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돌발! 상태이상 : 산타가 아니면 선물을!
싱글대디 류청우 X 산타 박문대
"누구세요?“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 시발. 박문대는 작게 욕을 뱉었다. 이거 오해하기 딱 좋은 타이밍인데..?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모른 척을 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라면 귀신인 척? 뻔뻔한 척? 그동안 실수한 적 없었는데 어째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문대는 복잡해진 머리를 가다듬지 못한 채로 남자의 물음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저는"
"산타입니다."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남자가 믿지 않을 것 같았지만 별수 있나. 분명 사실만 말했다. 남자는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대는 얼른 가방을 뒤적거리며 선물을 찾았다. 진짜라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선물을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보란 듯이 눈앞에서 흩어져 버렸다. 어? 이게 아닌데
5년 차 산타클로스 박문대.
오늘 사고 쳤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12월 24일의 저녁.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잔뜩 들뜬 이들의 웃음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류청우는 가볍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했다. 늦은 시간에도 여전히 환한 거리를 바라보며 조금 남은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으며 컵을 비웠다. 방 안에서 잔뜩 신난 청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하고 청우를 불렀다. 웃음을 띠며 방으로 향했다.
"아빠, 산타 할아버지는 언제 와?"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침대에 누운 청아가 쏟아지는 잠을 떨쳐내려는 듯하며 말했다. 청우는 귀여운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파란 이불을 덮어주며 청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곧 오실 거야. 청아는 설렌다는 듯 볼을 붉히며 품에 안긴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았다. 이틀 전, 청아가 하루 종일 갖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최신형 게임기를 구매해 진즉에 포장을 끝마쳤다. 청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청우는 이제 그만 자라며 방의 불을 껐다. 이제 사랑스러운 딸이 곤히 잠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여전히 산타를 믿는 딸이 마냥 귀여운 청우는 이번에도 기꺼이 자신이 산타가 되기로 하였다. 산타 할아버지를 보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감겨오는 눈을 애써 무시하며 버틸 청아의 모습이 그려졌다. 작년 이맘때쯤,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직접 받겠다며 새벽까지 깨어있던 때가 있었다. 정성스레 포장한 선물이 무용지물이 될 뻔했으나, 딸이 비몽사몽 한 틈을 타 순발력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한 덕에 딸의 동심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다. 힘들게 지켜온 동심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깨질지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딸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끄응- 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스트레칭했다.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끝나지를 않는 업무에 퀭한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3시. 딸이 잠들 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날은 시간이 흘러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되어 있었다. 잠들지 않는 어른들은 거리를 밝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흩날리는 하얀 눈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포장지에 쌓인 선물을 집어든 청우는 청아의 방으로 향했다. 강아지 인형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천사가 내려온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청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침대 옆 협탁에 선물을 올려두었다. 잠귀가 밝은 딸아이가 행여나 깰까 봐 서둘러 방을 나가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선물을 뜯으며 잔뜩 신나 할 것이 분명했기에, 벌써 기분이 좋았다. 분명 그랬는데,
“어”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나? 눈을 비볐다. 얼핏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람이었다. 사람? 류청우는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12층. 이 높이를 배관을 타고 올라왔을 리는 없고 이미 들어와 있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다. 무척이나 수상해 보이는 남자를 향해 표정을 찌푸리며 일단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태블릿을 만지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옅은 한숨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끝...”
“누구세요?”
류청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강도일지도, 더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향해 처음 꺼낸 말이 누구세요였다. 딱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류청우는 남자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딸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한다면 덮쳐버릴 계획이었다.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입을 떡 벌리며 뭐라 주절거렸다. 시발? 언뜻 욕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상해 보였지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청우는 무슨 설명이라도 해보라는 얼굴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저는"
"산타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류청우는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행여나 큰일이 날까 봐, 제 옆에 놓인 빨간 가방을 뒤적거렸다. 여기요! 하는 말과 함께 무지개색 포장지로 둘러싸인 네모난 박스를 내밀었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로 다가간 류청우는 남자가 건넨 선물을 들었다. 삑! 류청우의 손에 닿기도 전에, 선물은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남자가 든 태블릿에서는 빨간 경고창과 함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건데요?”
남자는 경고창이 뜬 태블릿과 류청우를 번갈아 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이런 적 없었는데! 작게 절규한 남자는 손으로 태블릿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하였다.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처럼 생긴 작은 가방에서 많은 양의 선물이 나오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상황파악은 안 되고 있었다. 일단은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남자의 행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거는? 남자가 꺼낸 선물들은 청아에게 닿으려고 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류청우는 서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무척이나 수상해 보이는 남자였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을 주워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따님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이 뭡니까..?”
