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뵤] 자주적 접촉 거부 上
S급 가이드 박문대 x C급 에스퍼 배세진
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던가.
만약 정말로 신이란 게 존재해서 인간이 딱 죽지 못할 만큼만 시련을 만들어주는 거라면, 세상에 그보다 더 잔인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가이딩이라는 게 글이나 영상으로 봤을 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실제로 해보면 전혀 안 그래~"
자료를 넘기는 내 표정이 점차 썩어가는 것을 느꼈는지 자신을 교육 담당이라고 소개한 인간은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는다.
"우리 센터는 손을 통한 가이딩이 기본 수칙이거든!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은 할 필요도 없고…."
이어지는 달콤한 꼬드김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계속해서 자료를 넘겼다. 손잡기, 포옹, 키스, 그리고… 허.
애정도 없는 상대와 몸을 섞으라는 게 국가소속 기관의 방침이라니. 세상에 망조가 든 것이 틀림없다. 아니, 이미 한 번 망했던가?
"센터에는 네 또래 애들도 있어. 다들 착하니까 금세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쟤가 걔에요? 그, 부모 잃고 S급 판정받았다는?"
"쉿! 다 들리겠어요."
교육 담당 뒤로 수군거리는 연구복 차림의 두 사람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들은 움찔해서 아닌 척 자리를 벗어난다.
그래. 세상이 이상한 괴수니, 게이트니 하는 것 때문에 망하든 그러지 않든, 그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어떻든, 적어도 나의 세계는 부모님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의 세계도 며칠 전의 게이트 사태로 깔끔하게 사라졌다. 부모님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괴수로부터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신 것이다.
그대로 꼼짝없이 고아 신세가 되나 했는데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가이드로 각성해버렸다.
그것도 센터 역사상 전례가 없는 S급 가이드로.
암것도 없는 애새끼인 나한테 센터 교육 담당이 쩔쩔매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숙소나 그런 것도 다 센터에서 지원해주고 생활비도…."
"할게요."
"어?"
"한다고요. 센터 가이드."
"어, 어~ 그래 문대야, 잘 생각했어! 그럼 계약서 줄 테니까 사인을…."
계속 뚱한 표정이었던 내가 바로 승낙할 줄은 몰랐는지 교육 담당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좋다구나 계약서를 들고 왔다.
나는 계약서를 죽 훑어보다 말했다.
"이거 지금 바로 사인할 필요는 없죠?"
"으, 응? 그… 그렇지? 천천히 읽어보고 네가 편할 때 하면 돼."
교육 담당은 친절한 말투를 유지하면서도 얼굴이 낭패로 일그러졌다. 멀쩡해 보이는 계약서 중간중간에 불공정 사항을 넣어놓은 걸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나? 나중에 하나씩 따져주겠다고 마음먹으며 계약서를 품에 챙겼을 때였다.
"선배님, 저…."
또 다른 연구복 차림의 사람이 다가오더니 교육 담당에게 귓속말을 했다. 교육담당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에게 말했다.
"문대야, 첫날부터 미안한데 아무래도 할 일이 생긴 모양이다."
교육 담당을 선배라고 부르던 연구원은 나를 센터 내부로 안내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가이딩은 기본적으로 가이드룸에서 이루어져.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이기도 해. 앞으로 너도 자주 들락거릴 테니까 익숙해지는 게 좋아."
"…네."
"긴장 풀어. 가이딩은 가이드의 감정 상태에도 영향을 받으니까."
X발. 긴장하지 말라고 해도 그게 쉬운가. 무시무시한 괴수를 맨손으로도 때려잡는 게 에스퍼인데. 그런 놈이 심신미약 상태로 있는 방에 단 둘이 있으라 하면서.
미디어에서 봤던 지랄 맞은 에스퍼들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친다. …설마 가이드를 패거나 그러진 않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방 안에 들어있는 게 최대한 덜 지랄 맞은 놈이길 바라는 것뿐이라는 게 기분이 참 엿같다.
"네가 가이딩 해야 하는 건 C급 에스퍼인데 끝까지 할 필요는 없어. 폭주만 안 하도록 조절하는 걸로 충분해."
"폭주요?"
"그래. 지금 좀 간당간당한 상태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진압팀이 출동할 테니까."
그것 참 안심되는 말이다. 첫 가이딩 상대가 무려 폭주 직전인 에스퍼라니.
"저기 보이지?"
가이딩룸 앞에 도착하자 연구원은 붉은 점등이 들어온 문을 가리켰다.
"밖에 사람을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뭔 일 있으면 호출하렴."
나는 떨떠름하게 연구원을 바라보다 문 앞에 섰다. 그것만으로도 문은 스르륵 옆으로 열렸다.
가이딩룸은 부엌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일반 원룸과 다를 바가 없었다.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침대 하나.
되도록 상대는 의자에 앉아있길 바랐건만, 테이블 쪽은 깔끔하게 비어있었다. 그 대신 침대 위에 이불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
'설마 저 안에 있는 건가…?'
들어가자마자 떽떽거리는 에스퍼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얌전하기만 한 방 분위기에 긴장이 탁 풀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불뭉치에서는 쌕쌕거리는, 고통이 섞인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
가까이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불 뭉치 속에서 잠긴 목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불자락이 흔들리더니, 그 안에서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일단 척 보기에 소년은 매체에서도 쉽게 못 볼 듯한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하지만 내 시선을 끄는 건 단순히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몸 곳곳에 보이는 생채기. 마른 입술. 떨리는 동공에서 느껴지는 경계심과 두려움. 애처롭게 떨리는 손끝까지.
녀석은 에스퍼라기엔 너무나도 작고 연약해 보였다.
소년은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운 경계를 걷는 듯했다. 센터에서 제 또래의 애도 있다고 말한 걸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제가 상상하던 괴수 때려잡는 에스퍼의 모습과는 천지차이지 않은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소년은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고통 섞인 눈으로 나를 위에서부터 찬찬히 훑어본 소년이 툭 말했다.
"뭐야… 애잖아?"
"…?"
