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an Song 上
미카슈 뇨테로 아가씨 AU
chapter i. Corbeau et ombre
지독하게도 꼬인 인생이었다.
태어났던 순간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과 길거리를 거듭 전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고작 여섯 살 소년. 가진 건 흑색의 더벅머리와 양쪽 색이 다른 눈, 지저분하지만 인형처럼 생긴 얼굴뿐이었다.
길거리에서 빵 조각을 주워 먹고 너덜너덜한 담요 하나에 의지해 겨울을 나는 작은 소년은 이럴 거면 낳지 말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꽁꽁 얼어붙어 굳어 버린 발을 담요 안으로 웅크렸다.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 따위에게 받은 건 몸뚱이 말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부모가 그 흔한 이름 하나 붙여 주지 않아 보육원 원장은 그냥 주위 묘비에 있던 비석 하나에서 성씨 하나를 떼어 와 소년에게 주었다.
影片
그림자 조각.
마르고 볼품없는 아이에게 붙여질 만한 성씨. 원장은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질 이름이 아니라 그저 서류에 적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소년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내전이 일어나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국경 근처에 있던 가난하고 작은 보육원은 당연히 급히 건물과 모든 살림살이를 처분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하나하나 아주 먼 친척이나 그들을 데려가겠다는 인심 좋은 사람들에게로 보내졌다. 보육원의 낡고 딱딱한 침대들이 하나둘 비워져 갈 때 사내아이치곤 마르고 작았던 소년은 홀로 남았다. 원장에게는 골칫덩어리였다.
원장은 항선을 타고 출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를 데려가 키워 주면 좋으련만—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원장은 그런 인물이 못 되었다. 아니, 설령 원장이 아니었더라도 그 어느 누가 혈혈단신에 깡마른 고아를 기꺼이 책임지겠는가. 하지만 원장은 마지막 책임이라는 듯 소년을 동반해 배에 태워 주었다. 전쟁에 휩싸인 나라에서 소년을 배에 태워 먼 나라로 함께 떠났다.
난생 처음 본 배와 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원장은 그를 두고 떠났다. 손에 쥐어진 푼돈으로 빵을 사 먹고 거리에 남겨진 고아는 제가 살던 곳과는 사뭇 다른 화려한 광경에 눈을 뜨지 못했다. 그제야 제가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 봐, 이 아이 눈이 정말 특이해.
지나가는 어느 사람이 알 수 없는 언어로 일행에게 말을 걸었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냄새라도 맡고자 음식점 앞을 서성이던 꼬질꼬질한 소년을 발견한 행인이었다. 소년의 눈은 오른쪽은 밝은 금색, 왼쪽은 투명한 청색을 띠고 있어 오묘한 조합이 눈길을 끌었다. 당연히 행인의 일행들이 몰려들었고, 일순간 주목된 관심에 지레 겁을 먹어 도망쳐 버렸다. 구걸이라도 할걸 하고 후회한 건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이다.
꼬질꼬질한 거지 소년이라 하기에는 눈에 띄는 외모. 그나마 머리가 흑색 더벅머리인 것이 다행이었다. 홍채 이색증은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케이스였던 만큼 소년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열중했다. 보육원 사람들이 지나가다 말했던 어린아이를 납치해 몰래 암매장에 팔아치우는 사람들이 생각나서였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회에서 동떨어져 지냈던지라 사람들이 익숙하지도 않았다.
길거리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가게들은 문을 굳게 닫고 열어 주지 않았으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눈에 쌓여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도로와 인도 또한 꽁꽁 얼고 눈이 뭉쳐 경계가 희미해졌다. 다섯 살 소년의 마른 몸이 견디기엔 무척 힘든 선진국 수도의 겨울.
그래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꽁꽁 언 어느 다리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이를 딱딱 떨며 이런 인생을 더는 이어갈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천천히 심장이 멈춰 죽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 비참해 몸을 더 끌어안았다. 따뜻해지지 않았다.
가난하니 죽는 것도 쉽지 않다.
도구도 없고 약도 없고 죽을 곳조차 주어지지 않아 몇몇 군데는 꽁꽁 언 차가운 개울을 바라보았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얼음에 비친 불행한 소년의 두 눈이 서로 다르게 빛났다. 텅 빈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제야 갓 여섯 살 난 어린아이가 어떻게 혼자 죽을 수 있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리 위로 지나다니는 마차는 고급스러워 보였고, 거리를 자세히 보면 집 안쪽 커튼에 비친 그림자로 보이는 어느 이름 모를 가족의 실루엣은 화목하기 그지없었다. 모두가 연말의 분위기에 젖어 있다. 소년을 제외한 모두가. 소년은 가져 본 적이 없는 행복이라 바라는 것조차 사치이지만 한참이나 길거리에 서서 불이 켜진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무척 싫어졌다.
발이 얼고 군데군데 피가 터져 더 이상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길거리를 걸었다. 점점 눈이 감기는 것도 같다. 이렇게 걷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을 텐데. 소년은 생각했다. 도로를 걷다 쓰러지는 순간까지— 몸 위로 쏟아진 무언가를 의식할 새도 없이.
얘야, 얘야 하고 부르는 자그마한 소리가 귓전에서 희미하게 소용돌이치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이 심연으로 빠져들기 전 느낀 건 이제껏 느껴 왔던 것들과는 다른 희미한 등의 통증과 가슴팍에 닿아 오는 차가운 도로의 감촉뿐이었다.
‧✧̣̥̇‧
깊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잔상들은 하잘것없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선명한 기억들이었다. 처음으로 보았던 도시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처음 먹었던 사탕의 단맛, 원장의 곁에서 처음 보았던 깊고 푸른 바다의 풍경. 이제는 형체도 흐릿해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어떤 사람들의 얼굴까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힐 때 즈음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낯선 주위의 풍경을 눈으로 받아들일 새도 없이 온몸에 저릿저릿한 통증이 밀려와 소년은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기름불이 켜진 작은 판잣집. 아무래도 밤인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인지를 도통 알 수 없어서 소년은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현실이 아직 두루뭉술하게 살갗에 와닿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뒤에서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좀 드나 보구나.”
낯선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웬 풍채 좋은 아저씨가 커다란 냄비를 든 채 커다란 기둥처럼 서 있다. 북슬북슬해 보이는 머리와 수염, 그리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암녹색의 눈동자. 걸을 때마다 쿵쿵 소리가 나는 우람한 체형. 소년은 속으로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분명 자신은 얼어붙은 수도의 거리에서 구걸을 하다 결국 쓰러져 동사했을 텐데— 아니, 그랬어야 했는데. 이곳은 그렇게 춥지도 않으며 따스했고, 사람이 있었다.
“기억은 나더냐? ⋯⋯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으니 뭐 기억하겠나 싶지만.”
