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날개 下 (完)

미카슈 피겨 AU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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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종목을 다루고 있으나 필자의 전문 지식 부족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감상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작중 소재(트라우마, 자살 등)에 유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꽃이 쏟아져 내린다.

슈가 서 있는 링크장으로 꽃다발이 날아들어 그의 발밑에 떨어졌다. 이어지는 큰 박수 소리와 함께 그가 팔을 허공으로 살짝 들었다 허리를 굽혀 고유의 인사법으로 관중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미카도 그 함성 속에 있었다.

아, 해냈나.

미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슈를 바라보았다. 도취된 뺨과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눈이, 미카가 사랑하는 그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만져지리라. 미카는 왜인지 모르게 왼쪽 팔에 들려 있는 꽃다발을 당기며 반대쪽 손을 그에게로 뻗었다.

- 너.

그 순간 슈가 미카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게 거짓말을 했지, 하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미카가 입을 여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보라색 눈이었다. 함성이 귀에서 점차 멀어졌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손을 뻗는 순간 그가 멀어졌다. 꽃다발에서 나온 꽃잎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미카가 다가가려 발을 움직였으나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빙판에 날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 떠나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 순간 미카가 가쁜 숨을 쉬며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본인의 방 천장이라는 것을 인식한 미카는 제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쓸었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수많은 카세트테이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작게 눈을 가린 채 심호흡을 했다.

아이스 쇼에서 완벽하게 복귀해 아름답게 빛나는 꿈속의 슈와 기억을 찾아 헤매는 현재의 그가 번갈아 아른거렸다. 그 온도 차에 미카는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까운 기분으로 한숨지었다.

그래도 당신이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어.

그 속에 내가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이 말은 반 정도 진심이다.

걷는 날개

바질

05

은반 위의 소년

공항에 기자들과 일반인들이 반반 모여 웅성거렸다. 게이트 앞에 너무 많이 인파가 몰리자 아예 펜스까지 세워 둔 걸 보아하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오는 모양이라며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의 자랑이라 불리는 피겨 선수가 막 그랑프리 파이널을 마치고 귀국한다니, 인파가 몰릴 만도 했다.

순간 터진 셔터 소리를 시작으로 눈이 아플 정도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보디가드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달려들려는 사람들을 막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처음 열리고 바닥을 디딘 건 검은 옷을 입은 여러 관계자들이었다. 어린 남자 피겨 싱글 한 명이 귀국하는데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 순간을 녹화하는 카메라가 공항을 전체적으로 쭉 훑자, 1층에 자리를 잡지 못한 소규모 신문사의 기자들이 2층까지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이 든 카메라 렌즈들이 마치 사람의 눈처럼 곳곳에서 빛났다. 보는 사람마저도 숨이 막힐 만한 규모였다. 그 모든 카메라 렌즈들은 단 한 명의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검은 인파들 사이에 단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흰 꽃다발 하나를 안은 채 메달을 목에 건 이츠키 슈가, 수많은 플래시와 사람들의 함성 새를 뚫고 걸어왔다.

중간쯤 와서 그는 자신을 응원해 주러 온 국민들을 향해 고개 숙여 정중한 인사를 했다. 그게 유일한 슈와 군중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 이후 그는 그 어떤 기자의 외침에도 응해 주지 않았으며, 그 어떤 팬의 조공도 받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표정의 변화 없이 공항 밖을 향해 보디가드들과 함께 직진했다.

슈는 평소보다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기자들과 군중들이 그 정도 변화에 관심을 가져 줄 리 없었다. 기자들에게 슈는 사진 한 장만 건져도 많은 조회수를 가져다주는 대어였고, 팬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평생 다시 오기 힘들 기회였다. 일본에서 연예인보다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존재에게 이만큼 가까이 다가갈 순간이 일생에 또 언제 올까.

그러나 슈의 반응은 언제나 선 안에 존재했다. 정중하게 자신을 보러 와 준 것에 대한 인사를 표해 주고, 그들을 밀치지 않는 대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끔 수많은 보디가드를 동행했다. 결국 팬들은 그에게 준비한 꽃다발을 전달하거나 선물을 조공할 수 없어 앞에서 지나쳐 버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재수없어.

순간 들려 온 목소리에 슈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에도 플래시는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국가대표 돼서 돈도 많이 벌고 사랑도 엄청나게 많이 받았는데 반응이 저게 뭐야. 

수많은 인파. 보디가드에, 기자에, 팬들에, 그냥 비행기를 타러 왔다가 신기해 구경 온 평범한 시민들까지 섞여 중구난방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기란 너무나 어려웠으며 슈에게 다가오려는 팬들과 그들을 밀어내려는 보디가드들 탓에 무척이나 유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목소리는 선명히 들린 것 같았다.

남의 불행을 보지 못하는 편협한 시야를 가진 인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었으나, 지금 그런 말 하나에 흔들릴 정도로 슈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가 눈을 점차 크게 떴다. 슈의 품 안에 안긴 꽃다발 속 흰 꽃에서 꽃잎이 떨어졌다.

어릴 적부터 견뎌 와 익숙하던 카메라 플래시가 유독 너무나 밝아 보였다. 눈에는 계속해서 플래시의 잔상이 남았으며 모르는 얼굴들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귀국한 걸 환영한다는 외침소리가 점차 변질되어 갔다.

오만한 제왕. 

손이 떨려 왔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뒤에는 이미 너무 늦어 시야가 밝은 플래시와 계속해서 움직이는 여러 사람들 탓에 휙휙 돌며 어지럼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순간 구역질이 나고 숨이 막히는 기분에, 슈는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놓친 채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틀어막는 걸로는 부족해 결국 제 목을 쥐었다.

보디가드 몇이 다가와 말을 거는 것 같았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제 거친 숨소리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간혹 아까의 그 환청이 희미하게 귀를 맴도는 것도 같은데, 뭐라도 입 밖에 냈다간 추하게 게워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순간에도 카메라 플래시는 멈추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터져 왔다.

열여덟 살이었다. 그 모든 걸 견디는 그는 겨우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보통의 남고생이었다면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에서 평범하게 공부를 하고, 입시에 지친 마음을 소소한 우정으로 달랠 나이. 그러나 군중들이 그런 걸 신경 쓸 리 만무했다.

그런 그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카메라가 슈의 얼굴을 향해 줌을 당기자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그가 보였다. 보디가드들이 점차 그에게 다가와 그를 가리고 있었기에 반 정도가 흔들리며 겨우겨우 앵글 안에 들어왔다. 슈가 카메라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제 목을 쥐고, 진정하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묘한 보라색을 빛내는 눈이 검은 옷 사이에서 앵글 안에 담겼다.

불행해 보였다.

그 순간, 휴대폰이 뒤집어졌다.

미카가 고개를 들어 제 휴대폰을 뒤집어 화면을 가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휴대폰의 뒷면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슈를 보며 미카는 안타까운 마음에 쓴 한숨을 삼켰다. 최근 들어 무대 영상뿐 아니라 공중파에 노출되었을 당시의 영상들도 보고 싶다고 해 깊숙이 보관해 놓았던 걸 휴대폰으로 옮겨 왔는데, 아무리 봐도 도움은커녕 거북한 기분만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역시 무대 영상만 보는 게 나을 것 같제? 앞으로는 이런 건 안 가져오는 게 낫겠구마."

"아니."

상관없으니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오라고 슈는 말했다. 둘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카는 이런 영상이 정신건강에 해롭기만 하지 않을까 걱정 중이었고, 슈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화면 속 자신을 보며 괴리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런데도 아이스링크장에 섰던 이유가 뭘까.

군중들 탓에 어린 나이에 공황을 앓으면서도, 자신을 쥐 잡듯 쫓아다니는 카메라 렌즈들에 반감을 가지고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반평생을 기꺼이 피겨스케이팅에 바쳤던 이유가.

"너의 눈에도 나는⋯⋯."

침묵하던 슈가 입을 뗐다.

"오만방자하고 건조한 사람이었나?"

지금도 슈 자신이 온화한 성정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저 하나의 개인인 데에 반해 과거의 그는 미카의 말대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국가대표였다. 그런데도 저런 눈을 하고 저런 태도로 일관한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미카는 말했다.

또다시 링크 위에서 발을 맞춘다.

다행히 슈는 금방 감을 잡았다.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미카는 생각했다. 다만 점프할 때 축이 흔들려 랜딩이 불안정해, 그는 수백 번을 뛰었다 랜딩하길 반복했다. 놀라울 정도로 단조로운 반복의 연속이었다.

미카가 뛸 수 있는 점프는 무척 제한적이었다. 그가 고등학생 때 빙질이 좋지 않은 곳에서 배웠고, 그마저도 전문적인 트레이닝이 아니었다는 걸 감안해야 괜찮은 수준인 정도.

