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을 사르며 돌이켜 널

차유진 side 외전


김래빈은 난제(難題)다.  

사전에서 ‘난제’의 뜻을 찾았을 때 차유진은 이거다 싶었다. 최근의 김래빈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로 난제보다 더 어울리는 게 없었다. 김래빈의 이름처럼 곡선 하나 없이 직선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도 꼭 맞춘 것 같았다. 단순하고도 어려운, 김래빈 그리고 난제. 그 딱딱한 직선만으로 이루어진 두 단어를 연습장에 나란히 쓰면서 차유진은 우스갯소리도 되지 못할 엉뚱한 상상을 했다. 혹시 한국에서는 뜻이 복잡하게 꼬인 단어일수록 일부러 직선만을 쓰나, 하고.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얼굴을 문질렀다. 

“헷갈려, 김래빈.” 

그를 온통 혼자 내버려뒀던 주제에 마치 자기가 남겨진 것처럼 매달리는 눈빛을 하는, 알 수 없는 김래빈. 

김래빈이 원래부터 난제였던 건 아니었다. 차유진이 평소에도 감이 좋았던 것이나 미국부터 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유형을 겪어왔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김래빈은 본디 어렵지 않은 사람이었다. 인상이 강해서 허술하게 감춰져 있을 뿐 김래빈은 표정으로, 행동으로, 또 눈빛과 시선을 통해 정직하게 읽힌다. 만난지 얼마 안 된 차유진이 김래빈의 눈빛과 눈동자의 움직임, 또 눈꺼풀의 깜박임 사이에서 알아온 시간에 비해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마찬가지로 차유진은 김래빈이 그에게 가진 호감도 쉽게 알아차렸다. 

‘김래빈 내 눈 좋아해!’ 

‘그야 네 눈은 형태나 색감이 미학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훌륭한 편이고, 굳이 좋아한다와 싫어한다로 나누자면 난 네 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정말 너무나도 빤히 보였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눈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하필이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자신에게 가진 호감의 정도를 쉽게 읽어내는 차유진의 눈에, 그렇지 않아도 읽기 쉬운 상대가 눈을 마주치는 것도 꺼려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김래빈은 읽어달라고 그 자신을 들이민 셈이었다. 

그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얇은 가림막 너머로 전해지는 김래빈의 기척을 숨죽여 더듬었다. 작은 딸각거림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펜이 종이를 긋는 소리와 작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김래빈의 일상은 단조로워서 그 단순한 단서만으로도 그가 무얼 하고 있을지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그 소소한 소리를 등 뒤에 두고 차유진은 돌아누웠다. 특색 없는 기숙사 벽을 시야에 두고 가만히 숨을 죽이면 등 뒤에서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오는 신기루가 느껴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만큼 희미했지만 들쭉날쭉하고 정제되지 않은 기운이었다. 그가 위로랍시고 의도적으로 흘려보냈던 신기루는 이것보다는 조금 더 격식을 차리는 모양새였다. 아마 김래빈이 무의식중에 흘려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신기루가 유기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유진은 그 차이를 퍽 세심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는 제 뒤에서 넘실거리는 신기루를 감각했다. 신기루가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신경이 교묘하게 곤두섰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신기루가 제 주변을 맴돌다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신기루마저도 김래빈다웠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그치지 않고 그에게 접촉해오는.

신기루든 김래빈이든 역시 나를 좋아하는 게 맞아. 여전히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을 더듬어 돌아누우며 그는 의기양양하게 확신했다. 노트북을 낀 채 웅크려있는 실루엣이 가림막 너머 저만치에 어른거렸다.

'게이는 아닌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무례한 걸 알면서도 조금은 교만하게. 그는 김래빈을 가늠했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보내는 호의보다는 좀 더 복잡하고 성애적 표현이라기엔 살짝 담백한, 김래빈이 보내는 그 호감이 곤란하게도 싫지 않다는 걸 아직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을 때였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 그는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세상에서 김래빈이 제일 어려워."

분명 처음에는 낡은 아파트 411호를 공유할 또래가 생겼던 게 반가웠을 뿐이었는데.