탁자에 쿵, 하고 냄비를 내려놓은 아저씨는 손을 탁탁 털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못 꺼낸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소년을 보자 그가 한숨을 쉬며 푹 자리에 앉았다. 투박한 말투에 섞인 사투리와 억양을 보아 그는 수도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은 아마 수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말해 준 바로는— 소년이 도로를 걷던 와중 이 저택의 마차를 몰던 말 하나가 빙판에 미끄러져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마차 뒤 칸에 있던 장작들이 소년의 위로 쏟아져 소년이 크게 다치고 기절해 버렸다고 한다. 적당히 수도에 있는 병원에 보내려 하자 이름도 신원도 확인할 수 없어 병원에서 치료를 할 수 없다는 얘기만 듣고 허탕을 쳐 결국 마차를 소유한 귀족 가에서 그를 영지로 데려와 치료하라고 명한 모양이었다.
“이름이 무어냐? 도통 대답을 안 하니 원.”
“⋯⋯.”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 걸까, 목이 잠겨 쉰소리만 튀어나왔다. 목을 긁는 소리에 아저씨가 일어나 커다란 양철 컵에 담긴 물을 건넸다. 정신없이 들이킨 소년이 입을 쓱 닦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몇 번 훑어본 뒤 답했다.
“카게히라.”
그게 이름? 하고 묻는 아저씨에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이자 아저씨가 이름은 없느냐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베넷이다. 네가 이름이 없어도 상관은 없지마는⋯⋯ 네 몸이 성해질 때까지는 아마 이곳에 머물게 될 것 같으니 하여간 처신 잘하거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를 몇 번 휘젓자 무척 달큰하고 고소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제야 소년의 배에서 그간 굶주렸던 것이 서럽기라도 했는지 배고픔을 소리로 표출해냈고,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더니 작게 웃었다. 목소리는 쥐꼬리 만한 놈이 배꼽시계 하나는 우렁차구나, 하고.
“후작 저에서 내려온 수프다. 깨어날 때쯤 됐겠거니 해 가져왔는데 잘됐구나.“
얼굴을 붉힌 소년이 저도 모르게 냄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꺼운 나무 접시에 수프가 담겨 제 손으로 옮겨 오자 소년은 굶은 개처럼 달려들어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것이 목뒤로 넘어가자 눈물이 나올 만큼 행복했다. 수프가 뭐라고, 다시 마차에서 떨어진 차갑고 딱딱한 장작에 깔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걸스럽게 수프를 먹는 그를 보며 베넷이라는 아저씨가 체할라, 하며 몇 마디를 던졌다.
이곳은 아마 수도 근처의 후작 영지인 것 같았다. 이 아저씨는 후작 영지 안 저택의 문지기로, 그날 사고가 날 뻔했다는 마차에 타고 있었다 했다. 하인들이 있는 방에서 지낼 뻔했던 소년을 제 오두막으로 데리고 온 것도 그이였다.
젊을 때에는 딱 너만 한 아들이 있었다, 라고 아저씨는 말했다.
전쟁이 지나고 평민가에 전염병이 돌아 아내와 아이를 잃고 떠돌다 후작 저에서 거두어 줘 문지기가 된 지 어언 25 년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그의 눈빛에서 빛바랜 그리움이 보인다.
당분간은 후작 저의 저택 외곽에 위치한 이 오두막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작은 오두막 주위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무성한 수풀 사이에는 길이 있어 후작 저의 정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오두막 근방을 벗어나지 말라고 했다. 소년을 거두어 준 것은 이곳의 후작이 아닌 듯했다.
이츠키 후작 가는 선대 후작 부인과 현 후작 부부, 그리고 소후작 한 명과 그 여동생이 있는 집안으로 웬만한 다른 귀족들의 영지보다 부유하고 화려한 영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결코 마음이 따뜻하진 않았지만 박하지도 않았다. 영지의 주민들은 그들이 씀씀이가 좋은 편은 아니어도 절대 자신들을 힘들게 하거나 고되게 하지 않는 걸 알았고, 그래서 잡음이 다른 귀족들에 비해 덜했다.
소년을 거두어 주자 말한 것은 이 후작 저의 여식이라고 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소년에 비해 그 여식은 한 살이 많고, 워낙 인형처럼 예쁘게 생겨 후작령 밖에도 소문이 자자한 인물. 그녀가 가끔 이상한 요구를 한다는 것을 사용인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를 살려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후작령까지 데리고 오게 한 건 정말 의외의 일이라고 한다.
“⋯⋯.”
들이닥친 현실이 너무 뒤죽박죽이고 현실감이 없어 소년은 말없이 제 앞에 선 베넷 아저씨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아저씨도 말없이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고, 소년은 암녹색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보았다.
‧✧̣̥̇‧
이곳은 봄과 여름이 길었다.
수도가 겨울을 나는 동안 이곳은 내내 봄을 유지했고,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며 크게 다쳤던 등은 서서히 나았다. 더럽고 꼬질꼬질했던 소년은 저택 사용인들의 보살핌을 받아 제법 깔끔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베넷 아저씨는 소년을 내보내지 않았다. 꼬박 두 해가 지났는데도, 부족하지는 않을지언정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도. 매번 그렇게 비쩍 말라서 나중에 은혜는 갚겠느냐 가볍게 핀잔을 던지면서도 그에게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년은 여전히 이름이 없어 베넷 아저씨는 그저 그를 얘야, 얘야 하고 불렀다.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 애. 소년은 그곳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지만, 소년은 점차 저택에 정을 붙여 가기 시작한다.
우연한 날.
날씨가 무척 좋아 소년은 산책을 나갔다. 나뭇잎도 춤을 추게 만드는 적당한 바람과 햇빛. 공기는 따스했고 소년을 둘러싼 온 세상이 초록색이었다. 잔디를 밟는 사각사각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푸른 냄새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온다. 그런 아름다움에 취했던 것일까. 평소 걷던 산책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산책로를 벗어났다. 이 길로만 다녀야 집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아저씨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새롭게 찾아드는 햇빛의 따스함에 그마저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박, 사박, 사박.
경쾌한 발소리에 기분이 좋아 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짹짹 하고 머리 위에서 우는 작은 새들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꺾기도 하고, 또 냇가의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걷기도 하며 마음대로 걸었다. 그나저나 이곳의 영지는 참으로 넓구나. 소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걸었는데도 숲은 여전히 모르는 곳들투성이였고, 광활했다. 걷다 보니 나온 냇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 아이 눈이 정말 특이해.
냇가에 비친 두 색을 가진 한 쌍의 눈동자를 향해 기억 속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소년은 수면에 눈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수면에 비친 소년 또한 의아한 표정을 하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하게 다른 색을 띠고 빛나고 있었다.
퐁.
그 위로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가볍게 던졌다. 두 색의 눈동자는 수면 위에서 부서져 잔상이 된 채 물살을 타고 흘러 사라졌다.
냇가에서 고개를 들자 고요한 숲이 나타났다. 그제야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어 소년은 어느 방향으로 왔더라, 머리를 쥐어짰지만 나오는 게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걸어 보자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냇가를 따라 걷다가 틀고, 나뭇잎을 들추며 걸었다.
