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장마 후
비 갠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게 도윤이안
*장마 전, 장마에서 이어집니다.
*전체적으로 가벼운 분위기. 비도 그쳤으니까요.
비는 사물을 가리지 않고 흠뻑 적셨다. 흐린 하늘이 오래 지속되었지만 서도윤은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창 밖을 자주 보던 그는 그날을 기점으로 교실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빽빽한 학생들의 검은 머리통 사이에서 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까맣고, 하얗고, 보드랍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곳에 빛이 고여드는 것만 같다. 서도윤의 눈이 미동없이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은 여전히 서도윤을 보지 않았다. 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고집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망설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서도윤은 팔랑거리는 이안의 속눈썹을 보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지간한 또래보다 키와 체격이 커, 그 움직임만으로도 시선이 끌려갈 텐데 이안은 고집스러웠다. 괜찮아. 서글픈 자위는 아니었다. 실로 괜찮았다.
조례가 끝난다. 담임선생님의 마무리 말을 들으며 이안은 짐을 챙겼다. 서도윤은 이안의 차분한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선생님의 말이 끝맺기 무섭게 이안이 움직였다.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뒷문을 열고 나가는 행동거지가 말끔했다. 하얀 교복셔츠의 팔랑거리는 끝단을 보던 서도윤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뒷문을 열고 나가, 먼저 계단을 오르는 이안의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
거절하지 않는다. 거부하지 않는다. 공기 취급이나 다름없지만 부러 잘라내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아. 서도윤은 마음 한구석이 가볍게 들뜨는 걸 느꼈다. 이안은 우산을 챙겨왔다. 서도윤은 알았다. 우산을 가져왔다고 해서, 꼭 쓴다는 법이 있던가?
*
2주의 장마는 그리 길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에게 다행인 일이었다. 간만에 본 맑게 갠 하늘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와, 그래도 비 오니까 좀 시원하네. 내일부터는 다시 끝내주게 더워질걸? 시시콜콜한 대화가 창문 앞에서 오갔다. 투명하고 맑은 햇살이 창문을 넘어 교실 위로 길게 누웠다. 제 책상 위로도 슬쩍 손 뻗은 햇빛을 보며 서도윤이 느지막한 만족을 흘렸다. 햇볕의 온기가 손등을 물들였다.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은 열감이 기분 좋았다.
열감, 제 것과 다른 따뜻함이 주는 온도. 서도윤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피부 중에서도 유독 얇은 표피 너머로 전해지던 온기는 이것만큼이나 따뜻했다. 빛 한 줌 없던 장마가 그리 춥지 않았던 것은 분명 그 탓이리라. 나직하게 만족스런 목울음을 흘린 서도윤이 책상 옆에 둔 종이가방을 어루만졌다. 종이가방 속의 색유리가 햇빛을 머금어 반짝 빛났다.
이안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미술실을 사용하는 학급이 있어 아쉽게도 교실로 내려와야 했던 서도윤은 혼자 진동하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기다리기로 했다. 인내하는 것은 서도윤이 잘 하는 것이었다. 참아내는 것, 견뎌내는 것, 그 모든 것을 버텨 이곳에서 이안을 만나지 않았던가. 서도윤은 기쁘게 기다릴 수 있었다. 이안과 만나 보여줄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종이 울렸다. 서도윤은 한 켠에 두었던 종이가방을 안아들고 서둘러 교실을 나섰다. 한 번에 세 계단씩 건너가며 성큼성큼 빠르게 올라가는 기예는 제법 이목을 끌 만했지만, 서도윤은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쭉쭉 올라가는 다리가 미술실과 음악실이 있는 층을 넘었다. 두 층 더 올라간 서도윤은 굳게 닫힌 옥상문을 망설임 없이 열었다.
비온 뒤의 쾌청한 바람이 시원하게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서도윤은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을 즐기다가 훌쩍 옥상에 발을 들였다.
