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an Song 中

미카슈 뇨테로 아가씨 AU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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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iii. Croissance et soupir 


 이츠키, 이제 인형 놀이는 그만 졸업해야지. 


 시끄러워.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돈과 허세 말고는 내세울 것도 없는 친척이라는 것들이 지껄이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생일 연회라면서 부모님은 아는 사람들 말고는 초대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생일을 빌미로 삼아 그저 체면이나 한 번 더 세우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사생활은 못마땅해했지만, 외모 하나만큼은 자랑이라 여겼으니까. 그런 속물들의 계략에 놀아나는 기분이 무척 불쾌해 먹던 케이크가 입 안에서 텁텁하게 느껴졌다. 


 결국 케이크를 더 먹는 것은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부모님과 친척들은 후작 저택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얘기를 하는 중이었고, 그나마 있는 사촌들은 당구를 치고 있었다. 슬쩍 빠져나가도 모를 것 같은데. 무엇보다, 카게히라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았다. 슈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 온실의 벽 쪽으로 살살 다가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스와 남색 리본, 조금의 흰 꽃들로 꾸며진 머리 장식은 후작 부부도 극찬할 만큼 아름다웠으며 슈 본인에게도 꼭 어울렸다. 이 남색 드레스는 조부가 몇 달 전공수해 온 귀한 것이었다. 역시 그는 슈에게 무엇이 가장 잘 어울리고, 잘 맞는지 알고 있었다. 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왜 변해가고 있니, 슈?


 별안간 유리창에 비쳐 있던 어린 그녀가 물었다. 누구나 감탄하고야 말던 동그란 얼굴과 사랑스러운 붉은 뺨을 가진, 인형들 사이에 섞여 있을 수 있던 시절의 그녀. 겨우 4 년 남짓한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이 성장해 버렸다. 유리창 속 그녀에게서 멀어지고야 말았다. 그 사실을 슈는 얼마 전 후작 부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알았다. 


 “이제 제법 아가씨의 모습을 갖추었구나, 슈.”

 “몰라보게 성장했죠, 그렇지 않나요? 아버님.”


 쨍 하고 슈의 접시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 소리까지, 슈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속을 긁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요새 우울했고, 카게히라에게도 이유 없는 짜증을 냈다. 그 착하고 바보 같은 아이는 슈가 아무리 부당하게 짜증을 부려도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래, 돌아가야지. 슈는 결심하고는 유리창에 비쳐 있던 그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모습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을 가로막은 여러 사람들의 실루엣에 흠칫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 고모님.”


 하는 수 없이 예법을 맞추어 인사한 그녀를 고모라는 사람은 한참 바라보았다. 고모 외에도 여러 친척들이 자신을 구경거리라도 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불쾌했다. 


 “과연 외양은 —를 할 만하구나.”


 그렇지 않니?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살짝 웃거나 슈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부채에 가려진 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뭉쳐 들렸다. 뭘 해? 외양? 슈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올려다보자 고모가 허리를 살짝 숙여 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얘, 넌 아직은 고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 그녀와 슈만 들을 수 있는 나직한 목소리였다. 파티의 어수선한 분위기도, 음악도, 말소리들도 전부 묻혔다. 슈는 불쾌해하면서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넌 출신이 귀한 사람이니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렴. 그게 좋을 거야.”


 천것들이나 하는 바느질 따위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 말을 끝으로 고모라는 사람은 허리를 펴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 장식을 살짝 바로잡아 준 뒤 그대로 사라졌다. 슈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약간의 조롱과 여러 감정들을 보았다. 모욕당한 느낌에 그녀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못 견디게 화가 났고, 짜증이 났다. 귀족의 삶을 사랑하는 슈였지만 이런 순간에는 정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해 슈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주인공이 없어도 저 연회는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더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 뻔했다. 연회의 음악 소리와 말소리들이 복도 저만치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에게 온 선물들은 수북이 쌓여 현관 로비 즈음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 전부 다 속물 같다. 역겨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머리에 올려져 있던 머리 장식을 쥐어뜯듯 벗어내 화장대 위로 던졌다. 가엾은 흰 꽃들이 대리석 화장대 위에서 무력하게 나뒹굴었다. 구겨진 남색 리본을 한참 노려보다 이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슈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겨우 저런 소리에 기죽어 울면 안 돼. 겨우 이 정도 일로 울어버리면 얕보일 게 뻔했다. 어릴 때는 훨씬 별것 아닌 일로 자주 울곤 했지만⋯⋯.


 그때 옆에서 누군가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두 색을 띈 커다란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의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길에 그가 카게히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애 고아라고 했었나.”


 지금의 나는 네가 부러울 지경인데. 그 말은 꾹 삼켰다. 그 말만은 해서는 안 되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슈는 귀족의 삶을 너무 사랑했기에. 착한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슈는 팔걸이에 지친 팔을 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옥 같은 성장통. 거울을 볼 때마다 괴로웠다. 슈, 어디 갔어? 기억 속 누군가가 연이어 물었다. 


