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히요] 꽃샘추위

앙스타 쥰히요 단문. 전연령



*18,411자. 

* 걍 뽀뽀하는 거 보고 싶어서 쓴 글.

* 둘이 안 사귐


달리던 발을 멈춘다. 고개를 들어 차오른 숨을 크게 내뱉고 하늘을 바라본다. 새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좋은 히요리네. 정작 본인은 좋은 히요리가 아닐 테지만. 

뺨에 닿아오는 공기가 제법 차다. 쥰은 제 발아래에서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는 작은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작은 몸이 달달 떨린다. 날씨라도 보고 나올걸.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두꺼운 걸로 입히고 나오는 건데. 어제까진 덥게 느껴질 정도로 올랐던 기온이 한순간에 뚝 떨어졌다. 꽃샘추위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춥죠? 들어갈까요, 메리?”

얇은 져지 안에 집어넣으면 작은 머리통만 쏙 나오는 것이 제법 귀엽다. 손안에 다 들어오는 작은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어 주고 쥰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날씨라면 누구 씨가 일어나자마자 불평부터 할 게 뻔하니, 가서 미리 대비를 해놓는 것이 좋겠다. 

“이제 오네, 쥰 군.”

“벌써 일어났어요? 어쩐 일이래.”

“너무 추워서 깨버렸네……. 추워…….”

“그 정도인가? 잠깐 있어 봐요. 코코아라도 타 줄게요.”

“응…….”

돌아오니 이불을 몸에 돌돌 만 히요리가 침대에 앉아 잔뜩 풀이 죽어 있다. 눈을 절반도 못 뜨고 있는 걸 보니 잠이 모자라긴 한 모양이다. 하긴, 평소라면 쥰이 씻고 나와 대강 아침을 준비할 쯤 깨워야 일어나는 사람이다. 춥긴 추운가 보네. 쥰은 메리의 발을 닦아주곤 서둘러 전기포트에 물을 채우고 머그잔을 꺼냈다. 히요리는 곧장 제게 달려오는 메리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린다. 

“자요. 천천히 마셔요. 아직 좀 뜨거우니까.”

“그럼 식혀줘야지.”

“이게 더 따뜻하잖아요. 손에 쥐고 있다 보면 적당해질 거예요. 몸도 데워질 거고.”

“으응.”

“씻고 나올게요.”

“추워……. 봄인데. 이건 너무하네.”

“당신이 지나치게 추위를 타는 거예요.”

불평하는 것 치곤 평소보다 말수가 적다. 히요리는 추우면 유독 조용해지는데, 그런 주제에 남보다 배로 추위를 많이 탄다는 걸 그와 겨울을 한차례 지내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더위도 많이 타면서. 하여간 여러모로 귀찮은 사람이네. 괜히 씻는 쥰의 손만 바빠졌다. 추운 데다 잠까지 모자란 그의 시중을 들려면 오늘 하루는 고생 좀 해야 할 것 같다. 히요리가 시끄러울 땐 귀찮지만, 조용해지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차라리 시끄러운 게 나았다. 

“잠 좀 깼어요?”

“잠은 진작 깼네! 왜 이렇게 춥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봄이라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꽃샘추위라나 봐요.”

“아아. 정말 싫어.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네. 안에 있어도 이렇게 추운데 밖은 어느 정도라는 거야.”

“단단히 입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던데요. 좀 쌀쌀한 정도고.”

“그건 쥰 군이 이상하게 열이 많아서 그렇네!”

“그러니까, 당신이 지나치게 추위를 타는 거라고요.”

다시 부지런히 입을 놀리는 걸 보면 코코아가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쥰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강 털어대며 히요리에게 다가갔다. 가득 담겨 있던 코코아는 절반 정도 줄어 있다. 그렇게 추운가. 잘 모르겠는데. 쥰은 무심코 손등을 그의 뺨에 갖다 대었다. 머그잔을 뺨에 대고 있었던 건지 따끈따끈하다. 이 사람은 볼도 말랑말랑하네. 어느새 제 손에 고개를 기대는 그의 볼을 매만졌다. 묘하게 촉감이 좋다. 

“다 마셨어요?”

“응.”

“씻고 와요. 머리 말려줄게요.”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어. 공기가 차네.”

“머리 다 뻗쳐서 지금 엄청 바보 같거든요? 빨리 안 일어나면 찍어서 SNS에 올려버릴 테니까.”

“난 이런 모습도 귀여우니까 상관없는데.”

“…그런 말 자기 입으로 하면 안 민망한가……? 아, 빨리 일어나요. 미적대지 말고.”

“못됐어! 맨날 구박이나 하고.”

“그래도 시중은 다 들어주잖아요. 착한 후배죠.”

“오늘 아침은 뭐야?”

“프렌치토스트로 할까 봐요.”

“수프도 먹고 싶어.”

“재료가 있던가……. 한 번 볼게요.”