“...최신형 게임기라고 하던데”
“게임기?ㅎㅎ...”
남자가 집어 든 게임기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만족할만한 선물이 나오지 않았다. 청우는 산타와는 거리가 먼 복장을 하고 태블릿을 만지는 남자를 보며 이 상황이 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옆에 쪼그려 앉은 청우는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았다. 청아의 인적 사항과 얼핏 자신의 이름도 함께 보이는 것 같았다.
“페이 세서 좋았는데.. 이제 다 끝인가”
“당신 진짜 산타예요?”
남자는 고개를 돌려 청우를 바라보았다. 남의 집 침대 앞에서 감상에 빠진 제 모습이 쪽팔리기라도 한 듯, 귀 끝이 붉어졌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남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네. 진짜 산타 맞아요”
“...진짜요?”
“네 진짜요.”
“근데 왜 선물은...”
“아”
남자는 이를 꽉 깨물고 대답하는 듯했다. 오류가 나서요. 라는 말과 함께 한숨을 흘리는 걸 보니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실시간으로 사라져가는 선물을 함께 본 청우는 남자의 표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본인이 정말 원하는 선물을 주는 게 산타의 일이거든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최신형 게임기가 맞았는데..”
“도저히 알 수가 없네요”
선물 란이 텅 빈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며 류청우는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무언가 필요하다는 말을 잘 꺼내지 않았던 청아는 늘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가지고 싶은 것 한 가지를 슬쩍 청우에게 흘려 말하곤 했다. 그리고 늘 그 선물을 사서 건네주는건 청우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틀림없이 최신형 게임기가 필요한 거라 생각했는데... 곤히 잠이 들어있는 청아를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으응,”
청아가 뒤척이자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몸을 숨겼다. 어쩌다 보니 청아의 침대 아래쪽에서 몸을 끌어안은 채 숨어있는 꼴이 되었다. 살짝 빨개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잘생긴 사람은 죄다 유부남이거나 게이라는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남자는 그런 것 같네. 하며 시선을 돌렸다.
“끄응.. 엄마아..”
엄마? 청아의 잠꼬대 소리에 집중하던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태블릿에 엄마. 두 글자를 써넣었다. 시종일관 화면 위에 떠 자신을 거슬리게 만든 경고창이 사라졌다. 이거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며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청우에게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요”
“엄마.”
“청아 어머님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세한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청아의 인적 사항을 훑었다.
- 가족 : 류청우 | (공백)
남자는 자신이 실언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곤란한 듯 멋쩍게 웃는 류청우를 보며 눈을 굴리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간신히 찾은 해결책에 비상이 걸렸다. 류청우는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말을 잃은 두 사람은 서로 곰곰이 생각하였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며 부모의 선에서 정리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지려 했다. 그때, 류청우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남자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꼭 친엄마가 필요하다는 말은 없었던 거죠?”
“음.. 그런 것 같네요.”
“그렇다면, 딸아이와 하루만 놀아주시겠어요?”
뭐? 남자는 살짝 웃으며 부탁하는 류청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산타에게 놀아달라니. 게다가 아직 총각에, 아이도 없는데? 기가 막힌 부탁에 거절하려 하는 찰나, 뒤척이는 청아가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에 잠시 멈칫하였다.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류청우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한 분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분이라도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잠시 접어두고 여전히 제 손목을 잡고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류청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로로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초과근무 수당은 두둑이 챙겨가야겠다.
“산타.. 익스,프레스..”
삼 일 같았던 삼십 분의 시간이 지난 뒤, 상황을 정리하고 간신히 식탁에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 남자는 제 명함을 건네며 여전히 산타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듯한 류청우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산타 익스프레스 배달 산타 박문대’
류청우는 명함과 문대를 번갈아 보며 설명해달라는 듯한 눈을 하였다. 박문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가방에서 외투를 꺼내 입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단숨에 뛰어내렸다.
“어!”
류청우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문대에 당황한 그는 활짝 열린 채 찬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만 멍하게 바라보았다. 똑똑- 그때 거실 통유리창에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사람 인영처럼 보이는 것이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류청우는 입을 떡 벌리고 달려가 유리창에 몸을 붙였다. 슬쩍 웃은 박문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트와 추위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이 모든 게 진짜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때요? 문대는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두꺼운 유리 너머에 있는 류청우에게 말을 걸었다. 류청우는 안광 가득 반짝이는 눈으로 문대의 몸과 행동을 훑었다. 가볍게 하늘을 날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문대가 몸을 털었다. 추웠는지 얼른 창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원샷하며 진짜 산타. 맞죠? 하며 슬쩍 웃었다. 류청우는 미소를 띤 얼굴로 박문대를 바라보았다. 꼭 동심으로 가득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산타클로스 맞으시네요 문대 씨.”
