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3
하루를 넘기지 못한 거짓말은 의외로 안심되서
23.10.11 오탈자 수정
23.11.03 오탈자 수정
포타에 올렸던 내용을 이쪽으로 가져오며 핸드폰에서 읽기 편하게 서식을 수정하고 문장을 조금 추가했습니다.
24.06.16 내용 일부 수정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쿠로와 소마와 에이치와 레이가 여자입니다! 용납 할 수 없는 분들은 뒤로 가기~
쿠로는 이 뭔지 모를 감정을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케이토가 그러자고 말을 꺼내자마자 얼굴이 보이지 않게 앞서서 걸어 나갔다.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고, 실제로 효과는 좋았다. 좀 걷고 움직이니 쿠로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런데 아는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이 사람은 제 약혼자입니다, 하고 말해야 해서 안 편하기도 했다. 그새 소문이 돌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어서 쑥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까 가만히 서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쿠로는 상점가에서 나고 자란 만큼 익숙하게 돌아다니며 살 것도 사면서 케이토에게 이런 저런 가게를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잠시 돌아다니다 쿠로는 여동생의 선물이 생각나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사야 했다. 집안 사정 탓인지 유달리 일찍 철이 든 동생이 쿠로는 늘 안쓰러웠다. 하지만 동생이 가볍게 '내 선물도 사와'라고 한 게 다여서 뭘 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인형이나 옷 같은 건 쿠로가 많이 만들어 주었기에 영 아니었다. 간식거리도 지금은 먹고 싶은걸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라 굳이? 싶어서 별로였고, 블록 같은 장난감은 좋아하지 않았다. 케이토한테 생각나는 게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케이토는 형에게 선물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쿠로의 질문에 선뜻 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래도 잠시 고민하던 케이토가 만년필 같은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이제 슬슬 읽고 쓰기가 익숙해졌을 테니 고급 필기구 하나쯤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거였다. 쿠로도 그게 좋겠다고 하며 가까운 만년필을 파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동생이 좋아하는 하늘색의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 저가 만년필을 꼼꼼히 골랐다.
그러던 도중 케이토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붉은색 만년필 하나를 쿠로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그 앞에 있는 가격을 본 쿠로는 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쿠로가 영 반응이 없자, 케이토도 강하게 말하지 않고 쿠로 여동생 몫의 만년필과 잉크 몇 개와 예쁜 편지지 정도만 샀다.
계산을 마치고 주인장이 봉투에 포장을 시작하자 케이토는 다른 가계에서 으레 그랬듯이 이때까지 산 물건들이 있는 수레로 보내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쿠로는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라서 그냥 들고 가고 싶었다. 케이토는 그런 쿠로가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저 정도는 들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안 무거워."
"무게의 문제가 아니라 거추장스럽거나 깜박할까 봐 그렇다. 게다가 혹시 소매치기 같은 거랑 만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 근방의 소매치기는 나 안 건드려. 내가 잡은 소매치기범이 한 달에 몇인데 처음부터 나를 노릴 정도의 바보가 있겠어?"
"듣고 보니 그렇군. 그 달리기를 그런 데 쓰고 있었나."
"뭐, 일단 등이 보이기만 하면 다 잡을 수 있어. 소매치기 잡아주고 간식 같은 거 얻어먹은 적도 많고."
"호오, 자주 있는 일이었나?"
"소매치기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뭐 도와드리고 얻어먹은 일은 많지?"
쿠로는 그리 의미를 두고 한 대답은 아니었으나 케이토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기는 커녕 귀여운 에피소드를 들었다는 듯이 은은한 미소를 띈 케이토에 앞에 있던 주인장도 빙그레 웃고 있어서 쿠로는 뻘쭘한 기분에 괜히 됐다며 그냥 가게를 나왔다.
냅다 자기 손으로 가게 문을 열고 나가 버린 쿠로를 보고 케이토가 놀라서 바로 뒤따라 나갔다. 다행히 쿠로가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케이토는 괜히 투덜거리는 쿠로가 그저 당황스러워서 뭐라도 손에 들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쿠로에게 상점가를 걸어 다니던 거리보다 반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훈훈하게 보고 있으면 다 뭐 좋은 줄 아나, 아니면 뭐 먹은 이야기가 그렇게 웃긴가?"
"쿠로, 혹시 이 근처에 꽃집이 있나?"
"응? 저, 저쪽 모퉁이 돌면 있어. 왜?"
"그럼 가볼까?"
