喚
5교시는 영어였다. 점심시간 직후의 교실이었다. 교실의 창을 통해 9월의 날씨가 쏟아졌다. 아직은 조금 덥지만 하늘이 맑아서, 때때로 바람이 불면 그 박자에 맞추기라도 하듯 졸음을 주체 못 하는 학생들의 고개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영어 교사는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엎드려 자는 건 기어코 깨웠지만 학생들이 슬며시 조는 것까지 깨우기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처지가 너무 고달프다고 했다. 교사의 말투 역시 그의 성격만큼이나 느려서인지 이 시간에는 유독 많은 학생이 잠을 이기지 못했다. 김래빈은 물론 예외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반년. 마치 수업이 듣기 싫은 것처럼 은근히 찌푸려진 미간에 눈매는 날카로울지언정 그는 여전히 수업 시간에 졸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자아. 봐라. 영어 독해도, 기본적으로는 언어 독해랑 또옥-같아. 그게 무슨 말이냐?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물론 문법이랑 숙어는 좀 봐야겠지. 그러니까, 볼까. 3번째 줄 Even though 보이지? 뜻이 뭐다? 비록 뭐뭐일지라도~. 보통은 이 표현이 나오면 뒤의 절이 더 강조되는 거니까, 뒤의 구절을 잘 봐야 한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진 척 한 손으로 고개 숙인 이마 부근을 받친 채 졸고 있는 옆 사람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 김래빈은 교사의 설명을 따라 다시 독해 프린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으면 그 글자와 글자 사이에 살며시 그림자가 섞여 들더니 마치 번져나가듯 다른 누구도 볼 수 없는 복잡한 문양이 생겨났다. 그 움직임을 무시하고 그는 그 위에 주황색 형광펜을 그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술이 교사의 말을 반복한다. 비록 뭐뭐일지라도.
“그럼 내용을 지금까지 봤지? 이게 무슨 내용이야? 비언어적 표현들이 사람의 본심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내용이지. 그러니까 답은… 보자, 4번.”
볼펜으로 적은 단정한 글씨체가 종이의 빈칸을 점령했다.
[비언어적 표현 = 본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줌.]
별표 치고. 그가 교사의 말을 따라 소리 없는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투명한 세계가 따라 공명했다. 학생들의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글자들이 드리웠다. 이야기가 천장 무늬를 따라 뚝뚝 떨어지면서 그의 어깨 위로 세계가 흘러내렸다. 밝은 어둠 속에서 녹색 불빛이 깜박였다. 세계와 세계가 오버랩된 공간, 일상에 비일상이 자연스럽게 끼어든 그 광경. 그 속에서 세계와 김래빈은 제법 기묘하게 공존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게 보일 때는 주의해야 해. 너, 잘하고 있지?’
누나는 아직도 잊을만하면 그를 불러 무시를 종용했다. 그는 그 말을 잘 지키다가도 가끔은 의식하지 않은 채 신기루에 오래 눈길을 주었다. 멍하니 세계를 보고 있으면 낡고 안쓰럽고 그에게 호의적인 그 세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와 구조를 열어 내보였다. 이해가 중첩될수록 김래빈은 그 속에서 점점 자유로워졌고, 열일곱의 김래빈은 자신에게만 읽히는 그 세계를 연민하지 않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비는 시간마다 악보를 그렸다. 이미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진로를 음악으로 확정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잊힌 이야기를 다시 풍성하게 살아날 수 있게 해줄 만큼 뛰어나지 않은 그의 글솜씨 대신 사운드트랙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구조와 흐름이 이야기의 구조와 맞물렸을 때 그걸 듣고 보는 사람에게 어떤 감성적인 시너지를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세계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그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눈에 잡히는 이야기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끄적거리고 있노라면 그 음악을 아끼는 것처럼 주변으로 이야기가 몰려들었다. 그런 날들이었다.
“보호자랑 의논은 된 거지?”
작곡을 전공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담임은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긴장으로 허리를 뻣뻣이 세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진행된 건 아니라도 그의 조부모와 누나가 모두 그 선택을 지지해주고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김래빈은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외부 공모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평범한 인문계 공립 고등학교라 좋은 정보가 흘러들어오길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그에게는 다행히 그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다.
“쌤. 쌤이 보기엔 얘 어때요? 얘 뭐 공모전인가 뭔가 쓴다는데, 지원하면 잘할까? 난 음악은 하나도 몰라.”
“어. 얘요? 니가… 그래. 김래빈이. 얘 악기 잘 다뤄요. 작곡해도 잘할 것 같은데? 애가 재능이 있어. 그치? 보자. 작곡 전공 좋지. 그러면 실용음악으로 쓰나? 근데 외부 공모전은 뭣하러? 외부 수상은 생기부에도 못 써. 수시엔 도움 안 될 텐데?”
배우자를 따라 먼 지역으로부터 이곳으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는 음악교사의 말에는 독특한 억양이 묻어있었다. 아직 젊었던 그 교사는 적당한 공모전이 뭐가 있는지 알려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공모전에 필요한 서류를 학교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그의 담임교사를 설득해주었다.
“넵! 사실 저번에도 제게 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만 자신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알아야 지망 대학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선생님의 또 다른 조언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전국 수준에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여러 가능성을 고민해보았는데, 아무래도 학생 입장에서 전문가의 평가를 받으면서도 접근이 손쉬운 가장 적절한 방법은 외부 공모전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대학 입시와는 별개로 지금의 제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나도 음악 하지만 음악 하는 애들 좀 독특해요. 랩마냥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진 김래빈의 웅변을 들은 음악 교사는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추천서는 자기가 써주겠다며 추천서 양식을 받아 갔다. 제출 마감 기한이 그렇게 길게 남지 않아 마음이 조급했다. 그는 상담이 끝나고도 꽤 오래 기다린 끝에 서류를 들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아직 가을보다는 여름에 더 가까운, 해가 긴 계절이었다. 해는 고개 너머로 넘어갔지만 여섯 시를 훌쩍 넘겼음에도 하늘이 밝았다. 그는 길가의 나무들에 시선을 주었다. 이 시간즈음의 나무들은 독특한 빛을 띄었다. 아직 밝은 사위가 그대로 묻어나는 잎사귀의 표면과 잎을 투과하기에는 너무 약한 빛 아래로 나무들이 머금은 제각각의 밤. 빛과 어둠의 교묘한 공존과 잎사귀를 경계로 한 고도의 양면성. 해가 진 이후부터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 서로 섞일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 공존하는 그 짧은 시간.
기이한 적막이 흘렀다. 그는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무언가 이제까지 일어난 적 없던 일을 앞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투명한 세계가 부산스럽게 흔들리고 낯선 공명이 그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 짧은 사이에, 불시에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
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검은 덩굴 사이에 김래빈은 서 있었다. 시공간이 묘하게 꼬이는 느낌과 함께 서가로 가득 찬 어둠이 제멋대로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중첩된 그림자, 미로처럼 꼬인 길. 그 공간을 구성하는 이야기에 따라 넓게, 혹은 깊게 왜곡되는 공간.
그는 어리벙벙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세계가 멋대로 그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아예 공간을 완전히 잡아먹은 건 처음이었다. 이미 여러 번 오갔던 세계였기에 그는 최대한 당황을 누르고 차근차근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괜찮았다. 그는 이 세계에 자신이 있었다. 제멋대로 펼쳐진 세계를 헤집고 그 구성과 규칙을 따라 출구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이후로는 주변에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다른 세계 속이었지만 더이상 시공간이 꼬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평소에 그랬듯 출구를 찾아 나가면 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서가 사이를 걸었다. 익숙한 이야기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다만, 서가 사이에 길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타인은 그의 예상엔 없던 요소라서.
“실례지만, 누구신지…?”
종종 환각처럼 그를 스쳐가곤 하던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존재감이 지나치게 컸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소속되지 않은,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이 미로 한중간에 있었다. 그는 잠시 당황해 말을 멈춘 채 상대를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체구는 조금 크고, 곱슬머리에 약간 밝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확신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제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애.
“――――――”
조금 부루퉁한 얼굴로 서 있던 그는 김래빈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눈에 띄게 반가운 얼굴을 했다. 상대가 입을 열면 크고 정신없는 제스쳐와 함께 낯선 언어가 빠르게 쏟아졌다. 그는 그게 영어라는 것조차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교 영어 듣기 평가는 실로 학생들을 엄청나게 배려한 난이도였던 거구나.’
