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른]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2

사실에 거짓을 섞은 절절한 사랑 고백은 포목점에서

  • 상점가 파트가 이렇게 길어질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하로 나누어져 버림(...)

  • 23.01.03 포목점 파트 조금() 수정

  • 23.01.19 설정 추가로 인한 일부 내용 수정

  • 23.10.11 오탈자 수정

  • 23.11.03 오탈자 수정

  • 포타에 올렸던 내용을 이쪽으로 가져오며 핸드폰에서 읽기 편하게 서식을 수정하고 문장을 조금 추가했습니다.

  • 24.06.09 내용 일부 수정

  •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 쿠로와 소마와 에이치가 여자입니다! 용납 할 수 없는 분들은 뒤로 가기~


손등 키스? 쿠로에게는 말로만 듣던 인사법이었다. 말로만 들었을때는 제법 징그러웠는데 케이토에게 받는건 전혀 징그럽지 않아서 쿠로는 놀랐다. 메이드로 취직한 아는 언니의 설명이 뭔가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쿠로는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마차에 올라탔다.

아마도 쿠로가 마차에서 멀미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면 손등 키스 때문에 유달리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눈치 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출발한 마차때문에 쿠로는 눈치고 뭐고 입을 가린체 몸을 숙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다는데 유달리 자신만 이렇다보니 쿠로는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달리 말발굽 소리가 크고 많이 들린다 싶더니 쿠로의 마차옆으로 말 한 쌍이 빠르게 뛰어서 지나쳤다. 마차에 조그맣게 난 창문으로 쿠로가 내다보니 두 말중 하나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어올린 긴 제비꽃색 머리가 유달리 눈에 띄였다.

원체 몸상태가 안 좋다보니 그저 급한 일이 있나보다 하고 대충 넘긴체 쿠로는 창문을 닫고 다시 웅크렸다. 그래서 그 제비꽃색 머리의 메이드가 대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게 당황스러웠다. 도착했다며 마부가 문을 열어주어서 일단 내려오니 그 메이드는 투명한 자수정빛 눈을 예쁘게 접으며 쿠로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소. 소인은 쿠로 키류 자작의 전속 메이드로 지정받은 소마 칸자키라고 하오. 케이토 도련님의 명을 받아 먼저 자택에 도착해 쿠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특이한, 욱, 말투네..."

"음. 자주 듣는 말이오."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얼굴을 보니 쿠로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제 와서 사용인이 하나 늘어난다고 해서 바뀌는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쿠로는 소마가 온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우선 이 망할 새파란 드레스를 갈아입기로 했다. 

그런 쿠로가 소마의 유능함을 눈치챈 것은 옷을 갈아입고 멀미가 가라앉을 때까지 정원을 배회하다 저택 구석에 있던 마구간이 눈에 띄어 다가갔을 때였다.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땐 말이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마구간이 다 부서져 가든지 말든지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었었다. 그런 마구간이 소마가 온 지 두 시간 만에 깔끔하게 보수공사가 되어있었고, 안에서는 말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쿠로 아가씨 오셨소이까? 창고에 남은 자재들로 임시 보수공사를 해두었소이다. 이걸로 케이토 도련님이 쿠로 도련님께 주신 말들이 잠시 지낼 곳이 생겼구려."

"케이토가?"

"그렇소. 케이토 도련님께서 쿠로 아가씨께 승마를 가르쳐 주라 소인에게 명하셨소이다. 멀미가 심해서 마차를 못 타면 행동 범위가 너무 좁아져 불편하니 말이오. 승마는 보기와는 다르게 전신운동에 가까우니 멀미를 할 일이 없을 것이오. 한 번 타보시겠소이까?"

"아니, 어중간한 거리는 걸어 다녀도 되고."

"귀족들의 저택 간 거리는 걸어 다닐 거리가 아닐 것이라 생각되오. 게다가 귀족들은 어렸을 때부터 다들 승마를 배우기에 말을 타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사교장에서 사냥놀이를 한다던가 하면 말만큼 빠르게 뛰어다녀야 할 터인데 드레스를 입고 그게 가능하겠소이까?"

"둘 중에 순한 말로 부탁할게."

"둘 다 초보자용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순한 말이외나, 이쪽의 갈색 말인 사이고돈은 아까 소인을 태우고 뛰었기에 많이 지쳤을 것이오. 그러니 이쪽의 검은색 말인 노이와로 연습하는 게 좋겠소."