순간 당황한 쿠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케이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쿠로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케이토가 휙 가버리니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허둥지둥 케이토의 뒤를 쫓았다. 그래도 먼저 출발한 덕에 쿠로보다 먼저 꽃집에 도착한 케이토는 쿠로의 것이라고 꽃다발을 하나 주문했다.
그 소리에 걸어오던 쿠로가 취소하려고 속도를 높혔다. 하지만 약혼 소식을 들었다며 주인장이 쿠로에게 잘 어울리는 꽃다발로 만들어 주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서 말문이 막혔다. 동내에서도 유달리 인심 좋고 목소리 크기로 유명한 아주머니였기에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 꽃다발은 나오지도 않았지만 쿠로는 받은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제법 난감했다. 꽃 두어송이면 몰라도 다발로 포장된 것은 나중에 처분하기 힘들 것 같아서 쿠로는 열심히 너스레를 떨며 작게 해달라고 부탁 했지만 결과물은 제법 컸다.
완성된 꽃다발을 케이토가 받아 들고 가볍게 향을 맡아보았다. 분홍빛 수국을 중심으로 빨간색 위주의 꽃으로 장식된 꽃다발을 케이토가 들고 있는 그 광경에 걱정이고 뭐고 쿠로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멈추어 섰다. 그 사이 향을 확인한 케이토가 주인장에게 값을 치른 다음, 쿠로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수국은 색에 따라 꽃말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나? 분홍색 수국은 '건강한 여인'이라는 꽃말이 있다, 쿠로. 대화하다 보니 갑자기 이 꽃말이 생각이 나더군."
"엇, 어. 고마워. 들고 있을까?"
"그래. 잘 보이게 들고 있어라. 그럼 잠시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조금 서두를까?"
"무슨 시간? 어디 가?"
"아직 식사 생각이 없으면 예약 시간을 늦추마."
"응? 아니,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어디 식당이야?"
"이쪽이다."
다시 케이토가 앞장을 서면서 쿠로의 허리를 팔로 살짝 감았다. 양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으니 잡을 곳이 허리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톡 하고 와 닿은 손끝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쿠로는 케이토의 손을 조심스럽게 팔꿈치로 밀어내고 꽃다발을 케이토의 반대쪽으로 들었다. 그리고 손을 잡아 말아 하고 있는데 케이토가 팔짱을 낄 수 있게 팔을 내 주었다.
그렇게 팔짱을 낀 체 걸어서 도착한 케이토가 예약한 식당은 쿠로는 겉만 본 적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괜히 꽃다발만 만지작 거리면서 케이토를 뒤따라 안내받은 자리는 둘만 있는 룸 석이었다. 꽃다발을 안내대로 잠시 옆의 탁자에 내려 놓은 쿠로는 조심스레 방을 둘러본 다음 케이토와 마주 보고 앉았다.
바로 애피타이저가 나와서 둘은 무릎에 냅킨을 깔고 숟가락을 들었다. 크림수프와 빵부터 시작된 코스요리는 가리비 관자구이와 웰던 스테이크로 정점을 찍고 식후 디저트로 생크림 롤빵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고급스러운 푸른빛 식기에 화려하게 담긴 음식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만큼 최상급의 맛을 자랑했다.
그 탓에 쿠로는 입 주변에 안 묻히고 먹기 위해서 곤두세운 신경이 자꾸 무뎌졌다. 그걸 보는 케이토는 음식 하나에 냅킨으로 세네번씩 입가를 닦는 쿠로가 조금 거슬렸지만 그렇다고 다 묻히고 먹는 것보다는 나으니 핀잔을 주지는 않기로 했다. 몇 번 입가를 톡톡 건드려서 닦으라는 손짓은 했지만.
식사를 하면서 케이토는 황태자 주최의 사교 파티가 사일 뒤에 열린다는 소식을 전했다. 정식으로 초대장까지 온 사교장이었다. 시기상 아카데미 입학 전에 열리는 마지막 사교장이 될 예정이라 여기서 약혼 발표를 하고 싶다는 게 케이토의 의견이었다.
쿠로는 딱히 이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서 케이토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 타이밍 좋게 식사도 끝이 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처음 말을 맡겼던 곳으로 향하려 했다. 그때 우연히 식당 앞에서 어느 백작 영식과 만났다.
그 백작 영식은 케이토와 조금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래서 케이토가 백작 영식과 대화를 하는 동안 쿠로는 케이토의 뒤에 서서 소개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니 백작 영식의 뒤쪽으로 죽 늘어진 사용인들이 보였다. 그 사용인들을 본 순간 쿠로는 뭔가 하나를 기억해 냈다.
