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Blue

낭만실조 by 바질
60
1
0


가지런한 구두 소리가 공항의 바쁜 발걸음 사이에 녹아들었다.

차콜그레이 색의 깔끔한 정장 바지 밑단이 움직임에 맞추어 작게 흔들리다, 어느 순간 멈추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옅은 푸른색 셔츠의 주머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기교 없이 정직하게 보내는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는 크림색의 봉투. 남자는 이미 한 번 열렸던 것 같은 편지 봉투를 열어 바르게 반 접힌 편지지를 꺼냈다. 공항의 커다란 유리창에 내려꽂힌 빛이 편지를 잡은 남자의 손 위에 얹혔다.

줄 맞춰 가지런하게 써낸 그것은 깔끔하게 딱 편지지 한 장 가량의 분량을 담고 있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줄과 글자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자, 동시에 들어찬 햇빛이 발목을 훑어 올리며 이내 어느샌가 희미하게 미소를 띤 남자의 입가를 비추었다. 그는 편지를 읽는 언제부터인가 작게 웃고 있었다.

편지지를 원래대로 반 접은 남자는 도로 봉투에 넣는 대신 다리에 손과 함께 잠시 얹어 놓은 채 공항 의자에 등을 대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분명 초봄인데도 매미 우는 소리가 귓가에서 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나팔꽃 색 눈동자는 잔잔했으나 생기로 가득했고, 편지지 또한 소중히 손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만나러 갈게.

MonoBlue

: my youth is yours

교복 셔츠 아래 사복에 햇빛 쨍한 여름날인데도 긴 동복 바지. 묘하게 껄렁한 인상인데도 웃으면 보조개가 세상 순하게 쏙 들어가는 얼굴의 카게히라 미카, 18세.

열여덟 살의 이상하고 삐그덕거리는 여름과 그 사람을 회상하자면, 16화음 벨 소리와 사과 맛의 아이스크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제가 살아생전 본 것 중 가장 예쁘고, 또 세상에 둘도 없는 괴짜였던— 그래, 마치 유리 공예품 같은 사람이었는데도 어째 미카의 기억은 그랬다.

Part 1. 

푸를 청 봄 춘

"넌 졸업하면 뭐 할래?"

초저녁, 도마, 그리고 여주.

밖에선 밤 매미가 연신 울며 여름밤의 시작을 알렸다. 풍경 울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미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형, 내 건 그거 빼 도."

여주는 익을수록 쌉싸름한 맛이 옅어지나, 여전히 쓰다.

두 개의 말이 허공을 맴돌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서로에게 한 마디도 답해 주지 않은 채 같은 공간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미카는 도마 위에 뭔갈 올려놓고 연신 썰기를 반복하는 형의 등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에 맞추어 눈을 감았다 떠 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 하등 쓸데없는 짓이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딱 오늘을 위해 살았다.

다가올 내일 따윈 생각하지 않았고 지나간 과거 따위는 금방 잊어버렸다. 미카는 제가 제 인생을 흘려보내는 방식이 '소모'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평범한 사춘기인 것도 같고, 내가 지금 엇나갔으니 바로잡아 달라고 외치는 센치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나 하여튼 그랬다.

담배를 피우거나, 유흥업소에서 밤을 새우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질 나쁜 친구들과 도로 위의 무법자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미카의 반항은 그리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이지 못했다. 어른들의 말에 그저 침묵과 웃음으로 일관하는— 어찌 보면 가장 어리숙하고 별거 없는 반항을 했다.

"먹어 봐. 적당히 쌉싸름한 게 잘 어울리는데."

"내 쓴 건 싫구마."

어린애 입맛이라며 형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미카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왔다. 형은 분주하게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고 있었다. 미카가 설거지는 제가 맡아 하겠다고 하자, 형은 당연하지—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카를 향해 한쪽 눈썹을 올려 보였다.

식사 시간 내내 식탁 위는 비교적 조용했다. 침묵이 흐르는데도 그저 적당히 편안한 분위기일 수 있는 이유는, 여름만 되면 풀숲 이곳저곳에 숨어 뽐내듯 노래하는 풀벌레들 덕이었다. 식탁 위 노란 등 하나만이 켜진 집 안에 초저녁 여름의 청녹색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비추었다.

그래도, 미카는 지금 당장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텅 비어 버린 형제의 대화를 채우기에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는 너무 작았다.

"돈 필요하다고 했었나."

갑자기 형이 민감한 화제를 던지자, 미카는 창밖을 보며 젓가락을 잇새로 물고 있던 것도 잊고 고개를 빠르게 돌려 형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이어 나가며 마치 오늘 날씨가 어떻네 같은 뻔한 얘기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뭘 사려는 건지는 안 물을게. 다만 그렇게 꽤 되는 액수를 한 번에 줄 순 없어."

"⋯⋯."

"사려는 거, 제법 고가 아냐?"

아는구나. 미카는 순간 찔린 탓에 몸을 움츠렸다.

"네가 나쁜 물이 든 것도 아니고⋯⋯ 매번 돈 빌리는 애도 아닌데 못 줄 이유는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카게히라 미카는 단 한 번도 형이나 남들에게 무언갈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제 걸 주면 줬지 달라고 떼를 쓰진 않는 아이였다. 그러나 형의 눈빛이 지나치게 날카로워 미카는 절로 긴장해 버렸다.

사실 이번에도 요구한 건 아니었다. 형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 지 좀 되었는데, 그걸 결국 들키고야 만 것에 불과했으니까. 형은 당연하다는 듯 당장 그만두라며 화를 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형의 말에 불응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게 아니고서야 돈을 벌 수 없다는 마음이 충돌해 아르바이트를 쉰 지 1달이 다 되어 갔다.

"첫째, 주 5회 학교를 나가."

넌 네겐 고등교육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필요해 라고 말하며, 형이 세 손가락 중 하나를 접었다. 학교생활에 문제도 없는 주제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교를 종종 빠진 탓이었다. 미카는 양심이 아파 끙 소리를 냈다.

"둘째, 아르바이트는 완전히 그만둬. 내가 너한테 일을 맡길 테니까."

일?

그는 유리 공예사였다. 제가 조금이라도 맡아서 할 일이 있긴 할까? 싶은 의문이 드는 조건이었다. 형은 세 번째 손가락을 접는 동시에 이게 마지막이야 하고 낮게 읊조렸다.

"셋째, 옆집에 이사 올 애를 잘 챙겨줘. 학교도 같을 테니까⋯⋯ 이제 끝."

뭐? 미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형은 정말 용건 끝이라는 듯 양손을 맞붙여 짝 소리를 내더니 식사를 계속했다.

"옆집?"

"그래, 곧 너보다 한 살 많은 애가 이사 온대. 너랑 학교도 같이 다닐 거야."

형의 결론은, 나보단 네가 낫겠지 정도. 미카는 그가 제시한 조건들을 곱씹어 보았다.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미카에게 없었다. 제안을 거절하면 수입은 끊겼다. 다시 그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거만 지키믄⋯⋯."

"줄 거야. 약속할게."

네가 뭘 그렇게 사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은 그 쓰다는 여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먹었다.

아기와 어머니의 첫 만남은 숭고하다.

연인들의 첫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다.

카게히라 미카는 그렇게 믿었다.

"형, 옆집에 아무도 없구마."

현관문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미카가 말하자 형은 먼저 간 모양이라고 소리쳐 대답했다. 곁눈질한 시계는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학교가 그리 멀지도 않은데 거의 1시간 가까이 먼저 가다니, 부지런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미카는 도로 현관을 나섰다.

챙겨주라더니.

길은 아나?

그러나, 미카는 얼굴도 모르는 옆집의 한 살 많은 학생에 대해서는 얼마 안 가 완전히 까먹어 버렸다. 돌연 아침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전력으로 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의 그가 가여웠는지, 선생 중 누구도 셔츠 안에 사복을 입은 미카를 나무라지 않았다.

"우산 없었어?"

"비 올 줄 몰라가⋯⋯ 안 챙겼데이."

"홀딱 젖었네~ 이리 와 봐."

여학생들이 갖고 다니던 손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옷을 털어 주자, 미카는 손 탄 고양이라도 된 듯 그녀들의 손길을 받았다. 아는 남학생 몇몇과도 인사한 미카는 얼마 안 가 여학생들의 설탕 같은 수다에 녹아들며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여전히 수업은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떠오르자 교실 안은 금세 평화로운 햇빛과 나무 그림자로 가득했다. 선풍기가 돌아가며 교실 특유의 냄새와 선생님의 나직한 목소리에 맞추어 손가락을 몇 번 두드렸다.

"등비수열의 수렴 조건에 의해, 절댓값 r이 9 이하일 경우에는 제한변역을⋯⋯."

매미가 울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어제 이야기하고 오긴 했으나 역시 망설여졌다. 형에게 돈을 받는다는 것도 아직은 그다지 미덥지도 않아, 차라리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달만 채워도 충분한 액수인데.

"이건 앞에 시그마가 있네. 일단 모든 항을 n으로 나누어 주면 돼."

그렇게 다른 생각에 완전히 잠겨 있는 사이, 수업은 모조리 지나가 버렸다. 애초에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이때다 싶은지 마음껏 수다를 떨고 시끄럽게 놀았다. 미카는 별 어려움 없이 그들에게 녹아들 수 있었다.

"미카, 축구할래?"

"아냐. 미카는 너무 말랐어."

"괘안타, 내는 운동 같은 건 잘 못해가."

"그래도 여자애들은 너 좋아하잖아. 부럽다."

책상 끝에 앉은 또래 남학생들과의 수다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미카를 무척 묘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막상 그가 무리에 껴 있으면 제법 호의적인 편이었다.

"얘 얼굴을 봐, 모성애 자극하게 생겼잖아."

"그건 그냥 잘생긴 거고. 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얼굴에 묻은 형광펜 자국이나 지워."

"어, 졸다가 묻었나?"

남학생들이 낄낄거리자 방금 들어온 듯한 여학생 몇이 관심을 보였다. 원래는 안 그러는데 네가 껴 있어서 그래 하고 누군가 귀에 속삭이자, 미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작게 웃었다.

여학생들에게 미카 같은 부류의 남학생들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인기가 많았다. 가끔 머리에 뇌수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은 발언을 종종 내뱉는 또래 남자애들보다야 차라리 저렇게 귀여운 외모에 과묵한 타입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 그녀들에게 미카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거 먹을래? 코코넛 젤리 얼린 건데."

"사탕도 있어."

온갖 단 것들이 미카의 책상에 와르르 쌓였다. 남학생들이 부러운 시선을 보내자, 미카는 몇 개를 나누어 주겠다며 일어서 초콜릿이나 캐러멜 따위를 건넸다.

"그거 왜 네가 먹어?"

"나도 받은 거거든?"

"네 얼굴이 그 모양이니까 겁먹어서 준 거잖아."

"뭐?"

아차차. 미카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진짜야, 미카? 나 배신하는 거야?"

"바로 따지긴, 이 밴댕이 소갈딱지!"

"야!"

간만에 이런 별거 아닌 대화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또래 아이들은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고, 그다지 숫기 없는 미카도 곧잘 끼워 주었다. 그렇게 또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어라, 뭔가 잊은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렇게 수업 시간을 흘려보내며 점심시간이 되자 반 단위로 움직이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니기 시작했다. 복도마저 왁자지껄해지자 미카는 밖을 기웃거렸고, 한 남학생이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나랑 3학년 층으로 올라가 볼래? 엄청 예쁜 누나 있는데."

"가두 되나?"

"당연하지. 야, 너도 갈래?"

"또 그 누나 보러 가?"

이름이 뭐랬더라. 사츠키인가 사토미였나 아무튼.

비가 갠 이후라 그런지 복도의 공기는 살짝 답답했다. 고동색 마루 위를 마음껏 걸어 다니는 선배들의 발소리를 듣다가, 미카는 2반 앞에서 잠시 멈췄다.

잠시만.

3학년 2반이면⋯⋯.

옆에서 같이 걷던 남학생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미카는 괜히 찔린 사람처럼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별일 아니라는 얄팍한 변명을 했다.

"또 왔어?"

