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날개 中

미카슈 피겨 AU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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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종목을 다루고 있으나 필자의 전문 지식 부족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감상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작중 소재(트라우마, 자살 등)에 유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다음은 일본에 수많은 영광을 안겨주었던 유망주의 무대입니다. 

카메라가 링크장 바깥쪽에 서서 관객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비추었다.

짧은 분홍색 머리와 깎아 만든 듯한 오른쪽 얼굴을 비스듬히 찍은 앵글이 비추어지자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땅을 울리는 환호 속에 그가 있었다.

- 이츠키 슈.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그는 링크장 한가운데로 이동하기 위해 발돋움을 했다.

빙판 위를 매끄럽게 지나며 짧은 머리칼이 흔들렸고, 슈는 고개를 돌려 제게 찬사를 보내는 관객석을 바라보며 링크장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화면에는 그의 이름과 함께 종합선수권 남자 싱글 우승자라는 명예로운 기록이 떴다.

슈는 손을 편 채 양 팔을 허공으로 들어 갈라쇼의 관례를 지키듯 짧게 인사를 했다. 그 짧은 순간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마지막 환호성마저 잦아들자 그는 링크장 한가운데에 가만히 섰다.

- 그가 선보일 무대는⋯⋯.

슈는 숨을 고르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끝마저 섬세하게 움직였다.

- 'Rusty Sky'.

음악이 흘러나오자 카메라가 이츠키 슈의 옆모습을 클로즈업했다.

살짝 하늘거리는 얇고 흰 상의와 옷에 박힌 투명한 큐빅이 빛을 받아 빛났다. 어두운 링크장에 오직 그만을 비춘 스포트라이트가 환했다.

고개를 약간 아래로 기울인 채 눈을 내리깔고 음악을 듣던 슈는 피아노 전주의 한 박자 반이 끝나는 순간, 예고 없이 카메라 앵글 밖으로 부드럽게 벗어났다.

얼마 안 가 옅은 푸른색의 조명들이 새까맣던 아이스링크 위에서 물결치기 시작했다.

모든 카메라와 관객, 코치와 심사위원들의 눈이 갈라쇼를 장식하는 18세 소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이백 이나바우어. 

슈가 스케이트 날로 빙판 위를 내딛고 등을 뒤로 물 흐르듯 넘기자 하늘거리는 상의와 다리에 달라붙는 검은 하의로 드러난 몸이 숨 막히게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주 살짝 벌려진 입술에 두 팔은 머리 위로 넘기는 게 아닌 가슴을 열듯 상체의 양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져, 그가 고개를 좌측으로 비스듬히 꺾은 채 턱 끝이 허공을 향하자 카메라와 조명도 넋 놓은 듯 그를 비추었다.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수려한 얼굴과 시선 처리가 예술이었다. 시선은 관객석이나 활주 방향을 바라보기보다는 어깨 뒤, 혹은 허공과 사선을 향했다. 그렇게 흐르는 음악과 함께 이나바우어를 유지한 채 링크장을 반 바퀴가량 돈 그는 링크 위를 가벼운 스텝으로 누비다 악셀을 뛰었다.

갈라쇼와 음악의 막바지, 링크 한가운데에서 콤비네이션 스핀을 돈 슈는 반주가 끝남과 동시에 머리 위 허공을 향해 손을 뻗듯 무대를 마무리 지었다.

하늘로 팔과 고개를 치켜든 슈를 담기 위해 공중에서 카메라가 내려와 그를 화면에 비추었다.

무대와 피겨, 아이스링크, 이 순간을 쉼 없이 사랑하는 소년의 눈이 어두운 배경 속 조명을 받아 빛났다.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숨이 차 오르내리는 가슴과 본인도 모르게 입가에 흘린 미소가 전광판에 비추어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차 커졌고, 카메라 앵글은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파도처럼 커진 박수와 환호가 갈라쇼의 아이스링크 위를 가득 메웠다. 모두가 그를 예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소년은 여운을 떠안은 채 팔을 내리고는 관객석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슈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는

이 순간을 살기 위해 태어났구나.

걷는 날개

바질

03

낙화

"신체적으로 더는 무리입니다. 여기서 피겨를 강행했다간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할 거예요."

병실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꽃병이 와장창 깨져 바닥에서 날카롭게 갈라졌다. 잔뜩 분노한 보라색 눈동자가 불꽃처럼 의사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바닥에 무참히 흩어진 꽃병의 파편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은 얼마 안 가 더욱 미동 없는 눈길로 병실에 앉은 소년을 응시했다. 가엾게도, 아이의 눈에는 깨져버린 파편보다 병실 위의 저 소년이 몇 배는 더 무력해 보였다.

"그럴 리 없어요,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인데요."

"제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흔히들 피겨 선수를 봄꽃에 비유하는 만큼⋯⋯ 유년기가 무척이나 중요한 스포츠입니다. 이렇게 부상이 잦다면 어린아이이니 더더욱 뼈의 구조가 엇갈릴 수도 있고요."

"수술은⋯⋯."

봄꽃.

빠르게 피어나, 빠르게 지기 때문에 봄꽃.

"주치의로서 이츠키 군에게 더 이상의 훈련은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얼마 안 가 헛웃음 소리가 뒤에서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침대 위의 소년을 향했다. 소년은 실성한 사람처럼 몇 번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별안간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뒤늦게 소년을 달랬으나 그는 어머니의 손길마저 뿌리쳤다.

