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4
약혼이 훼방 놓일 수 있는 마지막 장소, 사교회장
처음엔 이렇게 길어질 예정이 없었어서 기세만으로 쓰고 있었는데 하다 보니까 설정이 좀 추가돼서 1편 2편에 (특히 1편) 수정을 좀 넣었습니다! 오늘(23.01.19) 6시 이전에 보신 분들은 살짝 확인해 주고 이 편 읽으시면 편할 거예요~
이름있는 모브군이 하나 톡 튀어나왔는데 이번 편 끝나고 더 나올 예정은 없습니다.
오기인 처형...이 힘드신 분은... 네. 즈! 때처럼 심하게는 아니지만 뉘앙스가 좀 나올 예정입니다. 그으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됐어요오... (._. )
23.10.11 오탈자 수정
23.11.01 오탈자 수정
23.12.16 핸드폰으로 보니까 읽기 힘들어서 글의 서식을 싹 갈아엎으면서 서식에 맞춰서 문장을 조금 추가했어요.
24.07.07 내용 일부 수정
24.07.27 내용 일부 수정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쿠로와 소마와 에이치가 여자입니다! 용납 할 수 없는 분들은 뒤로가기~
사교회 당일 아침.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준비한 덕에 쿠로의 몸단장은 거의 끝이 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쿠로는 소마랑 전신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용인이 급하게 드레스룸으로 들어와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무려 황태자 에이치가 쿠로를 위해 보낸 마차가 지금 저택 앞에 도착한 데다가 심지어 그 안에 케이토가 타고 있어서 지금 쿠로를 만나러 방 앞에까지 와 있다는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소식을 들은 쿠로는 황당함에 현실감이 없어져서 진짜인지 확인을 하겠답시고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열린 방문 앞에는 케이토가 서 있었다. 정확하게는 쿠로가 있다는 방을 안내받아 도착하자마자 열린 문에 놀란 케이토가 서 있었다. 이렇게 바로 앞까지 와 있을 줄 몰랐던 쿠로와 대뜸 문을 열고 나올 줄 몰랐던 케이토는 서로 당황해서 얼어 붙었다. 그 잠깐의 적막을 깬 사람은 쿠로였다.
"우와 진짜로 케이토가 있구나."
"그건 도대체 무슨 반응이지?"
"왜 있는 거야?"
"이건 또 무슨 질문이냐, 구제 불능이군. 에이치 녀ㅅ, 아니, 에이치 저하가 쿠로를 데리러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나도 쿠로가 마차를 타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걱정되어 보러 오고 싶었던 참이라, 에이치 저하의 배려를 받아 데리러 왔다, 쿠로."
"잠시만, 마차 꼭 타야 해?"
"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황태자 저하가 직접 내리신 마차를 타지 않는 건 명령 불복죄다. 쿠로, 미안하지만 아무리 나라도 황태자의 명령 불복죄는 못 막아준다."
"... 명령 불복죄면 보통 사형, 이었던가?"
"직접 보낸 마차를 안 탄 정도라면 보석금 정도로 끝나겠지만, 확실히 벌이 되게 하기 위해서 꽤 많은 금액이 될 거다."
"마차, 탈게..."
"쿠로, 그렇게 얼굴을 문지르면 화장이 다 번진다."
"엇?! 지금 번졌어?"
"... 눈 화장은 다시 하는 게 좋겠군."
"진짜?!"
깜짝 놀란 쿠로가 방 안쪽의 소마를 쳐다보니 소마는 힘이 다 빠진 듯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쿠로를 보고 있었다. 쿠로는 마지막으로 거울까지 보고 난 다음 조용히 수건을 집어 들고 서둘러 얼굴의 화장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처음부터 다시 화장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급하게 화장을 하는 쿠로를 케이토는 드레스룸의 벽에 기댄 체 기다리기로 했다. 케이토가 벽에 기댄 체 바라본 쿠로의 드레스는 소마가 말했던 것처럼 조금 알록달록한 느낌이었다. 쿠로의 머리 색보다 조금 밝은 붉은색과 어두운 분홍을 적절히 섞은 베이스에 옅은 노랑과 초록으로 포인트를 준 화려한 드레스였다.
