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잉 리퀘 모음

300팔 기념으로 받았던 페잉 리퀘 조각글 모음 - 댕뵤 배세른 차배

1. 짝사랑 삽질 댕뵤

방송국 촬영을 마치고, 대기실에 없는 멤버를 찾으러 복도를 거닐다 박문대가 발견한 광경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래서, ……하게…”

박문대는 자신이 찾던 멤버, 배세진을 발견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배세진이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누구지?’

문득 예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배세진의 상대는 그를 섭외하려는 PD였다. 지금 배세진의 곁에 있는 녀석은 누가봐도 ‘나 관리 받고 있어요’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연예인이고. 그리고 분위기로 봐서 상대의 정체는….

‘배우인가?’

지긋해보이는 게 못해도 30대 후반인 남성. 아무래도 배세진이 아역배우 시절에 인연이 있던 사람인 듯했다. 물론 놀랄 것은 없다. 아무리 배세진이 세상을 따돌리는 인생을 살아온 놈이라도 아역배우 당시에는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했을 테니까. 그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박문대가 지금 충격을 받고 있는 이유는,

‘표정이…….’

남자와 대화하는 배세진의 표정이 예상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배세진은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힐끔힐끔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문대는 저 표정의 의미를 안다.

 

저건… 저 상대를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다.

X발.

자의식 과잉이라해도 할 말 없지만, 요 근래 박문대는 배세진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남몰래 확신하고 있었다. 녀석은 특기가 연기인 주제에 일상에서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매우 서툴렀으니까. 어느 날부턴가 박문대만 보면 남몰래 얼굴을 붉히거나 손이 닿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면 모르는 게 더 힘들지 않겠는가.

같은 그룹 멤버를 좋아한다니. 세상에 그런 스캔들이 어디있냐 싶었지만 의외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박문대는 곤란하다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과 둘만 남을 때마다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배세진을 보며 그를 밀어내긴커녕 언제쯤 저 입에서 고백이 나올지 흥미로울 정도였다.

사귀게 된다면 어차피 들킬 거 멤버들에겐 먼저 밝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놈들은 몰라도 이세진은 반대할 게 분명하니 녀석을 설득할만한 대책과 변명을 준비해둘 필요가 있겠지. 팬들과 언론은… 알아 챌 리가 없다. 편견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눈치 채도 이 녀석들 끝내주는 비게퍼를 하는 구나 정도로 넘어갈 거란 확신이 있었다. 거기다 배세진이 생활연기를 못할 뿐이지 의식만 하면 표정관리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니던가.

커플링은 역시 아웃이겠지만, W앱같은데서 은근슬쩍 콘텐츠인양 흘리면 페어 아이템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고. 다음 룸메 배정 때는 배세진과 룸메가 되도록 조정해야겠다. 아니, 꼭 룸메가 되지 않아도 둘 중 하나만 독방에 배정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 식으로 차곡차곡 박문대는 배세진의 고백 이후 대책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배세진의 입에서 좋아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녀석은 예민한 놈이었고, 분명 자신의 감정이 팀에 방해될 것이란 생각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먼저 나서 ‘형 절 좋아하시나요?’라고 묻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배세진의 감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저쪽이 먼저 저를 좋아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 권리도 배세진에게 있다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물론 슬쩍슬쩍 우리 둘이 사귄다 해도 팀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바람을 불어넣는 걸 잊지 않았다. 배세진이 아닌 척 박문대를 힐끗대며 고민하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녀석이 고백할 그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했고.

그런데 X발. 오늘 본 광경은 박문대의 전제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박문대는 배세진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배세진이 박문대에게 지어주는 표정은 팀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박문대에게만 지어주는 줄 알았던 그 표정을 지금 이름도 모르는 30대 배우에게 보여주는 배세진을 어떻게 판단해야하지??

‘X발 다 내 착각이었다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사실 배세진은 박문대에게 아무런 연애적 관심이 없는데 박문대 혼자서 김치국을 사발로 먹고 있었다는… 그런 개X팔린 착각을 했을 리가…….


 

오랜 고민 끝에 박문대는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배세진과 단 둘이 숙소에 남는 타이밍을 노려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형, 며칠 전에 복도에서 대화하던 배우 분은 원래 아시던 사이셨나요?”

“뭐, 뭣! 그걸 봤어!?”

박문대가 예상했던 반응보다 배세진은 훨씬 크게 펄쩍 뛰어올랐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걸 박문대가 알아버렸다는 듯이…. 시뻘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평소에는 귀엽게 느껴졌을 테지만, 지금은 매우 X같았다. 이어 배세진의 입에서는 아역배우 시절에 알던 사이라는 변명이 나왔으나 그런 건 이미 조사 끝낸 지 오래였다. 대충 말을 끝마친 배세진은 박문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내가 그 형이랑 무슨 대화하는지 들었어…?”

형? 형이라고?? 아니다. 진정해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박문대는 평정을 가장해 말했다.

“아니요. 주변이 시끄러워서 거기까진….”

“그, 그래?”

박문대의 대답에 배세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환해졌다. 긴장이 풀린 건지 “다행이다….” 하고 작게 중얼거린 게 다 들렸다. 그때의 대화를 회상하는 건지 살짝 달아오른 얼굴도. 그럴수록 박문대의 속은 더욱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왜 안심하는 거지? 둘이서 들키면 안 되는 얘기라도 한 거야? 정말로 배세진이 좋아했던 건 사실 내가 아니라….

“바, 박문대?!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박문대의 상태가 이상해지자 배세진은 화들짝 놀라 박문대의 이마를 짚는다. 살짝 서늘한 손의 온도. 별 거 아닌 접촉에도 가슴이 간질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X발. X발… 진심 X팔려서 죽고 싶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 것도 모자라 이제 배세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조절할 수도 없을 정도라고? 내가?