병실 안 사람들은 안타깝다는 듯 소년과 그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오랜 꿈이 있었을 텐데 펼쳐 보기도 전에 끝나다니 안쓰러울 만도 했다. 분명 어느 정도 재능도 있고 그만큼 아이스링크 위를 사랑했던 소년의 피겨 인생에 누군가 멋대로 끼어들어 와 마침표를 찍고 떠났다. 병실 안은 작은 울음소리와 침묵으로 잠겼다.

"제가 할게요, 어머니."

아이가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제 형을 꼭 닮은 보라색 눈이 똑바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깨진 꽃병보다 한 발짝 앞에 서 꼿꼿이.

"미카, 어디 가?"

신발장에서 급히 신발을 갈아신는 미카의 등에 대고 나츠미가 외쳤다.

혹여 왜 그리 자주 가냐 물어볼라, 미카는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풀매미 우는 소리와 특유의 맛이 나는 바람. 미카는 시골 여름의 한복판을 걸었다. 계속, 계속 걷다가 논을 건너고 작은 읍내를 지나면 병원이 있었다. 미카의 목적지는 그곳이었다.

그곳엔 답을 찾는 남자가 있다. 머릿속에서 비워진 10년 정도 분량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남자.

강아지풀 하나를 뜯어내 입에 살짝 문 미카가 눈동자와 함께 풀을 입 안에서 굴렸다. 보송보송한 부분이 공중에서 풀매미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 ⋯⋯ 지금 당장 내 눈앞의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날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선명히 울렸다.

차가운 얼음 위에서 아무리 넘어져도, 마르고 하얀 몸 곳곳에 파란 멍이 들어도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어두운 얼굴을 했다. 처음으로 구부정하게 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난⋯⋯.

미카는 카운터 직원에게 밝게 인사했다. 이제 제법 면식이 생겨서인지 카운터 직원도 그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세계적인 피겨 선수였던 이츠키 슈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냐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하던 사람인지 정도는 기억했으나 기억하는 것과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해 결국 본인조차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처음 카게히라 미카를 마주했을 당시 그의 표정을 본 이츠키 슈는 당연하게도 그를 '알던 사람'이라고 여겼다.

미카가 제 지인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의 표정만큼이나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가 지금껏 슈를 찾아왔던 몇몇 관계자들과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지 슈는 결국 기억해 주지 못해 유감이라는 지친 사과를 내놓았다.

- 새삼 자기소개하지 마. 그런 식의 반응은 이미 숱하게 겪어 지겹기만 하군. 

그런 게 아닌데.

말하려고 했으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은 그가 원래 알던 주변 사람이 아니고 그저 이 마을에 사는 당신의 한낱 팬 중 하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질 않아서 결국 미카는 뒷걸음질을 했다. 병실을 잘못 찾아왔다고도, 당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라 외부인이라고도 말할 수도 없던 탓에 뒷걸음질로 도망치려 했다.

- 기다려.

그날 미카의 발을 멈추게 만든 건 슈의 목소리였다.

"이츠키 씨, 내 왔데이."

여전히 참 넓은 1인실.

병상 위에 앉아 있던 그가 돌아보았다. 미카는 남몰래 작은 숨을 삼켰다. TV 너머로 수년 간 보았던 저 날 선 눈매를 숨이 막힐 만큼 좋아했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병상을 향해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다른 거로 가져와가, 바로 보긌나?"

부스럭 소리를 몇 번 낸 미카가 부산스럽게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어 보이자 그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미카가 가져온 카세트테이프에는 신식 TV도, 제대로 된 녹화 기능도 없는 찻집의 비디오플레이어를 사용해 보던 슈의 공연이 담겨 있었다.

슈는 기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떤 보통의 사람보다 영상 기록물이 많은 인생을 살았는데 왜 구체적인 기억을 하나도 되찾지 못한 걸까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그에게 듣기로는, 슈의 집안이 거의 고의적으로 그의 기억을 봉쇄하기라도 하려는 듯 기록물을 보지 못하게 하고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요양을 고집하는 슈의 집안과 복귀를 강행하려 하는 소속사 사이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던 것이 지난 겨울.

그는 아무것도 떠올려내지 못한 채 시골로 보내져 강제적인 요양을 취하게 되었다. 낯선 의사의 가정집에서 지내다 간헐적인 두통이 심해지면 입원을 했다. 온통 그뿐인 단조로운 패턴의 일상이라고 했다.

그런 슈에게 미카는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통신이 잘 되지 않는 마을에서 슈의 영상을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슈는 그를 과거 알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본인에게는 더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병실에 놓인 고물 같은 TV에서 한 피겨 선수가 무대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을라 볼륨을 아예 줄여 중계나 음악 따윈 들리지 않았다. 화면 속의 슈는 고요함 안에서 링크 위를 누볐다.

미카는 수백 번을 봤던 영상이기에 굳이 화면을 보기보다는 제 앞에서 TV를 응시하고 있는 화면 속 남자를 바라보았다. 집중한 옆모습이 좋았다. 긴 속눈썹과 묘한 색깔의 눈, 깔끔하게 떨어지는 콧날의 모양, 사선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뺨과 새하얗고 매끈한 피부 하나까지 전부.

"억수로 멋있제? 두말 할 것 없이 일본을 통틀어 최강이었데이."

옆에서 미카가 극찬했으나, 안타깝게도 슈는 그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그의 찬사가 귀로는 들어왔으나 머릿속에서 입력되기 전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무의식 속으로 빠져 버렸다. 슈는 아예 다른 생각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다리를⋯⋯

어떻게 움직였더라.

머릿속이 검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화면 속에서 무대를 만들어내는 소년은 틀림없이 자신의 얼굴을 한 사람인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은땀이 제 온몸을 덮는 그림이 그려졌다가 허공에서 흩어지길 반복했다.

