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뵤/건뵤] 1300도의 감정 上
도예가 박문대 X 배우 배세진
누군가 그러더라. 시간이 약이라고.
괴로울 정도로 부풀어 오른 이 감정도. 고통도. 사랑까지도. 시간만 있다면 괜찮아질 수 있대.
근데 난 잘 모르겠어.
그냥 네가 보고 싶어, 류건우.
도공의 하루는 바쁘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뜯어보면 퍽 단순한 편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공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물레질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는 나날. 그렇게 마치 흙에 영혼이라도 바친 것처럼, 혹은 스스로를 도자기에 가둔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박문대였다.
하지만 아무리 속세와 떨어진 인생을 살아도 역시 먹고 살 방도는 필요했기에 박문대는 협소한 삶에서도 나름대로 작은 인간관계를 꾸려왔다.
…설마 거기서 발목이 잡힐 줄은 상상도 못 했다만.
“무, 문대야…. 너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뵙고 싶다고 찾아오신 분이 계셔서…….”
평소 박문대가 얼마나 본인의 얼굴을 매체에 드러내기 싫어하는지 아는 선아현이 잔뜩 긴장한 채로 입을 연다. 박문대는 시선이 저절로 선아현의 뒤로 향했다. 갈색빛이 도는 단정한 머리칼과 트렌치코트. 이런 다 스러져가는 산속 공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외모를 가진 남자.
남자는 마치 무언가의 흔적을 찾는 사람처럼 주변을 살피다 박문대와 눈이 마주치더니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배세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슬쩍 목을 까딱이는 남자는 척 보기에도 붙임성이 없어 보였다. 가끔 제자로 받아달라고 저를 수소문해 찾아오는 녀석들은 박문대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아부성 멘트를 줄줄 내뱉곤 했는데 말이다. 배세진은 그러는 대신 박문대의 눈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웃기는 건, 박문대 역시 이를 지적하긴커녕 배세진을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눈싸움에 선아현은 한층 더 곤란해진 표정으로 둘 사이에서 눈을 굴렸다.
다행히도 눈싸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박문대가 먼저 눈을 피한 것이다. 그는 배세진에게서 등을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배세진은 점점 멀어져가는 박문대의 등을 홀린 듯 바라보다, 올라가자며 가볍게 제 어깨를 두드리는 선아현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구두를 벗었다.
“그래서, 절 꼭 뵈어야 한다는 이유가?”
간단히 차와 다과를 내온 박문대는 자리에 앉고 얼마 안 가 그렇게 물었다. 배세진은 오묘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카스텔라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선아현 씨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그쪽 작품을 봤어요.”
“…….”
배세진은 긴장한 건지 제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안쪽을 쓸어내리는 동작이 일종의 버릇 같았는데, 정작 왼손은 아무런 액세서리도 없이 깨끗했다. 그 대신 희미하게 반지 자국 같은 게 보였다.
“무척… 좋더라고요. 제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정확한 감상을 표현하긴 어렵지만, 마음을 울렸다고 할까….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꾸벅, 감사를 표하며 박문대는 고개를 숙였으나 정작 그의 표정은 감동과 거리가 멀었다. 선아현은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적막감에 안절부절못했다. 역시 세진 씨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그도 그럴 게 박문대는 유난히 그의 작품을 포함해 세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걸 싫어했다. 아마 선아현이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는 본인 작품을 전시회에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가에게 이름값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만약에 배세진이 선아현을 찾은 이유가 단순히 문대의 작품에 감동해서, 팬으로서 감사를 전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면 선아현은 결코 그를 이곳까지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선아현이 배세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발 이 작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달라는 배세진의 눈동자에는 말보다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안타깝게도 선아현은 이를 차갑게 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단호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 사이, 배세진은 결심을 마친 건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저… 근데 혹시, 도예는 누구로부터 사사했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요?”
그게 본론이었는지 배세진의 눈이 간절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박문대는 순간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랫입술을 짓씹더니 한 박자 늦게 답을 내놓았다.
“독학했습니다.”
“아….”
배세진은 당황과 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다 곧 자신이 무례했다고 생각한 건지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는 헛기침하며 차를 입에 댔다. 너무 쓰지 않은, 배세진의 취향의 맛이었다.