한국에선 눈이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지. 그의 할머니는 백 마디 말보다 그 사람의 눈이 더 많은 걸 말해준다고 했다. 김래빈의 눈빛은 백 마디의 말로 바꾸면 그 백 마디가 전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처럼 투명했다. 그 눈빛을 투과하면, 그 속에는 단순하지만 그만큼 깊고 진지한 김래빈이 들어있었다. 신기루를 기반으로 두었던 관심이 김래빈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호의로 바뀌는 것도 금방이었다. 

김래빈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차유진처럼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그와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사람은 다 알았다. 김래빈의 동기 일부, 그가 일하는 학교 도서관의 사서, 그리고 형들. 김래빈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어디나 알음알음 존재했다. 탁월한 외모 때문이든,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매너 때문이든, 아니면 어디서든 눈에 튀는 그 태생적인 존재감 때문이든 그는 남들의 시선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가끔 이해하기 어렵게 굴기는 해도 김래빈처럼 누군가를 볼 때 기분 나쁜 관찰도, 도 넘은 평가도, 부담스러운 기대도 없이 담백하고 곧은 시선을 보내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는 걸. 

그는 김래빈이 캠퍼스의 길목에 멈춰 벽이나 게시판에 붙은 대자보를 읽는 걸 종종 지켜보았다. 벽에 붙은 것이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고 바삐 걷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바쁠 때나 한가할 때나 꼭 빠짐없이 대자보의 제목부터 발의자까지를 꼼꼼히 눈에 담았다. 간혹 가방을 뒤져 꺼낸 펜으로 그 구석에 ‘동의합니다’나 ‘응원합니다’ 따위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래빈 그거 왜 읽어?’ 

언젠가 그가 물었을 때 김래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대자보는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쓰는 글이니까. 그 글을 게재하기까지의 용기와 결단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가급적이면 전부 읽고 있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대자보를 읽을 때의,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그 눈에 어리던 고요한 빛을 차유진은 기억한다. 읽어달라고 쓰인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훑던 그 부드러운 눈빛이 고스란히 그에게로 향하던 그 순간. 

그와 김래빈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진지함을 머금고 있던 눈빛이 차유진을 보는 순간 언뜻 누그러진다. 눈썹이 난처한듯 아래로 내려앉은 곡선을 그리고, 길게 뻗은 눈꼬리가 가만히 웃음을 머금었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눈동자가 고요히 그를 비껴갔다가, 그러다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올린 그가 시선을 내리깔면 속눈썹이 무심하게 그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왜. 더 할 말 있어? 차유진 너 다음 수업 있다며. 그러다 너 또 늦는다.'

차유진은 그제야 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양 받았던 시선인데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장면인데도. 제게 향했던 그 눈빛이 불현듯 아까워져서. 

'마음에야 진작에 들긴 했는데...'

학교 주변 패스트푸드점에서 살짝 식어 짠 맛이 도드라지는 감자튀김을 입에 물고 질겅이며 차유진은 기어이 인정했다. 어쩌면 자신도 김래빈을 친구 이상으로 제법 신경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수업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김래빈의 눈 속에 그가 그 자신으로 담기는 순간이 좋았다. 그 시선 속에 저를 향한 희미한 찬탄이나 온기가 담길 때면 더더욱. 어깨에 팔을 걸고 상대를 끌어당기다가 문득 어깨가 아니라 그 허리를 감아 안고 싶어졌을 때 차유진은 간만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가 김래빈을 두고 하는 상상 중에선 온건한 축에 속하게 되리라는 것도 모른 채. 

제 속을 자각하고 나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그는 이런 데서 망설여본 적이 없었다. 차유진은 제멋대로 김래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른 누군가의 선을 건드리지 않을만큼 예의바른 거리, 가끔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중하게 때로 엉뚱하게, 그치지 않고 저를 두드리는 그를 제 선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을 참지 않았다. 

낡은 아파트의 411호, 김래빈의 첫 술자리, 전공 과제를 핑계로 놀러나간 도시 언저리, 한강, 학교 축제, 그리고 그의 작업실... 