몸의 중심을 어디로 둬야 저렇게 뛸 수 있었지. 어떤 자세로, 몸으로, 마음으로⋯⋯ 임해야 저렇게 충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거지.

⋯⋯ 왜?

귀가 점차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머리 안에 녹색 수돗물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감각이 선해 슈는 저도 모르게 제 위에 덮어진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새하얀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

그 얇은 핏줄을 가만히 보고 있던 미카가 조심스레 무언가 물으려 입을 열었다.

미카가 입을 뗀 순간, 화면 속의 소년이 무대를 끝마치며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이때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중계는 극찬을 할 것이다. 볼륨을 올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만 같아 미카는 그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슈는 미카가 소리 내 말하지 않은 질문을 알 것만 같았다.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슈가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는데도 미카는 그의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절망적이라던가 슬픈 얼굴 따위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병상 위에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TV 화면을 응시할 뿐.

홀로 무너지는 밤을 몇 번이나 흘려보냈나.

1년이면 몸도 굳고, 한술 더 떠 기억도 없는 상태이니 그럴 수도 있지 싶으나 미카는 그의 눈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슈 본인이 느끼고 있는 거였다. 아마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넘어, 전처럼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 쉬는 동안, 한 번도 안 타 본 기가?"

"탈 수 없었어. 외부 활동이 금지되었으니까."

제가 피겨 선수였다는 걸 완전히 깨닫는 데까지 한 달이 걸렸고, 다시 빙판 위로 복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였다.

평생을 피겨를 위해 살았다고 하니 당연히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이츠키 가와 소속사 간의 분쟁이 길어질수록 점차 아이스링크 위에 선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을 흘려보냈다.

"괘안타."

슈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확신에 찬 얼굴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때가 많던 그가 돌연 저를 강하게 쳐다보자, 슈는 의구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너는 왜

나를.

끈적거리던 무력감 위로 또다시 이상한 감정이 그늘을 드리웠다.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슈가 입을 열었다.

"너와 나는 꽤 신뢰했던 모양이군."

그러자 미카의 표정이 흠칫하며 이전처럼 되돌아왔다.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지은 미카가 멋쩍게 웃었다.

"내는 믿었데이."

"나는 안 그랬다는 것처럼 들린다만."

"아마 이츠키 씨도 믿었을 끼라."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점프를 자유자재로 뛰며 아이스링크 위를 누볐으리라. 미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피겨를 해 본 적이 있나?"

미카가 맥없이 엣 소리를 뱉자 그가 재차 물었다. 피겨를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미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예전에는 탔데이, 지금은 안 탄 지 오래돼가⋯⋯ 몸이 기억 못 할 낀데."

"은퇴하고 나서도 빙판에서 뛰는 선수는 여럿 있어. 너도 몸이 기억할 거다."

피겨 열풍이 불어와 곳곳에 일반인을 위한 빙상장이 세워져, 이런 시골 깡촌에도 30분만 버스를 타면 되는 거리에 빙상장이 들어섰다. 얼떨결에 구경을 갔다가 피겨 강사에게 시범 강습을 받은 게 1년이고 초급반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한 것까지 치면 2년.

설 줄 알고, 가벼운 점프를 할 줄 아는 정도. 정말 '할 줄은 아는' 수준에 그치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선수라니? 미카는 슈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도 본인이 한 말에 놀란 얼굴이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에 기반하여 튀어나온 말인 것 같았다.

슈는 제 깡마른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고 제가 한 말을 곱씹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이츠키 씨두 마찬가지데이."

미카가 몸을 기울여 병상에 손을 얹고는 그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문득 꿈에 나와 주기도 하던 피겨 신예가 눈앞에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손을 뻗어 진짜인지 가짜인지 느껴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으나 지금 당장의 그가 너무나 불완전해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손끝이라도 닿았다 깨져 버릴라, 미카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신은 나락을 부르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할 테지만 기억의 빈자리와 불투명한 앞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시달린 탓에 바싹 말라버린 얼굴이 안쓰러우나 그마저도 예뻐 보였다. 아주 살짝 옴폭하게 들어간 뺨과 눈 아래로 옅게 드리워진 그림자에, 약간 마른 입술마저도.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걸 먼저 감지한 건 슈였다. 그가 미카의 안에서 느껴지는 이상하리만치 강한 확신에 휩싸여 있는 사이 미카 또한 제가 너무 거리감 없이 굴었다는 걸 알아채어 흔들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거리가 가까운 게 아니더라도 저 마른 몸 안에서 호흡하는 폐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탁한 주홍빛이 어항처럼 가득 찬 병실 안의 고요한 기류를 깬 건 다름 아닌 제삼자의 목소리였다.

"이츠키?"

미카와 슈는 동시에 병실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저녁매미가 크게 울었다.

04

도약

텅 빈 빙상장에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카는 다큐멘터리 도중 들리던 희미한 소리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았다.

미카는 스케이트화를 대여해 신긴 했으나 그와 함께 빙판 위에 오르진 않았다. 과거 이곳에서 배운 적은 있지만 누가 국가대표였던 피겨 선수 앞에서 쉽사리 빙판 위에 오를 수 있을까.

들어오자마자 링크장에 설 것 같았던 그는 예상외로 링크 밖에서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발레 선수가 아니었나 착각이 들 만큼 유연한 몸으로 스트레칭을 했다. 오프아이스 훈련이라며 짧게 답한 그는 제 몸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

대체 얼마나 몸을 풀 건가 생각하던 걸 들키기라도 한 걸까 싶어 벤치에 앉아 있던 미카가 흠칫 놀라자 그는 미카 또한 제 옆에 두고 오프아이스 훈련을 시켰다. 다리를 높게 올렸다 내리고, 발목을 풀기도 하고.

