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전

Winter Bliss

12/08, 누구보다도 다정한 겨울의 주인에게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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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류건우씨 생일 축하해-----!!!

사람은 찰나의 행복을 곱씹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어디에서 들은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류건우는 삶에 치여 흐릿해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주 가끔은 짧은 틈을 쪼개어 붙잡고 살아갈 만한 기억이 뭐가 있는지 잠시 뒤져봤던 것도 같다. 다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여서, 행복했던 기억은 작은 틈새에서 발견되기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류건우에게는 과거를 뒤적이며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 시절의 그는 물밀듯이 닥쳐오는 현실을 비집고 나아가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릴 시간도 없었다. 흩어진 퍼즐처럼 부스러진 마음은 이미 잔뜩 얼룩지고 저들끼리 제멋대로 뭉쳐, 류건우는 퍼즐을 맞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 그야 같은 이유였다.

  “건우 형!”

  “어, 왔냐.”

  “헤헤.”

그러던 중 이어진 아주 작은 인연은 류건우에게 작은 웃음을 선사하곤 했다. 국밥을 사줬던 꼬맹이에게서 간간이 오던 연락은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따뜻해서. 처음 꼬맹이, 박문대를 봤을 때의 잔뜩 기죽은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펴져서, 이제는 자신을 보면 활짝 웃을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면 꼭 커다란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류건우는 손을 들어 박문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면 헤헤 웃는 얼굴에, 항상 무표정하던 류건우도 피식 웃어버리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연말의 시작, 슬슬 난방비가 걱정되는 겨울의 초입인 12월 초. 류건우는 꼭 오늘 보고 싶다며 시무룩하게 일정을 묻는 꼬마에게 졌고, 결국 박문대와 함께 류건우의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평소엔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집에 놀러 오겠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인 박문대였기에 더 흔쾌히 장소를 제공한 것도 있었다. 류건우가 집을 적당히 치우고 시간 맞춰 마중하러 가자, 오랜만에 본 박문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고, 류건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상자를 받아서 들었다.

  “웬 케이크냐. 돈이 어디 있다고.”

  “그, 그래도… 이거 사려고 모아뒀었어요. 오늘이 형 생일이잖아요, 케이크 정도는 같이 먹으면 어떨까 싶어서…”

  “생일?”

  “네! 오늘이잖아요...”

집으로 향하는 길,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냐며 경악하는 박문대를 옆에 두고 류건우는 멋쩍은 얼굴로 스마트폰 화면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12월 8일, 별 특별한 것도 없는 날짜. 그러다 문득 떠올리는 거다.

  “아, 오늘이었나.”

  “형! 잊어버리신 거예요?”

  “어. 안 챙긴 지 좀 돼서.”

  “으으흡…”

생일이면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한 음식을 해 먹는 정도로 넘겼던 것 같다며 기억을 되짚는 류건우의 모습에 박문대는 마음이 잔뜩 쓰인 모양이었다. 우당탕거리며 류건우의 집에 들어선 박문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케이크가 든 상자를 비장하게 뜯어내고는 조심히 초를 꽂았다.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 영 불안해서 성냥을 뺏어들자, 박문대는 또 헤헤 웃고는 불이 붙은 초를 뽑아다 다른 초에도 불을 붙였다. 울다가 웃으면 뿔난다고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류건우는 가만히 옆에 앉아 박문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커다란 초 세 개가 꽂힌 케이크와 켜둔 형광등 아래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보며 박문대는 노래를 불렀다. 류건우에 비하면 조금 어린 티가 나는 얼굴과 목소리. 류건우는 노래하며 미소짓는 박문대를 물끄러미 보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건우 형, 생일 축하합니다.”

  “...”

  “형, 생일 축하드려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류건우를 슬쩍 확인하고는 머쓱해진 듯 박문대의 얼굴이 아래로 꺾이더니 점점 붉어졌다. 고개를 살짝 숙인 박문대를 보던 류건우는 작게 웃고는 손을 들어 박문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 짓던 것과는 약간 다른, 조금 더 따뜻한 미소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든 박문대는 제 머리 위로 얹힌 익숙한 온기에 그제야 마음 편하게 류건우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다.