"하하, 개성적인 이름이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정원의 돌길에서 승마 연습을 했다. 내일 마을에 갈 때에는 평보라고 하는 천천히 걷는 정도의 승마법만 알면 될 테니 그것만 벼락치기로 엄청 연습했다. 승마는 전신운동이라고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닌 데다가 긴장까지 했더니 다 끝나고 땀범벅이 되었지만 멀미는 안 났다. 

갑자기 한 승마 연습이었기에 목욕이 준비가 안 되어서 밥부터 먹은 게 아무래도 좋았을 정도로 더 이상 마차 안에서 멀미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쿠로는 기뻤다. 밥 먹고 목욕을 하러 들어가니, 소마는 케이토에게 직접 쿠로의 전속 메이드로 명 받은 것을 구실로 그 시끄러운 예절교육 담당 사용인들을 싹 다 물리고 혼자서 목욕 시중을 들러 와 있었다. 쿠로가 저택에 온 뒤 처음 한 편안한 목욕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 있으니, 소마가 아까 못 먹은 치즈케이크를 가지고 들어왔다. 많이 움직였으니 이 정도는 먹어도 된다는 기적의 논리가 쿠로의 마음에 들었다. 쿠로는 치즈케이크를 먹으면서 허락도 받았겠다, 케이토에게 받은 장신구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것은 팔아버리기 위해 한데 모으고 골라서 정리했다. 하지만 약혼 전에 다른 남자에게 받았던 장신구들은 마음에 드는 것도 버려야 해서 쿠로는 소마가 쿠로의 등 뒤에서 뜯는 선물 상자 쪽은 최대한 안 보려 노력했다. 

지금은 케이토의 약혼자라서 다른 남자한테 받은 장신구를 차는 건 바람피우겠다는 선언이라 케이토에게 실례라며 소마가 시간과 둘 곳이 없어서 못 뜯은 선물까지 열어서 한데 모았다. 정말로 팔 수 있는 건 사교회에서 약혼했다는 것을 발표한 뒤지만 미리 해두는 게 좋다는 게 소마의 의견이었다.

치즈케이크를 다 먹고 접시와 함께 소마를 보낸 쿠로는 드레스룸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옷을 오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옷과 천으로 쓸만한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오려낸 다음 버릴 것이다. 이것도 버리는 건 약혼을 발표한 이후지만 미리 해둬야 내일 살 원단의 색이나 양 같은 걸 정할 수 있어서 얼른 해 두어야 했다. 

가장 먼저 오린 건 역시 아까 그 망할 새파란 드레스였다. 한 삼분의 일 정도 하고 나니 소마가 잠들 시간이라고 데리러 왔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하기로 하고 드레스룸을 나와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 저택에 오고 난 뒤로 처음 겪는 상쾌한 아침에 쿠로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트집 잡고 싶어서 안달 난 그 망할 사용인들이 없으니 아침이 맛있었다. 

입 주변에 좀 묻으면 어때, 닦으면 그만이지. 이제는 식기 사용 순서를 헷갈린다거나 하지는 않잖아, 그럼 됐지 여기서 뭘 더 바래? 그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아침을 다 먹은 쿠로는 점심이 되기 전에 남은 드레스 해체를 위해 드레스룸으로 가서 틀어박혔다. 소마는 그런 쿠로의 아침 시중을 든 다음 드레스룸까지 따라간 뒤 인사를 올리고 곧장 마구간으로 가서 사이고돈을 타고 하스미 공작가로 향했다.

"호오, 쿠로가 그렇게까지 승마를 배우는 게 빠르다고?"

"그렇소이다. 소인이 보장하는 것이니 틀림이 없소. 운동신경이 좋다고는 들었소만 그 몸놀림은 마치 마치 타본 적 있는듯한 안정감이었소. 오늘 마을에 가는 길에 두 분이 나란히 말을 타고 다녀와도 무리는 없을 것이외다."

"그래 알겠다. 지금 쿠로는 뭘 하고 있지?"

"마음에 안 드는 드레스를 해체하여 재활용 천으로 만들고 계시오. 시원시원한 손짓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지라 감탄만이 나왔다오."

"드레스 정도는 그냥 만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오늘은 많이 걸을 것 같으니 점심을 든든히 먹어야겠어. 앞으로도 쿠로를 부탁하마, 소마."

"맡겨주시오. 그러면 여기서 실례하겠소."