당연히 미카의 부담은 배로 늘었다. 전직 국가대표 선수의 눈앞에서 단둘이— 심지어는 익숙하지도 않은 고통을 이겨내면서 점프를 익힌다니, 솔직히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줄 달린 인형처럼 그의 스텝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넘어지는 걸 겁내지 마."

몸은 학습한다.

차갑고 딱딱한 빙판 위에서 안 그래도 얇은 옷차림에, 스핀 탓에 추진력까지 더해진 채로 내려꽂히는 건 상상도 못 할 아픔을 동반했다. 더군다나 마른 체형이라 넘어질 때면 뼈가 부딪히는 느낌이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내 고통에는 무뎌서 괘안타, 끄떡없데이."

넘어질 때면 다시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미카가 넘어지면 슈는 그의 바로 앞에 와서 섰다. 그가 고개를 들기까지 기다렸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제야 손을 뻗어 일으켜 주었다.

"삐걱거릴 거라면 차라리 느낌을 살려. 그러지 않는 이상 추하기만 하다는 거다."

당장 스핀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연기까지 하라니, 미카에게는 너무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는 슈만큼 유연하지도 않았으며 천재도 아니었다. 본인도 자신과 신장이 비슷한 시절의 슈를 모방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잡아."

그와 같은 빙판 위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멈출 수 없다.

미카는 그와 함께 활주할 때가 가장 좋았다. 슈는 그가 자신의 속도에 맞출 수 있게끔 서로를 잡고 활주하는 데에 집중했는데, 미카가 그의 팔꿈치 안쪽을 잡고 팔을 위아래로 겹치면 그는 미카의 팔꿈치를 쥐었다. 그렇게 링크장을 누빌 때면 언제나 슈가 활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미카는 활주 방향과 등을 진 슈를 마주 보았다.

슈는 제 활주로를 보지 않아도 링크장의 코너에서 방향을 꺾을 수 있었다. 별거 없이 몸만 조금 기울여도 금방 활주 방향이 바뀌었다. 그걸 눈앞에서 홀린 듯 보는 미카는 완전히 자기 몸을 그에게 맡긴 모양새라, 슈는 가끔 혼자서 해 보라는 듯 손을 놓기도 했다.

링크 위를 누비거나 과거 쇼트나 프리에 사용했던 음악을 들으면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현역 시절의 기억들이 희미하게라도 차근차근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와 같은 열정은 되찾지 못했으나 감각은 되찾고 있다.

"이츠키 씨, 이때 왜 아파했는지 기억나나?"

동경하던 존재가 눈앞에 있어서 좋은 점은, 그가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부가적인 설명이 없던 장면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 성장통."

아아. 미카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니어 이후 슈는 키가 기하급수적으로 자랐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여름에 나온 그 다큐멘터리에서 빙판에 앉아 고통스러워하던 이유가 부상이 아니라 성장통이었다니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고 생각하며 미카는 화면에 집중한 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장통 때문에 잠을 많이 못 잤던 기억이 나."

언제나 소년 모습의 선수일 것 같던 그가 하루하루 키가 너무나 많이 커 중계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어느새 코치의 키마저 추월해 버린 그를 보며 '놀라울 만큼 성장했네요'라고 중의적인 감탄을 했던 외국의 한 해설자가. 그래서 저렇게 예민했나? 미카는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 특히나 — 지역은 강한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오니 가급적 외출을 피하시고, 우산을 꼭 챙기시길 바랍니다. 산사태 위험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셔야겠습니다⋯⋯.

아침에 나츠미가 틀어 둔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일기예보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함께 빙상장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를 응시하다 고개를 내려 눈을 마주쳤다. 미카가 제 가방을 뒤적였다.

"이츠키 씨, 우산 없제?"

슈는 제 앞에 내밀어진 남색 우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남고생이 쓸 것 같은 우산이라는 생각을 하며 받아들었다.

"너는 맞고 갈 생각인가?"

"내는 감기 잘 안 걸려가, 쪼금은 맞아두 괘안타. 이츠키 씨는 건강두 챙겨야 하니께 쓰고 가래이."

그가 별안간 얼굴을 찡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익히 나오던 표정에 미카가 흠칫 놀라 그를 보았다. 슈는 미카에게 네 집까진 도보로 얼마나 걸리냐고 질문을 던졌다. 20분에서 30분 정도라고 답한 그의 얼굴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이쪽이 가까워."

미카는 끌어당겨진 힘에 놀라 그에게 맥없이 끌려가 우산 아래에 나란히 섰다. 예상은 했지만 보기보다 힘이⋯⋯ 세다. 심장이 두근거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산을 쥐고 빗속을 걸어가는 그가 뭔가 낯설었다.

빗물의 비릿한 냄새도 좋았다. 저만치 도로 아래 핀 강아지풀이 빗물에 잠긴 게 보였다. 하늘도 잿빛이고 공기도 흐린데 왜 이렇게 좋은지 미카 본인도 영문을 모르겠으나, 그와 함께 있으니 그저 벅차기만 했다. 주위엔 건물도 없고 산이나 논만 펼쳐져 있어 볼 것도 별로 없는데, 그는 우산을 든 채 그런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온통 그의 향기로 가득하다.

미카는 고양이라도 된 듯 책상다리를 한 채 고개를 치켜들고 천장을 향해 눈을 말똥말똥 떴다. 뭔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전통 가옥 형식이라 무척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깔린 다다미마저.

1층 화장실을 쓰고 올라오자 그는 2층 화장실에 있는 모양인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미카만 혼자 그가 쓰는 넓은 방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억수로 넓네⋯⋯ 가 미카의 짧은 감상이었다. 슈의 생활이 묻어난 방은 확실히 아니었다. 2층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나 가구는 거의 없고, 이불만 펴고 정리하길 반복했을 듯한 방.

밤에 우는 풀벌레 소리가 무척 잘 들리는 방이라는 걸 제외하면 그다지 특색은 없었다. 미카가 기대한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불 깔아 둘까⋯⋯ 근데 한 방에서 같이 자는 건가? 그럼 이불 간격은 어느 정도가 좋지?

그런 잡생각에 갇혀 턱을 어루만지며 음 소리를 내던 미카는 그의 이불이라도 펴 놓자는 생각에 벽장을 열었다.

"아."

발등 위로 떨어진 가벼운 상자에 미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 같은데⋯⋯. 화내면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자 미카는 안절부절못하며 저걸 도로 넣을지 어쩔지 고민에 빠졌다.

역시 제자리에 도로 넣자. 미카는 상자를 들어 벽장 안에 다시 넣었다. 생각해 보니 슈의 물건이 아니라 집주인이라는 의사의 물건 같았다. 잘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미카가 벽장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뭘 하는 거지?"

미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자기 방금 씻고 나온 향기가 뒤에서 훅 끼치자 미카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민 슈가 보였다. 상황을 파악하자 얼굴이 끝까지 새빨개진 미카가 급히 변명했다.

"이불 꺼내려다, 뭘 실수로⋯⋯."

허둥지둥하는 미카를 본 그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그의 손이 벽장 손잡이에 걸려져 있는 걸 보고는 벽장을 열었냐고 물었다. 미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타, 내 허락두 없이 열었제⋯⋯."

"아니, 딱히 허락 없이 열어도 된다만."

"안에 있던 상자를 실수로 떨어뜨려가, 괘안나? 이츠키 씨 물건이믄⋯⋯."

"상자?"

몸을 일으키다 말고 그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나빠서 찌푸리는 게 아니라 그 상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벽장을 열자 바로 보이는 상자가 있었다. 그걸 본 슈는 아 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본가에서 보낸 건데, 열어 보진 않았어."

본가. 미카가 눈을 크게 뜨고 상자를 바라보았다.

"주치의가 열어 보지 말라더군⋯⋯ 이유는 모르겠다만."

그렇다면 저 안에는⋯⋯.

"열어 볼까."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미카는 위험을 감지하고는 그가 열지 못하게 상자 위에 손을 급히 얹었다.

"주, 주치의 씨가 그랬으믄 다시 넣어야겠구마."

"그때는 입원 중이었으니까, 지금은 괜찮다는 거다."

"아이다, 또 아파 버리믄⋯⋯."

상자를 들고 버티는 미카를 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한 슈가 살짝 당기던 팔을 놓자, 상자의 뚜껑이 별안간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용물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미카는 화들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진 내용물들을 보았다.

"이건⋯⋯."

뾰루퉁한 표정에 발그레한 뺨, 인형 같은 외모.

슈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미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노비스 시절조차 아니던— 거의 유아기의 모습.

혹여 슈의 나쁜 기억을 들쑤실 게 들어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미카는 눈을 반짝이며 그의 어릴 적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슈는 별것 없었다며 콧방귀를 뀌면서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 함께 들여다보았다. 미카는 무척 신나 보였다.

"엣, 이건 뭘 물고 있는 기가?"

"⋯⋯."

내가 어떻게 알아.

