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날개 上

미카슈 피겨 AU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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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은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종목을 다루고 있으나 필자의 전문 지식 부족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감상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14세의 신예.

- 이츠키 슈 선수, 러츠 점프를 가볍게 성공시킵니다. 

그가 선정한 음악은 고전 영화의 OST인 'Your Hands Are Cold'. 주니어 그랑프리 첫 데뷔였다.

- 까다로운 기술인데도 흔들림 없이 잘 해냈습니다. 훌륭합니다.

빙판 위를 빠르게 미끄러지듯 달리다 눈 깜짝할 새에 뛰어올라 점프를 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착지해 다시금 몸을 돌린다.

"미카, 그러다 빨려 들어가겠다."

물론 화면 안에서.

"TV에 너무 가까우면 눈 버린다니까⋯⋯ 이리 와."

화면에 거의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던 미카가 그 말에 냉큼 코타츠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이불 새로 머리 하나가 폭 나오더니 다시 화면을 응시하자, 못 말리겠다는 듯 여자가 미카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여튼 못 말려. 피겨 선수라도 되고 싶은 건가 몰라."

"학교에서는 장래 희망에 '가업 물려받기'라고 썼다던데?"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시원하게 하품하며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자 여자는 제 다리에 기댄 조그만 머리통을 살짝 쓰다듬어 보였다. 괜스레 착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업이라니, 그런 어려운 단어는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

"피겨가 하고 싶은 거라면 말해, 미카. 어디 교습소라도 알아볼게."

그러자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봤을 땐 너무 이질적인 외모라 낯설었는데 이마저도 매일 보다 보니 정이 든 건지⋯⋯. 여자는 손을 들어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아?"

"내 괘안타. 보기만 해두 충분하데이."

이런 시골 깡촌에 피겨스케이트 교습소가 어디 있겠어.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TV에 몰두한 아이에게 이끌려 여자도 TV 화면을 응시했다. 주니어 그랑프리에 출전한 선수인 것 같은데, 여자가 봐도 눈에 띄게 재능이 넘쳐 보였다.

화면으로만 봐도 열네 살이 맞나 싶은 기량을 보여 주는 선수였다. 분명히 화려한 외모는 아닌데도 오히려 전체적으로 갸름하고 중성적인 미형이라 되레 눈길을 끌었다. 긴장한 내색 하나 없는 것도 또래 주니어 선수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 유독 집중하게 된다.

- 다시 트리플 토루프, ⋯⋯ 성공시킵니다. 깔끔하네요. 

- 가볍게 랜딩합니다.

관객석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똑같은 기술이라도 유독 이츠키 슈가 하면 훨씬 깔끔하고 훌륭하게 해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넓다란 아이스링크 위에서 시선을 이츠키 슈에게 집중시키는 요인은 외모도 기술도 아닌 그의 연기였다. 긴장한 내색이나 점프, 랜딩에 신경 쓰는 모습도 없이 온전히 온 신경을 흐르는 음악과 링크 위에 미끄러지는 스케이트 날이 그리는 곡선에 쏟고 있었다. 시선 처리도 깔끔했으며 새침한 인상도 무마시켜 버리는 표정 연기가 홀리는 듯했다.

조그만 아이는 그런 그의 무대에 완전히 매료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카메라와 함께 이츠키 슈를 바쁘게 쫓았다.

몇 번의 기술을 추가로 완벽히 해내 중계위원과 코치, 관객들을 홀려버린 그의 무대가 음악과 함께 끝났다. 아이스링크 중앙에서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마지막까지 흠집 하나 없는 자세로 무대를 마친 그를 카메라가 클로즈업했다.

이츠키 슈는 조금은 가빠진 숨을 삭이며 끝까지 감정을 잡다 풀어주었다. 끝까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시선이 묘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미카의 눈에 그가 한가득 들어찼다.

중계위원들이 바쁘게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아이스링크를 빠져나왔고, 점수가 계산되었다. 얼마 안 가 화면에는 키스 앤 크라이 존에 앉은 이츠키 슈와 그의 코치가 나왔다. 힘든 내색도 않고 정자세로 앉아 점수를 기다리는 그보다 미카가 되레 더 긴장돼 보였다.

얼마 안 가 화면에 그의 이름과 국가가 표기됨과 동시에 점수가 함께 공개되었다.

기술 점수 36.98, 예술 점수 37.56, 총점 74.54.