종알대는 그를 간신히 욕실로 밀어 넣었다. 평소보단 이르지만, 덕분에 아침 식사는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겠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훌훌 털어 말리는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 아침 메뉴를 구상한다. 저 사람은 추울수록 씻는 데에 오래 걸리는 편이니까, 수프까지 끓일 시간은 충분할 것 같다. 꽃샘추위가 물러갈 때까진 메뉴 구성은 따뜻한 것들로 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뭐, 시집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간단히 식사 준비를 마쳤을 쯤 히요리가 잔뜩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꽁꽁 싸맨 채 욕실에서 나온다. 따뜻한 열기 덕분인지 그는 종알종알 다시 말이 많아졌다. 쥰은 자연스레 그에게 다가가 드라이기의 바람에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털어가며 말려주었다. 

머리카락이 공중에 폴폴 나부낄 때마다 향긋한 향이 날아와 코끝을 건드린다. 같은 샴푸를 썼으니 나에게도 같은 향이 나려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히요리의 수다에 네, 네, 성의 없는 대답을 던진다. 그래도 곱슬한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만큼은 정성스럽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손가락에 자연스레 감길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다. 봄바람처럼. 

여느 때와 같은 아침 식사 풍경이 이어진다. 이런저런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어느새 등교 시간이 코앞이다. 부리나케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며 이러다 늦으면 누구 탓이라느니 떠들 시간에 준비나 하라느니 다투며 급히 방을 나서는 것까지가 매일 반복되는 아침의 모습. 오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추워!”

“아아, 좀. 귀 가까이에서 소리 지르지 마요. 고막 터지는 줄 알았네.”

“그렇지만 춥네! 너무해. 봄이 됐는데도 이런 날씨라니,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네!”

“허튼소리 하지 말고 걸어요, 좀! 학교를 코앞에 두고 살면서 지각해야겠냐고!”

기숙사에서 학교로 향하는 그 짧은 거리에서도 히요리는 춥다고 야단이다. 정말 꼼짝도 안 하겠다는 듯 쥰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꼭 쥐고서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별수 없이 쥰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의 머플러며 외투를 꼼꼼하게 다시 매만져 주었다. 애야? 뭐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불만을 애써 집어삼킨다. 잔뜩 울상인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던 탓이다. 

그래. 추울 수도 있지. 이 사람, 말만 이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추위에 약하니까. 히요리는 쥰의 옆에 딱 달라붙은 채 머플러에 코를 박아 넣고서 목소리만큼이나 요란하게 덜덜 떨어댔다. 핫팩이라도 챙겨줄 걸 그랬나 보다. 저 모습을 보니 져지 밖으로 눈만 쏙 내놓고 있던 아침의 메리가 떠올라서, 쥰은 간신히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어르고 달래가며 그를 끌고 온 덕에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학교엔 히터가 돌았고, 낮부턴 언제 추웠냐는 듯 기온이 크게 올라 더는 춥지 않았다. 몸에 열이 많은 쥰에겐 덥게 느껴질 정도다. 학교 여기저기선 온통 히요리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새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2학년과 3학년은 분명 다른 층을 쓰지 않았나? 정말 어딜 가나 시끄러운 사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머리 위에선 히요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와서, 쥰은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토해냈다. 

*********************

학업과 아이돌 활동을 병행하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연말 무대에선 아쉽게 2위의 성적에 머물긴 했어도 여전히 주가는 톱을 찍고 있는 유닛답게 스케줄은 법적으로 미성년자의 출연이 금지된 시간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수업 시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나서 밴에 올라야 하는 때도 많았다. 바로 오늘처럼. 

기숙사로 돌아왔을 땐 이미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따뜻했던 오후를 만끽할 새도 없이 다시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친다. 히요리는 또 말수가 줄어들었다. 피로에 추위까지 더해진 탓이리라. 낮에 푹푹 찌던 날씨 때문인지, 기숙사 방엔 여전히 히터가 돌지 않았다. 

“왜 여긴 안 틀어주는 거야……?”

특대생 기숙사라고 번드르르한 건 다 해놓더니 난방은 중앙제어로 돌아가는 건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여름과 겨울엔 별문제가 없었지만, 기온이 크게 오르내리는 환절기엔 영 말썽이었다. 뭐, 사실. 쥰도 지금은 그리 춥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 히요리처럼 유독 온도에 예민한 사람만 고생인 거겠지. 

“아기씨. 목욕물 받아뒀어요.”

“으응. 너무 추워.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네.”

“자, 자. 당신이 좋아하는 입욕제도 풀어뒀으니까요.”

담요를 몸에 돌돌 만 채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히요리를 어르고 달래 욕실에 밀어 넣었다. 저렇게 투덜거려도 목욕으로 몸을 녹이고 나면 금방 평소처럼 재잘대기 시작할 거다. 쥰은 느긋하게 메리의 밥을 챙겨주고, 아침에 급히 방을 나서느라 어질러져 있던 것들을 정리했다. 

욕실 문 너머에선 어렴풋이 히요리의 콧노래 소리가 들린다. 평화롭네.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 조용한 여유를 만끽하려, 쥰은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SNS를 훑고 있으려니 자연스레 날씨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꽃샘추위가 이어질 거란다. 다만, 낮 동안은 기온이 크게 오르기 때문에 일교차에 유의하라는 내용의 짧은 기사를 읽는다. 그렇다면 한동안은 저 시끄러운 누구 씨가 평소보다 배로 귀찮아질 거라는 얘기다. 아침저녁으론 춥다고 난리일 테고, 낮 동안은 따뜻해졌단 이유로 외투며 머플러를 죄다 이쪽에 떠넘기겠지. 빈 에코백이라도 하나 챙겨 다니는 것이 좋겠다. 이 귀찮은 시중이 어느새 몸에 배 익숙해졌단 사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히터는 안 틀어주는 거냐고…….”