그 바람에 옆에서 케이토가 손을 잡은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 놀란 쿠로를 보고 케이토도 놀랐다. 그 상황에 금방 정신 차린 쿠로는 소개받은 백작 영식과 인사했다. 가벼운 대화가 끝나고 백작 영식은 식당 안으로 케이토와 쿠로는 마을 어귀로 향했다.
케이토는 아까 그 인사를 하고 난 뒤로 왠지 조용해진 쿠로가 신경 쓰였다.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은 체 조금 거리를 둔 체 앞만 보고 걷고, 옆에서 말을 붙여도 대답은 하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는 듯, 끊어지는 듯하면서 둘은 마을에 올 때 말을 맡겼던 곳으로 돌아왔다.
출발하기 전에 물건을 맡겼던 마차에 이제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말을 하러 가서 쿠로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포목점에서 나올 때 뭐를 얼마나 사겠다는 이야기를 안 했었다. 그런데 저 옷감의 산은 뭘까. 뭐 이렇게 종류별로 한가득 산 건지 감이 안 왔다. 그 옷감의 산 옆에 조그맣게 있는 동생의 선물과 약간의 잡화에 눈이 가니 헛웃음까지 나왔다.
"하하... 와..."
"쿠로...? 왜 그러나, 뭔가 까먹은 거라도 있나? 아니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뭘 이렇게 많이 산 거야... 아니, 왜..."
"음,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만? 나는 천을 다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색이 다양한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릴 때 물감 색이 많으면 좋듯이 옷을 만들 때도 여러 색이 있는 게 조합을 생각하기 좋지 않나?"
"이게 다 얼마야, 아니, 하아..."
"겨우 이 정도에 그리 반응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예상한 금액의 사 분의 일도 안 썼다."
"사 분의 일, 이구나..."
"그런 편이지. 거의 구경만 하고 산 거라고는 물건 몇 개와 동생분 줄 선물이 다지 않나."
"으응, 그래. 그렇구나."
"쿠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을 해 주길 바란다. 이대로는 해결될 문제도 꼬일 것 같군."
"그럴까?"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 쿠로를 보고 케이토는 지금 뭔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는 걸 확신했다. 그 사이 쿠로는 담담하게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도 수레에 얹고 집으로 출발 시켰다. 그리고 승마를 위해 드레스를 정리했다. 그 뒤에서 케이토는 말고삐 두 개를 들고 미묘한 기분으로 서서 뭐가 잘못이었던 건지 기억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그 식당 앞에서부터 왜 그런 건지 짚이는 게 없었다. 마치 포목점에 들어가기 조금 전 같은 폭풍 전야였다. 그런 케이토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는 입을 닫고 조용히 말을 골랐다. 그렇게 말을 타고 조금 걷다가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이 둘만 있게 되자 쿠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고마워. 저 정도 양의 옷감이나 만년필 사준 거, 케이토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나한테는 많이 큰 거거든."
"이 정도는 당연한 듯이 받아 주길 바란다. 그리 굳어 있으니 나도 어색하군."
"그리고 적당히 둘러댄 거고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약혼을 케이토가 부탁했다고 해줘서 고마워."
"지어낸 이야기 같나?"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내가 돈 때문에 팔린 건 맞잖아."
"쿠로, 그렇게 말하지 마라."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알고 있어, 내가 불의 마법을 쓸 줄 아니까 그 돈을 들여서까지 약혼을 맺은 거잖아. 케이토네 부모님이 정말 날 거슬려 했다면, 종종 옷 맞추러 우리 포목점에 오지는 않았겠지."
"포목점?"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우리 집도 아까 그 포목점 옆에서 같이 장사했었어. 그래서 엄마 따라 옷 만드는 법도 아는 거고. 저택 안에서 봤을 땐 별생각 없었는데, 가게 문 앞에서 사용인들을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 하스미 공작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그때였지 싶어져서."
"어머니가 종종 그 곳애 갔었다고?"
"아니, 사용인들이 종종 와서 치수 잰다고 엄마를 데리고 갔었던 게 기억났어. 케이토 말이 진짜면 직접 와서 내 얼굴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을까? 하스미 공작쯤 되면 암살은 몰라도 나한테 다른 남자를 붙여버린다거나 그런 건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쿠로, 그 포목점 안에서 내가 했던 말이 다 지어낸 이야기 같나?"