슈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미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어릴 적부터 상당히 신경질적인 아기였던 건지, 아기 시절의 사진들은 대부분이 짜증스러워 보였다. 미카는 그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은 데 반해 슈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손에서 사진을 뺏으면서도 어릴 적의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점차 성장해 가는 슈는 두 뺨에 젖살을 문 채 키가 커 갔다. 어릴 때도 엄청 새침한 표정이었지만 보기보다 울보였는지 울거나, 운 이후의 사진도 제법 많았다. 슈는 내가 진정 이랬느냐는 표정이었다.

"이래서 정신 건강에 해로울까 열지 말라 했던 건가."

"내는 귀여워가 좋데이. 뭔가 새롭구마~."

이런 거 팬카페에 올리면 다들 무진장 좋아할 끼라⋯⋯라는 말은 목구멍 뒤로 꾹 삼켰다. 복귀하면 분명 팬카페가 난리 날 텐데, 저런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 따위 좋아할 것 같지 않다.

"엣, 이건 노비스 시절 사진이가?"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미카는 그의 무대 의상만 보고도 이때 썼던 음악의 제목이라던가, 트리플이 더블로 판정된 점프라던가— 쉼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슈는 그를 이제 거의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을 탁탁 넘기며 얘기하자 슈는 못 말리겠다는 듯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중간중간 기억이 나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이때 빙판을 짚었던 것 같은데."

"맞데이, 나중에 보호대를 차고 나와가 억수로 걱정했구마."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는 것 같았다. 미카는 신이 나서 조잘조잘 이야기했고, 슈는 그런 그에게 맞추어 손가락으로 사진을 하나씩 짚어 가며 기억을 더듬어 갔다.

"그리고⋯⋯."

주니어 데뷔 직전까지의 사진. 미카는 별 망설임 없이 그 사진을 뒤로 넘겼다.

미카가 눈을 점차 커다랗게 떴다.

가족사진이었다.

"왜 그러지?"

미카가 방금 넘긴 사진을 손에 쥐고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이내 미카의 표정을 보고는 그의 손에 있는 사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느낌은 다소 다르지만 형이랑 많이 닮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슈의 형과 슈 본인.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별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가족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카가 상상한 드라마틱한 반응 따윈 없었다.

"계속 보고 있을 생각인가?"

"아, 아니데이."

급히 사진을 다른 것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며 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제대로 못 본 건지⋯⋯.

그 뒤로는 사진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미카는 말수가 줄었다. 슈 또한 생각에 잠긴 건지 제 어릴 적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몇 번 들추고 뒤적이며 입을 다물었다.

다문 입은 서로 다른 말을 뱉었다.

풀벌레의 수다는 밤을 지새울 모양이었다.

06

돌아올 봄

슈의 발목에는 붉은 자국이 있었다. 발목을 감싼 족쇄 같은 모양새로, 어린 살이 단단한 스케이트화에 짓눌려 생긴 흉터 같은 거였다.

족쇄.

그럴 리 없다. 과거의 자신은 이유 모르게 제 발로 덫 안에 들어갔다.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내, 내도 같이?"

미카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슈의 손이 그의 턱에 닿아 입을 다물렸다.

"칠칠찮은 반응이군.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내캉 같이 해두 괘안나? 이츠키 씨 복귀 무대에."

"너는 초반 부분만 이끌어주다 들어가면 된다는 거다."

아니, 말이 안 되는데. 미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내는 피겨를 잘하는 것두 아니고, 이츠키 씨캉 같이 할 만한 사람두 아니구마⋯⋯."

"이 안무는⋯⋯."

그는 미카를 내려다보다 갑자기 말을 돌렸다.

"⋯⋯ 여하튼, 하지 않을 건가?"

"⋯⋯."

"쉬이 결정할 게 아니니 시간은 주겠다만, 너도 복귀하기 좋은 기회야."

복귀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러 방면으로 뛰던 심장이 급속도로 느려지는 것 같았다. 슈 본인은 모르겠지만 자신이 슈와 일종의 계약 관계라는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미카와 자신이 알던 사이이고, 미카 또한 과거에 선수나 엇비슷한 직종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

미카는 말없이 빙판 위에 올랐다. 결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 거절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나를 몰라.

그의 손을 잡는 것도 익숙해졌다. 빙판 위에서 함께 활주하는 것도,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것도. 그의 팔에 손을 얹고 혈류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는 마음도.

"괜찮아."

어김없이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와중 슈가 말했다. 그는 미카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로 반대 방향을 마주 보며 팔만 맞닿은 채 서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 왔다.

"⋯⋯ 원한다고 말해도."

음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미카는 슈의 활주 방향으로 함께 나아갔다. 그가 슈를 잡고 이끌었다. 슈는 기꺼이 이끌려 주는 것처럼 미카를 바라보며 함께 빙판 위를 미끄러졌다.

이나바우어를 할 땐 허리를 받쳐 주고, 스핀을 돌 땐 손을 잡아 새를 날려 보내듯 함께 움직였다. 미카 자신도 놀라울 만큼의 발전이었다.

빙판의 얼음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후렴이 끝나면 미카는 무대에서 빠졌다. 두 번째 후렴, 그리고 그 후까지는 모두 슈 혼자 빛나야 했다.

펜스를 잡은 미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속죄는 미루어 두기로 했다.

아름답게 몸을 꺾고 손을 뻗으며 돌던 그가 물 흐르듯 링크장의 중앙에 섰다. 노래가 끝나도 계속되던 피아노 선율이 그가 중앙 부근에 날을 딛는 순간 딱 끝이 났다.

마지막 순간의 동작은 정하지 못한 건가. 미카는 제게 등을 진 그를 바라보았다. 날개뼈가 저렇게 예쁜 사람은 그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빙상장을 나오며 미카는 그에게 최고의 아이스 쇼가 될 거라며 이야기했다. 날것의 무대는 점차 뼈대를 잡아 갔다. 슈는 당연한 이야기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인자 해 지니까는 약간 쌀쌀하구마⋯⋯ 이래 추운데 혼자 걸어갈 수 있긌나?"

"쓸데없는 걱정 말고 가도록 해, 피겨 선수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군."

그러네. 미카는 살짝 웃었다. 이제 자신을 피겨 선수라고 칭하는 말이 괜히 좋아 방긋거리는 그를 보며 슈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그 안무는⋯⋯."

미카가 되묻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있어야 완성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슈가 미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표정으로 말할 게 맞나 싶을 만큼 뭔가⋯⋯ 포부에 가득 찬 얼굴이었으나, 미카의 반응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안 가 그냥 알아두라는 이야기였다며 얼버무리고는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미카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슈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너무나 뛰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 도메인, 실시간 검색어와 온갖 커뮤니티들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잠적한 지 거의 2년째가 되어 가던 이츠키 슈의 복귀였다.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남자 피겨 싱글이 아이스 쇼 단독 특별 공연으로 복귀한다니, 당연히 세간이 떠들썩할 만도 했다.

근 2년 간 슈는 사실상 은퇴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20대에 접어들었으며 이미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피겨 선수로서 충분히 성공했고, 공황과 경미한 대인기피증도 앓았으니 비공식적 은퇴 후 본인의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무척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랬던 그의 복귀라니, 일본 전역이 떠들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목격담이나 사진 하나조차 올라오지 않아 이민 설까지 나오던 와중 갑자기 대중들 앞에 나온다고 하니 군중들이 한때 사랑했던 소년이 2년 간 어떻게 변했을지 다들 압도적인 관심을 보였다.

이츠키 가 사람들도 알게 되었겠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든 건 연습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다. 미카는 빙판 한가운데에서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소리를 외마디 뱉었다.

"왜 그러지?"

"응아아, 혹시 이츠키 씨네 가족분들도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해서 그런데이⋯⋯."

"알게 됐겠지."

메달을 받을 수 없는 아이스 쇼의 단독 무대. 그들은 기사를 보고 슈의 결정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일단 이거나 보도록."

"에?"

의상 도안⋯⋯.

"다 억수로 예쁘구마~ 근데, 이츠키 씨한테는 기장이 쪼매 짧지 않나?"

"내 것이 아니야. 네 거지."

"에?"

신나서 도안을 넘겨 보던 미카가 전과 같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다만, 이번 의상은 내가 직접 만들 거니까⋯⋯ 미리 만들어 두긴 해야 한다는 거다."

"이츠키 씨가 직접?"

값어치가 어마어마해 따로 전시회까지 하는 의상들인데. 미카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말했잖아. 회사에서 아무 지원도 받을 수 없다고."

아⋯⋯ 매니저가 무척 곤란해진댔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거의 경이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안들도 다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이렇게 복잡한 걸 직접 만든다니.

"내 쪼매 고민해 봐두 괘안나? 자세히 보고 싶데이."

"좋을 대로 해."

설레는 얼굴로 도안을 품에 끌어안았다. 꽃다발을 껴안고 절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의 말이면 그가 만든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그의 파트너가 되어 링크 위에 설 수 있다.