낡은 원룸, 조금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형과 조금 더 말랑하고 따뜻한 동생, 재잘거리는 목소리와 다디단 케이크, 이따금 터지는 한숨과도 같은 웃음소리.

성대한 파티도, 제대로 된 커팅식도, 거창한 선물도 없었지만 작은 온기가 함께한 그 생일은 류건우의 손에 잡힌 찰나의 행복이 되었다.

  “네 생일이 다음 주지. 기대해라.”

  “네?!”

-

그랬던 적도 있었다.

  “문대문대 생일 축하해~!”

  “문대야, 생일 축하해…!”

  “문대 형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생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문대 형!”

  “큼, 새,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요, 형.”

  - 형, 생일 축하드려요!

12월 8일. 이제는 잃어버린 류건우의 생일. 큰달을 제외하면 딱히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던 탓에 자신도 반쯤 잊었던 그 생일을 누군가 챙겨주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과거 류건우였던 박문대는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커다란 케이크와 꽂힌 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무엇도 침투할 수 없던 견고한 칠흑이 머리 위에 쓴 우스꽝스러운 형광 고깔모자와 눈앞으로 날아드는 꽃가루와 함께하는 밝은 노랑이 되기까지의 일들.

어두워진 기색을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는 이런 날에는 역시 생일인 사람 얼굴에 크림을 묻혀줘야 한다며 도망가려는 박문대의 코끝에 기어이 크림을 찍어바른 이세진의 등짝을 조금 아프게 쓰다듬어주고, 이세진 형 혼자 재밌는 거 한다며 박문대의 뺨에도 크림을 치덕치덕 발라준 차유진을 보며 내일 아침엔 저염식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 모습을 보며 자애롭게 웃는 류청우는 왜 이렇게 얄미운 건지. 은근히 장난을 부추기는 것 같은 웃음에 괜히 한 번 째려보기도 한다. 문대문대가 내 등 때렸다며 찡찡거리는 이세진을 조심조심 달래는 선아현, 그새 부엌에 가서 케이크를 담을 그릇과 크림을 닦을 휴지를 들고 총총 오는 배세진. 시야를 공유받아 지금 상황을 고스란히 같이 지켜보며 우와, 감탄하는 큰달. 차유진을 말리지 못한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바보야, 잔소리하면서 제게는 쩔쩔매는 모습에 박문대는 결국 웃고 말았다. 이런 녀석들을 두고 어떻게 자신이 혼자 상념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자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녀석들이 이렇게 많으니 오늘은 충분히 기뻐해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도, 생일 축하 파티에는 술이 끼어들었다. 물론 박문대의 몫은 무알콜이었다.

  “저 오늘 생일인데요.”

  “너 저번에 술…!”

박문대는 배세진의 말끝에 무엇이 생략되었는지 눈치채고는 얌전히 무알콜 맥주를 받아 들었다. 무알콜 맥주를 받아든 박문대가 그치만 저 오늘 생일인데요, 하고 서글픈 얼굴로 중얼거리자, 배세진은 지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그다음부터는 그냥 시원한 맥주를 건네주었다. 좀처럼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박문대였기에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박문대를 지켜보다 큰달이 보낸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아 달라는 메시지에, 박문대는 피식 웃고는 남은 캔맥주를 천천히 비웠다.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빈 맥주 캔 다섯 개에 큰달은 자기도 이렇게까지 형에게 술을 먹인 적이 없다며 울먹였지만, 이미 마신 거 뭐 어쩐단 말인가. 박문대는 팝업에 주던 시선을 슬쩍 피하고는 아주 쿨하게 잔소리를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달콤한 케이크, 사랑하는 사람들, 즐거운 소란과 시원한 맥주. 박문대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분위기에 취해 옆에 널브러졌던 다른 멤버들도 그에 맞춰 흥얼거리고, 시무룩해졌던 큰달도 가사를 띄우며 즐거이 글씨를 떨었다. 박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은 그날, 밤새도록 왁자지껄했다.

되찾은 기억 속의 생일과 더불어, 그래서 오늘은 박문대가 품고 갈 또 다른 행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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