남학생의 누나가 나와 꿀밤을 먹이자 괜스레 오버를 한 그가 이마를 부여잡곤 뭐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미카는 저들보다 뭔가 훨씬 커 보이는 3학년 학생들의 무리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누구 찾아?"

돌연 시야에 들어찬 얼굴에 미카는 또다시 변명을 했다. 얼굴도, 이름도, 성별조차 모르는데 딱 반만 안다. 어제 그에 대해 이야기하며 형이 살짝 흘린 정보였다. 3학년 2반이라는 것 딱 하나. 아까 괜히 그를 잊었던 게 떠올라 양심이 아팠다. 그 사람을 챙겨 주는 조건으로 형에게 돈을 받게 될 텐데, 학교에서도 한 번 찾으러 갈 생각을 안 했던 것이었다. 학년이 다르다는 핑계는 너무나 뻔했다. 하려면 할 수 있었으니까.

"⋯⋯ 끝나고 기다려야겠구마."

"엉?"

하굣길엔 반드시— 라고, 카게히라 미카는 생각했다.

⋯⋯ 너무 무작정이었나.

기다린다 한들 그 사람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하다못해 성별조차 모르는데. 하굣길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져나간 시각에, 3학년 선배들도 하교를 해 버려 학교는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으면 차라리 일찍 오기나 하지, 교무실로 불려 가는 바람에 그마저도 늦어 버리고 말았다.

3학년 1반을 지나며 미카는 연신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을 회로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형의 귀는 열려 있어, 미카가 언제쯤 하교하는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소문할 수 있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도 그런 식으로 들켰고⋯⋯ 그건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야간 서빙 알바를 했던 때 들키지 않았던 것에 감사해야 했다.

2반 교실 문 앞, 미카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오후의 파란 하늘이 복도 끝 창문으로 보였다. 여름인데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원하다는 착각이 든다.

발걸음을 내딛자 교실 안쪽이 서서히 보였다.

예상대로 칠판은 깨끗했고, 책상 위와 의자는 모두 비워진 듯했다. 하교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한숨을 내쉰 미카는 문이라도 닫고 나가자는 생각에 아예 문턱에 발을 디뎠다.

"!"

미카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잠시, 그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뒤통수가 얼얼해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죄송⋯⋯."

점차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창가에서 비추어지는 빛 탓에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불었다.

이 사람이다.

틀림없어.

쿵, 쿵 하고 느린 박자로 뛰던 심장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미친 건가 싶을 만큼 빨라져, 얼굴마저 붉게 달아올랐을 것 같았다. 꼴사납게 복도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그랬다.

저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살짝 지나치더라도.

무척 밑에서 올려다보는데도 굴욕 없이 곱상한 얼굴이었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중성적이고 묘한 느낌을 주는 외모의 남학생은 그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츠키 슈라는 명찰을 보곤 미카의 추측이 확실해졌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에,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외모 하며⋯⋯ 조금은 겉도는 듯한 분위기.

"저⋯⋯."

"조심하도록."

뭐?

짧은 말을 남긴 그는 몸을 돌려 신발장 쪽으로 가 버렸다. 미카는 사과도 뭣도 아닌 말에 황당해하고 있던 것도 잠시, 곧장 그의 뒤를 쫓아갔다.

매미가 매앰 하고 연신 시끄럽게 울어댔다. 햇빛은 다행히 그리 뜨겁지 않았으나 걷다 보니 몸이 좀 달아올라, 미카는 티셔츠 목덜미에 손가락을 걸고 몇 번 펄럭였다.

말을 붙여야 되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의 뒤를 쫓아가는 꼴이었다. 이츠키 슈라는 옆집 남학생은 정말 일정한 폭으로 걸으며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집이 점차 가까워졌다. 무슨 핑계로 말을 걸지? 진심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해서, 미카는 우물쭈물하며 그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팔이 진짜 하얗네—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새하얀 교복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과 팔꿈치, 그 아래로 이어지는 팔목 선이 무척 부드러웠다. 그때, 그가 우뚝 멈추어 섰다.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에?"

이츠키 슈가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무척 차가웠으나 미카는 또다시 그가 참 곱상하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는 참말로 불출한갑다, 라는 혼잣말을 목구멍 뒤로 넘기며.

"그⋯⋯."

"집 주소까지 알아낼 참이었다면 이제 그만 가도 되잖아."

"그, 그런 거 아이다. 내 그짝 옆집 산데이."

"옆집?"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미카는 뭐 어떻게 증명할 길이 없어 허둥거리다 이내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냈다. 손가락 새에서 열쇠고리가 달랑거렸다.

열쇠에 주소가 적힌 것도 아니고, 이걸 꺼내서 어쩌자는 건지. 미카는 뒤늦게 얼굴을 붉혔으나 여전히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던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했군⋯⋯ 사과하지."

"아이다, 내도 용건은 있었으니께."

용건? 하며 되묻는 슈의 얼굴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적대적인 눈빛이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꺼내서 만져 보고 싶을 만큼 예쁜 색이었다. 제비꽃 같다가도, 물망초 같기도 한 오묘한 색깔.

"내⋯⋯ 그짝이 이 마을 적응할 때까지 도와주기로 해가, 오늘부터."

"그런 부탁은 한 적 없다만."

"사정이 있데이."

뭐?

슈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미카는 제가 생각해도 막무가내였는지 더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그의 집은 미카가 사는 집과는 약간 달랐다. 흰색 이층집인데, 마당에 꽃이 잔뜩이었다. 물론 슈가 가꾼 것은 아닐 테지만⋯⋯ 아무튼.

"거절하지."

다시 눈을 돌리자 보인 슈의 대답은 가히 청천벽력이었다. 그는 단호해 보였다.

"난 어린애가 아니야, 적응 따위는⋯⋯."

순간, 미카가 슈의 팔을 덥석 잡았다.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그는 미카를 뿌리치지 않았다.

왜 저렇게 간절한 눈을 하지? 싶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예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돌연 마을 적응을 도와주겠다며 나서다니 미친 놈이라고 생각해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매미가 다시 한번 매앰, 하고 크게 울었다.

새하얀 팔을 붙든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 따라오지 마."

아침인데도 약간 기온이 높은 날이었다.

"따라가는 거 아이다, 내도 이게 학교 가는 길이구마."

말장난 같은 대화가 이어지자, 앞에서 가던 그가 이내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카는 날 선 눈빛을 보자 마치 저는 잘못한 것 하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뇌를 흘렸으면 병원에 가 보라는 당찬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제 그렇게 말한 그는 팔을 뿌리치곤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선배, 그짝으루 가면 뒷산이구마."

골목에 들어섰던 그가 이내 탁 멈추어 섰다. 그러고 보니 여긴 아니었던 것도 같은데. 다만 뒤돌면 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카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불편해, 결국 그는 뒤돌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어정쩡하게 섰다. 지각하겠다며 미카가 한 마디를 더 얹자, 그제야 몸을 돌린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미카가 웃고 있었다. 입에는 뭔갈 물고 있다— 아무래도 사탕 같은 것을. 슈는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를 홱 지나쳤다.

"내 길두 알려 줬는데, 같이 가믄 안 되나?"

"⋯⋯."

계속 이런 술래잡기를 하는 것도 지쳤는지, 그는 미카가 저와 나란히 걷게 내버려 두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굳이 굳이 3학년 층까지 저를 데려다준 미카를 도끼눈을 하고 바라보았으나 그는 꿈쩍도 않은 채 심지어 제 신발장 문을 닫아 주기까지 했다. 전학 온 마당에 그새 후배 하나를 휘어잡았다는 소문 따윈 딱 질색인데. 그러나 그런 제 속도 모르는지, 검은 고양이처럼 생긴 옆집 한 살 어린 남자애는 웃기만 했다.

"내 점심 시간에두 오께. 밥 같이 먹을 사람은 있나?"

쾅. 문을 생각보다 너무 세게 닫아 버린 탓에 반에 있던 학생 몇몇이 뒤돌아보았다. 슈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카~!"

비음 섞인 목소리에 미카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자, 웬 화려한 네일을 한 누나가 다가와 미카의 두 뺨을 잡고는 귀엽다는 듯 흔들었다.

"누, 누나."

"얼마 만이야? 왜 요즘 아르바이트 안 해? 거긴 그만뒀어?"

질문 폭격이다. 미카는 그녀의 향수 냄새에 숨이 막힌 탓에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만둔 지 한참 됐구마. 이츠키 선배는 어데 있나?"

"이츠키? 아."

구릿빛 피부의 누나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애? 걘 왜?"

혹시 괴롭혀? 라는 질문에 미카가 손사래를 쳤다.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을 하자 누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남학생들을 좀 무서워해 여학생들과 주로 어울리던 애가 돌연 3학년 선배를 찾는다니.

"괴롭히는 거면 말해. 걔도 남자애치곤 삐쩍 말라서 누굴 괴롭히겠나 싶긴 하지만."

"어데 있는지는 아나?"

"아까 도서관 가는 것 같던데? 사실 잘 몰라."

점심시간이라 바로 왔건만, 걸음이 얼마나 빠른 거야. 미카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매미 소리가 복도에까지 울렸다. 여름이라고 여기저기서 귀가 찢어질 듯 소리치는 것만 같아, 미카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게 솟은 하얀 구름과 싱그러운 초록색의 나무가 보였다. 태양은 보기만 해도 목울대에 땀이 흐르는 듯했다. 눈을 돌리고 다시 복도를 걸었다.

도서관은 미카와 딱히 연이 없었다. 글과 친하지도 않고, 더군다나 멀기도 하고. 1학년 때 딱 한 번 와 본 걸 제외하면 솔직히 기억에도 없었다. 자유롭게 대출할 수 있는 책들과 도서 반납함이 문 앞에 우뚝 세워져 있는 걸 지나친 미카는 도서관 문을 열었다.

책 냄새.

도서관 특유의 책 냄새가 가득했다. 사서 선생님은 식사를 하러 가신 건지 계시지 않았다. 학교 건물은 대체로 어두워 보이는 데에 비해 이곳은 전부 다 새하얬다. 창가에서 날리는 불투명한 커튼도, 벽과 천장도. 책은 종류별로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선배 하고 부르려다, 그냥 제가 나서서 찾아보기로 했다. 부른다 한들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미카는 한 손으로 꽂혀 있는 책들의 책등을 쓸며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낡은 것들은 너덜너덜했고, 새 것들은 무척 매끈했다. 책장과 책 사이의 간격으로 옆쪽도 쳐다보며 걸었다.

도서관의 분위기는 학교의 다른 곳들과는 정반대로 무척 조용했다. 마치 다른 세계 같기도 해 미카는 괜히 제 숨을 죽이며 책등을 훑었다. 수많은 책 제목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책 특유의 냄새에 코가 슬슬 익숙해질 때쯤이었다.

저기 있다.

이츠키 슈는 고전 카테고리의 책장 앞에, 새하얀 손으로 책 하나를 받친 채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새하얀 교복이 새삼 찰 잘 어울렸다. 제가 입을 땐 한없이 껄렁해 보였던 게 그가 단추까지 다 채워 입으니 무척 단정해 보였다. 미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가에서 들어찬 햇빛이 그의 책을 훑고 뺨에 드리워지자, 미카의 방향에서 그의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였다. 눈동자가 특이한 색이라 그런지 빛이 비추어지니 무척 투명하게 빛났다. 누군가 만든 것처럼 생긴 사람이다. 순간 미카는 제 가슴께가 욱신거려, 살짝 놀라며 내려다보았다. 자꾸만 이상하고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선배."

책에서 고개를 든 그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전 소설을 읽는 중이었나 보다. 미카는 괜히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찾았구마."

독서라⋯⋯ 어울리는 것도 같고. 아니, 어울려. 미카는 그에게 다시 바짝 다가갔다. 그에게서는 아주 옅고 좋은 향이 났다.

"조용히."

도서관이잖아. 그의 말이 마치 곁에 있어도 좋다는 소리처럼 들려, 미카는 눈꼬리를 한껏 휘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마 안 가 다시 책을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미카는 책장에 머리를 기댄 채 한동안 그와 책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다리 아프겠구마, 가서 앉재이."

"딱히 상관없다만."