원망스럽게 천장에 달린 에어컨 겸 히터를 노려보았지만, 그런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긴. 히터가 나와도 고생이다. 사실 쥰에겐 지금이 딱 선선하고 쾌적한 기온이긴 했다. 겨우내 틀어져 있던 히터 때문에 공기가 답답했었는데,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춥다고 난리인 히요리도 정작 히터가 나오기 시작하면 공기가 건조하다며 투덜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이러나저러나 귀찮네. 그럼 차라리 히터는 안 나오는 게 낫겠다. 어쨌든 쥰은 별 불만이 없었으므로. 

“하아……. 피곤해.”

“아. 나왔어요?”

“응. 따뜻해지니까 졸리네……. 당장 눕고 싶어.”

“이리 와요. 머리는 말려야죠.”

자연스레 드라이기를 들고 서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 히요리가 다가와 화장대 앞에 앉는다. 따뜻한 바람으로 머리를 살살 말려주는 동안, 그는 눈을 감고 자꾸만 고개를 떨군다. 바보 같다고 핀잔을 줘봤지만 듣지도 않는다. 하긴. 피곤하겠지. 오늘은 쥰의 몸도 무겁긴 마찬가지다. 화보 촬영에 뭐에, 바쁘긴 바빴으니까. 오후엔 갑작스레 들이치는 따사로운 햇살이 자꾸만 졸음을 몰고 오기도 했다. 봄의 변덕에 시달리다 보면 몸은 금방 피로해졌다. 

“졸려요?”

“…응.”

드라이기를 끈다. 순식간에 고요함이 방안에 내려앉는다. 히요리의 뺨에 슬쩍 손을 대 고개를 받쳐주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 쥰의 손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이대로 잠들어 버릴 셈인가.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기는 뺨의 촉감이 나쁘지 않아서, 쥰도 불평하진 않았다. 

“일찍 잘까요?”

“으응…….”

“그럼 일어나요. 침대로 가게.”

“옮겨주면 좋겠네…….”

“저기. 온종일 스케줄 뛰느라 힘들었던 건 계속 같이 있었던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투덜거려봤자 히요리는 감은 눈도 뜨지 않고 요지부동이다. 손이 따뜻해 기분 좋다며 잠꼬대 같은 말이나 흘린다. 응석 부리는 아이 같아 가슴이 간질간질해졌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말을 들어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볼을 꼬집고 어깨를 잡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곧장 불평이 날아들었으나, 다행히 그는 비척대는 걸음으로 침대로 향한다. 

가습기에 물을 가득 받아 틀어두고, 침대에 히요리가 기어들어 간 것을 확인한 뒤 방의 불을 끈다. 자. 잘 준비는 끝. 쥰도 늘어지게 하품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히요리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도 뭐가 그리 불편한지 자꾸만 몸을 뒤척인다. 뭐. 저러다 잠들겠지. 별생각 없이 제 자리로 올라가려는데, 별안간 옷자락이 붙들린다.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도 반질반질 빛나는 눈과 마주친다. 

“뭐예요?”

“추워.”

“그러니까… 뭐 어쩌라고?”

“춥네! 이불 가지곤 모자라!”

“이불은 그게 제일 두꺼운 거고, 미안한데 제 건 줄 수 없거든요?”

“모르네, 그런 건. 어쨌든 난 춥고, 추우면 잠들 수 없어.”

“그것참 안됐네요. 제가 대신 잘 자겠슴다.”

“혼자 자게 그냥 내버려 둘 줄 알아?!”

“아아, 좀! 어쩌라는 거야!” 

결국 침대 사다리에 올렸던 발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히요리는 당해낼 수 없다. 차라리 원하는 것을 빨리 들어주고 입을 닫는 게 나았다. 포기하고 다가가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눈만 내민다.

“자. 그래서 뭘 어쩔까요.”

“방법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뭐?”

“쥰 군은 쓸데없이 몸이 따뜻하니까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하다 하다 이젠 사람을 핫팩으로 쓰시겠다?”

“얼른.”

“하…….”

“빨리!”

“알았다고요. 옆으로 좀 가봐요, 좁으니까.”

피곤하다. 졸린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 쓸데없는 기 싸움으로 귀한 수면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저래 봬도 이래저래 조건만 맞춰주면 잘 자는 사람이니, 빨리 재워버리고 빠져나가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쥰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히요리의 옆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그가 제 몸에 둘둘 말아둔 이불을 억지로 빼내 덮으면서. 

“이불을 뺐으면 어떡해?!”

“옆에 있으라고 한 건 당신이거든요? 좀 같이 덮자고요.”

“너무 좁아.”

“참아요. 원래 핫팩도 주머니에 넣어둬야 효율이 높다고.”