뭐라는 거지? 어딜 봐도 지가 더 애처럼 생긴 주제에.
녀석은 나를 곁눈질하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그 모습이 꼭 경계하는 소동물 같았다. 새하얗게 질린 녀석의 턱으로 식은땀이 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여기 온 이유를 기억해 낸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
그러나 바로 내 손을 잡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녀석은 뭐하는 거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만 봤다. 설마 이쪽에서 먼저 가이딩을 하자고 말을 꺼내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던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 말했다.
"가이딩 안 하나요?"
그러자 녀석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진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피…, 필요 없어."
"네?"
"필요 없다고!"
빽 소리를 지른 녀석은 이불이 마치 방어막이라도 되는 듯이 파고들었다.
필요 없다니? 가이딩이? 잘못 들었다 치부하기엔 녀석이 삑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녀석의 상태는 에스퍼에 대해 무지렁이인 나라도 바로 알 정도로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가이딩을 거부하다니. 이유를 모르겠다. 자존심이라도 세우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녀석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깨를 떨고 있었다. 굳이 감정을 따지자면 공포에 가까우려나.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할 일이 달라지진 않았다. 어떤 사정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피차 선택지 없는 처지 아니던가.
내가 침대에 앉자 녀석이 움찔거렸다.
"피, 필요 없다고…."
"죄송하지만 저도 하라고 시킨 거라서요."
뒷말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머리가 살짝 몽롱해지면서 손끝으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다. 몸속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엿가락처럼 늘어나 퍼지는 듯한. 세상이 순환하는 듯한. 분명 내가 녀석한테 일방적으로 주는 입장일텐데도 섞이는 듯한.
모든 게 생소한 감각에 간지럼을 느끼며 나는 녀석을 바라봤다. 나름 가이딩이 되는 것 같으니 녀석도 얌전해지겠지 싶은 마음으로.
그러나 정작 녀석은 점점 더 얼굴이 하얘지기만 했다.
……왜지? 가이딩을 받으면 회복되는 게 아니었나?
손을 맞잡은지 10초도 안 되어 녀석은 거칠게 손을 뺐다.
"이제… 됐어!"
핏기 없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녀석은 외쳤다. 그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곧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망할 것들, 내가 들어가고 난 뒤에 문 잠갔었냐…?
천장 스피커로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박문대 가이드, 나오셔도 됩니다."
나는 녀석을 돌아봤지만, 이미 녀석은 등을 돌린 채 이불 고치가 되어있었다. 완전한 무시였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고, 가이딩룸을 나섰다. 녀석과 잡았던 손이 가이딩의 영향인지 어딘가 저릿했다.
센터에서의 생활은 예상 외로 할만했다. 아무래도 등급이 등급이다보니 대우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정도 생활에 적응이 되자, 같이 다니는 놈들도 생겼다.
"아 배세진 형님?"
그 중에서도 이 녀석. A급 가이드 이세진은 통성명을 하자마자 나한테 껌딱지처럼 들러붙으며 친구 흉내를 내고 있다.
"형님?"
"어, 우리보다 2살 많아."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놀랐다.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근데 왜? 그 형님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뭐, 조금."
내 반응에 이세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신경쓰지 마. 그 형님이 원래 좀 신경질적이야. 내가 말 걸어도 항상 틱틱대더라."
이세진은 어차피 센터 내에서 에스퍼랑 가이드는 별도로 생활하니까 자주 볼일 없을 거라고 말했다. 놈의 말은 쓸데 없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도록 배세진을 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드 훈련은 별 게 없었다. 에스퍼처럼 능력을 다루거나 체력단련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워낙 기본 등급이 높다보니 힘이 달린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아직 미성년자다보니 하루 가이딩 횟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난관은 가이딩 그 자체에 있었다. 가이딩을 할 때마다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저 손이라고 해도 타인과의 신체 접촉은 껄끄러웠고, 접촉했을 때 내 기운이 흘러나가는 것 역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S급이라는 등급은 헛된 게 아니었는지, 최소한의 신체 접촉만으로도 가이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센터 놈들은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꺼림찍한 감각만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가끔씩 은근슬쩍 손을 넘어 더듬는 에스퍼 새끼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끔찍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물론 나를 더듬었던 새끼들한테는 그보다 더한 지옥을 맛보여주었다.
'처음 가이딩 했을 땐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 느꼈던 감각을 다시 떠올려보려 해도 이미 시간이 지난 일이라 애매하기만 할뿐이었다. 어쩌면 그냥 기억이 미화된 걸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배세진을 다시 만나지 않는 이상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적당히 생각을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 기회는 그로부터 며칠 뒤에 생겼다.
"아."
센터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서 우연히 배세진을 맞닥뜨린 것이다. 대문짝하게 적힌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시가 되어있는 문에서 나오는 배세진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희게 질렸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배세진은 나를 보더니 움찔 놀랐다.
"너……."
일단 아는 얼굴이 보여 입은 열었는데 뭐라 말을 이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박문대에요."
"…? 그래."
"……."
"……."
끔찍할 정도의 침묵이다. 이거 그냥 대가리 숙이고 갈 길 가야하는 건가? 하지만 이번을 놓치면 언제 또 배세진을 만날까 싶었던 내가 적당히 아무말이나 내뱉으려 할 때였다.
"크, 크흠. 여기서 뭐해? 길이라도 잃은 거야?"
"예…?"
첫날 봤을 때 신경질적인 태도를 생각하면 무시하거나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배세진은 얼굴을 붉히며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했다. 생각치도 못한 반응이었다.
배세진은 내가 자기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머뭇거리며 다시 한번 반복했다.
"길… 잃은 거 아니냐고."
"네… 뭐, 네. 그렇죠."
사실 내가 센터에서 길을 잃을 이유는 없다. 여기 내부 지리야 들어오고 3일 안에 다 외웠고, 지금도 그냥 가던 길을 가던 중이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답하는 대신 배세진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디로 가는데? 가이드 숙소…?"
"네."
"그, 그럼 내가 안내해줄게!"