쿠로가 보내 줘서 케이토가 오늘 입고 온 양장도 그런 느낌이었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초록빛의 긴 겉옷, 밝은 연둣빛 와이셔츠, 어두운 노란빛 조끼, 짙은 풀빛 바지와 군데군데 포인트로 넣은 붉은색이 마치 쿠로의 드레스와 한 세트 같아서 케이토는 순수하게 쿠로의 실력에 감탄했다.
한 번도 옷을 만들기 위해서 옷감을 사 본 적 없는 케이토가 저질러 버린 옷감을 애매하게 사버린 실수를 완전히 커버해 낸 것도 모자라, 약혼을 발표하는 자리에 걸맞은 한 쌍의 옷을 만들어낸 쿠로의 센스가 케이토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케이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쿠로의 옷을 티 나지 않게 번갈아 가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제 진짜로 약혼 발표를 하러 가는 거라는 실감이 들어버린 케이토는 급하게 입가를 가린 체 표정을 정돈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렇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표정을 정돈해낸 케이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화장을 하는 쿠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 화장을 위해서 눈을 감고 있는 쿠로를 보니 왠지 심장이 좀 빨리 뛰는 느낌이라 케이토는 다시 바닥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런 케이토가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정리하고 나니 쿠로의 화장이 다시 완성되었다. 그래서 일어나 큰 거울로 화장을 확인하는 쿠로의 옆으로 케이토가 가서 섰다. 괜히 의식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케이토였지만, 그럼에도 거울 앞에서 나란히 서서 옷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오늘 만나기 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대놓고 간지럼 태우는 장난 같고 실제로 간지럽기도 하니까 하지 말아달라 부탁하기도 했고, 상점가에서 몇 번 했을 때 반응이 영 안 좋았기에 케이토는 쿠로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여성의 허리에 손을 얹는 포즈 자체는 남자 귀족들이 약혼녀나 부인같이 매우 가까운 사이의 여성을 에스코트할 때 나오는 몸짓이었다. 그래서 쿠로가 대놓고 거절한 게 케이토는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말없이 자신의 팔 안쪽을 톡톡 두드리는 케이토의 몸짓에 출발 전의 마지막 체크를 하려나 보다 넘겨짚은 쿠로는 케이토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채는 일 없이 바로 옆으로 이동해서 팔짱을 꼈다. 그렇게 마치 그림 같은 한 쌍이 거울에 비쳤다.
팔짱을 한 번 껴본 케이토와 쿠로는 그대로 방을 나와 저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탔다. 멀미가 걱정되어 뻣뻣하게 얼어붙은 쿠로에게 케이토가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기댄 체 눈을 감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있으면 멀미 기운이 덜할 거라는 케이토의 말에 쿠로는 양 눈을 꽉 감았다.
기대라고 해 주었는데도 기대지 않고 말만 알겠다고 하는 쿠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토는 결국 조심스레 반댓손으로 쿠로를 살짝 당겨서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이미 마차는 출발했고 그 탓에 얼어붙은 쿠로는 케이토가 당기는 데로 어정쩡하게 기댔다.