소마가 다시 키류 자작가로 돌아왔을 무렵, 쿠로는 드레스의 해체를 끝내고 쓰레기를 한곳에 묶어둔 뒤 천 조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소마는 얼른 쓰레기 봉지들을 다른 방으로 치우고 주방으로 가서 든든한 점심을 부탁했다. 점심까지 조금 남은 시간 동안 쿠로는 방으로 가서 장 보기 전 체크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케이토는 사고 싶은 걸 다 사주겠다고 했지만 쿠로는 그 말을 거의 안 믿고 있었다. 일정량을 넘어가면 짜증을 낼 것 같다는 예감이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있기는 있어서 적당히 적어둔 뒤, 쿠로는 소마를 데리고 마음에 드는 옷만 있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골랐다.

이번에 입기로 한 옷은 짙은 와인색을 중심으로 흰색 포인트를 준 가벼운 드레스에 검은색 구두였다. 여기에 가벼운 피어스를 몇 개 귀에 꽂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에 동생에게 선물을 사 달라고 들어서 그것도 급하게 리스트에 추가했다. 

승마를 위해서 치마를 조금 걷어 올려 묶은 것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다음 저택 정문으로 향했다. 소마가 때맞춰 흑마 노이와를 데려와 정문에 대기 시키려고 했으나 노이와는 정문 밖에서 오고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문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걸 쿠로와 소마가 깜짝 놀라 쫓아가니 덩달아 놀라서 말을 달래고 있던 케이토와 만났다.

"워워, 진정해라. 구제 불능이군, 반가운 건 알겠지만 정면에서 그렇게 뛰어오면 어떡하나."

"소인의 불찰이오!! 굴레를 놓쳐버린 소인의 죄, 배를 갈라 사죄하겠소!!"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된다, 소마."

"그래 맞아 조금 진정하자, 소마. 다행히 케이토가 잘 받아줘서 다친 것도 아니고 조금 놀란 게 다인데 대뜸 배는 왜 가르려고 하는 거야..."

"쿠로의 말이 맞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건 좋지만 매번 그건 과하다."

"우우웃... 소인 면목이 없소이다."

매번 이러는 거야?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하고 쿠로는 케이토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케이토는 짙은 남색의 제복풍 양장을 갖춰 입은 누가 봐도 귀족 영식이었다. 그 모습을 말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위압감까지 느껴져서 쿠로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쿠로는 케이토의 얼굴이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됐다. 다행히(?) 쿠로와 케이토의 키 차이는 없었다. 그러므로 쿠로는 진정한 기색의 흑마 노이와를 몇 번 쓰다듬고 안장 위로 올라앉았다. 말 위에서 마주 보니 잘생긴 건 바뀌지 않았지만, 위압감은 없어져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쿠로와 케이토는 소마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 쪽으로 향했다.

"실례, 말들이 날뛰는 바람에 인사가 늦어졌군. 오늘 이렇게 쇼핑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해 주어 감사하다, 쿠로. 부족함 없는 에스코트를 약속하마."

"그렇게 과장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오늘은 잘 부탁해, 케이토."

"허례허식 같아도 받아 주었으면 한다, 쿠로. 상성이 담백한 편인 건 알고 있지만 이쪽에서는 이런 것이 평균적인 예법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익숙해져야 사교회에서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귀가 아플 정도로 많이 들었어... 그래도 안 익숙해진다고."

"그렇다면 익숙해질 때까지 대접해 주마. 나는 사교회를 열어가며 다니지는 않아도 공식적으로 열리는 사교회는 빠지지 않는 편이라서 쿠로도 여기저기 얼굴 비출 일이 많을 거다. 남들 웃고 떠드는 곳에서 구석에 혼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으응, 그렇구나."

"물론 쿠로는 지금 꽤 인기인이니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케이토가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쿠로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먼 산을 보았다. 웃는 얼굴이 왜인지 쓸쓸해 보이는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케이토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여기서 오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면 될지 모르겠어서 난감했다. 

그래서 쿠로는 좀 부자연스럽지만 마을에 가서 살 물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쿠로에게 케이토는 별말 없이 맞춰주었다. 그렇게 대화하고 있으니 금방 마을 어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말을 맡아주는 곳에 말을 맡기고 장터로 걸어갔다.

사람들 많은 곳으로 걸어오니 쿠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케이토와 쿠로를 둘러싼 큰 군중이 되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케이토와는 다르게 쿠로는 익숙하다는 듯이 머리 위로 박수를 쳐서 모두를 조용하게 하고 쇼핑 왔으니 길을 터 달라고 큰 소리로 말해서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온 거라 쿠로에게 안부 인사를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들 한마디씩 쿠로에게 인사하는 걸 케이토는 한걸음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쿠로를 바라만 보았다. 어제 티타임에서나 겨우 본 생기 넘치는 쿠로의 모습을 여기 사람들은 당연하게 보았구나 싶어져 케이토는 조금 기분이 심란해졌다.