웃기지만 첫 감상은 그랬다.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시 웰. 이게 맞나 싶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영어 시간에 배운 표현을 더듬더듬 말하면 상대의 말이 잠깐 멈추었다. 침음 소리가 나고, 턱을 만지작대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한 상대가 아까보다는 조금 느리고 뚜렷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here―――――?”
다만 김래빈은 본래부터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도 영어 성적이 썩 좋지 못한 편으로, 눈에 보이는 상대의 배려에도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뜻은 그럭저럭 추측할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본 적 없는 낯선 생김새, 이상한 세계 한가운데 떨어진 사람. 그 사람이 가장 먼저 궁금해할 만한 게 여기가 어딘지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어쩌다가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김래빈은 일단 그가 눈치껏 알아챈 작은 성취에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설명해주려 입을 열었다.
“어……”
그 한 음절 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깨달았다. 답을 아는 것과 그걸 상대에게 설명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여기는 한국의 강원도라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걸로 끝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그와 낯선 남자애가 서 있는 곳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었고 그는 가족에게조차 그 세계의 존재를 명확히 설명하는 데 실패해왔으며, 심지어 그와 상대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까지 있었다.
영어사전, 있을 리가 없었다. 휴대폰은 작동하지 않겠지. 그는 공연히 이마를 한번 문질렀다가 바닥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당장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히얼 이즈 앳 코리아 벗 낫 어 리얼 월드.”
“Umm, sorry?”
sorry는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상대는 귀에 손을 대는 시늉을 했다. 나 잘 못 알아들었어. 그 직관적인 표식을 겨우 이해하며, 그는 새삼스레 그가 배운 내용을 떠올렸다. 과연 누군가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비언어적 표현이 큰 역할을 하는구나. 그 비틀린 납득 위에서 그는 그가 했던 말을 한 번 더 천천히 반복했다. not a real world. 그가 한 말을 바로 따라 한 상대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더니 불현듯 제 뺨을 찰싹 치기 시작했다.
“저기,”
꿈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반쯤 돌아선 채 무어라 궁시렁대는 상대를 바라보다 김래빈은 입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한글로 말머리를 떼었다가, 적절한 영어 표현을 찾는 걸 포기한 그는 조심스레 상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상대가 돌아서면 아까보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눈과 눈이 곧바로 마주쳤다. 그가 살고 있는 곳 근방에선 보기 힘든 연한 색 홍채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쩌면 이 이상 현상의 원인이 그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고처럼 이곳에 흘러오게 되었을 이방인이 느낄 불안을 셈해보며 그는 가만히 단어를 골랐다. 가장 단호하게, 명확하게 그의 뜻을 전할 말들을.
“아윌 헬프 유 쏘 유 캔 리턴 투 유어 홈.”
망설이다가 그는 뒤늦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마이 네임 이즈 래빈 킴. 유 캔 트러스트 미. 아무래도 자기소개 하나 없는 사람이 신뢰를 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Raebin?”
상대가 고개를 기울였다. 상대가 부르는 제 이름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면 이세계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에서도 하염없이 반짝이는 눈동자가 두어 번 깜박였다. 눈이 오래 마주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눈이 웃는 형상을 그렸다.
“Okay.”
둘 사이의 거리를 불쑥 튀어나온 손이 침범한다. 쏟아지는 빠른 말들과 함께 어정쩡하게 놓인 김래빈의 손을 잡아챈 그 손이 위아래로 크게 두어 번 흔들렸다. 체온이 높은 손이었다. 갑작스러운 악수에 얼결에 말려든 김래빈이 어어 하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 상대는 크게 웃고는 자신을 가리키며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Eugene Ignacio Cha. Just call me Eugene!”
*
쓰러진 차유진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형들의 도움을 받아 옮길 수 있었다. 411호에 도착해서도 차유진의 몸에는 은은히 푸른 불이 감돌았다. 그 불은 침구며 옷 같은 현실 세계의 물건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의 물과 담요로도 꺼지지 않았다.
높았던 열은 이제는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차유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침대에 눕혀진 그를 잠시 바라보다 김래빈은 거실로 나왔다. 식탁 근처에서 이세진과 박문대가 소리죽여 대화하고 있었다.
“저렇게 될 걸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잖아. 무슨 힘인지도 모르는 힘이었다고.”
“그래. 그래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어차피 약속이 아니더라도 걔도 성인인데 말린다고 말을 듣겠냐. 그리고 어쨌든 김래빈이 무사히 돌아온 건 맞잖아.”
무슨 약속인지 그가 채 묻기도 전 김래빈의 인기척을 느낀 박문대와 이세진이 입을 다물었다. 이세진이 그를 위해 한쪽 의자를 빼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차유진은 어때.”
“아직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식탁에 각자의 한숨이 맴돌았다.
힘을 쓰지 말라고 차유진에게 더 강하게 말해야 했던 걸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차유진이 힘을 쓰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저에게 있었으므로, 그는 그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을 거야. 가만한 위로에도 김래빈은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깨어나지 않는다면, 혹시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역시 가족한테도 연락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지….”
잠시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는 박문대에게 문득 이세진이 입을 벙긋였다. 둘 사이에 짧게 눈빛이 오갔다. 박문대가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통할지 어떨지는 몰라도 내가 받은 연락이 하나 있긴 해.”
“예? 어떤 방법입니까?”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김래빈을 잠시 올려다본 박문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모두에게 잘 보이도록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음성 메세지 재생 버튼을 누르면 화면에서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로 시작된 그 목소리는 시답지 않은 몇 문장을 건너뛰고서야 본론으로 돌입했다.
≪…능력의 제어 문제도 분명 변수가 될 수 있지만 제겐 조금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는군요. 들어보시겠습니까? 저주가 아닌데도 시전자의 의식 없이 능력이 지속되는 사례가 있습니다. 소원입니다. 뭐, 저주나 소원이나 뭐가 그렇게 다른지 전 잘 모르겠지만요. 아. 주체가 다르던가요. … 아무튼 이쪽으로 내려오는 모든 문헌을 섭렵한 제 분석에 의하면 어쨌든 제일 중요한 건 인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가 표출되는 방식이고요. 인간의 영혼과 육신, 그리고 그 능력 간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한 형상으로 소원은 시전자의 의식과 별개로 언어의 형태로 의지가 능력에 개입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조건문…≫
그 후에도 제법 길게 이어진 그 이야기는 고급 정보를 제공해 준 자신에게 너무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겸양 아닌 겸양의 인사와 이후 결과를 알려준다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이능력 연구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은근한 부탁의 말로 끝났다. 박문대가 화면을 넘겼다. 김래빈은 뒤늦게야 발신자를 확인했다.
[정우단]
“급해서 신재현한테 대충 상황 설명만 남겼는데 아까 이런 메세지가 왔더라고. 난 솔직히 뭔 말인지 모르겠고, 자세한 건 이세진이 더 잘 아니까.”
그 말에 이세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저것 내용은 길어도 요는 그거지. 뭔가 조건이 걸려있으니까 저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거야.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데, 근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멈추냐니까 솔직히 해답이라고 하긴 좀 그래.”
정우단이라면 신재현과 한 팀을 이루는 수도사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며 이세진은 턱을 괴었다. 박문대의 시선이 이세진을 지나 김래빈에게 향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김래빈.
“아까 차유진이랑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것도 너고, 그 전에 차유진이 능력 쓰는 걸 가장 가까이서 봤던 것도 너지. 만약 차유진이 뭔가 조건을 걸었다면 네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어. 너도 모른다면 우리 중에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해. 혹시 뭐 생각나는 거 없냐?”
그는 숨을 들이켰다. 두 쌍의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애써 찾은 실마리였다. 그런데 머리가 하얗게 빈 것 같았다. 차유진이 불을 꺼트리지 않을 만한 이유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부담감과 초조함에 점차 질려가던 그의 얼굴을 본 이세진이 애 숨넘어가겠네,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 당장 떠올리라는 건 아냐.
“그냥 이런 의견도 있으니까 한번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우리도 나름대로 다른 방법도 찾아볼 거고. 그치, 문대문대?”
“그렇지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이세진과 박문대의 눈가에 희미하게 착잡함이 고였다. 김래빈은 차유진 옆에 가 있겠다며 도피하듯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침대 곁에 주저앉아 차유진의 손을 툭 건드렸다. 그 손에 여전히 감겨있는 불은 마치 그에게까지 옮겨붙을 듯 잠시 일렁이다 다시 얌전히 수그러들었다.
“왜 이러고 누워있어.”