코치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츠키 슈 또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오며⋯⋯

TV가 꺼졌다. 미카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누나, TV가 꺼져삣다⋯⋯."

"벌써 열 시야, 미카. 이만 자야지."

"꼬맹이는 잘 시간이야~ 올라가."

아쉬운 표정의 아이를 본 여자는 미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남자는 껄렁한 자세로 미카를 바라보다 그가 지나가자 격려하듯 머리에 손을 탁 얹어 주었다. 입이 뚱하게 나온 아이가 2층으로 올라가자 여자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꺼진 TV를 응시했다.

제 방에 들어선 미카는 문을 꼭 닫고는 이불 위에 뛰어올라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베개에 제 얼굴을 몇 번 비비고는 아까 봤던 꿈같은 광경을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빙판 위에서 아름답게 미끄러질 수 있지. 얼굴과 몸 선도 말도 못 하게 예쁘고, 매너도 완벽했다. 미카가 학교에서 봤던 다른 열네 살 선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달랐다.

'억수로 멋져가, 눈을 뗄 수가 없었데이⋯⋯.'

미카는 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또래 친구들이 열광하는 히어로 애니메이션이나, 예쁜 아이돌들을 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던 제가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에 갓 데뷔한 신인 남자 선수를 보며 가슴을 졸였다. 왤까?

열세 살 카게히라 미카의 풋사랑은 우습게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골 깡촌 마을의 작은 찻집에 딸린 단칸방 안 낡은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주니어 피겨 선수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그러나 미카만이 그에게 사랑에 빠진 건 아닌 모양인지, 전 일본이 새로이 등장한 피겨 신예에게 열광했다. 그의 무대 조회수는 몇백만이 넘어갔으며 댓글들도 삽시간에 쭉쭉 늘어났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그의 데뷔 무대 GIF가 여러 장 나돌아다녔고, 여러 기사는 '일본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의 샛별'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츠키 슈는 데뷔 무대 하나로 엄청난 스타가 된 것이다. 물론 74.54점으로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1위를 거머쥔 것은 대단했으나 일본의 전 국민이 열광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무대 장악력에 있었다. 스핀이나 점프를 하는 데에 급급한 게 아닌 정말로 무대를 꾸며나가는 진정한 스케이팅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누나가 일찍 TV를 꺼 버리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이츠키 슈의 인터뷰를 미카는 뒤늦게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예능과 프로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이츠키 슈 측은 그중 어느 것에도 응하지 않아 결국 그의 팬들에게 남은 건 주니어 그랑프리 당시의 무대와 인터뷰가 다였으므로 미카를 비롯한 이들은 그 영상을 수백 번이고 돌려보았다.

목에 꽃목걸이를 매단 채 축하를 받다 나온 모습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의상이 아닌 점퍼를 입은 것도 잘 어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예상대로 무척 미성이었으며 간결하게 딱딱 끊어 말하는 어조가 야무져 보이기까지 했다.

긴장했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1위를 할 줄 알았다기보다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달고 있었다.

미카는 누나의 당부도 잊어버리고 다시금 TV에 코를 바싹 붙였다. 재생이 끝난 DVD가 플레이어 밖으로 위이잉 소리를 내며 나오자, 미카는 그걸 다시 손가락으로 밀어 넣으며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았다.

걷는 날개

바질

01

꽃놀이패


당시 카게히라 미카는 시골 마을에 사는 열세 살 먹은 남자아이였다. 

본래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으나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먼저 여의고 마을에서 작은 찻집을 하는 나츠미라는 젊은 여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실상은 나츠미의 동거인까지 합해서 세 명.

집 분위기는 매우 평화로운 축에 속했다. 여러 방면에서 서툴지만 착한 아이, 그런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여자와 그런 여자의 동거인. 묘한 조합이나 나쁘지 않았다. 나츠미와 타나카가 미카를 걱정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자의'가 없다는 부분에서.

그러나 얼마 전 미카에게서 뚜렷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한 주니어 피겨 선수의 경기를 보고 완전히 반해서, 일종의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미카는 이츠키 슈의 영상을 수집했다. 그리고 하루 내내 넋을 놓고 감상했다. 그랑프리 경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겨보았다. 그 탓에 나츠미와 타나카는 피겨 경기의 규칙이나 용어, 채점 기준 같은 것을 달달 외울 지경이 되었다.