사실 내가⋯⋯. 라고 중얼거리며 미카가 헤헤 웃자,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기꺼이 미카가 안내하는 책상 쪽으로 따라가 주었다. 미카는 급히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을 뽑아 들은 채 책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창문 너머로 축구 경기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도서관은 2층 맨 끝에 있기에 그리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익숙한 목소리도 섞여 들리는 듯했다. 더군다나 매미는 연신 귀를 찢을 듯 울어대었다. 다행히 살랑살랑 머리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시원했다. 미카는 창밖을 무료하게 바라보다 이내 앞에 앉은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목 진짜 하얗다.

눈꼬리는 뾰족하고 표정은 차가웠으나, 살짝 접힌 속쌍꺼풀이 그런 인상을 완화해 주어 무척 묘한 느낌이 났다. 뼈대는 가냘픈데 마냥 또 체구가 작진 않았다. 오히려 미카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정도. 손가락은 길고 곧으며, 자세도 그랬다. 미카는 순간 저 사람이 웃으면 어떤 얼굴이려나 했다.

햇빛이 그의 책을 또다시 비추었다. 책장 하나 아래에 들어가 있는 그의 새하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내리깔은 눈 탓에 눈동자가 속눈썹에 살짝 가려졌다. 속쌍꺼풀도 조금 짙어진 것 같아, 미카는 책을 읽는 척도 그만둔 채 아예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미카는 그를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미인이기도 미인이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추상적이었다. 흔히들 미인보다는 꽃이나, 손가락으로 날아드는 새를 보며 예쁘다고 할 때의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미카는 제 어휘력의 한계를 끝없이 느꼈다.

그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미카는 그대로 굳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햇빛이 슈의 뺨을 비추고 있었다. 한쪽 눈은 햇빛에 드리워져 반대쪽 눈과는 새삼 다르게 투명한 빛을 띠었다. 눈꺼풀과 가까이 인접한 그의 눈을 보며 미카는 돌연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어라.

어라?

"나 말고 책을 보라는 거다."

굳은 상태로, 눈동자만 움직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거만한 표정이고, 새침을 떠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런 말을 했다. 미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급히 제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글이 읽히질 않았다.

"거꾸로 들었잖아."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카가 화들짝 놀란 소리를 내며 책을 눈 바로 아래까지만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열감이 돌았다. 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분명 웃음소리를 들었는데도 그랬다.

"선배, 웃은 기가?"

미카가 물었다.

"웃었제?"

"아니, 웃은 적 없다만."

"내 다 들었구마, 한 번만 더 웃어 도."

잠시 유해졌던 것 같은 표정이 다시 저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미카가 이상한 면에서 조르자, 그는 웃은 적 없으니 떼쓰지 말라고 딱 끊어 말했다. 결국 미카는 책상에 팔을 괴고 살짝 엎어졌다. 그에게 말을 붙이고 싶었으나 그가 어떤 화제에 관심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아.

"선배, 대출 카드 썼나?"

그 말에 드디어 슈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읽던 책을 작게 덮으며 미카를 바라보았다. 미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책상에 뺨을 댄 채 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대출 카드?"

"그거 가져가서 읽을라믄 써야 하는구마. 책 맨 뒤에 보래이."

미카의 말을 들은 그가 책의 맨 뒤를 펼치자, 책날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뭔가 끼어 있었다. 올곧은 손이 그걸 조심스럽게 빼내어 보았다. 그저 손바닥 하나 정도 되는 종이였는데, 이름을 쓰는 칸들이 여럿 있었다. 미카가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두 이마가 닿을 만큼 가까이.

"여기에 이름 쓰믄 되는 기라. 사실 안 쓰는 애들이 많긴 하지마는⋯⋯."

그는 군말 않고 책상 맨 끝에 달려 있던 펜을 집어 들었다. 미카는 그의 손이 움직이는 순간을 모두 지켜보았다. 대출 카드에는 창가의 햇빛이 날아들어 왔다.

볼펜의 끝이 맨 윗칸에 닿았다. 고전 소설은 딱히 아무도 읽지 않은 건지, 읽어 놓고 이름을 쓰지 않은 건지 텅 비어 있었다. 미카는 그가 본인의 이름을 쓰는 걸 보자 또 그 이상한 감각이 들어, 남모르게 주먹을 살짝 쥐었다. 이츠키 슈라는 이름을 쓴 글씨체는 무척 날렵하고 생각보다 큼직하기까지 했다. 그는 볼펜을 딱 소리를 내며 닫았다.

"앗, 내도."

그에게서 볼펜을 건네받은 미카는 그의 이름 바로 밑에 제 이름을 꾹꾹 눌러 썼다. 괜히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히라가나인 이름도 더 섬세하게 쓰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읽을 셈이냐고 묻자 미카는 또 헤프게 웃었다.

"같이 있으믄 좋으니께."

"이왕 썼으니 읽도록 해."

"에, 내 이런 어려운 한자는 무리데이."

슈가 살짝 헛웃음을 뱉자 미카는 턱을 괴고 순진하게 웃었다. 한동안 손끝에 대출 카드를 들고 위아래로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바라보던 그는 책 뒤에 그것을 도로 꽂았다.

여전히 매미는 시끄럽게 울고, 밖에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느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러나 미카는 처음으로 그 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Part 2. 

작은, 세상의 비밀

카게히라 미카의 요즈음은 약간 이상했다.

평소 학교에 대해 별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요즘 들어 조금씩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옆집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며 그가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요새는 평범한 아침 인사를 건네면 받아 주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기도 했다.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등하교, 점심시간을 함께 보낸다. 제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 반은 '쓸데없는 소리 마라'며 넘겨 버리지만 간혹 대답해 주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미카의 말수가 더 많았다.

이츠키 슈는 생각보다 잔소리꾼이었다. 셔츠 안에 검은 반팔티를 입고 다니는 그가 미덥지 않았는지 한마디를 했다. 그는 반대로 명찰도 성실히 달고, 단추도 끝까지 잠근 아주 모범생 같은 모습이었다. 미카는 슈의 옆에 빌붙어 간신히 교문을 통과하곤 했다.

점심은 안 먹는 편인지 매번 교실에 남아 있었기에 3학년 2반에 가기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젠 미카가 하도 찾아오니 그는 더 이상 미카를 나무라지 않았다. 3학년 반에 들어오다니 배짱도 좋다며 혀를 차는 게 다였다.

딱히 생각 없다며 강경히 거부한 슈를 억지로 끌고 나와 산책을 할 때면, 그렇게 거절할 땐 언제고 그는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저 담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지, 또는 어떤 선생님이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등등. 미카는 저도 잘 모르는 질문이 많았으나 대체로는 열심히 대답해 주곤 했다.

"이츠키 선배는 그짝에서 왔구마."

그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들도 몇 알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수도에서 살다가 이곳에 오게 된 것, 꽤나 사는 집의 자제라는 것, 또한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데에 제법 서투르다는 것. 미카 또한 휴대폰이 있었으나 슈가 가진 것보단 좋지 못했다. 미카는 그의 전화번호부가 텅 빈 것을 보며 기회다 싶어 제 것을 가장 먼저 저장했다.

"전화 걸어 봐두 되나?"

"상관없어."

점심시간, 아이들의 수다로 가득 찬 운동장. 햇빛을 피하려 스탠드에 함께 나란히 앉아 서로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전화번호를 나누었다. 슈는 어차피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라고 했으나, 미카는 개의치 않았다.

16화음 벨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슈는 음악을 듣자마자 경박하다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으나, 미카는 그의 휴대폰 화면에 뜬 제 이름을 보고 환하게 얼굴을 폈다. 다이얼을 꾹꾹 눌러 보니 또 제 이름이 떴다. 앞자리 세 개를 치기만 해도 딱 제 것만 떴다. 마음에 들었다.

"조부님은 프랑스에 계셔."

이츠키 슈는 가끔 자기 이야기를 했다. 무척 뜬금없이, 먼 하늘이나 운동장 끝을 바라보다가. 그럴 때면 미카는 한참 산만하게 굴다가도 가만히 앉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 눈엔 한참 선배처럼 보이는 그가 조부나 가족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아버지도 때론 편지하시거나 전화를 거시지. 다만 가끔은 아주⋯⋯ 짜증 나는 이야기도 섞여 있어서, 답장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거다."

"부럽구마."

미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자, 슈는 얼굴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웠다.

"내는 얼라일 때부터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컸데이."

열세 살 때— 어머니가 불운의 사고로 돌아가셨던 날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휠체어에 타고 있던 아버지는 미카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미카는 아버지의 다른 가정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곳에서 형을 또 처음 만났다.

그 형 또한 어머니가 안 계셨다. 형의 입장에서는 미카가 사생아였고, 미카의 입장에서는 형이 사생아였다. 결국 가정은 무척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미카의 아버지 또한 그리 살가운 성격은 되지 못해, 남자 셋이서 무뚝뚝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형은 무척이나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미카는 그 가정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속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미카가 차마 끼고 들어갈 수 없는 세월이 아버지와 형 사이에는 존재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으나 형과 나란히 서 있을 때면 얼굴에 닮은 구석이 보였다. 그러나 미카가 까치발을 하고 서고 몇 시간을 거울 앞에 서 있어도 제 얼굴에서는 아버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 아버지.

딱 한 번 불러 본 적이 있었는데.

갓 열일곱이 되었을 무렵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딱 한 번.

열세 살의 미카는 키가 무척 작았다. 아버지와 형은 그때도 무척 장신인 편에 속했기에 미카는 더더욱 작고 왜소해 보였다. 하기야 어머니와 함께 살 때도 그리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 미카는 간혹 학교나 길에서 넘어져도 얼른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도와줄 사람이 없니?'라며 접근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기에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러나 하루는 아버지를 마주치자, 피가 나는 무릎이 괜히 더 쓰라린 것 같아 눈물을 터뜨렸다.

언제나 석상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는 그날 처음 미카를 손으로 안아 들었다. 팔 사이에 손을 끼워 휠체어로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혀 주었다. 눈물이 섞여 보였던 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미카를 안은 채 오래된 레코드판에 다가간 그는, 한 노래를 틀어 주었다.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느린 템포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잔뜩 젖어 작은 귀로 흘러들어오던 나직한 노랫소리. 아버지의 너른 어깨에 뺨을 대고 소리를 죽이고 있자니 따뜻한 손이 조그마한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는 것이 느껴졌다. 노래와는 맞지 않는— 아버지, 그 자신만의 박자로.

미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유일한 기억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슈의 눈빛이 묘해졌다. 다시 초록빛 가득하던 그날의 집에서 현실로 돌아온 미카는, 때맞춰 우는 매미 소리와 보라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바람이 살짝 불어와 교복 옷깃과 그의 짧은 앞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런 것치곤⋯⋯."

새하얀 손이 허공에 들렸다.

"외롭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구나."

바람에 날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묘하게 상냥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어, 미카는 눈을 살짝 감았다. 귀에서 그 노랫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조금 더.

열리는 눈꺼풀 새로 보이는 그는 딱히 웃고 있거나, 저를 동정하지도 않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저 미카를 완전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인 얼굴.

미카는 처음으로 그가 저보다 한 살 많은 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동요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온전히 딱 하나만을 봐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어른이라는 말은 싫은데,

이 사람에게 갖다 붙이면 나쁘지 않을 것도 같다.

"내 자전거 좀 빌려 줄 수 있나?"

"자전거? 타고 가게?"

"응. 누구 좀 태워 주고 싶어가⋯⋯."

너, 여자 친구 생겼어?!

하고 자전거 주인인 남학생이 소리치자 온 반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미카는 돌연 집중된 관심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부인했다.

"응아아, 그런 거 아이다!"

"아니긴 뭘 아냐. 사진 있어? 한 번만 보여 줘. 예뻐? 가슴은 커?"

"얘 뭐래니?"

그새 다가온 여학생이 들고 있던 공책으로 저급한 질문을 한 남학생의 얼굴을 때렸다. 남학생이 코를 부여잡고 아야야 소리를 내었다. 꼭 사귀는 애들끼리 저랬다.

"좋아, 빌려줄게. 대신 나중에 꼭 소개해 줘야 해."