멀미 기운이 심해서 뻣뻣하게 얼어있는 건지, 처음 가는 사교회가 긴장되어 뻣뻣하게 얼어있는 건지 구별이 안 되는 케이토는 그저 쿠로가 잠들지 못할 정도만 계속 말을 붙였다. 그 덕분에 멀미 기운 탓에 얼어있던 쿠로는 점점 편하게 케이토에게 기댈 수 있게 돼서 평소보다 훨씬 편하게 마차를 타고 사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사교회장은 황궁 안쪽의 한 공개용 정원이었다. 정원 입구에 도착한 마차에서 케이토가 먼저 내려서 쿠로의 손을 잡아주어서 내려오기 편하게 에스코트했다. 황태자의 초대용 마차에서 그렇게 내린 두 사람에게 먼저 도착해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두 사람은 경비병에게 초대장을 보여주고 사교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상점가 사람들과 다르게 귀족들은 살짝 거리를 둔 체 정중한 척 슬쩍 위아래로 훑으며 모든 것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 특유의 분위기에 쿠로는 속도 안 좋은 와중에 그들의 인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바로 뒤에 서 따라오던 케이토가 앞으로 나와서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쿠로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케이토는 그런 격식적인 말이 금방 생각나는구나..."
"금방 생각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몇 가지 표현을 돌려쓰는 것에 가깝다. 외우기만 하면 쿠로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 거다."
"그 외우는 게 안 되는데..."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니까 안 되는 거다."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야."
"구제 불능이군. 이대로 가다 보면 이야기가 같은 곳에서 빙빙 돌겠다."
"케이토가 빙빙 돌리는 거야. 그리고 이런 분위기 부담스러워서 싫어.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할 일은 다 하고 가야 한다, 쿠로. 아까 마차 안에서도 말했듯이 시작 시간에 에이지 저하가 개회사를 끝내고 쿠로를 호명하면, 앞으로 나가서 에이치 저하와 드레스 자락이 한 걸음 떨어진 대각선 앞에서 사람들 쪽을 바라보며 서야 한다."
"그래그래, 케이토는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내 바로 앞에 있을 테니, 에이치 저하의 허락이 떨어지면 케이토를 불러서 약혼자로서 소개하기. 이거 세 번째 듣는다고, 내가 많이 못 미더운 건 알겠지만 자꾸 말 안 해도 돼."
"못 미더운 게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절차라서 그렇다."
"그래, 알겠어."
그런 잡담을 하며 케이토는 쿠로의 상태를 살폈다. 쿠로는 전에 티타임에 초대했을 때 보다 멀미 기운이 훨씬 적어 보였다. 이래저래 알아보다가 어떤 사용인한테 들은 민간요법이 꽤 효과가 좋아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약혼 발표날, 즉 이 약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훼방을 놓을 마지막 기회였다.
실제로 이쪽을 대놓고 바라보며 수군대는 영식들이 꽤 많았다. 일부러 그들이 보이지 않게 쿠로의 시선을 유도하면서 케이토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 케이토를 보고 있던 한 영식이 옆에 있는 영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렇게 옆구리가 찔린 영식은 자연스럽게 이동해 쿠로의 시선방향에서 대놓고 걸어와 말을 걸었다.
"실례, 키류 자작.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무슨 일로?"
"조금 개인적인 이유라 이쪽으로 와 주시면 감사합니다."
"엇, 어..."
"제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입니까?"
"네, 저의 개인사이므로 배려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쿠로. 그럼 천천히 대화 나누시길, 코루토 자작 영식."
"그러죠, 케이토 공작 영식."
분명 두 사람 다 말은 상냥하고 정중한데 주변 공기에 답답할 만큼 가득 찬 살기에 쿠로는 영문도 모른 채 잔뜩 긴장한 체 자작 영식을 따라갔다. 화가 난다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거는 시정잡배라면 익숙하게 때려눕힐 텐데, 이 자작 영식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것 같으면서 얼굴만 환하게 웃고 있으니까 쿠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중한 태도 탓에 케이토도 별다른 대응을 못 한 체 먼 발치에서 보고만 있게 되어버렸다. 뭔지는 몰라도, 쿠로는 이 자작 영식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게 사교회장의 다른 한산한 곳으로 이동하며 자작 영식은 뒤따라 걸어오는 쿠로에게 상냥한 말을 걸어 주었다.