얼마나 좋을까?

안무가 정해지자 슈의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길이 정해지자 망설임 없이 질주해 가는 것만 같았다. 한껏 정교해지고 견고해진 무대였다.

기억을 잃어버린 탓일까. 묘하게 이제껏 봐 왔던 무대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슈는 저와 함께 발을 맞추어 빙판 위를 가르는 미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무척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순박한 시골 소년 같은 외모, 그리고 그런 외모에 대조되는 투박한 사투리. 슈가 단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얼굴은 그래도 제법 취향이었으나 어리바리해 보이는 행동거지를 보며 뭐 하는 사람이지 싶었다.

그러나 가장 기이했던 건 광기에 가까운 신뢰였다.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을 믿고 있지 못하는 그의 앞에 나타나 손을 잡았다.

네가 뭘 아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의 믿음이 눈동자 너머로 보였다. 확신이었다. 방황하던 슈는 그런 확신에 저도 모르게 압도되어 링크 위에 섰다.

평소에는 그저 조금 주의가 산만한 소년 같은— 그래, 방금처럼 저렇게 보온병을 엎지르는 행동을 한다던가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눈을 할 수 있는 걸까. 과거 자신은 그렇게 살가운 편도 아니었는데.

스케이트화를 신고 링크 위를 누비며, 그를 흔드는 불안 속 슈를 지탱해 준 건 그런 그의 믿음이었다. 미카의 확신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

피겨를 했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불행을 감당하면서까지 아이스링크 위를 고집했던 이유 따위는 잊혀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선택지는 충분했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이미 지났다고 여겨졌고, 잠적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니 사실상 은퇴라는 말까지 도는 마당이었다.

봄이 끝난 거야.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다.

피겨를 사랑했던 그때의 감정을 기억해내면 피겨를 더는 하기 어려워진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고통스러워져 무의식이 기피하는 건가 싶었던 적도 있다. 꽃이 졌다는 걸 인정하고 사랑해 마지않던 링크 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사랑했던 게 맞기는 한 건지, 그게 맞다면 왜 몸이 전부 기억해내지 못하는 건지. 답해 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인데 의식은 답해 주지 않았다. 끝없는 불안 속에 그를 남겨두었다.

그래서, 더욱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맹신하는 거야. 기억을 잃어버린 피겨 선수 하나에 목숨을 건 것처럼⋯⋯.

불안은 끝나지 않고 발목을 잡는다. 그럴 때면 미카가 제 두 손을 잡고 링크장 위에서 끌어 주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마치 걸음마처럼— 첫발을 떼는 아이처럼. 슈는 눈을 감았다.

믿어.

네가 나를,

내가 너를.

공중으로 날아올랐던 날이 정빙된 빙판 위로 부드럽게 내리꽂혀 스핀을 돌았다.

뛸 수 있었다.

빙판 위로 도로 내려온 그를 미카가 다시 잡았다. 안무는 내내 공중이나 빙판 위로 앞질러 간 그를 미카가 잡아 주거나 밑에서 보좌하는 식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스치는 찬바람과 링크 위를 누비는 안무 탓에 상기되어 발그레해진 두 뺨과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닿은 손, 차가워진 스케이트 날이— 빛나는 은반 위 앞에 있는 서로가.

- 밤길 조심하래이, 이츠키 씨.

다 큰 남자한테 밤길은 무슨⋯⋯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뒤를 몇 번 돌아보았다.

분명 과거의 자신은 밤길이 위험했으리라. 그러나 이젠 이츠키 슈라는 사람을 기억하긴 할까 싶었다. 2년 간 기다리던 사람들도 실망했을 테고, 그때와 같지 않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는지도 모르겠다.

휴대폰이라던가⋯⋯ 없으니까 알 수 없어. 슈는 괜히 빈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 보길 반복했다.

하도 걸어 익숙한 길이었다. 길가에 핀 풀의 이름과 어느 정도 가야 도로가 패여 웅덩이가 생기는지도 전부 외울 만큼 자주 다녔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움직이지도 않던 시절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작은 생각들을 하며 도착한 슈는 평소 보이지 않던 차 하나가 주차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척 봐도 값져 보이는 깔끔하고 좋은 차였다. 이런 시골에는 절대로 없을 법한 차. 보통은 다들 트랙터 혹은 4륜 트럭 정도나 타고 다녔으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 주치의의 신발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주치의가 자주 신던 검은 수제화 대신, 무척 날렵해 보이는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자 발에나 겨우 들어갈 만큼 얇았다.

슈는 반복되는 이상한 느낌에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용하지 않는 1층의 불이 켜져 있다.

"⋯⋯."

"⋯⋯."

저 사람은⋯⋯

"⋯⋯ 어머니."

검은 목폴라 위에 입은 웜업 재킷. 누가 봐도 자신은 방금 빙상장에 다녀온 모습이었다. 슈는 제 앞에 앉은 저와 닮은 얼굴의 여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 앉으렴, 긴 길 걸어왔을 텐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제 어머니를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드문드문 있었다. 몇 년째 같은 스타일을 고수 중이신가 하며, 슈는 그녀의 눈길에 못 이겨 결국 그녀 앞에 앉았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기사 봤어, 아이스 쇼로 복귀한다는 거."

슈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본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두 모자는 흔들림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런 날 선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창문 밖 밤에 잠긴 시골은 평화롭기만 했다. 연신 시원한 끝 여름 향이 밀려들어 왔다.

"네가 결정한 일이거니 했어. 설마 네 소속사가 우릴 상대로 계약 위반을 강행했을 리도 없고."

"⋯⋯."

"슈, 기억이 돌아온 거니?"

투명한 네일을 바른 가지런한 손톱. 슈는 탁자에 올려진 제 손을 꼭 쥔 그녀의 새하얀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상외로 제 어머니는 너무나⋯⋯ 슬픈 표정이었다.

"기억해내서 다시 돌아가려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그냥 본가로 돌아와도 충분해."

무슨 소리야. 슈의 눈가가 꿈틀거렸으나 그녀는 슈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뭔가 말하길 계속했다.

왜 저러는 걸까. 슈는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도, 반대로 잡아 주지도 못한 채 바라보았다. 낯설었다. 지워진 기억 속에도 없는 감각과 감촉이었다. 손을 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은 모순적이고 이상한⋯⋯ 무언가.

처음 슈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을 때 가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 과 동시에 보이는 복합적인 감정의 파도가. 처음엔 제법 불쾌했다. 저 자신 빼고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력한 자신에게, 그리고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그들에게 화가 났다. 저를 보는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동정이 치가 떨리게 불쾌해 결국 부모를 마주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치다시피 요양을 간다고 했을 때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왜.

탁자 위로 뭔가 떨어졌다. 눈물 같았다. 슈는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숙인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슈는 탁자 위를 둘러보다⋯⋯ 어머니의 옆에 놓인 뚜껑 열린 상자를 보았다.

슈의 눈동자가 점차 커졌다.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새하얀 스케이트화다.

숨소리가 점차 귀를 울렸다. 두려워서 피하고 있던 걸 마주한 건지, 온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그 자리를 떠나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단박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전문 선수가 신는 스케이트화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노비스 선수 정도나 신을 법한 청소년용⋯⋯.

1층 거실 속, 낯선 물건과 어머니에게 둘러싸인 채 차가운 늦여름 공기를 숨 쉬었다. 저 위에 걸린 벽시계에서 연신 똑딱똑딱 소리가 났다. 익숙한 손에 들린 가족사진 속 누군가가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게 뭔지 알고 있었다. 손톱이 어딘가를 거칠게 긁어대는 날카로운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 형의 스케이트화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슈를 부르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슈는 그 집을 박차고 나왔다. 속이 울렁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슈.

우리가 어린 너를 혼자 뒀어.

낯설은 동시에 낯익어 기분이 이상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울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저도 모르게 커다란 숨을 토해냈다.

얼마나 빨리 달려야 이 소리가 멎을까.

늦게 찾아와서 미안타, 그래도 꼭 지금 말해야 할 것 같아가⋯⋯ 아니야. 역시 좀 무례해 보여.

미카는 의상 도안을 손에 쥔 채 밤길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서 작게 흥얼거렸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활기찬 나츠미의 아래에서 자라다 보니 저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집을 청소하면서도 계속 그의 생각을 했다.

도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평소 제 신체적 특징이나 분위기 등을 잘 살피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났다. 제대로 몸의 치수를 재어 본 적이 없어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임시로 적어 놓은 치수도 대부분이 맞아떨어져서, 미카는 혼자 대단하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슈와 함께 무대에 설지 아니면 그저 동행하기만 할지는 여전히 정하지 못했다.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 그리고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악감과 동시에 자신을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안무와 고독해 보이던 어린 슈가 머릿속에서 계속 맞부딪혔다.

그래도 만약 무대에 선다면 이 의상으로 하고 싶다.

