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배세] 언젠가의 배드엔딩

간수 선아현 x 해커 배세진

Roll the Dice 세계관

“으윽….”

괴로운 신음과 함께 배세진은 눈을 떴다. 머리가 웅웅거렸다. 지끈거리는 뒷통수를 짚으려던 배세진은 손은 물론이고 온몸이 옴짝달싹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

뒤로 고정된 손목을 잡아당기니 찰칵찰칵하고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수갑? 시선을 내리니 몸통은 밧줄로 의자와 함께 꽁꽁 묶여있었다. 발목에는 케이블타이까지.

완전한 구속상태. 이에 당황한 배세진은 몸을 버둥거리다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아윽!”

거친 바닥과 그대로 충돌한 충격에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곧 고통은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뚜벅, 뚜벅.

익숙한 발소리.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리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도 옷 안에 숨겨둔 면도날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제발, 제발….’

가죽장갑이 아슬아슬하게 면도날 끝을 스치는 그 순간,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배세진은 숨을 죽이고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는 가지런한 군화 두 켤레가 놓여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서늘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금발의 간수가 있었다.

“깼네.”

“…!”

그의 목소리는 차가울 거란 예상과 다르게 의외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높낮이 없는 차분한 말투와 그가 들고 있는 진압봉은 그를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마 저걸로 제 머리를 후려쳤으리라.

배세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날 어떻게 할 셈이지?”

“…….”

금발의 간수는 배세진의 물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와 함께 나뒹구는 배세진을 가만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배세진은 빠르게 간수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몸을 꿈틀거렸다. 일단 이 망할 의자에서 벗어나야했다. 하지만 배세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금발 간수는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윽?!”

간수의 손은 결코 거칠지 않았다. 볼에 닿는 면장갑의 감촉은 부드러웠고 간수는 깃털처럼 섬세한 손길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세진이 신음을 낸 것은 얼굴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었다. 배세진은 조금 늦게, 그것이 방금 의자와 함께 넘어지면서 난 것이라는 걸 알았다.

“…….”

배세진을 훑는 간수의 투명한 눈동자는 오싹하다고 해야 할까, 왠지 모르게 보고 있으면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는 배세진에게 얼굴 외에 추가적인 부상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의자와 함께 배세진과 일으켜 세웠다. 생각보다 인도적인 대우였지만, 구속을 풀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저기?”

“…….”

배세진은 아무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간수에게 당황했다. 그의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붙잡아 놓았으면 감옥에 집어넣던가 정보를 얻어내려하던가 둘 중 하나는 할 줄 알았는데….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배세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있지? 그들도 붙잡았어?”

만약에 류청우가 무사하다면 어떻게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담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배세진의 얼굴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간수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 지금 움직이고 있는 건 너뿐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 배세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간수의 입술에 완전히 덮여버렸다. 간수의 속눈썹이 당장이라도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의 금발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얽혀간다. 아니 그보다 이건….

간수는 면장갑으로 배세진의 다치지 않은 쪽의 볼을 쓸어내리며 행위를 이어갔다. 배세진이 목을 뒤로 빼면 더 깊이 다가와 입술을 짓누르며 숨을 섞었다. 마치 사막에서 물을 원하는 사람처럼, 갈구하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배세진은 당장이라도 간수를 떼어내야 된다고 생각했으나, 속눈썹 사이로 간절히 빛나는 녀석의 눈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하아… 나,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결국 간수가 스스로 물러난 뒤에야 배세진은 숨을 고르며 물을 수 있었다. 간수는 답했다.

“계속, 같이 있자.”

“…뭐?”

“이대로 끝내지 말고 계속 나랑 놀아.”

여전히 높낮이 없는 말투였으나 배세진은 저 말 끝에 ‘제발’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배세진은 마음이 흔들렸다. 배세진은 그런 자신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이름 모를 간수는 진압봉으로 그를 때려서 기절시키고, 온몸을 구속하고, 심지어 멋대로 키스까지 해댔는데.

아마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 때문일 거라고, 배세진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여기는 이상해. 죄수들에게 정체모를 약물을 투여하고 괴상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어.”

“…….”

“게다가 류청우와 김래빈…. 여기서 만난 다른 죄수들까지. 모두 어떻게 됐는지 난 알지 못해.”

배세진이 말을 이어갈수록 간수의 눈에는 빛이 사라지고 익숙한 체념이 나타났다. 마치 배세진의 결론을 이미 알아버렸다는 듯이.

“알아야겠어. 이곳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도.”

…그렇구나. 결의에 찬 배세진의 외침에도 간수의 대답은 어딘가 쓸쓸했다.

간수는 후회하지 않겠어? 같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배세진 앞에 선 간수는 무표정으로 진압봉을 높게 들어올렸다. 배세진은 문득,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또 봐.”

망설임 없이 진압봉이 배세진을 향해 똑바로 내리쳐지자 순식간에 세상은 암전했다. 배세진도 그를 구속했던 의자도 감옥도 모두 사라졌다.

금발의 간수―선아현은 무(無)의 세계에서 제 앞에 남은 유일한 결과창을 확인했다.

<GAME OVER>

선아현은 진압봉을 다시 허리에 채운 뒤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로지 그뿐이었기에.

선아현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감옥 복도에서 눈을 뜨고, 조심스럽게 감옥을 돌아다니는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그 날을―

 

[Bad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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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저… 괜찮, 았나요…?"

오늘 할당된 마지막 촬영까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선아현은 복작복작한 촬영장 속에서 익숙한 인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익숙한 인영들 속에서도 가장 작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다가가서 그렇게 물었다.