걷다 보니 나뭇잎들의 모양이 달라졌고, 나무들의 몸통이 점차 얇아지더니 높이도 낮아지며 새소리도 덜 들렸다. 어디에선가 달콤한 내음이 흘러들어와 코를 간지럽힌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혹여나 길을 잘못 들어 다른 숲으로 와 버린 것은 아닌지, 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그때 누군가 휙 하고 앞을 지나가자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확 숙이고 앞 덤불에 숨었다. 자세히 보니 소년은 숲을 가로질러 저택의 앞까지 온 모양이었다. 덤불 앞은 잘 닦인 영지의 산책로였고, 방금 지나간 사람은 저택의 한 사용인이었다. 아저씨가 절대 영지 가까이에 가 후작가 사용인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했었는데. 후회가 밀려왔지만 별수 없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숲으로 돌아가는 수밖엔.
숨을 참고 수풀 안에 있는데, 코가 살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도 참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코와 입을 막은 것도 잠시, 몸을 젖히다 제 얼굴로 들이닥친 머리 위 나뭇가지 때문에 요란하게 재채기가 터지고야 말았다.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훅 하고 수풀을 걷고 안에 숨어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누구냐?”
잔뜩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용인에게 무언가 변명하려 입을 열었는데 애석하게도 소년의 입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를 않아 결국 힘껏 줄행랑을 쳤다.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뛰었다. 소년은 계속 발돋움했고, 낯선 사람의 그 낯선 눈빛이 눈앞에 어른거려 계속 소매로 눈을 비벼 잔상을 닦아냈다.
바람이 풀 길을 스치는 잔잔한 소리와 단 내음. 소년은 눈을 끔뻑거리며 수풀 안을 거치고 지나갔다. 각자 제멋대로 자랐지만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던 숲과는 달리 이곳은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 무척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오차 없이 똑같은 모양의 작은 나무들, 일정하게 깎인 잔디, 또 깔끔하게 손질된 수풀들.
그런 정갈한 정원을 마구 헤집고 다니며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 해서 수풀 밖으로 나가 사용인들의 눈에 띌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어디선가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땡, 땡 하고. 소년은 손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작은 몸을 웅크리고 수풀 안에 숨어 있는데 말소리가 또다시 들려와 소년은 몸을 더 수그린 채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국에서 온 장미를 정원사가 심었다 하는데 색이 무척 오묘해서 아름다워요,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뭇잎 사이로 보일 것 같으면서도 무성한 가지에 가려 보이질 않아 소년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뭇잎 틈새로 옷자락이 보였다. 이 저택의 아가씨라면 단 한 명—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이름도 모르는 이 후작가의 막내딸이 분명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가지 몇 개를 꺾으며 더 가까이 다가가자 빛이 밝아지며 더 선명하게 보인다. 작은 은색 티테이블과 꽃병, 찻잔— 그리고 아마도 찻주전자. 말하던 여자는 그새 어디론가 간 건지 보이질 않았고, 그 아가씨라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둘이 같이 간 건가. 이유를 모르게 두근거렸던 가슴이 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소년이 몸에 힘을 빼는 순간이었다.
확.
순식간에 밝은 빛이 제 얼굴을 가려 소년은 눈을 훅 감아 버렸다. 들킨 걸까? 그런 생각에 눈을 차츰차츰 떴다.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처음에는 제 두 눈을 믿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자 점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감지했다. 쿵. 쿵. 쿵. 쿵. 일정하고 무거운 박자로— 소년의 심장은 더욱더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시야 위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랑하고 흔들렸다.
작고 새하얀 얼굴과 그 안에 알차게 들어찬 이목구비. 눈매가 살짝 찢어졌는데도 큰 눈, 전체적으로 고양이 같은 인상이지만 젖살과 홍조 때문에 사랑스러운 인형 같아 보였다. 살랑거리는 분홍색의 긴 머리칼은 굵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소녀의 어깨선에서 소년의 뺨까지 이어졌다. 무엇보다— 눈동자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웠다. 오묘한 보라색의 눈동자.
저렇게 예쁜 게 참말로 사람인가? 소년은 태어나서 그만큼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정교하게 만든 인형 같았다. 장인이 몇 해를 쏟아붓고 정성을 들여 만든 인형. 올곧은 자세에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어린 소녀에게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소년은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중심으로 펼쳐진 하늘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주위의 소리도 멎고, 제 몸속을 순환하는 피와 주제도 모르고 뛰어대는 심장의 소리만이 귀를 터질 듯 채웠다.
“⋯⋯ 너는 누구지?”
소녀가 동그란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넋을 놓고 있던 소년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일어나 그녀에게서 몇 발짝이나 뒤로 떨어졌다. 우두둑 하고 제가 숨어 있던 수풀의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녀는 그를 더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저는⋯⋯.”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아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소년은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소녀는 팔짱을 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자홍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전체적으로 보니 더욱 인형 같다.
“얼마 전에, 마차에서⋯⋯.”
“아가씨.”
누군가 소년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까 그 하녀였다.
“정원사가 장미 몇 송이는 가져가도 된다 전하라고⋯⋯.”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린 여자는 놀라며 아가씨를 제 뒤로 숨겼다. 소년은 더욱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놀란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생각났다는 듯 뒤에 있는 아가씨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던 그 거지 소년입니다.”
하지만 여기 어떻게⋯⋯ 라는 말을 끝맺을 새도 없이 아가씨가 그녀의 뒤에서 나와 소년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말리려는 여자에게 아가씨는 가만히 있으라 고갯짓했고, 결국 여자는 마지못해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상황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가씨가 가까이 다가와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쥐고는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뿌리치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소년은 아가씨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표정이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예쁘구나.”
헌데 한쪽 눈알을 잘못 끼워 넣었나.
작게 읊조린 소리에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인 소년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입을 벙긋거렸지만 나오는 말이 없어 끝내는 입을 다물고 그녀가 시선을 거두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가씨가 허리를 펴 일어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소년은 우물쭈물할 새도 없이 푹 고개부터 숙였다. 죄, 죄송합니데이. 제가 길을 잃어가⋯⋯. 터져 나온 사투리에 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후작가의 영지는 사용인이 아닌 이상 출입 금지다. 아량을 베풀어 주셨으면 잘 알고 다시는 실수로라도 얼굴 비추지 말거라.”
예, 예 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린 소년은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려 애썼다. 보이는 건 드레스 자락이 다였는데, 여전히 아가씨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모, 잠시.”
아가씨가 뭔가 말하자 유모라는 사람은 계속 망설이더니 이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사박사박 사박 하고 발걸음이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어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씨는 너무 예뻤고, 이곳은 넓고 무서웠다. 이러다 쫓겨나거나 벌을 받으면 어떡하지.
“이름이 무엇이지?”
“카, 카게히라⋯⋯.”
“말고 이름.”
소년이 우물쭈물하자 그녀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꽃봉오리처럼 동그랗게 주름이 잡힌 드레스가 소년의 발끝에 닿았다. 선명한 자홍색이었다.
“이름이 없다면 그렇다 해라.”
“⋯⋯ 이름이 없습니다.”
애써 입에서 뱉어낸 사투리 없는 말씨가 어눌해 소년은 아가씨의 보랏빛 눈을 떨리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아, 사람이 저리 예쁘게 생겨도 되나.