천재라는 칭호를 단 주니어 피겨 선수— 이츠키 슈. 데뷔 무대 당시 독보적이던 비주얼과 무대 완성도, 데뷔하자마자 이뤄낸 1위의 쾌거 덕에 이름이 일본 전역에 알려지며 거의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몸값이 배로 뛰었다. 그러나 과한 관심은 독이 되는 법인지 구설수도 제법 많이 생겼다.

노비스 이후 주니어로 데뷔하자마자 사생활이 없어진 점도 안타깝긴 매한가지였다. 공중파에 경기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기자들은 이츠키 슈의 사진을 하나라도 더 건지려 안달이었고, 결국 이츠키 슈는 이동이나 통행에 제한을 겪는 등의 고역을 견뎌야 했다.

엄청난 인기 탓에 '거품' 꼬리표가 붙을 뻔한 것이 다행히 그의 실력 덕에 완전히 묻히며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주니어 선수 생활을 했다.

여러 메달도 많이 땄으며 뭣보다 고난도 기술들을 교과서처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국제적인 인기마저 끌기 시작했다. 또래보다 길쭉한 키와 압도적인 비율, 날렵한 몸매에 작은 얼굴까지 완벽하게 밸런스를 이루며 주니어 피겨 선수 역사에 한 획을 긋기까지 했다.

또한 세간의 관심을 끈 건 그의 기행이었는데,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되었던 것과 맞아떨어지게 그는 제법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팬 서비스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으나 제가 링크 위에 입장할 때 환호성이 너무 길어지면 관객석 쪽을 날카롭게 한 번 쳐다봐 함성을 낮추기도 했다.

"미카 군."

그런 그에게 카게히라 미카가 완전히 반한 건 본인에게는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이츠키 슈의 주니어 데뷔로부터 3년, 그는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과 세계선수권에서 각각 은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는 당시 쇼트와 프리에 트리플 악셀을 넣었다.

"진짜 좋아하네. 또 보는구나?"

"응, 억수로 좋데이."

얼마 안 되는 노비스 시절의 영상까지 다 찾아보았다. 학교 쉬는 시간에도 간혹 친구와 함께 그의 영상을 보곤 했다. 중계마저도 거의 다 달달 외울 지경이 된 미카는 그의 팬이 아니라 신도쯤 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예쁘긴 한데⋯⋯ 남자 피겨 선수가 그렇게 좋아?"

"?"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질문한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여학생은 조금 뚱한 얼굴을 하며 미카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볼래."

그러자 미카는 웃으며 이어폰 한 쪽을 빼내어 건넸다. 그의 미소를 본 여학생은 순간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어폰을 건네받았다. 속으로는 천연, 바보, 눈치 제로 같은 생각을 하며.

휴대폰은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했을 때의 이츠키 슈를 보여 주고 있었다. 연습 당시 모든 선수들이 링크에서 빙판 위를 다닐 때의 이츠키 슈는 무대 의상이 아닌 딱 달라붙는 검은 목티를 입고 있었는데, 미카는 그 모습을 보며 군살 없는 몸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몇 번을 봐도 예쁜 몸 선이었다.

그가 선정한 음악은 'April.#19'의 일부분.

트리플 악셀, 트리플 러츠와 더블 토루프 세트, 트리플 플립과 트리플 루프. 더할 나위 없이 클린한 무대였다.

여학생의 눈에도 이츠키 슈는 무척 예쁜 얼굴과 예쁜 몸을 가진 선수였으나 어디까지나 남자 피겨 선수에 불과했다. 그런 선수에게 미카가 그렇게까지 열광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카를 남몰래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카메라가 무대를 마친 이츠키 슈를 클로즈업했다. 옆태가 무척 아름다웠다. 높게 솟은 콧대에 입술, 똑 떨어지는 옆선이 예뻤다. 숨이 가빠 오르락내리락하는 몸도.

- 좋은 무대였습니다. 정말 좋아요.

- 네, 많은 타노 동작 덕에 가산점을 기대해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 자세도 좋고 랜딩도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트리플 러츠의 비거리가 훌륭했어요. 완벽합니다.

- 모든 엣지 점프의 탄탄한 축이 정말⋯⋯ 극찬밖에 나오지 않는 선수입니다. 

키스 앤 크라이 존. 갑자기 여학생이 영상을 멈추자 미카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츠키 선수, 실제로 본 적 있어?"