자전거 열쇠를 건네받은 미카가 작게 웃었다. 사귀는 사람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심지어는 여자도 아닌데. 이상하고 장난스러운 비밀처럼 느껴지는 게 좋았던 탓에 결국 다시 한번을 더 웃었다.

맞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가야지. 매번 하교 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조금 대화하느라 슈가 움직인 뒤에야 쫓아가곤 했던 미카는 아예 일찍 가기로 마음먹고는 종이 치자마자 주머니에서 짤랑거리는 열쇠를 들고 잽싸게 반을 나섰다. 3학년들이 내려오는 걸 보고는 아차 싶어 또 그새 걸음을 빨리했다.

이젠 정들 것만 같은 3학년 2반의 문을 보며 미카는 걸음을 다시 빨리했다. 예상대로 나머지 책상들은 다 비워진 데에 반해 누군가가 창가 끝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뭔가 다른데? 미카는 햇빛 탓에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안경을 썼네.

동그란 테의 안경이 그의 코끝에 살짝 걸쳐 있었다. 저런 걸 쓰니 무척 우등생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런대로 잘 어울리기도 하고. 뭘 하나 했더니 교과서 끝에 뭔갈 적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성실한 편이구나. 미카는 어깨를 으쓱한 뒤 교실 안에 발을 디디며 그를 반갑게 불렀다.

"선배."

그러나, 슈의 반응이 이상했다.

미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움찔하더니, 눈동자를 이쪽으로 굴렸다가 미카를 보자마자 아예 고개를 홱 돌려 버린 것이었다. 미카가 몇 번을 다시 불러도 대답해 주지 않고, 고개를 돌리곤 급히 얼굴을 만지며 허둥거렸다.

"선배?"

"그만."

미카는 그의 말에 그 자리에 딱 멈추어 섰다. 급히 벗어진 안경이 그의 손에서 책상으로 옮겨갔다.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가까이 가도 되겠냐고 묻자, 여전히 거부한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것 같았다. 그가 화났을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미카는 몇 번 더 쓸데없는 말을 붙이다 실패하고는 결국 거리를 좀 둔 채로 쭈그려 앉았다.

"⋯⋯."

"내가 뭐 잘못한 기가?"

미카가 놀라고, 서운하기도 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하자 결국 그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말했다.

"⋯⋯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았어."

어라.

"그걸 쓴 나는 전혀⋯⋯."

귀가⋯⋯

"아름답지 않잖아."

빨갛다.

미카는 그 말을 듣곤 한동안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아름답다니, 그게 무슨⋯⋯ 아.

"선배, 귀 억수로 빨개졌구마."

답지 않게 이런 면도 있구나 싶어 다가가 귀를 향해 손을 뻗자, 정말로 두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보였다. 그러면 내가 하교하기 전까지는 안경을 쓰고 있다가— 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매번 벗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자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간지러운 기분.

미카가 웃고 있다는 걸 확인한 그는 아예 손을 들어 미카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슈가 신경질을 부리는데도, 어쩐지 이전처럼 움츠러들거나 하지 않았다.

"선배, 집까지 태워 주께."

그러나 장본인인 이츠키 슈는 그다지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둘이 타긴 무리인데."

"괘안타, 내 힘 세구마."

전혀 신뢰하지 못하겠다며 슈는 너 혼자 타고 가라는 식으로 거절하곤 앞서가 버렸다. 급히 잠금장치를 푼 미카가 뒤따르자, 그는 몇 번 차갑게 곁눈질만 하는 식으로 일관해 버렸다. 계획이 완전히 엉망이 된 터라 미카는 결국 한숨을 작게 뱉으며 페달을 밟았다.

빛 바랜 포스터들이 잔뜩 붙은 거리를 지나가며, 미카는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슈와 함께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몇 하다가 주위도 몇 번씩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한 포스터 앞에서 멈추어 섰다.

남자 아르바이트생 모집, 시급 조정 가능.

그러고 보니⋯⋯ 라며 미카는 잠시 멍을 때렸다. 요새 뭔가 조금 얼이 빠져 있어서 본분을 잊고 지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형에게는 언제쯤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형에 대한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돈이 궁하기라도 한 게냐."

슈의 물음에 미카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워낙에 유심히 보고 있던 터라 결국은 거짓말하기를 그만두었다.

"으응, 내 사야 하는 게 있어가 그런데이."

슈는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구태여 묻지 않았다. 미카는 그런 그를 볼 때면 신기했다. 궁금한 것도 잘 참고, 묻지도 않고. 저라면 틀림없이 좀이 쑤셔 궁금하다는 티를 한껏 냈을 것이 분명한데도.

"궁금하믄 물어두 된다. 그리 곤란한 건 아니구마."

"아니, 굳이 무리해서 답하지 않아도 돼."

그런 면이 좋았다.

어리숙한 어른 같아서.

미카가 사고자 하는 것은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로, 세상에 딱 하나 있는 거였다. 미카의 아버지가 살아생전 개조해서 만든 것이었으니까. 카세트테이프 또한 그랬다. 개조된 플레이어로만 재생해야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죽기 전 미카에게 남긴 유일한 것이었으나 미카는 1년이 넘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수소문해서 알아낸 결과 그 플레이어는 골동품 박물관 같은 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다행히 그다지 큰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 개인적으로 구매가 가능했지만, 여전히 학생에게는 제법 큰돈이었다. 그러나 미카는 그 플레이어를 사기 위해 시급이 적은데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을 들어야만 했다.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미카, 하고 불러 주는 걸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비밀이데이, 형이 알면 큰일나가."

슈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켜 줄 기제?"

미카가 순진한 척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대는 제스처를 하며 묻자 그는 지켜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보라색 눈은 여전히 미카를 훑는 듯했다.

집에 거의 다 다다르자 미카는 아쉬운 기분이 들어 그의 옆모습을 연신 바라보았다. 하루가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여름은 낮이 긴데, 그와는 상관없이 슈와의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끝났다. 새하얀 벽돌집과 고동색 집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언제나 아쉬움이 일었다.

그리고, 언제나 미카에게 '집'이라는 건 꺼려지기만 했다. 결국 또 현관을 맴돌다 들어가고야 말겠지 싶은.

"카게히라."

그가 불렀다.

미카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집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 그가 대문 철창을 새하얀 손으로 잡고 이쪽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슈가 제 이름을 불러 줬다는 것에 들떠, 미카는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세워 둔 채 그의 부름에 응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그는 또 무척 새침하고 오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눈빛이 조금 달랐다. 대문 위 아치형 철창에 늘어진 나팔꽃이 슈와 새삼 잘 어울렸다. 미카는 잠시 정원에 서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 집으로 와."

미카는 그가 잡은 대문 철창을 함께 잡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철로 된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나팔꽃 사이에서 한참 눈을 맞추었다.

미카는 까치발을 하고 걸었다. 슈의 말로는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성격이 만만찮다고 했다. 들키면 귀찮아질 터라, 미카는 정말 혼신을 다해 발을 세워 2층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거의 숨을 참고 걷는데, 미카는 순간 그와 함께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즐겁게 느껴져 웃을 뻔했다. 슈는 고개를 돌리고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듯 미카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뭔가 머릿속에 찌릿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방문을 닫자, 미카는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가슴을 쓸어내리자, 그도 가정부가 올라오고 있는지 문에 귀를 대어 확인하고는 안도하듯 작게 숨을 쉬었다.

슈의 방은 전통 양식보다는 서양식에 가까웠다. 높은 침대 하며, 특이한 조명 모양까지. 그는 벽장이 아닌 옷장을 썼다. 미카는 한동안 입을 살짝 벌린 채 그의 방을 구경했다. 슈는 교복 단추 몇 개를 풀어내고는 미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방에 고등학생 둘인데.

위험하지 않나?

조명을 구경하는 듯 보이겠지만, 미카는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불출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뭐가 위험해? 매우 건전하지. 곁눈질로 바라본 슈는 창밖을 살짝 둘러보다가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

"선배, 뭐 보여 주려고 한 기가?"

"아."

잊고 있었다는 듯 슈가 소리를 내자 미카는 작게 웃었다. 조심스레 침대 위에 가서 앉자 엉덩이가 푹 가라앉는 느낌에 살짝 놀라 몇 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사이, 슈가 옷장에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내어 왔다. 생각보다 무척 큰 상자였다.

"이건⋯⋯."

재봉틀.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재봉틀은 척 봐도 매우 값져 보였다. 세월의 흔적은 남루하기는커녕 고풍스럽기만 해, 미카는 재봉틀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감탄하길 반복했다. 슈는 마음에 든다는 듯 손으로 재봉틀의 둥근 윗면을 살짝 쓸었다.

"조부께서 남겨 주신 물건이라는 거다. 제법 오래된 재봉틀이지만 작동은 제대로 돼."

"멋있구마, 이거로 뭐 만들어 본 적 있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태도로, 슈는 재봉틀 아래 깔린 사진들을 꺼냈다. 색이 조금 뿌옇고 흐리지만 선명히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 같은 옷들이 잔뜩 찍혀 있었다. 사진은 뒤로 넘기면 넘길수록 점점 더 수준이 발전하는 옷들을 담고 있어, 미카는 또다시 감탄을 연발했다. 만든 거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하며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옷은 보통 여자들이 만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카는 슈가 이런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만 같았다.

슈가 애정을 담아 다시금 재봉틀을 손으로 쓸자, 미카는 그런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내 비밀이야.

미카는 아까 제가 카세트테이프 이야기를 하며 비밀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재봉틀에서 손을 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까 미카가 하던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어 비밀이라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그저 순진해 보이고 싶어서 했던 건데, 마음에 담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랑스럽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말을 뗀 이후로도, 걸음을 뗀 이후로도 한 번도 누군가를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재봉틀과 사진을 보며 감상에 잠겨 있던 듯하던 그는 얼마 안 가 다시 상자에 그것들을 도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미카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나직하게 불렀다.

"선배."

슈가 고개를 돌려 미카를 바라보았다. 미카는 바닥에 손을 짚고 작게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살짝 놀라는 것 같았다. 밖에서 저녁 매미가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방 안에 가득 찼다. 바깥은 주홍빛 노을로 가득했고, 바람 부는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얼굴이 무척 가까웠다. 슈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면서도 저지하지 않았다. 슈에게 가까이 가니 나는 그 향긋한 냄새가 무엇인지 미카는 여전히 알지 못했으나, 무척이나 좋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다가가고 싶을 만큼. 긴장 속에서 두 입술 새의 거리가 채 한 뼘도 안 되었다. 숨이 섞이기 직전이었다.

쿵쿵.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미카는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물렸고, 슈는 고개를 홱 돌려 문가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안에 계세요?"

가정부인 모양이었다. 슈는 여전히 열감이 뚜렷한 얼굴로 미카를 옷장 안에 들어가라며 몰아세웠고, 미카는 급히 옷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옷가지가 몇 되지 않다는 걸 신기해할 새도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오시면 말씀을 하셔야죠. 제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옷장 새로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으나 얼마 안 가 암흑 속 미카의 심장 소리에 전부 묻혀 버렸다. 쿵, 쿵,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피가 가득 몰린 듯 뜨거워졌다. 가깝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붉고, 예쁘고, 얄쌍한 입술이 바로 제 앞에 있었는데.

제 교복 셔츠에서 여전히 그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미카는 괜히 셔츠 안쪽에 손을 넣어 코에 가져다 대고는 향을 맡아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통제할 수 없는 사춘기 소년이 따로 없었다.

이후 옷장 문을 연 슈와 마주한 미카가 서로 눈도 채 마주치지 못하고 인사를 나눈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 진짜 연애하는 거 맞지?"

남학생들이 기합을 맞추는 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개수대에 껄렁한 자세로 앉은 미카가 그에 반해 연신 헤실거리자 보다 못한 친구가 건넨 말이었다.

"응? 아이다, 그런 거."

"아니긴. 요새 학교도 너무 꼬박꼬박 나오고 매번 그렇게 바보처럼 웃고 있는데 말야."

"글나?"

또! 라며 친구가 삿대질을 했지만 미카는 정말 아니라고 말하며 느리게 개수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매미가 우는 소리에 맞추어 공 하나가 파란 하늘을 가로질렀다. 체육 시간은 활기로 가득했다.

