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5
평온한듯 삐걱대는 사교장과 쿠로의 비밀
대지각 죄송합니다!!!!!!!!!!!!!
그리고 댓글 마음 감사합니다!!!!!!!!!!!!!
23.11.30 타이틀에 케이쿠로 넣어두는 거 깜빡해서 본문 오타랑 함께 수정함....
23.12.17 핸드폰으로 보니까 읽기 힘들어서 글의 서식을 싹 갈아엎으면서 서식에 맞춰서 문장을 조금 추가했어요.
24.07.07 내용 일부 수정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쿠로와 에이치와 레이가 여자입니다! 용납 할 수 없는 분들은 뒤로 가기~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교회의 꽃, 댄스 타임이 곧 시작하는 것을 알리는 시작의 노래였다. 격식적인 사교회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간식거리만 종류별로 먹고 있던 쿠로는 악기 소리에 서둘러 입가를 정리했다.
아침에 준비하면서 소마가 이 댄스 타임만 잘 넘기면 사교회 데뷔를 성공적으로 한 것이라 했었다. 댄스 타임은 총 다섯번 있는데 첫 번째와 마지막 다섯 번째는 약혼이나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의 사이를 다른 귀족들에게 자랑하는 시간이므로, 말은 안 했지만 케이토가 약혼 발표만큼 신경을 쓰고 있을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 자락을 툭툭 털어 정리한 쿠로는 케이토를 향해 미소 지었다. 케이토는 말도 하기 전에 댄스 타임의 준비를 하는 쿠로를 보고 놀랐지만 곧 자신도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쿠로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사교댄스를 출 시간이라는 것을 말로 설명을 했다가는 주변에서 쿠로를 정말 바보로 알 텐데 싶었지만, 쿠로는 사교장에 온 뒤로 처음 볼 정도로 자신 있어 보였다.
그래서 케이토는 긴장도 걱정도 없이 쿠로와의 사교댄스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안심했다. 그래서 시작의 노래가 끝나기 전에 어디쯤으로 이동할까, 하고 사교장의 광장 쪽을 바라본 케이토는 악기를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광장을 가볍게 한 바퀴 돌고 있던 광대를 보고 미간을 있는 힘껏 구겼다. 그런 케이토를 보고 쿠로는 놀라서 그 광대를 같이 쳐다보았다.
그 광대는 하늘색으로 빛나는 은빛의 머리칼이 허벅지의 반까지 올 정도로 길었고 자줏빛의 눈동자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 같았다. 눈가를 가리는 가면을 썼음에도 수려한 외모가 가려지지 않은 그 광대는 오른손은 허리에 묶어둔 팀파니를 닮은 작은북을 연주하며, 왼손으로는 트럼펫을 불고, 종종 왼쪽 발목에 묶어둔 실을 당겨서 등에 메고 있던 큰 북을 울리며 길쭉한 다리로 발랄하게 광장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들고 있는 악기가 좀 많은 것과 광대치고는 입고 있는 옷이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걸 제외하면 혼자 하는 마칭 밴드였다. 이렇게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연주하는 곡도 수준급이라 눈과 귀가 즐거운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쿠로는 아무리 봐도 케이토가 짜증을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케이토, 공연이 마음에-"
"쉿. 쿠로, 목소릴 낮춰라. 와타루님의 공연이다."
"... 님?"
쿠로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에 케이토가 극존칭을 붙이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토의 아버지, 하스미 공작은 소유지로 이 유메노사키 제국의 동부 국경선을 긋는 남자이자, 제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역사도 있고, 현재 황국 기사단의 단장이자, 최근 그의 큰아들이 실력만으로 황국 기사단의 차기 단장직으로 인정받았다.
그런 그의 둘째 아들인 케이토가 그냥 존칭도 아니고 무려 극존칭을 붙이는 사람은 황족이나 극히 일부 귀족들로 매우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높은 사람이니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 본 것 까진 알겠는데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몰라서 쿠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런 쿠로도 곧 '와타루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케이토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도 눈을 흘기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런 시선을 받는 높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황태자의 부마, 와타루 히비키. 떠돌이 광대로서 몇 번 황궁 내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든 건지 황태자가 대뜸 지목해서 부마가 된 남자.