확 목소리가 밝아진 배세진은 내 승낙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휙 돌리더니 척척 앞으로 나아간다. 누가 에스퍼 아니랄까봐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하지만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던 나는 앞서나가는 녀석을 관찰하며 따라갔다.
막상 같이 서 있으니 키는 나랑 비슷한 정도이려나? 그런데 체구는 처음 만났을 때랑 별반 달라진 것 없이 비리비리하다. 그냥 보기에는 덤벨도 제대로 못 들 것 같은 저게 에스퍼라니. 놀랄 노자가 따로없다.
한편 티셔츠 밖으로 보이는 상처들은…. 에스퍼는 회복력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방금 전까지 훈련을 한 것인지 보는 사람이 쓰라릴 정도로 깊고 많았다.
저게 때릴 때가 어디있다고 저렇게 다져놓은 건지. 아무리 괴수도 때려잡는 놈이라도 너무한 거 아닌가싶어 약간 불만을 담아 녀석의 목과 어깨에 난 상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
"저기, 도착했는데…."
어느새 나는 내 방문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나는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눴는데 벌써 도착하다니. 넋이라도 뺀 것처럼 멍청하게 굴었다. 베세진을 붙잡을 명분도 없는데. 녀석의 숙소 위치라도 물어보는 게 좋으려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배세진은 우물쭈물 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저번엔 미안했어."
"…?"
나는 조금 늦게 녀석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였어서… 그, 그게 변명이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 말을 하려고 일부러 길 안내를 해주겠다고 나섰던 건가. 귀까지 새빨개져서 배세진은 쩌렁쩌렁 외쳤다.
"미,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썼어요."
사실 처음 봤을 땐 뭐 저딴 녀석이 있지 싶었지만, 요 몇 달간 여러 에스퍼들을 겪어보니 배세진 정도면 선녀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녀석은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다행이고…."
부끄러웠는지 배세진은 벌게진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목에 있던 상처가 쓸리면서 터진 건지 핏방울이 맺힌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 상처로 손을 뻗었다.
가볍게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찌릿하며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이딩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그 순간 배세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손을 쳐냈다.
"아…!"
스스로 쳐놓고 배세진은 자기가 더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배세진이 쳐냈던 손을 감싸쥐었다. 비리비리하게 생겼어도 역시 에스퍼라 그런지 힘이 무시무시하다. 손이 조금 뜨근한 것이 부어오를 듯 싶었다. 녀석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미, 미안. 정말 미안해… 다친 거야?"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손에는 닿지 않도록 배세진은 거리를 둔다. 또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피한다면 모를까 에스퍼가 가이드와의 접촉을 꺼릴 이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에스퍼는 본능적으로 가이드와의 접촉을 갈구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자기 힘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배세진은 반대로 행동한다. 첫 만남때도 배세진은 내 가이딩을 거절했다. 결국 억지로 가이딩을 받으면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지.
어째서?
"그냥 살짝 부은 정도에요. 형."
그렇게 말하며 내가 살짝 앞으로 나서자 배세진은 한 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횡설수설 할 말은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의무실에…."
"문대문대~ 왜케 소란스러, 어? 형님?"
그때 옆방이었던 이세진이 소란을 못이기고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는 자연스레 2대 1 대치 구조가 되었다. 거기서 배세진의 선택은….
"어라? 도망치신다."
36계 줄행랑이었다. 에스퍼의 신체능력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린 배세진을 바라보며 이세진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방해한 건가?"
"그래."
나의 단호한 대답에 이세진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차가울 수 있냐며 징징댔지만, 나는 배세진이 사라진 복도 끝에서 쉽사리 시선을 때지 못했다.
그 다음날 내 방문 손잡이에는 약간의 먹을거리와 손에 붙일만한 크기의 쿨링패드가 든 봉지가 걸려있었다.
다쳤던 손은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르자 완벽히 나았지만, 여전히 나는 배세진을 볼 수 없었다.
이세진때문에 숙소 위치도 못 물어봤으니 찾아갈 수도 없고, 일부러 일거리를 더 받아봐도 배세진은 가이딩으로 매칭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첫날을 제외하면 가이딩룸에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다 일련의 경험으로 추리해보면 녀석은 아예 가이딩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정공법으로 센터 놈들에게 배세진에 관한 정보를 캐내볼까 한 적도 있지만, 놈들은 배세진의 'ㅂ'자만 나와도 무슨 기밀인 양 마냥 말을 돌리기 바빴다.
결국 배세진과 직접 맞닥뜨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날을 잡고 S급 가이드의 권한을 남용해 에스퍼들의 훈련장에 죽쳐보기까지 했는데 발이 엇갈린 건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수확이 아예 없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에스퍼들의 공간을 들락날락하다가 또래 에스퍼 한 명과 가까워진 것이다.
"세, 세진 형은 다른 훈련도 병행하고 있어서 이, 이쪽으론 자주 안 와."
자기를 선아현이라 소개한 녀석은 소심한 태도와 달리 식물을 제 맘대로 조종한다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었다. 내가 맨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뭔가를 찾는 모양새니까 도와주고 싶다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호, 혹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가 대, 대신 해줄까?"
에스퍼라고 으스대는 녀석들만 보다가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선아현을 보니 매우 신선했다. 나는 이참에 녀석을 통해 궁금증을 하나 해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그건 됐고,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 나한테?"
"너는 가이딩 받으면 어떤 기분이냐?"
선아현은 내 질문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주었다.
"으, 응? 어… 부, 불안정하던 힘이 진정되면서 마, 마음도 차분해지는 기분?"
"그럼 혹시 가이딩을 받고 싶지 않은 때는 없었어?"
"없, 없었던 거 같아…. 더 많이 받고 싶다고 새, 생각한 적은 있어도…."
마지막 말은 부끄러웠던 것인지 선아현은 볼을 살짝 붉혔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보통은 이렇지.
적당히 얻을만한 정보는 얻었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배세진과 못 만났지만, 앞으로는 선아현을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 며칠 내로 만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얘기해줘서 고맙다. 나중에 또 보자."