작고 검은 깃털이 몇 개 장식된 블랙 컬러의 의상으로, 비즈 몇 개가 달린 걸 제외하면 무척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걸 골랐다. 아무리 그래도 슈의 복귀 무대이니 제가 초기 후렴 때 동행한다 한들 그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의 의상은 그와 반대로 새하얀 색의 의상이었다. 심플한 자수가 놓여 있고, 프릴을 조금 장식했다는 걸 제외하면 동시에 제법 심플해 보이는 의상. 아이스 쇼라서 그런지 프릴이 좀 더 하늘거리는 재질인 것 같았다.

만약 무대에 선다면 부디 그의 그림자처럼 보일 수 있길.

그의 집이 저만치에서 보이기 시작하자, 미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짓누르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고 있으면 어쩌지. 밤늦게 너무 실례일까? 현관문 즈음에 다다라서야 미카는 고개를 들었다.

"⋯⋯ 어?"

문이 열려 있다.

"이츠키 씨?"

신발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늦게 밤 산책이라도 나간 건가 싶어 미카는 작게 실례합니다 중얼거리고는 운동화를 벗어 조심스레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즈음에 다달라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집이 완전히 비어 있었다.

게다가 1층은 원래 안 쓴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 방문이 왜 열려 있지. 미카는 그리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노란 빛을 내는 등 하나가 켜져 있었다. 식탁 주위로 의자가 네 개나 들어가 있었는데, 그중 마주 본 의자 두 개는 방금 누군가 앉아 있던 것처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츠키 씨, 여 있나?"

없어. 이쪽도 인기척이 없었다. 순간 미카의 머릿속에 시골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근데⋯⋯ 여긴 너무 외졌는데. 아니야, 오히려 외졌으니까 더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원래 그는 엄청난 유명인이었고⋯⋯.

사생의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싶어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건가 했다. 의자 하나는 바닥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방 안을 조심스레 둘러보던 미카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벽장 안에 있던 그 상자랑 같은 제품 같았다.

"이건⋯⋯."

스케이트화인데?

예쁘다. 척 봐도 고급품이었다. 근데 세월을 좀 탄 건지, 가죽이 조금 오래돼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딱딱하기도 하고. 조심스레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슈가 노비스 시절에 탔던 건가 해서 유심히 뜯어보았지만 역시 알 길은 없었다.

아래에는 웬 카드 하나가 꽂혀 있었다. 11월 20일에 떠난 가여운 영혼을 추모하는 글.

그렇다면 형의 스케이트화이려나.

영원히 시간이 멈춘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이었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스케이트화를 무척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의 형도 스케이트를 탔었나 보다.

슈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무척 부유한 집안이며, 그렇기 때문에 슈가 금전적으로 어떠한 문제도 없이 피겨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수많은 루머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는 그 본인만 알 터였다.

형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있을지 몰라도, 알려진 정보는 단 하나도 없어 미카는 그의 형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슈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부모에게 감사하다던가, 가족이 보고 싶다던가 하는⋯⋯ 특히나 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 왔다. 부엌 싱크대 위 작은 창문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미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안에 들린 카드를 내려다보며 다시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뜯어 읽기 시작했다.

11월 20일에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조의문 문구 같았다. 소수의 사람에게만 전달한 걸까? 슈가 형제상을 당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뉴스에서도, 하다못해 그의 악질스런 팬덤에서조차 돌아다니지 않았던 이야기.

근데 어쩐지 낯이 익은 날짜다.

- 쇼트 프로그램에서 2위를 거머쥔 이츠키 슈 선수가 우승을 향해 발돋움합니다.

왜인지 속으로 두어 번씩 곱씹은 적이 있는 11월 20일.

- 그가 오늘 프리를 위해 선정한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제 1악장입니다. 

쇼트를 끝낸 그의 프리가 있던 날—

처음 만났다.

그랑프리 4차, 삿포로에서.

밤바람 소리가 거세졌다. 바람이 풀잎 새를 지나가며 간지러운 소리를 연신 내자 그에 질세라 풀벌레들이 울었다. 그 고요한 소란 속에 미카가 있었다. 두 눈이 커졌다.

돌아오길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탁자 위에 떨어진 카드를 어떻게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미카는 집을 뛰쳐나갔다.

집 뒤에 작은 산이 있었다. 산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나무가 우거져 커다란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미카는 직감적으로 슈가 그곳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리로 뛰었다.

그는 형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가엾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가가 젖어 들자 손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그리고 또다시 뛰었다. 밤하늘이 오묘한 색을 내며 한밤중의 숲을 비추었다. 어디에 있는 거야. 다리가 쉴 새 없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으나 미카는 다시 일어났다.

묻고 싶었던 순간이 여럿 있었어.

왜 그날 펜스에 눌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던 한낱 남학생을 향해 다가와 줬던 건지. 기억을 잃어버렸으니 대답해 줄 수 없는 걸 알아 일부러 묻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으나 중심을 잡았다. 이제 보니 신발과 바지가 흙투성이다.

지나칠 수 없었구나.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만 기억한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바랜 기억은 더러 그러곤 한다. 미카가 기억하는 그날의 슈는 그저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이후 그가 쇼트와 프리에서 얻은 점수로 1위를 거머쥐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그가 더욱 대단해 보였다.

뒤에서는 계속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선수들이 나가는 복도 위에는 밝은 조명들이 빛나고 있어서 그런지 후광이 비추어 보이는 것 같은 왜곡된 기억 또한 존재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내버리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때 슈의 표정은 살피지 못했다. 그저 그 순간이 너무나 꿈만 같아 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눈 아래가 어두운지, 표정이 슬퍼 보이는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기억상실 환자와 다를 바가 없다.

결국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잖아.

나머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저만치에 드디어 찾던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자 안심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쪼그라들었다가 팽창하길 반복했다.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이츠키 씨."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자.

감기 걸려.

춥지 않아?

하고 싶은 말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더 깊은 말들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순간 슈의 기억이 모두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이름 외에는 소리 내 외칠 수 있는 게 없었다.

"⋯⋯."

슈가 미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생각한 것만큼 많이 무너진 표정은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묻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으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상처받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본인은 모를 터였다.

"⋯⋯ 알고 있었나?"

미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더 말하려던 것 같던 슈는 이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사람처럼 작게 우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피겨를 했던 이유가⋯⋯."

아니야.

눈 아래가 어두워 보였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어 미카는 그 자리에서 손을 뻗다 내리길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슈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 가지 못했어."

기억은 여전히 전부 돌아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냥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는 건가 싶을 만큼⋯⋯ 그러나 드문드문 기억나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다. 저와 꽤 닮아 있으면서도 느낌은 제법 다른 소년이.

병실 위, 집 안과 침대 위를 반복해서 드나드는 그 얼굴은 다양한 표정을 했다. 가끔은 따스했고 가끔은 짓궂어 보이기도 했으며, 어느 순간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처음 빙판 위로 스케이트 날이 닿는 묵직한 소리를 들었던 건 슈 자신이 피겨를 시작했을 때가 아니었다. 저는 펜스 밖에서 바라보는 쪽이었다. 무척 어린 나이인지 눈높이가 낮았다.

얼마 안 가 짧은 기억들은 점차 흑백 빛을 띠었다. 병실이 자주 등장하다 어느 순간에는 굳어졌다. 동시에 그 사람의 얼굴도 무척 단조로운 빛을 띠며 퀭한 눈을 했다.

- 제가 할게요, 어머니.

내 목소리.

병실 안 TV에서 아름답게 피겨를 하는 슈를 누군가 바라보고 있었다. ⋯⋯ 카게히라도 없고, 나 자신도 없다. 그 사람이 구부정하게 앉아 TV 속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보라색 눈이 텅 비어 있다.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기분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도망치듯 병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 이후로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 않는다. 화면 너머로 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 기억 이후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나러 가지 않았구나.

외면하려 해도 계속 떠오르는 기억에 머리를 감싸고 앉았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쉬지 못하게 조여들었다.

젊음의 반을 바친 이유가 이제는 이곳에 없다.

어디에도.

과거의 저 자신이 안타깝고 한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몸을 혹사한 건지.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어린 나날과 그 사람, 기억마저 전부 다 잃어버렸으면서.

"이츠키 씨."

어느덧 귀에 익어 버린 목소리가 부르자, 슈가 손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내 허탄한 웃음을 작게 뱉었다.

왜 너까지 길 잃은 아이 같은 표정인지.

"이츠키 씨가 아이스링크에 섰던 건⋯⋯."

제 앞에 선 슈를 꽉 쥐었다. 그렇게 키도 크고 뼈대가 올곧은데도 막상 쥐면 얇기 그지없다.

갓 열세 살 먹은 아이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던 키 큰 소년. 그는 아이스링크 위를 누비는 동안 누구보다도 충만해 보였던 사람이었다.

피겨를, 아이스링크를, 그리고 형을—

당신의 방식대로 사랑했던 거야.