저번에 보낸 선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쿠로는 이 자작 영식이 기억은 안 나지만 자신에게 혼담을 보냈던 귀족들 중 하나인 것을 눈치챘다. 분명 소마가 해준 말에 의하면, 케이토네 사용인들이 쿠로의 집에 온 이후에 들어온 혼담용 선물은 사용인들이 모두 반송해서 쿠로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약혼을 한 것 자체는 이미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케이토랑 도착해서 계속 케이토랑 있었으니, 그 약혼 상대가 케이토라는 것 정도는 발표 전이지만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쿠로는 이 자작 영식이 왜 이런 말을 꺼낸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일단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이 정도 왔으면 케이토 공작 영식과는 꽤 거리가 있으니, 저희의 대화가 들리지 않겠지요."
"케이토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가요?"
"네, 물론입니다, 키류 자작.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약혼 발표 때 저를 지목해 주시겠습니까?"
"예???"
자작 영식이 말한 데로 케이토에게 두 사람의 정확한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토는 대화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약혼 발표 때 다른 사람을 지목해 달라는 부탁을 해서 쿠로가 거절하게 한 다음, 본 목적인 오늘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안 하도록 부탁할 것이다.
한 번 거절해 버리면 미안해서라도 다음 부탁을 들어주기 쉽게 된다는 심리적 전술에 쿠로가 걸려들지 안 들지 케이토는 예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거짓말이 아닌, 말을 하지 않는다 정도면 의외로 상냥한 쿠로가 부탁을 들어줄 지도 몰랐다.
오늘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은 했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니 밀려오는 무력감과 스트레스에 케이토는 속이 쓰렸다. 만약 쿠로가 저 자작 영식의 심리전에 걸려들어서 오늘 약혼 발표를 안 하게 되면 다른 영식들이 쿠로에게 말을 걸어도 케이토는 제지할 명분이 없어 뒤로 밀려 나와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아침에 에이치가 뜬금없이 마차를 보내준 덕분에 사교회장에 있던 모든 귀족들에게 쿠로와 매우 친밀하다는 어필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쿠로는 이쪽의 규칙을 잘 모르니까. 이 이유를 들이대며 권모술수에 능한 귀족들이 뭘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쿠로가 제대로 말을 섞은 귀족 영식은 케이토뿐이었다. 그래서 쿠로가 케이토에게 느낀 어떤 종류의 호감은 케이토에게만 느낄 수 있는 호감이 아닌, 다른 영식들에게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호감이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다른 영식들과 말을 섞고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 쿠로가 다른 영식에게 강한 호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쿠로가 파혼을 신청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쿠로가 지금 사는 저택 같은 경우도 후작 이상의 귀족 영식은 얼마든지 다른 저택으로 제공이 가능하고, 돈이라면 케이토네 집 보다 많은 집도 꽤 있었다. 이걸 염려해서 약혼 이후로 엄청 챙겨주고 신경 써 준 거지만 쿠로가 그걸 마음에 들어 할지 케이토는 확신이 없었다.
다시 또 상점가에 놀러 가자든가, 이런 것을 챙겨주어서 고맙다던가, 그런 말들은 케이토가 귀족 영식인 탓에 진심인지 예의인지 구별이 거의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약혼을 하고 아직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호감을 샀어도 많이 얄팍할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케이토가 이것저것 서두르는 것처럼 보여서 되려 역효과가 있을 수도 있었다. 케이토와 파혼하고 자신과 약혼을 하자는 영식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쿠로는 누구를 선택할까. 케이토에게 있어 이 약혼은 장기전이었다. 어떻게든 오래 유지를 해서 결혼은 물론이고 노후까지 끌고 가야 하는 장기전.
영원같았던 자작 영식과 쿠로의 대화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쿠로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어두운 얼굴을 한 체 케이토쪽으로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중간중간 옆에서 느껴지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 탓인지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하는 탓에 쿠로의 표정을 읽기 힘들어 케이토는 가뜩이나 쓰린 속이 더 쓰려오기 시작했다.
