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도윤이안] 장마

빗소리가 공간을 단절시킨다.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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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게 도윤이안.

*장마 전에서 이어지고, 이후 장마 후로 이어집니다.

*썰 풀었던 트윗 타래를 구체화 했습니다.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흐리지 않던 하늘을 기억하는 학생들이 우려섞인 목소리로 수근거렸다. 삼삼오오 모여 잿빛 하늘에 시선을 꽂은 모양새가 설핏 무리 지은 미어캣 같았다. 엥, 벌써? 밤부터 비 온다고 하지 않았냐? 몰라, 일기예보 안 맞는 게 하루 이틀임? 아… 비 맞고 가게 생겼네. 이른 오후부터 교실의 형광등이 켜졌다. 습한 어둠을 한껏 머금은 하늘을 힐끗거리던 이들이 불안한 마음을 품고 수업을 준비했다.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하기 전, 사설로 날씨를 선택한 그가 교과서를 펼치며 물었다. 오늘 일찍부터 비 올 것 같은데, 우산 챙겨온 사람? 몇몇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창 밖을 응시하던 회색 눈동자가 교실의 눅눅한 공기를 가로질러 한 곳에 꽂혔다. 평소라면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어 마땅한 소년이 눈가를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채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내 눈길을 느끼지 못했나? 그럴 리가. 서도윤은 소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으려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냈다. 눈이 마주친다면 좋겠지만 이안이 저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제가 그를 쳐다보고 있는 한, 계속.

괜한 고집을. 서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지? 그는 고개를 꺾어 기울였다가 다시 창 밖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고작 몇 분 눈 돌렸을 뿐인데 삽시간에 더 어두워졌다. 곧 비가 올 것이다. 아마, 첫 빗방울은 3시쯤에 떨어질 듯했다. 억수 같이 쏟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안 걸리겠지. 서도윤은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손을 움직여 야광석을 굴렸다. 동글동글한 돌이 그의 큰 손 아래서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어느 새 제 체온에 물들어 따뜻해진 것을 느끼며 그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1학기 초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그 생각만으로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아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서도윤이 눈을 내리깔고 느린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개학 후의 일을 빠르게 되짚었다. ……. 매료된 건 나뿐이었나? 서도윤은 몇 개월 전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날' 부르던 목소리. 단단하고 흔들림없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그 자신이 하는 연주를 꼭 빼닮은 듯한 음성. 유리를 만지고 있을 때 그 이름에 반응한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이 엷게 깨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충격에 기쁜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그가 알아들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유리의 배열을 읽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의 저와 마찬가지로 일순간에 매료된 것이 보였다. 이안, 음악실 밖으로 새어나온, 듣는 이를 홀리는 연주. 사람이라고는 한 명뿐인 음악실 밖에서 꽉 닫힌 문에 기대 앉아 음률의 편린을 주워들었다. 한 시간을 통째로 그리 날리고 저 홀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 어린 음악가,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나의, 바이올리니스트.

분명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안은 묻지 않았다. 관심이 없다면 아예 묻지 않을 텐데 서도윤의 소년은 상투적인 질문만 하고 입을 닫았다. 사과의 껍질을 핥으면 맛있어? 무심코 그리 물을 뻔했다는 것을 이안은 평생 모를 것이다. 알고자 하면 기꺼이 말해주겠지만, 그는 묻지 않을 테니까.

새 학기가 시작됐을 때, 서도윤은 제법 들떠 있었다. 그래, 들떠 있었다. 이안을 생각하며 유리를 접붙였다. 녹아내린 납이 튀어 피부에 조그마한 화상흉을 남겨도 마냥 즐거웠다. 그가 들려준 세계를 구현하고 싶어 안달났었다. 이 세계를 보여주고, 너의 세계를 듣고, 그걸 뒤섞어서―. 그러나 하기도 전에 끊어졌다. 보여주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안은 그를 보지 않았고 서도윤은 보지 않는 이의 시선을 묶는 방법따위 알지 못 했다.

이건 차인 것과 같구나. 서도윤은 자신이 조금 시무룩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톡톡,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손이 조금 거칠었다. 듣고 있지? 입 안에서만 맴도는 문장을 꿀꺽 삼켰다. 종소리가 울리고 쉬는 시간이 시작됐다. 목요일 6교시, 미술실은 공실이다. 서도윤은 지익 의자를 뒤로 끌었다. 슬리퍼가 교실 바닥과 마찰하며 느리고 긴 발걸음 소리를 만들어냈다. 다른 준비물은 미술실에 있으니 몸만 가면 됐다. 서도윤은 교실 뒷문을 열어 홀로 복도를 나선 뒤 계단을 올랐다. 목요일 6교시, 음악실 역시 공실이다. 왜 움직이지 않아? 왜 나와 함께 걷지 않지? 서도윤이 짧게 눈동자를 굴렸다. 음악실의 꽉 닫힌 문이 시야에 잠깐 담겼다 멀어졌다.

