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큰문]장마 下

맞짝사랑

2차 by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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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대는 지금, 아주 빠르게 걷고 있다.

‘아슬아슬한데.’

휴대전화를 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집까지 다시 갔다 돌아오는 데 5분이나 소요됐다. 다행히도 비는 오지 않았다.

분명 오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습기 가득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아.’

박문대는 뛰기 시작했다.

비는 눈에 띌 정도로 점차 빠르게 쏟아졌다.

눈앞에 기다란 횡단보도가 보였다.

‘저것만 건너면···’

횡단보도까지 약 10걸음. 신호등은 아직 파란 불을 내뿜고 있다.

며칠간 고인 웅덩이에서 튀긴 흙탕물이 종아리에 묻었다. 박문대는 무릎에 조금 못 미치는 길이의 반바지를 입고 나온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몇 초 새 더 거세진 빗발은 온몸 위로 때리듯 떨어졌다.

박문대는 속도를 높였다. 비 따위 신경 쓸 게 못 됐다.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단 1분.

‘저거 지금 놓치면 3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신호등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걸어가는 초록색 사람 아래로 점으로 이루어진 숫자가 나타났다.

20초.

‘조금만 더.’

19초.

‘조금만.’

18초.

17초.

16초.

‘여유 있-’

안도와 쾌감의 미소가 번뜩이는 순간, 세상이 빠르게 아래쪽으로 돌아갔다.

철퍼덕.

“아윽.”

박문대는 낮은 신음을 내질렀다.

양쪽 무릎이 벌겋게 까져 있었다. 특히 오른쪽 무릎에선 새빨간 피가 상처 사이를 비집고 나와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상처에 고통을 더했다.

통증에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던 순간,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그에게 퍼져왔다.

“박문대!!”

빗방울에 점처럼 가려지는 시야 사이로 뛰어오는 이세진이 보였다.

“야!! 괜찮아?!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박문대는 바보처럼 멍하니 눈앞에서 한숨을 쉬고 제 무릎을 조심스레 만지는 이세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비 냄새 속에 가까이 붙은 이세진의 살 내음이 더해졌다. 쓰라린 상처 위로 옅게 불어오는 숨결이 따뜻했다.

“너 내가 전에도 걸으면서 딴짓하지 말라고 했었지! 이번엔 까진 걸로 끝났지만 만약 이러다 다음에 정말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이세진은 호통치고, 한숨을 쉬고, 원망하듯 박문대를 노려보았다.

순간 박문대는 빗소리와 말소리가 섞인 그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을 보았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 보일 수 있는 빛깔.

걱정으로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과 달리 머릿속은 이미 통제를 잃은 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동안 애써 무시해 왔던 무언가가 내뱉어지고 말았다.

“너 나 좋아해?”

양 무릎을 감싸던 이세진의 손이 일순 멈췄다.

그의 눈동자는 박문대에게 고정된 채로 그대로 굳어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의 장막 속에서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심장이 똑같은 박자로 뛰고 있는 것 같다는, 이상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빵!!

갑작스레 울린 경적 소리에 둘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장막은 어느새 무너지고 놀라울 만치 조용했던 주위는 다시 날카로운 빗소리와 도로 위 차들의 라이트로 가득했다.

이세진은 박문대를 부축해 반쯤 남은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낡은 건물의 그늘에 도착하고 나서도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카락 끝과 옷자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박문대였다.

“할 말 있다고 했었지. ···미안, 다음에 들어야겠다.”

그대로 뒤를 도는 그의 손을 이세진이 붙들었다.

“그렇게 젖어서 집까지 어떻게 가려고. 우리 집 근처잖아. 옷이랑 머리, 말리고 가.”

 

이세진의 집은 적당히 넓고 쾌적했다.

균형적으로 배치된 가구들, 잘 정돈된 방과 화장실, 가족사진이 담겨 있는 커다란 액자. 거기에 그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어딘가 전체적으로 사람 사는 집 특유의 온기가 돌고 있었다. 박문대는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가 빠르게 머릿속 한구석으로 집어넣었다.

“샤워실··· 써도 돼.”

이세진은 짧은 말을 건네곤 금방 부엌으로 사라졌다.

화장실 안에는 네 개의 칫솔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에 박문대는 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다 말렸으면 이거 입어.”

비죽 나온 이세진의 손이 흰 티와 반바지를 건넸다. 박문대는 말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수건걸이에 젖은 옷을 걸어두고 새로 받은 옷으로 천천히 갈아입었다. 옷에서는 익숙한 체향이 났다. 아까 폭우 속에서 깊이 맡을 수 있었던···.

박문대는 생각을 멈추고 즉시 이마 위로 손을 얹었다.

“하아······.”

‘빗물이 뇌까지 들어갔나. 미쳤다고 하필 거기서 그런 말을···.’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세진이 들고 있던 컵이 잠시 흔들렸다.

박문대는 그의 앞에 어설프게 서 있었다.

“물 마실래?”

이세진은 분명 자연스럽지는 않았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앞에 놓인 머그잔을 가리켰다.