"무, 문대야!"
하지만 선아현은 나에게 예상보다 더 큰 복덩이였다.
"지금 생각났는데 세, 세진 형 말이야. 이 시간이라면 어, 쩌면 휴게실에 있을 지도 몰라."
'정말 있다.'
나는 에스퍼 휴게실 구석에서 소파에 머리를 박은 채 자고 있는 배세진을 발견했다. 여전히 안색도 허옇고 또 언제 다쳤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지만, 처음으로 보는 인상쓰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숨소리는 안정적이야.'
예민해서 다가가면 깰 줄 알았는데 녀석은 푹 잠든 채였다. 기절한 건 아닌 것 같고,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나는 곱게 감긴 녀석의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차.'
뒤늦게 배세진이 나와의 접촉을 기겁하며 피한다는 걸 기억해냈지만, 이미 손은 녀석의 눈가에 닿았다. 배세진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나는 더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떼어내지도 못한 채 몸이 굳었다. 깬 건가 싶어 녀석을 내려다보는데 녀석이 머리를 움직였다.
내 손 쪽으로 말이다.
"……!"
배세진은 마치 온기를 찾는 아이처럼 내 손에 제 볼을 비비적대었다. 손바닥에 짜릿한 감각이 돌았다. 그러자 녀석은 본능적으로 더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손과 손 이외의 가이딩은 이게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배세진은 제대로 된 가이딩을 안 받아온 것인지 몸 속의 기운이 쭉쭉 빠져서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른 에스퍼 녀석들의 가이딩을 해줄 때처럼 역겨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는 살짝 벌어진 배세진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뭔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손만 닿는 게 아니라 좀 더 깊은…….
"으음…."
"…!"
배세진의 신음에 정신을 차린 난 뒤로 물러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미쳤나?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쿵쿵댔다. 손으로 가슴을 내리눌렀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휴게실을 벗어났다. 어서 빨리, 방으로 돌아가야 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진 모르겠지만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발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손목이 붙잡혔다.
"야 너, S급 가이드라던 걔 맞지?"
나는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곧바로 팔을 뿌리쳤다. 고개를 돌리니 영문모를 에스퍼놈이 날 보며 킬킬대고 있었다.
나는 짜증을 담아 물었다.
"뭡니까?"
"아니, 가이딩룸에서도 보기 힘든 스타를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가워서."
에스퍼놈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왔다. 손 모양을 보아하니 또 만지려드려는 심보였다. 아직도 센터에서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놈이 남아 있었다니. 소문에 귀가 어두운 건지 만용이 넘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놈 덕분에 배세진 곁에 있을 때의 울렁거림이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그 보답으로 놈에겐 지금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
자, 그럼 저 새끼 어떻게 족쳐야 잘 족쳤다고 소문이 날까. 내가 팔을 막 걷어붙이려할 때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나와 에스퍼놈은 동시에 목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배세진이 서있었다.
에스퍼놈은 나를 대할 때완 다르게 눈에 띄게 당황한 태도를 보였다.
"야, 배세진. 네가 왜 여기에…."
"가이드의 허락없이 에스퍼가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건 센터 규정 위반인 거 몰라?"
그러면서 배세진은 나와 에스퍼놈 사이로 끼어들어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에스퍼놈은 이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배세진이 등급은 낮아도 센터에 있던 기간이 길어서 또래 에스퍼 사이에선 나름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만(선아현이 알려줬다) 그게 진짜였던 모양이다.
에스퍼놈은 되도 않는 변명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그것 역시 깔끔하게 막혔다.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고? 만약 박문대가 허락했다 쳐도 센터가 정한 구역 외의 공간에서의 가이딩은 원칙적으로 금지야. 어느 쪽이든 지금 네가 할 말은 없을 텐데?"
에스퍼놈에게 하는 말이었겠지만, 방금 전 휴게실에서 몰래 배세진에게 가이딩을 했던 나까지 덩달아 찔끔했다. 결국 변명거리가 떨어진 놈은 베세진의 협박에 나에게 진심없는 사과를 날린 뒤 꽁지가 빠져라 튀었다.
"박문대, 괜찮아?"
놈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배세진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곧이어 씩씩댔다.
"저 녀석 언젠간 일 낼 줄 알았다니까! 저건 명백한 범죄라고! 박문대, 걱정하지 마! 내가 센터에다가 잘 말해놓을게. 다신 네 앞에 얼쩡거리지 못할 거야."
걱정한 적 없다. 지금까지 저렇게 집적대던 놈들은 모두 다 평생 내 손 끝 하나 못 건들게 되었으니까. 배세진이 센터에 보고한다면 내가 직접 손 볼 기회가 날아가버려서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나.
"고마워요. 형."
"그, 아니야. 이 정돈."
감사인사를 하면 얼굴이 벌개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차분한 반응이 돌아왔다. 찌푸린 얼굴이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형,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그냥…. 에스퍼와 가이드가 진정으로 동등한 관계였다면 이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
예상 외로 심각한 주제를 꺼내는군. 나는 당황해 말을 잃었다. 그래도 배세진이 분위기는 읽었는지 정적에 눈치를 보다 내 손에 시선이 갔다.
"아 참, 너 그… 손은 괜찮아…?"
그것 참 빨리도 물어본다. 나는 깔끔하게 완치된 손을 들어보였다.
"네, 괜찮아요."
"정말로 미안했어……."
어째 배세진을 만나면 사과만 받는 입장이 되네. 나는 쭈뻣거리는 배세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뇨, 뭐. 덕분에 과자도 얻어먹었는걸요."
배세진이 쿨링패드랑 같이 줬던 먹을거리 얘기를 하며 내가 웃자 배세진도 안심한 건지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가이딩 덕분인지 여태까지 보아온 녀석의 모습 중에 가장 안색이 밝다.
그 뒤로 짧은 근황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녀석이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가이드인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그게."
배세진과 만나려고 훈련장에서 죽치고 앉아있다 수소문 끝에 여기까지 온 걸 솔직하게 말하면 녀석은 소스라칠 게 뻔했다. 하지만 미처 다른 변명을 준비해두지 않아서 나는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읊었다.