"넌 졸업하면 뭐 할래, 미카? 난 요즘 엄마가 맨날 그것만 물어봐서 죽겠다."

끼긱 소리를 내며 수도꼭지를 잠근 친구가 어깨 너머로 묻자 미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친 기분에, 누군가 들뜬 심장에 얼음물이라도 들이부은 것 같았다. 갑자기 형의 얼굴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난 구두장이는 싫거든⋯⋯ 가업은 딱 질색인데. 넌?"

"내는⋯⋯."

형이 예전에 소리 지르던 게 머릿속을 울렸다. 미카는 쓴웃음을 작게 뱉었다.

"닳고 닳으면⋯⋯."

죽어버리겠지.

맞아, 원래 그런 인생이었다. 매번 철부지 어린애처럼 사는 인스턴트 같기만 한 인생. 미카는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꽉 깨물어 깨뜨려 버렸다. 어릴 땐 입 안이 베일까 무서워 끝까지 녹여 먹었었는데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아."

그때, 저만치에 누군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미카는 눈을 크게 뜨고는 개수대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이츠키 선배!"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자, 멀리 떨어져 제 갈 길을 가던 슈가 한 번 두리번거리고는 정확히 미카를 찾아냈다. 미카는 그의 시선이 닿자 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

주위를 살피고는, 한쪽 손을 들어 아주 작게 흔들어 준 뒤 그는 바로 사라졌다. 미카는 한동안 고개를 들고 그가 있던 스탠드 위쪽을 바라보았다.

"야, 너 설마⋯⋯."

"응?"

"아, 아니야."

"다녀왔데이."

미카의 집은 보통 낮에는 불을 잘 켜지 않았다. 어두워질 때쯤에야 등 하나를 키는 게 전부였고, 보통은 온갖 문을 다 열어 놓고 지내서인지 여름만 되면 미카의 집은 이끼 가득한 어항 같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미카."

형의 목소리에 놀란 미카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딱히 찔릴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미카는 형의 목소리를 들으면 습관처럼 움츠리곤 했다.

"대화 좀 해."

이런 경우 8할은 대화라고 하기 힘들었다. 미카를 앉혀 놓고 다그칠 게 분명했으나 거절한다는 선택지가 없어, 미카는 결국 그의 앞에 앉았다.

분위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초록빛 집안에는 매미 소리가 가득 찼다.

"너, 진로희망서에 또 아무것도 안 적어서 냈어?"

형은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면 끊임없이 답답한 말을 한다.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릴 거야."

학교에서 오라는데, 너 정말 아무 생각도 없어?

형은 자기가 해 주겠다는데 왜 안 하냐는 말을 하고, 정말 그렇게 한량 같은 인생을 살고 싶냐고 날카롭게 물었다.

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릴 땐 엇비슷한 걸 가졌던 것도 같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의 집에 들어오며 모든 것을 받는 입장이 된 지금— 아버지가 차라리 살아 계셨다면 모를까, 형은 아버지의 유산으로 저를 대학에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일 밤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가끔은 어린 소년처럼 그의 흔적을 찾는다는 걸 미카가 모를 리 없는데도.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이다, 내는⋯⋯."

"그럼 말을 하란 말이야.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숨기기나 할 건데?"

그게 무슨 좋은 형이야?

"형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긴 아나?"

"몰라. 네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앞에서는 마치 어른이라도 되는 듯— 자기는 다 안다는 듯 떠벌리면서,

뒤에 가서는 아버지의 글씨와 유품조차 놓지 못하는 주제에.

아버지는 형에게 많은 물건을 남기고 떠났다. 유산 또한 성인인 형 앞으로 되어 있었고, 미카에게 사실상 남겨진 건 그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전부였다. 미카의 눈에 형은 전부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괜찮아지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을 보냈다.

"넌 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

아버지가 형만 사랑해도 괜찮았다.

원래 난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형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항 속으로 천천히 침수하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진로 희망서에 아무것도 적어서 낼 수 없었던 건, 그리고 그런 인생을 살았던 건 전부⋯⋯.

"나는 계속 노력하고 있어. 너랑⋯⋯."

그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뒤에서 형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으나, 미카는 그대로 현관문을 닫지도 않은 채 뛰쳐나왔다. 형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작아져 들리지도 않게 됐다. 머릿속이 피로 꽉 찬 것 같았다.

끼익 끼익 소리가 파란 하늘을 울렸다. 녹슨 쇠로 된 그네가 내는 불규칙한 소리가 듣기 싫은데 어쩐지 멈출 수가 없어, 미카는 계속 그네를 탔다. 해가 지면 추워질 테니 누구든 연락을 해야 하는데— 전화번호부를 아무리 뒤져도 오늘은 딱히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결국 휴대폰을 닫았다.

안 돼, 울 것 같은 기분이다.

미카는 고개를 숙였다. 새삼 제가 어린애처럼 느껴질 때가 싫었다. 그네 소리를 들으면 울음이 멎을 것 같아, 다시 체중을 실어 일부러 끼익 끼익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미카의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16화음 벨 소리⋯⋯ 그였다.

대출 카드에 적혀 있던 그 가지런한 이름이 휴대폰 윗면에 뜨자, 미카는 작게 헛웃음을 뱉어냈다. 끼익 끼익 소리가 멈추었다. 휴대폰을 열자 그 이름이 한층 더 뚜렷하게 보였다. 일부러 한참을 받지 않고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 ⋯⋯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

"무슨 일이가? 전화를 다 하구⋯⋯."

말 그대로, 휴대폰은 장식이면서.

- ⋯⋯. 

한동안 답이 없자, 미카는 그가 잘못 걸어서 끊어 버린 게 아닌지 화면을 두어 번이나 확인했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어 있었다.

- 큰 소리가 들려서. 

옆집이니까⋯⋯ 들렸겠구나. 미카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입을 가렸다. 치부를 들켜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형이 저를 불러 대는 것도 완전히 다 들었을 터였다. 아무 일도 없다고 변명하기는 완전히 글렀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춘기 애송이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고백하는데도 어쩐지 창피하지 않았다. 아니, 외려 더 어리광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휴대폰을 귀에 일부러 더 가까이 대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오며 주는 작은 진동이 좋았다.

- ⋯⋯.

당신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볼 일 없을걸. 그렇게 올곧고 성실하니까⋯⋯ 가출 따위는.

- 어디야?

응? 하고 못 들었다는 듯 미카가 되묻자 그가 다시 말했다.

- 어디냐고 물었어. 

미카는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동네 놀이터라고 작게 속삭였고, 전화는 얼마 안 가 끊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온 탓에, 총 통화 시간을 깜빡거리며 띄운 휴대폰 화면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끼익 소리를 몇 번 더 내며 그네에 앉아 있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카게히라!"

고개를 홱 뒤돌자, 그가 보였다. 여전히 교복 차림에, 뛰어온 건지 숨이 찬 듯 발그레한 두 뺨을 하고 있는 이츠키 슈가.

"⋯⋯ 선배."

"무작정 가출이라니, 겁도 없군."

제법 새침한 말이었으나, 저렇게 땀을 닦으며 하니 평소보다는 덜 그래 보였다. 미카는 기분이 한층 누그러지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가출했다고 해서 와 준 건지, 아니면 그냥 와 본 건지.

미카가 반대편 그네의 의자를 털어 주자, 그는 몇 번 그네를 살피고는 그대로 앉았다.

단축수업 탓에 여전히 이른 시간이라, 하늘이 참 파랬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아까 있던 이들이 모두 거짓말 같아 미카는 점차 머리가 식어 가는 걸 느꼈다. 슈가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눈물 따윈 나오지 않았다.

"⋯⋯ 아이스크림."

에?

이런 분위기에 갑자기 그가 뱉은 말이 의아해, 미카는 고개를 돌렸다. 분명 조금은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웬 아이스크림⋯⋯.

"먹어 본 적 있나?"

"당연히 있제."

누구든 한 번쯤은 먹어 봤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필수인데.

"난 없어. 나무 막대가 달린 건."

"에? 진짜가?"

거짓말이겠어? 라는 듯한 표정을 보고 미카는 우울한 기분 속에서도 살짝 웃음을 뱉어냈다. 풀숲에서 풀벌레가 울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다. 카게히라 하고 그가 작게 읊조렸다.

"네가 골라 줘."

그네에서 끼익 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저를 보고 있는 그의 옆모습이 참 예뻤다.

첫 키스 맛은 레몬 맛.

첫 키스 맛은⋯⋯.

⋯⋯.

이런 생각을 왜 해?

미카는 동네 슈퍼의 아이스크림 가판대에서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교복 차림으로 잘도 이런 생각을 했다. 갖가지 종류가 있는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보며 그가 무슨 맛을 좋아할지 고민해 봤으나 평생 좋은 것만 먹고 자랐을 그가 겨우 이런 몇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에 만족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사과 맛 하드와⋯⋯

레몬 맛 하드를 샀다.

놀이터에 있다간 형이 찾으러 올 것 같아 둘이 향하기로 한 곳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서도, 지금 시간이면 운동부도 아마 전부 체육관에 있을 것이었다. 그냥 운동장 스탠드에서 한가로이 아이스크림이나 먹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겠지 싶었다. 슈는 기꺼이 어울려 주었다.

그에게 무슨 맛을 줄지 정말 많이 고민했으나 결국 사과 맛 하드를 건넸다. 레몬은 너무나 뻔한 맛이 났으니까.

"조잡한 맛이군."

이츠키 슈가 지독한 악평가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군말 없이 입을 댔다. 함께 학교에 들어서면서도 둘은 하드를 먹고 있었다.

"그래두 여름이라 덥구마. 글체?"

"아무래도."

함께 스탠드에 앉자, 운동장 위로 펼쳐진 넓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매미는 연신 매앰 매앰 울어댔고, 풀벌레들은 또 따로 저들끼리 노래를 불렀다. 더운지 시원한지 분간할 수 없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쓸고 지나갔다.

"선배."

레몬 맛 하드는 예상대로 다소 인위적인 상큼함이 느껴졌다.

"선배는⋯⋯ 어른이 되믄, 하고 싶은 게 있나?"

하드를 깨물었더니 와삭 소리가 났다. 이가 시려졌다. 질문을 받은 장본인은 사과 맛 하드를 조금씩 먹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안 어울렸다.

"우선 파리로 가서 아틀리에 하나를 빌릴 거다."

옅게 번지는 교복의 나프탈렌 냄새.

"그 안에서 나만의 예술을 하며, 무료할 땐 가끔 미술관에 가는 거야."

고작 사과 맛 하드를 입에 물고 하기에는 제법 장황한 이야기였으나, 미카는 말없이 들어주었다. 제 이야기에 심취한 듯 보이는 슈가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빈 캔버스를 사서 떠오르는 걸 그릴 거다⋯⋯ 분명 걸작이 될 테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말을 하면서도 작게 웃는 그였다. 그가 웃으니 미카도 혼자 푸스스 따라 웃었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미카는 알지 못하는 파리의 길거리를 마음껏 내걷고 있는 그는 간만에 활기차 보여 무척 사랑스러웠다. 말하는 내내 입술 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니까. 정말, 한없이 즐겁다는 듯이.

"부럽데이."

왜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바라보자, 미카는 순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그에게 더 가까이 앉았다.

"선배는 뭔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뚜렷해가, 억수로 부럽구마."

내는 내일 당장 죽어도 별 상관없는 인생인데.

제 하드 표면에서 녹은 게 똑 하고 떨어졌다. 어디선가 매미가 요란하게 울었다.

한 칸 위의 스탠드에 앉아서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무척 묘했다. 왜인지 모르게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는데, 목울대에서 뭔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너도 분명 바라는 게 있을 거야."

얼핏 보면 여자아이처럼 곱상한 얼굴에, 목끝까지 채운 단추에⋯⋯ 더 어울리지 않게 작은 입에 문 하드까지.

"뭐든 입 밖으로 내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니까."

매미가 또다시 매앰 하고 울었다.

그의 눈동자는 기묘한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미지근하고, 간지럽고. 때론 불꽃처럼 튀다가도 저런 식으로 진중해지고.

- 닳고 닳으면 죽어버리겠제.