저리 희고 고운 게 정녕 사람인가. 소년은 잠시 넋을 잃었다. 미쳤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따라오거라.”
아가씨는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선명한 자홍색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얼떨결에 일어나 아가씨의 뒤를 쫓았다. 곧은 자세로 걷는 아가씨의 등이 보이자 소년은 아까보다 훨씬 더 마음을 놓고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옅은 분홍색의 긴 머리가 바람에 살짝, 아주 살짝 흔들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어야 할지 몰라 소년은 한 발짝은 속도를 높였다가 한 발짝은 속도를 늦추어 걸었다. 또 한 발짝은 빠르게, 한 발짝은 느리게. 아가씨는 걷는 것도 다소곳하게 걸었다. 일정하고 나직한 보폭을 따라— 들쭉날쭉한 망설임이 담긴 발걸음이 뒤따랐다.
아가씨를 따라 들어간 저택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고, 컸으며 호화로웠다. 사방이 반짝거렸고 비싸 보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보육원 원장이 낡은 서랍장 위에 보물처럼 애지중지 간직했던 작은 귀중품들이 이곳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쌓여 있었다.
이렇게 반짝거리는 것들에 둘러싸여 살았구나.
“앞을 잘 보고 걸어라.”
여기저기 하도 두리번거려서 그런지 넘어질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건넨 아가씨에게 또 우물거리며 답을 했다. 아가씨는 익숙한 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 복도 끝에 있는 어느 방의 문 앞까지 도달하자 그제야 소년을 뒤돌아보았다. 소년은 고풍스럽고 넓은 복도를 한참 구경하다 흠칫 놀라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그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아가씨는 문을 열었고, 소년은 화려한 방 안에 발을 들였다.
방에 들어서며 벽에 달린 끈을 당겨 작은 종을 몇 번 울린 아가씨는 작은 머리에서 커다란 꽃과 리본들로 장식된 챙 큰 모자를 벗어내었다. 바스락 하고 모자에 달린 커다란 꽃에서 버석한 소리가 나 소년은 그 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홍색과 분홍색. 저렇게 큰 모자를 쓰면 무겁지 않았을까? 아니, 저렇게 챙 큰 모자를 쓰니 저리 하얀 걸지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아가씨.”
한 하녀가 들어와 소년을 보고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그를 지나쳐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빗을 집어 든 하녀는 곧은 자세로 앉은 아가씨의 머리칼을 잡고 부드럽게 빗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하는 소리에 맞춰 아가씨의 머리카락이 빗에 감겼다 풀어졌다. 그 일련의 광경에 눈길을 빼앗긴 소년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돌아 있도록.”
아가씨의 음성에 정신을 차리자 이내 하녀의 팔에 걸쳐진 다른 드레스와 등에 달린 리본 끈을 푸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란 소년은 급히 몸을 돌리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 방에서는 은은한 장미 향기가 난다. 이제 보니 작은 금색 테이블에 장미꽃이 꺾여 놓여 있는 화병이 있었다. 아가씨를 닮은 장미였다. 흐드러지게 핀 분홍색의 장미가 화병에 그대로 담겨 있다.
하녀가 소년의 옆을 지나쳐 방문을 닫고 나가자 아가씨와 소년만이 방에 단둘이 남았다. 뒤돌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망설인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보다 살짝 큰 키에, 프릴이 달린 분홍색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눈에 들어온다. 꽃병에 꽂힌 장미꽃과 똑 닮았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게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라, 소년은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해명했다.
“그, 그게 아니라예⋯⋯.”
얼굴 끝까지 달아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가 말을 뱉었다.
“태어나서 아가씨만큼 예쁜 사람은 처음 봅니더. 그게, 이상하게 신기해가⋯⋯.”
소년은 아가씨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웅얼거리듯 답하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팔짱을 끼고 무척 당연하다는 표정과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하단 것이야. 네가 살던 세계에 후작가 영애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아가씨는 가벼운 콧방귀를 흥 하고 내뱉었다. 그마저도 소년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긴 뒤 그를 또다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자수정 같은 눈동자로— 안 돼, 또다시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누더기 같은 것을 걸쳤구나.”
그녀의 짧은 감상이었다. 소년은 급하게 제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동시에 우물거리듯 답을 내놓았다.
“베넷 아저씨가 주셔가, 쪼까 낡았지마는 그럭저럭 입을 만허구⋯⋯.”
다른 옷을 축내기 힘든 처지라는 말은 꾹 삼켰다. 연신 얼굴을 붉히고 있던 그가 괜히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곤 말했다.
“난생 첨으루 받은 선물 같은 것이라, 지한테는 둘도 없는 소중한 보물입니데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다른 옷은 필요 없었다. 화려한 곳과 화려한 꽃 같은 아가씨 앞에 이런 차림새로 있는 것도 괜찮았다. 아무 득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그를 거두어 준 베넷 아저씨가 준 옷이었으니까. 다만 그녀가 던지는 눈길에 담긴 감정이 껄끄러웠을 뿐. 말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림처럼 앉아 있던 아가씨가 이내 대답 없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년은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삼켰다.
“팔을 들어 보거라.”
“예?”
“팔을 위로 올려 보라는 말이다, 카게히라.”
그녀의 말에 두 팔이 자동으로 허공에 걸쳐졌다. 심장이— 심장이 정말,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었다. 보육원 원장이 어쩌다 한 번씩 부르던 것과는 달리 저 나직하고 고상한 음조를 담아 불린 이름은 무척 간지러웠고⋯⋯ 낯설었다.
“꼬질꼬질하고 별 볼 일 없는 누더기이지만, 그런 옷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 하나는 좋군.”
그녀는 그를 지나쳐 화장대 아래의 카펫을 들추었다. 두꺼운 카펫이 들추어지자 아래쪽 마루의 목재가 살짝 들린 게 보였고, 아가씨는 그 안에서 작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아가씨는 가까이 다가와 상자를 열고, 작고 흰 손으로 상자 안을 뒤적거리다 무언갈 꺼냈다. 소년은 그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저건⋯⋯ 삯바느질을 할 때 쓰는 실과 바늘이잖아.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느질은 보육원에서 도맡아 하던 일이었다. 아직 꼬마였지만 보육원에서 가장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던 소년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받았고, 대표적인 것들 중 하나가 삯바느질이었기에 실과 바늘은 무척 익숙해 바로 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손이 작고 야무지지 못해 매번 혼이 났다. 바느질 하나도 제대로 못 한다며.
그런데 그런 하류층이나 손에 쥐는 일이— 기껏해야 평민층에서 그칠 소일거리 따위가 저 귀한 아가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고운 손에.
“급한 대로 그 눈에 담기 너저분한 소매랑 진동 둘레 부분만 손봐 주겠다는 게야.”