그때,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서 쿠로에게 뒤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그 질문을 듣자마자 놀라서 떨리는 눈빛으로 쿠로가 뒤돌아보았다. 그런 쿠로를 향해 살짝 웃어준 케이토는 쿠로의 앞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서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쿠로의 약혼자이자 하스미 공작의 둘째 아들인 케이토 하스미라고. 

한순간에 시끄러웠던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그 반응을 예상했던 케이토는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비켜서서 쿠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로 한 행동인지 눈치챈 쿠로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케이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며칠 전에 약혼을 했다고 모두의 앞에서 공표했다.

놀라는 사람 반,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반반 섞여서 군중이 소란스러워졌다. 약혼을 축하한다고 서비스를 해주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당초 계획이고 뭐고 다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쿠로가 옷감을 보러 가야 한다고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한번 들떠버린 사람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은 자기들끼리 떠들며 서로 자기 가계에 데려가겠다고 싸우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 꼴을 본 쿠로는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먼저 가보겠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케이토의 손을 잡고 도망쳤다. 갑자기 손이 잡힌 케이토는 당황한 체 그대로 쿠로가 끌고 가는 데로 질질 끌려갔다. 중간에 보안경찰에게 사람들이 모여서 싸우고 있다는 말까지 전한 쿠로는 그대로 원단을 파는 포목점까지 쭉 뛰어 갈 생각이었다.

"근데 뒤에 이 사람은 뭘 잘못했길래 이 꼴이냐?"

"네?"

그제야 뒤돌아본 쿠로는 주저앉은 채 쿠로의 손에 매달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대는 케이토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쿠로에게 달리기는 돈 안 내고 튀는 놈 쫓아갈 때나 하던 일이었다. 남들보다 훨씬 빨라서 쿠로가 한번 잡으려고 뛰기 시작하면 반드시 다 잡아내서 주변 상인들이 쿠로를 정말 좋아했었다.

남의 손을 잡고 뛰는 건 어렸을 때도 늘 너무 빠르다고 혼나곤 했던 짓이었다. 그저 신나서 달렸는데 옷이 찢어지고 무릎이 까져서 울음을 터뜨렸던 친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쿠로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인파에 제법 당황한 듯 보였던 케이토를 위해서 한 짓이지만 다른 문제를 일으켜 버렸다.

오랜만에 친 대형 사고에 쿠로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급하게 케이토의 손을 놓고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 케이토는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서 땀을 닦았다. 그렇게 닦으면서 천천히 표정을 정돈한 케이토는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며 말을 시작했다.

"황궁의 체력 테스트를 전부 남자 기준으로도 특등급으로 통과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보군."

"그 얼굴로 칭찬해도 안 기뻐. 차라리 화를 내라."

"이게 칭찬으로 들리나? 남들과 기준이 달라서 주변이랑 발맞추어서 가는 게 힘들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혼자 사는 게 아니니 주변 사람을 좀 보면서 다녀라."

"알았어."

그 한마디를 툭 뱉은 쿠로는 뾰로통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린 체 투덜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걸 본 케이토가 어이가 없어서 쫓아가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뒷짐 지고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가는 쿠로의 뒤에서 빠르게 걷다가 살짝 뛰다가 하면서 케이토의 설교는 이어졌다.

쿠로도 본인이 잘못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케이토가 비꼬듯 하는 말이 너무 기분이 나빠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케이토는 케이토 나름대로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했다고 맘에 안드는 표정을 지으니 더 열받아서 시작된 설교가 끊이지 않았다.

길게 설교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어딘지 모를 골목을 걷고 있어서 케이토는 돌아가는 길도 모른 체 쿠로의 뒤만 쫓았다. 길을 알고 여기로 가는 거냐고 케이토가 다그치자 골목 끝에 도착한 쿠로가 드디어 멈추어서 케이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케이토는 갑자기 멈춘 쿠로를 보고 놀랐다. 쿠로의 등 뒤에는 황궁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포목점이 있었다.

"여, 기는?"

"케이토 공작 영식, 아까의 무례를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나요? 좋아하시는 색을 알려 주신다면 영식께 어울리는 양복을 하나 해드리겠어요."

"..."