그리 작은 침대도 아니건만, 역시 고등학교 남학생 둘이 나란히 눕기엔 영 크기가 애매하다. 좁다며 자꾸만 꿈지럭거리는 몸을 붙들어 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당겨 안고 투박하게 등을 두드려 줬다. 좀 자라고. 그제야 잠잠해진다. 두 사람의 체온이 이불 속에서 나른한 온기를 자아내기 시작한다. 

“좀 나아요?”

“응. 역시 따뜻하네. 좋은 선택이었어.”

“누구한텐 귀찮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지만요.”

“자꾸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노예는 주인의 수면을 위해서 노력하는 게 당연하지!”

“알았다고. 자요, 좀.”

가만히 두면 이대로 밤새 종알댈지도 모른다. 그의 고개를 당겨 안아 어깨에 기대어 놓았다. 그제야 잠잠해진다. 따뜻한 숨결이 목 언저리를 맴돈다. 머리를 쓸어주고, 등을 토닥여 주면 그는 언제 그리 종알댔냐는 듯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점점 느려진다. 이렇게 잘 잘 거면서 뭘 그렇게 투정이래. 애도 아니고. 

히요리가 잠들면 곧장 몸을 일으켜 제 잠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잠드니, 영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쥰의 몸도 점차 노곤해진다. 뭣보다 품 안의 체온이 따끈한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조금 더운가 싶어 다리 한쪽을 이불 밖으로 쓱 빼내 히요리의 몸에 휘감듯 얹어놓았다. 딱 알맞다. 그새 잠들어 버린 히요리도 무겁다느니 하는 불평은 늘어놓지 않을 것 같다. 

아. 몰라. 그냥 잘까? 괜히 빠져나가다가 잠든 사람 도로 깨워놓으면 더 귀찮아질 것 같은데. 뭣보다 이미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사다리를 기어 올라갈 자신이 없다. 별수 없지. 다 이 사람 탓인데. 몰려오는 졸음에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쥰도 눈을 감았다. 

오늘은 피곤한 날이었다. 잠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다. 

*********

왜 이러고 있었더라. 

평소와는 다른 아침의 온기에 눈을 뜬다. 히요리는 왜 품 안에서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지, 자신은 그를 왜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는지 기억해 내는 데에는 아주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아. 어제 그대로 잠들었구나. 심지어 깨지도 않고 푹 잤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시야?

“음… 메리. 잠깐만요…….”

등 뒤에서 찹찹거리는 깜찍한 소리가 쉼 없이 들린다 했더니, 블러디 메리의 발소리였던 모양이다. 작은 강아지는 짖지도 않고 열심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식사를 보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긴 했던 모양이다. 쥰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품에 안고 있던 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그러나 어찌나 딱 달라붙어 자고 있었던지, 히요리를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오는 데엔 무리가 있다. 히요리의 몸에 얹어놓았던 다리를 슬쩍 떼어 옮겨놓고, 침대를 조심스레 짚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잠든 그의 몸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되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다른 쪽 팔은 어떻게 빼지? 히요리의 머리가 당연하다는 듯 팔에 얹어져 있어 곤란하다. 어쩐지 팔이 저리더라. 

“…메리. 잠깐만요. 잠깐만…….”

작은 강아지가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와 열렬한 눈빛으로 보채기 시작한다. 배고플 텐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지만, 팔을 빼내는 몸짓은 한없이 느리다. 침대를 짚었던 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쳐 들고, 조심조심 팔을 움직인다. 그러나 쥰의 눈물 나는 노력이 무색하게, 감겨있던 눈이 자꾸만 움찔거리더니 결국 조금 열린다. 

“음…….”

“아. 깼어요?”

“응……. 뭐야.”

“안 깨우려고 했는데.”

“그야, 누가 내 위에 올라타서 꿈지럭대고 있으면 누구든 깨지 않을까?”

“…아.”

“쥰 군, 엉큼하네. 잠든 사람한테.”

“…그런 거 아니거든요?”

쥰은 황급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꽤 민망한 자세로 있었다는 걸 히요리가 지적한 뒤에야 깨달았다. 이럴 거면 그냥 깨거나 말거나 대충 일어날걸. 

“으응……. 몇 시야.”

“아직 일러요. 좀 더 자요.”

“쥰 군도 이리 와. 춥네…….”

“핫팩 유효기간 지났어요— 메리 산책도 나가야한다고요.”

히요리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이불에 파묻혀 몸을 웅크린다. 오늘도 기온이 낮고, 히터는 나오지 않는다. 오늘도 귀찮겠구나. 뭐, 어차피 익숙해서 상관없다. 쥰은 제 발을 자꾸만 간질이는 작은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의 시작이다. 

***************

아니나 다를까 히요리는 귀찮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단 얘기다. 오전 내내 춥다고 투덜거리는 그를 달래고, 오후엔 그새 기운을 차리고 떠들썩해진 그의 시중을 들었으며, 해가 진 뒤엔 또 춥다며 시무룩해진 그의 응석을 받아줘야 했다. 귀찮아. 빨리 따뜻해져야 할 텐데. 그러나 더우면 더운 대로 귀찮게 구는 사람이니,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지 싶다. 평생 이러고 살아야겠지? 내 팔자도 꼬일 대로 꼬였구나. 