불안한 마음이 타박의 형태로 흘러나왔다. 차유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가만히 누워있는 차유진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활기가 없는 차유진은 낯설었다. 차유진은 언제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모르는 곳에 떨어진 불안한 상황에서조차 열일곱 차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유진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 남자애와는 그 뒤로도 소통이 썩 잘되지 않았다. 유진이 아무리 느리게 말해도 어휘력이 약한 김래빈이 알아듣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제스쳐와 몇 개의 기본적인 단어, 표정을 이용해 겨우겨우 의사를 전달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을 이겨가며 온갖 시도를 하다가 드물게 서로 뜻이 통하면 그때만큼 신날 때가 없었다. 유진은 처음 말이 통했을 때 그에게 하이파이브를 시도했고 김래빈은 손바닥을 마주쳤다가 그 힘에 뒤로 밀려나는 줄 알았다. 아연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귓가에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 그거 건드리면, 아니, 돈… 돈 터치 댓!”
그래도 그 짧은 사이에 영어 단어를 조합해 뭐라도 뱉어내는 속도가 좀 늘었다. 서가의 책을 뒤엎으려는 유진을 말리고 그는 흩어진 이야기들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꾸물꾸물 규칙을 뱉어냈다. 그는 그 결을 더듬었다. 평소라면 출구를 찾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유진이 들어오면서 공간이 좀 꼬인 모양이었다. 들어온 뒤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정확히 알 길이 없어 그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의 가족이 귀가가 늦어지는 그를 기다릴 것도 염려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유진이 문제였다.
‘여기 오래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상대를 힐끔 바라보았다. 유진은 머리 뒤에 손깍지를 댄 채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톡톡 걸음을 옮기면 독특한 박자가 서가 사이를 울렸다. 이상한 세계에 갇힌 것 치고 느긋한 얼굴이었다. 그 박자와 멜로디를 습관적으로 머리 속 악보에 그려내면서 그는 손끝으로 책 표지를 더듬었다. Hey. 무언가 혼자서 중얼거리던 유진이 그를 불렀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Look at This!”
또박또박 떨어지는 단어들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서가 사이를 뒤적이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고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상대의 손 위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진이 손가락을 쥐었다 펴면 그 불은 점차 그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게, 대체…?”
놀란 김래빈의 얼굴을 보며 유진은 경쾌하게 웃었다. 유진이 그의 쪽으로 팔을 쭉 뻗으면 그 손 위에서 어른거리던 불이 훅 거리를 좁혔다.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 물러섰던 김래빈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뜨겁지 않았다. 착각 같은 온기가 잠시 손끝에 머물렀다가 곧 사라졌다. 마주한 얼굴 사이에서 불티가 튀면 그 빛이 상대의 눈동자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낙천적인 성격, 여유로운 언행. 무모한 짓을 해도 밉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어색함이 없는. 그가 읽었던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이 꼭 저랬지.
‘이야기의 주인공 중에 저런 유형이 많은 이유는 역시 사람들이 그런 성격에 매력을 느껴서일까.’
그런 의미에서 유진은 어디서나 주인공처럼 살 것 같다고, 그는 설핏 생각했다.
만약 그의 세계도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마도 유진과 같은 사람일 거라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일곱 차유진을 곱씹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박문대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전히 기척 없는 차유진을 잠시 응시하다가 박문대는 다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가와 입매가 굳어있었다. 차유진을 깨울 만한 답을 들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박문대가 운을 떼었다.
“그, 죄송합니다. 아직 차유진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거 물으러 온 건 아닌데.”
박문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손등으로 침대 프레임을 두어 번 두드렸다. 마치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 싫은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기루에서 우리가 했던 이야기, 사실은 내가 너의 위치가 아니라 차유진의 위치지?”
그제야 김래빈은 박문대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박문대라면 금방 알아차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신기루에 대해 오래 고민했고 그 7년 동안 사람이 실종되었던 그날을 계속해서 되새겼을 테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는 순순히 긍정했다. 이미 박문대는 반쯤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어설프게 부정해봤자 통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야 할 일도 아니었다.
“형께서는 그 세계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그는 다시 한번 선고를 내렸다. 열일곱의 기억까지 얻은 김래빈에겐 그 차이가 확실하게 보였다. 만약 박문대가 정말로 그 세계의 주인이었다면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신기루를 읽어내지 못할 리도, 제어하지 못할 리도 없으니까. 추측건대 그 신기루의 주인은 아마 원래의 박문대였을 것이다.
“말해 봐. 너희한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굳은 얼굴로 박문대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야기로 이루어진 세계, 열일곱 가을에 만난 어떤 남자애.
어쩌다 차유진이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차유진이 불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도 미지수였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차유진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지목했을 때 마치 지금처럼 세계가 차유진을 삼키려 들었으며, 그때도 차유진은 불을 써서 벗어났음을 박문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에게도 같이 나가자고 손을 내밀었지.
김래빈은 차유진이 선뜻 비쳤던 호의를 기억한다. 하지만 따라갈 수는 없었다. 차유진이 돌아갈 곳과 그가 머무는 곳은 서로 달랐으니까.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차유진은 혼자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그 세계에서 그 역시 길을 찾아 무사히 귀가했다. 차유진이 떠났어도 신기루는 여전히 그를 찾았고 그는 혹시 바다 건너 차유진에게 영향을 끼칠까 억지로 기억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서히 잊었다.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채 그를 만나 결국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때까지.
“아마 나한테도 너희랑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거겠지.”
박문대가 고요하게 결론지었다.
김래빈은 그저 침묵했다. 그 일은 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김래빈이 차유진을 주인공으로 지목했던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건 박문대의 세계도 류건우를 지목했을 것이다. 지금의 결과를 보면 박문대 역시 류건우가 세계에 삼켜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박문대와 류건우는 동시에 그 세계에 휘말렸고, 박문대와 류건우의 몸이 바뀌었다. 그리고 박문대가 된 류건우는 무사히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류건우가 된 박문대를 그 세계에 그대로 남겨두고, 옛 박문대의 세계를 흔적처럼 몸에 매단 채.
“왜 나였을까.”
박문대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중얼거림에 그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가 신기루로 뛰어들기 직전에, 그에게 달려오는 박문대를 보며 생각했던 게 있었다. 이야기로 이루어진 그의 세계는 주인공을 원했지. 그렇다면 박문대의 세계는 어떤 사람을 찾았을까.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분은 형을… 일종의, 이상향처럼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복숭아꽃이 만발한 그의 신기루. 몽유도원도, 남가지몽을 떠올리게 하는 그 평화로운 광경. 누군가의 세계가 무릉도원을 닮아있다면, 그 세계의 주인은 박문대에게서 어떤 낙원을 본 게 아니었을까, 하고.
그의 말에 박문대는 씁쓸한 것도, 허망한 것도 같은 기묘한 표정을 했다.
“그럼 나에게 차유진처럼 신기루를 없앨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어쩌면 박문대도 너처럼,”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드물게 타인의 말을 끊었다. 그는 류건우도, 본래의 박문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확언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와 차유진의 관계가 아주 기묘한 우연과 큰 운이 겹친, 흔치 않은 결과물이라는 건 알았다. 신기루 안의 시공간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고, 신기루의 주인조차 한번 세계가 꼬이면 길을 찾기 어려웠다. 김래빈 그 자신도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 애쓰며 한참을 헤매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문대는 분명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게 설령 더 큰 우연에 가로막혔다 하더라도 당신의 7년이 무의미했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노라고, 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신기루의 작용은 박문대도, 류건우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본래의 박문대가 선택한 길 역시, 그에겐 최선이었을 것이다. 김래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만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역시 차유진을 대신해 신기루로 뛰어들기를 선택했으니까.
“신기루의 주인 입장을 제가 전부 대변할 순 없겠지만, 저는 차유진 대신 신기루에 빠졌던 걸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분도 그러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리고 한숨 쉬는 것처럼 박문대는 덧붙였다. 그랬겠지.
“하지만 차유진은 그걸 별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던데.”
이번에는 김래빈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게 제 최선이었습니다.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면 박문대는 한참 후에야 그래, 하고 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너도 피곤할 텐데 적당히 쉬어.”
조용한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 안이 다시 적막해졌다.
그의 등이 천천히 수그러들었다. 시선이 차유진의 눈가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를 찾았을 때 차유진은 울고 있었다. 그를 끌어안던 손, 어깨에 떨어지던 눈물, 어딘가 절박했던 차유진의 몸짓. 왜 그렇게까지 했어. 아직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그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가 자신에게 쏟아붓던 원망과 분노, 슬픔이 선연했다. 그의 목소리가 기억 속을 왕왕 울렸다.
‘…김래빈 진짜 바보야. I'll gonna burn all these fucking things… 가지 마. 다 태워버릴 거야.’