김래빈이 차유진을 보는 만큼 그 역시 김래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당겨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일에 웃고 즐거워하고 감탄하는, 남들은 잘 모르는 김래빈이 보였다. 그 자잘한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모을수록 상대가 점점 더 특별해졌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걸 넘어, 차유진은 김래빈이 욕심이 났다. 더 많은 걸 보여주고 더 즐거운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와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늘어났다. 김래빈은 그가 이전에 어울리던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지만,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조금만 크게 움직여도 팔꿈치가 부딪히고 방음시설로 온통 조용한데 그의 목소리만은 뚜렷이 울리던 그 공간에서, 웃고 있던 김래빈과 오래 시선을 마주하며 차유진은 그와 김래빈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래빈이 난제가 되어버린,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  

‘억울해.’ 

차유진의 마음이 속삭였다. 

‘김래빈은 나 좋아하잖아.’ 

그는 손을 뻗었다. 김래빈의 뺨이 닿으면 그의 손끝이 그 위의 점을 스치듯 지나갔다. 김래빈은 멀뚱히 서 있었다. 그가 얼굴을 만져도 괜찮다는듯, 그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듯. 무방비한 믿음이었다. 그럴 때면 김래빈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났다가도 결국 주먹 쥔 손의 힘을 풀었고, 답답해 발을 구르면서도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채 발산하지 못한 분함이 서서히 누그러지면 그 자리를 흐릿한 슬픔이 채웠다. 

“나 김래빈 친구라고 생각했어. 이제 좋은 파트너 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김래빈은 나 그렇게 생각 안 해.”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던질 때마다 마주한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제가 좋아하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데도 차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신기루가 끼어들면서 밀려나고, 배제당하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김래빈이 점차 그가 모르는 사람처럼 흐릿해지는 일을 겪었던 그에게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상대의 반응은 오히려 기꺼웠다. 

차유진은 언젠가 농담처럼 했던 말을 떠올렸다. 김래빈의 생각 On-Off 스위치. 김래빈은 여전히 생각이 너무 많았다. 신기루만이 둘 사이를 연결하던 시절은 예전에 지나갔다. 둘 사이에는 신기루와는 별개의 시간, 기억, 감정과 추억이 쌓였다. 그런데 김래빈은 그걸 모른다. 그러니 그와 차유진 사이에 여전히 신기루를 둔 채 옛 기억을 쫓는 거겠지. 잃어버린 기억. 그가 예전에 만났다고 주장하는 열일곱의 차유진.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못하면 그와 차유진의 사이가 그대로 끊어질 것처럼, 미안함과 부채감 같은 걸로 그 자신을 꽁꽁 숨긴 채. 

차유진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신기루가 설령 정말 그에게 위험하다고 해도 그 이유로 차유진이 그를 내버려둔 채 거리를 두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면, 김래빈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바보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네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가 김래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사실은 저 한마디가 다였다.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토로여도 괜찮았다. 어쨌든 입을 다무는 것만 아니면 좋았다. 차유진은 이제까지 그가 신기루를 보지 못해도,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해도 당당했다. 그에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김래빈도 제게 아무렇지도 않게 신기루에 관한 일들을 털어놓았으니까. 그렇지만 김래빈이 선택한 길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김래빈을 바라보며 초조해하는 것 외에는. 

마치 김래빈이 그를 뒤에 홀로 남긴 채 신기루 속으로 점점 더 혼자 사라져갈 것처럼.  

사실 그는 박문대의 문자를 받았을 때 조금 기대했다. 도시의 놀거리에 익숙하지 않은 김래빈이니 놀이공원의 풍경도 즐거워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기분이 누그러진 사이 이번 신기루가 그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면 여태껏 삐걱대는 둘 사이를 풀어내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 논리로 밀린 김래빈이 심상찮은 기색을 보였을 때에도 차유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러지 말아야 했을까. 