에이치 황태자가 결혼식은커녕 성인식을 할 나이도 되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부마가 아니라 약혼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반대가 심했다. 이것 때문에 상점가에서도 한동안 이야기가 나돌았었다. 쿠로는 그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라고 알게 된 것 까진 좋은데 이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약혼식에서 처음 만난 뒤로 쿠로가 별의별 이유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어도 설교를 늘어놓았을지언정 단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는 케이토가, 그 케이토의 얼굴의 완전히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케이토에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체 쿠로는 말도 못 붙이고 그저 서 있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임에도 와타루는 웃는 얼굴로 곡을 끝까지 마무리하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고는 오케스트라 악단이 있는 곳으로 퇴장했다. 그런 적막한 사교회장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에이치 황태자였다.
"역시, 나의 와타루는 악기 연주도 수준급이네. 여러 악기를 혼자서 들고 마칭 밴드를 이렇게 완벽하게 할 줄이야. 재미있는 볼거리였어. 주최자의 권한으로 지각한 벌은 없는 걸로 할게, 나의 와타루. 이쪽으로 오렴, 시작의 노래가 끝났으니 같이 춤을 추자. 주최자인 내가 즐거워야 손님들도 즐거워할 테지. 나의 와타루가 모두를 기다리게 하진 않으리라 믿어."
"마음에 들어주시다니 영광이군요, 황태자 저하. 저하의 너그러우신 마음씨에 감사를 올립니다. 그럼 말씀에 따라 모두를 위해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워볼까요, 에이치 저하?"
한순간이었지만, 와타루의 눈썹이 대답하기 전에 까딱이는 것을 쿠로는 분명히 보았다. 저 약혼은 황태자의 독단이라고 듣긴 했지만 설마 와타루의 의견도 무시한 건가? 쿠로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에이치와 와타루는 광장의 한가운데에 마주 서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도입부가 살벌한 댄스 타임의 시작이었다. 온화한 노래가 울려 퍼진 덕인지 살벌한 분위기였던 귀족들도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몇몇 쌍이 모여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든 것을 보고 쿠로는 조심스레 케이토를 다시 보았다. 그러자 케이토와 눈이 마주쳤다.
"쿠로, 우리들도 나가서 같이 추지 않겠나?"
"으, 응. 물론이지, 케이토."
케이토도 다른 귀족들처럼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쿠로는 그렇게 케이토가 내민 손을 잡고 뷔페 코너를 벗어나 적당히 광장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바짝 붙어서 마주 보고 서 있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교댄스를 위한 자세를 잡았을 뿐이지만 쿠로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힜다.
이제야 겨우 대화할 때 마주 봐도 긴장하지 않을 정도만 익숙해진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피하는 짓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인 걸 알고 있었기에 쿠로는 억지로 케이토의 미간을 보려 노력했다. 그런 쿠로의 모습에 케이토는 덩달아 같이 긴장되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 긴장하지 말아라. 날 믿고 몸을 맡기면 된다, 쿠로."
"오우, 알고 있어. 잘 부탁해, 케이토."
그렇게 노래에 맞춰 두 사람도 부드럽게 춤을 추었다. 시간 관계상 처음 맞춰보는 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거의 완벽한 호흡으로 경쾌하게 광장을 돌았다. 꽤 긴장했던 쿠로도 막상 시작하고 나니 긴장이 풀려서 평소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난 쿠로가 미소를 지으니, 케이토도 거기에 답하듯 같이 웃어주었다. 내내 약혼 발표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던 케이토도 걱정거리가 사라져 진심으로 신이 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광장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첫 번째 노래가 끝이 났다. 그리고 어느샌가 두 사람은 다시 뷔페 코너 앞이었다. 케이토의 리드에 쿠로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우와. 케이토, 여기에 딱 맞춰서 멈춘 거야?"
"그래, 아직 못 먹어본 음식이 있는 걸로 안다, 쿠로. 마지막 다섯 번째 댄스 타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느긋하게 먹어라."
"... 왠지 케이토가 날 먹보 취급하는 것 같은데."
"아니다, 쿠로. 그저 여기에서 할 일이란 먹고 춤 추는 것뿐이라서 그렇다. 그저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나?"
"그건 그런데, 이럴 거면 그냥 다섯 번째 댄스 타임까지 계속 춤추고 있으면 안 돼? 먹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만히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
"나와 춤추는 게 그렇게 마음에 들다니 영광이군. 하지만 그렇다면 거의 두 시간 동안 춤을 춘 다음 사십 분간 또 춤을 춰야 하는데, 자신 있나?"
"생각보다 길긴 한데, 괜찮을 것 같아."