다 태워버릴 거야.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차유진은 그 비슷한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지. 동시에 그는 박문대가 받았던 음성 메세지를 떠올렸다. 불이 꺼지지 않을 조건. 소원. 시전자의 의지. 그의 상상 속에서 두 음성이 서로 연결되었다.
신기루는 다 타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차유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가 잘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신기루와 차유진의 연결은 끊어졌고, 이제 신기루가 이전만큼 그에게 맹목적으로 접근할 리도 없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만약 차유진의 능력에 신기루를 다 태워야 한다는 조건이 걸려있었고 김래빈이 신기루를 갈무리해버렸기에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다면? 그래서 여전히 차유진의 능력만 살아있는 채 그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김래빈은 상황을 되짚었다. 되짚을수록 자신이 떠올린 게 맞는 답일 것 같았다. 그는 신기루를 피워올렸다. 신기루는 여전히 차유진이 흥미롭다는 듯 그 주변을 맴돌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 세계의 말단부를 억지로 그 곁으로 밀어 눌렀다. 넝쿨의 끄트머리가 닿자 차유진을 감싸고 있던 불이 붉은빛으로 확 피어올랐다.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변화였다
“혀, 형…!!”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형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는 우당탕탕 방을 나섰다.
박문대는 김래빈에게 네 신기루를 전부 태워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루를 태우는 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이미 부분부분 타 있어서 쭉 이어지게끔 연결하는 게 어려워 더 그랬다. 김래빈은 신기루를 끄집어내고 그걸 다시 적절한 농도로 늘이고 분해하여 차유진에게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분명히 효과는 있었다. 세계를 태우면 태울수록 차유진이 몸에 두르고 있는 불은 일렁였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희미해졌다. 대신 태우기를 멈추면 불은 마치 항의하는 것처럼 그 몸집을 부풀렸고, 그럴 때마다 그는 그 불이 차유진을 곧 살라먹을 것처럼 초조해졌다.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식사를 하는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신기루를 태우는 데 몰두했다. 간혹 형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그를 근심스럽게 보고 갔지만 그는 쉬라는 말에도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잠은 자야지!”
“그래. 내가 깨워줄 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붙여. 유진이 불 색깔이 변할 때쯤 깨워주면 되는 거지?”
어차피 언제 다 태울 수 있을지 모르는 거라면 장기전을 대비해서 체력을 조금이나마 남겨두는 게 좋다며 청우는 온화하게 그를 설득했다. 신기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청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형들이 이끄는 대로 침대 곁에 기대 누웠다. 완전히 드러누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조심스럽게 담요가 몸 위로 올려졌다.
무슨 일이 있었든 네 잘못은 아니야. 꿈결인 듯 아닌 듯 청우의 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유진은 좀 더 평온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요. 반박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가물가물 정신이 멀어졌다. 그렇게 따지면 네가 갚고 있는 업도 네 잘못은 아니지. 배세진의 목소리가 멀고 은은하게 울렸다. 알아. 하지만 막상 닥치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거든. 그게 그가 들은 청우의 마지막 말이었다. 두 분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지 묻기도 전 그는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차유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차유진을 옆에 둔 채, 그는 고요함 속에서 신기루를 마주했다. 세계를 늘이고 분해할 때마다 이야기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제 옆에 오래 두었던 세계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계속 신기루를 태웠다. 이제는 많이 가라앉은 차유진의 불에 연료를 넣듯 신기루를 뜯어 떨어트리면 주홍빛을 띠는 불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 색을 보면서 그는 고향의 노을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길. 논두렁, 혹은 밭둑에서 저 먼 지평을 보면 꼭 저런 색으로 하늘이 물들었다. 하나둘씩 같은 방향끼리 서로 떠들며 사라지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김래빈은 대체로 혼자 걸었다. 가끔은 조부모가 운영하는 비닐하우스 쪽으로 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한창 밭일이 바쁠 때는 그가 학교를 끝마칠 시간까지도 일손이 모자랐다. 조부모는 고등학생이 된 그에게 공부만 하기에도 힘들 테니 이제는 일을 돕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는 그래도 종종 하우스에 들러 조부모와 함께 집에 돌아갔다.
지는 노을, 산등성이를 향해 고요히 날아가는 새,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우스를 정리하는 조부모를 기다리며 밭둑에 홀로 선 채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주변에서 슬그머니 흘러나오던, 그만이 알 수 있던 그 세계.
언젠가는 신기루가 그에게도 위안이 되었을 때가 있었다. 세계를 조각날 때마다 그는 그런 기억을 조금씩 되살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의 원망 어린 목소리도, 잊고 살던 추억들도 전부 잘게 조각내 태우다 보면.
자잘한 부스러기들만 남긴 채 텅 비어버린 세계 속에서, 불이 완전히 사그라든 차유진이 눈을 떴다.
“…….”
잠에 취한 것처럼 흐린 눈을 차유진이 연신 깜빡일 때까지도 김래빈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차유진은 그를 멀거니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기고는, 피곤에 지친 김래빈이 그대로 끌려가자 그를 더듬다 문득 웃었다.
“꿈 아냐….”
“…그래.”
그 태연한 모습을 보자 긴장이 탁 풀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입 밖으로는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차유진의 이마를 짚었다. 살짝 높은가 싶은, 평상시의 체온이었다.
내가 그 능력 쓰지 말라고 했잖아. 잘 돌아왔어. 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원망, 안도, 의문. 차유진에게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는 상대의 이마나 한번 꾹 누르고 말았다. 푸스스 웃은 차유진이 막 깨달은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래빈 신기루 태웠어?”
아. 그랬지. 차유진도 신기루를 느낄 수 있었지. 생각이 느렸다. 그간의 피로가 그대로 눈꺼풀에 내려앉은 것처럼 눈이 무거웠다. 본인이 다 태워버리겠다고 했으면서 막상 다 사라지고 나자 두리번거리며 찾는 게 조금 우스웠다.
“다 태워버리겠다며.”
몸이 물 먹은 것처럼 늘어졌다. 그는 차유진의 위에 그대로 쭉 엎어졌다. 다 태웠어. 말과 섞인 웃음소리가 이불에 막혀 먹먹한 목소리가 나왔다. 머리 위로 간지러운 바람이 불었다. 차유진이 한숨을 내쉰 것 같았다.
“김래빈 너무 무거워.”
머리카락 쪽이 간지러웠다. 슬그머니 제 머리를 만지작대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를 끌어당긴 건 너잖아. 항의가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는 항변하는 대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무겁다면서도 차유진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
차유진이 깨어났으니 언제까지고 411호에 머물 수는 없었다. 둘은 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벌써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에 가까운 때였다. 거리와 대중교통에도 귀가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걷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며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김래빈은 아직도 조금 얼떨떨했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종이봉투 하나만이 그들이 겪은 이상한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안에는 병원 진단서가 들어있었다.
정신을 차린 차유진에게 박문대는 봉투 한 장을 건네었다. 이게 뭐냐며 고개를 갸웃한 차유진이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종이를 끄집어내는 사이 김래빈은 그 어깨 너머로 기웃거리며 인쇄된 내용을 엿보았다. 진료 확인서. 급성 장염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떡하니 적혀 있는 그 종이 가장 하단에는 모 종교재단 산하의 병원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어쩐지 그 진단서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박문대는 친절하게 종이의 용도를 설명해주었다.
‘요새 대학생들은 학점 관리해야 해서 자체 휴강도 못 한다며. 응급실 실려 가서 미리 연락 못 했다고 해. 쓰러졌다는 말은 딱히 거짓말도 아니니 괜찮겠지.’
그 원인이 비록 장염은 아니었지만, 차유진이 쓰러졌던 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옆에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차유진은 의외의 것을 본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박문대의 말에 썩 공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마워요! 하고 던져지는 인사만은 싹싹했다. 진단서를 앞뒤로 훑어보다가 종이를 팔랑팔랑 내려놓은 차유진 대신 그 봉투를 주섬주섬 챙겨 든 건 그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차유진의 시선이 그의 손에 닿았다.
“Hmm…. 그거 내 거야. 김래빈은 그거 필요 없어?”
“나는 너 쓰러져있을 때 미리 연락했어. 네 거니까 이제 네가 챙겨.”
차유진에게 봉투를 다시 건네주며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던 그 대신 그런 자잘한 일들을 상기시킨 건 주변 형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일에도 익숙해 보였다. 혹시 학교에 연락할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냐는 선아현의 말을 듣고야 김래빈은 그가 전공수업과 근로를 앞두고 있으며 지금 연락하지 않으면 일이 더 꼬일 거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차유진 옆에 앉아있는 틈틈이 조교와 사서 선생님께 연락을 넣었다.