"그렇게 벌레 씹은 표정으로 보지 말아 줄래? 나도 안 어울리는 거 알거든?"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조금 의외라서 당황한 거다, 기쁘게 받으마. 네가 해주는 거라면 아무거나 좋다, 쿠로. 정말이다."

"... 그런걸로 하자."

또 뾰로통한 표정으로 몸을 휙 돌리는 쿠로를 보니 케이토의 애간장이 탔다. 마음에 안 들어서 화를 낼 거면 있는 힘껏 비꼬고 죄책감을 자극해대는 에이치를 상대하다가, 이렇게 뭐 때문에 화난 건지는 말을 안 하면서 이상한 곳에서 화풀이하는 쿠로를 상대하려니 어찌해야 할지 몰라 케이토는 답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었다. 케이토는 서둘러 가게 문을 열려는 쿠로의 대각선 앞으로 나와서 가게의 문을 열어주었다. 쿠로를 먼저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온 다음 소리 나지 않게 가게 문을 닫았다. 공작 영식으로서 몸에 익은 예절이었다.

"어머, 쿠로니? 천 사러 온 거지? 이게 얼마 만이야? 갑자기 이사 간 뒤로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잖아. 잘 있었어?"

"오랜만이야, 언니. 사정이 좀 있었어."

"쿠로, 여기 자주 오던 곳인가?"

"어릴 적부터 종종 오곤 했어. 이쪽은 친한 언니."

"그렇게 간단히 말하면 서운한데... 그런데 그쪽은 누구신가요?"

"쿠로의 약혼자이자 하스미 공작의 둘째 아들, 케이토라고 합니다. 편하게 케이토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쿠로의 친우분께 인사 올립니다."

"네???"

하스미 공작이라는 말에 가계 안이 발칵 뒤집혔다. 갑작스러운 VIP의 등장에 가게 실장님까지 내려와서 케이토와 쿠로를 맞이했다. 그렇게 쿠로는 있는지도 몰랐던 이 가게의 VIP 룸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그림이 걸려있고 탁자 위에는 과일이 한가득 차려진 VIP 룸에 안내받은 쿠로는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드레스를 꽉 잡은 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쿠로를 본 케이토는 일단 손님용의 길고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게 하고는 가볍게 눈앞의 과일을 권했다. 쿠로는 케이토를 힐끔 보고는 샤인머스켓 한 알을 따서 입안에 넣었다. 쿠로의 옆에 앉은 케이토는 뻣뻣하게 얼어붙은 체 겨우 그것 한 알을 우물거리고 있는 쿠로가 웃겨서 고개를 돌렸다.

"왜? 웃지 마."

"실례, 쿠로는 언제쯤이면 이런 대접이 익숙해질지 걱정이군."

"그치만 여기 자주 오는 편이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나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어머님이 주로 오는 곳인가 보군. 옷감을 고르고 디자인을 정하면 옷을 만들어서 보내 주는 모양이야. 나는 다른 곳을 쓰던 편이지만 다음부터는 이쪽으로 옮길까 싶군."

"왜?"

"쿠로가 자주 가는 곳이면 실력은 보장된 곳이겠지."

"어휴, 당연하죠. 케이토 영식님의 마음에 든다니 영광이랍니다."

"아, 언니."

때마침 들어온 점원은 아까 문 앞에서 만난 친한 언니였다. 가게에서 파는 옷감들의 샘플 북을 한가득 들고 들어와서 쿠로가 자주 사 갔던 옷감들 위주로 몇 개 넘겨주고는 접객 모드로 쿠로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샘플 북에 조그맣게 오려 붙여진 원단만 보고 고르는 건 처음이라 쿠로는 꽤 난감했다. 

원래라면 말려있는 원단들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켜서 꺼내 달라고 해가며 한 원단을 10마정도 사곤 했는데 그러면 전체적인 옷감의 분위기 같은 게 보이지만 작게 오려져서 여러 색이 있다는 것만 보이니, 뭘 사야 할지 몰라 난처해졌다. 심지어 자꾸 케이토가 옆에서 쿠로가 사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다는 이유로 사겠다고 해서 더 난감했다.

"제발 가만히 있어 주라, 케이토."

"마음에 드니 뒤집어 보고 한 게 아닌가?"

"그런 거긴 한데, 이걸 다 사면 어쩌려고?"

"그세 그 저택이 비좁을 정도로 물건이 많아진 건가? 큰 곳으로 옮기고 싶나?"