"그… 길을 잃어서요."
박문대 이 멍청한 새끼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무슨 가이드가 길을 잃어서 에스퍼들의 휴게실까지 와? 이딴 걸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가 세상에….
"아! 그랬어? 힘들었겠다. 그럼 숙소가는 길도 모르겠네. 내가 데려다줄까…?"
여기 있네. 아무래도 배세진은 나를 세상에 둘도 없는 길치로 착각한 모양이지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세진의 안내를 받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나는 배세진의 등만 봤던 예전과 달리 적당히 대화도 나누며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난 최대한의 기지를 발휘해 일상 얘기를 하는 척 여태껏 가장 궁금해왔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형은 가이딩 안 받아요?"
"어…?"
"가이딩룸에 오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배세진은 내 질문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 나는 등급이 낮아서 가이딩 받을 필요 없어. 스스로 조절할 수 있거든."
"아하."
거짓말이다. 분명 첫날에 폭주 직전이라고 연구원놈이 말했던 걸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배세진은 더 이상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지 말을 돌렸다.
"너야말로 길을 잃었다 해도 용케 이런 데까지 흘러 들어왔네. 가이드랑 에스퍼는 아예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을 텐데."
꽤나 정곡을 찌르는군. 나는 방금 얼굴 튼 놈을 팔아넘기기로 했다.
"그게 사실은 에스퍼 중에 아는 녀석이 있어서요. 잠시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그만…."
미안하다. 선아현. 하지만 딱히 거짓말은 아니잖아?
배세진은 나한테 에스퍼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기특해하면서도(왜 배세진이?) 곧 걱정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친구도 좋지만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공동 구역에서 만나도록 해. 혹은 센터 사람들이 있는 곳이나.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아무리 규칙이 있다해도 아까처럼 제멋대로인 녀석들이 있기도 하고……."
걱정에서 시작된 녀석의 말은 점차 잔소리로 이어졌다. 눈이 번뜩이는 게 나에 대해 연장자이자 경험자로서 조언을 해주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뭔가 애 취급을 받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투정에 가까운 말을 꺼내버렸다.
"그럼 형은 어떻게 만나는데요?"
"어? 나?"
"네. 형이요."
배세진은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눈을 끔뻑이더니 말했다.
"날 왜… 만나고 싶은데…?"
그러게…?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센터에 들어오고 처음만난 에스퍼라? 왜 가이딩을 거부하는지 궁금해서?
하지만 원래의 자신이라면 타인의 일에 그렇게까지 머리를 들이밀려 않을텐데.
배세진과 내가 만나야 되는 이유야 만들라하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런 사실들을 다 제쳐두고 생각한다면…… 그냥 녀석의 얼굴을 보고싶은 게 가장 컸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녀석의 다른 표정이 보고싶다. 녀석이 울고 웃는 순간에 옆에 있는 게 자신이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녀석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다.
어째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가이드고 녀석이 에스퍼라 그런 건가? 이게 바로 본능적인 이끌림이라는 걸까? 심장 박동이 묘하게 빠르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어……?"
"전 형이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요."
"나, 나랑?!"
"네. 대화해보니 말이 잘 통하는 거 같아서요."
그, 그렇단 말야? 나의 막무가내 밀어붙임에 배세진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상당히 당황했는지 목까지 시뻘게진 게 웃겼다. 좀 더 밀어붙일까 하다가 이 이상 압박하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기다렸다. 배세진은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알았어, 그럼! 일요일 날, 소등 시간 30분 전에 옥상정원으로 와."
큼큼 거리며 목을 가다듬던 배세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시선을 피했다.
"거기면 조, 조용히 대화할 수 있으니까."
창피해하는 배세진을 보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난 녀석이 딴말하지 않도록 냉큼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럼 그때 봬요. 형."
배세진이 말한 옥상정원은 노후화되어 개수공사를 앞두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중단되면서 그대로 버려진 곳이었다. 그대로 사람 발길도 끊겨 센터에 오래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존재조차 모르기에 다른 사람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오면 좋다고 배세진이 알려줬다.
비록 꽃 대신 잡초가 무성하고 그네의자는 삐걱대는 소리를 내서 을씨년스러운 곳이었지만, 배세진과 만날 수 있다면야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그 뒤로 나와 녀석은 일주일에 한 번, 소등되기 전 짧은 시간동안 밀회 아닌 밀회를 즐겼다.
주로 하는 건 그네의자에 나란히 앉아 훈련이 힘들었네 센터의 누가 뭘 했네 하는 시시콜콜한 잡담이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정원 구석에서 발견한 깨진 램프를 고쳐서 세워두니 나름 운치도 있었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언뜻 보이는 베세진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우리는 그 짧은 만남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에서 다시 겨울이 오고, 또 그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생기거나 어느 한쪽이 센터를 비우지 않는 이상 미리 말하지 않아도 그 시간만 되면 우리는 옥상정원에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 배세진은 여전히 나와 닿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같이 앉아도 항상 주먹 한 개의 거리를 유지했지만 일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담는 순간 배세진이 더는 옥상에 올라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두려웠던 것 같다. 건드리면 이 관계가 무너질까 봐.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까 봐.
그만큼 나한테는 그 시간이 소중했다. 별도 안 보이는 밤하늘 밑에서 녀석과 떠드는 별 거 아닌 그 시간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녀석과 함께 있을 때는 이 망할 세상 속에서도 마음이 조금 편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모든 걸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척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랬던 자신을 미치도록 후회한다.
"이거 봐요. 178cm. 맞죠?"
"말도 안 돼! 분명 저번에는 그것보다 작았잖아…!"
"남자는 군대 갈 때까지 키 큰다고 하잖아요."
"으으…!"
배세진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는 듯 내 신체검사표를 램프 불빛에 비췄다. 그리고 선명하게 보이는 178이라는 숫자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겨우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형은 얼마 나왔어요? 에스퍼 쪽도 오늘 검사 결과 나왔죠?"
"……cm."