“Oh My God. 설마 아프다고 했어? 김래빈 거짓말 안 할 줄 알았어!”
“……거짓말은 안 했어.”
그를 빤히 바라보는 차유진의 눈초리를 슬쩍 피하며 김래빈은 답했다. 그는 단지 이세진의 조언을 실행했을 뿐이다.
‘꼭 모든 걸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냐~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뉘앙스를 주면 더 좋긴 하지만? 음…. 네 상황이라면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유진이가 아픈 것도, 주변에 돌봐줄 보호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까.’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수업과 근로에 빠져야 하겠다는 그의 말을 학교 사람들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돌봐야 하는 일이 생겼다며 사정을 얼버무려도 어련히 일신상의 이유가 있겠거니 하는 분위기라 그가 더 놀랐다. 박문대는 네가 이제까지 성실했으니 의심하지 않는 거겠지, 하고 그의 걱정을 일축했다.
‘항상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비현실에 한 발짝을 걸치고 있다고 해서 현실을 아예 떠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핑계 댈 구멍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으면 좋지.’
자신보다 먼저 신기루의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의 조언을 김래빈은 신중하게 마음속에 새겼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 건물들의 창을 온통 물들이며 노을이 지고 있었다. 고요했다. 이 시간쯤에 자주 튀어나오던 다른 세계의 기운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루는 완전히 타버렸지. 지금의 그에게는 현실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왠지 알 것 같았다. 신기루는 언젠가 다시 찾아올 거다. 사람들에게 잊히는 이야기가 언제고 존재하고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외로움을 모조리 없애버릴 수 없는 한.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옆에서 걷는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유진,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수업에 빠진 일에 대해 진단서를 내고 병결 처리를 받는 게 곤란하게 느껴진다면 그 외의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Not bad. 근데 나 필요 없어. 이유 없이 수업 한 번 빠져도 된댔어.”
그의 등을 한번 탁, 친 차유진이 어깨에 팔을 걸며 여유로운 얼굴로 우쭐댔다. 그런 교수님도 간혹 있다고 들었다. 다행이네, 하고 그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날 밤, 여전히 같은 기숙사 방에서 둘은 다섯 걸음 떨어진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불을 끄고 누우면 잠시 각자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그는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차유진이 깨고 나서 몇 시간 동안은 긴장이 풀려 거의 기절하듯 곯아떨어졌으니 그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오랫동안 옆에 두었던 세계가 사라져도 아직 크게 실감은 나지 않았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가끔은 마치 차유진이 쓰러졌을 때부터 지금까지가 전부 꿈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차유진은 쓰러져 있고 그는 차유진이 멀쩡한 상상 속에 빠져있는 것처럼. 그는 옆자리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벽을 타고 넘어오는 다른 방들의 자잘한 생활 소음과 가을벌레 소리 사이에 고른 숨소리가 섞여 울렸지만, 그것만으론 불충분했다. 그는 제 팔을 괸 채 차유진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차유진.”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상대를 불렀다. 대답을 기대하고 부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왔다.
“왜.”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였다. 대답이 돌아올 줄 몰라 퍼뜩 놀랐던 그는 이내 몸을 늘어뜨렸다. 별것 아니었다고, 혹시 잠을 깨운 거라면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너 예전에 신기루 못 들어가는 거 괜찮다고 했잖아.”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신기루 바깥에 차유진 혼자만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물었을 때 돌아왔던 경쾌한 대답. 그 말을 들은 뒤 느껴졌던 이유 모를 꺼끌거림까지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그때 왜 자신이 서운해했는지를.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던 거다. 그가 차유진을 특별하게 느끼는 만큼. 차유진에게 아무래도 좋을 다른 사람과는 구분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 신기루가 둘 사이에서 간질간질한 암호나 비밀 같은 게 되어주기를 바랐던 거고, 그 신기루가 돌변하여 차유진을 삼키려고 했을 때는 그만큼 당황하고 겁먹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의 기억이 맞다면 차유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의아했다.
“나는 그래서 내가 신기루에 집중하는 게 네가 그렇게 화낼 일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어.”
그가 기어이 능력까지 써 가며 자신을 끄집어낼 것도. 형들에게 듣기로는 그가 신기루 속으로 빨려든 그 직후부터 차유진은 이미 신기루를 전부 태워버릴 마음으로 고집을 부렸다고 했다. 끝까지 그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그래도 잠시간은 형들의 판단을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김래빈 바보야?”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김래빈 결론 이상해. 타박이 긴 꼬리처럼 붙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유독 차유진에 관해서는 잘못 판단해왔던 게 사실이라 김래빈은 순순히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도 남은 일말의 억울함이 비쭉하게 다물린 입술로 남았다.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중요해. 신기루 아니어도 돼. 근데 그때 김래빈 신기루만 신경 썼어. 나 버리고 혼자서.”
조금 기다리자 한풀 꺾인 말이 흘러나왔다. 김래빈이 그렇게 찾고 싶던 답이었다. 차유진은 대체 어디에 그렇게 화가 났던 건지. 왜 위험하다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건지. 그러나 여전히 불명확했다. 외곽선을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는 디딤돌을 놓는 것처럼 신중하게 다음 말을 정했다.
“너, 나 아니어도 같이 놀 다른 사람 많잖아.”
“Holy sh…….”
불행히도 그리 적절한 돌을 고른 것 같지는 않았다. 차유진은 씹어 삼키듯 말끝을 흐렸지만, 새벽에 가까운 고요한 시간이었다. 그가 본래 붙이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김래빈 역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차유진은 쉽사리 다음 답을 주지 않았다.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도 난 것 같았다. 돌아오지 않는 답 대신 그 부산스러운 반응을 보며 그는 천천히 가능성을 판가름했다. 몇 가지 미심쩍은 가능성은 제하고, 차유진이 과거에 했던 말과 행동을 더듬었다.
그러자 조금 이상한 길이 튀어나왔다. 거기 있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이었다. 그는 설마 하는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혹시 차유진, 너한테도 내가 특별해?”
잠시 죽음 같은 침묵이 흐르고, 이어 빠르게 쏟아지는 투덜거림이 저 너머에서 건너왔다. 영어 혹은 스페인어. 어느 쪽이든 그가 뜻을 해석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런데도 알 것 같았다. 아주 작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사부작댔다. 그런 간질거림이 계속될수록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차유진. 그는 상대를 한 번 더 불렀다.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자신의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베개 하나. 이불 하나. 차유진의 침대도 마찬가지겠지. 그는 자신의 베개를 집어 들었다.
“나 그쪽으로 간다.”
“What???”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기숙사의 가구들을 건드리지 않고도 쉽게 그의 몸을 이끌었다. 이불은 어디에 구겨두었는지 이불도 덮지 않고 침대에 건성으로 뻗어있던 차유진이 그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것처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더 빨랐다. 상대의 침대에 한쪽 무릎을 걸친 김래빈이 차유진을 대충 밀었다. 힘도 별로 주지 않은 채 팔로 슥 밀어낸 게 다인데도 주춤주춤 물러난 차유진이 아연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김래빈 미쳤어?”
“조용히 해. 다들 자는 시간이잖아.”
검지를 입술에 댄 채 속삭이면 그 어둠 속에서도 차유진의 눈썹이 제법 떨떠름한 곡선을 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무릎으로 상대를 조금 더 밀고는 기어코 침대의 틈새를 찾아 끼어들었다. 두 명분의 무게에 눌린 일인용 침대가 처량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숙사 침대가 대개 그렇듯 그들의 방에 있는 침대도 좁았다. 차유진 하나로도 넓지 않을 침대에 김래빈까지 끼어들자 졸지에 구석에 구겨지게 된 차유진이 침음을 냈다.
“이거 김래빈이 말했던 ‘아닌 밤중에 홍두깨’야…. 나 이제 알겠어.”
“미안.”
사과는 하지만 비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 그를 한동안 살피듯 바라보던 차유진은 결국 푹 한숨을 쉬더니 그의 팔을 휙 잡아끌었다. 엇 하는 사이 그와 침대 사이 틈새로 파고든 차유진이 제 몸 위에 그를 반쯤 얹듯 끌어안았다. 그가 뒤늦게 놓친 베개가 차유진의 어깨 너머로 툭 떨어졌다. 몸을 구기는 대신 서로 넓게 맞닿는 걸 선택한 차유진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서 김래빈 왜 왔어?”