저 잔뜩 힘이 들어간 눈썹이, 어두운 표정이,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 부디 나에게 미안해서 나오는 몸짓이 아니기를 케이토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이 마음이 표정에 나와버린 건지 케이토와 눈이 마주친 쿠로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지막은 거의 뛰듯이 걸어온 쿠로는 가장 먼저 케이토의 표정을 살폈다.
"케이토, 많이 기다렸지?"
"아니다, 쿠로. 그것보다 코루토 자작 영식이 뭐라 하던?"
"무례한 부탁을 하기에 거절하고 왔어. 저 사람 케이토가 어지간히 싫나 봐."
"음, 고맙다. 저 자작 영식이 무슨 부탁을 한 건지는 짐작이 가지만... 묻지는 않으마."
"의외네. 아는 만큼 더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저쪽을 봐라, 시간이 되어서 황태자 저하가 오셨다. 이동하자."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인 거냐, 에이치. 말할 수 없는 불만을 속으로 뱉은 케이토는 에이치 황태자의 개회사를 듣기 위해 쿠로와 걸음을 옮겼다. 시기상 오늘이 아카데미 입학 전 마지막으로 열리는 대규모 사교회가 되다 보니, 에이치는 조금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듯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백금발의 머리를 반묶음으로 정리하고 대외용의 온화한 미소를 지은 에이치는 연 베이지를 중심으로 노랑과 하늘색을 배치한 레이스가 가득 들어간 풍성한 드레스를 입어 이곳의 그 어떤 영애보다 화려하고 존재감이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푸른 하늘빛의 눈빛은 사람에 따라 온화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했다.
두 사람이 에이치가 쿠로를 소개하기 위해서 부르기 좋은 곳으로 이동하던 도중 쿠로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래서 케이토도 멈춰서 쿠로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꽤 놀란 케이토와 눈이 마주친 쿠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케이토의 팔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히 군중 안에서 황태자 저하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황태자가 언제나처럼 아주 많이 긴 개회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쿠로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에이치 황태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긴장을 풀기 위한 심호흡이 아니었던지라 놀란 케이토는 쿠로가 왜 저러는지, 아까 거절한 부탁이 정확히 뭔지 물어볼 수 없어서 점점 불안해졌다.
그래서 케이토는 영식답지 않게 고개까지 움직이며 쿠로와 황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 황태자의 연설 중이니 그쪽으로 얼굴을 향해야 하는데 옆의 쿠로가 너무나도 신경 쓰여서 고개가 돌아가다 못해 표정 관리마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런 케이토랑 연설 중이던 에이치가 눈이 마주쳤다.
에이치는 아무것도 못 본 듯이 여유롭게 다른 사람들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케이토는 나중에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게 되면 에이치가 엄청 놀려 댈 것이라는 예감에 가뜩이나 쓰린 속이 더 쓰려졌다. 배를 꾹 누르며 쓰린 속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런 것으로 진정될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에이치가 마차를 보내 주었었다. 그것 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으니 분명 에이치는 그걸 명분 삼아 별 희한한 부탁들을 할 것이었다. 약혼발표도 발표지만, 그다음은 에이치의 장난기 어린 대가 요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맞춤 한 번에 배로 복잡해진 케이토의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에이치는 개회사를 더 늘리지 않고 마무리를 지었다.
"후후, 생각보다 개회사가 길어져 버렸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면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니, 입학 전에 마지막으로 즐기는 자유로운 사교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보다 더 설레 버린 듯해. 그러면 여기서 형식적인 이야기는 그만하고, 모두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보름 전, 황궁의 기밀문서를 들고 외국에 팔아넘기기 위해서 도망치던 스파이를 잡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대낮에 일어난 불상사를 빠르게 제압하고 자작 지위를 회복한 쿠로 키류 자작, 앞으로 나와 주겠어?"
"네, 황태자 저하."
"가볍게 자기소개를 부탁해도 될까?"