환한 얼굴로 말하는 류청우를 보며 잠깐 멈칫한 문대는 뒷목을 긁적이며 네. 하고 답했다. 귀엽고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낯설어 이 느낌이 어색했다. 박문대는 자꾸만 청우의 눈을 피했다. 가슴께가 괜히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 시간이 늦었네요. 조금이라도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이야기할까요?”
어느덧 4시를 훌쩍 넘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시계를 슬쩍 보던 청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대를 제 방으로 이끌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이불과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무채색 톤의 침구에 맞지 않게 귀여운 늑대 인형이 이불을 덮고 있었다. 문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류청우는 침대 앞 책상에 펼쳐진 노트북을 닫아 손에 들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본인 방을 내어주고 어디서 자려고. 저 큰 덩치를 소파에 뉘고 불편하게 잘 류청우를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자요.”
“..네?”
초면에 같이 자자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미친 말 같았다. 아닙니다.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얼른 말을 수습한 문대가 서둘러 거실로 나가려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청우는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침대도 큰데, 그냥 같이 자요.”
툭툭, 침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문대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지만 쏟아지는 졸음에 작게 대답하곤 침대로 뛰어들었다. 혼자 자기엔 과하게 큰 사이즈의 침대였기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한 문대었다. 류청우는 작게 웃으며 문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조금 기대되었다.
“아빠!”
따스한 햇살이 몸 위로 내려앉았다. 일어나자마자 달려온 것인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달려온 청아가 류청우를 불렀다. 류청우 옆에서 졸린 눈을 비비고 있는 박문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둘의 사이를 파고들어 누웠다. 류청우를 옆에서 끌어안는 모양새로 자고 있던 박문대가 청아가 오자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청아를 함께 끌어안았다. 청우의 가슴팍에 누워 언제 일어나아~ 하면서 말을 늘어뜨리던 청아가 문대에게 아저씨는 누구냐며 물었다. 아저씨라니... 박문대는 ‘아저씨’라는 단어를 듣고 본능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가 눈을 떴다. 어, 점점 잠에서 깨던 문대는 류청우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이내 벌떡 일어났다. 제 가슴 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청아를 꼭 끌어안은 류청우가 잘 잤어요? 하고는 슬쩍 웃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누구야?”
“누구야가 아니라 누구세요라고 해야지”
“응. 아저씨는 누구세요?”
“어어..?”
엄마... 엄마를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다짜고짜 네 엄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류청우에게 도와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류청우는 가볍게 웃으며 청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청아의 볼에 입을 맞춘 청우가 몸을 일으켰다.
“청아랑 놀아줄 엄마야”
“엄마?”
“어..그래 청아야..”청아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엄마? 하며 말을 반복했다. 태어난 이후부터 줄곧 류청우의 손에서 자란 아이는 엄마의 존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저 엄마와 놀았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에게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짓궂은 어른들의 말에 휘둘려버린 어린아이는 존재하지 않는 엄마를 꿈에서도 찾았다. 청아는 엄마? 하면서 활짝 웃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지만, 엄마가 생겨서 기분이 좋은 청아였다. 얼른 일어나 문대의 품에 안겼다. 문대는 나른한 얼굴로 청아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청아야, 엄마랑 하고 싶은 거 있어?”
“어, 놀이공원!”
“놀이공원?”
“응! 이만한 나무랑 곰 인형 보고 싶어! 우주로봇도 타고 싶어!”
류청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청아의 말에 답한 류청우는 이내 문대를 바라보았다. 같이 갈 거죠? 하며 묻는 눈빛이었다. 문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집에 가기 위해서도, 이 조그만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 자신이 오늘 하루 그 빈자리를 채워줘야 한다 생각했다.
가정식으로 아침을 차려온 청우가 자리에 앉으라며 식탁 의자를 빼어냈다. 문대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청아가 눈을 반짝였다. 히히- 잠깐이지만 엄마가 생긴 게 좋았던 것인지, 웃으며 문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대는 슬쩍 웃으며 그렇게 좋아? 하고 말을 건넸다. 청아는 응! 하고 답하며 계란말이를 콕, 집어먹었다. 류청우는 딸아이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것만 같은 늑대 앞치마를 매고 아기자기한 식기에 밥을 담아 건넸다. 문대는 귀엽다는 듯 슬쩍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먹어요.”