"아니 왜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거야... 빈방 많아. 그냥 이걸 다 사긴 좀 그렇지 않냐는 이야기지. 애초에 이것만 보고 뭘 골라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그러면 원단 묶음 들고 올까요, 영애님?"

"언니도 좀 진정하자..."

"흠... 지금은 날이 많이 풀려서 봄 느낌이 나는 걸 파는 건 알겠지만, 옷이 완성될 시기를 생각하면 여름 분위기의 옷감도 보고 싶긴 한데."

"갑자기 케이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옷 정도는 이삼일 이면 다 만들어. 애초에 그렇게 생각했으면 아까 그것들을 사겠다고 말을 하질 말던가."

"이삼일 정도면 되나?"

"물론이죠~ 쿠로의 솜씨는 이미 이 포목점의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빠르고 예쁘고 센스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답니다. 원래 여기에서 잠깐 일도 했는데 쿠로가 자작 지위를 받아 못 오게 된 게 얼마나 아쉬웠는지."

"내가 자작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하지만 그때 쿠로가 불로 때려잡은 게 황궁의 기밀을 들고 도망가다 말고 네 동생을 잡고 인질극을 벌인 범죄자라며? 게다가 쿠로의 먼 친척이 정말 자작이었던 것도 있어서 새로 자작 지위를 받은 거잖아?"

"그건 그런데 진짜 적응 안 된다고 그거..."

"자작 지위가 적응이 안 되더라도 하스미 공작가에 들어온 이상, 쿠로는 귀족으로서 살아야 한다. 익숙해질 시간은 얼마든지 주마."

"알겠으니까 케이토는 제발 가만히 있어."

"그러고 보니 두 분 약혼은 어쩌다가 한 거에요? 실례지만 서로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신 거 같으신데...?"

대답할 말이 없는 쿠로는 헛숨을 삼켰다. 어릴 적부터 아는 사이라고 설명하기는 했지만, 이 가게랑 쿠로의 집은 쿠로의 엄마가 살아있던 시절엔 옷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경쟁사였다. 어느 집이 더 많이 주문을 받고 더 많은 돈을 벌었는가로 경쟁하던 곳이었다.

제법 살벌하게 대치하기도 했던 경쟁사였지만, 이곳의 실장님과 쿠로의 어머님은 친구이기도 했다. 쿠로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경영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쿠로의 아빠가 거의 다 말아먹은 포목점을 사고, 거기에 있던 재단사들을 다 고용해 준 곳이었다.

경쟁사를 사서 흡수하는게 얼핏 보면 나쁜짓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곳의 실장님은 쿠로네 집을 엄청나게 신경 써주어서 한 일이었다. 원체 쿠로의 아버지가 다 말아먹다보니 웃돈을 얹어주며 실장님이 충분히 배려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의 아빠가 이상한데 다 써대서 집에 돈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쿠로가 모든 돈 관리를 하게 돼서 조금 나아졌지만 케이토와 약혼하기 전까지는 황립 아카데미의 교복을 살 여유도 없었다. 마법을 쓸 줄 알고 자작 작위까지 받은 지금은 무조건 아카데미에 가서 공부를 해야하건만 집에 돈이 너무 없어서 힘들었었다.

아무튼 이 가게의 종업원 중 삼 분의 이 정도는 친하게 지내던 언니들이라서 종종 오곤 했다. 그런 언니 앞에서 돈 때문에 한 약혼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쿠로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질문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그때, 케이토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구애한 겁니다. 드디어 허락이 내려와서 말을 꺼낼 수 있게 돼서 기뻤었다, 쿠로."

"무슨 허락?"

"우리 집안이 좀 큰 곳이 아니다 보니, 내가 아무리 차남이라고 하더라도 귀족 영애가 아니면 부모님들이 허락을 안 해줬었다. 몇 번 집 밖으로 못 나오게 갇힌 적도 있었지. 이쪽 상점가로 나올 땐 사용인들을 다닥다닥 붙여서 엄청 눈에 띄게 다니는 게 아니면 오지도 못했었다."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상점가를 웃으며 뛰어다니는 쿠로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나는 모른다. 멀리서 한 번 스치듯 본 것이라도 해도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반한 사람에게 말 한 번 걸어보기는커녕 두 번 다시 만나지도 못하게 막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차분히 대화를 하며 알아가는 시간 없이 약혼부터 시작해 쿠로에게 부담을 주게 되어 미안하다. 쿠로와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좋은 점도 마음에 안 드는 점도 지금은 그저 다 좋다. 지금 이렇게 쿠로의 옆에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고,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감사한다. 쿠로,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맙다."