제가 했던 말이 귀를 울렸다.

자신에게 미래 따윈 없는 것처럼, 일회용품 같은 인생을 사는 걸 애써 포장하기라도 하듯 웃음과 함께 뱉어낸 말이었다. 꿈이나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래도

누군가 저렇게 말해 주기를

내심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자."

슈의 하드 막대는 마침내 비었다. 사과 맛 하드 탓에 입술이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미카는 마치 여름 같다고 생각했다

인위적인 붉은색이, 그래도 살아 있음을 끊임없이 내뱉는 그의 입술이.

하늘이

심상치 않다.

돌아가는 길, 일부러 평소 걷던 하굣길이 아닌 산 옆길을 택한 미카와 슈는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워지는 것 같던 하늘에 점차 구름이 끼자 미카의 표정은 점차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비⋯⋯ 올 것 같구마."

보통 '비 올 것 같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비가 온다.

미카가 그 이야기를 떠올리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바로 콧등에 작은 빗줄기가 하나 떨어졌다. 미카가 고양이라도 된 듯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자 슈 또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질 모양이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를 따라 미카 또한 고개를 쳐들자, 기다렸다는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카는 슈의 손을 잡고 급히 달렸다. 산 옆길이라 주위에 가게나 민가가 없어, 혹여 슈가 감기라도 걸릴라 빠르게 뛰었다. 묵직한 빗소리가 연신 귀를 울렸다.

"⋯⋯."

턱으로는 연신 빗물이 흘러내렸다. 옷 안에서 흐르는 빗물이 생경하게 느껴져, 미카는 저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떨었다. 마주 잡은 손은 서로의 체온으로 무척 따뜻했다. 미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비에 젖은 그는 선연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만큼.

하얗고 얄쌍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은 목을 타고 교복 옷깃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슈는 그의 손 하나에 의지해 가고 있었다. 제 숨소리와 빗줄기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를 않았다.

"선배."

불렀다. 제 입 모양을 본 건지, 슈가 빗속에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미카가 그의 뺨으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고만 있자 결국 그는 몇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가 미카의 코앞에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 빗소리보다 제 귀에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더 커졌다.

미카의 손이 슈의 뺨에 닿았다. 빗물 탓에 조금 차갑고,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슈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에 흐트러진 모습이 이상할 만큼 좋았다. 비가 이마 위로 흘러내려 눈을 가늘게 떴다가도, 속눈썹에 맺혀 떨어지면 다시 미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비는 끝없이 내렸다.

미카가 슈의 입술에 제 걸 맞대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빗물에 젖은 입술이 맞물리며 미끄러지다가도 결국은 제 자리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옅은 사과 맛이었다. 줄곧 예쁘다고 생각했던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숨이 막힌 듯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맞댔다. 같은 교복이 빗물에 젖어 불투명했다.

따뜻하고 달았다. 서툰 움직임이 이상했다. 빗물과 섞인 게 맛이 묘하다가도 또 달았다. 슈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의 손이 미카의 팔을 잡자, 미카는 제 입술을 작게 떼어내 그의 아랫입술을 입에 머금었다. 간지러운지, 그가 부서지듯 웃음을 뱉었다.

이상한 맛이 나, 라고 그는 말했다. 미카도 웃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에게 사과 맛을 준 게 다행이었다. 우렛소리가 들렸다.

하얀 손이 뺨에 닿았다. 미카는 제 귀에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는 게 들렸다. 비에 젖었는데 열까지 올랐으니, 내일은 분명히 감기 신세를 질 게 분명했다.

그의 손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무척 섬세히 움직였는데, 검지손가락 하나가 미카의 눈꼬리 부근을 살짝 만지자 미카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입술이 작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아까와는 사뭇 느낌이 달라, 미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빗물에 가득 젖은 그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 보라색 눈,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목,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복까지. 배경은 온통 초록색인데 그 혼자만이 하얬다.

"어릴 땐⋯⋯."

소리를 치듯 목을 쥐어짜 내 말했다. 단 한 번 용기를 내서 한 말인데 혹여 그가 듣지 못할까 겁이 나서, 동시에 저 자신이 확실히 들을 수 있길 바라며 목소리를 크게 냈다.

—가 되고 싶었어, 라고.

비가 어느새 고인 웅덩이에 부딪히며 작게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한없이 작은 세상의 비밀 같았다.

"⋯⋯."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온 동생을, 형은 나무라지 않았다.

"멈춰 봐."

미카는 그런 이복 형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너한테 일을 줄 거라고 얘기했었지."

닮은 구석이 없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온순한 성격의 미카와는 달리 무척 저돌적이고 직설적이었던 성격의 그는 미카와 상성이 잘 맞지 않았고, 이복형제니만큼 더했다.

카게히라 미카는 제 형을 알지 못한다.

조금도.

"약속해, 그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나면."

눈을 크게 뜬 미카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카세트테이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랑⋯⋯."

진짜 형제가 되기로.

미카는 형이 제 비밀을 깬 그 순간,

살아생전 처음— 그가 진정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art 3. 

찬란, 여름, 해방

보건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누군가 보건실 침대를 가린 블라인드를 하나하나 걷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이츠키 슈는 그 사람이 저를 찾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소리 내 제가 여기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선배?"

어차피 결국 찾아내서 저렇게 무해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 걸 알고 있었으니까.

"⋯⋯."

답하지 않고,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언뜻 보니 전에 얘기한 걸 새겨듣기라도 한 듯 제대로 된 교복 차림이었다. 카게히라 미카라고 적힌 명찰을 확인한 슈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누웠다.

"많이 아픈 기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이츠키 슈는 잘만 걸린다.

"⋯⋯ 너 때문이잖아."

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을 한다. 슈는 더 얘기해 봤자 손해라는 걸 깨닫고는 기침이 터져 나오는 입가를 막았다. 그새 또 열감이 오르는 것 같았다. 보건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나 때문이가?"

"빗속에서 그렇게⋯⋯ 이상한 짓을 했으니까."

와중에도 옮을까 싶어 얇고 흰 이불로 입가를 가린 그가 미카를 흘겨보자, 미카는 도리어 수줍다는 듯 웃었다. 깡마른 뺨이 베개에 묻혀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무척 좋았다.

"그래 야하게 말하지 마래이, 선배."

미쳤군.

얼굴까지 붉히며 저러는 꼴을 보니 어딘가 분명 나사 하나 빠진 놈인 것 같았다.

"⋯⋯ 불출하긴."

"근데 선배, 괘안은 거 맞나? 목까지 빨갛구마."

"해열제는 먹었으니 한숨 자면⋯⋯."

그때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미카와 슈가 대화할 때마다 불청객이 급습을 했다. 보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이츠키, 자니?"

"⋯⋯ 아니요."

"안 자? 좀 자 두지 그래."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미카는 그의 명치 부근에 아예 코를 박고 있었다.

이불 속은 그의 체취로 가득했다.

"남자애가 삐쩍 말라가지곤 말이야."

"⋯⋯."

이불 속으로 슈의 손이 홱 들어왔다. 그의 교복 단추 틈새로 장난을 치던 미카의 얼굴을 잡아챈 손은 생각보다 무척 뜨거웠다. 그에게 보일 리 없겠지만, 미카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런 장난이 한참 재밌을 나이였다.

서로가 궁금하고, 똑같은 몸인데도 만져 보고 싶고.

그나저나 진짜 하얗네. 미카는 그의 맨살을 손으로 살짝 만져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미카의 손이 닿자마자 다시 들어온 슈의 손이 그의 머리채를 살짝 잡았다.

"조퇴할 정도까진 아니지?"

"⋯⋯ 네."

목소리가 맛이 갔네 하는 보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미카는 저도 모르게 살짝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그건 감기 탓 아니에요, 선생님.

슈는 들킬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미카를 밀어내지도 못해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미카는 그의 몸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이츠키 슈라는 명찰이 보이자, 뭔가 훨씬 이상하고 묘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미카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잔뜩 달아오른 슈의 얼굴이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빨갛기만 하고, 눈꼬리에는 눈물도 약간 맺혀 있다.

그만하라는 듯 그는 제 손가락을 미카의 입에 물렸다. 단추 몇 개가 듬성듬성 풀린 셔츠를 입은 모습이 무척이나 흐트러져 보여 좋았다. 미카는 일부러 나른하게 웃었다.

"이츠키, 괜찮은 거 맞아?"

발소리.

홱, 하고 블라인드가 젖혀졌다.

"너⋯⋯."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얼굴이 새빨간데. 열 재 볼게."

체온계를 가지러 나간 보건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던 슈는 급히 간이침대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뒷머리가 아픈지 작게 아야야 소리를 내는 미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

그를 보곤 또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보건 선생님의 발소리에 이만 가겠다며 속삭인 미카는, 빠르게 몸을 펴 그의 입술에 제 걸 맞댔다.

슈가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하려고 할 때 즈음, 이미 미카는 입술을 떼고 몸을 돌려 블라인드 밖으로 나간 후였다. 슈는 제가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걸 깨닫자 수치심과 다른 감정으로 또다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저보다 나이도 한 살 어린 어린애한테!

"뭐야, 미카. 언제 왔어?"

"배가 좀 아파서예⋯⋯."

가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의 열감을 식힌 슈는 이불을 올려 미카가 풀어 둔 교복 단추를 마저 잠갔다.

아까 제 몸 위를 간지럽히고 움직이며 살을 머금던 입술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매미 우는 소리에 맞춰 따르릉, 하고 자전거 벨을 울렸다. 일정하지 못한 높낮이의 도로가 울렁거릴 때면 자전거 위에 탄 몸도 함께 흔들렸다.

제 어깨 즈음에 뺨을 대고 기댄 그가 그럴 때면 몇 번 기침을 했다. 정말 감기가 제대로 들었구나 싶어서, 괜히 괜찮은지 몇 번 물었으나 그는 신경 쓰지 말고 앞이나 보라며 일관했다.

찌르르 하고 운 여치 소리에 맞추어 바람이 불었다. 자전거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은 그가 살짝 움직이자, 미카는 또 습관처럼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슈의 깡마른 볼은 살이 없어 대고 있어도 별 촉감은 없었으나, 그의 열감 탓에 어깨가 뜨끈해졌다. 미카는 빨리 그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페달을 더 밟았다.

"선배, 다 왔구마."

"⋯⋯."

계단을 올라가는 걸 도와줘야 하나 생각하는데, 그가 한 번 열이 오른 얼굴로 숨을 내뱉더니 조금 풀린 눈으로 흰 집을 올려다보았다.

한 발로 땅을 딛고 자전거를 지탱한 미카는 그에게 말을 붙이려 했으나, 슈가 먼저 선수를 쳤다.

"⋯⋯ 집에 아무도 없어."

⋯⋯ 어.

어?

미카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그를 다시 보았다. 조금 풀린 보라색 눈이 위험해 보였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이상한 생각들이 잔뜩 메아리쳤다.

집이 비었고, 혈기 왕성한 남고생은 둘이고.

아니⋯⋯ 하나인가.

열 오른 숨을 내뱉은 그가 다시금 작게 기침을 내뱉자, 미카는 그제야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그를 부축했다. 자전거는 집 앞에 아무렇게나 세워두었다.

"⋯⋯."

그를 어찌어찌 침대에 뉘이긴 했으나, 미카는 태어나서 병간호 따위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제가 감기에 걸려도 딱히 간호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침대에서 한 번 앓고 나면 괜찮아지는 게 다였다.

"약은 어데 있나?"

1층 부엌의 선반이라고 답한 그의 말에 따라 미카는 하얀 알약을 한 움큼 쥐어 가지고 왔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물수건도 젖혀 왔는데, 슈의 이마에 놓기엔 좀 큰 것 같아 한 번을 더 접었다.

"차가우믄 말하래이."

하얀 이마에 물수건이 닿는 순간— 그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자꾸만 이상한 상상이 드는 탓에 한 번 자세를 고쳐 앉은 미카가 알약을 이것저것 구분하고 있자, 슈가 보다못해 분홍색 약이라고 언질을 주었다.

"잠들믄 가께. 가정부 아주머니 오시기 전에⋯⋯."

슈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미카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가 덮은 이불을 몇 번 토닥여 주었다.