다 알고 있으면서.

…다 알고 있어서?

*

3시, 예상한 바와 같이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도윤은 미술실 바닥에 꿇어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바닥에 늘어놓은 유리가 형광등 빛을 투명하게 머금었다. 자연광과는 확실히 다른 색이다. 어쩔 수 없지. 서도윤은 조금 우울해진 기분으로 유리를 새로 배열했다. 한 달의 방학, 그 기간동안 질리도록 구상했던 스테인드글라스. 개학 후 한 번도 손대지 않았다. 제 우울이 묻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비가 오니까. 10분이 지나면, 온 세상을 흠뻑 적시고도 남을 폭우가 쏟아질 테니까. 서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느릿하게 유리를 골랐다. 화사하고 다채로운 색유리들이 일제히 모양을 달리했다. 과연, 엉망이었다. 서도윤은 잠시 그것을 지켜보다가 꿇어앉은 방향을 틀어 창문을 바라봤다. 유리와 나란히 앉아 창문 밖의 빗줄기를 쳐다보는 것은 색다른 감상을 주었다. 제가 그리 바라 마지않는 빛이 드는 것도 아닌데 폭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둡게 뭉쳐든 구름이 작은 뇌성을 흘렸다. 온통 새까매진 천공이 가볍게 떨렸다. 깜박, 미술실의 형광등 하나가 일순 빛을 잃었다가 되찾았다. 서도윤은 느리게 눈을 내리감았다.

우산을, 챙겼던가.

*

과한 폭우에 정규 수업시간보다 이른 하교가 시작됐다. 어느 학생은 우산을 펼치고, 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종이박스를 덮어쓰고, 부모님의 차를 탔다. 서도윤의 알 바는 아니었다. 여러 문제로 교실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빠져나갔다. 옆반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리를 비우는 소리가 들렸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던 복도에 낯선 침묵이 들어찼다. 서도윤은 창가에 놓인 제 책상에 앉아 창 밖을 응시했다. 동글동글하던 학생들의 머리통이 많이 사라졌다.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에 제대로 보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서도윤은 자신의 좋은 눈을 믿었다. 수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상 0.

저벅, 빗소리만이 가득하던 교실에 때 아닌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서도윤은 눈꺼풀을 느리게 여닫았다. 제가 있는 교실을 제외한 모든 곳에 불이 꺼졌다. 교무실이야 그렇다쳐도, 마치 저만이 동떨어진 것 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렸다. 서도윤의 눈이 창문 너머의 공간에서 창문의 표면으로 향했다. 주룩주룩 유리를 긁고 지나가는 물줄기, 그 사이로 하얗고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창 밖이 어둡기에 더 잘 보였다. 이안, 서도윤은 혀를 굴려 그의 이름을 발음해보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책상에 올려둔 이안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불을 꺼둘 걸 그랬나. 그리 생각한 서도윤이 몸을 일으켰다. 이안의 곁을 스쳐지나가 교실을 가로질러 앞문으로 다가갔다. 달칵, 불이 꺼졌다. 제일 뒷줄의 한 칸짜리 형광등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한다. 교실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차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습하고 고요한 교실에서 그의 움직임이 내는 소음이 큰 파동으로 남았다. 서도윤은 이안의 움직임을 보고는 소리없이 눈웃음을 그렸다. 찰나에 어두워진 데다 제 위치는 불 꺼진, 깊숙한 곳이었다. 미세한 움직임까지 보기는 힘들겠지. 서도윤은 떨리려는 손을 꾹 말아쥐고 걸음을 옮겼다. 향한 곳은 이안의 바로 앞 책상이었다.

서도윤이 의자를 잡아끌었다. 길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의자에 발을 올리고 책상에 올라앉자 이안과 정확히 마주볼 수 있었다. 그새 눈웃음을 지운 서도윤이 이안의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빗소리가 교실에 습기를 더했다. 얕게 내쉬는 숨결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침묵이 깔렸다. 서도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음성을 흘린다. 약 1주일만의 대화였다.

"바이올린 젖을까 봐? 비닐 씌우는 건 어때."