그러나 크게 불만은 없었다. 익숙해진 덕분이다. 그와 함께 지낸 지도 거의 1년. 쥰은 이제 히요리의 끝도 없는 응석과 불평 중에 무엇을 들어줘야 하고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 능숙하게 골라낼 줄 알았다. 게다가 뭘 해줘도 큰 반응이 돌아오니 의외로 시중을 드는 맛도 제법 있었고. 물론, 꼭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 찰나의 뿌듯함을 날려버리는 게 문제긴 했지만. 

곤란한 것은 익숙하지 않은 억지를 맞닥뜨렸을 때다. 바로 지금처럼. 이불속에 파고든 채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팔을 벌리고 있어봤자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쥰은 저에게 쏟아지는 눈빛에 붙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 한가운데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불… 끌게요?”

“응. 얼른 끄고 와. 자고 싶네!”

“그럼 눕든가……. 뭘 더 해줬으면 하는 거예요?”

“당연히 와서 재워달라는 거지.”

“…또요?”

“오늘도 춥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나 저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니 오히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추울 때마다 이럴 셈이냐고요.”

“당연하지? 그야 추워서 못 자던 게 오늘이라고 달라질 리 없을 테니까.”

“그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러니까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오는 게 좋겠네!”

뭘 당연하다는 듯이 저러고 있는 거야? 이게 맞아?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불현듯 스쳤지만, 쥰은 고분고분 일단 방의 불을 끄고 돌아섰다. 히요리는 친절하게도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켜 방에 어슴푸레한 빛을 밝힌 채 쥰을 기다리고 있다. 침대 안쪽으로 몸을 바짝 밀어 넣어 쥰이 누울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어 놓고서. 

쥰도 어색하게 다가가 히요리의 옆에 눕는다. 영 어정쩡한 쥰은 개의치 않는 듯, 히요리는 쥰이 다가오자마자 가까이 달라붙어 이불을 덮었다. 확실히 따뜻하긴 했다. 조금 더울 정도로. 

“침대가 두 개나 있는데 굳이 이렇게 좁게 자야 해요?”

“싫다면 쥰 군의 이불을 주면 되겠네.”

“그건 안 되지. 저도 새벽엔 추울 거 아녜요.”

“그러니까 이렇게 자면 둘 다 추울 일도 없고 이득이네! 게다가 주인님과 같이 자는 영광도 누릴 수 있지.”

“영광이고 뭐고 모르겠지만… 이건 좀 더운데.”

“응. 난 딱 좋아.”

“제가 덥다고요, 제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굳이 좁은 곳에서 이래야 하나 싶지만, 생각보다 자는 데에 불편하진 않았으니 순순히 말을 듣기로 한다. 쥰을 핫팩처럼 쓰고 있는 히요리가 바짝 달라붙어 주는 덕에 공간도 의외로 여유로웠고, 아무렇게나 발을 걸치고 자도 별 불평을 하지 않아 자세도 생각보다 편하다. 품에 뭔가 따끈한 것이 안겨있으니 오히려 안정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자, 그럼 잘 자요.”

“음. 그런데…….”

“또 뭔데요?”

“‘뭔데요?’가 아니지? 내가 좋은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계속 만지작대면 잘 수 없네.”

“…아.”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불만스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히요리와 눈을 마주친다. 쥰은 그제야 제 손이 히요리의 뺨을 연신 만지작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거, 느낌이 좋은걸. 묘하게 중독성도 있고. 뾰로통한 얼굴로 항의해봤자 별로 손을 거둘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쪽 억지를 들어주고 있으니 이 정도는 봐달라고. 

“그런데 이거 제법 기분이 좋아요. 아기씨 뺨 엄청 말랑말랑해서.”

“무례하네! 또 놀리는 거지? 그놈의 말랑말랑 타령!”

“왜 화를 내는 거야……. 여긴 말랑말랑해도 상관없잖아요?”

근육 하나 없이 판판한 배를 보며 말랑하다고 하도 놀려댔더니 이젠 말랑하단 말만 들으면 성질부터 낸다. 히요리는 몸까지 반쯤 일으켜 가며 쥰을 노려보고 불평했다. 단단히 화가 났음을 어필하려는 모양이지만, 그 성실한 반응이 오히려 장난기를 부추긴다. 이 사람, 은근히 반응이 커서 놀리는 재미가 있다고. 

“문제는 여기가 아니고…….”

“아, 잠깐!”

“여기라고요.”

약 올리듯 빙글빙글 웃어가며 히요리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곧바로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악을 쓴다. 간지럼을 타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가도 성질을 내며 버둥거리는 그에게 달라붙어 집요하게 배며 옆구리를 찔러댔더니, 그 역시 달려들며 반격해 온다. 웃음과 짜증이 반씩 섞인 아우성과 함께 몸이 엎치락뒤치락 뒤엉킨다. 숨 쉴 새도 없이 웃고 나서야 서로 항복하듯 손을 거두고 숨을 골랐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친다. 어둠 탓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조차 핑계 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지나치게 가깝다. 어느새 히요리의 몸에 반쯤 올라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제야 깨닫는다. 그 부자연스러운 거리감을 자각한 순간 웃음도, 웃음 중간중간 터져 나오던 수다도 멈춘다. 히요리도 마찬가지다. 어색한 정적이 둘 사이로 내려앉는다. 정적과 함께, 지금껏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밀려 들어온다. 은은한 샴푸의 냄새라거나, 닿은 살결의 부드러운 촉감. 혹은 지척에서 뒤엉키는 숨결,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가슴의 고동 따위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이 거리에선 눈을 돌려봤자 서로의 얼굴과 몸에 눈길이 걸려버린다. 어색해. 어색하기보단 간지럽기도 했다. 어둠과 고요함, 서로의 체온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고의 흐름이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쥰은 히요리에게서 몸을 떼어내지 못하고 도리어 조금 더 바짝 몸을 들이밀었다. 훅 숨을 들이쉬던 그가 어색하게 호흡을 멈춘다. 얼마 가지 않아 날숨이 터진다. 흐트러진 호흡이 닿는다. 서로의 콧잔등과 함께.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입술이 닿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위다.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듯. 