실제?

상상하기만 해도 벅찬지 미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곧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할 나이잖아. 보러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시니어 그랑프리 1차는 미국에서⋯⋯."

"4차는 일본 삿포로잖아. 갈 수 있어."

"⋯⋯."

미카가 입을 살짝 벌렸다. 직접 보러 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는데. 갑자기 심장이 뛰는 느낌에 여학생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시끄러운 교실의 소리가 귀에서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 알아서 끝내지 않을까. 여학생은 기뻐하는 미카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츠키 슈의 팬 서비스는 좋다 나쁘다 딱 잘라 평가하기 애매한 정도였다. 애초에 접근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매번 세상 혼자 사는 얼굴을 하고 있어 팬들이 농담 삼아 '링크 위 제왕'이라고 부르곤 할 정도였으니까. 예상하건대 아마 냉혈한일 것이다. 미카도 그런 그를 실제로 보면 순간의 동경이었을 뿐임을 알겠지.

"보러 가자, 미카 군."

다른 생각을 하는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랑 같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텅 빈 훈련장 안에 울려 퍼졌다. 굳은살 잡힌 손이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트리플 러츠를 오일러 점프로 연결한 뒤 더블 살코를 뛰어 콤비네이션⋯⋯.

랜딩이 불안정했다. 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훈련장 안은 고요해 얼음 갈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앞에 있는 거울에는 제 모습만이 비추어졌다.

왼쪽 발, 스케이트의 안쪽 날을 사용해야 한다. 제 스케이트화를 잠시 노려본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새 좀 뛰었다고 땀이 조금 난 것마저 짜증스러운 기분에 숨을 크게 쉬었다.

보라색 눈이 거울 안쪽의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커다란 아이스링크 위 혼자였다.

"미카, 어서⋯⋯!"

늦어 버렸다. 예기치 못한 눈 탓에 열차 시간이 지연됐는데, 설상가상으로 대회장까지 가는 버스마저 한 타임 늦게 타는 바람에 이츠키 슈를 보기는커녕 대회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시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역시 볼 수 있을 리 없었던 걸까? 미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살을 엘 듯 추웠다. 무작정 온 것도 둘째치고 늦기까지 했다.

기자들이 잔뜩이었다. 하기야 그 이츠키 슈의 시니어 그랑프리인데 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들어가는 게 가능하려나 이리저리 고개를 들이밀어 보았으나 뚫을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미카! 여기야."

저 문은 사용 금지인데?

그러나 계속되는 손짓에 미카는 결국 그 문으로 들어갔다.

"이거 괘안나? 여기로 들어가두⋯⋯."

"잠시면 괜찮아! 왔으면 봐야지, 안 그래?"

당찬 목소리에 결국 이끌렸다. 사람이 없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너머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뒤 문고리에 손을 대고는 문을 열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쏟아지는 빛과 함께 보이는 건 기자들의 등판이 전부였다. 미카는 밀려오듯 제 귀를 감싸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까치발을 서서 겨우겨우 보니 아주 멀리에 인터뷰를 하는 곳이 보였다.

이리로 나오겠구나. 미카는 경량 펜스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레드카펫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에서부터 셔터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시니어 그랑프리에 참가한 선수들이 옆에 코치나 가족 몇을 데리고 차례로 나오고 있었다. 미카는 이츠키 슈는 고사하고 다른 선수들마저 가려 보이지 않자 계속 기자들의 등을 훑으며 결국 대회장 게이트 앞쪽까지 밀려 나갔다. 미카는 펜스에 겨우 걸쳐 나오는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미국, 러시아, 중국⋯⋯ 많은 국적의 선수들이라 생김새도 다양했다. 옅은 금발부터 새까만 흑발까지. 다들 목까지 잠기는 점퍼를 입은 채 꽃다발을 들고 몇몇은 카메라 셔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코치들은 자신들이 맡은 선수의 성과에 따라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미카는 게이트에 가까운 곳에 서 있어 추위 탓에 코끝이 빨개진 것도 모르고 선수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입만 벌렸다.

- 아무것도 안 챙긴 거야? 정말로?

- 으응, 내는 보기만 해도 충분해가⋯⋯.

- 그래도 어떻게 카메라 하나를 안 챙기니? 잠시만 있어 봐.