"... 세 번째 댄스 타임에 한 번 더 춤을 신청해도 될까, 쿠로?"
"역시 그게 낫겠지? 응, 그렇게 하자, 케이토."
순간 파래진 케이토의 안색에 쿠로가 말을 바꿨다. 덕분에 케이토는 속으로 크게 안심했다. 말 한 번 잘못 뱉었다가 케이토는 하마터면 첫 번째 댄스 타임 시간까지 합쳐서 거의 세 시간 동안 쉬지도 못하고 춤을 출 뻔했다. 그때, 옆에서 그 발언을 들은 나츠하 백작 영애가 살짝 웃더니 쿠로에게 말을 걸어왔다.
쿠로의 체력에 관해 칭찬하는 말로 자연스레 쿠로와 말을 튼 영애는 먹을 것 관련으로 이야기를 틀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까 약혼 축하를 위해 한 바퀴 돌 때 마주친 친 황태자파 사람이었다. 그래서 딱히 경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케이토는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모름지기 사교회의 목적은 먹거나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저런 소소한 인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원래 상점가에서 알아주는 마당발이었던 쿠로의 성격상 케이토가 아무도 못 만나게 하더라도 어떻게든 인맥을 구축해낼 것이 보이기에 케이토는 어느 정도는 쿠로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친해지게 내버려 뒀다가는 케이토에 관한 험담을 듣거나 다른 영식과 친해져서 파혼할 결심을 하거나 케이토가 지금부터 에이치와 벌릴 일에 대해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케이토에 관한 험담을 하지 못하는 친 황태자파이자 백작 이하의 영애들을 중심으로만 친해질 수 있게끔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토가 음료수를 들고 뷔페 코너를 돌아다니고 있던 웨이터에게 음료를 부탁하자, 웨이터가 음료를 건네주며 황태자 저하가 찾는다고 언질을 주었다. 혼자 오라는 언급에 황당했지만 케이토는 우선 쿠로에게 잠시 갔다 오겠다는 말을 하고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틈을 타 쿠로와 대화하고 싶은 영애 영식들이 아닌 척 몰려들었다. 쿠로가 원체 이례적으로 귀족 지위를 복귀한 사람이자 아카데미 입학도 전에 작위를 받은 능력자라 쿠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 뒤쪽으로 쿠로를 바라보는 한 영애가 있었다.
한편, 케이토를 찾는 황태자는 광장이 잘 보이는 단상 위에 천막과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런 황태자의 옆에 좀 떨어진 곳에서 와타루가 오케스트라의 노래에 맞춰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사교회와는 동떨어지다 못해 따로 노는 광경은 언제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대놓고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그 자리에서 대놓고 욕을 먹었을 테지만, 황태자는 몸이 늘 안 좋다 보니 중간에 피를 토하면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덩그러니 앉아있게 두는 게 일상이었다. 당사자인 에이치는 이걸 정말 싫어해서 종종 슬그머니 내려가 있기도 했었다. 물론 금방 잡혀서 다시 단상 위로 올려지곤 했지만.
오늘도 시작부터 이 꼴이 나서 에이치는 너무나도 지루하단 듯이 미묘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저럴 때 괜히 뭐 하나 책잡히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케이토는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기에 지체하지 않고 에이치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에이치 저하, 부르셨다기에 왔습니다."
"어라, 케이토.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리다니. 여기는 사교회, 친분을 다지기 위해서 연 자리지. 사교회를 열겠다고 편지를 한 이후로 어떻게든 몸 상태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한 노력이 아까워진 기분이야. 여기에서만큼은 격식 치르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몇 번을 해야 알아들어 줄까.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면서."
"했다가 한 소리 듣는 것보다는 안 했다가 한 소리 듣는 게 나아서 그런다, 에이치. 용건이 뭐냐."
"후후, 나는 체력이 안 돼서 중간에 그만두고 또다시 유배당하듯 이 자리에 올라와 앉았는데, 케이토는 참 오랫동안 춤을 추고 있으니 눈길이 가더라. 케이토도 그렇고 쿠로 군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지 감상이 궁금해졌어. 연습하면서 질리도록 해 봤을 텐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사람들 사이를 누비니 들뜨기라도 한 걸까? 쿠로 군이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이렇게까지 잘 하려면 연습을 꽤 했을 텐데 싸우지는 않았니?"