제 신체 사이즈를 꼼꼼하게 눈여겨본 뒤 아가씨는 상의를 벗긴 뒤 그에게 담요 하나를 내어주었다. 상류층 아가씨치고는 무척 세심한 편에 속하는 듯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아가씨는 차분하게 바늘에 실을 꿰더니 (어린 시절 소년이 몇십 분을 고군분투하던 걸, 아가씨는 한 번에 해냈다) 바느질을 시작했다. 곧은 자세로 앉아 집중한 아가씨에게 소년은 눈길을 빼앗겼다. 다른 부분은 돌로 변하기라도 한 듯 굳었는데, 작고 흰 손만 일정하고 착실하게 움직인다. 옷을 몇 번 들어 보고 털어 본 아가씨는 곧 테이블에 놓인 바구니에서 작은 금색 가위를 들어 톡 하고 실을 잘라냈다.
이런 거, 수도 사는 귀족들은 손에 쥐지도 않을 텐데.
언젠가 보육원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며 던진 말이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짧게 기간제로 일했던 어느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간 말은 의문이 되어 남았다. 소년이 신기해하는 걸 눈치챈 건지 아가씨가 말했다.
“바느질은 조부께서 가르쳐 주셨지.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수를 놓을 때 말고는 바늘과 실을 들 수가 없었던 것이야.”
아가씨는 셔츠를 들어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입어 보라는 말에 우물쭈물하던 소년은 걸치고 있던 담요를 벗어 건넸다.
“볼품없이 말랐군.”
엣 하고 소년이 소리를 내자 아가씨는 말없이 수선한 셔츠를 들어 올려 그에게 입힌 뒤 단추까지 하나하나 잠그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묘한 기분을 느낀 소년은 숨도 쉬지 않았다. 아가씨의 가지런한 손톱과 새하얀 손은 보기만 해도 심장께 어딘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거기에 서.”
떨어진 명령에 소년은 주춤하며 테라스로 나가는 창가 앞에 섰다.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렸고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그러자 아가씨는 완성작을 감상하듯, 그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해가 지는 주홍빛 풍경 가운데에서 소년의 두 눈이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났다.
“이제부터 매일 정오가 되면 그 정원으로 찾아오거라.”
아가씨가 바늘함을 정리했다.
“날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닐 테니 시간을 정확히 맞추도록.”
네가 지내는 곳에 시계가 있다면 말이지. 그녀가 덧붙인 말에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정오? 정오가 언제지, 시계도 없는데. 그런 소년을 본 아가씨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 쉬었다. 고민하던 듯한 그녀가 말했다.
“저기 마을의 종이 한 번을 치면 정오 십 분 전이라는 소리고, 두 번을 치면 정오라는 소리이니 그걸 보고 찾아오면 되겠군.”
그곳에서 종소리는 들리나? 소년은 아까 들었던 종소리를 기억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벙어리가 아니면 대답을 하도록 해라⋯⋯ 아니,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어.”
아가씨는 혼잣말이 많은 편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제 매일 그녀를 만나게 되는 건가 해서 소년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아가씨가 나를 왜? 이 집에 사용인이라면 차고 넘치고, 후작가 영애 정도면 주위에 말동무를 해 줄 만한 사람 또한 차고 넘칠 텐데. 그리고 자신은 이곳 문지기의 집에 얹혀사는 거지 소년일 뿐인데.
“그럼⋯⋯ 지는 인자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되는 깁니꺼?”
“내가 무어가 아쉬워 겨우 너를 하인으로 쓰겠냐는 것이야. 뭣보다 여자인 나를 남자인 네가 시중들게 할 리 없고.”
아가씨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는 듯 답했다. 그녀는 무언가 바쁘게 적고 있었다. 금빛 만년필이 사각사각 움직일 때마다 가끔 빛이 비쳤다. 우아한 글씨체로 적혀진 내용이 궁금해 소년은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렸지만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질문을 주고받는 것도 꿈만 같았다. 웬만한 귀족들도 말을 섞어 보기 어려울 것 같은 후작가의 영애와 이렇게 같은 방에 단둘이 서서 이런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다니. 한낱 천애 고아 거지 소년 따위에게는 일어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네가 할 일은 그저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게 다이니 괜히 부담 갖지 말도록.”
인형.
소년은 기쁜 마음에 웃었다. 어려운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숨죽이고 있는 것만큼 소년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 무엇보다, 아가씨의 인형이 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귀족 아가씨이니 인형 하나에 크게 정을 붙여 주진 않을 듯 보였지만 그녀의 방 안에 수두룩하게 놓인 여러 인형들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세심히 신경을 써 주고 있는지가 보였다. 그리고 오늘부로 소년도 그 일부가 되는 거였다. 정원으로 우연히 기어들어 가 그녀의 눈에 띌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디선가 아가씨의 눈동자 속 보랏빛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
처음 베넷 아저씨에게 아가씨를 만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드렸을 때, 그는 믿지 않았다. 소년이 몹쓸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척 구체적인 이야기와 정확하게 묘사한 아가씨의 겉모습 때문에 베넷 아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이츠키 아가씨를 만났다고?”
“아저씨가 저택에 가까이 가지 말라구 했지마는 실수로 어떻게 들어가 버려가⋯⋯.”
예상외로, 그는 못 말리겠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소년은 그와 지낸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 보였다. 베넷 아저씨는 아가씨가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조금이라도 거슬려 보이면 바로 눈앞에서 치우라 하기 때문에 혹시나 사용인들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길까 가까이 가지 말라 했던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앞으로 매일 정오에 정원으루 나오라고 하셨습니데이.”
소년은 스튜를 뜨며 말했다. 이유가 짐작이 안 되는지 아저씨는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 아가씨가? 라고 하는 걸 보니 그녀는 평소에 정말 무척 까칠했던 모양이다.
“아마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얘야.”
눈 안에 든 이상 예쁨받으려 노력해 보거라. 그러자 소년이 답했다. 아무래도 인형으로 쓰실 모양인가 봅니더. 인형이라는 말에 아저씨가 움찔했다. 아주 약간의 동요였지만 언제나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유심히 뜯어보는 소년이었기에 바로 알아채고는 물었다.
“인형이⋯⋯ 뭐, 그, 아가씨랑은 안 좋은 깁니꺼⋯?”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아가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평소와 다르게 그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가 동요한 이유가 궁금했고, 아가씨에게 인형이 뭔지- 자신에게 인형으로 적합하겠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실은 그, 이츠키 아가씨가 무척 특이하셔서 말이다.“
네가 어디 가서 나쁘게 말할 거라고 생각은 안 되니까 말하는 거다. 베넷 아저씨가 컵에 담긴 물을 삼키며 말했다. 소년은 귀를 쫑긋한 채 그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듣기 위해 눈을 빛냈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하고는 많이 다른 모양이야. 성격도 무척 특이하시고, 좋아하는 것도 남다르시지. 인형 수집을 좋아하시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소년은 작게 침을 삼켰다.
“그 인형한테 직접 옷을 만들어 주신댄다. 이거야 건너 들은 얘기이니⋯⋯ 저택 주방에서 일하는 여편네가 말해 준 거라 잘은 모르겠구나.”