기차 안에서 그녀가 건넸던 얇은 노트 하나. 그마저도 미카의 품 안에서 조금 구겨진 것 같았다. 만약 만난다면 사인이라도 받아 기록을 남겨 두라는 거였다. 설마. 만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뭔가를 부탁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미카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때였다.

게이트 밖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였다. 게이트에서 눈을 떼고 선수들이 나오는 쪽을 확인하니 맨 끝에 그가 보였다. 미카가 동경해 마지않는 그가.

"⋯⋯!"

새하얀 스키복 점퍼를 입은 그가 저만치에서 꽃다발 하나를 안은 채 나오고 있었다. 미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멀리에 있는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는 코치와 계속해서 대화하고 있었다.

예쁘다.

목에 메달이 걸려 있고, 담당 코치의 표정을 보니 경기 결과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나중에 알기로 이츠키 슈는 남자 싱글 포디움에 참가해 1위를 거머쥐었다. 미카는 펜스에 상체를 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츠키 슈가 게이트로 다가올수록 미카를 미는 힘이 강해졌다. 기자들이었다. 미카는 외마디 신음을 뱉었으나 그래도 펜스 부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슈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육안으로 선명히 보이는 거리에 왔을 때쯤, 미카는 거의 압사하기 직전이었다. 가엾게도 기자들 중 누구도 미카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그저 4차 시니어 그랑프리의 남자 싱글 포디움 챔피언을 카메라에 담으려 안달이 났을 뿐이었다.

안 돼⋯⋯ 이러다간 지나쳐 버리고 말 거야. 미카는 입술을 꽉 물며 버텼다. 이츠키 슈는 중간쯤 와서는 코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앞을 바라보며 꼿꼿하게 걷고 있었다.

소리 내 불러야 해. 소리 내 불러야 해. 미카가 배에 힘을 주었다. 그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츠키 슈가 코앞을 지나가는 순간은 밀려오는 기자들의 무게 탓에 아깝게 놓쳐버린 미카가 소리를 낸 건 이츠키 슈의 발이 게이트 문턱을 밟을 때쯤이었다.

"이츠키 ⋯⋯ 씨!"

압박 탓에 이름도 채 못 부른 소리를 내고도 미카는 그가 듣지 못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나 밖의 사람들이 소리쳐대는 함성에 비해 너무나 작았던 것이다. 펜스와 기자들에게 눌린 체구 작은 남학생의 목청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슈는 기적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보라색 눈이 똑바로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정확히는 기자들에게 눌린 한 남학생을. 한 손은 펜스를 쥐고, 다른 한 손은 얇은 민트색 노트 하나를 구기고 있었다.

"왜 그래, 이츠키?"

코치가 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멈춰서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슈는 코치의 부름을 뒤로하고 그에게 꽃다발을 맡겨 두고는 펜스 쪽으로 다가섰다.

스키복 주머니를 열자 유성펜 하나가 나왔다. 미카는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그가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이름."

기자들은 미카에게서 떼어져 나와 이제는 이츠키 슈와 미카의 투 샷을 찍고 있었다. 미카는 입을 떡 벌렸다. 노트를 든 손이 떨렸다.

"⋯⋯ 이름."

그가 정신 차리라는 듯 다시 딱 떨어지는 어투로 말하자 미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카, 카게히라⋯⋯ 미카. 카게히라 미카입니더."

그는 말없이 유성펜의 뚜껑을 따 민트색 노트의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페이지를 펴 사인을 해 주었다. 미카는 제 앞에서 움직이는 하얀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TV에서만 보던 얼굴이 제게 가까이 있다. 앞에 서 있는 그의 얼굴 덕에 제게 그림자가 진다. 심지어 공책에 사인까지⋯⋯. 미카는 쿵쿵거리며 시끄럽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펜 뚜껑을 닫고는 허공에서 떨리고 있는 미카의 손을 잡더니 공책 위에 얹어 주었다. 행동을 끝마친 그는 몸을 돌려 코치의 옆으로 돌아갔다. 미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공책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 11월의 삿포로,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다.

02

복사뼈

여름에 공개된 한 다큐멘터리.

공개 이후, 카게히라 미카는 해당 다큐멘터리를 수백 번 돌려보았다. 총합 52분 정도 되는 짧은 다큐멘터리였는데 그걸 보고 또 보길 반복했다. 미카가 비디오 보는 것을 반복하자 나츠미는 그의 방에 아예 TV와 비디오플레이어 하나를 놓아주었다.