"안녕하세요, 여러분. 얼마 전 자작 지위를 회복한 쿠로 키류입니다. 오늘을 계기로 모두와 좋은 관계를 쌓아 나가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 생각했던 것보다 얌전한 영애분이셨네. 다시 한번 더 자작 지위 복권과 오늘 사교회에 데뷔한 것을 축하해, 키류 자작. 그리고 키류 자작이 일전의 사건으로 꽤 정신이 없었을 와중에, 경사는 연달아서 온다고들 하듯이 성공한 일이 하나 더 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고 있어. 어딘가의 소문에 따르면 약혼을 했다던데,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약혼자분을 소개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끝난 에이치의 말을 들은 케이토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평소라면 공적으로 전혀 태가 나지 않는 선에서 케이토를 신나게 놀려먹는 에이치가 케이토를 또 살짝 도와준 것이었다. 도대체 에이치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쿠로가 무조건 약혼의 이야기를 꺼내게끔 유도해 준 건지 케이토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긴장과 놀람으로 뻣뻣한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서 케이토는 쿠로의 반응을 살폈다. 말하면 안 돼서 당황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까, 라는 케이토의 걱정처럼 케이토와 눈이 마주치자 쿠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그런 쿠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행히도 기다리고 있던 그 말이었다.
"네 물론입니다, 황태자 저하. 엇, 어...? 케이토, 그, 잠시 이쪽으로 나와 줄래?"
"...! 그래, 응. 물론이다, 쿠로."
"이쪽은, 아니 여기 서. 흠흠, 이쪽은 다들 알다시피 케이토 하스미 공작 영식입니다. 실은 일주일 전에, 서로 마음이 맞아 약혼을 맺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해. 설마 약혼 상대가 내 오랜 친우, 케이토였을 줄이야. 케이토가 사랑받고 있는 듯해 나까지 기쁜걸. 그럼 이제 전해야 하는 소식은 모두 전한 것 같으니 지루한 개회사는 이만 마치고 모두가 기다리던 사교회를 시작하려 해. 여기 모여준 모두를 위해 궁중 음악가들이 자아내는 최고의 음악과 궁중 요리사들이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을 준비했으니 다들 즐겁게 지내길 바라. 그럼, 여기까지."
에이치의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은 에이치 쪽을 향했던 시선을 일제히 거두고 두 명에서 네 명 정도가 둥글게 모여서 사담을 시작했다. 그걸 보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케이토는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무사히 약혼 발표를 끝낸 것이 기뻤지만 다리가 풀리지 않게 힘을 주는 것은 까먹지 않았다.
그 옆에서 놀란 쿠로는 어쩔 줄 모르고 일단 케이토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영애로서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쿠로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두세 번 정도 각도를 바꿔가면서 몸을 기울이니, 케이토가 그만하라고 쿠로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핏기가 돌아온 케이토의 얼굴을 마주친 쿠로는 그제야 진정하고 가만히 섰다.
"하하, 아까는 정말 하얗게 질려있더니 드디어 얼굴에 핏기가 도네. 그렇게 긴장한 거야?"
"하얗지는 않았다, 쿠로."
"아니, 충분히 하얗게 질려있었어.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일이 거의 없는 내가 한눈에 보고 저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아마 키류 자작이 장난삼아 대답을 망설였으면 아마 비명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서 실려 갔을 거야. 내가 쓰러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케이토가 쓰러지는 일은 본 적이 없어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키류 자작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안타깝네."
"약혼남이 쓰러져서 실려 가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요."
"아직은 이런 격식적인 자리는 익숙하지 않나 보네. 하지만 그런 실수는 다신 하지 않는 게 좋아. 잊었다면 다시 말해 줄게, 키류 자작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황국 경찰 조직의 구멍을 드러내 버렸어. 하지만 내부 사정상 처벌은커녕 크게 띄워주어야 하니, 이번 실수는 크게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도록 할게. 그렇다고 해서 정도를 넘지 않도록 주의해 주면 좋겠어. 이것과 별개로 동갑인데다가 케이토의 아내 될 영애분이기도 하니 내게 편하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물론 나도 쿠로 군이라 편하게 부를게."