“물어볼 건 그게 다인가요?”
고저 없는 물음은 마치 겨우 그거나 물으러 왔냐는 듯 배세진을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선아현은 박문대가 일부러 더 싸늘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배세진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 필사적으로 말을 쥐어짰다.
“그게.. 저는 사실 배우인데….”
“알고 있습니다.”
“네?”
“유명하시잖아요. 얼마 전에 영화에도 나오셨고.”
아, 예…. 전기도 끌어다 쓸 것 같은 깡 산골에 묻혀서는 사람이 설마 바로 그를 알아볼지 몰랐던 건지 배세진은 순간 벙찐 얼굴을 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변명 같은 말을 내뱉는다.
“사실 이번에 맡은 배역이 젊은 천재 도예가거든요…. 그래서 혹시 박…문대 씨에게 자문할 수 있을까 하고…….”
“저한테요?”
“…네.”
이는 선아현도 미리 듣지 못했던 말이라 저절로 시선이 배세진에게 향했다. 배세진은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유명 배우라는 명성에 걸맞게 저건 연기인 걸까? 선아현은 쉽사리 사람을 의심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문득 그런 의심이 싹트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선아현은 지독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두 사람 다 어딘가 이상하다고.
“안 될까요…?”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이상한 건, 바로 자신의 친구인 박문대라고.
놀랍게도 박문대는 배세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배세진은 자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주에 한 번씩 박문대의 공방에 드나들게 되었다.
“공방에 혼자만 있으신 거예요?”
“네.”
“그럼 도자기도 전부 혼자서…?”
“네.”
하지만 배세진이 있다고 해서 박문대가 자신의 일상 루틴을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배세진이 있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물레를 돌리느라 바빴다.
자연히 박문대는 작업에 집중하느라 배세진이 무엇을 묻든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한편, 배세진은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데 매우 서툴렀다.
그나마 초반에는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이라도 던질 수라도 있었으나, 그조차 바닥나자 배세진은 박문대가 앉으라며 가져온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구경꾼이라도 된 것마냥 그의 물레질을 바라보았다.
공방은 민가로부터도 떨어진 산속이라 배세진이 입을 다물자 존재하는 것은 박문대가 물레를 돌리는 소리와 밖의 새소리가 전부였다. 도시에서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사람들의 소리나 아스팔트를 질주하는 차 바퀴 소리는 이곳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배세진은 어째서 자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느냐고 박문대에게 따지는 대신 이 평화에 몸을 맡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돌돌돌.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물레음과 함께 은은하게 창문을 넘어오는 햇살이 몸을 덥히자 배세진의 기분도 노곤노곤해졌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가끔은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살고 싶다고.
물론 배세진은 연기를 사랑했고, 그를 좋아해주는 팬들을 사랑했기에 지친 현대인의 망상이나 다름없는 소리였으나, 듣고 있던 상대는 배세진에게 이를 지적하는 대신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평상시 계획과 현실성을 깊이 따지는 성격인 그가 어린 애의 칭얼거림이나 다름없는 배세진의 투정에 동조해준다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내가 원했던 건 잠깐의 고요였지 영원한 적막이 아니었어.
너와 함께 계속 있을 수 있다면, 그런 시시콜콜한 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는걸.
배세진은 박문대가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보며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물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리게 깜빡이던 눈이 이윽고 닫히는 순간, 작은 물방울이 툭 하고 한 줄기 선을 이루며 뺨을 타고 흘렀다.
어느새 물레는 멈춰져 있었다.
"헉...!"
배세진이 눈을 떴을 때, 이미 공방은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잠들었던 건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던 그는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담요...?'
꽤나 귀여운 강아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폭신한 담요였다. 배세진이 떨어진 담요를 주워 끌어안았을 때 소리를 들은 건지 박문대가 공방으로 들어왔다. 가마에 있었던 건지 옷에 검댕이를 묻힌 그는 문가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아... 그 죄송해요. 잠들어버려서...."
멋대로 바쁜 사람의 시간을 뺏어 놓고 자기 혼자 태평하게 잠이나 잤다는 생각에 배세진은 화끈 달아오르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답했다. 의외인 것은 박문대의 반응이 생각보다 무난했다는 것이다.