진실은 없다. 오직 과거의 슈만 알고 있던 일은 기억 속에 묻혀 사라져 버렸고, 그에 대해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여전히 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절망 속에 갇혀 있다.

그래도, 설령 그렇더라도⋯⋯.

미카가 그를 더욱 세게 쥐었다.

슈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두우니 전체적으로 검은 색소를 가진 미카의 눈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잃어도 갈피를 잡아 주는 대신 함께 주저앉아 주는 사람이었다. 가족도, 지인도 건드릴 수 없었던 부분을 저도 모르게 어루만져 주는 사람. 자신을 잡은 미카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너는 내게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마저도 기억 속에 사라져 버려 이제는 과거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을 미카에 대해 아는 정보도 무척이나 적었다. 그런데도⋯⋯.

서로를 끌어안았다. 등에 손톱을 박아 넣기라도 할 듯 간절하게.

실은, 네가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이

나의 구원일지도 몰라.

외로운 밤 두 개가 합쳐져 늦여름 속에 녹아들어 갔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07

메리골드

* 언급되는 곡과 함께 감상해 주시면 몰입에 도움이 됩니다.

"뭐? 도쿄에?"

"으응, 아는 사람 만나구 싶어가."

"네가 도쿄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나츠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전 10시에는 항상 가게에 나가 있던 그녀가 웬일로 집에 있어, 미카는 오랜 외출이 될 듯해 말하려 했건만 나츠미는 되레 기겁하며 앉혀 놓고 정확한 이유를 물었다.

"있을 수도 있지."

칫솔을 입에 문 타나카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한 채 나오자, 나츠미가 그를 째려보았다.

"⋯⋯ 미카, 요새 외출도 잦던데. 혹시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그러면 말해 줘야 해."

"아니데이, 내 인자 얼라도 아니고. 걱정치 않아두 된다."

미카가 손을 살래살래 젓자 나츠미는 그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말할 수 없다. 너무나 긴 이야기가 될 텐데, 도저히 출발 시간 전까지 말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알겠어."

웬일로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미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츠미를 바라보았다.

"몸조심해. 알지?"

고등학생도 아닌 아이에게 너무 과보호 아니냐며 타나카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그런 그의 등을 후려치는 소리를 뒤로한 미카는 얼른 2층 계단을 두 개씩 뛰어 내려갔다.

다녀오겠다고 소리친 뒤, 문을 닫았다. 조금 늦은 아침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운다.

대망의 아이스 쇼 날.

그리고⋯⋯ 마지막 날.

계약서에 명시된 날은 딱 오늘까지였다. 그리고 설령 그보다 더 길었더라도 아이스 쇼에 복귀한 그는 더 이상 이런 시골 깡촌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전문 무대에는 서지 못하더라도 피겨스케이팅의 상징 같은 존재인 만큼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다니겠지.

무엇보다 실망할 것이다. 어쩌면 크게 화낼지도 몰랐다. 원래 미카는 그저 외부인이었고, 미카가 슈를 만날 수 있던 것 모두 계약에 명시되어 있던 덕분이라는 걸 알게 되면⋯⋯ 분명 그럴 테지.

그런 생각을 하자 입 안이 썼다.

"이츠키 씨, 긴장했나?"

평소 이 정도로 과묵하진 않았는데 싶어 말을 붙였다. 슈는 시골을 벗어나며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선팅 잘 돼서 밖에선 절대 안 보일 테니까 편히 봐도 돼. 아, 카게히라 씨도요."

처음엔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나 지금은 고속도로였다. 멀미가 나나 싶어 걱정이 됐다.

"아니, 긴장 따윈 나와 어울리지 않아."

확실히 긴장한 얼굴은 아니었다. 애초에 긴장하는 편이 아닌 것도 같고.

그러면 지금 긴장되는 건 자신뿐이라는 얘기다. 미카는 손이 떨리는 걸 꾹 눌렀다. 무대에 함께 서겠다고 얘기한 것도 아닌데 긴장이 됐다. 뒤에는 두 명분의 의상이 비닐에 가지런히 포장된 채 나란히 놓여 있다.

"팬들두 오랜만에 보긌네. 그렇제?"

"그렇겠지⋯⋯ 뭐, 난 처음 같다만."

미카가 작게 웃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좌석에 앉아 있는 게 뭔가 그제야 그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약간 들뜬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아이스링크에서 맞춰 보던 날, 완전히 클린한 연기를 마친 미카에게 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무리해서 서지 않아도 돼.

그의 물품들을 정리하던 미카는 고개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슈는 장갑을 벗으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너에겐 이미 충분히 감사하고 있으니까.

배려해 주는 건가.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그를 올려다보며 미카는 작게 웃었다.

- 응.

미루어 두었던 속죄가 머지않았다.

도쿄 시내 거리에 다다를 즈음에는 이미 시간이 무척 많이 지나 있었다. 차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무척 적었고, 슈는 내내 창밖을 응시했다.

번화가에 접어들자 그제야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좀 보이기 시작했다. 가게들은 최신 유행의 옷이나 디저트, 화장품들을 광고했으며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차는 끊임없이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어."

백화점 위의 커다란 전광판이었다. 슈가 대문짝만하게 비추어지고 있는 전광판에는 그의 복귀를 축하한다는 문구가 찍혀 나오고 있었다. 아이스 쇼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생중계 채널까지 아예 가져다 박은 걸 보니 어지간한 팬들인 모양이었다.

슈는 꽤 감회가 새로웠다. 매번 미카에게만 최고다, 온 세계가 당신을 열광하고 온 국민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다 보니 제법 무뎌져 있던 건지 이렇게 체감하니 조금은 실감이 안 나는 것도 같았다. 전광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당신들이 기대하는 사람과는 다를지도 몰라.

아니, 다를 테지만⋯⋯.

차창에 팔을 걸치고 손등으로 턱을 괸 채 밖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를 보며, 난생처음 보는 도쿄의 번화가에 잔뜩 들떠 있던 미카도 말이 없어졌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길에 행인들이 줄지어 가득 찬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거, 현장 티켓 줄이가?"

"그런가 봐요~ 엄청 치열하네."

인터넷으로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현장에 줄을 서 현장에서 발급되는 입장권을 구매하고 있었다. 저번에 보니까 중고로도 엄청난 값에 팔리던데.

"사람 몰릴까 봐 일부러 밴 말고 자가용으로 가져왔어. 걱정하지 마."

팬들이 주위에 엄청나게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창문에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자 슈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나 많은 관심 속에 살았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탓이었다.

"다 도착했다. 주차장 곧 들어갈 테니까, 손으로 챙길 건 챙겨. 나머지는 스태프들이 옮길게."

매니저의 말을 들은 미카가 분주하게 물건들을 챙겼다. 물병, 이어폰, 핫팩이랑⋯⋯. 맞다, 의상은 어쩌지?

"의상팀이 들고 갈 거니까 걱정 않으셔도 돼요. 이 정도 지원은 당연히 가능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랑은 연락이 된 걸까. 순간 차체가 기울어지며 차가 지하 주차장에 진입했다.

다행히 지하 주차장에는 기자나 팬들이 없어 슈는 비교적 수월하게 내릴 수 있었다. 아직은 전부 낯설기만 한데, 제게 익숙한 단 한 명의 사람은 이 모든 게 무척 낯익어 보인다.

"이츠키 씨, 웜업 재킷 입으래이."

"정빙은 언제쯤 하려나. 길게 타 보지 않아도 되지? 리허설은 사정상 못 했으니까, 가볍게 빙질 적응만 하자."

"카게히라, 너도."

매니저의 말이 끝나자마자 슈가 미카를 돌아보았다. 미카가 품에 생수병을 안은 채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빙질에 적응은 해 두라는 것이야. 네가 무대에 설지 안 설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렇구나. 이렇게 짐을 드는 입장이 아니라⋯⋯.

심장이 쿵쿵 뛰어 뺨을 붉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슈는 앞으로 나아갔다. 커다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넓구마⋯⋯."

"카게히라, 칠칠찮게 멍때리지 말고 이리로 와."

입장 전의 빙상장. 스태프들은 커다란 스피커로 바쁘게 대화를 했고, 여러 색의 조명들이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아이스 쇼이지만 엄연히 다음 행사도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복잡해 보였다. 그러나 넓은 빙상장은 정빙 기계가 지나간 이후로는 미카와 슈밖에 없었다.

둘은 소음 속에서도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넓은데 긴장되지는 않나. 실전 때 혹시라도 공황이 오는 건 아니겠지.

"잡생각이 많군. 정신 차리도록."

우앗.

나를 완전히 바라보고 있구나.

아주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귀신처럼 잡아냈다. 웜업 재킷에 목폴라와 장갑. 여느 때와 완전히 똑같은 복장인데도 조명이 덜 켜진 넓은 아이스링크 무대 위에서 보니 뭔가 달랐다.

"슬슬 어두워지는구마."

"곧 입장 시각이니까."