가까이 온 박문대에게서는 그가 좋아하는 향이 났다.

“샤워했구나.”

“···어. 샴푸랑 바디워시, 잘 썼다.”

박문대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팔을 들어올려 목을 가볍게 쓸었다.

이어진 침묵 속에서 한 컵의 물은 빠르게 비워졌다.

“갈게.”

“우산 가지고 가.”

우산꽂이에서 검은 장우산을 하나 꺼내든 박문대는 뒤돌아 고개를 까닥이곤 그대로 문을 나섰다.

 

둘의 어색한 관계와는 상관없이 며칠 뒤 시험은 늘 그렇던 대로 시작됐다.

이세진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박문대를 맞았다. 박문대 역시 평소처럼 이세진을 대했다.

이 불안한 관계라도 이어갈 수 있길 바라며.

“문대문대, 답 맞춰보자.”

“어어.”

“내 걸로 부를게. 1, 2, 5, 3, 4.”

박문대는 왠지 모를 몽롱한 기운에 빠져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목이 칼칼한 데다 두통이 멈추질 않는 게 딱 봐도 심상치 않았다.

‘이거 좀 불안한데······. 시험 끝날 때까진 버텨야 한다.’

“듣고 있어?”

“아, 어. 3번에 몇 번이라고?”

“5번. ···너 괜찮아?”

“그냥 잠깐 멍때리고 있었던 거야. 다음 번호 계속 불러.”

이세진은 한동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박문대가 속으로 이를 악물며 시험지만 노려보자 결국 다시 답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문대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앓아누웠다.

37.5도. 체온계는 명확한 고열을 나타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정답지를 나눠 받고 흥분해 그 자리에서 들추고 있을 동안 그는 곧장 집으로 가 대충 옷만 갈아입은 채 누워있었다.

‘어차피 내일부터 주말이니까 아무것도 안 하고 쉬면 좀 나아지겠지.’

오한에 몸을 반사적으로 웅크리고 있던 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택배 시킨 거 없는데.’

무시하려던 찰나 초인종이 또 울렸다.

“나야.”

일부러 크게 낸 목소리가 방까지 퍼졌다.

“이세진?”

박문대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이세진은 제집처럼 자연스레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그는 곧장 부엌으로 가 식탁에 무언가가 들어있는 하얀 봉지를 내려놓았다.

“뜬금없이 왜 온 거야? 저건 또 뭐고.”

이세진은 박문대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이마를 짚었다. 미간 사이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

“뜨겁네.”

박문대가 뭐라 말을 떼려던 순간, 이세진이 선수를 쳤다.

“아픈 거 어떻게 알았냐고?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학교에서 네 상태가 어땠는지나 알아?”

“···”

“이미 걸려본 사람 눈을 어떻게 속이냐? 아, 물론 난 몸살까진 아니었지만.”

그는 말을 마치곤 묵묵히 부엌으로 돌아가 봉지 끝부분을 풀어냈다. 반투명한 일회용 용기 안에는 초록색과 주황색이 간간이 섞인 야채죽이 들어있었다.

“입맛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이거라도 사 왔어. 어······ 혹시 야채죽 싫어해?”

뒤늦은 깨달음에 나온 떨떠름한 질문에 박문대는 짧게 부정했다.

“그럼 됐어.”

“야, 뭐 하는···!”

이세진은 한 손에 죽 그릇을 든 채 그대로 박문대를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졸지에 하반신을 덮는 부드러운 이불에 조금은 뜨거운 죽까지 눈앞에 두고 있으니 박문대는 정말 환자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이 더 생겼을 뿐인데 비로소 이 공간이 제대로 된 집처럼 느껴졌다.

박문대는 죽을 한 입 넣었다. 쌀이 혀 위에서 부서지고 작게 썰린 야채들이 뭉그러졌다. 천천히 씹어 삼킨 죽은 목구멍 뒤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따뜻했다.

도리상 감사 인사를 전하려 시선을 올려 먹는 내내 뚫어질 듯 바라보던 이세진과 눈을 마주했다.

‘아.’

또 그 눈빛.

걱정, 염려, 안도.

이 모든 것들이 섞인 오묘한 눈빛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사랑.

‘착각이 아니야.’

박문대를 향한 애정이 다른 모든 감정들을 감싸고 있었다.

“이세진.”

“응?”

막 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일어서려던 이세진이 다시 이불 위에 걸터앉았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왜 그렇게 뜸을 들여?”

마지막으로 입을 틀어막으려는 불안을 떼어내고 박문대는 말을 끝맺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이세진은 그날 그 폭우 아래에서처럼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양 눈썹 끝을 내리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연히 이렇게 하겠지.”

숨을 들이켤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입술이 포개져 왔다. 박문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다 이내 눈을 감았다.

첫 키스는 뜨겁고, 버거웠다.

두 사람은 몇 초 뒤 입술을 떼어내고 열기를 띤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마를 맞대고 불그스레한 볼을 내보이며 웃었다.

밖의 빗소리는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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