옷? 바느질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 아가씨는 옷도 만들 줄 아나 보다. 진짜 별나긴 별나다는 생각을 하며 소년은 나머지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귀족 아가씨가 바느질을 하거나 옷을 만드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까. 아직이야 어리시니 그렇다고 쳐도 커서도 계속 그런 일을 하실까 후작 부부가 골머리를 앓으신다 들었다.”
그렇게 안 생기셔서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원,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저씨가 다 비운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내가 어느 나라 왕이었으면, 평생 바느질이고 뭐고 손에 잡지도 않았을 거다. 장담하마.”
그는 또 사람 좋게 껄껄 웃었다. 황금빛의 기름불과 어우러지는 베넷 아저씨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 소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나저나, 언제쯤 편하게 말을 놓을 테냐? 그렇게 경어를 쓰고. 소년은 그와의 거리감이 여전히 아득한 느낌이었기에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답하지 않자 그가 말했다.
“천천히 하면 된다, 천천히.”
베넷 아저씨는 식기구를 치우러 부엌 쪽으로 등을 돌렸다. 시야에 꽉 들어차는 커다란 등판이 뭔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 어쩌면, 아가씨의 인형이 되어 이곳에 더 오래 남을 수 있게 된 걸 기뻐하는 것이 자신뿐만은 아닌 모양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는 정말 이상한가 보다. 남들의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던 베넷 아저씨조차 그 아가씨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소년이 처음 보는 귀족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마음속에 아가씨가 너무 크게 각인되어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아가씨는 까탈스럽고,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이 높았으며 추구하는 것이 뚜렷했다.
고작 여덟 살이 된 여자아이인데도 또래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성격이면 분명 천것들이나 하는 삯바느질, 의류 만들기보다는 산책이라던가⋯⋯ 보석이라던가, 그런 걸 좋아할 텐데.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는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랐을 게 분명했다. 부유한 귀족가의 막내딸이라는 위치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그런데도.
카게히라.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떠올라 갑자기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chapter ii. Petite marionnette
인형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소년이 해야 할 일은 없었고— 그저 아가씨의 곁에 앉아 그녀가 머리를 빗겨 주거나 제 몸을 인형 돌보듯 보살피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되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에 만족했다. 아가씨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자신은 보살핌을 받았다. 인형이 되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소년은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소년이 신경 쓰이는 것은, 정말 자신이 아가씨나 베넷 아저씨와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들 만큼 아가씨가 자신을 인형 그 이상 혹은 이하로도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저 다소곳한 표정과 깔끔한 옷매무새를 한 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고급 인형들 옆에 저도 끼어 앉아서 가만히 있을 때면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소년의 곁에 앉은— 금발 머리의 온화한 아몬드형 얼굴을 한 저 수제 인형은 멀리에 위치한 따뜻한 남부의 어느 섬에 사는 장인이 직접 만든 것으로, 무척 값비싸고 귀한 것이라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저 윤기 나는 검은 단발머리에 백옥처럼 흰 피부를 가진 도자기 인형은 황실 직속 인형술사가 직접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그리고 저 짙은 적갈색의 인형은— 전부 다 말하자면 끝이 없었다.
각각의 인형은 전부 이름이 있었다. 아마 그녀의 품에 들어온 순서대로 놓인 듯한 인형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아가씨는 걸음을 옮겼다. 마드네, 플뢰르, 레일라⋯⋯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뚝, 하고 소년에게서 끊겼다. 소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아가씨는 한참 동안 미묘한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읊조렸다.
"카게히라."
소년의 뺨이 저도 모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아가씨가 이름을 불러 줬다. 저만큼 예쁘고 귀한 사람이 나를 인형으로 아껴 주고, 이름을 불러 주고⋯⋯ 매만져 주기도 하고, 감상하기도 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한동안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가씨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 귀퉁이에 있는 옷장으로 다가가 옷장 문을 열었다.
열린 옷장 문에 가려져서 그녀의 상체가 보이질 않았다. 보이는 건 드레스 자락과 제 손바닥보다 작아 보이는 발이 전부라 소년은 긴장을 풀고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시 고요함 속에 가만히 있던 발뒤꿈치가 천천히 올라가며 그녀가 까치발을 하고 섰다. 얼굴이라던가, 뭘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한참이나, 그녀의 발이 전부 땅을 밟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소년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어린 여자아이임에도 그녀는 소년과 키가 비슷하여 (혹은 좀 더 커서)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녀도 아직 옷장 끝에 손이 닿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게 와닿을 때면 소년은 이유 모를 어색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쓰곤 했다.
“받거라, 카게히라.”
저도 모르게 에? 하고 맥 빠지는 소리를 낸 소년은 제 앞에 내밀어진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스 장갑을 낀 작은 손에 들린 꽤 커 보이는 흰색 선물 상자는 금색의 커다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얼떨결에 상자를 건네받으며 아가씨의 손과 살짝 닿았다. 소년은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었지만, 내용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선한 기쁨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건⋯⋯.”
“선물이다. 제법 마음에 들게 만들어졌다는 것이야.”
직접 만든 건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리본 끝을 당기자 매듭이 스르륵 풀리며 손에 감겨 왔다. 조심스레 상자의 뚜껑을 열자 보이는 건 양 팔과 가슴 부분에 시폰 레이스가 장식된,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 셔츠와 그 위에 놓인 보석 브로치였다. 금색 테가 둘러진 브로치는 선명한 청록색으로, 소년의 왼쪽 눈동자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소년은 손을 떨며 셔츠는 만지지도 못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워 보였다. 그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지, 지한테 이런 거 주셔도 괘안습니꺼⋯⋯?”
“이 정도는 성의니 부담 없이 받도록. 내 인형이면 인형답게 좋은 옷을 입어야 하니까.”
그에게 직접 다가와 상의를 벗겨 준 아가씨는 이내 셔츠를 들어 올렸다. 팔을 들으라는 말에 전처럼 어색하게 팔을 들자 그녀는 양쪽 팔을 셔츠 안에 집어넣은 뒤 앞으로 와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 주었다. 소년의 몸이 딱 맞는 셔츠는 평소 헐렁하게만 입어 무척 어색하고 살짝은 불편했지만 마치 날개를 단 듯한 기분을 주었다. 소매에서 손까지 내려와 바스락거리는 레이스를 살짝 쥐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브로치를 들어 그의 목에 달아 준 아가씨가 말했다.
“앞으로 옷을 조심스럽게 입고 자신을 단장하는 법을 배우거라, 매번 내가 입혀 주기만 할 수는 없단 것이야.”
알겠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인 소년에게서 떨어진 아가씨는 그를 잠시 감상하듯 뜯어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빛나는 눈이 인형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기가 넘쳤지만, 그에 비해 깡마른 체형과 창백한 피부가 더해져 아가씨의 눈에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특히, 보석과 어우러진 두 색의 눈동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쿠아 다이아몬드로 고르기를 잘했어.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옷과 브로치는 제 주인을 찾은 듯 무척 잘 어울렸다. 옅은 미소를 지은 아가씨는 제 분홍빛 머리카락을 뒤로 단정히 넘긴 뒤 인형들을 저기 있는 안락의자 주위에 앉히라 명령했다. 귀한 것들이니 조심히 다루라는 말에 괜히 긴장한 소년은 뻣뻣한 동작으로 인형들을 들어 올려 아가씨가 앉은 커다란 안락의자 주위에 앉혔다.