"지적할 것 다 한 거 같은데."
"에이치 저하는 늘 이런 느낌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라, 쿠로."
케이토의 덤덤한 대답이 돌아오자 쿠로는 놀라 케이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속으로 생각한 말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와버린 모양이었다. 불경죄로 잡혀가는게 아닐까 싶어진 쿠로는 급하게 해명을 위해 에이치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아까보다 서늘하게 웃고있는 에이치는 의외로 쿠로가 아니라 케이토에게 말을 붙였다.
"어라, 너무한걸. 케이토. 친우로서 나를 오래 봐온 케이토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네. 안타깝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겠지. 그렇더라도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케이토. 쿠로 군에게는 케이토가 이 사교회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같은 편인 만큼 캐이토의 말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올 것이란 것을. 케이토의 언동 하나 때문에 좋지 못한 첫인상을 쌓아서 피해를 보는 이는 나 하나 뿐이길 바라."
"에이치 저하, 충고는 감사히 듣겠다만 쿠로가 저하를 나쁘게 볼 리 없지 않나. 사교회에 오기 위한 마차를 보내주고 약혼 발표를 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준데다 말실수까지 관대히 넘어가 주었는데. 괜한 억측은 몸에 좋지 않다."
그렇게 말한 케이토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쿠로 쪽의 팔 안쪽을 두드렸다. 대화가 끝이 났으니 자리를 옮기기 위해 팔짱을 끼라는 몸짓이었다. 좀 많이 무례한 말을 해버렸다는 자각이 있었던 쿠로는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게 맞나 싶어져서 몇번 케이토와 에이치를 번갈아 바라보다 실례했습니다는 말을 먼저하고 케이토의 팔에 팔짱을 꼈다.
케이토는 지금 속이 안 좋은 것과 평소에 에이치를 매우 편하게 대했던 탓에 쿠로가 당황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 것 보다는 이상태로 아까 쿠로에게 쓸데없는 부탁을 한 코루토 자작 영식에게 여기서 가장 먼저 약혼 축하를 받기 위해 곧바로 걸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쿠로의 힘은 케이토가 버틸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쿠로는 팔짱을 낀 체 케이토를 질질 끌고 사용인들이 요리를 놓고 있는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케이토의 몸상태가 걱정됬던것은 사실이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에이치의 시선이 마치 케이토가 걱정되서 그런게 맞지?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쿠로는 바로 마실 물을 찾아 걸어갔다.
그런 쿠로의 속도 모르고, 에이치의 시선도 눈치체지 못한체 케이토는 이상한 소문이 나면 안 되므로 큰 소리로 쿠로를 말리면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케이토는 어떻게든 쿠로가 당기는 것을 힘으로 버텨 보려 했지만, 쿠로는 무사히 케이토를 끌고 요리가 놓인 탁자에 도착했다.
"케이토, 아까 엄청 안색이 안 좋던데 속은 괜찮아?"
"지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쿠로. 지금은 약혼 축하를 받으러 가야 한다. 요리 같은 걸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까 에이치 저하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일단 물들고 비상약이라도 받으러 가자. 내 멀미는 그렇게 신경 써 주면서 왜 본인 몸은 아무것도 아닌 것 취급인 거야?"
"...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수 없군. 그래,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속이 쓰리고 아픈 편이다. 늘 먹던 약을 챙겨왔으니 물만 있으면 된다. 고맙다, 쿠로."
"오우, 몸은 소모품이 아니라고. 어쩐지 잔소리가 심하다 싶더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그렇게 긴장됐나? 의외네."
"전혀 아니다. 쿠로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숨길까 봐 좀 걱정이 된 게 다다."
"응?? 아까 그 사람이 한 부탁이 들렸어!? 나 제대로 거절했잖아, 대체 뭘 걱정한 거야?"