오후 여름의 햇살이 창문에 비추어 들어오며 바닥에 기다란 빛 자국을 남겼다. 매미와 여치는 번갈아 대며 시끄럽게 울었으나 방 안에서는 먹먹하게 들렸다. 미카와 슈의 눈이 마주쳤다.

"잠들면 가야 해."

제 교복 옷자락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던 미카가 웃었다.

"응, 그러께."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거만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뺨도, 코 끝도 빨갛게 달아오른 주제에.

"아프면⋯⋯."

외롭잖아.

물기 젖어 속삭인 목소리를 들으며 미카는 제 무릎에 팔을 괴곤 또 웃었다.

"어릴 땐 아픈 게 죽어도 싫었어."

"죽을 정도였던 기가?"

"집은 숨 막히니까."

아. 미카는 그 기분을 정확히 알았다. 가정부에 대해 이야기하던 슈의 얼굴을 떠올린 그는 납득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매앰 하고 매미가 또 크게 울었다.

"내는 어릴 때 아프믄 좋았데이."

"왜?"

글쎄⋯⋯.

졸린 듯 눈을 작게 깜빡인 그는 얼굴에 열감이 조금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달라 보일 것 없는 얼굴이었다. 이불 새로 교복 옷깃이 보이자, 갈아입혀 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고 작던 어린아이는

아픈 몸을 면죄부 삼아 어리광을 부렸다.

손을 들어 슈의 눈꺼풀을 덮은 미카가 작게 자장가를 흥얼거리자, 그는 자신이 아기인 줄 아냐며 도리어 성질을 냈다. 미카는 작게 웃었다.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자장가는 작고 감미로웠다. 열 탓에 연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슈의 눈꺼풀이 점차 내려앉고, 하얀 이마는 고르게 퍼졌다. 얼마 안 가 일정하고 작은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매미 소리,

여치 소리,

숨소리.

하나같이 다 살아 있음을 바쁘게 알리는 것 같았다.

미카는 그런 생기 넘치는 것들을 사랑했다.

"⋯⋯."

인사 없이 현관문을 닫았다.

예상대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예상이라기보다는, 바라던 대로. 형과의 관계는 서먹함에서 완전히 어색함으로 바뀌어,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평소 드문드문 미카에게 평소 생활에 관해 물어보던 형은 미카를 배려하기라도 하는 듯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표현 방식이 서투른 사람들은 더러 그런다.

성도, 외모도, 성격도 모두 다른 형.

겨우 열여덟 살이 이해해 주기에는 너무 어른들의 사정이었던 걸까. 미카는 그날을 떠올리자 또다시 낯부끄러워지는 감각에, 공방에서 형이 돌아오기 전까지 방에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나 식탁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미카는, 제 방으로 올라가는 대신 멈칫해 그 자리에 굳었다. 설마 형이 집에 있었던 건가 싶어 신발장을 한 번 더 확인했으나 역시 형의 신발은 없었다. 식탁 위에는 봉투와 함께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형이 남기고 간 듯했다.

돈 봉투 안에는 미카가 필요한 그 금액이 정확히 들어 있었다. 그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걸 보태면 이 정도로 받을 필요는 없는데, 형은 굳이 액수를 딱 맞추어 넣어 놓았다. 미카는 이제껏 만져 온 가장 큰 액수의 돈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교복 위에 겉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자전거에 올라타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저녁 시간이 다 될 즈음, 형이 돌아올 즈음에야 결심이 섰다. 미카는 자전거 키를 챙기고 곧장 집을 나왔다.

끼익, 끼익 하고 페달 밟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비 오던 그날 그네를 타던 게 떠올랐다. 저를 몇 번이고 어린애로 만들어 버리는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자, 묘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작은 웃음이 나왔다.

여름의 초저녁을 달리며 미카는 여러 곳을 지나쳤다. 저녁 매미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페달을 연신 밟으며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카세트테이프에 대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셨을까.

돌아가신 이후로, 온갖 플레이어에 아무리 넣어 봐도 애석할 만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그 애증의 카세트테이프. 한 번은 아버지를 완전히 잊기 위해 차라리 듣지 말자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그것은 미카의 결핍으로 남았다.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거였다.

그러니 들어야만 해.

아버지가 남긴 목소리를.

미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겉옷 덕에 서늘한 여름 바람에도 그다지 춥지 않았다. 오르막길에서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계속, 계속, 계속.

"⋯⋯."

박물관의 관리자로 보이는 노인은 나와서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미카는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곤 그에게로 다가갔다.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한 번 더 삼켰다.

"저⋯⋯."

"아, 박물관은 30분 후 폐관합니다.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그런 건 아이고, 여기에 기증된 물건 때문에 왔습니더."

빗자루를 들고 있던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똑바로 들어 미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을 배경으로 작게 숨을 헉헉거리는, 끽해야 열일곱에서 열여덟이나 될까 싶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관리인은 그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 어떻게⋯⋯?"

노인은 따라오라는 듯 뒤돌았다. 미카는 작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노인을 뒤따랐다.

그다지 번화가에 있는 박물관이 아니라 그런지, 딱히 특별히 볼 만한 건 없었다. 정말 그냥 골동품 전시관이었다. 미카는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으며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이겁니다."

생각보다 라디오처럼 크지도 않고,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녹음기를 닮은 플레이어였다. 머릿속으로 수백 번은 생각했던 순간인데 어째 저 자신의 반응이 생각보다 덤덤하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개조했다는 플레이어는 노인의 손에 의해 쉽게 유리관 안에서 빠져나왔다. 저게 작동이 되려나 싶다가도, 노인이 그걸 건네자 미카는 선뜻 받지 못했다.

"받아요."

"⋯⋯."

플레이어는 묵직했다. 단 하나의 카세트테이프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주제에.

"아, 돈은 여기⋯⋯."

"돈이요?"

되물으며, 노인이 웃었다.

"주인에게 돌려주는 건데 돈을 왜 받겠습니까."

미카는 눈을 깜빡거렸다. 노인은 참 인자하게도 웃고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가의 주름을 가려 보니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와 닮았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웃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아버지를

많이 닮으셨네요.

그 말은 영원처럼, 이상한 파도처럼 미카의 가슴속에 고였다.

들었을 땐 얼떨떨해서 그냥 플레이어를 끌어안은 채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박물관을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노인의 말은 박물관에서 멀어질수록 물먹은 솜처럼 무게가 점점 더해지더니, 결국 중간에는 자전거에서 내려와야 할 만큼 무거워졌다. 미카는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숨소리가 이상했다.

아버지.

저와는 한 구석도 닮지 않은 형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버지.

오래된 팝송과 카세트테이프 감는 소리.

나를

사랑했나요?

눈이 매웠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또렷해졌다. 손바닥에 멋대로 고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괜찮아? 너 몸 안 좋아 보여."

"아이다. 오늘 살짝 피곤해가⋯⋯."

끝끝내 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는 넣지 못했다. 고민하기를 반복하다 거의 날밤을 새워 버린 미카는 남들이 보기에도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는 듯했다.

"내 가보께."

"또? 맨날 어딜 가는 거야."

응후후 작게 웃은 미카가 손을 흔들며 반을 나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친구도 미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도 밥 먹듯 3학년 층을 들락날락했더니 이제 웬만한 선배들하고는 일면식이 생겼다. 귀엽게 생긴 2학년짜리가 선배 하나를 쫓아 바쁘게 뛰어다니는 걸 보고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이츠키 선배, 여 있나?"

"걔? 교무실 갔어."

카게히라는 또 이츠키를 찾네.

한참 미카를 귀여워하던 누나들은 대체 왜 미카가 남학생 하나에게 얽매여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미카는 또다시 순진하게 웃고는 곧바로 3학년 교무실 쪽으로 향했다.

아침에는 그가 먼저 가 버려 함께 등교하지 못했다. 웬일인지 먼저 가겠다는 쪽지만 남겨 놓고 휑하니 가 버린 게 마음에 걸려 1교시부터 왔건만 교실에도 없고. 아무튼 만나기만 하면 되니까— 라는 생각에, 미카는 용기를 내어 3학년 교무실 쪽을 기웃거렸다.

이츠키 슈는 끝까지 반에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그를 '걔'라고 불렀으며, 미카가 아무리 밥 먹듯 찾아가도 누군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그리 살가운 성격도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미카는 그런 그가 오히려 좋았다.

"저⋯⋯."

"2학년? 누구 보러 왔어?"

"선배 보러 왔는데예, 어디⋯⋯."

"이놈, 정신 못 차리고 연애질이나 하고."

아야야. 미카는 딱밤을 맞은 이마를 쥐어 싸맸다. 평소 제 사복을 종종 잡곤 하던 3학년 담당 체육 선생님은 미카에게 딱밤을 먹이고는 그대로 교무실을 나갔다.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며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던 미카의 주의를 사로잡은 건 교무실에서 들려 온 한 여선생의 목소리였다.

"그래, 이츠키. 그럼 유학 절차는 개인적으로 밟고⋯⋯."

익숙한 이름,

유학.

미카는 순간 기분이 착 가라앉아, 교무실 문 틈새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생활기록부에는 그렇게 처리해 놓을게. 학교생활도 얼마 안 하고 간다니 아쉽네."

"⋯⋯ 네."

작게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 여선생 앞에 서서 상담을 하고 있는 건 이츠키 슈가 맞았다. 방금 들었던 말들이 계속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여 난리도 아니었다. 눈을 다소곳하게 내리깔고 순순히 대답하는 그를 보자니 뭔가 머릿속이 점차 뜨거워졌다.

유학이라니?

그대로 3학년 층을 내려오며, 미카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선배가 유학이라니. 이사 온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이라니?

선생님이 몇 번 미카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미카는 그때마다 손톱을 물어뜯다 넋 빠진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말하길 반복했다. 분명 선생님께 알겠다며 대답하는 슈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

말하지 않은 걸까,

말할 수 없었던 걸까.

하굣길에 슈를 맞이하면서 미카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안경을 벗어내며 뭔가 말했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교무실에서 들었던 그의 얘기로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도 오늘 알게 돼서— 그래서 말을 못 한 거려나. 맞아, 어쩌면 어제였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지금 말을 하겠네. 하굣길 내내 미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슈의 얼굴을 바라보았으나 슈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태도를 보였다. 항상 바쁘게 말을 붙이던 미카가 평소보다 조금 조용하니 하굣길도 그런대로 조용했다.

"오늘은 덜 소란스럽구나."

정도가 끝.

"내한테 할 말 없나?"

"할 말?"

무슨 이상한 꿍꿍이냐며 슈가 되묻자 미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왜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어린애라서 그런 건가.

"교무실에서⋯⋯ 내 다 들었구마."

앞서 가던 그가 뒤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언제 가는 긴데?"

"너⋯⋯."

끝까지 안 말해 줄 생각이었는갑네. 미카는 작게 헛웃음 같은 한숨을 뱉어냈다. 이토록 온 세상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했다. 열여덟 살 애송이에게 말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미카는 제가 그렇게 무력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결국 선배한테도 내는 그 정도였던 기가?"

"카게히라."

슈가 딱 잘라 말했다. 미카의 감정은 그릇에서 넘칠 듯 위태롭게 찰랑이는데, 슈는 겨우 뚜껑 하나 덮어 범람을 막듯 차분했다. 그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난⋯⋯."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예고 없이 떠나 버릴 거였잖아. 미카는 그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슈를 앞질러 뛰어나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둘의 목적지가 무척 비슷하다는 것이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여름이

끝난다.

그 사실이 끔찍이도 싫어, 미카는 머리를 털어 제 뇌를 가득 채운 부정적인 생각들을 털어냈다. 그런데도 기억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미카의 뇌리를 꽉 채웠다. 

- 너도 분명 바라는 게 있을 거야.

바라는 건⋯⋯.

단 한 번도 있어 본 적 없어.

미카의 마음도 모르는 여름 매미가 매앰 하고 시끄럽게 울었다. 여름이 참 지독하기도 했다.

"미카."

무뚝뚝한 목소리에, 식탁에 엎어져 있던 미카가 고개를 들었다.

"⋯⋯ 오늘 받은 옥수수가 좀 많아서, 옆집 갖다주고 와."