안락의자에 앉은 아가씨는 골똘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은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가 바삐 인형들을 옮기는 동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소년은 그녀를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그저 앉아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아가씨였다. 입고 있는 셔츠가 이유 없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소년은 빠른 동작으로 고개를 떨군 레일라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마리오네트 출신의 인형이었다.)의 머리를 받쳐 준 뒤 자신도 인형들의 주위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아가씨를 인형들이 둘러싸자 마치 모두가 그녀의 주위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소년은 이런 인형 놀이에 자신도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는 이제 여러 누이동생들을 둔 맏언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저기 앉은 인형이 무언가 말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빨리 책을 읽어 줘, 이츠키! ⋯⋯ 하고 인형 중 누군가 말하자 아가씨는 그제야 보채지 말라는 듯 고개를 들고 주위에 앉은 인형들을 둘러보았다. 그건 소년이 들은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마드네가 정말 입을 열고 말한 걸까? 아가씨는 이내 나직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소년은 그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대답하였다. 내가 벌을 받았기 때문에 빛은 내게서 빛난다.”
그건 어느 버림받은 천사에 대한 이야기, 영혼을 거두어 와야 하는 인간에게 동정을 느끼고 신에게 버림받아 인간들의 세계로 버려지고야 만 어느 대천사의 이야기였다.
천사가 말했다. 나는 들판에 혼자 있었고, 나는 인간이 되기 전까지 추위와 배고픔, 인간의 필요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배가 고팠고, 얼어 죽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리깔린 아가씨의 보라색 눈이 문장의 끝을 좇으며 다음 내용을 종용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방 안의 분위기는 부드러웠고 모든 인형들은 아가씨의 목소리 하나에만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으며 아가씨는 변함없이 그림 같은 모습으로 인형들에게 이야기를 베풀었다. 소년은 레일라의 머리를 받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대천사는 상냥했고 인간을 사랑했으며, 고통을 알았다. 그 이야기 또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이 사랑한 그 작은 평화를 깬 건 다름 아닌 피아노 소리였다. 오라버니가 돌아오신 모양이군 하고 작게 읊조린 아가씨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제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인형들과 앉아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책에 눈길을 빼앗겨 그녀의 시선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도대체 그 긴 이야기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소년은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복잡하고 빽빽하게 나열된 책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아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어일 것 같아 소년은 잔뜩 인상을 쓴 채 그 단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ℳ𝒾𝒸𝓀𝒶ℯ𝓁.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이지. 소년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꿰뚫기라도 하듯 아가씨가 말하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 귀까지 붉히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가는 눈매는 아래에서 보니 훨씬 더 거만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지만, 동그란 얼굴과 발그레한 뺨 덕분에 그저 사랑스러운 소녀 같기만 했다.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위치한 페이지의 옆장에, 무척 온화한 얼굴을 한 남성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차갑고 까만 도시의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이 사람이 미카엘. ⋯⋯ 버림받은 천사.
“이걸 말하는 게 아니었나?”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지만 그걸 보지 않은 채 묘한 표정을 한 아가씨는 검지손가락으로 미카엘이라는 단어를 쓸었다. 왜지? 뭐가 신경 쓰이나? 소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꾹 누른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쳐다보는데도 아가씨는 신기할 만큼 제 마음이 동할 때 빼고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차라리 그 편이 나은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가 이내 입을 뗐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미카로 하도록.”
이름? 소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말했다. 이 모든 인형들의 이름은 내가 지어 주었다는 것이야. 그리고 너도 때마침 이름이 필요했으니. 아가씨는 책을 탁 하고 덮었다. 순식간에 부여된 이름에 소년이 멍하게 있는 사이 그녀가 몇 마디 덧붙이며 타박했다. 그리고 인상을 쓰지 마라. 좋지 않은 습관은 고쳐. 어떻게 저만큼 제멋대로일 수 있는 걸까? 소년은 입이 벌어지려는 걸 꾹 닫았다. 얼떨떨한 감이 있긴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미카, 미카, 미카, 미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 손을 스치는 시폰 레이스를 느끼며 소년은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미카는 계집아이들이 쓰는 이름이라며 아가씨가 조금 신경이 쓰여 하길래 자신은 전혀 상관없으며 미카라는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연신 강조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붙여 주었으면서, 아가씨는 자신을 여전히 미카라고 부르지 않고 카게히라라고 불렀다. 이제 와서 호칭을 바꾸기도 애매하니까, 라는 이유로 그저 제게 이름만 던져 준 그 아가씨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다. 그 이름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마음에 드는 이름도 아니었다. 이름 자체만 본다면 말이다. 아가씨가 자신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꿈만 같아, 미카는 자신이 하늘로 붕붕 떠오르고 있는 건 아닌지 연이어 확인했다. 아저씨는 미카라는 이름을 듣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미카! 그래, 잘 어울리는구나.”
그의 말에 미카가 조금은 수줍게 웃었다. 아저씨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었다. 사실 아저씨 말고는 알려 줄 사람도 없지만, 이제 아저씨가 불러 줄 이름이 생겼다. 근데 여자아이들이나 쓰는 이름인데, 괜찮겠니? 그의 물음에 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 이름인지, 남자아이 이름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아까 고민하던 아가씨의 모습이 마치 이름을 준 것을 무르기라도 할 것처럼 보여 미카는 빠르게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손사래를 치며 미카라는 이름이 좋다고 연신 덧붙였다. 차라리 내가 계집아이였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아가씨도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아가씨는 다른 인형들과 그를 대하는 것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결국 그녀에게 미카 자신은 그저 정원에서 출퇴근하는 인형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인형에게 이름 하나 붙여 준 것 따위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괘씸하게도 조금은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는 늦은 밤까지, 익숙해진 오두막에서 열심히 아저씨의 일을 거들며 그녀가 자신을 미카라고는 불러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해가 흐르고 흘러 아가씨는 열한 살이 되었다.
유리로 된 커다란 온실을 개조해 열은 그녀의 생일 연회는 마치 공주님의 생일 축하 무도회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고 들었다. 오직 이츠키 가의 친척들과 가족들, 그리고 어른들의 가까운 귀빈들만 초대한 연회. 아가씨의 또래라던가, 그런 사람은 없었다. 오직 아가씨만이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어린 또래가 자신밖에 없는 생일이라니, 얼마나 지루할까? 하지만 화려했고, 아가씨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예술품들도 선물로 많이 들어왔다고 하니 분명 행복한 생일을 보냈겠지. 보육원에서 미카의 생일은 항상 다른 아이들과 함께였다. 연상, 동갑, 연하. 같은 달에 생일이 있는 고아들을 모아 한꺼번에 간단히 생일을 축하했다. 그리고 그날은 빨래라던가, 바느질이라던가 하는 잡일들을 면제받았다. 미카의 기억 속 생일은 그런 거였다.