차유진이 불안한 예감에 눈을 떴을 때 그를 맞이한 건 늦었을 게 분명한 시간이 떠 있는 그의 휴대폰과 문자 한 통 남기지 않고 먼저 가 버린 김래빈의 빈 자리였다.  그 뒤부턴 꼬이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이세진에게 연락해 신기루가 나왔다는 구체적인 장소의 정보를 얻어 달려갔지만, 김래빈은 야속하게도 단 한 번 그를 돌아보고는 박문대와 함께 신기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그에게 한 마디 말할 시간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는 한 시간 동안 꼬박 그 거울미로 밖에서 김래빈을 기다렸다. 막내들 둘이 싸운 게 맞다고 장난스럽게 주고받던 형들의 대화가 시간이 흘러도 신기루에서 나오지 않는 박문대와 김래빈에 대한 걱정으로 바뀔 때까지. 이세진이 걸어둔 제한 시간인 한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으로 조용해지는 이들 사이에서 차유진은 소식 없는 김래빈을 기다리며 그간 겪은 일들과 김래빈이 했던 말, 그리고 앞으로 그가 해야 할 말을 곱씹었다. 그 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러니 내가 조금 비겁해도 김래빈 이해해야 해. 

김래빈에게 붙잡혀주며, 또 반대로 손을 뻗어 상대를 붙잡으며 차유진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오늘 차유진은 김래빈의 속을 낱낱이 파헤칠 생각이었다. 그 마음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이제는 뻔히 보인다는 이유로 그의 마음을 짐작하거나 넘겨짚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이 필요했다. 그러면 나도 네 옆에 있고 싶다고 답할 수 있었다. 신기루가 오로지 너만의 일이 아니라고, 나는 더 이상 남겨지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고 김래빈의 세계를 나누어받고 싶었다.  

그러니까 더 말해. 더, 더.  

손을 내어 그 뺨을 다시 문지르며 그는 숨을 죽였다. 붉어지는 귀 끝, 조금씩 흐트러지는 말투, 그럼에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김래빈의 시선. 모든 신호가 긍정적이었다. 길게 뻗은 눈매 속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김래빈의 눈동자 속에서 놀이공원의 등불이 산란했을 때에는 기어이 차유진의 심장이 함께 두근거렸다. 

“나도 아마 너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 말이 김래빈의 입에서 나왔을 때 차유진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이어진,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은 의아했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여기서 입을 맞춘다면 그 눈은 놀란듯 동그래질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까맣고 작고 인상깊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에게 너도 그렇다고, 김래빈을 끌어안고 속삭이고 싶었다. 

차유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런 그를 비웃듯, 신기루는 그에게서 순식간에 김래빈을 빼앗았다. 

김래빈은 그대로 사라졌다. 

 

 

"우리 저기 열어요."

달려온 박문대와 그 일행에게 차유진은 선언했다. 시선은 거울미로를 향한 채였다. 김래빈을 삼킨 신기루는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신기루의 남은 흔적은 그곳뿐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무릎을 짚고 헐떡이던 배세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적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조차도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차분히 기억을 되짚을 여유도 없었다. 분명 둘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김래빈이 잃어버렸다던 기억을 되찾은 것 같더니, 신기루의 기척이 갑자기 주변을 가득 메웠다가 김래빈과 함께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차유진이 이해한 건 그뿐이었다. 신기루가 본래 노리던 건 그일 것이고 대신 사라진 김래빈이 신기루 안에 있으리라는 것만이 확실했다.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 펴면 손이 빈 공기를 갈랐다. 방금 전까지 그 손에 잡혀있던 어떤 이의 무게는 오간데 없었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 없어요. 나는 그 망할 신기루인지 뭔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요. 그런 설명은 내 특기도 아니고. 지금 중요한 건 김래빈을 찾는 거잖아요!] 나 알아요. 저기 열어야 해요."

차유진은 다른 이들을 이해시키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의사를 한번 더 확고하게 전달했다. 쏟아지는 영어를 다른 이들은 쫓아가지 못하겠지만 박문대는 알아들었을 터였다. 

그는 신기루를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고집스레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박문대는 바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뭐라도 찾을 수 있을 것마냥. 주변은 퍼레이드를 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으로 시끌시끌했다. 그렇지만 차유진은 박문대가 느낄 고요함을 알았다. 그는 그 어떤 신기루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떠들썩한 세상에 고요하다는 표현을 붙일 수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지금은 두 명으로 줄었지. 