형은 아직도 미카를 조금 쑥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젠 저런 것도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카는 엷게 웃었으나, 그의 말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제 옆집은 안 간데이."

"뭐? 왜?"

"⋯⋯ 아무튼, 더는 안 가는 기라."

묻지 말라는 듯 미카가 다시 엎어지자, 형은 사춘기란 하고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미카는 그런 형의 뒷모습을 보며 살풋 웃었다.

주말은 이틀이나 된다. 이틀이나 학교를 가지 않고, 이츠키 슈를 볼 수 없다. 그런 게 정말 싫었었는데 이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등하굣길에 그를 더 마주쳐야 했다면 완전히 고역이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비가 후드득 후드득 내렸다. 거실에 누워 정원에 초록빛 비가 내리는 것을 보노라면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장마가 지나면 여름은 정말 끝이 나는데.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울리자, 미카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교복에서 나던 향긋한 체취 따위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미카는 제가 화를 내는 게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꽁한 기분을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방치해 놓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츠키 슈는 처음 미카가 다가왔을 때 강경히 거부했다. 등하교도 같이 하자고 한 적 없었고, 심지어 되레 그가 미카에게 친절을 베푼 게 전부였다. 슈가 미카에게 미래 계획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이야기해 줬던 미래에는 미카는 모르는 파리의 길거리가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도 미카가 이렇게 그를 피해 버리는 이유는 서운함과 동시에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불안감이었다.

그 하얗고 곱상한 얼굴을 보게 되면 분명 눈 녹듯 용서해 버릴 것 같았다. 모든 걸 납득해 버리고야 말 것 같았고, 슈가 마지막 이별 인사를 하면 손을 흔들게 될 것만 같아서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 모든 걸 아는데도,

차마 잘 가라고 인사해 줄 수 없다.

미카 방의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슈의 방 창문이 보였다. 이전에는 이 창문을 통해 몇 번 그와 이야기도 나누었었는데, 이제 미카는 커튼까지 꼼꼼히 쳐 버렸다.

"저녁거리 좀 사 올래?"

형의 또 다른 부탁이었다. 이번에는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잔돈과 바구니를 받아 든 미카는 다녀오겠다며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었다. 현관문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가 괜히 경쾌해 미카는 서둘러 우산을 들고 문을 나섰다.

재료를 보아하니 오늘은 카레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정원 대문을 열고 길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

깜짝아⋯⋯.

저를 향해 창처럼 드리워진 우산을 보며 미카가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새하얀 우산 아래, 그보다 더 하얀 열아홉 살 소년이 있었다. 보라색 눈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저를 보고 있다.

비도 오는데 제가 언제 나올 줄 알고 이렇게 기다린 건지, 그답지 않게 참 무모한 짓이었다. 미카는 놀라는 것도 잠시— 머릿속이 점차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순간마저 그가 제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처럼 느껴져 화가 난 탓이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타고 흘러내리며 물웅덩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뭇잎이 빗물을 쉴 새 없이 받아 내는 상쾌한 소리가 둘 사이를 가득 메웠다.

"카게히라."

먼저 말을 꺼낸 건 그였다. 빗소리에 섞여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사과하지."

교복 차림이 아닌 그는 처음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얇은 흰색 스웨터 차림인데, 그마저도 무척 잘 어울렸다. 미카는 검은 후드집업을 입은 제가 지나치게 후줄근해 보일까 돌연 걱정을 했다.

"끝까지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

"내한테 할 말 없냐고 물었을 땐, 왜 말 안 한 기가?"

그러자 슈가 멈칫했다. 맞닿은 우산에서 빗물이 곡선을 그리며 연신 후두둑 떨어졌다.

"말할 수 없었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건지 눈 아래에 조금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감정이 빗물처럼 울렁거렸다.

이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어린애처럼 굴 거면 완벽히 그래 버리자는 생각에 고심해 놓았던 원망의 말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막상 슈가 저렇게 나오니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는 항상 할 수 있는 게 없구마. 지금도."

체념하는 수밖에 없다. 미카가 상처받은 눈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 슈는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

비가 내렸다. 장대비가 지붕에 끝없이 부딪혔다.

"말하믄, 뭐가 바뀌나?"

미카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소리내어 말한다 한들 뭐가 바뀌어?

제가 아무리 간절하게 외치고 붙잡는다 한들 이츠키 슈는 가야 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였다. 이 비가 그치면 그는 돌아가고, 얼마 후엔 같은 땅 위에 없겠지.

나는 아직 열여덟 어린애에 불과하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 미숙한 무력감이 죽어도 싫었다.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물을 튀기며, 이상한 파문을 일으키며.

이츠키 슈가, 처음으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마음을 들을 수 있잖아!"

울 것 같은 얼굴.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소년처럼 위태로운.

"⋯⋯."

빗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며 투둑투둑 소리가 났다. 너무나 거칠게 내린 탓에 주위가 뿌옇게 보이는데, 저를 잡고 있는 그만이 무척이나 선명해졌다.

가지 마.

작게 속삭였다. 빗방울 탓에 들리지 않을 터였다. 미카의 우산도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사력을 다해, 부서질 것처럼 끌어안았다.

제발⋯⋯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른이 되지 마.

슈의 머리가 제 목덜미에 얹히자 끊어질 것 같은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꾹 눌렀다. 빗소리와 함께, 그 숨이 제게 새겨지길 바라며.

오전 11시 비행기.

그의 집은 하루 빠르게 비워졌다. 미카는 이삿짐 트럭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모든 방에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숨어들어 나오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창문을 봤다간 슈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텅 비어 버린 등굣길을 걸으면서도 슈의 집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새벽 내내 시뮬레이션을 돌린 덕에 눈길도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이츠키 슈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해서 학교는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이 있었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미카가 조금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빼면 평소와 지독하게도 똑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오늘, 11시가 지나면 슈가 다른 나라로 떠난다는 걸 아는 건 저밖에 없었다.

- 배웅 안 가? 

- 별로 안 친했어가, 상관없데이. 

형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의 눈빛은 읽을 길이 없었다.

- 정말로 상관없어?

떠보는 듯한 질문에, 뭐라고 답했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시침이 9시 반을 가리킬 때도 아무 생각 없이 칠판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국어 시간이 되자 이동해야 된다며 누군가 엎어져 있던 미카를 깨웠다.

웬 이동수업⋯⋯ 아, 도서관. 미카는 그제야 작게 하품을 하며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길도 뭔가 낯이 익었다. 그와 함께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각자 책 한 권씩 골라 읽으면 돼, 안 읽고 떠들기만 하면 혼날 줄 알아."

네에 하고 답한 학생들은 각자 뿔뿔이 책장으로 흩어져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미카도 얼마 안 가 책장을 향해 다가갔다.

책등을 손으로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어느 순간의 기억이 찬찬히 떠오르자, 미카는 눈을 감았다. 발자국 수를 걸으며 세다 보니, 열 걸음 정도를 걷자 신코가 책장에 닿았다. 미카는 눈을 뜨곤 가장 먼저 보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어려운 한자라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펼쳤다. 세로로 가지런히 적힌 한자와 그 사이 아주 적은 히라가나들이 보였다. 새하얀 책장들이 넘어가며 오래된 책 특유의 냄새가 났다.

마지막 책장이 넘어가자, 책의 맨 뒷면이 드러났다. 미카는 익숙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츠키 슈, 카게히라 미카.

위아래로 나란히 적힌 이름과 대출 카드.

"미카?"

책을 덮었다. 제자리에 꽂아 두지는 못했다.

"어디 가, 미카?"

책장을 바쁘게 지나쳤다. 언뜻 본 시계는 9시 50분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도서관 문을 벌컥 열고 그대로 발돋움했다.

익숙한 하굣길을 벗어나, 또다시 뛰었다. 익숙한 자전거가 보여 빌리기로 한 미카는 곧바로 올라탔다. 다행히 공항은 여기서 30분 거리였으나, 미카가 그 시간 안에— 비행기가 뜨기 전에 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망설이는 시간조차 아까워 페달을 밟았다.

어리숙하고, 끝없이 서투르고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어린애가 되어도 좋아.

페달을 밟는 끼익 끼익 소리가 바쁘게 울렸다. 주위의 풍경이 휙휙 바뀌며 거센 바람이 미카의 앞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날 그렇게 한없는 어린아이로 만드는 당신이

좋아.

가슴이 터질 만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숨이 차는데도 페달을 밟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낯선 거리에 들어서도 표지판 하나에 의지해 공항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마음이

자꾸만

앞지른다.

숨이 차올라 잠시 멈추었다. 공항이 얼마 남지 않은 부근에서는 폐가 터질 것 같아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빌딩에 커다랗게 뜬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태어나서 비행기를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미카는 자세히 알진 못했으나, 비행기가 11시에 절대적으로 출발할 것 같진 않았다.

정말 코앞에서 놓칠 수도 있었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탄 미카는 페달을 밟았다.

폐가 터져도 상관없었다.

- 탑승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전 11시 정각에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가는, XX 항공 XXX 편은 지금 1번 탑승구에서 탑승을 시작합니다. 탑승 마감 시간은 출발 5분 전입니다. 다시 한번⋯⋯.

손 안에서 하드 바의 포장지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거 먹을 거니, 슈? 수화물은 다 부쳤어."

레몬 맛.

슈는 고개를 저었다. 지나가는 아이에게 아무 생각 없이 하드를 쥐여 준 슈는 항공편 일정이 적힌 거대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안 가 출발해야 했고, 이미 탑승이 시작된 참이었다.

"가자."

어머니의 재촉이 들리자, 슈는 제 캐리어를 잡았다.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린애 같은 기대를 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 결국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제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여름을 닮은 소년을 만났다.

어리숙하고, 어떨 땐 바보 같고⋯⋯

레몬 맛이 나는

그를.

인사할 수 있을까 싶어 그의 집을 막연히 바라보았으나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항상 그런대로 조용했다. 초록 식물들과 나팔꽃이 가득 자란 정원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이 정도면 된 거다.

자기 자신을 설득하며 뒤돌았다. 캐리어에서는 드르륵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슈가 저를 따라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뒤를 돌아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순간, 가만히 걷고 있던 슈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럴 리 없어 하면서도 허공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선배!"

뒤돌았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저 멀리 공항 입구에, 숨을 잔뜩 몰아쉬는 미카가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 흐트러진 교복인데도 저를 보자마자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슈는 헛웃음을 내뱉으면서도 미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카는 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폐는 찢어질 것 같고, 심장은 팽창해 터져 버릴 것만 같은데도 기뻤다. 정말 더는 못 뛰겠다고 생각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져, 그에게로 뛰었다. 슈도 캐리어에서 손을 놓고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선배."

수많은 인파 속에서 마주치자, 미카는 그에게 완전히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속도를 낮췄다. 미끄러운 공항 바닥에 닿은 신발이 어색했다. 열감을 띤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말이 오간 것 같았다.

"⋯⋯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돌려받았데이."

숨이 찬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자, '돌려받았다'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슈의 표정이 변화했다.

"편지할 테니까, 꼭⋯⋯."

받아 줘야 해. 거친 숨소리가 그 말을 대신해 둘 사이를 채웠다. 미카는 무릎을 짚고 나머지 숨을 몰아쉬다가, 어느 정도 진정돼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공항 창문으로 햇빛이 들이쳐 슈의 얼굴을 비추었다. 도서관에서 봤던 것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선연하게.

"편지는 딱 한 통만 부쳐."

그가 웃었다.

마침내.

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공항의 게이트 옆 유리창으로 바람에 휘날린 무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둘을 비추었다. 미카는 눈을 점차 크게 떴다.

어른이 돼서 만나.

미카는 웃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인데도 웃을 수 있었다. 슈 또한 웃어 주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진귀한 미소였다.

공항 의자에 앉은 미카는 비행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으나, 이젠 괜찮았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꺼내 들었다. 결국 보여 주진 못했네. 이어폰을 두 귀에 꽂은 미카는 한참을 망설이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었다.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아아.

미카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자마자, 무릎에 고개를 작게 묻었다.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When I dream, I dream of you 

Maybe someday you will come true

미숙하기에 가장 찬란했던

우리의

여름.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