살그머니 눈꺼풀이 닫힌다. 더욱 짙어진 어둠과 고요 속에서 촉각이 기민하게 곤두서기 시작한다. 입술 끝에 닿는, 낯설지만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가슴을 간지럽힌다. 여기도 말랑하다고, 그래서 기분 좋다고 하면 아기씨는 또 화를 낼까? 아무래도 좋을 생각과 함께 입술을 더 깊이 묻었다. 

히요리는 쥰을 밀어내지 않는다. 화를 내진 않을 모양이다. 쥰은 살며시 떨어지던 입술을 다시 그에게 파묻었다. 이번엔 조금 더 깊이. 촉촉한 속살이 닿을 만큼. 아쉽게 도로 떨어질 땐 아주 자그마한 물소리가 났고, 그것에 이끌리듯 둘은 다시 입술을 맞대었다. 이번엔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 없다. 

입술은 말랑했고, 부드러운 데다 촉촉하기까지 했다. 조금 단 것 같기도 했고, 덥기도 했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맞붙을 때마다 다른 기분이 들었다. 짧은 입맞춤이 자꾸만 길게 이어진 것은 그 탓이다. 

이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끝이 닿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히요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쥰의 어깨를 움켜쥔다. 다만 그것은 밀어내는 행위와는 달랐으므로, 쥰은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고개를 꺾어 좀 더 깊이 그에게 파고든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얼마나 길게 그것이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둘 중 누구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기에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살며시 밀어 뜬 눈꺼풀 너머로 그의 떨리는 눈을 마주했을 때야 쥰은 천천히 입술을 거뒀다. 잠시 서로에게 닿았던 시선은 어색함을 피하듯 허공으로 도망친다. 

쥰은 반쯤 히요리에게 얹어져 있던 몸을 슬쩍 돌려 그의 옆에 모로 누웠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치 조금 전까지 이어졌던 행위는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히요리를 당겨 안았다. 이불로 몸을 꼼꼼하게 감싸고, 투박한 손으로 그의 등을 툭, 툭 쓸어내리듯 두드렸다. 잠시 잊었던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 

“…잘까요?”

“…응.”

짧은 대화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요란하게 쿵쿵 뛰어대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이제야 귀에 울린다. 큰일 났네. 이래서야 제대로 잘 수나 있을까?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 쥰도, 히요리도 쉬이 잠에 빠져들었다. 고른 숨이 너나 할 것 없이 서서히 느려진다. 아마도 품 안의 따뜻한, 혹은 조금은 더운 듯한 체온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

밤사이에 충동적으로 벌어진 민망한 입맞춤은 둘 사이에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쥰은 아주 푹 잤고, 아침 일찍 아주 개운하게 일어났다. 품 안에서 히요리가 잠들어 있거나 말거나 팔도 쓱쓱 빼서 몸을 일으켰지만, 그는 깨지도 않고 잘만 잤다. 메리를 품에 안고 산책을 다녀와서 이불을 몸에 돌돌 만 채 풀이 죽어 있는 히요리를 달래 아침을 준비하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전날 밤에 있었던 작은 사고에 대해선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말하지 않으면 없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다만, 서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제 입술을 매만지게 되는 것은 분명 어젯밤의 잔상일터다. 해가 지고 기온이 다시 떨어지자 바짝 말라오는 입이라거나 초조해지는 마음까지도 어쩌면……. 

꽃샘추위는 길게도 이어졌다. 낮은 하루하루 따뜻해지는데, 해가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온도 함께 뚝 떨어진다. 며칠만 지나면 기온이 크게 오를 거라는 예보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늘은 특히 더 춥다. 쥰마저도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니, 히요리는 더 곤란할 거다.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연신 꼼지락대는 발끝이 영 안쓰러워 보여서, 쥰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발끝이 차다. 

“양말이라도 신고 잘래요?”

“그건 답답해서 싫어.”

“내일은 기온이 좀 오른다니까, 좀 버텨봐요. 불 끌게요.”

방의 불을 끄고 돌아서자 기다렸다는 듯 히요리 침대 옆의 스탠드가 켜진다. 아무래도 ‘이리 오라’는 신호인 모양이다. 히요리는 이불에 쏙 들어간 채 고개만 내밀어 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춥지. 추우니까. 쥰 역시 순순히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침대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쥰은 침대에 밀어 넣던 발을 걷고 괜히 딴청을 부렸다. 어젯밤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다. 