몸 전체로 차유진의 체온이 닿는다. 숨소리가 엉키고, 차유진이 말하고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생의 증거였다. 그렇게 차유진이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조금 더 편하게 자세를 고친 김래빈이 소리죽여 중얼거렸다.
“네가 깨어난 게 혹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빈번하게 들어서 인터넷에서 그나마 신뢰할 만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본 결과, 이건 일종의 불안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어. 하지만 우리가 겪은 일이 범상치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섣불리 상담할 수도 없고, 자야 하는 너에게 계속 말을 걸 수도 없잖아. 그러니 너한테도 내가 특별하다고 한다면 같이 자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에게 일방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는 부담을 지운 것 같기도….”
…no middle ground… 어쩌구.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차유진의 영어가 김래빈의 등 뒤로 흩어졌다. 등 언저리에 헐겁게 얹혀 있던 차유진의 팔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 곁까지 올라온 손이 조심스럽게 뺨에 닿았다. 톡 하고 뺨의 점을 건드린 손가락이 가만히 접히더니 이번에는 손마디가 그 근방을 슬슬 건드렸다. 도독하게 튀어나온 손가락뼈가 귀와 턱 부근을 스치고, 이어 엄지손가락이 진득하게 뺨을 문질러댔다. 어딘가 익숙한 그 동작을 기억 속에서 더듬다가 그는 신기루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도, 그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뭐라고 했더라. 생각 On-Off 스위치라고 했던가.
“차유진. 너 또 내가 지금 생각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
의외로 차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귓가에서 차유진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간지러웠다. 그러면 뭐지? 그는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의아한 그의 눈과 뜻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차유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김래빈 한국에선 특별한 사이 의미 달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차유진.”
“김래빈 나한테 특별해지고 싶다고 했어. 나도 똑같아. 그럼 나랑 김래빈 특별한 사이니까, 만지고 싶어서 만져. I mean, 그러니까 김래빈이랑 나 이제, …연애? 이거 맞아?”
아. 김래빈의 입에서 얼빠진 탄성이 새어 나왔다. 차유진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게, 그러니까. 눈앞에 자꾸 똑같은 말들이 떠다녔다.
특별한 사이, 연애, 그러니까, 차유진이랑, 내가?
갑자기 생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애써 다시 뇌를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당황을 타고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물론 상호 간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바로 연애겠지만, 차유진, 내 생각엔 내가 말했던 특별한 관계라는 게, 꼭 연애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 물론, 다른 친구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지점을 함께 하고 싶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우정보다는 조금 더 깊은 관계를 상정한 거라고 봐도 큰 문제는 없겠지만,”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그의 뺨에 그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김래빈은 그제야 차유진의 얼굴이 제게 가까워졌다가 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점이 있는 그 부근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차유진의 손이 어루만지던 그곳에.
그는 우뚝 말을 멈추었다. 생각을 켜고 끄는 스위치가 진짜 그곳에 있나 보지. 우습게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정말로 그때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나 먼저 허락 없이 한 거 사과해. 김래빈 그래서 싫어?”
아니. 의식하기도 전에 그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무의식중에 나온 본심에 당황한 채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여전히 차유진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래도 마주친 눈이 웃는 건 알았다. 그 웃음을 보자 또 말이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럼, 나랑 연애는?”
“그것도 싫은 건 아닌데….”
OK. 김래빈 동의했어. 차유진은 손쉽게 문제를 매듭지어버렸다. 우리 이제 만나는 사이야. 문제는 그 제멋대로인 말에도 그가 반박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얼렁뚱땅 결정되어버린 일인데도 꼭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차유진도 성인이고 나도 성인이니 상호 동의를 전제한다면 교제하는 사이라고 우리의 사이를 규정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건가? 일단 내가 동의를 한 건 사실이긴 한데…, 차유진과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김래빈은 복잡한 심경으로도 저를 이끄는 손길을 따라 순순히 몸을 뉘었다. 내가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었나, 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보면 다시 그의 뺨에 손이 닿았다.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손길은 꼭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는 차유진이 말했던 것처럼 생각을 멈춰보기로 했다. 그는 손가락이 쓰다듬는 방향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예민하게 감각에 닿았다. 예컨대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은 차유진과의 거리나 조금만 고개를 기울이면 닿을 것 같은 입술 같은 것들이.
“어쩐지. 김래빈 침대 오는 거 너무 과감했어.”
차유진이 웃음기를 섞어 속삭였다. 김래빈은 느리게 차유진의 말을 이해했고,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차유진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를 깨달았다. 그는 약간 버벅대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혹시 내가 돌아가는 편이 너의 숙면에 더 도움이 될까, 차유진?”
“Nope. 그치만 자세 바꿔야 해.”
이제는 늦었다며 그를 붙든 차유진은 일단은 성인 남성일 그를 조금 덩치가 커 골치 아픈 인형 모양새로 쉽게도 운반했다. 어어 하는 사이 그는 벽과 차유진 사이에 안착했다. 차유진은 그의 위에 이불을 마구 덮더니 허리 즈음에 팔을 감아 당겼다. 그는 졸지에 바디필로우가 되어 침대와 차유진 사이에 꽉 끼었지만 차마 불평할 순 없었다. 반쯤은 그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이었다. 김래빈은 더 이상 자책하는 대신 자신의 잠버릇이 나쁘지 않기를 바라며 얌전히 눈을 감았다.
“잘 자, 김래빈.”
어둠 속에서 차유진의 목소리가 울리고 이번에는 입술에 가볍게 아까의 감촉이 닿았다. 그는 눈을 떴다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차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가, 다시 질끈 눈을 감았다가, 한참 뒤에야 너도, 하고 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잠자리는 무겁고 불편하고 어쩐지 뒷목이 화끈거렸다.
그는 그간의 부재에 대해 교수님과 사서 선생님께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무단결석이나 무단결근 처리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제는 어쩔 수 없이 태반이 밀렸다. 그는 한동안 빠진 수업의 필기를 동기에게 구하러 다니며 정신없이 과제를 해야만 했다.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쁜 날들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 와중에도 그와 차유진은 시간을 내어 단풍을 보러 갔다. 한번 크게 비가 쏟아져 이미 많은 잎사귀가 떨어진 뒤였는데도 반쯤 진 단풍 아래에서 여전히 차유진은 화사했다.
‘그럴 줄 알았지.’
단풍의 알록달록한 색 아래에서도 차유진은 묻히지 않고 어울릴 줄 알았다. 사실은 단풍이 한창일 때부터 생각해왔지만 그간은 둘 사이에 일종의 냉전 상태가 지속되던 때여서 놀러 가자고 편하게 말 붙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일찍 말할걸. 핸드폰으로 차유진의 웃는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며 김래빈은 내심 아쉬워했다.
친구였을 때보다 조금 더 친밀하게, 때로는 서로를 의식하여 어색하게, 가끔은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소소한 대화와 장난이 오갔다.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조금씩 더 늘어났다. 그의 생일에는 케이크를 사 와 둘이 작게 축하를 했다. 차유진이 고른 병맥주는 과일 향이 강하고 달았는데도 한 병을 다 비우니 그것도 맥주라고 서로 섞이는 혀끝에 옅게 알콜 기운이 돌았다. 여전히 신기루는 느껴지지 않았고 가끔은 그 사실에 적응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는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는 박문대와 했던 대화를 저도 모르게 잊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한 이세진이 급박하게 그를 찾기 전까진.
‘래빈아. 박문대가 혼자서 신기루에 들어갔는데, 그런데 나오질 않아. 지금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아니, 이미 넘었을지도 모르는데…, 아, 진짜 미치겠네. 너 어디야? 여기 와줄 수 있어?’
신기루가 다시 나타났다고 했다. 막내들은 최근에 일이 많았으니 신기루에 혼자 들어가겠다고 박문대가 말했을 때도 이세진은 그러려니 했다고 했다. 김래빈이 411호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그 혼자 신기루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삼십 분이 넘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둘이 들어가다가 혼자 들어가니 평소보다 오래 걸리는 모양이라고 웃기만 했다고 이세진은 털어놓았다.
이세진이 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 건 박문대가 신기루에 들어간 지 오십 분이 넘었을 때부터였다. 이세진은 전화기 너머로 박문대가 그와 방 안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후로 한동안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걸 기억하고 있다며 넌지시 그때의 대화 내용을 물었다. 김래빈은 일단 이세진이 알려준 곳으로 이동하며 그때 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전달했다. 마음이 급해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마저도 가만히 서 있기가 어려웠다.
그가 그곳에 도착하자 초조한 얼굴을 한 선아현이 그를 맞았다. 세진이가, 진을, 버티고는 있는데…. 말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문대 형께서는 아직도 나오시지 않은 겁니까?”