"네?"
"177cm라고! 보통 어른이 되면 키가 더 안 자란단 말야!"
빼액! 소리를 내며 외치는 배세진은 조금만 건드리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눈이 그렁그렁했다.
그 정도로 충격 받을 일인가? 적어도 내 기억으로 배세진과 내 키가 똑같았던 적은 있어도 내가 녀석보다 작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반대로 내가 더 이상 키가 크지 않는 상황에서 배세진한테 1cm차이로 발렸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꼴받았을 것 같긴 하다.
적당히 납득한 나는 배세진을 달랬다. 녀석도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시뻘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소매 사이로 팔뚝에 난 검붉은 자국이 보인다.
'또 상처가 늘었네.'
선아현이 알려준 대로 배세진은 다른 에스퍼와 별도로 특별훈련을 받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자기 능력을 잘 컨트롤하지 못해서 추가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데, 거기만 다녀오면 꼭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녀석의 상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배세진은 스리슬쩍 상처를 가렸기에 나는 그 화제를 건들거나 하진 않았다.
"아 참. 나 다음주에 지원 나가."
헤어지기 전, 배세진은 방금 막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또요?"
"응. 요즘 일이 좀 많네."
그러니까 다음주엔 여기 못 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배세진은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럴 때는 나도 모르게 서운해진다. 물론 겨우 한 번 안 만나는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딱 한 번밖에 못 보는 사이인데. 그 한 번조차 없어지는 걸 아무렇지 않아하는 배세진을 보면 녀석은 나만큼 이 만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간다. 지원을 나가는 게 배세진이 원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녀석이 싫다해서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서운하다니. 동생 취급 받으니까 사고방식도 바보같이 진짜 애새끼처럼 되어 버리기라도 한 건가.
결국 내가 배세진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였다.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형."
"문대문대~ 지금 내가 흔들고 있는 손이 몇 개~?"
"……."
"와 이 자식. 진짜 정줄을 놓았잖아? 문대문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내가 담당한테 말해둘 테니까 오늘은 일찍 방에 들어가서 쉴래?"
"……그게 되냐?"
"아. 반응했다."
내가 온종일 정신을 놓고 있자 관심을 끌겠다며 열심히 내 앞에서 재롱을 떨던 이세진은 내가 드디어 자신과 눈을 마주쳤다며 좋아했다.
"뭐, 되지 않을까? 오늘 지원 인력이 많이 빠져나가서 센터도 한산하고~ 지금도 우리 할 일 없어서 이렇게 멍 때리고 있잖아. 뭣하면 지원 나가는 아현아현 배웅이라도 가주던가?"
"…선아현이 지원을 나가?"
"와. 문대문대. 진짜 심각하구나? 아까 인사하러 왔었잖아. 기억 안 나?"
그러고 보니… 선아현이 중간에 찾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정신을 놓고 있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까진 기억을 못하지만. 선아현도 지원 인력에 포함되어 있었구나….
그럼 배세진도 거기에 있나?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야, 이세진. 지원 나가는 녀석들 지금 어디에 있어?"
"어? 그야 주차장에 있겠지. 다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알겠어. 그럼 난 간다."
"뭐? 갑자기? 야! 진짜로 가버리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이세진을 뒤로 한 채 달려나갔다. 배세진은 옥상에서 만날 때를 제외하면 나와 같이 있는 걸 꺼려했지만(센터 놈들에게 우리 둘이 붙어있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는 듯 했다) 선아현을 배웅하면서 겸사겸사 보는 거라면 녀석도 뭐라 못하겠지.
주차장 쪽으로 가자 모인 사람들 중 바로 선아현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도 나를 발견했는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 문대야? 여긴 어쩐 일이야…?"
"배웅해주려고."
응? 아까 인사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지만, 선아현은 착실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렇구나…. 고, 고마워."
"근데 배세진 형은 안 보인다?"
"으, 응?"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배세진을 찾자 선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 세진 형은 이번 지원 안 나가는데?"
"뭐?"
확실히 여기 어딘가에 배세진이 있다면 눈에 띌 텐데 전혀 눈에 들어오는 이가 없다. 내가 착각한 건가? 하지만 배세진이 직접 나한테 해준 말이잖아?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선아현도 덩달아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일단 선아현부터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돌렸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 안 모양이야."
"아, 아니야."
내가 고개를 까딱 숙이자 선아현은 소스라쳐서 손을 내젓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럼 배세진은 지금 어디있는 거지? 센터 내부에 있나? 그럼 애초에 지원을 나간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었다고? 왜 그런 거짓말을 했지?
어떤 가설도 충분한 정보가 없으니 모두 허무맹랑하게 느껴진다. 배세진이 없으니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발길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선아현이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채고 묻는다.
"혹시… 세진 형이 어, 디 있는지 찾는 거야?"
"어. 혹시 아는 거 있냐?"
나는 선아현의 물음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놈은 내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섰다. 동공 양옆으로 흔들리던 녀석은 내 표정을 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게 세진 형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요즘 에, 에스퍼 사이에서 도는 뜬소문이 있어서…."
"뭐라도 좋아. 뜬소문이라도 괜찮으니까 말해줘."
선아현은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원래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그보다 배는 더 낮췄다. 나는 거의 귓속말을 듣는 것처럼 귀를 가져다 대고야 녀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세, 세진 형이 하고 있는 특별 훈련 말이야……. 그게 사람들이 말하길 후, 훈련이 아니라 어떤 시, 실험의 일종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순간 돌로 머리를 쳐맞는 기분을 느꼈다. 실험? 훈련이 아니라 실험이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나도 모르게 선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말 진짜야?"
"그, 그냥 소문일 뿐, 뿐이라 나, 나도 잘 몰라! 처, 청우 형이라면 좀 더 잘 알 텐데……."
선아현이 당황해 버둥대는 걸 보고 나는 내가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물러섰다.
"그…, 미안하다."
"아니야… 추, 충분히 이해해."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땐 놀랐으니까…. 선아현은 부드럽게 나를 감싸주었지만 나는 멍청한 나 자신을 패고 싶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나? 배세진 몸의 상처를 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냔 말이다.