첫 문장의 어조가 지난 나날들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의 공백이 없었다는 양 구는 것에 서로의 머릿속에 동시에 1학기의 순간들이 지나갔다. 잠시 침묵하던 이안이 평상을 가장해 답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서."

"……아, 뭐, 그래.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넌 우산 있는 것 같던데 그냥 가지?"

잘라내려는 기색이 완연하다. 적어도 서도윤은 그렇게 느꼈다. 그것이 서운한가? …아니, 지금은 오히려……. 서도윤이 낮게 목을 울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는 방어적으로 구는 것들이 왜 그런지 알았다. 일부러 날을 세우고, 쳐내고, 이를 드러낸다. 내 말이 네게 가 닿고 있구나. 서도윤은 확신했다. 그는 영리한 사냥꾼이었으니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이안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이안에게까지 사냥꾼이 되고 싶지 않았다. 되기 싫었다. 그가 사냥한 것들은 하나 같이 걸레짝이 되니, 서도윤은 이안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내려놓을 것이다. 사냥감의 발톱 아래 기어들어가 얌전히 목을 내어주는 사냥꾼처럼, 혹은 기쁘게 사냥꾼의 앞을 맴도는 사냥감처럼. 서도윤이 상체를 뒤로 살짝 젖혔다. 가지고 있는 우산은, 저만의 것이기에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우산 없는 사람 버리고 가는 쓰레기는 아니거든."

"거짓말."

쏴아아, 빗소리가 가깝다. 인기척 하나 없는 정적 위로 해일 같은 물소리만이 자욱을 남겼다. 서도윤은 차이안과 눈을 맞추었다. 차이안은 지난 일주일의 무시가 없었던 것 마냥 서도윤을 똑바로 응시했다. 번쩍, 창 밖의 빛이 교실을 창백한 색으로 적셨다.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지는 교실 가운데서 이안이 바이올린 케이스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너 나 좋아해?"

순간, 서도윤은 이름을 불린 것 같다는 기이한 착각을 느꼈다. 그때, 그 미술실에서 느꼈던 그 감각이 서도윤의 기감을 어지럽혔다.

*

서도윤은 이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답을 회피할지언정 거짓을 입에 담아 이안을 현혹하지 않는다. 던져진 질문에 서도윤은 진실로 응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서도윤은 짧게 기뻐했고 길게 어이없어 했다. 이안이 저를 정확히 응시하여 호명한 것은 기뻤다. 하지만 기껏 불러놓고 묻는 게 저런 거라니. 서도윤은 침묵했다. 대답을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기묘한 정적과 서도윤의 얼굴에 얇게 펴 발린 감정이 답을 대신했다. '알면서 뭘 물어 봐?'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이었으나 서도윤의 답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이나 당연한 침묵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고, 아끼고, 애틋해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침묵. 차이안은 서도윤의 침묵을 듣고 그의 얼굴에 시선을 좀 더 두었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서도윤은 제게서 시선을 떼어내는 이안의 움직임을 지그시 응시하다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억수 같이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시부터 내리던 비, 10분 후 폭우로 화한 물줄기. 10분, 이 대화는 폭우가 될까, 부슬비로 그칠까.

서도윤은 이것이 폭우가 되어 이안을 흠뻑 적시길 바랐다. 튼튼한 우산을 찢어발기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끌어안은 이안을 흠뻑 물들여, 그에게 스며들길 바랐다. 서도윤은 구름을 끌어왔다. 폭우가 될―, 될지도 모르는 먹구름이었다.

"넌?"

"뭐?"

"넌 어떤데."

침묵. 몰려든 구름이 비를 쏟아낸다. 쏴아아, 장마처럼.

"나 좋아해? 아니면 싫어?"

"……."

"난 너한테 다 맞춰줄 수 있는데."

속삭이는 목소리의 색채가 짙었다. 자국을 남기는 목소리가 이안의 뇌리에 남았다. 정확히 마주치는 눈동자가 근거리에 있었다. 이안이 조그맣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답하지 않았다. 서도윤 역시 답을 바라지 않았다. 불친절한 이안의 답에도 만족하던 지난 학기처럼, 서도윤은 이안의 침묵으로 만족했다. 서도윤의 눈이 가늘어지며 기이한 웃음을 그렸다. 이질적이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찰나의 변화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서도윤은 기쁜 마음으로 목을 내어주었다. 이안은 본인이 서도윤의 물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난한 장마가 끝나면, 그제야 알게 될 것이다. 장마의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붉은빛이 쾌청한 하늘 아래 훤히 드러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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