"아니, 전혀 안 들렸다. 하지만 그런 부탁을 할 것 같았다. 아마 다른 사람을 지목해 달라고 한 다음, 거절당하자 약혼 발표를 아카데미 입학 이후에 해 달라는 부탁을 했겠지."
"진짜 못 들은 거야? 내용 다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지마."
"진짜 못 들었다. 아마 저 자작 영식은 윗사람에게 명령받아 한 짓이겠지. 약혼 발표가 늦춰지면 그동안은 쿠로에게 어필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잘 되면 나와의 약혼을 깰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약혼 발표가 중요하다."
"딱히 생각나는 그럴듯한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저 사람은... 아니, 뭐 어찌 됐든 그래서 케이토가 그렇게 잔소리 해대며 약혼 발표를 신경 썼던 이유는, 알, 거어..."
"쿠로...?"
말을 하다 말고 쿠로가 무언가를 보고 놀라자 케이토는 뭘 보고 저러는지 확인을 위해 쿠로의 시선 끝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원체 사람도 많고 탁 트인 정원이라 뭘 보고 이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왠지 슈 후작 영식과 눈이 마주쳤지만, 별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케이토는 경계를 하기는커녕 그냥 넘기고 몸을 돌려서 가볍게 쿠로의 양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 덕에 정신이 돌아온 쿠로는 케이토가 속쓰림 약을 먹는 걸 보고 난 다음 팔짱을 낀 체 돌아다니며 영애들에게 인사하고 약혼 축하를 받았다. 이걸 영식들에게 받아야 의미가 있는 케이토는 일부러 영식들을 피하는 쿠로가 답답하지만 우선 쿠로가 하고 싶어 하는 데로 맞춰 주었다.
케이토의 예상대로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경우도 있어서 쿠로는 완전히 영식들을 피할 수 없었다. 먼저 인사해 오는 영애 영식은 친 황태자파이고 쿠로가 다가가서 인사하는 영애 영식은 반 황태자파이지만, 케이토는 쿠로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지 않고 그저 영애 영식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들의 부모님이 노선을 확실히 정한 영애 영식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전부 확인하며 케이토는 아카데미 입학 이후 있을 대규모 숙청의 밑 작업을 시작했다. 케이토는 이런 사정을 쿠로에게 설명할 생각 따위 없었다. 쿠로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에이치를 위한 시나리오를 실현하기로 약혼 전에 이미 케이토가 결정을 내렸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반 황태자파 영식들을 제외한 사교회에 온 모든 영애 영식과 대화를 마친 쿠로는 케이토의 눈치를 보았다. 쿠로는 위화감은 있었지만 확신이 없어 단순히 인사를 다 못한 상황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사람들 안에는 슈 후작 영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소꿉친구이자 첫사랑인 슈 후작 영식에게 만나자마자 약혼을 축하받는 건 미묘한 기분이어서 괜히 피해 다니곤 있지만, 꼭 모두에게 축하를 받아야 한다고 케이토가 한 말 탓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 와중에 슈도 쿠로를 피하는 것 같아 쿠로는 묘하게 화가 났다. 분명히 몇 번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가까이 오지는 않는 슈가 쿠로의 신경을 의도치 않게 빡빡 긁어대고 있을 때, 케이토가 이만하면 되었으니 뭐라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듣던 중 매우 반가운 소리에 바로 수긍한 쿠로는 곧장 아까 물을 가지러 갔던 음식이 놓인 곳으로 갔다. 그리고 접시를 들고 고기 위주로 뷔페 음식을 덜고 지정된 장소에 서서 요리를 먹었다. 궁중 요리사라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격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고기를 먹고 있는 쿠로를 보니 케이토도 곤두세운 신경이 누그러져 마음이 편안해졌다. 옆에서 적당히 같이 먹으며 케이토는 평화롭지만 대숙청의 시작점인 이 사교회를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척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그렇게 잠시 먹고 떠들고 있으니 어느세 자리를 잡고 앉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