답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녀석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여기 들어온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녀석은 가이딩을 거부하는 에스퍼였으니까. 가이딩은 에스퍼의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하지만 폭주하지 않는다는 녀석의 말마따나 배세진은 몇 년이고 멀쩡했으니까…….
아니, 아니다. 나는 그저 녀석과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는 그 욕심 때문에 일부러 모르는 척한 것이다.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리고, 이제는 알아야 할 때였다.
나는 선아현에게 물었다.
"류청우, 그 형 지금 어디있어?"
류청우.
신체 강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에스퍼이지만, 정작 가이드가 가이딩을 받는다고 착각할 만큼 청량한 성격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
배세진과 같은 나이라 그런진 몰라도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종종 봤었다.
나는 훈련장에서 나오는 녀석에게 다가섰다.
"아, 문대구나?"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먼저 녀석이 아는 척을 해왔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 세진 형 지금 어디갔는지 알아요?"
"응? 세진이는 지원 나갔잖아."
그래. 아무래도 이쪽은 말을 맞춰둔 모양이군. 하지만 그렇다는 건 반대로 류청우는 정말로 무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가 된다.
"안 나간 거 다 알아요."
"……."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문대야, 나는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배세진이 참여했다는 실험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몰라?"
"……."
그 순간 류청우의 미소가 사라졌다.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근처에 없다는 걸 확인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제가 그걸 꼭 말해야 합니까?"
"음…. 아니.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겠지……."
녀석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층 낮게 속삭였다.
"세진이에 대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야겠니? 너한테 뭐라 하는 게 아니라, 한번 알게 되면 돌이킬 수 없어서 하는 말이야."
"네. 알고 싶습니다. 알아야겠어요."
내가 고민의 틈도 없이 말을 받자 류청우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물론이죠."
"그래 너라면… 아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세진이는 싫어하겠지만….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흘린 류청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시 모습을 회복해 다정하게 웃었다.
"그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갈까?"
류청우가 대화 장소로 고른 곳은 옥상정원이었다. 세진이가 이쪽으론 사람이 잘 안 온다고 그랬거든. 그렇게 말하는 녀석에게 사실 자기와 배세진이 매주 여기서 만나고 있다고 말하기도 뭣해 입 다물고 고개나 끄덕여줬다.
류청우는 내가 초조해하는 것을 아는지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세진이 보다 늦게 센터에 들어왔기도 하고."
"그렇게… 오래 전부터 실험을 했어요?"
"그래. 못해도 10년은 넘었을 거야."
10년….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항상 상처투성이었던 배세진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럼 그 자식은 10살 무렵부터 그러고 살았다는 거야? 나는 침음을 삼켰다.
"대체 무슨 실험이길래 그렇게 꽁꽁 숨겨서 하는 겁니까?"
"하위 등급의 에스퍼를 인위적으로 상위 등급으로 올리는 걸 목표로 하는 실험…이라고 하면 이해가 가니? 뭐. 흔히 말하는 인체실험이지."
"……!"
나는 말문이 막혔다. 공공기관에서 남몰래 인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센터에서 등급에 따라 은근히 차별하는 구석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그 궤도를 벗어나는 얘기다. 아무리 세상이 한번 망했기로서니 이런…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 것인가?
나는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럼… 세진 형은……."
"실험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개체… 라고 해야하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말이야."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류청우의 태도에 가슴께에서 뭔지 모를 울분이 일렁거렸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류청우의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녀석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그걸 알면서도 내버려뒀다고요?"
"그래. 우리 둘 다 어렸으니까."
하지만 류청우는 예상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내 분노를 받아들였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렸다.
"지금은 아니잖아. 센터에서 도망쳐도 받아줄만한 곳이…!"
그래. 이제는 우리 모두 센터로 가지 않으면 길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꼬맹이들이 아니다. 비록 도망치면 센터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만, 에스퍼인 이상 생존에는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나 류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안 돼."
"어째서요?"
목소리가 튄다. 감정이 조절이 안 된다. 잘못하면 류청우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라 나는 손을 꾹 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세진이는… 센터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없는 몸이야."
"그게 무슨…!"
"문대야. 너는 세진이가 가이딩 받는 거 본 적 있어?"
"……!"
"실험의 부작용이야. 에스퍼인데 가이딩을 몸이 못 받아들여. 본인 말로는 가이딩을 받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면서 기운이 섞이지 않고 몸이 뒤틀리는 느낌이라더라. 다행히 지금까진 센터에서 조달하는 약물로 어찌저찌 버티고 있지만… 센터 밖에서는 아마 힘들겠지."
류청우의 말을 듣자 지금까지 일련의 사건들이 정리가 된다. 가이딩룸에서 벌벌 떨던 배세진. 내가 손만 대도 화들짝 놀라 도망치던 녀석. 하지만 동시에 납득되지 않는 점 역시 존재했다.
분명히… 내 가이딩은 배세진한테 통하지 않았었나?
배세진이 잠들어 있을 때 딱 한 번 뿐이지만, 내 가이딩은 성공했다. 배세진은 확실하게 내 가이딩을 받아들였다. 본인은 자고 있어서 몰랐겠지만, 내 손에 제 얼굴을 부비기까지 했으니까.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류청우는 내가 혼란에 빠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문대야. 만약 네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세진이를 도와주고 싶다면… 새벽에 내가 말한 곳으로 와."
류청우는 메모를 꺼내더니 위치와 시간을 적어 나한테 건넸다. 그러고는 내가 생각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빌게."
숙소에 돌아와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후드로 얼굴을 꽁꽁 싸맨 채 밖으로 나갔다.
류청우가 안내한 곳은 과거, 배세진이 나온 적이 있는 출입금지구역 푯말이 적혀있는 문 앞이었다. 나는 또 다시 말문을 잃었다.
"여기가…."
"가자."
류청우가 앞장서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놈을 따라 갔다.