청아가 아빠 나 이거! 하며 맛있는 양념으로 졸인 불고기를 가리켰다. 청우가 야무지게 숟가락에 뜬 밥 위에 고기를 올려주며 웃었다. 시끌벅적한 아침이었다.
“빨리! 빨리!”
얼른 커다란 곰 인형을 보고 싶다면서 옷을 입던 청우를 부추긴 청아가 이내 문대에게 다가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엄마아 빨리요!!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길에 문대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류청우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는 문대를 돌아보았다. 그의 옷차림을 훑는 듯했다. 산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밤새워 일하며 더러워진 옷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청우의 시선을 느낀 문대는 제 옷을 살짝 들었다. 아. 머쓱하게 웃은 문대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큰 팔찌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 팔목에 찬 문대는 가운데에 튀어나온 버튼을 눌렀다.
“우와!”
어느새 팔목에서 튀어나온 옷이 문대의 몸을 감쌌다. 청아가 신기하다는 듯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바라보았다. 청우도 좀 놀랐는지 멍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부녀의 눈길에 부끄러워진 문대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손을 가볍게 들어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을 하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 좀 믿기나? 입 모양을 읽은 청우는 활짝 웃었다. 요즘 산타는 사람도 홀리나?
크리스마스의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같은 자리만 빙빙 돌기를 반복했다. 그런데도 청아는 신이 났는지, 청우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곰돌이! 나무! 공룡! 하며 소리쳤다. 잔뜩 신이 나 보였다. 류청우는 힘든 기색 없이 딸을 받아주었다. 행여나 류청우와 떨어지게 될까 그의 소매를 두 손으로 꼭 잡은 문대는 청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언제나 힘들었다.
“저기 청우 씨”
“네 여보”
“예?”
“아, 이렇게 불러야 청아가 오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문대는 고개를 들어 류청우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 뻔뻔하게 느껴졌다. 진짜 엄마라도 된 것만 같았다. 괜히 가슴께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문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청우는 청아를 돌보는 척 문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흩날리는 눈송이로는 열기를 식히기에 어림도 없었다.
“...이쪽으로 따라올래요?”
한 시간째 인파 속에 휘말려 제자리걸음을 하던 세 사람은 근처 골목으로 슬쩍 빠졌다. 청아도 슬슬 지쳐가는지 말이 없었다. 청아를 내려놓은 청우는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청아가 손을 들어 문대에게 흔들었다. 응? 문대는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니이! 답답한지, 직접 문대의 손을 덥석 잡고 이거! 하며 손을 잡는 청아가 마냥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청우는 문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남이 본다면 단란한 가족으로 볼 것이다. 웃음을 진정시킨 문대는 무언가 생각난 듯 가방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두 벌을 꺼내어 자신이 한 벌을 입고 나머지 하나는 청우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문대가 건넨 옷을 껴입었다. 청우는 체격에 맞게 변하는 옷이 마냥 신기해 두 팔을 쫙 펴고 옷을 관찰했다.
“청아야, 아빠한테 안겨볼까?”
청아를 번쩍 들어 올려 청우의 품에 안겨준 문대는 이내 청우의 손을 잡았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
“네네~”
류청우는 여유롭게 웃으며 손깍지를 꼈다. 문대가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청우는 청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문대는 놀라지 않은 척을 하며 태연하게 말을 했다.
“그.. 제가 신호하면 놀라지 말고 청아 꽉 붙잡아요”
“응? 알았어요”
“하나, 둘!”
그 순간이었다. 문대가 셋을 외치는 순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청아를 꼭 끌어안은 류청우가 문대를 바라보았다.
“셋!”
하늘로 뛰어오른 문대는 청우의 손을 꼭 잡고 하늘 위에 멈추어 섰다. 수많은 사람의 정수리가 한눈에 보였다. 분명 커 보였는데, 제 발아래에서 작아진 곰돌이를 보며 청아가 신난 듯 환호성을 질렀다. 청우는 자꾸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문대를 바라보았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문대는 신이 난 듯, 류청우를 바라보며 웃었다. 바람이 문대의 머리를 훑고 지나가 그의 금발 머리가 흩날렸다.
“어때요?”