"잘 모르겠어. 솔직히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멀리서 보고 좋아하게 돼서 그 뒤로 못 만나게 됐다는 이야기를 뭐 어떻게 확인하겠어. 이대로 케이토네 집에 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뒤에 케이토가 서 있으면 말을 맞춰줄 텐데. 솔직히 진짜라고 강하게 말 안 해주는 걸 보니까 다 지어낸 것 같기도 하고, 이때까지 케이토가 잘 대해준 거 생각하면 진짜 같기도 해."
"다 지어낸 건 아니다."
"그런 걸로 할게. 그런 거로 하자. 케이토 말이 다 맞는 걸로 하자. 더 의심 안 할게."
"차라리 화를 내라."
"내가 뭐 잘났다고. 알아서 말 맞출게."
"말 맞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나, 쿠로."
"케이토, 그렇게 불안한 표정 하지 말아 주라.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그, 그렇게 보이나?"
질문을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있을 때쯤, 쿠로의 저택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려서 드레스를 정리하고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쿠로는 잘 교육받은 귀족 영애였다. 정말로 행복한 외출이었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에 케이토는 아무것도 더 캐묻지 못 한 체 격식 갖춰 인사하고 그대로 말에 올라타서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케이토의 배웅을 마친 쿠로는 물건을 실은 수레가 도착했는지 대문 앞에 마중 나와준 소마에게 물었다. 확인해 보니 이미 도착한 상황이었기에 쿠로는 옷감을 드레스룸 옆의 빈방에 옮기고 잡화는 필요한 곳에 두라고 사용인들에게 부탁하고 동생 선물인 만년필과 잉크를 챙겨서 동생 있는 곳으로 갔다.
딱 봐도 쿠로가 고른 선물이 아닌 티가 나서 동생은 매우 찜찜한 표정으로 만년필과 잉크를 받았다. 케이토가 만년필을 추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납득한 동생은 만년필 색을 확인하고 감사 인사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나서야 쿠로는 한숨 돌렸다.
그리고 아까 옷감을 옮겨 놓은 방으로 갔다. 여기는 이제 작업실이 되었다. 그런데 가구 쪽은 준비된 게 없어서 책장에 옷감을 꽂아 넣은 게 좀 웃기긴 했다. 그래도 넓은 탁자는 있으니 대충 구색을 갖춘 셈 치기로 했다. 옷감을 샀다는 걸 몰랐기에 부자재를 하나도 안 사서 선택지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첫 사교회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기로 했다.
한편 케이토는 집에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고만 있었다. 역시 너무 급조한 이야기였던 게 문제였던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루도 못 가서 들통난 게 좀 뼈아팠다. 쿠로가 눈치챈 이유가 꽤 허술한 데다가 자신의 반응을 보고 확신 근처까지 간 거라서 속이 쓰렸다.
케이토는 쿠로가 귀족들 사이의 허례허식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이런 가식적인 이야기는 모르길 바랬다. 하지만 막상 들킨 다음의 반응이 예상외였다. 저렇게 담담하면 미리 말을 할 걸 싶으면서도 조금은 믿을 만하니까 저러는 거겠지 싶어서 영 심란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사교회에서 케이토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케이토의 집이나 상점가에서 만났기에 케이토가 엄청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거지만, 사교회는 달랐다. 현시점에서 황태자 또래의 사교회를 주도하는 건 사쿠마 공작의 첫째 딸인 레이와 히다카 공작의 외동아들인 호쿠토였다.
아카데미에 입학도 안 한 영애나 영식들이다 보니 부모님끼리는 계급이 확실하지만 그들끼리는 계급 차가 희미했다. 케이토는 공작 영식이지 공작이 아닌 데다가 공작 부부가 겉으로 잘 드러내려 들지 않아서 그들 사이에서 크게 영향력이 없었다. 하지만 쿠로는 자작이다. 그저 귀족의 피를 타고났을 뿐인 그들 사이에서 지위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 쿠로였다.
그래서 케이토는 쿠로가 사교회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쿠로가 케이토의 거짓말을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저 말이 거짓말이면 그 상냥함과 배려는 다 뭐지?'라는 지점인데 사교회에서의 케이토를 보면 쿠로는 바로 모든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 하스미 공작의 둘째 아들이 아무 재능 없는 일반인이라는 이야기는 귀족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사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라고 발표해야만 하는데, 거기서 다른 귀족 영식들을 보고 쿠로의 마음이 바뀌어버리면 케이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 약혼이 없던 일이 되어버리면 집안에서 정말 있을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압박감에 케이토는 속이 쓰렸다.