그는 손가락을 부딪혀 딱, 하는 소리를 내었다. 형들의 시선이 일순간 그에게로 쏠렸다. 박문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요."

박문대는 그와는 달리 신기루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달려오면서 무언가를 보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답이 될 실마리였다면 진작에 내뱉었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그와 의논하는 대신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두리번거리는 걸 그만두고 그와 시선을 맞춘 박문대는 기묘하게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에게 대뜸 묻는다. 

"방법이 있어?"

차유진. 나는 곧 돌아올 거니까, 그 능력은 쓰지 마. 김래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가물가물 귀를 맴돌았다. 그는 그 소리에 반발하듯 입을 열었다. 김래빈이 사라졌을 때부터 머리속을 채우는 단 한가지 방법이 있었다. 치미는 열기, 초조한 몸과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명료한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간단한 대답.

 "신기루 다 태울 거에요."

"저기 있는 신기루는 김래빈 게 아닌데?"

"관계 없어요. 신기루 다 연결되었어요.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올 때까지 태워요."

"아니, 잠깐만, 유진아. 조금만 침착하자. 너 아직 제어도 못 하는 상태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데 힘을 그렇게 쓰면 위험하잖아."

이세진이 끼어들었다. 여기 모인 이들 중 그가 가지게 된 능력을 김래빈 다음으로 가장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이세진은 그가 신기루를 불태운 이후로 차유진에게 힘을 읽고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썩 성공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세진의 부드러운 너스레와 만류하는 몸짓에서 그는 걱정을 읽었다. 그러나 애정만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차유진은 우선순위가 명확한 사람이었다. 

"나 지금 침착해요."

김래빈이 사라졌다고 울지도, 손을 떨지도, 화를 내지도, 막무가내로 신기루로 쳐들어가지도 않았으니 이 정도면 침착한 거 아닌가.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배세진의 시선을 무시하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못 기다려요. 문대 형, 내 이야기 기억해요?"

김래빈의 작업실을 그렇게 뛰쳐나오고 나서 차유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박문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누구라도 붙잡고 속을 토로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와 김래빈과 신기루를 동시에 알만한 사람은 뭐, 뻔했다. 문자만 하나 남긴 채 막무가내로 찾아가 속엣말을 맘껏 영어로 뱉어내었을 때 박문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한 마디를 던졌다. 너 김래빈이랑 싸웠냐. 

박문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김래빈한테 신기루 보라고 했어요?'

'그래. 내가 부탁했는데.'

차유진은 박문대가 충분히 김래빈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그가 신기루에 대한 실마리를 찾느라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옆에서 봐왔으므로. 따지자면 김래빈을 만난 것 역시 박문대가 기울인 노력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신기루를 들여다보는 김래빈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종종 상대를 확 낚아채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래빈이 신기루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점점 현실보다 신기루에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아서.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릴까봐. 

'신기루에 빠진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들. 그런데 김래빈은 그런 타입은 아니지 않나?'

'몰라요. 김래빈 어려워졌어요. 근데 나랑 한 약속 안 지켜요. 그거 위험해요. 김래빈 신기루에 열렬? 해요.'

열중이겠지. 박문대가 무심결에 던진 말에 김래빈의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평소대로라면 그에게 저런 타박을 던지는 역할은 김래빈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김래빈은 없다. 데려오지 않았다. 지금도 어쩌면 신기루나 보고 있을까. 

'김래빈은 형이랑 달라요.'

'누가 뭐래.'

'김래빈은 신기루 안 싫어해요.'

박문대에게 신기루는 오랫동안 원망의 대상이었지만 김래빈은 그와는 달리 신기루를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김래빈 그 스스로도 잘 모르는 걸 차유진만은 알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대에게 김래빈은 무심하다. 신기루를 꺼린다고,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꼭 그 기척 끝에 시선을 둔다는 건 사실 김래빈이 신기루에 마음을 둔다는 뜻이었다. 가끔은 신기루에 매혹이나 그리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 때 차유진은 이세진이 농담처럼 그에게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는 유진이도 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알게 되겠네. 김래빈이 처음 신기루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였다. 차유진은 내도록 신기루 안에 들어간 이를 기다리는 쪽이었지만 그럼에도 이세진이나 선아현과는 입장이 달랐다. 7년이 엉킨 사이.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 밖에서 박문대를 기다리는 한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는 말을 차유진은 그때까지도 아주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해한다. 상대가 신기루 안에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염려를. 밖에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과 초조함을. 