"연습? 아니, 그럴 시간은 없었다. 쿠로는 이 의상을 만드느라 바빠서 편지만 좀 주고받은 게 다다. 쿠로가 사교 댄스를 출 줄 아는 게 그리 신기한가, 에이치?"
"케이토, 그 질문은 진심으로 한 걸까? 사교회에 올 정도의 귀족 영애가 아니라면 굳이 실생활에 쓸 일이 없을 사교댄스를 굳이 배울 필요가 없지. 쿠로 군의 어머님은 살아계실 적 귀족들과의 커넥션이 있긴 하지만, 재단사로서의 인맥일 뿐이고, 쿠로 군을 귀족가에 데리고 간 적은 없는 걸로 확인했어. 귀족들과의 사교회에 쿠로 군을 데려올 생각은 없는 것 같은 행보였는데, 사교회에서 쓸 춤은 가르쳐 놓은 건가? 앞뒤가 맞지 않는걸?"
"... 에이치의 말을 듣고 보니 위화감이 느껴지는군. 쿠로가 귀족 영애로서 자란 게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식의 범위가 다를 줄이야. 사용인들에게 배웠다 하더라도 사일 안에 편지 3통의 답장과 드레스 한 벌, 정장 한 벌을 만들면서 틈틈이 사교댄스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쿠로에게 확인이 필요하겠군."
"빠른 확인을 부탁해, 케이토. 실제로 쿠로군의 먼 친척이 자작 직이었던 건 맞지만, 쿠로 군에게 사교회를 위한 지식을 가르치기는커녕 본인들도 버티기 힘들어서 서서히 사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대가 끊긴 걸 확인했어. 친척에게 배운 게 아니라는건 확실해. 만약, 쿠로 군에 관해 놓치고 있는 게 있다면 케이토가 많이 귀찮아 질 거야."
"그래, 에이치. 확인하고 연락 주마. 쿠로는 아직 뷔페가 있는 쪽에 있을...? 잠시만, 저 기둥 쪽에 있는 건 쿠로와 레이 공작 영애가 아닌가?"
일이 이렇게 되기 수 분 전, 에이치와 케이토가 아직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쿠로는 귀족 영애 영식들에게 둘러싸여서 대화하고 있었다. 그러다 케이토가 황태자의 부름에 가버리고 나자 좋아하는 먹을거리 이야기는 당연한 듯이 케이토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래서 쿠로는 슬슬 그 이야기를 꺼낼 시간이 왔구나 싶어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케이토가 쿠로에게 반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는데, 쿠로가 귀족 지위를 복귀하면서 약혼을 신청했고, 그걸 쿠로가 냅다 받아들였다는 그 이야기를 케이토가 없으니 쿠로가 자기 입으로 말해야 했다. 괜히 자기 자랑 같고 민망해서 쿠로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후후, 케이토 공작 영식께서는 사교회에 나와도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안 하는 편이라 비밀이 많으신 분이거든요. 그런 분이 갑작스럽게 약혼을 했다고 하니 다들 신기해했답니다. 이런 쪽으로는 관심이 아예 없는 분인 줄 알았거든요."
"네, 맞아요. 보다시피 케이토 공작 영식께서는 집안도 좋고 얼굴도 잘 갖춰진 분이다 보니 먼저 말을 걸어본 영애가 꽤 많답니다. 그런데 늘 칼같이 거리를 두시곤 하셔서 다들 포기했었죠."
"그렇게 칼같이 거절하는 사람인가요? 내가 느끼기에는 여성을 대하는데 익숙하다고 해야 할지 능숙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느낌이었는데. 가벼운 남자는 절대 아니지만, 뭐랄까 사소한 것도 잘 챙겨주는 게 몸에 배어있는 느낌이라서 관심이 아예 없어 보였다고 들으니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 그런 점은 황태자 저하를 보좌하느라 붙은 버릇일 것이랍니다. 지금도 저렇게 딱 붙어서 대화하고 있죠? 거의 보좌관 같은 위치에 있다 보니 이래저래 익숙한 거겠죠."
"저희야 당연히 황태자 저하와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느니 케이토 공작 영식의 저런 모습은 황태자 저하께만 나오는 행동인 줄 알았는데, 키류 자작께는 더 극진히 대하는 모습에 놀랐답니다."
"저도 정말 놀랐답니다. 키류 자작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얼굴색이 확확 바뀌니 제가 알던 케이토 자작 영식이 맞는지 눈을 의심했을 정도라고요?"