박문대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형, 그 배우 형을 좋아하는 거예요?”

“뭣, 뭐어어어!?”

배세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간다. 그렇겠지. 설마 대화도 안 듣고 들켰을 줄 몰랐을 테니까. 배세진은 숙소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해서인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너… 너! 그런 말 절대 밖에서 함부로 하면 안 돼!”

당연한 소리를 한다. 아이돌계에서 열애설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하지만 배세진의 말투는 자신이 아닌 상대를 신경써주는 느낌이라 기분이 별로였다. 저도 모르게 비꼬는 말투가 나왔다.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요. 걱정 마세요. 형이 얼마나 그분을 좋아하시든 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고….”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제 멋대로 착각해서 미련 철철 넘치는 소리나 내뱉는 제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온 감정은 쉽게 갈무리가 되질 않는다.

배세진은 그런 박문대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만 했다. 워낙 꼴사나워야지. 앞으로 배세진을 어떻게 봐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배세진이 말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그 형을 왜 좋아해?”

“……네?”

왜 좋아하냐니…. 박문대는 배세진을 쳐다봤다. 배세진은 순수하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응?

어쩔 수 없이 박문대는 배세진에게 자신의 추론을 설명해야했다. 그날 배우에게 보여주었던 배세진의 태도와 방금 전 대화로 그가 배우를 좋아하는 정황을 확신했다고. 배세진은 박문대의 말에 시시각각 얼굴색이 변하다 마지막엔 충격받은 얼굴로 씩씩대며 외쳤다.

“그게 말이 돼?! 그 형은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뭐라고?

 

***

 

“…그래서, 이번에 결혼하게 되었거든. 따로 발표는 안 하고 지인들만 데리고 조용히 할 예정이야.”

“…! 축하드려요, 형. 꼭 참석할게요.”

“에이. 너 바쁜 거 아는데 마음만으로 충분해. 그나저나 그 꼬마 세진이가 벌써 이렇게 자라다니 형은 감동이다. 어때, 좋은 사람은 있어?”

“그, 그건…!”

“오호, 반응을 보아하니 뭐가 있긴 하구만~? 형은 다 이해한다. 아이돌은 이쪽 업계보다 연애하기 힘들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는 인연을 다 놓아버리려 하지는 말아라.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이야.”

“…네. 고마워요. 형.”

 

“…그렇게 된 거야.”

“…….”

배세진이 알려준 그날의 진실에 박문대는 겨우 혀 깨물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사정을 알고 나니 여태껏 자신이 저지른 쌩쇼가 실시간으로 플래시 백되었기 때문이다.

“그 형은 정말로 그냥… 좋은 형일 뿐이야. 성적인 감정을 일절 없어…!”

하마터면 결혼식 빌런으로 몰아질 뻔한 배세진은 벌건 얼굴로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박문대는 순순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이상한 착각을 해서….”

“아, 아니야.”

그리고 침묵. 숙소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배세진은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은지 몇 번 입을 달싹였지만, 쓸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끄응 소리가 전부였다.

한편 박문대는… 깊이 생각했다. 자각한 자신의 감정이나, 이것저것 말이다. 그리고 인정했다. 그 동안 자신이 이것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박문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형,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어어, 어어어?”

배세진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사이에 섞인 사랑의 열꽃이 보였다. 제가 사랑하는 얼굴이다.

“아니, 아까 배우 형과의 대화를 들어보니 정말로 뭐가 있긴 한 것 같아서요.”

“그건… 그게…….”

배세진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눈동자를 가만히 두질 못했다. 작은 머리로 용기를 가지고 한 발짝 내밀어도 되는지 연신 고민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형 들어봐요,”

박문대는 배세진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사실은요. 제가 형을 좋아해요.

 



2. 아기로 변한 뵤(배세른 기반)

“와우, [완전 사랑스러워요!!]”

“으우…!”

지금 차유진에게 통실한 볼을 조물딱당하고 있는 저 아기는… 놀랍게도 배세진이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다행히 원래 기억은 가지고 있는지 낯을 심하게 가리는 녀석이 부모도 없이 우락부락한 남정네들 사이에서 냅다 울어버리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침없는 차유진의 스킨십에 점점 울상으로 변하는 걸 보니 저것도 곧 한계겠군.

“유진아, 그만. 지금 너무 거칠어.”

“맞아, 차유진! 아기는 피부가 예민하단 말이야! 지금 너의 행동은 아기를 귀여워하는 게 아니라 괴롭히는 짓이야!”

류청우의 중재에 맞춘 김래빈의 잔소리에 차유진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우우, 죄송해요.”라고 말하며 한풀 꺾였다. 하지만 류청우 품에 안긴 배세진은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는지 중얼거렸다.

“아, 아기…. 내가…….”

“앗, 형이 진짜 아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현재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형의 상태로 추측해보았을 때 아기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이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차유진에게 경고를 한 것이고….”

김래빈의 말이 이어질수록 배세진은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류청우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무래도 아이의 머리로 김래빈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듯 했다. 그런 배세진의 등을 류청우는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하. 세진이가 많이 놀랐나보다.”

“그, 그런 거 아냐!”

동갑에게 애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창피했는지 배세진은 얼굴은 화르륵 달아올랐다. 뭐, 내가 보기엔 평소에 류청우가 배세진을 대하는 태도와 그닥 다르지도 않았으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또 다른가보지. 그러면서도 류청우의 가슴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걸 보면 꽤나 저 품이 안락한 모양이다.

“…….”

아니다. 지금 나는 결코 류청우와 내 몸을 비교하는 그런 멍청한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나는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젓고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배세진을 노려보고 있는 놈에게 눈을 돌렸다.

“…….”

큰세진은 내가 놈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배세진이 류청우의 옷자락을 제 쪽으로 끌어당길 때마다 사회생활용 웃는 낯짝은 어디다 처박았는지 눈썹을 꿈틀댔다.