“왜?”

“그게…….”

“뭘 꾸물거리는 거야? 본분을 다하길 바라네!” 

“아니, 재워주는 건 상관없는데…….”

“그런데?”

말을 해야 아나?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머릿속엔 원망과도 같은 의문이 싹튼다. 

“…사고 칠 것 같아서요.”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쥰을 바라보던 히요리가 이윽고 웃음을 와르르 터뜨린다. 뭐가 그리 웃기는지, 그는 손뼉까지 쳐가며 한참을 웃었다. 이게 웃겨?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괜히 민망해서 따지지도 못하겠다. 쥰은 괜히 제 목덜미를 벅벅 긁어대며 히요리의 옆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기다렸다는 듯 이불과 함께 그가 가까이 달라붙는다. 

“엉큼하네, 쥰 군은. 무슨 사고를 칠 생각이었어?”

“치겠다는 게 아니고… 그냥… 어제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조심하자 이거잖아요.”

“어젠 사고 같은 거였나 보네?”

“그…….”

“신경 쓰여?”

흘끔 히요리를 바라본다. 노란빛이 어슴푸레한 스탠드 빛 아래 그의 눈이 반짝인다. 바로 어젯밤 둘 사이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그에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오늘도 영 멋쩍은 기분에 곤란했던 건 쥰 뿐이었던 듯, 히요리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쥰을 대했다. 마치 어젯밤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약 쥰이 이제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정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을 거다. 

말 괜히 꺼냈네. 분명 어제 닿은 입술을 밀어붙일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뒤늦게 자꾸만 이게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아니지. 이런 거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무렇지도 않은 쪽이 이상한 거라고요, 이런 건…….”

“쥰 군도 평소랑 똑같길래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뭐… 그건…….”

그러나 히요리는 여전히 퍽 태연한 얼굴로 쥰을 바라보고 있어서, 여기서 혼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았다. 괜한 자존심 싸움이다. 

“아기씨가 너무 태연하길래 덩달아 상관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뭐야, 아무렇지도 않은 게 이상한 거라며?”

“이상해졌나 보죠, 누구 때문에.”

“남 탓은 곤란하네.”

태연함을 가장해 보려 했지만,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히요리를 보니 아무래도 진작 들통난 것 같다. 그래도 쥰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어본다. 다만 그 외면이 더 우스은 모양새였는지, 그는 아예 쥰의 볼을 콕콕 찌르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뭐야~ 어색해하긴. 꼭 이런 거 안 해본 사람처럼.”

“그야… 처음이니까…….”

“에. 잠깐. 진짜?”

“네.”

“처음이야?!”

히요리가 번뜩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목소리가 쓸데없이 크다고 나무라봤자 그는 개의치 않는다. 히요리는 쥰의 가슴팍이 마치 제 책상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기대며 쥰을 바라본다. 잔뜩 놀리고 싶어 안달 난 눈으로. 

“당연하잖아요. 아이돌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알려지지만 않으면 그건 별로 상관없지? 게다가 데뷔 전이라면 말랑말랑한 청춘 정도는 즐겨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네.”

“아쉽게도 그 시기엔 시궁창 같은 인생이라 그럴 여유도 없었거든요.”

일부러 빈정거리듯 대꾸했지만, 히요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웃기만 한다. 처음인 게 웃겨? 여태 안 해본 사람들이 훨씬 많을걸? 그러니까 이 사람의 기준이 이상한 거라니까? 누군 아주 인기 많고 태평한 청춘을 즐긴 덕에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지 모르겠지만. 

“영광이네? 처음을 나랑 하게 되다니.”

“…태평하긴.”

“그래서? 처음 키스해 본 소감은 어떤지 궁금하네~”

“몰라요. 자요, 빨리.”

“피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 당당해져도 좋네! 자. 토모에 히요리와 키스해서 어땠어?”

“…별로… 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따지고 보면 무대 퍼포먼스랑 별로 다를 것도 없었고. 아. 그럼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아. 그것도 키스로 치는 거야?”

“연습하다가 닿은 적도 몇 번 있긴 하니까……. 그거야말로 사고였지만요.”

“흐응. 어쨌든, 둘 다 처음은 나였다는 거네.”

히요리가 눈을 휘어가며 기쁜 듯 웃는다. 놀리지 말라고 투덜댈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로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괜히 한 번 손을 뻗어 건드려 보고 싶을 정도로. 쥰은 슬쩍 제 가슴팍에 편히 고개를 기대고 있는 그의 머리칼을 살짝 쥐어보았다. 부드럽다. 그야, 매일 쥰이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말리고 매만져 주고 있으니까. 

얌전히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는 그에게 조금 용기를 얻어, 좀 더 손을 깊이 넣어 머리를 쓰다듬던 쥰은 이내 조심스레 손을 내려 그의 뺨을 건드린다. 부드럽다. 어젠 이 촉감에 홀린 듯 사고를 쳤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만지고 있으면 퍽 기분 좋아지는. 그리고 또…….

“어젠 사고였다고 했으면서, 별로 반성의 기미는 안 보이네.”

투덜거리면서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어쩌면 조금 수줍어 보이는 이 눈에 홀려서.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응?”