너무 오랜만에 다리를 끝까지 찢느라 얼굴이 하얘진 미카를 뒤로한 슈는 벤치의 끝에 걸터앉아 스케이트화를 묶었다.

저거, 기억하는구나.

선수들마다 스케이트화 끈 묶는 방법은 미세하게 다르나 미카는 슈가 스케이트화 끈을 묶는 특유의 방법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본인 스스로 묶을 줄도 알았다. 여섯 살, 일곱 살 이후로 내내 써 온 방법이니만큼 몸이 기억하겠지 싶어 미카는 그가 끈 묶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보니 별안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연습할 때면 착용하던 검은 목폴라와 흰 장갑. 저걸 입은 슈는 미카가 동경하던 화면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예쁜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은 그를 보며 미카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안 할 셈인가?"

"오늘은 그냥 보구⋯⋯ 봐두 되긌나? 내는 잘 못 타가, 아마 별 도움도 안 될 끼라."

미카의 대답을 수긍한 듯한 그가 양손에 낀 장갑을 확인했다.

뛸 수 있을까.

미카와 슈 둘 다 머릿속으로 품고 있는 불안이자 의문이며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간절함이었다.

기억을 잃은 1년 동안 모두가 그는 세계 최고의 피겨 선수였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고, 본인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바랐던 터에 막상 영상으로 마주하자 몸의 감각이 일깨워지지 않았다는 건 슈에게 어느 정도 공포에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 은퇴해도 괜찮아, 슈.

이츠키 가의 사람들이 슈에게 현역 시절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여 준 건 단 하나— 기억 속엔 없는 과거의 제가 따냈던 금메달이었다. 이미 충분히 해냈으니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면 끝내도 괜찮다는 거였다. 금색이 어쩐지 탁하게 빛났다.

그럼 내게 남는 건 뭐야.

강제적으로 칩거 비슷한 생활을 했던 지난날 동안 문득 들던 생각이었다. '은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거부하기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어린 날의 그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 감흥 없이 은퇴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젊음의 반을 빙판 위에 쏟은 이유를 찾고 있다.

슈로부터 건네어진 수건을 받아 든 미카가 작게 웃었으나 슈는 그에게 답해 주지 못했다. 막상 빙상장을 눈앞에 두니 어지간히 심란한 모양이었다. 미카는 슈의 복잡한 표정을 링크장 너머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카도 못지않게 심란한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 이츠키가⋯⋯ 당신을요?

그날 병실에 찾아왔던 매니저라는 남자의 얼떨떨한 목소리가 미카의 귀에 울렸다.

- 정말인가요? 뭐라고 하던가요? 다시 복귀하고 싶대요?

- 엣, 그건 아니구⋯⋯ 그, 아직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한 것 같습니더.

- 은퇴하겠다던가요?

은퇴라니?

미카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그러나 매니저의 간절해 보이는 눈빛에 악의가 없었다는 걸 확인하고는 입술을 약간 오물거리며 대답하길 꺼렸다. 미카가 섣부르게 대답할 부분이 아니었다.

- 도와주세요, 카게히라 씨.

- 예?

미카는 매니저가 돌연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부탁하자 잔뜩 당황해 두 손을 내저으며 일어나시라고 웅얼거렸다. 그 이츠키 슈를 돕는다니?

- 전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달에 딱 한 번만 이츠키를 보러 오는 게 합의 내용이라서요⋯⋯ 그가 다시 아이스링크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슈가 얼음 위에 섰다. 미카는 기억을 찬찬히 곱씹으며 눈으로는 슈를 좇았다.

- 일단은 이츠키도 카게히라 씨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를 설득해 주세요. 아니, 조금이라도 좋아요. 

미카에게 닥친 모든 순간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슈가 다시 거처를 주치의의 집으로 옮겨 준 덕에 미카가 예전에 강습을 받던 빙상장으로 왔다. 그 매니저라는 사람이 빙상장 대여비를 청구하라고 적어 주고 간 메모지가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렸다.

- 곧 있을 아이스 쇼에서 이츠키를 초청했어요. 아이스쇼 특별 단독 무대로 복귀할 겁니다. 

복귀⋯⋯ 물론 미카도 바라는 바였다. 그는 무대 위 조명 아래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 계약을 하죠. 비밀리에 하는 계약이지만 금액은 정확히 계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돈?

- 돈은 필요 없어가, 괘안습니더.

- 필요가⋯⋯ 없다고요?

지금 이 순간으로 충분한데.

하루의 끝 즈음 병실에 와 반평생을 동경하고 사랑한 사람을 보는 일상. 미카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평생 물욕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슈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과분한 일상 정도면 이미 품에 들어와 넘칠 만큼 행복했다.

- 그리구 계약이라니,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잖아.

- 지금 당장은 이 정도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만, 더 부르신다면 상의 후에 알려드릴게요.

매니저가 급히 휘갈겨 보여 준 숫자는 미카가 시골에서 평생을 살며 감히 들어 본 적도 없는 액수였다. 겨우 이런 단기 계약치고는 자릿수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딱—

딱, 나츠미의 가게가 조금 더 수도 근방으로 이사할 수 있는 정도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미카는 금액이 쓰여진 작은 쪽지를 떨구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다. 지금의 일상에서 부족함을 느끼거나, 더 바라는 이상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미카의 행복은 이 시골 안에서 온전히 존재했다. 요즈음 들어서는 더욱이 길을 걷기만 해도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 이츠키는 복귀하고, 카게히라 씨는 꿈꿔 오던 대로 이츠키 곁에 있다가 계약대로 보수도 받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죠. 안 그래요?