"아뇨. 피곤하셨던 것 같은데 푹 쉬셨음 됐어요."
"......?"
솔직히, 배세진은 박문대가 이참에 자신을 쫓아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에 예민한 배세진은 박문대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외부인을 싫어해 산속에 틀어박힌 예술가가 다짜고짜 찾아온 배세진을 좋아할 리 만무했으니까.
그런데도 배세진이 박문대에게 억척스러운 부탁까지 해대며 그의 곁에 붙어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박문대에게 미안하지만, 그 이유를 해결하기 전까진 배세진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물론 오늘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일보후퇴해야하지만 말이다.
"저...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갈게요."
후다닥 몸을 일으킨 배세진은 빠르게 앉아있던 자리를 정리했다. 박문대는 여전히 문가에 기대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배세진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옆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박문대가 그의 앞을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
배세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박문대를 바라보자 그는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크게 껌뻑였다. 하지만 배세진이 지나칠 수 있도록 몸을 물리진 않았다. 또다시 시작된 눈싸움에 배세진은 이번엔 자신이 선수를 쳐야하나 고민했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몇 번 입술을 들썩이던 박문대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 드시고 갈래요?"
배세진은 분명 자신이 체할 줄 알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그것도 제가 일방적으로 귀찮게 구는 상대와 단 둘이 저녁식사였으니 당연했다.
배세진은 손님이라는 이유로 부엌에 들어가지 못했다.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 부엌에서 점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걸 기다렸는데, 문득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밥을 차려주는 광경을 보는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자주 부엌이든 거실이든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
박문대는 요리를 잘 하는 모양인지 순식간에 식탁이 반찬으로 가득 찼다. 양 조절에 실패해서 너무 많이 만들었다며 반찬을 따로 용기에 담아 가져가라고 챙겨주기까지 했다. 박문대와 마주보고 식탁에 앉은 배세진은 그의 눈치를 보며 밥 술을 떴다.
어색한 저녁이었지만, 배세진은 체하지 않았다. 아마 밥이 정말 맛있었기 때문일 거다. 착각인지 익숙한 맛이 났다. 그래서일까.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은 별로 볼만한 게 없을 텐데."
유약을 묻힌 도자기들을 옮기던 박문대는 막 공방에 도착한 배세진을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배세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박문대가 그가 도자기 만드는 걸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자문을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듣고 싶은 답이 있는 배세진의 입장에선 박문대가 작업에 집중하느라 바쁜 것보다 어느정도 여유로운 게 훨씬 좋은데 말이다.
그래도 배세진은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해 도자기들을 옮기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며 넌지시 말을 던졌다. 물론 박문대는 칼같이 거절했지만.
가마는 공방 뒤에 산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배세진은 박문대의 곁을 맴돌며 1300도까지 올라간 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자기들을 보았다. 너울거리는 열기를 홀린 듯이 시선을 고정하자 박문대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친다.
"가까이 다가가지 마요. 다쳐요."
배세진은 눈을 깜빡이다 그의 말에 따라 몸을 뒤로 물렸다. 얼굴을 덥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찬 공기에 식는다. 박문대는 작업이 끝난 건지 숨을 돌리며 목장갑을 벗고 있었다. '그'에 관해 묻는다면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고, 배세진은 생각했다.
"저기...."
"물레 돌려볼래요?"
"예?"
"천재 도예가 배역이면 물레 돌리는 장면 정도는 있을 거 아녜요. 아닌가요?"
"아... 그게... 그렇겠죠?"
배세진의 매우 어색하기 짝이없는 답변에도 박문대는 별 반응없이 따라오라며 공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정도로 노골적이면 배세진이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저 사람은 내 질문을 회피하려 하고 있어.'
그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배세진의 질문 세례에서 도망쳤지만, 이번만큼은 자연스러운 회피가 불가능했던 것인지 상당히 티가 났다. 하지만 배세진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대하기 싫은 거면 그냥 오지 말라고 하면 될 텐데....'
멀어져가는 박문대의 등을 보며 배세진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저야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어거지라도 계속 박문대 주위를 맴도는 거지만서도 박문대가 굳이 계속해서 배세진과 어울려주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애초에 박문대 저 사람은 어떻게....
"안 오세요?"