처음 귀빈들이 하나둘 마차를 타고 찾아와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올 때 미카는 사용인들 중 한 명으로서 모든 집사, 유모, 하녀, 하인, 부엌데기들과 함께 모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들은 그저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는 사용인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물 흐르듯 연회장 쪽으로 가 버렸다.
아가씨는 저만큼 떨어져서, 연회장으로 통하는 실외복도 앞에 후작부인과 함께 서 귀빈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생일이라고 해서 하녀들이 유독 신경을 쓴 것인지 아가씨의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칼과 꽃 같은 얼굴은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정말로 유독 아름다운 꽃 같았다.
하지만 아가씨는 요즘 외모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미카와 인형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의 성장은 열한 살치고 무척 빨랐다. 미카는 그렇게 새 모이만큼 먹으면서 아가씨는 어떻게 그만큼 키가 잘 클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하녀들의 말을 주워듣기로는, 그 아이는 못해도 열네 살로 보인다— 라고 후작 부인이 말했다고 한다. 한때 동그랗던 얼굴은 이제 꽤 갸름해져 제법 소녀의 모습을 띠었다.
그렇게 자라며 한때 정말 여자아이 인형 같은 인상을 주었던 얼굴은 조금씩 사라져갔고, 아가씨는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싫은 것 같았다. 거울을 보는 시간이 늘었고 하녀가 들어와 치장해 줄 때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거울을 바라보았다. 푸념하기도 했다. 내게 성장하는 것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같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진심으로 괴로워 보였다.
아가씨는 그렇게 유난을 떨지만,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미카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카의 눈에 아가씨는 그저 이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유일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외모는 때 하나 묻지 않은 꽃 같기만 했다. 그녀는 오늘 밝고 차분한 색의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크림색의 커다란 레이스가 무척 화려한데도 다른 장식들과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웠다. 머리에 올린 레이스와 꽃장식도 무척 예뻤다.
준비를 하며 치장하는 동안 미카는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너를 데려갈 순 없으니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하고 그에게 당부해 놓았기 때문에, 미카는 해가 다 지고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방에 혼자 남아 기다렸다. 아가씨의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혹여 그녀가 들어올까 마음을 졸이면서도, 슬쩍슬쩍 곁눈질로 그녀의 생활 흔적들을 좇았다. 아까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하던 아가씨를 생각하자 또 가슴이 콩닥거렸다.
미카는 간지러운 기분에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른 인형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선반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그녀의 인형들. 자신에게는 선배나 다름없는— 그런 생각을 하자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가씨의 세계에 전염된 느낌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세계를 전부 이해하고 함께 느끼고 싶었다. 내도 인형들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미카는 짙은 금발의 인형을 향해 까치발을 살짝 들었다.
“마드네⋯⋯ 내 마드 누나라 불러두 되긌나?”
조금 망설인 뒤— 마드 누나는 아가씨하구 얼마나 많이 대화하나?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온화한 눈매 아래 텅 빈 청록색 눈으로 미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대화하는 건 안 되는 긴가⋯⋯ 하고 중얼거린 미카는 살짝 실망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는 그래두 아가씨의 인형들 중 진짜로 말할 수 있는 게 내뿐이라서 좋다 생각한데이.”
-이기적이야.
미카는 흠칫 놀랐다. 방금은 정말 마드네가 속삭이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몇 번이고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카는 마드네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다. 들어 주고 있다면 기쁠 것 같았다.
“아가씨가 내 혼자 서 있을 땐 내만 보면서 얘기해 주셔가⋯⋯ 그게 기뻐서.”
괜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드네의 깊은 숲 같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미카는 덩달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엇, 그러고 보니 내 눈이랑 닮았구마. 청록색이 하나 더 늘었다. 미카의 눈, 아가씨가 준 브로치, 그리고 마드네의 눈까지. 아가씨가 이 색을 좋아하나 보다 하며 사람 좋게 웃은 미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까치발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 아가씨의 방문이 열렸다.
나쁜 짓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화들짝 놀란 미카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꾹 누른 채 침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문 쪽을 보기 위해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곳에는 아가씨가 있었다. 미카는 그녀에게 가까이 가야 될지, 아니면 인형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아가씨는 화장대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더니 머리에 쓰고 있던 레이스 장식을 확 벗어 내려놓았다. 평소 항상 조용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던 아가씨치고는 제법 격한 움직임에, 미카는 섬칫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일인데, 기분이 좋지 않은 건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축하를 받지 않았던가.
그녀는 이마를 짚고는 그대로 화장대 옆에 있는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풍성한 드레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녀가 앉자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펌프스는 진주처럼 하얀색이었다. 미카는 아가씨의 구두에 잠시 정신이 팔렸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다가가 평소 그녀가 책을 읽어 줄 때처럼 그녀의 의자 옆에 앉았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러웠고, 더 조용히 앉았다. 주위에 미카를 제외한 다른 인형들이 없다는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아가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밖에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의 분홍색 머리칼 몇 가닥이 흐트러진 채 빠져나와 있었다. 아까 장식을 멋대로 벗은 탓이다. 아가씨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얼마가 지나, 미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걸 그제야 깨달았는지 아가씨는 고개를 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천애 고아라고 했었나.”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질문인지,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혼잣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왜? 어쩔 땐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미카는 조용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족이란 건 어쩔 땐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가끔은 핏줄로 얽힌 악몽이 돼. 그녀가 말했다. 보라색 눈동자는 울먹이는 것도 같았지만 그녀는 눈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아가씨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리고 너무 외로워 보여서— 미카는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짓을 했다. 미카의 세상에는 아가씨를 제외하면 베넷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미카는 외롭지 않다. 아저씨는 미카의 세상을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수십 명의 하녀를 거느리고, 부모님과 오빠가 있고, 아까 봤던 것만큼 수많은 친척들과 부모님의 지인을 둔 아가씨가 베넷 아저씨 한 명을 둔 자신보다 훨씬, 훨씬 더 외로워 보여서 미카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망설이다 팔걸이에 얹혀 있는 그녀의 흰 손에 살포시 얹었다. 다른 쪽 팔걸이에 괸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던 아가씨는 살짝 놀란 듯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근, 두근,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녀의 눈을 보자 그제야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가씨의 손에 손을 얹어 버렸다. 저 고귀한 이츠키 가 막내딸의 손에. 겨우 내 손을⋯⋯. 미카는 아찔한 마음에 돌처럼 굳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미묘한 표정은 읽을 길이 없었다.
위로해 주는 건가? 하고 아가씨가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괘씸해 보이고, 아니라고 할 용기는 없었다. 미카는 그 간단한 두 대답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미카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하고 답이 없자 아가씨는 이내 손을 빼내고는 그 손으로 미카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만지는 거라고 하기도 애매할 만큼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이 멎을 것만 같은데, 아가씨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티 낼 수조차 없었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하늘로 나오며 어둠 속 조금은 희미하던 아가씨의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미카는 그녀의 세계를 잠시나마 보았다.
아가씨의 세계에 그녀 자신은 고아처럼 남겨져 있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