그렇게 떠밀리듯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게 엊그제의 일. 역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게 전화기를 들어 매니저의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으나 끝끝내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 힘들면, 차라리 코치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정당하게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 이뿐이다. 이 계약이 아니면 이제는 퇴원한 슈를 더 이상 만날 명분도 없었다.

"이츠키 씨?"

회상, 그 안의 회상을 벗어나 또다시 현실.

미카는 아이스링크 한복판에서 움직이지 않는 슈를 발견하고는 계약 관련의 일은 완전히 잊어버린 채 링크의 경계에 가까이 붙어 그를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마치 숨이 쉬어지지 않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제 목을 쥐고 있다.

"이츠키 씨!"

스케이트 날에 끼워져 있던 고무를 빼낸 미카가 급히 아이스링크 위에 발을 디뎠다. 미카가 아이스링크의 한가운데에 도착해 슈의 팔을 잡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이 서서히 돌려져 미카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땅과는 다른 아이스링크 위에서 균형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슈의 몸은 원래 서야 할 곳에 섰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균형을 잡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를 내는 순간이었다. 발이 빠르게 미끄러질수록 시야와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결국은 생판 초보들이나 쓰는 가장 기본적인 끌기로 멈추어 서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가 목을 쥐었다. 숨을 쉬어야 했다. 폐부를 채우는 공기가 무섭도록 차가웠다. 슈는 직감했다.

나는

이보다 더 중요한 걸 잊어버렸다.

미카는 패닉에 빠진 듯한 그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공황인가? 아니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거? 그러나 짚이는 게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깡마른 등에 손을 살짝 얹었다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뼈의 감각에 흠칫 놀라 떼었다.

"낯설어서 그러는 기가, 이츠키 씨?"

그렇게 묻자 슈가 고개를 들어 미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풀린 눈과 식은땀이 나는 얼굴이 순간 가여워 보여 미카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 이내 그의 손을 잡았다.

"이거, 초급반 애들 도와줄 때 했던 긴데⋯⋯."

두 손을 맞잡고 함께 활주하는 건 빙판 위에서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생초보 아이들을 위해 미카가 자주 하곤 하던 일이었다. 장갑 낀 두 손이 맞닿아 함께 빙판 위를 비교적 느린 속도로 함께 활주했다.

"아직두 머리 아프나?"

"⋯⋯."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두 사람 다 미동 없이 손만 맞잡은 채 링크 위를 도는 상황이었다.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묘한 표정으로 미카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가 활주하는 걸 보다니. 미카는 제가 그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잡아 주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겼다.

"항상 이런 식으로 가르쳤나 보군."

"내가 가르친 건 아니데이. 강사님이 가르칠 때 그냥 옆에서 조금씩⋯⋯."

심하게 균형을 못 잡는 아이들은 아예 뒤에서 거의 끌어안듯 잡아 주며 활주한 적도 있다고 하자 그는 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뱉었다. 미카가 손에 힘을 뺐는데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기분이 간질거렸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활주 방향에서 불어오는 남의 체향을 느끼며 저를 짓누르던 불안과 압박이 사라지자 숨통이 트였다. 슈는 아까 차마 쉬지 못했던 숨을 크게 쉬었다.

몸이 기억했다.

"갈 수 있긌나? 이제 안 아픈 기제?"

괜히 민망한 웃음을 뱉으며 미카가 손을 떼는 순간, 슈가 그를 도로 붙잡았다.

"손을."

어?

별안간 미카의 앞으로 앞지른 슈가 미카의 손을 다르게 잡았다. 에스코트하듯 얹어진 손에 미카가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슈가 미카를 이끌었다.

빛난다.

미카는 슈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활주하며 부딪혀 오는 바람이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옅게 흔들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미카의 스케이트화를 보고 있었다. 본인은 활주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행동이, 그와 스텝을 맞추어 가는 이 순간이 가슴 떨리게 좋았다.

"나를 잡아."

눈이 커졌다. 제대로 들은 건지 의문이었다.

"허리를."

미카가 잔뜩 발개진 얼굴로 머뭇거리다 그의 허리에 손을 살짝 얹었다. 그는 여전히 뒤를 보지 않고 미카의 방향에 몸을 맡긴 채 활주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그는 아직 10대 초에 머물러 있어 막연히 커 보였던 적이 있다. 기적처럼 만났던 11월의 삿포로에서도 펜스에 걸쳐 있던 터라 불쑥 다가온 슈가 너무나 커 보였다. 이렇게 같은 스케이트화를 신은 채 마주 보고 있으니⋯⋯.

잡힌 손이 떨어졌다. 둘은 미카의 손과 슈의 허리로 간신히 닿은 모양새를 한 채 함께 활주했다. 슈는 미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특이한 눈동자 위에서 작게 나부끼는 걸 바라보았다.

순간, 얼음 가는 소리만 가득하던 빙상장에 첼로가 내는 낮은 음이 가득 찼다. 활주를 멈춘 미카와 슈는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Your Hands Are Cold. 

슈의 주니어 그랑프리 데뷔곡.

반가운 얼굴을 한 미카가 고개를 내려 그를 보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슈는 눈을 약간 크게 뜬 채 작게 숨을 쉬며 곡에 집중하고 있었다. 낮은 첼로 소리와 긴박하던 오케스트라가 지나갈 때까지,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숨을 삭였다.

2분 가량을 그러고 있었을까, 기억 속에 강하게 각인된 피아노 음이 높게 반복되기 시작했다. 미카는 슈의 손을 이끌었다.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1위를 거머쥐었던 그날은 현재 슈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그러나 막상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춰 빙판 위를 가르자 슈의 몸은 움직였다.