깨끗한 햇빛이 구석구석 들어오는 옥상은 일찍이 등교해 말끔히 닦아놓았다. 얌전히 무릎 꿇고 옥상 바닥을 박박 닦는 모습은 제법 웃겼겠지만, 이안만 보았으니 부끄러울 건 없었다. 도윤은 깨끗한 바닥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어보고 조심스레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이안이 오려면 멀었나? 옥상문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의 세계는 분명하다. 섬세하면서도 과격한 면이 있고, 그런데도 흐트러짐 없이 통일성을 갖추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시선을 사로잡고 그 안의 숨겨진 규칙을 들여다본다면 홀린다. 다양한 것을 쓸 수 있지만 통일해서 골랐다. 빛의 투과량을 재어가며 색의 깊이를 성심성의껏 비교했다. 그리하여 완성한 것은 하나의 세계, 나의 색안경, 제 눈으로 본 이안이었다.
"아직이야?"
옥상문이 열림과 동시에 깨끗한 목소리가 울렸다. 서도윤은 그쪽을 바라보며 어설프게 웃었다. 어둠 속에서 이안이 가르쳐준 방식을 익혔다지만 영 웃지 않던 얼굴로는 어려웠다. 이안은 서도윤의 어색하기 짝이없는 미소를 보다가 말없이 눈을 내렸다. 깨끗한 바닥 위에 놓인 넓고 투명한 플라스틱 접시 위로 제대로 조형된 색유리가 어지럽게 배열되어 있었다.
서도윤은 대답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되도 않는 침묵을 고집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이안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을 택했다. 잘각잘각, 유리가 가는 소리를 내며 순서대로 놓였다. 규칙적이지 않다. 마구잡이로 놓인다. 밑그림을 보지 않고 그 자리에 정확히 퍼즐을 내려놓는 것과 비슷했다. 수없이 반복했음이 분명한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그 움직임을 지그시 내려다보다 눈을 짧게 깜박였다. 아, 이거……. 그가 서도윤을 보자 서도윤이 길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들었던 순서대로야. 음악실에서 너를 알아본 때부터 들었던 곡의 순서."
"처음이 틀렸잖아."
이안의 손이 미완성된 스테인드글라스의 한 켠을 가리켰다. 분명, 이안이 이곳에서 연주한 적 없는 곡이었다. 서도윤은 이안이 짚은 곳을 보고 부러 고개를 들어 이안을 응시했다. 얼굴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혹은 각인하려는 것처럼. 제 두 눈에 이안을 찍어내려 그의 흔적이 짙게 남은 각막으로 세상을 응시하려는 것만 같았다. 어리던 소년의 애정을 담아, 경애를 담아.
"안 틀렸어. 저게 맞아."
"내가 틀렸다고?"
"아니, 이안도 틀리지 않았어. 이건 그냥……."
3년 전의 CD. 이모에 의해 크레파스를 쥐었던 제 귀에 꽂혔던 그 바이올린 소리. 한국어가 어설퍼 독어로 주인을 물었던 콩쿨 연주. 서도윤이 옅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내가 처음으로 너를 들었던 곡이라서."
그저 순수한 기쁨만이 가득한 얼굴에 이안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빛을 머리 위에 진 이안을 올려다보며 서도윤이 조그맣게 물었다. 누구야? 이번엔 독일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상황을 보았을 때 분명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차이안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대답했다. …차이안. 기다렸던 대답이 본인에게서 들려왔다. 넘실거리는 감정이 물밀 듯 쏟아진다. 서도윤은 부드럽게 이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이안을 안은 그가 환희에 찬 목소리를 흘렸다.
"그 음악실 문 너머에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
마지막 붉은 유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서도윤은 그 위로 플라스틱 판을 꾹 눌러 덮은 뒤 단단히 고정했다.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어 제대로 된 납뗌도 하지 않은, 위치만 잡았을 뿐인 작품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렵잖게 판을 들어올리자 좁은 플라스틱 판에 끼인 색유리들이 중력에 의해 차르르 쌓이며 모양을 갖추었다. 맑은 빛이 유리를 투과해 옥상 바닥 위로 쏟아진다. 그 빛무리 가운데 선 이안은 제게 드리우는 빛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손끝으로 펼쳐 귀로 들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 끝에 보이는 것은 오롯한 자신이라, 이안은 빠르게 밀려드는 감정을 차마 완전히 삼켜내지 못했다. 이안의 담담했던 표정이 녹아내렸다. 이윽고 말갛게 드러난 희미한 진심이 옅은 웃음으로 새어나왔다.
어린 공예가가 보고 싶어 했던, 맑게 개인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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