그 다큐멘터리를 돌려보며 미카가 알게 된 것은

이츠키 슈가 넘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이었다.

미카가 그것을 수백 번 보면, 화면 속의 슈는 수천 번을 넘어졌다. 수천 번을 점프나 스핀에 실패했다. 그건 이츠키 슈의 피나는 노력을 담은 짧은 기록이나 다름없었다.

화면 속 앵글이 확대를 하자, 화면이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도 잠시— 이츠키 슈가 러시아 출신의 안무가와 함께 연습을 하는 모습이 담겼다.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안무가가 뭔가 동작을 하자 그걸 본 슈가 완벽히 복사하듯 따라 했다.

피겨스케이팅은 보기보다 외로운 종목 같았다. 그는 코치와 동행할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으나 보통은 1인으로 링크 위에서 홀로 연습을 했다.

짧은 정빙 작업이 끝나고 스케이트화 끈을 묶는 그는 항상 그랑프리 경기에서 보는 것보다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는 압박감 탓인지 훨씬 더 예민해 보이기도 했다.

매번 스케이트화 끈을 강하게 묶느라 그의 새하얀 손에 생긴 굳은살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 가, 카메라를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슈가 일어나 링크장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점차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만이 화면에 보였다.

부상.

다큐멘터리 중 그의 부상 관련 장면이 나온 건 세 번 정도였으나 실은 그보다 훨씬 만성 질환들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계속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주니어 시즌 중후반 즈음부터 시작된 그의 신체 성장이라고 했다.

빙판에 주저앉아 통증 탓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를 보며 미카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얼마 안 가 코치가 슈에게 다가갔으나 슈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었다.

카메라는 탈의실 안— 슈의 발을 비추고 있었다. 생채기 하나, 멍 하나 없이 새하얄 것만 같던 그의 몸은 생각보다 얼룩덜룩한 부분이 있었다. 그의 발은 스케이트화에 눌려 발목까지 울긋불긋했고, 발끝 부분은 굳은살과 멍이 나 있었다. 그래도 미카는 그의 발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다만 카메라에 잡히는 발의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얼마 안 가 화면에는 카메라를 짜증스레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담겼다.

그 장면을 끝으로 미카는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카세트테이프를 뺐다. 그리고는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한 상자 안에 그걸 소중히 넣고는 벽장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미카는 눈을 감았다.

전 세계와 일본에 피겨 열풍을 다시 불러왔던 신예 이츠키 슈가 잠적한 지 일 년이 넘었다.

"미카, 이것 좀 옮겨 줘."

7월. 시골 마을에 여름이 찾아온 탓에 여기저기서 풀벌레가 울어댔다.

햇빛 아래에서 누군가 일어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지역의 특성화 덕에 나츠미의 찻집이 입소문을 타 제법 유명해져 리뉴얼을 한 참에 미카도 손을 보태고 있었다.

"누나, 기분 억수로 좋아 보이는구마~."

"그래? 새로운 도약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들떴어."

"나츠미, 가끔 제법 여고생 같은 면이 있다니까."

꽝 소리가 울렸다. 나츠미가 들고 있던 은쟁반으로 타나카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었다. 나이 갖고 농담하지 말라며 소리치는 나츠미 때문에 미카는 웃음을 터뜨렸고, 타나카는 아픈 적을 하며 줄행랑을 쳤다. 나츠미가 씨익거리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와 함께 시골 마을의 여름을 장식했다.

"저녁은 나베야. 저놈한테는 국물도 없지만."

나츠미가 손을 털며 말하자 미카는 맛있겠다고 말하며 둥글게 웃고는 훨씬 커진 가게를 바라보았다. 이전엔 그저 시골 마을에 짱박힌 낡은 찻집이 제법 신식 카페 같은 깔끔한 모양새를 한 게 왜인지 애틋한 기분이었다.

칼과 도마가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미카는 거실에 앉아 인형의 눈을 꿰어 주고 있었다.

"미카, 혹시 병원에 좀 다녀와 줄 수 있어?"

"병원? 누구 아픈 기가?"

"우체국 가게 할머니. 얼마 전에 입원하셨는데 과일이라도 좀 갖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손을 멈춘 미카가 알겠다고 답하자 나츠미가 냄비를 갖고 후다닥 거실로 오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미카도 고등학교 졸업한 지 반년인데, 매번 변변찮은 것만 해 주는 것 같네."