선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손을 맞잡은 채, 손가락이 연신 다른 쪽의 손가락을 눌러댔다. 그 뒤로 이세진이 걸어 나왔다. 한 팔을 손수건으로 꾹 누른 채였다. 한 손에는 피로 쓴 글씨가 덕지덕지 묻고 너절해진 부적 무더기가 들려 있었다.
“진 그냥 뺐어. 더 버틴다고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 진짜 봉인해버리면 그게 더 문제라.”
피로한 기색이었다. 김래빈과 눈이 마주치고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을 정도로. 그 소리가 꼭 그에 대한 책망으로 들려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세진은 상황 파악이 빨랐다. 그가 박문대와의 대화를 조금 전한 것만으로 금세 그의 생각을 따라잡았다.
‘그러니까 문대가 사실 신기루의 주인이 아니었고 그 주인이 신기루에 들어간 지 7년이 넘었다는 거지? 신기루의 주인인데도 7년 동안 나오지 못한 거라면… 솔직히 지금은 멀쩡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이는데, 나는. 맞아?’
‘…문대 형께서는 몸이 바뀌셨다는 변수가 있어 꼭 그렇게 확답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확률로만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그걸 박문대도 알았다는 거고.’
‘…….’
‘…대체 이 자식은 무슨 생각으로….’
전화상으로 이세진과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그와 이세진 둘 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침묵 속에서 김래빈은 이세진 역시 그와 비슷한 결론을 낸 게 아닐까 짐작했다.
본래의 신기루가 노리던 게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그리고 이제는 그를 찾을 확률도 아주 낮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그래서 아주 낙담하거나, 위험한 시도를 하려 하거나, 혹은 신기루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졌다면.
“래빈아. 너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 그런데, 알겠지만 나나 선아현은 저 안으로 못 들어가.”
솔직히 위치도 모르고. 이세진의 시선이 망연히 빈 공간을 더듬었다. 다른 이가 알려주지 않으면 위치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아주 오래된 증오 같은 것이 그 시선에 묻어있었다. 나는, 그러니까 못해. 이세진이 힘겹게 입을 떼었다. 지혈을 하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허탈한 듯 축 늘어졌다.
“네가 들어가서 걔 좀 끌고 나와주면 안 될까?”
그런 부탁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달려오면서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오는 길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안타까워하고 갈등하며 해야 할 말을 골랐다. 그래서 김래빈은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을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 달려온 것이 어쩌면 괜한 짓처럼, 최악의 경우 일종의 기만처럼 여겨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되는 이유는 직접 얼굴을 보며 설명해야 한다고. 그리고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무어라도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한다고.
“왜?”
“신기루를 다 태운 후로 저도 그 세계와 연결이 끊어져서, 사실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아주 희미한 기척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신기루가 정확히 어디에 열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낯선 무지와 공백이었다. 이세진은 그 답을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문대 형께서는 제가 못 들어가는 걸 이미 알고 계십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이후 통화를 하면서 그와 박문대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었다. 아마 박문대가 이세진에게까지는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세진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그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지만, 하필 그쪽에는 선아현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하…. 아니, 그러면 박문대는, 그러니까, ……아, 래빈이 네가 힘들다면 그래, 유진이라도 오라고 하자. 끄집어내는 게 안 된다면 태우는 거라도 해야 하니까….”
한층 불안하고 간절해진 목소리였다.
“차유진은,”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차유진이 그를 찾으려다 쓰러졌던 게 고작 몇 주 전이었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 때까지 신기루를 태우려면 또 얼마나 힘을 써야 하는가.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는 저도 모르게 재고 계산했다. 어쩌면 박문대의 목숨이 달려있는지도 모르는데도. 차유진은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낯설고 이기적인 거부감이었다.
그게 아무리 순간이라도, 분명 비겁한 판단이었다. 김래빈은 그런 자신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과 거부감이 뒤섞인 혼란을 애써 거스르며 그는 차유진에겐 자신이 연락해보겠다며 핸드폰을 든 채 잠깐 뒤로 빠졌다. 그래서 그는 선아현의 중얼거림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 순간 연결된 통화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래빈아. 있잖아. 정말로 구하고 싶으면, 유진이처럼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맞겠지?”
“아, 차유진! …잠깐만, 형? 죄송합니다만 제가 잘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맞아. 원하는 게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기대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선아현은 그의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최근 그의 연락을 부쩍 반기는 차유진은 금세 용건을 재촉했고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 대신 상대에게 현재의 긴급한 상황과 위치를 설명하는 쪽을 택했다. 차유진과 통화하는 그의 뒤로 천천히 선아현이 지나갔다. 박문대와 그 사이의 대화를 모르는 차유진을 이해시키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잠깐 기이한 압박이 스치고 지나갔던가.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비명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가 놀라 허겁지겁 통화를 종료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화를 내는 이세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박문대가 나와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랐다. 스스로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세진이 선아현에게까지 저렇게 화를 내지 않았을 테니까. 박문대는 지친 와중에도 무언가 초조한 것 같았고, 선아현은 유독 창백해 보였다. 선아현의 얼굴에서 뿔과 비늘이 일렁이는 것처럼 드러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주 그냥 둘 다 제멋대로야. 나는? 내 생각은 안 하지?”
달래고, 다시 언성이 높아지고, 그러다가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고. 쉴 새 없는 말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다. 그들은 김래빈이 거기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는 한 발짝을 떼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런데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그는 형들에게 썩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차유진을 부르자는 말에는 개인적인 이유로 머뭇거렸다. 선아현을 말릴 기회도 눈치채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그런 주제에 이제야 나선다는 게 혹시 경우 없는 짓은 아닐까.
애초에 내가 저들 사이에 끼어들 수가 있나.
“김래빈.”
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그의 어깨에 손이 닿았다. 차유진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차유진이 그에게 물었다. 그는 답하지 못했다. 잠시 형들을 건너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던 차유진은 그에게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깨달은 사실을 확인받듯이 물었다.
“내가…, 지금 형들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지?”
“응. 나 사정 모르지만 그래도 알아. 이거 형들 일이야.”
무정하리만치 깔끔한 대답이었다. 그래.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래, 하고 조금 씁쓸하게 반복했다. 여전히 셋 사이에서는 그가 알 수 없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는 어렴풋이 이해했다. 형들이 좋은 사람이고 박문대와 그가 신기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저 테두리 안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지금 여기에는 그의 자리가 없다고.
“가자. 김래빈.”
차유진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네 자리는 여기라는 것처럼. 그는 그 손을 힘주어 쥐고는 마지막으로 형들을 돌아보았다. 박문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박문대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묵인이었다. 차유진에게 이끌려 그는 돌아섰다. 외면했다. 누군가들의 7년이 점점 등 뒤로 멀어졌다.
선아현이 자신의 수명을 걸어 처용의 힘을 빌려 신기루를 강제로 갈라버렸다는 걸, 2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요청이 선아현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월권행위였기에 그렇게 깎인 수명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다는 걸 그는 조금 나중에 알게 되었다.
*
오랜만에 박문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래빈이 411호에 도착했을 때 박문대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화면에서는 영화로 보이는 장면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음으로 틀어두었는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자막이 있어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지 않았다. 마침 화면을 스치는 익숙한 구도에 그는 그 영화가 〈러브레터〉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세대 기준으로는 한참 이전에 개봉한 영화였다. 그래도 워낙 유명해서 과제를 하기 위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기말은 잘 봤냐.”
소리 없는 이야기를 뚫고 박문대가 물었다.
“아직 성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온다면 기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
박문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걸 물으러 부르신 건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고개는 화면에 고정한 채로, 그러나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진 않은 얼굴로 박문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네가 믿을진 모르겠지만 별로 뭘 어떻게 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 혼자 고민하고 싶은 게 있었고, 그냥 딴생각을 좀 하다가 실수로 시간을 놓친 게 다야.”
박문대 혼자 신기루에 들어갔던 날의 이야기였다.
“…세진 형과 아현 형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변명을 들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는 그렇게밖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 뒤로 셋이 다시 화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박문대와의 연락이 오랜만이었던 만큼이나 따로 이세진과 선아현에게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박문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걔들한테도 똑같이 말했고. 근데 너도 그렇게 가고 마음 편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느라 심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가끔은 그때 그렇게 돌아선 게 떠올랐다. 형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내가 더 할 수 있었던 건 없었을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못 이겨서 해야 할 걸 외면한 건 아닌지. 그 불안 중 일부를 그는 차유진에게 털어놓았다. 거기에는 차유진을 부르자는 말에 잠시 머뭇거렸던, 그의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차유진은 의외의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나 불러도 못해. 내 불 김래빈 신기루만 태울 수 있어. 문대 형도 그거 알아.’
