 설치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신기루 내부의 시공간은 외부의 시공간과 다른 흐름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너무 왜곡되어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신기루에서 빠져나왔을 때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있거나 과거로 돌아가 있다면, 그는 박문대처럼 그 상황에 훌륭하게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비록 일방적이지만 차유진과 약속하기도 했고.’

그 바보가 절 찾겠다며 그 힘을 써버리기 전에는 나가야 했다. 그는 다시 신기루로 침잠했다. 규칙을 알면 분명 비틀어 출구를 열 수 있다. 그건 분명했다. 다만 신기루의 심층부는 얕은 부분보다 훨씬 세계가 촘촘했고, 밀도가 높은 만큼 그에게 더 깊은 이해를 요구했다. 세계를 이룬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를 연민하지 않았느냐고, 너라도 우리를 읽어달라고 그를 꼬이는 말들이 들려왔다.

김래빈은 신기루에 완전히 동조해버리면 그때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세계는 낱낱이 파헤쳐 이해하되, 그 자신은 세계에 흡수되지 않고 스스로를 유지할 것.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에 홀려 그 속에 안주하고 싶을 때마다 그는 바깥 세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쌓은 기억이 그를 유지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그가 마주쳤던 좋은 어른들, 소수의 또래들. 몇 번이고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유년기로부터의 목록을 쭉 따라 내려오면 목록의 가장 마지막에는 형들과 차유진이 있었다.

‘김래빈!’

기억 속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그 이름을 따라 그는 서서히 그 자신을 재구성해가기 시작했다. 김래빈. 스물한 살. 실용음악과 작곡 전공. 가족관계는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본가는 강원도.

‘정신 차리자 김래빈.’

그는 자기 뺨을 착착 내리쳤다.

그러고 보니 차유진은 그의 본가에도 놀러 올 뻔한 적이 있었다. 추석 때였다. 명절이라고 기숙사생들이 하나둘씩 내려갈 때 차유진은 그럴 내색이 없었다. 주말에 다른 공휴일까지 겹쳐 시간표만 잘 짰다면 일주일은 쉴 수 있을 때여서 외국으로 나간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도 그랬다.

‘미국 추석 없어. 부모님 안 쉬어.’

이유를 묻는 말에 차유진은 발을 까닥이며 그렇게 답했다.

‘작년에는 추석 더 짧았잖아. 그럼 기숙사에 내내 있었어?’

‘작년엔 문대 형 집 있었어!’

그럼 우리 집 올래? 김래빈은 그렇게 말할 뻔했다. 조부모님께 먼저 허락받지 않고 무작정 친구를 데려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임을 그 순간 상기하지 않았다면 말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결과적으로 차유진은 데려갈 수 없었다. 그의 조부모는 손주의 친구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라는 태도였지만 집안에 일이 있었다. 손님을 받기엔 적절하지 않을 때였다. 결국 김래빈은 강원도에서, 차유진은 박문대의 집에서 추석을 보내게 되었다. 강원도로 혼자 내려가는 그를 배웅하러 차유진은 학교 근처 전철역까지 나왔다.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가는데 뒤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김래빈!!!’

차유진이 개찰구 근처 허리쯤 오는 칸막이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손나팔을 만들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죄다 차유진을 돌아봤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채 바라보니 차유진이 그에게 이리 오라는 듯 팔랑팔랑 손짓했다. 무슨 일이야, 하고 다가가면 차유진이 손바닥을 그의 쪽으로 내밀었다.

‘김래빈 손!’

그가 강아지인 마냥 부르는 소리에 차유진은 지금 한글이 서툴다, 되뇌며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작은 초콜렛 과자를 꺼낸 차유진이 키득거리며 그의 손바닥을 뒤집고 그 위로 과자들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강원도 버스 타고 몇 시간 간다고 들었어! 그동안 먹어.

그는 아무것도 없는 손을 괜히 쥐어 보았다. 그리웠다.