"내 괘안타. 가게도 새로 하는데 뭐가 아쉽긌나, 내는 좋데이."

난 너 어릴 때가 엊그제 같아. 나츠미의 감상 젖은 말투에 미카가 멋쩍게 웃었다.

"너, 그 피겨 선수 좋아했었잖아. 이름이 뭐더라?"

멈칫했다. 고개를 든 미카의 눈빛이 묘했다.

"중학생 때 이후로는 그 선수 좋아하는 거 자주 본 적 없는 것 같아서. 미카가 뭔가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

"고등학생 되고 나서도 계속 좋아했구마. 근데 1년 전부터 잠적해가, 지금은 근황도 모른데이."

"그래서 작년에 그렇게 뭔가 우울해 보였구나."

금방 복귀할 거야. 나츠미의 위로에 미카는 다시 애써 웃어 보였다. 이제야 그의 부재가 실감 나는 요즈음, 그녀의 위로는 그저 현실을 조금 더 일깨워주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이츠키 슈를 계속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쌓이고 쌓여 어느 때부터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결을 띠었다. 그의 경기 하나 인터뷰 하나 빠짐없이 전부 보고, 그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느껴질 때에는 보물처럼 간직하는 '그 사인'을 보았다.

점차 유명해진 이츠키 슈는 여러 문제에 휘말렸다. 악성 팬덤, 파파라치 등이 그를 꾸준히 따라다녔으며 특히 사생팬 문제가 제일 심각했다.

중성적인 외모 덕에 남성 피겨 선수치고는 유독 남자 팬층이 제법 있던 이츠키 슈는 여자 사생팬과 더불어 남자 사생팬에게까지 시달렸다. 거주지는 물론이고 빙상장까지 따라붙기도 하며, 한번 화장실에서 사생팬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할 뻔했던(이후, 해당 사생팬은 그저 팬서비스를 요청했을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사건은 기사화되기까지 했다.

위태로운 사생활 문제와는 별개로 시니어 그랑프리에서 이츠키 슈는 자신이 직접 곡이나 안무를 짜기도 하는 재능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훈련하기도 바쁜 와중에도 그런 걸 해내다니, 정말 천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미카의 MP3에는 그가 경기 때 썼던 곡들로 가득했다. 시골 깡촌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미카의 일상은 이츠키 슈로 가득했다. 집에 오면 숙제와 가게 일, 집안일을 거들고 자기 전에 그의 영상을 보았다. 그게 일과였다.

그래서 이츠키 슈가 잠적했다는 걸 반년 정도는 믿지 못했던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살았다. 그의 사진을 계속 보고, 목소리를 계속 듣고 얼굴을 계속 보았다. 결국에는 가장 처음 그를 마주했던 주니어 그랑프리 데뷔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제서야 미카는 그의 부재를 실감했다.

"미카!"

뒤돌자 미카의 중고등학교 동창인 유코가 보였다. 지난 11월, 4차 시니어 그랑프리— 이츠키 슈의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전 당시 함께 삿포로로 무작정 갔던 그 여학생이었다. 미카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그녀가 미카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 가는 길이야? 그렇게 과일을 잔뜩 들고."

"우체국 할머니, 어디 편찮으시다 캐서 과일이라두 드리러 간데이."

"아~! 미끄러지셨대. 과일,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렇제? 내캉 같이 놀아 줬던 분이라 걱정했구마."

유코 쨩은 어디 가던 길이냐고 묻자 그녀는 읍내에 나간다며 바구니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동행할 수 없어 아쉽다는 투였으나 미카는 바쁘면 얼른 가 보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유코는 그렇게 인사 후 사라졌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에서, 거의 처음 와 본 탓에 미카는 병원 앞 주차장에서부터 방황했다. 

병원 문이 열리자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쳐 미카는 고개를 흔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시야에서 벗겨냈다. 여러 사람들이 병원 대기석에 앉아 일제히 TV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그 우체국 할머니는 어데 계시는지⋯⋯."

카운터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들어 미카의 얼굴을 보더니 별안간 뺨을 붉혔다.

"30, 304호 병실⋯⋯이요."

"에? 못 들어가, 다시⋯⋯."

그때 뒤에서 우렁차게 우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부모의 목소리에 간호사는 뺨을 붉히던 것도 잠시, 카운터를 빠져나가 급히 그리로 갔다. 미카는 한 손을 병원 카운터에 얹은 채 어리벙벙하게 그리를 바라보았다.