참고로 저놈은 배세진이 처음 아기로 변했을 때 “아니! 그 잔소리쟁이 형님이 이렇게 귀여워지다니!”같은 소리를 내며 배세진을 들어 올렸다가 한 차례 거절당한 전적이 있다.

잔뜩 몸을 굳히고는 “너는 너무 키가 커서 안기면 무섭다.”라고 했던가? 하지만 류청우한테는 안정적으로 안기는 걸 보고, 키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안기는 게 불편했기 때문에 배세진이 거절했다고 짐작하고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 잠깐만.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

배세진이 류청우 품에 들어가면서 찾아온 평화는 전화 한 통에 국면의 전환을 맞이했다. 류청우가 잠시 거실을 비울동안 배세진을 안을 다음 타자를 뽑아야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자기가 하겠다고 어필하는 놈부터 아닌 척 눈을 빛내는 놈들까지 경쟁이 치열했다.

배세진은 자기가 진짜 아기냐며 혼자 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만, 낑낑대며 소파에 올라가려다 그만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의 의견은 효력을 잃고 기각당했다. 참고로 나는 누가 배세진을 안든 상관없다 생각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아기가 편안해하는 안는 자세 정도는 숙지해두었다.

결국 공정한 승부(가위바위보)를 통해 승자는 선아현이 되었다. 이 놈도 아닌척하면서 아기가 된 배세진을 귀여워하는 티가 다 났지. 아무래도 형이다보니 눈치보며 자제했던 모양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지자 선아현은 활짝 웃으며 배세진에게 팔을 벌렸다.

“혀, 형, 이리 와요….”

배세진도 선아현이 상대라면 불만이 없는지 별말없이 쪼르르 다가가 폭 안겼다. 선아현은 유리조각을 다루는 것처럼 신중하게 배세진을 안아올렸다.

“…안 무거워?”

완전히 선아현의 팔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배세진이 선아현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아현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 세진 형, 깃털처럼 가벼워요…. 부드럽고….”

배세진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표정이었으나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선아현은 배세진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히고 앉아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형…, 머리… 쓰다듬어 봐도 될까요…?”

“으응…? 뭐…… 그 정도야….”

큰세진나 차유진이 물어봤으면 분명 기겁하며 싫다했을 텐데 선아현이 상대라 묘하게 허용범위가 넓어졌다.

선아현은 살살 배세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들썩였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 카메라를 켰다.

“바, 박문대! 뭐하는 거야!?”

“괜찮아요. SNS에는 안 올릴 거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고…!!”

나는 절대 그 누구와도 사진을 공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세 번쯤 반복하고서야 선아현과 배세진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띵-

“문대 형, 전자레인지에서 알람이 울리고 있습니다만?”

“아, 그렇지.”

나는 몸을 움직여 전자레인지에 넣어두었던 용기를 꺼냈다. 언제 냄새를 맡은 건지 차유진이 따라붙었다.

“네 꺼 아니다.”

“I know~ 저 욕심쟁이 아니에요. 아기 음식 안 뺏어요!”

그러냐. 나는 몰래 간식을 꺼내먹는 차유진을 뒤로한 채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완성했다. 아기 이유식은 처음 만들어봤는데 위튜브에 나온 대로 따라하니 그리 어렵지도 않더라고.

나는 선아현과 배세진을 부엌으로 불렀다. 내 손에 들린 햄스터무늬 식판에 배세진이 기겁했다.

“바, 박뮨대 너까지….”

혀까지 씹어대는 게 상당히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너까지 나를 아이 취급할 줄은 몰랐다’며 씩씩댈 기세길래 먼저 선수를 쳤다.

“래빈이 말대로 형 몸이 어려진 이상 주의할 필요가 있잖아요.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그래도…! 아기용 식판까지 준비할 필요는…. 그냥 원래 그릇에 줘도…!”

“뭐, 이왕 하는 김에 분위기 내본 거죠.”

“……!”

배세진은 예능 방송이었으면 등 뒤에 쿠궁 소리와 함께 놀란 햄스터 짤이 삽입됐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몸집이 작아지고 얼굴이 더 동글동글해진 탓일까 오늘따라 더욱 햄스터처럼 보이는군.

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식판을 노려보는 배세진에게 물었다.

“먹여드릴까요?”

“호, 혼자 할 수 있어…!”

“화이팅…!”

선아현의 응원까지 받은 배세진은 비장하게 아이용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이유식을 푸더니 제 입으로 가져간다.

“맛, 맛있네….”

눈을 빛내면서도 부끄러운지 흠흠 소리를 내는 배세진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더 있으니까 많이 드세요.”

“저도 맛 궁금해요!”

너 방금 전에 애 음식은 안 뺏어 먹는다 그러지 않았냐. 기어코 배세진에게서 이유식을 얻어먹은 차유진은 보답으로 배세진에게 젤리를 주었다. 배세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다 내가 녀석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먹을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세진은 젤리를 든 손을 최대한 내 쪽으로 뻗었다. 그래봤자 짧아서 한참 고개를 숙여야 젤리에 입이 닿았다만.

‘더럽게 다네.’

“맛있네요.”

“그, 그래?”

내 대답에 배세진은 얼굴이 확 피더니 방실방실 웃었다. 나는 겨우 휴대폰을 꺼내고 싶다는 충동을 눌렀다.

그 후로 배세진은 막내 녀석들과 큰세진에게 한참 시달리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날, 배세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큰세진이 지나가면서 “아~ 어린 형님이 귀여웠는데.”같은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면 멤버들은 어제 일이 꿈이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 이게 뭐야?!”

거실에 나온 배세진은 못 보던 탁상액자를 발견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부들부들거리는 그의 손에 들린 건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 배세진의 사진이었다. 음. 내가 봐도 잘 찍었다니까.