김래빈. 환청이 들렸다. 응. 그는 무심코 대답하며 어느 때의 부름일지를 상상했다. 열일곱 살의 차유진은 그를 래빈이라고 불렀는데 스물한 살의 차유진은 꼬박꼬박 김래빈이라고 성을 붙여 불렀다. 한국 사람들 친하면 그래! 그게 이유였다. 차유진은 가끔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그래도 그는 차유진이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걸 썩 싫어하지 않았다. 차유진이 이름을 부를 때면 항상 느낌표가 세 개쯤 붙어야 할 것처럼 풍부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불리는 건 그의 이름인데 꼭 차유진이 온 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김래빈!!!”

그래. 저렇게.

환청처럼 다시 이름이 불렸다. 아니. 그게 정말 환청인가?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환청이 아니었다.

“차유진?”

설마, 하면서도 그는 대답을 돌려주듯 차유진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신기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그의 뺨을 간지럽히며 떨어졌다. 그는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거멓게 바스라지는 가루들이 손등에 묻어났다. 그는 이런 걸 본 적이 있었다. 차유진의 곁에 다가가던 신기루가 꼭 이런 모양새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점점 더 많은 조각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재가 흩날렸다. 세계가 붕괴하고 있었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소리가 저 멀리 들렸다. 미쳤어. 차유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있는 곳은 신기루의 심층부였다. 거기까지 불길이 닿을 만큼 신기루를 태우는 데 어느 정도의 불이 필요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가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그 능력은 쓰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차라리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이었다. 넝쿨을 따라, 서가를 태우며 불이 서서히 옮겨붙고 있었다. 등을 들지 않아도 세계가 환했다. 틈 없이 짜였던 세계의 구조가 불에 타 사라져 듬성듬성 해체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드러났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길이었다.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그 위를 걸었다. 현실로, 조금 더 현실로.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까워질수록 불은 희고, 또 푸르게 변해갔다. 현실에 맞닿은 경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상대를 발견했다. 

온 사방에 불을 일으키고 있는, 차유진이었다.

그를 확인한 차유진의 눈썹이 확 치켜세워졌다. 그러자 불이 더 커졌다. 좌우의 신기루가 불타면서 경계가 넓어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 사이로 차유진이 성큼 한 발을 디뎠다. 기세가 흉흉했다. 팔을 뻗어 그를 붙든 차유진이 우악스럽게 그를 현실로 끌어냈다. 평소와 달리 힘 조절도 잊었는지 팔이 아플 정도였다.

분명 잔소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연한 얼굴로, 그는 어떤 말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차유진을 말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래빈 맘대로 하는 거, Alright, 괜찮아. 상관없어! 이제 나도 맘대로 할 거니까!!!”

차유진이 울고 있었다. 인상은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화난 것처럼 찌푸린 채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럴 때마다 불이 점점 더 커졌다. 정말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것처럼, 신기루라면 그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을 것처럼. 

차유진이 그를 숨이 막힐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눈물을 닦아줄 새도 없었다. 내가 혼자 싫다고 했어. 그런데 김래빈 사라졌잖아. 나 또 혼자… 김래빈 진짜 바보야. I'll gonna burn all these fucking things…. 가지 마. 다 태워버릴 거야. 뭉그러진 말의 토막들이 헐떡이는 목소리 새로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차유진.”

그가 이름을 부르면 끌어안은 팔의 힘만 더 세졌다.

그를 태우지 않는 불이 그의 몸에까지 옮겨붙었다. 그의 세계가, 등 뒤에서 무너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김래빈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차유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차유진은 그가 또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를 놓지 않았다. 품 안의 그를 더듬다가, 헛손질하는 것처럼 그의 옷깃을 쥐었다가, 다시 온몸의 무게를 실어 매달려왔다.

“알았으니까, 나 돌아왔으니까, 이제 그만 해. 차유진.”

신기루는 이미 반도 넘게 사라졌다. 그도 현실에 완전히 발붙여 섰다. 그를 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이 이상은 불필요한 소모였다. 달래듯이, 그는 상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멈칫했다.

“차유진…?”

차유진의 불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도 주변이 뜨거웠다. 불 때문이 아니었다. 차유진에게서 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저를 안고 있는 팔을 두드렸다. 여느 때처럼 얇게 입은 옷차림 너머로 열 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상대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침묵이었다. 그는 차유진을 흔들었다. 힘이 빠진 장신의 몸이 그에게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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