'그래도 너도 있는데 괜찮지 않겠냐. 뭐. 너까지 나처럼 되지는 않게 해야지.'

그러니 김래빈은 걱정 말라고. 흐린 웃음과 함께 박문대가 남겼던 약속을 그는 눈빛으로 되짚어주었다. 김래빈이 신기루에 삼켜졌잖아요. 형은 신기루에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잖아요. 잠시 망설이던 박문대의 입에서 결국 허락이 흘러나왔다. 

"네가, ....아니다. 이세진. 쟤 원하는 대로 하게 둬."

이세진은 졌다는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얼굴 한 구석엔 여전히 못마땅한 웃음이 서렸다. 난 경고했어. 끝내는 한 마디가 덧붙는다. 그래도 걸음은 착실하게 거울미로를 향했다. 차유진이 그 뒤를 쫓았다. 키 큰 사람들 특유의 성큼성큼한 걸음걸이로 둘은 곧 미로 입구에 도착했다. 이세진이 부적을 거둬들였다. 약간의 진동이 느껴지고, 가지런하게 놓였던 부적과 나무패들이 힘을 잃고 흐트러진다.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팔랑이는 부적을 하나하나 주워 갈무리하며 이세진이 물러났다. 

그 어깨 너머로, 차유진은 그의 생애 처음으로 신기루를 목격했다.

현실과 저 너머 세계의 경계를 흐릿하게 그리고 있는 이상한 공간. 기척으로만 느꼈던 세계가 형상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뒤에서 박문대가 뛰듯이 다가왔다. 숨을 고르며 그가 속삭였다. 

"할 수 있겠어, 차유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들 물러나 있어요."

박문대는 그것까지는 네 알 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뒤에서 이세진이 새로운 진을 그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할 일이 있겠지. 차유진은 더이상 말을 얹지 않기로 했다.

그는 여전히 그의 능력을 다 모른다. 가족들과의 통화를 통해서도 차유진은 그의 능력에 대해 별 단서를 얻지 못했다. 그의 능력은 여전히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았고 박문대의 신기루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그 불은 김래빈의 신기루를 태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김래빈이 몇 번이고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차유진의 마음 한 켠에선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게 그때문일 거라는 의심이 떠돌았다. 김래빈은 신기루를 내심은 아끼니까 역시 그때 신기루를 태워버린 자신의 능력을 꺼림직해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무작정 능력을 쓰지 말라고 했던 김래빈의 태도가 그 오해를 부추겼음을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 말이 김래빈의 걱정이었음을 안다. 그래도 차유진은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를 태우지 말라니. 그렇게 이야기할 거라면 김래빈은 스스로 신기루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은, 김래빈의 신기루를 태울 수 있는 게 자신의 불이라는 데에 모든 걸 걸 수밖에.

불을 다루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래도 차유진은 그가 '저걸' 태울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팔을 들어올렸다. 숨쉬듯이 불길이 일어났다. 신기루의 입구에서 한 발짝 다가서면 저항하듯 그 세계가 그를 밀어냈다. 신기루가 보여도 들어갈 수는 없구나. 그는 여전히 괜찮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다 태워버릴 거니까. 

차유진은 김래빈이라는 난제를 풀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모든 문제를 자르고 끊어버리기로 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린 알렉산드로스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너는 항상 내 세계의 주인공 같았어.'

그는 김래빈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 위화감. 묘한 거리감. 내가 만약 네 세계의 주인공이라면, 그 세계에서 너는 어디에 있는 건데.