어떻게든 쿠로에게 자신을 선택하게 해야 하는 케이토는 머리를 싸맸다. 선물을 보내보는 것도, 티타임을 갖는 것도, 상점가에 놀러 가는 것도 다 해버려서 쿠로를 불러낼 구실이 없었다. 그렇게 괜히 할 것도 없으면서 고민만 하다 케이토는 밤을 새워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정기 보고 겸 쿠로의 말을 전하러 소마가 말을 타고 케이토네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밤을 새워 버린 탓에 조금 충혈된 눈과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의 케이토를 보고 소마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무슨 일 있었냐고 소마가 울 것 같은 분위기에 케이토는 아무 일 없다고 달래주느라 진땀을 뺐다.
"우웃, 케이토 도련님이 이리 힘드실 것이라면 소인이 이쪽으로 와 있는 게 좋았을 것을... 쿠로 아가씨의 반응을 보면 상점가에서는 별일 없으셨던 게 확실한데, 정말 별일 없으셨소이까? 공작부인께서 부르셨다거나, 형님께서 돌아오신다는 연락이 왔다던가?"
"아니, 전혀 없었는데. 그것보다 쿠로의 반응이 어떻다고?"
"어제 외출 갔다 돌아오신 이후로 계속 즐겁다는 듯이 상점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셨소이다. 본디 수다를 좋아하시는 분인 듯하여 열심히 들어 드렸소. 처음부터 끝까지 케이토 도련님 이야기뿐이라 정말 케이토 도련님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소이다."
"그랬나? 정말로?"
"정말이오. 그런데 이렇게 반응할 일이오? 쿠로 아가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소만, 역시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아니다. 쿠로가 좋아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소마, 볼 일은 이게 다인가?"
"아니오. 케이토 도련님의 옷 치수를 받으러 왔소이다."
"그건 무슨 이유로?"
"쿠로 아가씨가 이번 황태자의 사교회에 갈 의상을 맞춰드리고 싶다 하여 옷 치수를 받으러 온 것이외다. 저번 약혼식을 위하여 재 둔 치수가 있을 터이니 받아서 돌아갈 예정이오. 부디 옷 걱정 없이 편하게 계시길 바라오."
"쿠로가, 내 옷을?"
"그렇소이다. 벌써 쿠로 아가씨 본인의 드레스는 제단이 끝난 상태라오. 아침에는 정말 신나서 바느질을 하셨소. 색은 많지만 옷감 양이 적어서 제법 알록달록한 느낌의 드레스지만 그런 만큼 화려한 드레스가 되어 쿠로 아가씨의 센스가 돋보여 정말 멋있소이다."
"그렇게까지 손이 빠른가? 분명 하나에 이삼일은 걸린다 들었는데?"
"어제 신이 나서 밤을 새운다는 것을 말리느라 고생했소이다. 거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기까지 했으니, 소인이 돌아가 있을 때쯤에는 드레스가 완성되어 있을지도 모르오."
"그, 그런가..."
"그럼 마지막으로 쿠로 아가씨의 편지를 전해드리고 이만 물러내겠소이다. 모쪼록 편히 쉬시길 바라오."
"그러지. 조심해서 돌아가라, 소마."
그렇게 받은 쿠로의 편지는 실링 도장 없이 빨간색 왁스로만 봉해진 어제 산 편지지 세트였다. 그러고 보니 쿠로 자작은 급조된 가문이라 아직 가문의 상징이나 마크 같은 게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도장을 못 찍고 봉인용 왁스만 발라 놓은 쿠로의 첫 편지를 보고 케이토는 어제 돌아온 이후로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페이퍼 나이프로 왁스를 건들지 않고 조심조심 편지 봉투 가장자리를 뜯어서 편지를 열었다. 어제 샀던 짙은 녹색의 잉크로 쓰인 편지는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어제 사준 꽃다발의 꽃을 작업실 창가 꽃병에 꽂아 놓았더니 고개를 들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만년필 선물을 동생이 좋아했다던가, 상점가에 또 놀러 가고 싶다던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굵고 힘찬 글씨체와 상급자에게 쓰는 듯한 과하게 격식적인 문구와 잔잔한 일상 이야기가 셋 다 따로 노는 신기한 편지였다. 좀 많이 삐걱대는 듯하지만 케이토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편지에 밤새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좋아졌다. 이 편지를 보고 나서야 케이토는 소마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했다.