“박문대 너…! 내가 아무에게도 사진 주지 말라고….”

“네. 형 말대로 공유는 안했습니다.”

근데 요즘 프린터기가 성능이 좋더라고. 맘 같아선 선아현과 같이 찍은 사진으로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W앱같은데서 들키면 곤란하니까. 저 사진이면 배세진이 어렸을 때 찍은 거라 퉁칠 수 있었다.

배세진은 류청우나 김래빈이 잘 나왔다고 칭찬하는 소리에도 얼굴이 새빨개져 바들바들거리다 나에게 소리쳤다.

“야!”

오늘도 파란만장한 숙소였다.



3. 유치원 낮잠시간에 배세진 옆자리에 배게 던지고 눕는 문대

섬별유치원 햇님반 배세진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는 제 옷자락을 꼬옥 붙잡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뚫어져라 보는 아이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고 말했다.

“저기…….”

“녜.”

어린아이 특유의 뭉개진 발음에도 불구하고 진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배세진은 한층 더 곤란해졌다. 그러나 이쪽으로 몰린 반 아이들의 관심에 배세진은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여긴 7살 반… 햇님반인데…. 너는 5살이니까 별님반이고…….”

“알아요.”

안다고? 알면서 왜 여기 있지? 말문이 막혀 내려다보니 아이는 배세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쳤다. 왠지 모르겠지만 언뜻 무심해보이는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자, 여러분 낮잠시간이에요~ 모두 원하는 자리에 이불을 펴봅시다~”

손뼉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킨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세진도 아이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항상 자신이 낮잠자던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아이는 여전히 배세진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졸졸 쫓아왔다. 그러곤 배세진이 이부자리는 펴자마자 냅다 그 옆에 베개를 던지는 게 아닌가.

“……어?”

원래 배세진의 옆자리에서 낮잠을 잤던 소년이 당황스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런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어이없게 자리를 빼앗긴 소년이 아이에게 짜증을 내려 하자 소란의 예감을 느낀 선생님이 빠르게 중재에 나섰다.

“저… 문대야? 문대도 여기서 자게?”

“녜.”

“문대는 별님반이니까 자기 반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자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요. 여기가 좋아요.”

단호한 아이의 대답에 이 아이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걸 바로 파악한 선생님은 자리를 빼앗긴 소년에게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행히 이건 들어 먹혔는지 소년은 선생님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세진과 아이 둘만 남은 공간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세진 홀로 어색해하고 있었다. 이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지만, 배세진은 미간을 좁히며 아이에게 물었다.

“……정말로 여기서 자려고?”

“녜.”

아이는 세상 무심한 표정이면서 대답만큼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참고로 배세진은 오늘 이 아이를 처음 본다. 아무리 상대가 어린 아이라도 낯가림이 심한 편인 배세진은 이 상황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배세진이 입을 열 기색이 없자 아이는 처음으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형은 저랑 자는 거 싫어요…?”

“그, 그건….”

배세진은 아이가 싫은 건 아니었다.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은 작고 볼이 포동포동해서 귀여웠다. 다만 조금 어색하고 불편할 뿐.

배세진은 엄마와 떨어져 유치원에 왔던 첫날을 기억해냈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선생님이 달래줘도 엉엉 울었었지. 어쩌면… 이 아이도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기분인 게 아닐까? 어째서 배세진에게 마음을 붙인 건진 몰라도 아이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자신은 형이니까! 배세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혼자 자는 게 무서워?”

아이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예측이 들어맞은 배세진은 활짝 웃었다.

“…알았어! 그럼 같이 자자!”

배세진은 자신의 이불을 들어 올려 아이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혼자 잠들기 무서운 밤에 엄마를 찾아가면 그의 엄마가 그랬듯이 말이다. 아이는 배세진의 적극적인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거절하진 않았다. 곧이어 품 안에 따뜻한 감촉이 한 가득 들어왔다. 배세진은 어색한 손동작으로 아이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불편하진 않아…?”

“…아니요. 안 불편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혹시 더운가 싶어서 물어보니 아니랜다. 그러면서 아이는 배세진의 품속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얼굴에 닿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닿은 살결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배세진은 집에 있는 햄스터 바디필로우를 떠올렸다.

점점 수마가 자신을 덮치고 있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배세진은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배세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옅은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깜빡.

깜빡.

깜빡…….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교복차림의 박문대가 있었다.

“……어?”

“형, 왜 이 시간에 자고 있어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예요?”

박문대는 이제 막 변성기가 지난 소년의 목소리를 냈다. 매우 익숙하고, 또 좋아하는 그의 목소리다. 배세진은 잠이 덜 깨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바디필로우에 비볐다. 그제야 제가 안고 있는 게 5살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애착 바디필로우이며, 여기는 유치원이 아닌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아. 아까 그건 꿈이었구나. 배세진은 미처 달아나지 않은 잠기운에 비몽사몽하며 답했다.

“그냥… 어제 공부하다 좀 늦게 자서……. 너야말로 왜 여기 있어?”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키셔서요. 겸사겸사 형 얼굴도 보러왔죠.”

“…깨우지 그랬어.”

“좋은 꿈 꾸고 계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박문대는 피식 웃었다. 어렸을 땐 그가 감정표현이 적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박문대를 바라보던 배세진이 이불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들어올래?”

“……예?”

“어렸을 때 우리 항상 같이 잤잖아. 네가 혼자 자는 거 무섭다고 해서….”

아까 전 꿈의 영향으로 인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박문대의 표정이 묘해지는 걸 보고 배세진은 바로 후회했지만, 했던 말을 철회하기 앞서 박문대가 냉큼 침대에 올라섰다. 그의 무게에 시트가 출렁였다.

바디필로우 대신 배세진의 옆에 누운 박문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싱글침대는 다 큰 남자 둘이 눕기엔 좁아서 딱 달라붙어 누워야했다. 박문대의 숨이 목덜미에 닿자 배세진은 솜털이 쭈뼛 섰다.