앞에 펼쳐진 것은 긴 계단이었다. 나와 류청우는 아무 대화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긴장 때문인지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이 천 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녀석에게 언제쯤 도착하는지 묻기보다 류청우가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게 먼저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거 내일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창문 너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어떻게 모를까. 센터에 들어온 첫날. 나를 배세진에게 안내했던 연구원 녀석인데. 그럼 저 새끼가 말하는 '저거'는……!
나는 이를 갈며 놈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아. 이번에도 역시 실패인가."
"그래도 저 정도면 오래 버텼죠. 아쉽네요. 가이딩만 통해도 성공할 수 있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되려나요. 막막하네요."
나도 모르게 몸이 튀어나가려 했던 것인지 류청우가 날 내리눌렀다. 놈들은 누구때문에 목숨을 건진지도 모르고 입을 놀린다.
"일단 내버려두고 차후를 지켜보죠. 지금까지도 생명력 하나는 끈질겼잖아요."
놈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류청우는 억지로 나를 끌고 몸을 숨겼다. 입까지 막힌 나는 바둥거렸다. 하지만 아예 날뛰지 못하도록 힘으로 포박한 류청우는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를 풀어줬다.
나는 바로 튀어나갔다.
"형!"
나는 바로 배세진을 찾아 나섰다. 녀석은 주변이 초토화된 공간 한 가운데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공간 안에 제대로 형체를 유지하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는 배세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배세진!"
녀석의 몰골은 끔찍했다. 제대로 뼈가 붙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사람이 이렇게까지 넝마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죽지 않았다. 집중하면 겨우 들을 수 있는 얕은 숨을 내쉬며 목숨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반복해서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녀석은 살짝 눈을 떴다.
"박… 문대…?"
"네. 저 박문대에요, 형. 정신 차려봐요."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호흡을 내쉬며 배세진은 나를 바라봤다.
"네가… 왜 여기…에?"
"형 말하지 말아봐요. 상처가 벌어지고 있어요."
"그… 으윽!"
"형!"
배세진은 몸을 일으키려다 신음을 흘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내가 배세진의 몸에 손을 대도 되는 건가? 배세진이 가이딩을 못 받아들이는 몸이라는 건 방금 연구원놈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배세진에게 손을 대서, 녀석이 더 괴로워지기라도 한다면 어쩌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류청우가 나섰다.
"부상이 심해. 일단 방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 내가 할게."
류청우는 어렵지 않게 배세진을 안아올렸다. 류청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배세진은 가는 숨을 뱉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형!!"
"괜찮아…. 기절한 것뿐이야. 어서 올라가자."
그렇게 내가 멍청하게 아무것도 못하는 동안 류청우는 배세진을 녀석의 방으로 옮겨 응급처지를 시행했다. 나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류청우가 모든 걸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형은 좀 어때요…?"
류청우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초조함을 삼키며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 좋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만 상처 회복 속도가 느려서…."
"어떻게 방법은 없는 거예요?"
"이미 몸이 많이 망가졌어. 힘도 너무 많이썼고. 제대로 된 가이딩이 없는 한 죽거나, 폭주하겠지."
"……!"
배세진이… 죽는다고?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는 배세진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는다. 오늘 하루 들은 정보가 너무 많은데다 하나같이 충격적이라서….
아니다. X발 정신차려 이 멍청한 새끼야. 충격적이든 뭐든 그게 뭔 상관이란 말이냐. 대가리가 없어진 게 아니라면 계속해서 굴려라. 잘못하면 배세진이 죽는다고.
나는 억지로 입을 움직였다.
"가이딩…이 없으면 죽는다는 건…… 반대로 제대로 된 가이딩만 있다면 배세진 형은 살 수 있다는 거죠?"
류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제가… 만약에 제가 가이딩을 한다면 형은 살까요?"
"……."
"솔직히… 믿으실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몇 번 세진 형의 몸에 손이 닿아서…… 가이딩이 된 적이 있어요. 대부분 거부반응을 일으켰지만 그래도 딱 한 번…. 적어도 제가 보기엔 성공했던 적이 있어요. 그 형은 그때 잠들어 있었지만."
말하고 보니 내가 허락도 없이 의식없는 타인의 몸이나 만져댄 답도 없는 쓰레기처럼 느껴지는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류청우에게서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반응이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녀석은 침묵을 유지했다. 이에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녀석을 불렀다.
"형?"
"아, 미안. 네가 설마 그걸…. 아니. 이건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류청우는 왠지 모르게 당황한 낌새였다. 녀석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은 오히려 내쪽에서 부탁하려고 했어. 이 상황에서 세진이를 센터 의사에게 데려간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가이드도 마찬가지고…. 네 말대로 가능성이 있다면 되든 안 되든 시도해봐야지."
"그럼…."
"난 일단 밖으로 나갈게. 필요한 약도 더 챙기고, 센터 사람들이 이 방으로 찾아오지 못하도록 주의를 끌 테니까…."
류청우는 뒷말을 잊지 않았지만 난 충분히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류청우는 부담을 지게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류청우가 방을 나가자 방 안은 배세진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만이 유일했다. 무시무시한 에스퍼의 회복력 덕분에 처음 발견했을 때에 비하면 상처가 낫긴 했지만, 녀석의 얼굴은 그만큼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래서 만날 때마다 이 자식 안색이….'
배세진은 대체 얼마나 이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살아온 걸까. 털어놓지 못하고 속으로 삼킨 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C급이라는 이유로 인간 취급도 못받고 혹사당하면서, 센터 내에서 그저 높은 등급이라는 이유만으로 호의호식하던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X발.'
지금은 그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배세진을 살려야한다. 무슨 짓을 해서든.
나는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손끝이 떨렸다. 두려웠다. 배세진에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이. 내가 녀석을 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무력감에.
하지만 해야한다. 어차피 최악의 결말은 정해져있다. 그렇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나는 기도하듯 양손으로 녀석의 오른손을 그러쥐었다.
배세진은 그 매니저가 껄끄럽다(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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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뵤] 자주적 접촉 거부 下
S급 가이드 박문대 x C급 에스퍼 배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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