 책 밖의 독자, 무대의 관객. 차유진은 김래빈의 위치를 더듬었다. 그의 옆이 아닌 건 확실했다. 김래빈은 꼭 차유진을 예쁜 스노우글로브 안에 넣어두고 밖에서 그 글로브를 끌어안은 사람 같았다. 애틋해하고, 아끼고, 바라보지만 그 손을 잡아줄 생각은 없는. 실은 김래빈은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한 게 아닐지도 몰라. 잘 눌러두었던 의혹이 다시 한 번 피어났다.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보인 게 그저 통상의 호감이었다면. 그 다정함이 차유진의 눈을 가려 일방적인 감정을 맹목적으로 키워놓은 거라면. 그와 김래빈이 서 있던 세계가 애초부터 서로 다른 레이어로 구분된, 서로 통할 수 없는 차원이었다면. 

설령 그렇다 해도 차유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세계가 불에 타고 있었다. 눈앞의 신기루가 타오를수록 그 내부는 점점 깊어지고 어두워졌다. 한때 그를 사냥감 삼아 위협적으로 몰아갔던 기척을 이제는 그가 뒤쫓는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신기루는 서가의 형상을 띄었다. 차유진은 그게 김래빈의 세상일 거라 짐작했다. 김래빈은 도서관을 좋아하니까. 신기루의 어두운 서가 사이에 도서관에서 종종 목격했던 김래빈의 책 정리하는 모습을 투영해 본 차유진은 그 광경이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눈앞의 풍경을 아까워하는 대신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태우는 데 집중했다. 

태우고, 태우고, 또 태우고. 

얼마나 태웠는지는 일부러 셈하지 않았다. 제게 간간히 닿는 형들의 시선도 무시했다. 여전히 김래빈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시야에 닿을 때마다 분노와 초조함이 그를 좀먹었고 그러면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다. 언젠가부터 그에게 매캐한 불의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 호기심어린 눈빛을 받고 싶어서 그에게 설명해주었던 어떤 곳을 그는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로마의 침입을 받아 불타 사라졌다던 고대의 거대한 도서관이 있던 도시. 지금은 그가 침입자의 입장인 거겠지.

"김래빈!!!"

 그는 목청껏 상대를 외쳐불렀다. 그렇게 하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제발. 사라지지 마.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혼자 남기 싫어. 온갖 감정과 소망이 엉긴다. 이 모든 것을 불태워도 끝내 김래빈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불현듯 떠오른 불길한 가정을 지우듯 불길에 힘을 더했다. 그럴 수록 붉게 타오르던 불이 점차 파랗게 변해가고 끝내는 희게 번지는 것을 차유진은 몰랐다. 불이 넓게 번지면서 현실과 신기루의 경계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금이 점차 지워졌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는 그의 영역을 넓혀갔다. 손을 뻗고, 다시 이름을 부르고,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불사르고. 현실과의 경계선을 다시 세웠다. 어느 샌가 울고 있던 것도 모른 채 계속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대답이 돌아왔다. 낡고 녹슬고 어두운 것들 사이에서 희고 무구한 얼굴이 망연한 빛을 띈 채 그를 향했다. 그는 김래빈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상대의 발이 현실로 한 발짝 끌려나온 순간 몸의 힘이 탁 빠졌다. 그는 김래빈을 끌어안았다.

'찾았어.'

그게 차유진의 정답이었다. 나 김래빈 찾았어. 그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달싹이듯 의미를 쏟아낸다. 김래빈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그의 착각이든, 아니면 그와 김래빈의 마음이 다른 형태이든 괜찮았다. 김래빈에게 차유진은 특별하고, 김래빈은 결국 차유진을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할 테니까. 지금도 봐. 고작 울고 있다는 이유로 그의 세계를 전부 태워버리려는 사람을 김래빈은 달래지 못해서 안달이잖아.  

그는 김래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열일곱의 기억은 그에게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예전에 만난 게 사실이라면 난 그때도 너를 마음에 들어했을까. 그는 고등학교 때를 떠올렸다. 어쩌면 한국에 가리라 걸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김래빈의 지분도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의 영역은 아직도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이고 차유진은 직감이며 본능이 꽤 유용하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므로. 그게 아니어도, 열일곱 차유진이 김래빈만 아는 어떤 환상, 예지, 아니면 망상이어도 문제 없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차유진은 김래빈을 만났고, 알게 되었고, 기어이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 뒤로는 암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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