‘이거 너무… 가깝지 않나?’

하지만 자기가 먼저 제안해놓고 이제 와서 뺄 수도 없었던 배세진은 눈을 굴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땐 그냥 같이 껴안고도 잘 잤는데. 뭐지 이 느낌은? 이거 손을 어디다 둬야 하는 거야?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아 배세진은 숨을 죽였다. 박문대는 그런 배세진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형.”

“으, 응?”

“형은 키스해본 적 있어요?”

“뭐?!”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배세진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모른 채 되는대로 말했다.

“없, 없어! 당연히 없지!”

“그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그것 역시 없다고 배세진은 대답하려 했으나 시선이 자연스레 박문대의 입술로 가면서 말문이 막혔다. 말캉해 보이는 분홍빛이다.

닿으면, 아마 부드럽겠지…?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박문대는 친한 동생일 뿐이잖아…!’

차마 박문대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배세진은 눈을 흘겼다. 지금 제 표정이 얼마나 볼썽사나울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모, 모르겠네.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럼 한번 생각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박문대는 허리에 손을 올렸다. 배세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야, 진정하자. 이건 그냥 친한 형동생끼리의 스킨십이다. 어렸을 때는 업고 안고 볼에 뽀뽀도 하고 다 했잖아? 그러니까….

‘왜… 왜 자꾸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 같지…?’

이게 지금 자신이 박문대의 입술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착각하는 건지 아니면 실제로 둘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머리가 과부화에 걸릴 것 같았다. 결국 배세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쪽.

따스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이마에 살짝 닿았다 사라진다. 배세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상기된 얼굴의 박문대가 보인다.

“잘 자요. 형.”

박문대는 그렇게 말하며 배세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떠났다. 배세진은 온기만 남은 빈 공간을 허우적거리다 아직도 촉감이 남아있는 이마에 손이 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배세진은 목까지 새빨개져서 방문을 어리벙벙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문 너머로 자신과 똑같은 표정의 박문대가 문에 기대 손으로 얼굴을 쓸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4. 왼_손에_총이_있고_5분_내로_른을_쏘지_않으면_세상이_멸망 댕뵤 ver.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숫자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4분 59초, 58초.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들고 있던 권총이 납덩어리라도 된 듯이 무겁다. 차가운 감촉에 손이 벌벌 떨렸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바닥을 찍는다.

4분 57초, 56초, 55초….

“…대, 박문대! 정신차려!”

“……허억!”

어깨가 흔들리는 감각에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핏기없는 얼굴로 서 있는 배세진이 있었다.

“너… 너 괜찮아? 또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다음 미션은….”

미션…. 나는 무심코 다시 팝업을 쳐다본다. [미션 실패 시: 세계의 멸망.] 참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 수 없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절대 저것이 허언도 과장도 아니란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나?

[조건: 배세진의 사망]

미션 실패 시 페널티가 아니다. 조건. 세계를 망하게 두고 싶지 않으면 배세진을 죽이라는 명료한 표현.

“박문대…?”

아니다. 정신 차리자. 분명 어딘가에 함정이 있는 거다. X발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와서 이럴 순 없다. 엿 먹이는 것도 X발 적당히 해야지.

생각해. 생각하는 거다. 4분 30초 안에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배세진이…….

“박문대! 나 좀 봐.”

짝. 가볍게 뺨을 두드리는 감각에 정신이 들었다. 배세진이 내 두 뺨을 감싸 쥐고 나를 노려보았다.

“정신 차려. 너 지금 표정이… 너무 안 좋아. 힘들면 좀 쉬어. 다음 미션이 뭔지 알려주면 내가 먼저 하고 있을 테니까….”

이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지? 자기가 하겠다니.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제 머리통을 후려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생각이라도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지. 나는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냥 좀 놀란 거라. 바로 움직일 수 있어요.”

“…알았어. 그럼 총이라도 나한테 줘. 너 그것 때문에 더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배세진은 내 걱정에 그렇게 말한 거겠지만, 미안하게도 그럴 순 없었다. 내가 고개를 내젓자 배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때, 갑자기 땅이 뒤틀렸다. 단순히 지진이라기엔 세상 전체가 어긋나며 비명을 지르는 듯한 굉음. 아무래도 멸망은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막 3분대로 진입한 카운트다운에서 글리치가 튀고 있었다. 젠장. 1분을 생으로 날린 자신에게 욕지거리를 날릴 시간도 없었다. 빨리 돌파구를….

“어…?”

배세진이 갑자기 새된 소리를 냈다. 마치 뭐라도 발견한 것처럼. 나는 무의식적으로 배세진의 시선을 좇았다. 녀석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내가 보고 있었던. 녀석의 눈에는 절대 보일 리 없는.

“이거…….”

배세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간다. 거짓말이지?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만약 배세진이 알아버리면…. 배세진의 손이 팝업창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다.

안 돼. 부탁이야. 깨닫지 마.

그 입에서 나와선 안 되는 말이 나온다.

“3분… 47초.”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나는 척수반사처럼 입을 열었다. 목 끝까지 차오른 심장 고동을 억지로 삼켜 침착을 가장했다. 배세진은 당장이라도 기절하지 않는 게 놀라운 안색이었다.

“…어떻게?”

“분명 다른 돌파구가 있을 거예요. 조금만… 저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

이제 배세진의 눈은 조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마술의 트릭을 파헤치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곧 꾹 눈을 감았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다 툭 하고 멈춘다. 낮게 숨을 뱉은 배세진이 결심을 굳힌 듯 말한다.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아님 그저 네 바람이야?”

“……그건,”

“다른 돌파구는 없어. 생각할 시간은 더더욱 없고.”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흐른다. 몸이 벌벌 떨렸다.

“선택지는 두 개야. 세상을 포기하거나….”