쿠로는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새빨개진 체 케이토가 있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케이토는 쿠로가 고개를 돌리든 말든 그저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한 체 속으로 쿠로에게 사과했다. 사실이 반쯤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 

쿠로에게 혼약을 넣은 건 케이토의 부모님이었다. 케이토는 약혼식에서 쿠로를 처음 봤었다. 집에 갇혀서 못 나온 건 그저 케이토가 부모님의 눈에 거슬려서였다. 이쪽 상점가에는 올 이유가 없어서 안 온 것뿐이었다. 드물게 이쪽에 올 때마다 사용인을 주렁주렁 매달고 왔던 건 황태자 에이치가 사달라고 떼쓴 물건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무거울까 바였다. 케이토가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던 건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쿠로의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는 감상은, 그거 하나만큼은 사실이었다. 어제의 그 티타임때 본 쿠로의 미소는, 아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인사와 축하를 받는 쿠로의 미소는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사용인들에게 강하게 나서질 못해서 안 어울린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에 안 드는 새파란 드레스를 입고 온 게 처음엔 황당하고 어이없었지만, 티타임 도중 한번 환하게 웃는 걸 보고 나니 쿠로를 몰아넣은 사용인들을 치워주고 싶어졌다. 

이제 약혼자 사이니까, 라는 의무감이 아니라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드는 그런 미소였다. 이 사실을 아주 많이 부풀린 말이란걸 알지만, 속인다는 죄책감이 들어서 양심이 아프고 속이 좀 쓰렸지만, 그래도 끝까지 사실인 것처럼 케이토는 쿠로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사실 사교회에서 쓸 이야기를 만들 생각이기는 했는데 이렇게 즉석에서 만들어낼 줄은 몰랐기에 케이토는 조금 식은땀이 났다.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쿠로에게 사전 설명을 하기엔 케이토 눈에 쿠로는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다. 약혼하게 된 적당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자체를 꺼내기가 양심에 찔려서 말 자체를 못 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신분 차이 때문에 이뤄지지 못 할 뻔했다는 사랑 이야기는 평민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하였다. 여기에 앞으로 자주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쿠로를 챙겨대는 애처가 이미지를 굳히면 케이토는 평민들 사이에서 하스미 공작가라는 과하게 경외시되는 귀족보다는 애절한 사랑을 하다가 결국 이루어 낸 귀족이라는 조금 친근한 이미지가 돌 것이다.

한편 거짓말인 줄은 꿈에도 모른 체 상상도 못 한 절절한 이야기를 들은 쿠로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거짓말 같은데 저렇게 담담하게 웃으며 하고 있으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잘 구별이 안 됬다. 그래서 케이토가 말을 다 하자마자 천천히 몸을 돌려서 케이토의 반대쪽에 있던 팔걸이를 붙들고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손에 닿은 뺨이 꽤 따뜻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 말을 아는 사람 앞에서 들으니 무슨 반응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일단 얼굴을 가렸지만, 이 상황이 오래 갈 리 없었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구별도 안 되고 누군가에게 물어본다고 사실 확인이 될 것 같지도 않은 말에 쿠로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때까지 케이토가 계속 자꾸 쿠로에게 져주고 맞춰주는 이유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쿠로는 케이토의 행동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약혼식 날 구두를 벗겨주는 손길을 거부한 지 얼마나 됐다고 (결과물이 아주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새 옷을 해다 보내 주었고, 이상한 옷을 입고 왔다고 티타임을 쫓아내거나 화를 내기는 커녕 되려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티타임 다음날인데 둘이 나와서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굳이 다음날에 또 보자고 한 게 이유가 있다면? 거기다 상점가에서 보자고 말을 꺼낸 이유는? 등 뒤에서 케이토가 부르지만 알 수 없는 감정에 쿠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쿠로, 얼굴 들고 이쪽을 봐주었으면 한다."

"잠시만, 잠시만 가만히 냅둬주라..."

"실례, 쿠로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자리를 비켜 줄 수 있나?"

"앗, 물론이죠. 나오실 때까지 안 들어오겠습니다. 편하게 계세요."

점원이 나가는걸 본 케이토는 바로 일어나서 쿠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쿠로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달라고, 눈을 맞춰달라고, 대답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몇 번 간절하게 쿠로의 이름을 부르니 쿠로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었다. 