이건 케이토가 소마를 못 믿은 게 아닌, 쿠로의 반응이 지나치게 예상외였던 탓이었다. 그 상점가로의 외출이 정말 마음에 들었구나, 꽤 화나게 하거나 거짓말로 속여서 당황하게 했는데, 그런데도 정말로 마음에 들었구나. 케이토는 쿠로의 반응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상점가에 또 놀러 가고 싶다는 문장이 너무 기뻤다.
한참을 손끝으로 다음에 상점가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나열해둔 문장을 쓸어보던 케이토는 급하게 방 안을 뒤졌다. 분명 남은 편지지가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에이치 황태자 저하에게 쓰고 조금 남은 정말 고급스러운 편지지를 찾아서 책상에 펼쳐 놓고, 자주 쓰는 만년필에 들어 있던 검은 잉크를 빼고 깨끗이 씻은 다음 후후 불어가며 급하게 말려서 짙은 녹색 잉크를 채웠다.
그렇게 준비된 만년필을 들고 책상에 앉은 케이토는 크게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답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에도 또 상점가에 가자고 제안해준 게 기쁘다고, 사교회에서 입을 옷은 어떤 느낌의 옷으로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편지를 먼저 보내 주어서 고맙다고,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나는 데로 편지지를 꽉 채워서 답장을 적었다.
그런 케이토의 답장은 저녁때쯤 쿠로에게 배달됐다. 케이토한테서 편지가 왔다는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든 편지는 고급스러운 비싼 종이로 된 편지 봉투에 가장자리가 반짝반짝 금박까지 둘러져 있었다. 편지를 봉한 왁스는 어두운 녹색이고 찍힌 도장은 둥글게 뱀이 가장자리를 감고 가운데에 연꽃이 활짝 핀 하스미 공작의 것이었다.
편지를 이루는 그 모든 것이 당황스러워서 쿠로는 편지랑 소마를 번갈아 쳐다봤다. 소마가 편지 뒤쪽을 가리켜서 보니 봉투에 쿠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쿠로는 작업대에 편지를 얹고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경건하게 자세를 잡고 소마가 건네준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답지 않게 손을 덜덜 떨면서 편지를 열어서 읽었다.
솔직히 쿠로는 케이토가 이렇게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안 했었다. 케이토의 말을 쿠로가 못 믿는 탓인지 쿠로가 하는 말도 케이토가 안 믿는 눈치여서 어쩌지 하다가 아까 깜빡하고 동생에게 건내지 못한 편지지가 눈에 들어와서 보낸 편지였다.
케이토가 한 말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쿠로가 확인할 방법은 없고, 어느 쪽이든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해 주었다는 점은 고마워서 쿠로는 좀 찜찜해도 케이토의 말이 진짜인 것처럼 지내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는 애매하게 껄끄러운 사람들한테 돈 때문에 팔려 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소설책 속에나 나오는 사랑받고 사는 사람인 척이라도 할 수 있어서 쿠로는 지금 상황이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반쯤 충동적으로 쓴 편지에 이렇게 열혈한 반응이 돌아올 줄 정말 몰랐기에 쿠로는 편지를 세 번 다시 읽어보았다. 예절 교육 탓에 지나치게 건조하고 어딘가 거리를 둔 반응도 아니고, 열받아서 조목조목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닌,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반응에 쿠로는 그 포목점 안에서 그랬던 것 같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야 진짜로 케이토랑 대화를 하는 기분이라 쿠로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소마에게 내일 아침을 먹고 상점가에 가서 답장을 쓸 새 편지지를 사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월계수 잎을 가장자리에 원으로 감고 가운데에 독수리 발톱을 장식한 급조 키류 자작의 가문 도장을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케이토와 쿠로는 황태자 주최의 사교회까지 남은 나흘 동안 두어 번 더 편지를 주고받았다. 도장이 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려서 여전히 쿠로의 실링 왁스에 도장은 없었지만 즐거운 대화였다. 사교회 전날 정오, 쿠로는 도장 없이 봉인된 편지를 열심히 만든 케이토의 양장 위에 얹고 예쁘게 포장했다.
그걸 사용인에게 넘겨서 케이토네 저택으로 출발하는 것까지 본 쿠로는 마지막으로 황태자의 초대장을 들고 내일 입고 갈 옷을 점검했다. 처음으로 가는 귀족들의 사교회이자, 케이토와의 약혼을 발표하는 사교회였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실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각오를 단단히 다진 쿠로는 점검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