그만.

“내가 죽거나.”

그만해.

“그러니까 그 총….”

“거짓말 아니에요.”

내 쪽으로 손을 뻗던 배세진이 멈칫한다. 나는 최대한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된 대안, 생각해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형이 포기할 이유따윈…!”

없다고 외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물을 마신 게 언젠지 모르겠다. 이미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쉬자고, 포기하자고 속삭인다. X발 다 닥치라지. 누가 포기하겠냐고.

배세진은 미간을 찌푸리다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배세진이 스스로를 포기했대도 상관없었다. 내가 결정을 미루면 미룰수록 세계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대도 그것 역시 상관없다. 세계평화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배세진만 무사하다면 설령 세상이 X되든 말든….

와락.

체온이 느껴졌다. 흙먼지 사이에서 녀석의 냄새가 났다.

“울지 마. 네 잘못이 아냐.”

그의 말과 동시에 후드득 물방울이 중력에 의해 떨어졌다. …내가 울고 있었나? 배세진은 어색하게 나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준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다. 하지만 그 손끝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내, 내가 봤으니까 알아!”

배세진의 말투는 완전히 평소와 같았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한 태도. 그래서 더 기묘했다. …연기하고 있는 거다. 내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너는 살아줘.”

찰칵. 체온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뒷걸음치는 배세진의 얼굴이 보였다. 눈가가 살짝 발갰지만, 단단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형…!?”

“…미안.”

미안해.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는 배세진에게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그거 저한테 돌려주세요. 그거면 돼요. 내 부탁에도 배세진은 내 쪽을 보는 대신 붉게 점멸하는 카운트다운으로 시선을 옮겼다.

1분 17초, 16초….

“형, 제발….”

가지마요. 날 혼자 두지 마. 혼자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하물며 함께가 익숙해져버린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배세진이 사라진다면 나는….

하지만 배세진은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녀석을 불러도 뒷걸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나는 녀석을 쫓을 수조차 없었다. 만약 손만 닿는다면 힘으로라도 뺐을 텐데. 그걸 알기에 배세진도 나와 거리를 벌리는 거겠지만. 몸을 완전히 뒤돌기 전, 녀석은 고민하다 입을 연다.

“…넌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신뢰가 담긴 울림. 하지만 안타깝게도 배세진의 믿음은 틀렸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세계 따위 뒷전으로 간지 오래였으니까.

“그냥… 여기. 제 곁에 있어주면 안 돼요?”

나는 코먹은 소리를 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뒤로 처음으로 꺼낸 진심이었으나 배세진의 굳건한 결심을 흔들기엔 택도 없었나보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 사과를 반복하던 배세진은 카운트다운이 1분 이하로 내려가자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형!”

나는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지만 얼마 못 가 쓰러졌다. 상처가 터졌는지 배세진이 감아주었던 붕대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배세진!!”

녀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멀어졌다. 아마 죽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내가 시체조차 찾지 못하도록 어디 잔해 속에 들어가 머리에 총구를 들이댈지도 모른다. 오로지 홀로. 외로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무서워 떨고 있진 않을까. 나를 안아주던 배세진의 희미하게 떨리던 손의 감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다면 녀석은 결코 울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어디선가 작은 폭죽 소리가 들렸다.

 

[멸망까지 카운트 다운 00:00:03]

[미션 성공!]



5. 미국에서 호랑이 가족에게 둘러싸인 한입거리뵤 차배

“Hey~ [저 왔어요!]”

캘리포니아 한 가정집의 현관을 벌컥 열어젖히며 차유진이 씩씩하게 외치자 얼마 안가 복도는 복작복작해졌다.

[우리 강아지! 오느라 힘들었지?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히히 비행기 시간이 바뀌었거든요.]

차유진은 그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며 어리광부렸다. 며칠 뒤에 있을 해외 촬영 장소가 이 근처라 짧은 휴가를 겸해 집에 돌아온 것이다. 원래는 멤버 다 같이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일정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우연히 차유진과 같이 일정이 비어 함께 비행기를 탄 동료가 있었다.

“으학, 잠깐…!”

그리고 그 동료는 차유진이 가족과의 재회로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커다란 리트리버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개들이 몸으로 미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침 범벅이 되어가는 배세진을 보고 차유진은 외쳤다.

[메리, 안 돼!]

훈련을 잘 받은 개들은 차유진의 말 한 마디에 바닥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았다. 하지만 헥헥대며 배세진을 쳐다보는 꼴이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라 배세진은 몸을 움찔 거렸다. 차유진은 그런 배세진을 직접 일으켜 세워줬다.

“괜찮아요, 형?”

“무, 물론이지! 개들이 건강하네…!”

배세진은 한껏 당황한 게 그대로 드러났지만, 가족들 앞이라는 걸 깨닫고 표정을 수습했다. 그래봤자 옷도 얼굴도 침에 나뭇잎 투성이였지만 말이다. 배세진은 차유진의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미리 인사말을 준비해두었던 건지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나왔다. 가족들도 웃으며 배세진을 맞이해주었다.

[들어와요! 일단 얼굴부터 닦아야겠네.]