“어제… 그거 말이에요.”

그를 바라본다. 지긋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히요리와 눈을 마주한다. 히요리는 잠시 쥰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 다시 눈을 휘어 웃으며 쥰에게 고개를 더 깊이 기대어 온다. 마치 안기는 것처럼. 

“글쎄. 쥰 군에게 뜻깊은 경험을 줬으니 뿌듯하다— 정도로 하는 게 좋겠네.”

“…뭐에요, 그게.”

“쥰 군도 그 정도의 의미만 두는 것 같으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결국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네요.”

심술이 생긴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는데. 그런 척했던 것뿐이지. 닿아오던 입술의 부드러움도, 어렴풋이 들리던 숨소리도 온종일 머릿속을 머물며 떠나지 않았었다. 사실은 지금 전해지는 체온도. 가슴 한쪽이 계속 간지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 건 혼자뿐인가? 아기씨한테 이 정도는… 그러니까 입술이나 혀를 비비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그럼 또 해도 별로 상관없는 거죠.”

“…응?”

머릿속에 피어난 심술은 억지가 된다. 추우니까 옆에 와서 자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받아주고 있으니, 이 사람도 이 정도는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괜한 용기까지 스스로를 부추긴다. 쥰은 몸을 일으켜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저를 바라보는 히요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쥬…….”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묻는다. 충동적인 행위였으나 후회는 없다. 맞닿은 입술이 여전히 부드러웠던 덕이다. 밀어낸다면 기꺼이 밀려나 줄 생각이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런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듯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히요리의 손이 천천히 쥰의 어깨를 짚어온다. 닫혀있던 입술 또한 혀끝의 서툰 노크 정도로도 쉬이 안을 내어준다. 순식간에 혀가 얽혀들었다. 코끝엔 히요리의 체향이 맴돈다. 달콤하게. 

입맞춤이 이어진다. 어제의 얕기만 했던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다. 진득하게 파고든 혀가 서로의 안을 탐한다. 타액이 뒤엉키며 새어 나오는 끈적한 물소리 사이사이로 숨소리라기엔 높은, 게다가 조금은 민망한 비음이 종종 뒤섞인다. 야릇한 콧소리에 이끌리듯 쥰은 좀 더 깊이 히요리를 안았다. 체온이 서로를 덥힌다. 꽃샘추위의 서늘함 따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 으응…….”

모자란 호흡을 찾으려 입술이 떨어진다. 그러나 숨을 들이쉬기가 무섭게 도로 뒤엉킨다. 쥰은 집요하게 히요리의 입술을 탐했다. 머릿속에 피어나는 열감 탓에 몸 아래에서 자꾸만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평소엔 지나칠 정도로 행동도 목소리도 큰 사람이었으니, 그 정도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밀어내긴커녕 어깨를 끌어안은 손은 애달프게 셔츠를 구겨 잡는다. 그래서 쥰은 마음껏, 충동에 제 몸을 맡기기로 했다. 몇 번이고 뒤엉켰다. 몸이 점점 달아올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한참 뒤에야 한숨 같은 호흡을 터뜨리며 떨어진다. 거칠어진 숨은 둘 사이에 피어난 흥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어제처럼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가 없다. 차라리 민망할 새도 없어 더 나았다. 쥰과 히요리는 한참 숨을 고르며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로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놓지 못하고 있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이젠 조금… 덥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히요리다. 침대맡 조명의 노란 빛 아래에서도 그의 귓불에 어린 붉은 빛은 숨길 수가 없다.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그럼 이건 뭔데? 거짓말이나 하고. 기가 차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다시금 그의 몸을 끌어안고 콧잔등을 맞대며 꺼낸 말은 다른 것이다. 

“…그럼 벗을까요?”

쥰을 바라보는 자색 눈동자가 몇 차례 깜박이더니, 곧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모진 타박을 들을 줄 알았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가늘고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온다. 따뜻함이 몹시 기분 좋아서, 쥰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그와 입을 맞댔다. 

“엉큼하네, 쥰 군.”

“…당신, 그거 아까도 말했는데요.”

히요리는 중요한 것은 곧이곧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아마 이 미소는 허락의 의미일 거라고, 쥰은 멋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허리의 맨살을 지분거리다 천천히 더 깊은 곳으로 밀려 올라가는 손을 그는 막아내지 않았다. 그럼 아마도, 내가 맞는 거겠지. 

“알면서도 들인 아기씨가 나빠요.”

살풋한 웃음은 곧장 입 속으로 먹힌다.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밀어낸 옷가지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둘이 덮기엔 조금 작은 이불 하나로 간신히 몸을 가린 채로도 더는 춥지 않았다. 맞닿은 살결에서 피어오른 열기 덕이다. 

그래도 히요리는 남보다 몇 배는 더 추위를 타곤 했으므로, 쥰은 그가 춥지 않도록 부드럽게, 그리고 끊임없이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귓가에서 더운 숨이 터진다. 당겨오는 손길에 이끌리듯 몇 번이고 입을 맞춘다. 서로에게 파고들면 추위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일이 되면 어쩌지…하는 하등 쓸데없는 고민 따위도 흥분에 밀려 머릿속을 떠난다. 

밤이 깊어져 간다. 그래도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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