‘뭐?’
왜냐면 문대 형 신기루 나한테 안 와. 김래빈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차유진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는 말문이 막혔다. 박문대의 신기루가 차유진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건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차유진의 능력에도 적용되는지는 몰랐다.
‘그러면 왜 왔어?’
‘김래빈도 갔잖아. 걱정하면 가는 거 당연해.’
차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우습게도 그 말에 눈앞이 명확해졌다. 형들이 걱정되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어도 갔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때라서 돌아왔다. 그랬다. 그냥 그런 거였다.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 된 그를 보며 차유진은 이번에도 제 말이 맞았다며 으쓱댔다. 김래빈은 그날 사람이 귀여우면서 동시에 얄미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 아무래도 그날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한동안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만 그래도 차유진 덕에 곧 괜찮아졌습니다.”
그래. 너도 혼자가 아니었지. 중얼거린 박문대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박문대는 어쩐지 표정이 조금씩 더 떨떠름해지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운을 떼었다.
“생각을 정리하려 하셨던 건, 그래서 잘 되셨습니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것처럼 표정을 가다듬은 박문대가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이제는 마음 정리를 끝낸 것처럼 차분한 얼굴로 덧붙였다.
“류건우의 실종신고를 하기로 했어. 어쨌든 지금 나는 류건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니까 청우에게 맡기기로 했고. 그렇게 해두면 나중에 자연스럽게 사망 처리도 할 수 있게 되겠지.”
아직 찾는 걸 포기한 건 아니지만, 일단 거기까진 하기로 했어. 사실을 기술하듯 담백한 어조였다. 둘은 다시 침묵 속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한국도 어느덧 겨울의 초입이었다. 같은 계절인데도 서울의 바람은 강원도보다 차고 날카로웠다. 추운 날 겨울 배경의 영화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손이 시린 것 같아 그는 손을 문지르며 흘러가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제목에는 사랑이 들어가는데도 이별의 장면이 훨씬 많은 영화였다. 둘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엔딩롤이 올라가자 박문대가 전원 종료를 눌렀다. 화면이 까매졌다.
“그래서 신기루가 없는 삶은 어때. 살 만하냐?”
박문대는 그를 힐끔 바라보다 평이하게 물었다. 그는 곰곰이 몇 주 동안의 삶을 반추했다. 간혹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가끔 신기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낯설긴 해도, 원래도 한동안은 무시하며 살았으니 일상적인 측면에서의 불편은 없습니다. 홀가분하거나 기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슬프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신기루를 신경 쓰기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본래도 김래빈의 삶에서 신기루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새 그의 생활은 온통 작곡과 차유진이 차지했다. 전자는 과제와 기말 때문이었고, 후자는 연애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연애는 대부분은 그를 웃게 했지만 아주 가끔은 그를 당혹시켰다. 신기루를 다 태워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을 때도 있었다. 언젠가 신기루가 다시 돌아올 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말하면 박문대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곧 종강이겠네. 방학 계획은?”
“예! 이미 종강은 했습니다. 명절 즈음해서는 본가로 내려갈까 합니다. 차유진도 이번 방학 동안에는 집에 돌아가 봐야 한다고 해서 가능하다면 능력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오도록 권유했습니다.”
차유진은 원래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려 했다. 그도 사실은 같이 가고 싶었다. 그가 자랑하던 바다와 파도, 그가 자라난 공기가 궁금했다. 하지만 미국 여행을 준비하기엔 비행기표부터 값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 준비된 돈으로는 불가능했다. 가족에게 손을 벌릴 순 없었다. 내년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생각한다면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맞았다. 대신 둘은 메세지도, 영상통화도 자주 하기로 약속했다.
캘리포니아와 한국의 시차는 16시간. 머리를 맞대고 서로가 통화하기 편할 시간을 계산하던 때를 떠올리며 그는 슬그머니 웃었다. 우리는 Long Distance 많이 연습해야 해. 김래빈 군대 가니까, 하고 야무지게 말하던 차유진이 떠올라서였다.
“래빈아.”
박문대가 그를 불렀다. 마치 그의 할머니가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를 부를 때와 비슷한 결이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서, 그는 습관적으로 표정을 고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예.”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보던 박문대는 이어지지 않는 뒷말에 물음표를 띄우는 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한숨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됐어. 온 김에 저녁이나 먹고 가라.”
아.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이후에는 차유진과의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오랜만에 마주하는 형의 호의였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차라리 차유진을 이쪽으로 부르자는 마음과 그러면 문대 형께서 한 명분의 밥을 더 차리는 번거로움을 감내해야 한다는 판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그는 일단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형. 혹시 차유진을 불러서 같이 먹어도 될까요?”
김래빈의 대답이 늦어지는 걸 의아하게 보고 있던 박문대가 그 말에 탁, 하고 뭐가 풀린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걔랑 선약 있냐?”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혹시 입을 하나 늘리는 게 형께 큰 부담이 된다면 제가 옆에서 돕겠습니다.”
그럼 그냥 가라. 해탈한 얼굴로 박문대가 그렇게 말했을 때 김래빈은 조금 당황했다. 그걸로도 끝이 아니었다. 박문대는 힘이 다 빠진 자세로 휙휙 손을 흔들었다. 마치 귀찮은 걸 쫓아내기라도 하듯. 그건 차유진이 이곳에 오는 걸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는 긴장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차유진이 그사이에 박문대에게 뭔가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설마 차유진이 형께 뭔가 결례를 저지른 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대신 사과를…!”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가. 둘이 약속 먼저 했을 거 아냐. 내가 그 사이에 끼는 건 좀.”
이상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박문대가 하는 말은 꼭 그와 차유진 사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지만 그는 말한 기억이 없었다. 차유진이 말한 걸까. 그는 어리둥절한 채로 등 떠밀리듯 갈 준비를 했다. 현관과 거실을 가르는 중문에 기대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박문대가 김래빈, 하고 그를 다시 불렀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박문대는 그를 보고 있었지만, 그 눈 속에는 그가 없었다. 마치 조금 더 먼 어딘가를 보고 있거나 혹은 과거의 어느 시점을 보고 있는 것처럼.
“너는 나처럼 신기루가 삼키게 내버려 두지 마. 너든, 걔든.”
이어 박문대는 한층 가벼워진 어조로 농담처럼 덧붙였다. 하긴. 차유진이 질기게 매달려있을 것 같긴 해. 박문대는 그 말끝에 미소를 걸었지만 김래빈은 그 말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각오를 담아, 그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박문대는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현관을 나섰다. 조금씩 좁혀지는 문 너머로 박문대가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대신 함께 저녁을 먹을 상대를 찾는 모양이었다. 상대방과 무어라고 말을 주고받는 그 얼굴은 다행스럽게도 그다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박문대를 바라보았다가 몸을 돌렸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아파트의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는 차유진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차유진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 아래에서 선명히 보였다.
크게 내딛은 한 걸음씩들이 더해져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설프게 두른 목도리 사이로 드러난 목이 퍽 추워 보여 그는 손을 뻗어 그 매무새를 꼼꼼히 다잡아주었다. 나 국물 좋아. 눈을 한껏 접어 웃은 차유진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 사이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파고들었다.
“이 주변에 우동 잘하는 집이 있대.”
“그럼 우리 거기 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별거 아닌 이야기들이 두런두런 흘러나왔다. 이제 그와 차유진 사이에는 신기루가 없다. 그래도 김래빈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뭔가 더 특별하지 않아도 서로의 감정, 혹은 의지로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아직 둘 사이에는 김래빈의 군대 문제도, 언젠가 그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차유진의 문제도 남아있었다. 졸업도 취업도 아득히 멀었다. 언젠가 또 모여들 신기루가 그나 차유진을 새롭게 노릴 수도 있고, 어쩌면 차유진의 능력은 언제까지고 미지수로 남을지도 몰랐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새롭게 생긴다면 둘은 이전보다도, 형들보다도 더 격하게 싸울 수도 있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둘의 앞날은 알 길이 없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도 어느새 김래빈은 웃고 있었다. 괜찮았다. 차유진이 옆에 있으면 그냥, 어떻게든 괜찮아질 것 같았다.
서로 속도를 맞춘 걸음 소리가 골목을 지나 조금씩 멀어졌다. 마지막까지 흔적처럼 남았던 웃음소리도 서서히 흐려졌다.
어떤 이야기들이 사라진 골목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적막해졌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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