해외 로케 촬영이 차유진의 미국 집 근처로 잡히자 마침 그 전 일정도 없겠다 다 같이 자신의 집으로 놀러가자고 차유진이 숙소에서 신나 소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세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차유진네 집은 예전에도 한 번 방문한 적 있었고, 멤버 다 같이 가는 거니까…. 설마 갑자기 자신과 차유진을 제외한 모두가 스케줄이 생겨버려서 단 둘만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졸지에 테스타 대표가 되어버린 배세진은 매우, 아주 많이 부담스러웠다. 일단 배세진은 영어에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나름 공부를 하긴 했지만 박문대나 선아현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설령 영어를 술술 할 줄 안다고 해도 혼자서 차유진의 가족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게 오히려 다행인 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판단이 미친 배세진은 자신도 은근슬쩍 스케줄로 못 가게 된 멤버들 사이에 껴서 일단 차유진을 미국으로 보내고 뒤에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매일 밤마다 미국에 가서 멤버들과 하고 싶은 것들을 늘어놓던 차유진을 떠올리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배세진은 차유진과 함께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그래도 차유진네 가족들에게 좋은 인상을 보이려고 열심히 인사말도 외웠는데 개들한테 습격을 받으면서 엉망이 되었다. 그나마 다들 웃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배세진은 수건으로 침을 닦아내며 침울해지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차유진의 가족들은 다들 차유진을 닮았다. 밝고, 화려하고, 하나같이 건장했다. 특히 차유진과 같이 시원스레 웃으면 송곳니가 보이는 형은 팀 내 최장신인 이세진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커보였다.

‘저쪽은 진짜 호랑이같네….’

차유진이 들었다면 “저도 호랑이에요!” 하고 외쳤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며 배세진은 짐을 풀고 안내를 따라 거실로 갔다. 참고로 배세진이 짐을 푼 방은 예전에 차유진이 쓰던 방이었다. 배세진 혼자만 호텔에 가기도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차유진의 방은 딱 예상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예닐곱 명은 넉넉히 들어오겠다 싶었던 거실은 차유진의 가족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꽉 찼다. 가족이라곤 엄마와 뭉게가 전부인 배세진에게는 신선한 광경이었다. 차유진이 신나서 부엌과 거실을 뛰어다니는 동안 배세진에겐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다들 차유진과 혈연 아니랄까봐 낯가리고 영어도 잘 안 나오는 그를 상대로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배세진은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차유진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오랜만의 집! 오랜만에 모두 모인 가족!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까지! 그는 신나서 뛰어다니다 뒤늦게 예민하고 낯가림이 심한 형이 떠올랐다. 물론 자신의 가족들이 그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 형 역시 자기 앞가림을 잘 할 줄 아니 일부러 옆에 붙어 도와줄 필요는 없지만, 오늘 배세진은 자신의 손님이니까! 잘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야 초대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거겠지.

‘오우.’

거실에 들어서니 배세진은 그의 가족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소파에 머리통만 겨우 보였다. 이런 걸 김래빈이 뭐라고 하더라? 사면초가? 뭔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육식동물들 사이에 둘러싸인 초식동물 같달까…. 배세진은 가까이 붙는 그의 가족들의 거리감을 어색해하면서도 열심히 엉성한 영어로 말한다.

[유진이는… 항상 잘해요. 긴장도 거의 안 하고 표정? 얼굴?도 잘 써서….]

마침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차유진은 입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칭찬은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저대로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겠다고 차유진이 판단했을 때, 그의 여동생이 배세진에게 말을 걸었다.

[세진, 세진은 여자친구 있어?]

“뭣…!”

예상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배세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반응에 동생이 눈을 빛낸다. 건수를 잡은 짓궂은 청소년의 표정이었다. 오우. 이건 안 되겠네. 차유진은 순진한 형이 10대 소녀에게 한계까지 농락당하기 전에 소파 뒤에서 배세진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아이돌에게 애인에 대해 질문하는 건 NG행위야!]

[어째서?]

[우리는 러뷰어의 남자친구니까!]

물론 아이돌 경력 5년차인 차유진은 이제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아이돌의 문화를 잘 모르는 동생한테는 이게 가장 납득 가는 설명일 것이었다. 어쨌든 아이돌인 배세진은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동생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세진, 내 타입이었는데….]

“…?!”

한 순간에 어린 동생을 꼬신 파렴치한이 돼버린 배세진은 안절부절못하며 차유진을 올려다봤다. 차유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 이 정도 쯤이야 누구랑 섹스를 하느니 마느니를 농담을 하는 미국 문화에선 정말 가벼운 조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배세진에겐 그렇지가 않았나보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넷플러스는 잘만 보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차유진은 이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배세진에게 씩 웃어보였다.

“우리 밥 먹어요!”

그나저나 배세진 형이 내 동생의 타입이라….


차유진네는 식사자리 역시 왁자지껄했다. 차유진은 할머니의 비호 아래 박문대가 봤다면 뒷목을 잡을 정도로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배세진 앞에도 한 가득 음식이 있었다. 차유진은 그중에서 그릇이 넘칠 정도로 가득 담긴 수프를 가리키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배세진은 조심스레 스푼을 들었다.

“……!”

“맛있죠?”

배세진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맛있는 음식이 차유진의 손에서 그 꼴이 난 건지 평생의 미스터리였다.

차유진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 몸을 굴렸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차유진은 양손을 천장으로 쭉 뻗으며 외쳤다.

“내일은 우리 서핑 할 거예요!”

멤버들과 서핑. 차유진이 가장 기대하던 것 중 하나였다. 숙소에서도 계속 서핑하는 자신의 사진과 동영상을 배세진에게 보여주며 얼마나 떠들어 댔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그때는 차유진을 상대할 운동 멤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아니었다.

“미안. 나는 구경만 할 테니까.”

“Noooo~ 보기만 하는 거 안 돼요. 같이 하면 재밌어요!”

“그치만 나 수영 못하는 걸….”

“What?!”

진짜요?? 차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른인데도 수영 못해요? 어른인 거랑 수영이 무슨 상관인진 모르겠지만, 배세진은 차유진의 반응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 어른이어도 수영 못 할 수 있지!”

빽 하고 외치니 차유진은 도리어 심각해졌다. 그는 잠시 눈을 굴리다 말했다.

“그럼 형은 물이 무서운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OK~ 알겠어요. 저 다른 방법 생각해요.”

다른 방법? 그게 뭐냐고 배세진이 물어도 차유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내일을 기대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차유진의 신나 보이는 모습에 배세진은 기대보단 불안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그의 손에 들린 건 스윔수트와 커다란 물안경, 그리고 오리발이었다. 배세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외쳤다.