진짜 시작이구나. 이 커다란 아이스링크를 둘러싼 셀 수 없이 많은 좌석들이 곧 꽉꽉 찰 것이다. 거기다 그의 무대는 생중계될 예정이니 더욱⋯⋯.

서로를 잡던 손이 풀렸다. 슈는 미카보다 앞으로 나아갔고, 미카도 그의 등을 쫓는 것처럼 그 뒤를 쫓으며 활주했다.

"⋯⋯ 카게히라."

응?

미카가 그를 보았다.

"재차 말하지만 네게 무대를 강요하고 싶진 않아⋯⋯ 그건 온전히 너의 결정이니까."

살짝 멈추어 섰다. 이젠 슈도, 미카도 무척 능숙하고 부드럽게 멈출 수 있었다.

그래도, 라고 말하며 그가 뒤돌아보았다. 빙판 위 조명을 살짝만 받았을 뿐인데도 새하얀 옆선이 돋보였다.

"함께 관객들을 매혹시키자."

때늦은 청춘을 바치는 거야.

그래, 저 표정이었다.

미카의 눈이 빛났다.

확신이 스민 보라색 눈과 약간은 오만해 보이는 저 아름다운 미소를 사랑했었다.

아이스링크 위에서, 수많은 관중 아래에서.

"내 혹시 실수해가 무대를 망쳐두 괘안나?"

그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런 생각 자체가 글러먹었다며 혼을 내는 듯한 말을 했다.

"쓸데없는 걱정 따윈 그만둬. 넌 내 무대를 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 모든 무대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너는 나를 다시 걷게 했잖아."

날개 꺾인 새에게 걷는 법을 가르쳤다.

미카는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이내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살풋 내며 스케이트 날을 밀어 그에게로 나아갔다.

손을 잡았다.

또다시 발을 맞춘다.

어둠 속에서 관중들이 작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대와 그리움을 담은 사람들의 눈이 단 한 사람을 찾았다. 이내 커튼이 젖혀지고 전광판에 아이스 쇼의 문구가 뜨자, 밤하늘을 찢는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땅과 하늘을 울릴 것만 같은 소리였다. 몇몇 사람들은 아예 일어난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스 쇼 진행자의 목소리도 무척이나 감회에 젖은 듯했다.

- 은반 위 제왕의 귀환입니다. 

미카가 작게 웃었다. 은반 위 제왕이라니, 본인은 좋아할련지.

부딪쳐 오는 바람을 맞았다. 넓게 펼쳐진 관객석과 빙판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조금 더 위에 있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까마득히 넓게 펼쳐진 관객석이 꽉 차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슈는 고개를 더 높이 들었다.

미카도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장 빛날 시간이야.

조명을 받는 그를 이렇게까지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집에 가면 우선 일기를 써야겠다. 무척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적어야지. 미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꿈은 머지않아 끝날 테니까.

- Golden Hour. 

화면에 음악 제목이 떴다. 슈는 메인 화면의 양옆 전광판에 가득 찬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낯설었다. 수없이 많은 영상 속에 비추어진 모습이건만 오늘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착각이 든다.

고개를 돌려 제 앞에 선 미카를 바라보았다.

상하의가 모두 검은색에, 머리 또한 흑발이라 그는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슈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도 슈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대화를 나눈다.

피아노 선율이 먼저 흘렀다. 빛이 내는 소리 같았다.

미카가 슈의 한쪽 손을 잡아 이끌었다. 기억을 잃고 처음 빙상장 위에 올랐던 그날처럼.

조명이 두 사람을 비추어도 미카의 의상이 까매 슈가 돋보였다. 미카가 활주 방향을 등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슈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은 것처럼 보였다.

현장에서 무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온 사방이 음악으로 가득 찼다.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안무대로 그를 끌어당기자 슈는 따라와 주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네 개의 스케이트 날이 빙판 위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군중은 셀 수 없이 많고, 이 순간을 보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겠지만⋯⋯ 지금 당장은 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무대 위의 그는 빛난다는, 또 그 생각을 한다. 미카는 빙판 위인데도 저도 모르게 살풋 웃었다. 미카가 활주 방향을 등진 채 슈와 마주 보며 활주하고 있어 슈도 미카가 웃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둘을 바쁘게 쫓는 조명 탓에 옅은 메이크업을 한 그의 눈가가 조금 빛났다.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저를 잡고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며 연기를 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 일기에는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이 순간을 전부 담아내지 못할 테지만.

두 손이 서로를 꽉 맞잡았다. 활주하는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 슈의 앞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이런 얇은 의상을 입고, 빙판 위에서는 춥지 않을까 궁금했었는데 막상 타 보니 알겠다. 추운 걸 느낄 수 없을 만큼 황홀하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린다.

슈의 스핀이 끝나자 미카가 다시 그의 허리를 잡았다. 아이스링크와 관중석을 잠시 훑은 듯한 그의 시선이 다시 미카에게로 닿았다. 심장이 간지럽게 뛰었다. 욕심내어 끌어당기고 싶을 만큼.

웃는다.

그의 웃음을 본 미카가 넋을 놓아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슈는 제 허리를 잡은 그를 작게 끌어당겼다.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정말 왜인지 모르게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카는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조명이 아이스링크 위를 자유롭게 누비는 둘을 바쁘게 쫓았다. 슈가 앞질러 가 스핀이나 연기를 할 때면 간혹 미카는 조명을 받지 못해 어둠 속에 잠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주 짧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미카 또한 관중이 되었다. 슈가 아이스링크 위에 다시 서서 아름답게 몸을 뻗는 것을 보았다. 바이올린 소리가 작게 늘어지며 물 흐르는 듯한 피아노 선율이 이어졌다. 미카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았다.

봐, 사랑하잖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할 리 없어.

카멜 스핀을 아름답게 돈 그가 스핀을 마치고 링크 위로 두 발을 딛자 관중석에서 무대 중인데도 관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는 이전처럼 관중석을 날카롭게 바라보거나 하지 않았다. 조명과 맞부딪혀 오는 바람, 박수 소리 사이를 자유로운 새처럼 가로질렀다.

첫 번째 후렴, 슈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미카는 조명이 그의 스핀을 비추는 사이 링크 밖으로 나갔다. 스태프 한 명이 스케이트 날로 맨바닥을 짚은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미카는 코트 하나를 걸친 채 다시 무대를 뒤돌아보았다. 가장 가깝다. 미카가 나오는 사이 그새 곧 두 번째 후렴이었다. 두 손으로 링크와 맨바닥 사이를 구분 짓는 펜스를 쥐었다.

홀린 듯 링크 위를 부드러운 스텝으로 이리저리 누비는 그를 바라보았다. 후렴이 시작되기 직전, 미카는 해낼 수 있다고 소리치려는 것처럼 커다란 숨을 뱉었다.

이나바우어다.

스케이트 날 하나로 버티고 선 길고 섬세한 몸이 뒤로 꺾이며 황홀한 곡선을 만들었다. 또다시 관중석에서 그를 향해 박수를 쳤다.

방향, 엣지의 구분 없이 자유자재였다. 음악에 맞추어 허리를 꺾거나 몸을 돌리고 손을 뻗었다. 그의 아이스 쇼를 준비하며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기인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날것의 표정이었다. 이 순간을, 아이스링크와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연기. 갈망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금 도취되고 마는 무대였다. 미카는 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는지 알아차리자 팔을 들어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고 다시 그를 보았다.

슈는 혼자 남은 빙판과 음악을 온 몸으로 느꼈다. 관중들의 박수는 짧고 강렬했다. 이 순간이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모든 불안이 감추어져 춤추는 스케이트 날 아래에 놓였다.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그때의 감정은 기억해낼 수 없다. 기억이 이미 한 번 지워져, 과거의 일들을 또다시 겪을 수도 없어 그때와 같은 힘과 감정을 다시 끌어낼 수 없었다.

가벼운 더블 점프를 마치고 링크 위에 착지했다. 부드러운 랜딩이었다.

바이올린 선율도, 목소리도 끝나고 피아노 선율만이 남아 음악의 막바지를 장식했다. 슈는 그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마지막으로 아이스링크 위를 부드럽게 활주했다.

아이스 쇼가 끝난다.

봄은 끝나지 않았다.

슈의 스케이트 날이 아이스링크의 중앙에 닿자, 그는 고개를 아주 살짝 숙이고 두 손을 기도하듯 모은 뒤 이마에 댔다. 그러자 그의 등에 드러난 뼈가 몸을 감싼 날개처럼 아름답게 휘었다. 음악은 그와 동시에 끊겼다.

그 순간이었다.

금색 꽃이 쏟아져 내렸다. 환각이 아니었다. 환호성과 함께 빙판 위로 내려오는 메리골드의 향연이었다. 관객들이 그를 향해 꽃다발을 연신 날려 보냈다. 그 모든 영광 속에 슈가 있었다. 슈는 이마에서 기도하듯 모은 손을 떼지 않은 채 살짝 웃었다. 슬퍼 보이기도 하나, 모든 걸 날려 보내듯 자유로운 미소를. 눈가가 살짝 젖은 것도 같다.