“응? 어! 완전히 잘나왔어. 감독님도 너 화면 잘 받는다고 칭찬하더라!”

배세진은 현장에서 멤버들의 연기지도와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맡고 있으면서도 힘든 기색을 티내지 않으며 웃는 얼굴로 선아현의 등을 툭툭쳤다. 하지만 그 작은 스킨십에도 선아현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형…! 괜, 괜찮다는 게 그게 아니라, 아까 그거요….”

“…?”

“저, 저희 아까 같이 촬영하다가 그… 키, 키, 키스…….”

뒤로 갈수록 선아현의 목소리는 희미해져서 마지막 부분은 귀를 선아현의 입가에 가져다 댄다해도 듣기 어려웠다. 배세진은 선아현이 왜 저런 반응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무언갈 깨닫고 말했다.

“아, 아까 촬영하다가 잘못해서 입 닿았던 거?”

 "……!!"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때 당시 상황이 떠올라 선아현은 달아오른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하니 연기를 하다 세진 형과 그, 키, 키스를 하게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원래 시나리오에 그런 내용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저 게임 속 간수 선아현이 해커 배세진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대사를 말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만 자신이 거리감을 잘못잡아서 그대로 입술이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멋대로 입술을 박아버린 것도 잘못이었지만, 아직까지도 배세진과 입을 부딪혔을 때 느낀 말캉한 감각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선아현의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저 형은 과연 그때 어떻게 느꼈을까를 궁금해 하는 건 그게 저의 첫 입맞춤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정작 피해당사자인 배세진은 선아현과 입술이 부딪힌 걸 키스로 분류하지조차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수. 어쩌다 손이 엄한데 닿는 것과 비슷했다. 불쾌할 수는 있어도 상대가 선아현이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그 뒤로도 몰아치는 촬영에 배세진은 금방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었다. 사실, 입술이 닿았다기엔 거의 스친 거나 다름없기도 했고.

그래서 배세진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평소보다 배는 조심스러워진 선아현의 태도를 낯선 촬영장에서 실수했기 때문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렇기에 실수에 대한 선아현의 부담감을 덜어주려는 목적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런 건 촬영장에서 자주 있는 일이고.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네?!”

NG가 나도 괜찮은 컷은 따로 편집해서 붙이니까, 따위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선아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우들은 자주 서로의 입이 그, 닿거나 한단 말이야?

원래도 형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배세진이 무척이나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억울해졌다. 선아현에게 배세진과의 입맞춤은 오늘 밤 꿈에서도 나올 것 같이 지금도 가슴이 간질간질하게 하는데, 배세진에게는 수많은 연기 중 하나밖에 안 된다니.

“자, 잠깐, 선아현 너 울어?!”

배세진이 당황해서 선아현의 팔을 붙잡았다. 선아현의 눈에서는 진주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저는 그게 첫키스라…….”

선아현은 펑펑 눈물을 흘려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키스?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묻기엔 선아현의 우는 모습에 압도당한 배세진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선아현을 이끄는 게 먼저였다. 촬영장 구석에서 배세진은 선아현의 등을 두드리며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그, 너무 자책하지 말고….”

왜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배세진은 우는 동생을 어떻게든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형이니까! 그래서 배세진은 고민 끝에 어렸을 적 그가 울 때, 자신의 어머니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끌어안는 것 말이다.

“혀, 형?”

“쉬이―”

어머니가 그랬듯 선아현을 품에 안은 배세진은 조심스럽게 그를 쓰다듬었다. 선아현은 순간 몸을 움찔거렸지만, 배세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이게 맞나? 싶긴했지만 선아현의 울음이 점차 잦아드는 걸 보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배세진은 선아현의 흐느낌이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뒤 포옹을 풀었다.

선아현은 울어서 그런지 목덜미까지 새빨갰다. 얼굴이 눈물로 축축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웠다. 배세진이 선아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줘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선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형….”

“응…?”

선아현이 살짝 속눈썹을 내리깔자 고여있던 눈물이 또르륵 떨어진다. 그조차 화보 같았다.

근데, 어라? 선아현이랑 나 지금 좀 가깝지 않나? 촬영할 때야 선아현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든 그때 자신은 배세진이 아닌 해커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이건 모두 연기였으니까. 상대도 선아현이 아니라 금발의 간수라는 캐릭터였고.

하지만 지금 선아현은 간수복을 입고 있어도 테스타의 선아현이고, 자신 역시 배세진 본인이다. 연기할 때 빼고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선아현의 투명한 눈동자에 배세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혀, 형한테는 키스정도 아무렇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아니, 아무렇지 않지는 않지…? 그보다 키스따위 해본 적도 없다. 배우였다 해도 아역배우 활동이 다였으니 키스신은 없었고, 누구랑 연애해본 적도 없으니 당연했다.

타인과의 입맞춤, 그 비슷한 행위라도 해본 적은….

‘그러고 보니 선아현이 처음이잖아!’

키스라고 하기엔 약한 스침에 불과했으나 어쨌든 그랬다. 그때는 연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은 선아현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안 좋았다.

배세진은 파드득 몸을 물리며 외쳤다.

“아, 아니야! 나도 누군가랑 입이 닿았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

왜 이런 변명 같은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가오던 선아현의 얼굴을 멈추는 데는 성공했다.

“제가, 처음이에요…?”

선아현은 사슴같은 눈망울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화악 얼굴이 밝아졌다.

그 순간 왜 선아현과 입이 닿았을 때 속눈썹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금색 홍채와, 부드럽던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는지. 배세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얼굴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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