손을 맞잡은 둘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빙판 위에서 함께 미끄러지다, 슈가 가벼운 원 스핀을 돌아 끝내자 앞질렀던 미카가 다시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

이 곡의 제목은 사랑한다는 말의 은유였다.

이상해. 미카는 제 숨소리가 음악보다 큰 것 같다고 느끼며 슈의 허리에 얹지 않은 손을 쥐었다가 폈다. 둘이 오전히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다. 기분이 너무나 묘했다. 여전히 이 모든 게 비현실적이고, 꿈만 같다.

감을 잡지 못해 오프아이스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날처럼 러츠 점프를 뛸 순 없었다. 슈는 제 몸이 음악에 맞춰 스케이팅을 하자 본인의 몸에 이끌리는 것처럼 보였다. 또, 실전처럼 속도가 빠르진 않아 미카도 슈와 호흡을 맞출 수 있었다.

"살코, 뛸 줄 아나?"

미카가 활주하는 와중에 던져진 슈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슈는 숨이 약간 차 보이고, 찬바람을 조금 맞은 탓에 두 뺨이 살짝 발그레했다. 다만 다큐멘터리에서 본 연습 중의 그와는 어딘가 달랐다.

"배운 적은 있데이, 근데 뛸 수 있을지는⋯⋯."

"내가 손을 놓으면 싱글로 뛰어."

놀란 미카의 얼굴을 뒤로하고, 무슨 말이 꺼내지기도 전에 슈가 손을 놓았다.

살코 점프에 앞선 쓰리 턴을 생각하며 미카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걸 눈치챈 건지, 슈가 '무릎이 스치듯 뛰어'라고 속삭인 것도 같았다.

싱글 살코.

미카가 랜딩하며 작게 특유의 빙판을 찍는 소리가 나자, 간발의 차로 그에 이어 슈도 랜딩하며 작게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기억을 잃었어도 소리의 차이는 극명하구나. 미카는 어찌저찌 살코를 뛰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와 함께 페어처럼 음악에 맞추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벅찬 숨을 뱉어냈다.

음악이 끝날 무렵이 되자 미카는 그의 허리에서 손을 놓았다. 귀를 파고드는 바이올린 선율이 치고 나온 뒤 오케스트라가 점차 느린 템포로 곡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링크의 중앙으로 혼자 뻗어 간 슈는 느리게 끌어가는 현악기 소리가 끝나는 순간 멈추며 고개를 옆으로 꺾어 옆선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열네 살의 슈와 겹쳐졌다.

미카는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쥐고 있어 혹시라도 넘어질라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탓이었다. 슈 또한 음악이 끝나자 자세를 살짝 풀고 조금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빙상장의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으나 슈는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시 귀를 기울였다. 환호, 박수와 함성. 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빙상장에서 저만을 바라보고 있는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듯 텅 빈 관객석에 비추어졌다.

스케이트를

다시.

자신의 매니저라고 1년째 주장하는 남자가 얼마 전 얘기해 주고 간 아이스쇼 초청 소식. ⋯⋯ 아마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들었던 턱을 내리고 발아래 스케이트화를 내려다보았다.

두 쌍의 스케이트화. 슈가 고개를 살짝 들자 제 가까이 와 있던 남자도 놀란 듯 흠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슈가 다시 걸음마를 하듯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이끌어 준 남자였다. 검은 머리에 특이한, 그러나 나쁘지 않은 외모를 한 남자. 저보다 키는 조금 더 작고 나이도 한 살 어린 사람.

"⋯⋯."

"⋯⋯."

당신은 역시 이때가 가장 아름답다.

미카는 평생 슈가 시니어로 데뷔한 이후 무언가에 심취해 있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피겨는 기술을 포함해 연기와 음악에 매진하는 종목인데도, 그는 본인이 심취하는 대신 남들을 완전히 매료해 버리는 무대를 펼쳤다.

과거의 그는 완전히 절제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슈는 달랐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동시에 혼란스러워하고, 숨이 막혀 목을 쥐기도 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였다. 1년 만에 링크에 올라 제 몸이 기억하는 대로 음악에 맞추고 나서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의 초점을 관중석에 맞추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생동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가여우며, 동시에 사랑스럽다.

걷잡을 수 없는 이 감정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사람분의 숨소리만이 빙상장을 채웠다.

- 이츠키, 다시! 모호크 턴.

- 쿼드러플 살코 뛰기 전에 발만 바꾸고 쭉 아웃 엣지로 가자.

- 아니다, 역시 콤비네이션으로⋯⋯.

코치가 중얼거리길 반복했다. 카메라맨은 그런 코치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카메라를 돌렸고, 시선이 닿은 곳엔 한 소년이 링크 위를 누비고 있었다.

- 하고 싶은 게 많으신가 봐요.

카메라맨의 말에 코치가 고개를 돌리고는 씩 웃었다.

- 슈는 당대 최고의 선수예요.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죠. 그는 제가 무슨 플랜을 짜도 전부 다 해낼 겁니다. 

얼마 안 가 카메라맨은 슈를 인터뷰하고 싶다며 코치에게 요청했고, 그는 '이츠키가 응할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로 허락해 주었다.

화면이 바뀌었다.

카메라는 빙상장 복도로 보이는 곳에서 높은 펜스에 발을 걸치고 스트레칭을 하는 슈를 클로즈업했다.

- 코치님께서 요구하는 바가 많던데, 힘들진 않나요?

카메라맨의 질문에 슈가 고개를 돌리자 줌이 당겨지며 화면에 그의 얼굴이 곧바로 들어찼다.