과거의 자신이 아이스링크의 반대편에서 춤추고 있는 것 같았다. 전성기 시절의 아름다운 몸과 기술을 가지고.

나는 두 번 다시 그런 마음으로 임할 수 없겠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대를 마친 슈의 얼굴이 전광판에 가득 담겼다. 그 시선은 관중들을, 방송으로 이 무대를 보고 있을 사람들을— 그리고, 그리운 누군가를 향했다. 환호성은 한층 더 커졌다. 메리골드와 함성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이 순간을 사랑해.

변함없이.

제왕의 귀환을 축하하는 이들은 눈물과 함께 꽃을 던졌다. 변하지 않은 사랑의 증표처럼.

성공적인 무대였다.

그의 인기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아이스 쇼가 끝난 이후 갈라쇼에는 참가하지 않은 채 모든 행사를 감상한 뒤 나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카는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싶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다시 이런 것들이 일상이 되겠지.

사람들 사이에서 수많은 관심을 받고, 부담스러운 카메라들이 따라다니는 탓에 가끔은 이전처럼 화를 내기도 하고. 그러나 다시 무대에 서서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선수를 은퇴하더라도 어쩌면 제자를 키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심 욕심이 나기도 했다.

나만 내 자리로 돌아가면 되는구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미카와 슈를 둘러쌌다. 어지러울 정도였으나, 슈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러 말들과 소리가 뒤죽박죽 섞여 들렸다. 사인해 달라는 말, 사진을 찍어 달라는 말⋯⋯ 선물을 받아 달라는 말까지.

그러나 어지럽지 않았다. 이런 난잡한 팬서비스는 공황을 접어둬도 딱 질색이지만, 오늘은 왠지 이래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슈는 펜을 들어 기꺼이 그들에게 사인해 주었다.

이 모든 영광을 나눌 사람이 곁에 있었다.

미카는 팬들처럼 그들 사이에 섞인 채 파트너처럼 옆에 서 슈를 바라보고 있었다. 슈는 그런 그의 존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을 본 미카는 입에서 쓴맛이 나는 것 같아 저도 모르는 새에 아주 작게 일그러지듯 웃었다. 이제 당신을 다시 TV 화면을 통해 보겠지. 대화는 끊기고, 일방적인 그의 이야기만을 듣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 비디오테이프를 수집할지도 모르고, MP3에 당신을 담아 들을지도 모르고.

"이츠키 씨."

사인을 받고 나자 사람들은 그의 사진을 찍거나,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슈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미카의 두 색 다른 눈을 찾았다.

"카게히라, 더 가까이 와. 그러지 않다간 밀려서⋯⋯."

더 멀어진다.

슈가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어딜 가는 거야?

"내는 이츠키 씨 원래 아는 사람도 아이고, 그냥 그 마을 살았던 사람이구마."

슈가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귀에서 모든 커다란 소음들이 사라지고 미카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속여가 미안타, 실망했제⋯⋯."

왜 그렇게 웃어? 슈는 미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 어딜 가는⋯⋯."

닿지 않았다. 미카는 그림자라도 된다는 듯 밀려오는 군중들 새에서 점점 뒤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쏟아지는 건지, 미카가 뒤로 움직이는 건지 알 수도 없었다.

"카게히라!"

펼쳐진 손이 수많은 관중들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그러나 그들은 슈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 따윈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왜 저런 얼굴일까? 미카는 발을 멈추었다. 한 발짝만 뒤로 가도 밀려드는 관중 탓에 그와 몇 미터는 멀어지는 것 같았다. 화가 난 얼굴도 아니고, 심하게 충격받은 듯한 얼굴도 아니다.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다시 피겨를 할 수 있고, 기억도 많이 돌아왔다. 게다가 이제는 복귀해 계약의 제약도 받지 않게 되니 더 전문적인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상태는 차차 나아질 터였다. 미카의 쓸모는 여기서 다한 거였다.

다시 멀어졌다. 몇 발짝 뒤로 더 가자 그가 보이지 않았고, 그보다 더 가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들어가는 건 질식할 만큼 어려운데 나오는 건 생각보다 무척 쉬웠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미카는 건물 밖으로 나와 숨을 크게 뱉었다.

이거면 된 거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으나 꾹꾹 눌러 담으며 이거면 된 거라고 세뇌하듯 되뇌었다.

잊지 못할 거야.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입에 물었던 들풀의 쌉싸름함을, 아이스링크 위로 부딪히는 스케이트 날의 소리를, 쥐었던 허리의 감촉과 얇은 옷 위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날개뼈를.

조금 더 바쁘게 달렸다.

그는 따라오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미카, 화분에 물 좀 주고 들어올래?"

"아, 알았데이."

카운터에서 바쁘게 뭔갈 계산하던 미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숫자 갖고 하는 일은 잘 안 맞는 모양이라며 나츠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여기, 이것 좀 받아."

지나가는 길에 타나카가 품에 얹어 준 상자 때문에 미카가 살짝 비틀거리자, 나츠미가 뭐라고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가게에 틀어진 음악이 커서 손님들에게는 잘 안 들릴 듯했다.

나츠미의 가게는 작은 시골을 벗어나, 수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 개업을 했다.

주위에는 아파트 단지와 기차역, 공원과 학교가 있었다. 처음에는 기차가 지나가기만 해도 신기해서 입을 벌리고 있던 게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지나갈 때쯤이 되면 학생들이 하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햇살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새파란 색의 간판과 새하얀 가게 앞에는 수많은 화분들이 있었다. 작은 입간판에는 여러 메뉴가 적혀 있어, 매일 아침마다 나츠미가 고쳐 쓰곤 했다.

잘생긴 알바생이라며 옆 학교에 소문이 나 처음 가게를 옮겼을 땐 약간 고역도 겪었으나 여차저차 잘 적응해 이제는 옆 가게 사장님도 가끔 놀러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놀러 온 그는 미카에게 인사를 한 뒤 들어갔다.

물을 다 준 미카는 잠시 기차가 지나가려나 하고 밖을 보다가 이내 앞치마에 조금 묻은 흙을 털어냈다. 가게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주위를 둘러본 미카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뒤 발을 옮겼다.

- 지상에서의 무대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모습입니다.

가게 안도 식물들도 많이 꾸며져 있었다. 가게 규모가 조금 더 크게 확장되니 나츠미는 그간 참아 왔던 로망을 표출시키듯 인테리어를 했고, 그런 탓에 가게 안은 골동품과 식물들로 가득했다.

TV는 예전에 쓰던 것 그대로였다. 화질이 조금 깨지는 골동품 같은 TV가 고딕풍 티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얼마 전에 있던 아이스 쇼의 영상이었다. 다만 이츠키 슈는 아이스링크 위가 아닌 지상 무대를 택했다. 일본에서는 피겨 신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또 최근 유망주들이 많아진 터라 빙판 위의 무대는 그들에게 넘기겠다는 입장이었다.

아이스 쇼의 오프닝.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의상에 달린 옷자락들이 휘날렸다. 빙판 위가 아니니 저런 의상도 입을 수가 있구나.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미카는 카페 일도 잊은 채, 동그란 쟁반을 품에 안다시피 하고 쪼그려 앉아 TV를 바라보았다.

"미카, 저기 테이블⋯⋯ 아, 어서 오세요!"

나츠미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화면을 응시했다. 아름답게 춤추는 남자에게 정신이 팔린 듯했다.

무용수를 해도 엄청 잘했겠네. 어느새 접은 무릎 위에 턱을 괸 채 감상하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무대를 꾸며도 유리한 체형이었다. 물론 얼굴도 무척 아름답지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날 아이스 쇼 이후로부터 벌써. 미카는 잠시 감상에 잠긴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완전히 손이 닿지 않는 일상 속으로 사라진 그를 보며 그의 다양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가게 안에는 몇몇 학생과 아주머니들, 그리고 커플도 있었다. 다들 차나 디저트를 즐기며 대화하는 중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열린 창문 틈새로 주홍빛 가을 햇살이 파고들었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하시나 보네요."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아, 제가 너무 가렸지예."

안 그래도 화면이 작은 TV를 가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미카가 쟁반을 손에 쥔 채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비켜 드리려는 순간 제게 말을 건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긴 코트에, 짧은 목폴라가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

미카의 눈이 커졌다. 귀에서 딸랑 하고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을 공기는 적당히 차갑고 기분 좋은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의 얼굴이 미카의 눈에 가득 들어차 미카가 넋 나간 표정을 하자 만족스러운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오만해 보였으나 무척 예뻤다. 자기가 이겼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미카도 긴장한 표정을 풀고는 웃었다.

"손이 차갑구마."

"마찬가지야."

미지근한 온도의 늦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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