"...! 가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배세진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찍거라다 빠르게 박문대를 따라 공방쪽으로 발을 옮겼다.
배세진을 자신이 쓰던 물레 앞에 앉힌 박문대는 어디선가 물통과 점토를 가져왔다. 물레 위에 물을 묻힌 점토를 올려놓은 박문대가 말했다.
"바닥에 페달 보이죠? 그걸 밟으면서 속도 조절을 하는 거예요."
박문대가 시범삼아 페달을 밟자 점토가 핑그르르 회전했다. 페달에서 발을 뗀 박문대가 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배세진은 박문대가 했던 것보단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았다. 빙글빙글. 배세진이 밟는대로 점토가 돌아간다.
"이제 손에 물을 묻히고 원하는 대로 형을 잡으면 돼요."
갑자기 시작된 1대1 수업에 배세진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물을 듬뿍 묻힌 점토는 차갑고 미끌거렸다.
"처음에는 양손으로 점토를 잡고 위쪽 중앙을 엄지로 꾹 누르면서...."
"......!"
박문대는 설명을 이어가며 그의 말을 따라 양손으로 점토를 붙잡고 있던 배세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제 체온보다 따스한 온기가 닿자 배세진은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연스레 마지막으로 이런 식으로 누군가와 손을 겹쳤던 기억이 떠올랐기에.
이를 눈치 챈 건지 아닌 건지 박문대는 그 후로 배세진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저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의외로 칭찬에 후한 편인지 중간중간
"잘 하시네요."
라며 배세진을 의욕을 북돋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배세진의 손에서 탄생하고 있는 작품은 그가 초보자란 사실을 고려해도 미묘했지만 말이다. 처음으로 박문대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서 였을까. 배세진은 어째서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지, 그 목적도 순간 잊고 이 기묘한 체험활동에 꽤나 깊게 몰입했다.
그렇게 입까지 삐죽내밀고 컵의 모양을 잡아가던 그때였다.
"앗...."
집중을 하느라 몸통을 너무 기울인 탓인지 옷 안쪽에 넣어두었던 목걸이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빙그르르 공중을 유영하는 목걸이가 시야를 방해하자 곤란해진 배세진은 고개를 들어 박문대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한데.. 이거... 대신 옷 안쪽에 넣어주실 수 있으세요?"
흙이 잔뜩 묻은 손을 보여주며 부탁하자 박문대는 무심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배세진 쪽으로 몸을 숙인 박문대가 목걸이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배세진의 시선의 사각에서 박문대는 어느 때보다도 눈이 크게 떠졌다.
"...반지..네요."
유명 배우가 가지고 다니는 것 치고는 심하게 투박한 세라믹 반지였다. 심지어 깨져서 손에 낄 수조차 없어보였다. 반지 걸린 목걸이를 배세진의 옷 안쪽으로 넣어주는 박문대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런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왜 깨진 반지를 가지고 다녀요?"
박문대가 먼저 질문을 건넬 줄 몰랐던 배세진은 순간 놀라 손을 삐끗할 뻔했다. 항상 뭘 묻든 피하기 바빴던 사람이 웬일로..? 하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배세진은 속으로 작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다시는... 못 만나는 사람이 저에게 처음으로 줬던 선물이에요."
"......."
박문대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배세진에게 같은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배세진은 박문대가 그 다음에 할 질문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직도 좋아해요?"
"......."
여태껏 저 물음을 몇 번 들었더라. '그'가 배세진의 곁에서 사라진 세월만큼 그를 시험하는 질문 역시 켜켜이 쌓여왔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네."
그 대답을 할 때만큼은 배세진에게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해도 배세진은 이 감정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절실히 박문대가 필요했다.
"저기 근데 혹시 박문대 씨는...."
배세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그'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 싶었다. 하지만 배세진이 박문대와 시선을 마주했을 때, 그는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박문대는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어째서...?'
지금까지 그의 처지를 슬프게 여긴 사람이야 많았지만 저런 식으로 마치 본인이 당사자가 된 것 마냥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박문대는 배세진과는 새빨간 타인이나 다른 없는 사이 아니던가.
하지만 박문대는 마치 지옥불이라도 삼킨 사람처럼 괴로워하다 배세진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발 때려쳐요. 그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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