이제 보니 아직 어린애였다. 키만 컸지, 여전히 몸도 가냘프고 뼈대도 덜 자란 어린애. 그러나 그런 애가 뭐가 그리 탐탁지 않은지 무척이나 날 선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카메라는 말없이 펜스에서 발을 내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슈를 향해 계속해서 줌을 당겼다. 침묵 탓에 오디오가 빈 건지 지지직 하는 소리가 연신 나왔다. 얼마 안 가 슈의 보라색 눈동자가 카메라에 크게 잡히는 순간, 화면이 전환되며 비디오가 끝났다.

미카는 제 휴대전화를 도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의 앞에는 스케이트화를 신은 슈가 양쪽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빙판과 관중석의 경계에서 미카와 마주 본 채 어릴 적의 자신이 나온 다큐멘터리를 짧게 감상하고 있었다.

이츠키 슈는 아이스 쇼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 얘기를 들은 순간 슈의 매니저는 하늘에 감사하기라도 한다는 듯 두 손을 맞잡고 감격한 탄성을 내질렀다. 미카를 향해 고맙다고 계속해서 얘기하자 자기는 한 게 없다며 손을 내두르는 미카에게 그는 굳이 굳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답례품 세트 같은 걸 쥐여 주고 떠났다.

그렇게 비밀리에 시작된 훈련은 꼭두새벽에 시작해 저녁 즈음까지 이어졌다.

이츠키 가와 소속사 간에 맺은 합의에 따르면 소속사 측은 슈에게 피겨를 강요할 수도, 혹은 피겨를 재개하는 데에 어떠한 지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미카는 이상하게도 그 세계적인 남자 싱글 이츠키 슈의 파트너 겸 코치 비슷한 게 되었다.

동이 틀 무렵 조깅으로 시작해 거의 마을 뒷산을 제패하다시피 하는 슈의 뒤를 쫓느라 미카는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빙상장 주위를 빙빙 도는 것만 봐서 실제로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는데 직접 뛰어 보니 알겠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해가 점점 올라오며 열까지 올랐다.

"이츠키 씨, 그, 아침 훈련은 혼자 해두 괘안치 않나⋯⋯?"

6일째 되던 날, 이 짓을 더 했다간 근육이 녹거나 폐가 터지거나 할 것 같아 미카가 그렇게 말하자 슈는 뒤돌아보며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같이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 얼굴에, 미카는 완전히 항복해 그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진을 뺐다.

"더."

아니, 왜 내가⋯⋯?

요새는 거의 일주일 내내 하는 생각이었다. 왜 내가 아침부터 뒷산 깨기를 하고, 다리를 찢으며 버티고 스핀 연습을 해야 하지? 아이스 쇼에 나가는 건 내가 아니라 이츠키 씨인데?

그러나 이후 미카의 스케이팅을 '형편없다'라고 평가한 그가 저를 교정해 주고 있는 것 같아, 미카는 스케이팅에 근접한 훈련일수록 군말 없이 묵묵히 해냈다.

슈의 일과에는 미카가 항상 있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매일매일 유년 시절이나 비교적 최근의 영상 기록물을 하나씩 보는 것. 그건 미카가 제공해 줘야지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치의 영상도 다 봤다.

"조금이라두 기억나나?"

"⋯⋯ 아니, 습관처럼 집중했군."

미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장갑을 꼈다. 이제 보니, 똑같은 디자인의 목폴라와 장갑을 끼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비록 체형이 달라 슈와는 느낌이 다르지만⋯⋯.

- 피겨를 하기에 나쁘지 않은 몸이라는 거다. 

근육이 적다는 것만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마른 체형이기에 남들보다 조금은 유리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요즈음 죽도록 코어 운동을 시키는 건가 했다.

"미카, 요즘 무슨 일 있어? 가게에서도 안 보이고."

유코였다.

가게를 나가던 미카와 마주친 그녀가 섭섭하다는 듯 말하자 미카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 말해 줄 수 있는 건 아이다, 그래두⋯⋯."

"잠시만, 미카 너⋯⋯ 발목 다쳤어?"

슈가 연습을 할 때마다 그에게 이끌려 함께 빙판에 올랐던 탓에 스케이트화에 눌려 발목에 보호대를 했다. 당연한 거였다. 슈는 까마득히 어릴 적부터 시작해 몸이 익숙했지만 미카는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에헤헤, 내 워낙 둔감해가 다쳐두 잘 모른데이."

어느새 허리를 굽혀 삐뚤어진 발목 보호대를 바로 해 주는 유코를 보며 미카는 살짝 웃었다. 말해 주면 깜짝 놀라겠지. 일본의 자랑이던 국가대표, 남자 피겨 싱글인 이츠키 슈랑 함께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고 하면.

쭈그려 앉느라 유코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작은 시장바구니를 본 미카가 저도 몸을 굽혀 도로 어깨에 올려 주자 유코와 눈이 마주쳤다.

"⋯⋯ 가게에도 자주 나와, 미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버린 유코가 미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 뛰어가 버렸다. 미카는 어리벙벙한 얼굴이었으나, 얼마 안 가 즐거워 보이는 웃음을 흘리고는 유코의 뒤에 대고 알겠다며 외쳤다.

빙상장. 읍내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이면 되었지만 슈는 그 길을 조깅해서 갔다. 미카가 아침나절 가게를 도울 동안 먼저 가서 연습을 하는 일상이었다.

미카는 그보다 뒤이어 도착하면 슈의 매니저에게 그가 연습 중이라고 메신저로 보고하고 그의 무대를 남몰래 감상하곤 했다. 일부러.

연습이 항상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1년 동안의 칩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그의 몸은 이전처럼 기술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츠키 씨."

"늦었군."

"아, 버스가 조금 늦게 와가 늦었구마."