"괜찮으시다면 케이토 자작 영식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케이토 공작 영식이 약혼을 신청하게 된 정황이라던가, 케이토 공작 영식과 약혼을 하고 싶어진 한마디라던가."
"그런 건 없어요. 애초에 처음 대화해 본건 약혼식이 끝난 이후여서."
"네?"
"앗? 아, 그게, 사실은 혼담을 위해 온 사진들을 보고 케이토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아버지께 전했더니 아버지가 약혼을 하자고 연락을 한 건지, 그 길로 바로 약혼식 준비가 시작되어 버려서 바빠지는 바람에 제대로 대회를 해 본 적은 약혼식 이후가 처음이 되었어요."
"케이토 공작 영식께서? 아니, 하스미 공작 부부의 반대는 없으셨나요? 장남이 먼 곳으로 출장을 가버리게 돼서 쓸쓸하다고 차남인 케이토 공작 영식은 최소한도의 사교회만 나가게 하면서 행동 하나하나 엄격하게 신경 쓰시는 분들이 그런 대담한 짓을 하셨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 말이 맞아요. 케이토 공작 영식께서 같이 앉아 대화해 본 적도 없는 키류 자작께 하스미 공작 부부 몰래 혼담을 넣기라도 했었단 말인가요?"
"저도 당황스러웠답니다, 아직 상점가에서 장사를 하던 시절의 저를 알고 있더라구요. 사실은 이게 원인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자작이 되기 전까지 저는 평민이었으니까요. 케이토가 좋은 영애 분과 맺어지길 원하시는 하스미 공작 부부께서는 케이토가 저를 신경 쓰는 게 마음에 안 드셨겠죠. 하지만 제가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에 혼담을 넣는 걸 허락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랬더니 약혼을 하자는 대답이 돌아와서 약혼을 했다? 그렇게 된 거라면 키류 자작께서 싫다고 하셨으면 됐었을 텐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쿠로 혼자 줄줄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대답을 하면서 부분부분 말을 하면 되다 보니 쿠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편하게 말이 나왔다. 영애 영식들이 와, 그렇구나! 같은 반응이 아니라 아니 어째서 왜? 같은 반응을 해준 덕에 뭔가 신나버려서 안 해도 될 말을 한 것 같지만 어떻게 잘 넘겼다.
그러다 결국 튀어나온 쿠로가 케이토를 거절하지 못한 이유를 묻는 말에 쿠로는 작게 숨을 골랐다. 당연히 돈과 가족들의 안녕 때문이지만, 여기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 가문 간의 정략결혼을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진실한 약혼처럼 만들기 위해서 쿠로가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저는 감히 케이토를 바라보면 안 됐던 평민이었으니까요. 그, 자작이 되어서, 나란히 설 수 있게 되어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케이토를 알아갈수록 좋은 분이란 걸 알게 되어서, 거절할 생각은 아직 없어요. 하하하..."
쿠로가 어색하게 웃자, 주변 영애 영식들도 같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웃으며 몇몇 영식들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 케이토가 그렇게 원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영식들을 시작으로 영애들까지 제법 흩어지자 쿠로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케이토가 가버리고 난 직후에 쏟아진 질문 세례에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구나 싶어졌다.
그러다 케이토가 보고 있으면 좋아할 텐데 싶어져서 쿠로는 케이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케이토는 황태자랑 바짝 붙어서 진지한 이야기 중이었다. 그 모습에 쿠로는 울컥 짜증이 났다. 그렇게 걱정하고 신경 썼으면서 정작 마지막 결정타는 나 몰라라 다 자신에게 던져놓고 저러고 있느니 쿠로는 자연스레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쿠로를 먼발치에서 처음부터 쭉 바라보고 있던 한 영애가 쿠로를 향해 다가왔다.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유달리 어둡고 딱 붙는 디자인의 특이한 드레스를 입은 그 영애는 독특한 드레스를 빼더라도 손짓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른,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검은 잉크보다도 검은 머리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게 파도치며 어깨를 넉넉히 덮었고, 붉은 눈동자는 한 번 마주치면 눈을 돌릴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쿠로랑 엇비슷할 정도로 큰 키를 가졌으면서도 높은 굽의 구두를 신었는지 유달리 크게 들리는 발소리에 쿠로는 케이토를 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이 첫 인사하지, 키류 자작? 난 레이 사쿠마. 사쿠마 공작의 첫째 딸이지. 괜찮다면, 한 곡 같이 추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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