303호였던가? 304? 헷갈렸다. 결국 미카는 303호 앞에 멈추어 선 후 노크를 했다.

"할머니, 내 미카인데⋯⋯ 들어가두 되긌나?"

대답이 없었다. 미카는 다시 한번 노크했으나 여전히 답이 없어 주무시나 싶어 병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커튼이 쳐져 있네. 생각보다 넓은 병실에 놀란 미카는 탁상에 우선 큰 과일만 내려놓았다.

"할머니⋯⋯."

침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커튼 뒤. 미카는 그리로 다가가 커튼 끝을 쥐고는 옆으로 걷어냈다.

창밖에는 초록 나무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조용한 병실에 풀벌레 우는 소리와 여름 저녁의 햇빛이 드리워졌다.

병상 위 새하얀 얼굴 위로 빛이 쏟아졌다. 감긴 속눈썹이 약간 떨리는 것도 같았다. 미카의 눈이 점차 커졌다.

심장 박동 소리가 점차 커졌다. 쿵, 쿵 하며 귀를 울렸다. 묘했다. 이상했다.

꽃다발과 메달을 걸고 중앙에서 옅은 미소를 짓던 얼굴. 통증 탓에 찌푸리던 이마와 연기를 끝마칠 때쯤 들어올리던 날렵한 턱, 몰입하면 살짝 벌려지던 예쁜 입술.

바로 그— 이츠키 슈가 제 눈앞에 있었다.

투둑.

과일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미카의 눈앞에 잠들어 있던 예쁜 얼굴에 금이 가듯 균열이 생기더니 눈꺼풀이 열렸다.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카는 바닥에 주저앉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병상을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과일은 바닥을 나뒹굴었고, 미카의 손은 바닥을 짚은 채 방황했다. 머리는 끝없이 회로를 돌렸으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실제로는 딱 한 번 봤던 얼굴, 그러나 TV와 휴대폰 화면으로 수만 번 보았던 얼굴.

"⋯⋯."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른 탓에 환자복도 헐렁해 보였다. 깡마른 목덜미가 드러났다. 미카는 제 얼굴이 새빨개진 것도 모른 채 입을 살짝 벌리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 넌 누구지?"

눈살을 찌푸린 그의 얼굴을 본 미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이크를 통한 기계음 없이 온전한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낯익은 동시에 낯설었다.

"외부인은 출입 금지일 텐데."

"저, 저는⋯⋯!"

난 뭐지?

멍청한 답을 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이 마을 사는⋯⋯ 그⋯⋯."

슈의 얼굴이 점차 더 구겨지는 것 같았다. 불쾌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게, 이곳은 오직 그만을 위한 1인실 같았다.

아니 그보다, 가령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이런 시골 마을의 병원에 일본을 대표했던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입원해 있을 거라고는. 미카 또한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이츠키 씨의⋯⋯."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어이없을 게 분명했다. 갑자기 병실에 난입해 커튼을 걷고 잠까지 방해한 사람이 돌연 자기가 더 당황하다니. 미카는 입술을 꾹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무표정으로 미카를 내려다보는 그는 묘하게도 슬픈 빛이 엿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미카는 그를 알아보았다. 지난 몇 년 간 단 한 하루도 빠짐없이 스크린 너머로 보았던 얼굴과 눈.

실은 팬이었던 지 무척 오래됐어요.

취향, 눈빛, 순간의 감정⋯⋯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버릇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당신을 오래 봤어요.

어쩌면 나는 당신의 뼈 위치 하나하나마저 외우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당신을 좋아했어요.

미카의 머릿속에서는 그런 말들이 메아리쳤다. 전하고 싶은 말과 감정이 너무나 많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시간을 독점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그가 자신을 똑바로 봐 주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날 아나?"

흠칫 놀란 미카가 저의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당신을 모를 수가 있나? 아마 일본 내에 TV를 소유한 가구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는 지난 몇 년 간 거의 스타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나를 몰라.

그가 작게 읊조렸다.

딸랑 하고 풍경 울리는 소리가 퍼지는 착각이 들었다.미카의 눈이 커다래졌다. 보라색 눈과 두 색이 다른 눈이 서로를 천천히 훑었다.  

두 번째 만남은 무척 기묘했다.

데일 듯 뜨거운 시골의 여름 한복판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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