시간은 철저히 지키라고 한마디를 한 그가 음악을 정했다고 이야기해 주자 미카는 놀란 표정을 했다.

"이츠키 씨 혼자 정한 기가?"

"고른 건 아니야. 여기에 담겨 있는 곡이었으니까."

슈가 내민 건 낡아 보이는 MP3였다. 미카도 아는 물건이었다.

과거, 비행기로 이동할 때 슈는 저 MP3로 쇼트와 프리에 사용할 음악들을 듣곤 했다. 익히 봐 오던 MP3를 보자 미카가 돌연 흥분해 어디서 났냐며 눈을 빛내자, 슈가 약간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매니저가 갖다준 적이 있는 물건이야. ⋯⋯ 사용법을 잘 몰라 켠 지는 얼마 안 됐다만."

미카가 작은 탄성을 뱉으며 MP3를 이리저리 살폈다. 왜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는 건지 물어보려는 순간, MP3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왼손과 오른손의 멜로디가 같은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미카는 음악에 매료된 듯 한참을 감상하며 서 있었고 슈는 그런 미카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사가 있는 곡이구마."

"아무래도⋯⋯ 아이스 쇼니까 이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어."

슈는 다행히 정식 대회가 아닌 이상 안무가는 필요 없었다. 갈라쇼를 할 땐 가끔 곡이나 안무를 직접 짤 만큼 그런 쪽에 원체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MP3에 담긴 곡을 스피커에 연결하자 연습할 환경이 마련되었다. 미카는 자신이 또 링크장에 서야 하는 건지 아닌지 긴가민가해 슈의 눈치를 보다, 그가 빙판 위에 서 손을 내밀자 발돋움을 해 그에게로 갔다.

음악이 흘렀다.

"⋯⋯ 몸이 아직 불완전해서, 완벽하게 뛸 수는 없어."

"괘안타, 이츠키 씨는 빙판 위에 서기만 해두 충분히 예쁘데이."

아첨은 관두라며 슈가 장갑 낀 손가락을 맞잡았다. 아첨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옆얼굴을 보며 작게 웃은 미카는 흘러나오는 선율을 몸으로 느껴 보았다.

전개 과정이 무척 임팩트 있는 곡이었다. 미카는 슈의 움직임을 읽으며 그가 어떤 식으로 곡을 해석해내고 있는지를 눈으로 좇았다. 어릴 적부터 해 오던 거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날것의 무대는 처음이었다. 미카는 제가 들뜬 걸 들킬라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눌렀다. 아직 미완성이고, 슈는 제대로 뛰지 않고 음악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단계의 무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어 미카는 괜히 그의 허리께에 얹은 손바닥이 간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감상은?"

"억수로 좋구마, 뭔가 낯설기두 하구⋯⋯."

"이런 부류의 곡은 처음인 것 같긴⋯⋯."

그 순간 누군가 빙상장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둘이 고개를 홱 돌렸다. 매니저였다.

"연습 중이셨던 모양이네요."

사람 좋게 편의점에서 뭘 좀 샀다며 비닐봉지를 내려놓은 그가 슈에게 살갑게 인사했으나 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고, 미카만 링크장에서 나와 그를 마주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새삼 매니저가 올 때마다 느끼곤 했다. 그는 슈가 아이스 쇼에 나가겠다고 결정한 이후로는 아예 얼굴이 펴서 전보다 덜 피곤해 보였다. 미카를 보기만 하면 감사하다며 조공해 대곤 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이츠키는 이제 조금 기억이 돌아왔어요?"

"기억은⋯⋯ 아무래도 드문드문 나는 모양이라, 그래두 완전하진 않아가 불편해하구 있습니더."

"아이스 쇼 전까진 돌아와야 할 텐데⋯⋯ 아, 카게히라 씨의 가족도 오시나요? 표를 끊어드릴게요."

나츠미와 타나카도? 미카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그래 주시믄 억수로 고맙지예, 진짜 그래두 됩니꺼?"

"당연하죠, 저희한텐 얼마나 고마운 분인데요. 몇 명분 끊어드릴까요?"

두 명⋯⋯ 이라 답하려다 미카는 유코까지 생각해 세 명이라고 정정했다. 매니저는 알겠다며 수첩에다가 뭔갈 적었다.

"근데, 그⋯⋯ 이츠키 씨 가족분들도 오시는 깁니꺼?"

"아무래도 그렇겠죠. 슈가 결정한 일이니 합의 조항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니까요, 오실 거예요."

"그라믄 대가족이 오는 거네예, 조부님부터 부모님, 형까지⋯⋯."

매니저의 표정이 돌연 어두워졌다. 아, 모르셨구나 하며. 미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는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미카를 바라보았다. 무해한 얼굴이 갸웃하자, 결국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뒷머리를 털더니 말을 꺼냈다.

"이츠키의 친형은⋯⋯."

2년쯤 전에 죽었어요. 

자살이었죠. 

미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시선이 저 아래 커다란 링크장에서 홀로 점프 연습을 하는 슈에게로 닿았다.

죽음.

생소한 단어가 고막에 닿았다가 가루가 되듯 사라졌다.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박동했다. 그런 미카가 무색하게도 슈는 링크장에서 변함없는 얼굴로 활주를 하며 스케이트를 매만졌다.

쿵, 쿵, 쿵 하며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온 몸의 피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며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스링크 한복판에서 공황이라도 온 듯 제 목을 움켜쥐던 슈가 떠올랐다.

당신이 잃어버린 건

기억이 아니야.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가는 소리가 났다. 그 일정한 소리가 늦여름 매미 소리와 겹쳐 들렸다.

이츠키 슈의 아이스 쇼가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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