쿠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한손은 눈을 가리고 반대 손은 드레스를 꽉 잡았다가, 고개를 돌린 체 양팔로 배를 감쌌다가 케이토가 한 번 더 간절하게 이름을 부르니 고개를 돌려 케이토와 눈을 맞추었다.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쿠로를 보니 케이토는 양심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케이토가 미간을 구기는 게 쿠로는 마음이 아팠다.

"케이토, 일단 소파에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쿠로,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나? 쿠로를 이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괜찮다면 손을 잡아도 되겠나?"

"응, 여기. 일단, 케이토가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사과 안 해도 돼.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래. 그, 이런 취급은 처음이라서. 뭐랄까 오히려 내가 미안해. 케이토는, 그게, 그러니까..."

"쿠로, 울지마라. 내가 생각이 짧았다. 쿠로..."

"하하, 우는 거 아냐. 그냥 조금 심란하네. 케이토는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는 아닌데. 전혀 아니었는데."

"당연하다. 우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지 오늘이 나흘째다. 우리가 같은 마음인 게 더 이상한 거다, 쿠로. 내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하마."

"아니야, 사과 할 일 아니야. 그렇게 들은 게 아니니까 사과 안 해도 돼. 빨리 아무거나 사고 가자. 여기 계속 있긴 좀 그렇다, 그지?"

"그럴까? 아까 재질이 마음에 든다고 한 게 이 샘플 북의 옷감이었나?"

"어? 응, 그거랑 이거랑 이거."

케이토는 쿠로가 집어 든 샘플 북을 손에 들고 방문을 열었다. 케이토가 연 문틈 사이로 평범해 보이는 가게가 보였지만 쿠로는 점원 언니들이 다 엿들었다는 것을 순식간에 눈치챘다. 쿠로는 도망가고 싶어져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케이토는 그런 쿠로를 일단 가게 밖으로 나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아무것도 눈치체지 못한 척 직원을 응대했다. 직원에게 쿠로가 집어 든 샘플 북을 넘겨주며 거기에 나오는 모든 옷감을 5마씩 상점가 동문 쪽에 있는 말을 맡아두는 곳에 있는 수레에 배달을 부탁하고 가계를 나왔다.

쿠로는 케이토가 연신 감사합니다 소리를 들으며 계산까지 하고 나올때까지 벽을 본체 진정하려 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쿠로한테 케이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위를 맞춰야 하는 사람이었다. 저택과 사용인을 받았던 그날에 아빠는 모르겠고 여동생이 기뻐하는 걸 보고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약혼 상대를 쿠로 본인이 고른게 아니라 아버지가 조건만 보고 골랐다보니 쿠로는 최악의 경우 늙고 배불뚝이에 느끼하고 스킨십과 성희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 예상했었다. 그럼에도 여동생이 좀 클 때까지, 쿠로 본인이 아카데미를 졸업 할 때까지는 꾹 참고 비위를 맞춰가며 그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약혼식 날 본 케이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미남이었고 이렇게 대화해 보니 잔소리가 아주 많은 것만 빼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알고 봤더니 예전부터 쿠로를 좋아하고 있었단다. 쿠로는 연애 이야기 같은 것에 크게 관심을 둬 본 적이 없었다. 운명이라던가 사랑 같은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이라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뭘까. 극한의 상황이라도 비위를 맞추겠다고 결심까지 해야 했던 사람이 알고 봤더니 나를 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눈 마주치는 거나 손 잡는 것조차 고마워하는 데다가 얼굴이 자신의 취향을 구현해 낸 미남일 확률은 얼마가 될까?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빨개진 체 진정 안 되는 얼굴은 뭐가 문제인 걸까? 

케이토는 쿠로에게 계속 '익숙해 질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약혼식 날, 케이토를 처음 봤을 때부터 쿠로는 쭉 이 상태였다. 가게를 나온 케이토는 그렇게 벽을 보고 있는 쿠로를 보고 심각해져서 다가왔다. 가까이 붙어 서서 괜찮냐고 물었지만 쿠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허리에 얹어진 케이토의 손 때문에 깜짝 놀라서 쿠로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케이토는 그렇게 놀라는 쿠로를 보고 쿠로의 허리에서 손을 떼었다. 케이토가 쿠로의 반응을 보고 죄책감에 양심이 아프다 못해 속까지 쓰려 올 때쯤, 쿠로가 상점가를 좀 걷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나아질 것 같아서 한 쿠로의 제안을 케이토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원체 쿠로가 터치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케이토는 쿠로의 허리에 손을 더 올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나란히 서서 상점가의 인파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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