“...예뻐요”
문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청우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죠? 문대는 활짝 웃으며 사람으로 가득 찬 놀이공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커 보였던 대관람차도 한눈에 들어왔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던 문대는 청우의 손을 잡아 대관람차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청우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무시한 채, 홀린 듯 문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여기 앉아볼래요?”
대관람차의 난간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어느새 해가 져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한 이곳은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느끼기에 제격이었다. 어때요? 류청우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문대를 향해 얼굴을 붉혔다. 좋아요. 웃으며 답한 그는 문대의 귀가 빨개진 것을 알아채고는 웃었다. 청아의 눈을 가볍게 가리고는 쪽- 문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선물”
류청우가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려 웃었다. 문대는 청우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볼을 붙잡고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청아는 자신의 눈을 막은 손이 답답한지 제 손으로 청우의 손가락을 잡고 싫어어~ 하며 떼어내려 애를 썼다. 문대는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웃음이 터진 청우는 문대와 청아를 번갈아 보며 웃고는 이내 문대를 보며 다정한 미소를 띄웠다.
“메리 크리스마스, 산타 씨.”
“어..”
청우는 잔뜩 붉어진 문대의 얼굴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흘려보낸 채로 경치를 구경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릿결을 헤집고 지나갔다. 시원한 바람에도 붉어진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서로의 새끼손가락이 슬쩍 맞닿았다. 손이 닿은 부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만 같았다.
문대는 자신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청우의 손에 이끌려, 갈까요 여보?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청아를 침대에 눕혀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진짜로 이 아이의 엄마가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문대의 따스한 손길에 엄마아.. 하며 금세 잠에 빠졌다. 방의 불을 끄고 나온 문대는 소파에 앉아있는 청우의 곁으로 갔다. 12시까지 시간이 좀 남아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특선영화를 함께 보며 아이와 함께 먹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마저 처리했다. 달달한 감각이 혀끝에 남아 맴도는 게 기분이 좋았다. 꼭 달달한 기분에 취한 것만 같았다. 티비에서는 어떤 남자아이의 집에 든 강도가 고생하는 명작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움찔한 문대가 애써 무시하며 케잌을 삼켰다. 류청우가 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정말 도둑인 줄 알았는데”
“오해라니까요..”
“응 그러니까요.”
“오히려 선물이었으니,”
그렇죠?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청우를 애써 외면하며 티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여간, 사람 꼬시는 데에는 도가 텄다니까. 크흠, 문대는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영화는 끝이 나고 엔딩크레딧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11:58
크리스마스가 끝나기까지 2분 남짓하게 남았다. 문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는 자정, 그의 기억을 지우고 사라지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제안을 승낙했다. 류청우가 느릿하게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재미있었어요”
“...여보”
청우는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이내 사르르 풀린 얼굴이 미소 지었다. 응. 여보. 문대의 말을 받아쳤다. 문대는 청우의 손을 잡고 주문을 걸었다. 류청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도 같았다.
- 12:00
기억이 지워진 듯, 청우는 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잠에 빠졌다. 문대는 챙겨놓은 가방을 들고나와 신발장 앞에서 붉은색 부츠를 신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짧게 심호흡했다. 오늘의 기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쿠당탕-’
저 멀리서 무언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대가 뒤를 돌았을 때, 허겁지겁 달려온 청우가 그를 껴안았다. 어? 지금쯤이면 잠에 빠져 기억을 잊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다니. 꿈인가 싶었다.
“가지 마”
류청우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문대를 꽉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손에 넣은 듯, 간절하게 꽉 껴안았다. 얼떨결에 그를 품에 안은 문대는 손을 들어 올려 등을 토닥였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문을 열고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가쁜 숨을 내쉬며 문대의 얼굴을 바라보던 청우는 부드럽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을 붙잡고 천천히, 입을 맞추려 했다.
“싫으면 피해요”
“...빨리 하기나 해.”
문대는 청우의 멱살을 붙잡고 입술을 붙여왔다.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산타의 삶은, 이젠 어느 가족의 삶에도 스며들어 살게 되었다. 언제나 상상하며 꿈꿔왔던 ‘가족‘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대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살며시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제 모습을 지켜보던 청우와 눈이 마주쳤다. 입술을 떼고 동시에 웃었다.
“들어갈까요?”
“좋아요”
문대가 청우의 손을 잡았다. 깍지 낀 손이 달아올랐다. 몽글몽글한 분위기에 가슴께가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큰 사이즈의 침대는 두 사람이 엉켜있기에 충분했다. 문대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의 아침을 맞이했다. 온전히 그와 크리스마스를 보낸 문대는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웃었다. 저 멀리서 청아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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