“스, 스노클링이라고!?”

“Yeees~ 바다를 즐기는 방법 많이 있어요! 그리고 스노클링은 수영 못해도 가능해요.”

차유진은 시원스레 송곳니를 드러내며 배세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이게 캘리포니아 출신의 사고방식인가? 배세진은 차유진이 바다에서 노는 동안 선배드에 누워있거나 발만 물에 묻힐 생각으로 왔다가 경악했다.

“…싫어요?”

배세진의 표정을 읽었는지 차유진은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키도 덩치도 배세진보다 크지만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기고양이같았다. 으으윽. 동생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배세진은 고민 끝에 눈을 꼭 감고 외쳤다.

“그, 그래. 까짓것 하지 뭐!”

“좋아요! 형 후회 안 해요. 저 스노클링도 특기에요!”

“뭐? 자, 잠깐 둘이서 하는 거야?!”

보통 이런 건 전문가가 한 명 붙거나 하지 않아?! 하지만 이런 배세진의 외침은 신나서 배세진의 손을 잡고 달려나가는 차유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툭툭.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감촉에 배세진은 꽉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공기방울이 시야를 지나쳐 올라간다. 전신을 감싸는 차가운 물의 감각에 오싹해지려다 어깨에 닿는 온기에 진정했다. 고개를 돌리니 스노클링용 물안경을 착용한 차유진이 보였다. 차유진은 방긋 웃으며 손짓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물을 타고 굴절되는 햇빛, 그 햇빛에 비춰 반짝이는 산호초. 간간히 지나다니는 물고기들과 이 모든 것을 감싸는 고요.

‘예쁘다….’

차갑다 생각했던 물은 어느 순간부터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주고 있었다. 해변가에만 있었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 알지 못 했을 감각. 배세진은 차유진이 이끄는 대로 바다를 유영했다.

“푸핫!”

“어때요?! 좋았죠?”

물안경을 벗어던지자마자 차유진은 기대감에 가득 차 소리쳤다. 물속에서 막혀있던 청각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꽤 오래 들어가 있었는데 숨 하나 안 찬 모습이 경이로웠다. 배세진은 상기된 얼굴로 멀고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다 조금 쑥스럽게 말했다.

“…한 번만 더 할까?”

차유진은 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송곳니가 보일정도로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탈력감에 지친 몸을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혔다. 해가 져서 식은 모래가 시원해서 기분 좋았다. 아직도 몸이 바닷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한 번만 더 한다는 게 거의 해가 질 때까지 즐겨버린 것이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누워버릴까 배세진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차유진이 뛰어왔다.

“형, 이거 해요!”

이제 저 말이 공포스럽게 들린다. 그렇게 실컷 놀았는데 또 하고 싶은 게 있다니?! 또 어떤 걸 들고 올까 두려움에 떠는 배세진에게 건네진 것은 막대기였다.

“……?”

“저쪽 사람들이 줬어요. 불꽃놀이!”

그렇게 말한 차유진은 손수 배세진의 막대기에 불까지 붙여줬다. 타닥타닥. 배세진의 손 안에서 막대기는 예쁜 주황빛을 내며 타들어갔다. 차유진은 자신의 막대기에도 불을 붙이고 배세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불꽃에 정신이 팔린 배세진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오늘 재밌었어요?”

차유진의 질문에 배세진을 잠시 고민하다 슬며시 웃었다. 언뜻 제멋대로로 보이는 이 아이가 사실은 얼마나 배려심이 넘치는지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응. 좋더라.”

[그럴 줄 알았어요!]

차유진은 벌떡 일어나 신나 소리쳤다.

“다음번엔 형네 집 놀러가요! 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거 했으니까 다음에는 형 좋아하는 거 해요!”

배세진의 취미 생활을 뻔히 아는 차유진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상당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정작 정말로 배세진이 원하는 걸 하면 10분도 못 견디고 뛰쳐나갈게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 마음만으로도 배세진은 충분했다.

“그래. 뭉게 보고 싶다는 애들도 있으니까. 다음에는 멤버들도 같이 해서 우리 집에 가자.”

이렇게 말하면 차유진은 당장 신나서 “좋아요!”라고 외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꺼지려하는 불꽃은 보지도 않고 무언가 골똘한 표정이었다.

“Umm… 그거 공평하지 않아요.”

“응?”

공평이라니? 방금 전 얘기에서 공평하고 말고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나? 하지만 차유진은 심각했다.

“이번에 형 혼자 저희 집 놀러왔으니까, 다음에도 저만 형네 집 가는 게 맞아요.”

“그, 그런가?”

하지만 이번엔 멤버들의 스케줄이 안 맞아서 그런 것뿐이고 원래는 다 같이 오려했던 건데…? 그러나 이미 차유진의 머릿속에는 확고한 알고리즘이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네! 그게 바로 기브 앤 테이크에요. 그러니까 다음에도 저랑 둘이 놀아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외치는 차유진을 배세진이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배세진은 백기를 들었다.

“그래. 그럼 둘이서 가자.”

“좋아요! 히히.”

차유진은 매우 만족했다는 얼굴을 하며 새로운 막대기에 불을 붙였다. 달빛과 불꽃이 어울어진 차유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뭐… 차유진이랑 둘이서 간 뒤에 멤버들과도 또 가면 되니까….’

미국과 달리 자기 집은 쉽게 갈 수 있다며 가볍게 생각한 배세진은 그 역시 새로운 막대기를 들었다.

적당히 나른한 몸. 부서지는 파도소리. 빛나는 불꽃.

아직 차유진의 입에서 “저는 러뷰어의 남자친구지만, 형의 남자친구여도 괜찮을 것 같아요.”라는 폭탄발언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화로운 밤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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