 “가족이란 건 어쩔 땐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슈는 기억 속 아이의 물음을 외면했다. 


 “가끔은 핏줄로 얽힌 악몽이 돼.”


 말을 끝맺은 그 순간, 웬 낯선 손 하나가 슈의 손 위에 얹혔다. 작고 따뜻한 체온에 슈가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정말 인형처럼 말없이 제 눈치를 살짝씩 보던 카게히라치고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슈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다. 


 “위로해 주는 건가?”


 물었다. 카게히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땐 차라리 카게히라가 말을 하지 않아 주는 게 좋을 때도 있었다. 그는 그저 손에서 손으로 그녀에게 체온을 나누어 줄 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 착한 아이. 슈는 손을 빼내 그의 뺨을 만졌다. 이제 그와 본 지도 꽤 되었는데, 카게히라는 여전히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지 슈와 닿기만 하면 저렇게 착실히 뺨을 붉혔다. 

 보통의 검은 머리들은 빛에 빛나면 흰색을 띠기 마련인데 카게히라의 검은 머리는 청동과 같은 색을 띠며 빛이 났다. 달빛이 갑자기 밝아진 덕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여 순간적으로 알아낸 부분이었다. 고양이 같은 그의 두 눈이 빛에 비추어져 더욱 투명해 보였다. 카게히라의 눈은 두 개의 색이 각각 달라 어디를 보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많곤 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슈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맞추며.


 보여 줘도 돼?


 어디까지?


 너는 어디까지 나와 함께할 수 있지?


 슈는 눈을 감았다. 카게히라는 더 이상 아무것도 종용하지 않았다. 그저 그걸로 되었다는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주었고, 슈도 그런 그를 가만히 잡은 채 제 세계에서 안정을 찾았다. 슈는 여전히 성장통을 앓고, 카게히라는 계속 망설임을 반복한 10월의 어느 밤에 있던 일이었다.



‧✧̣̥̇‧



 5월.


 이 제국의 장미 철이다. 이 후작 가도 정원의 장미가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후작 저가 있는 이 지역도 장미가 특산물이라 5월만 되면 장미 향기가 어지러울 만큼 거리를 나돌았다. 미카는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도 5월을 기다렸다. 5월에는 여기저기 분홍색과 붉은색의 장미들이 만발하기 때문에, 아가씨가 장미 길을 걷기만 해도 그림이 되었다. 아가씨도 그녀의 머리색과 맞춘 분홍과 다홍, 붉은색의 드레스 시즌이 와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5월만 오면 여러 이유로 아가씨는 티타임을 자주 가졌다. 보통의 영애들이라면 친구들이나 새로운 여식들을 초대해 함께 차를 마시겠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일절 없는 아가씨는 그저 인형들을 데리고 화려한 정원 한복판에 앉아 테이블을 차린 뒤 차를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테이블을 조금 더 작은 것으로 가져오라 한 것을 보아 아마 아가씨와 조금 더 가까이 앉을 수 있을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끼는 인형 다섯 개(미카와 마드네도 포함되어 있었다)를 테이블에 빙 둘러앉혀 놓은 뒤에, 티타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아가씨는 이번 봄에 아주 작정을 하고 방에 틀어박혀 바느질을 하고 재봉을 했다. 미카도 그 옆에서 그녀의 수발을 드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다. 방바닥에 널려 있는 천들 중 밟아도 상관없는 것과 실수로 밟기라도 하면 아가씨가 바로 윽박지르는 것들이 섞여 있어 미카는 거의 까치발을 하고 서서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은 그녀의 인형들을 위한 봄 컬렉션의 옷들이었다. 옅은 분홍색, 연한 보라색, 진한 분홍색, 자홍색, 가벼운 빨간색. 갖가지 색들 중 미카에게 온 옷은 크림색의 핀 턱 셔츠와 연한 붉은색의 니트였다. 셔츠는 아가씨의 손길이 닿았고, 니트는 그녀가 직접 뜨개질하고 손을 본 완전 수제의 작품이라고 했다. 아가씨가 줬던 그 브로치를 할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온전히 아가씨가 만든 옷을 입고 있을 수 있다니, 미카는 정말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티타임이 끝난 뒤에 뱃놀이를 가기로 정한 아가씨는 미카에게 얼른 방으로 올라가 옷장 옆 화장대에 걸려 있는 뱃놀이용 챙 넓은 모자를 챙겨 오라고 말했다. 미카는 밝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올라가 모자를 찾았다. 미카의 눈에는 하나같이 비슷비슷해 보였지만 아가씨가 투명한 분홍색 레이스의 긴 끈이 달리고 살짝 반짝거리는 재질이라고 일러 두었기에 찾을 수 있었다. 모자를 들고 내려오며 따스한 봄의 내음에 한참 기분이 좋아진 미카는 마치 산책을 하는 고양이라도 된 듯 흥얼거렸다. 


 “봤니? 옷이 전부 바뀌었어.”

 “아무렴. 저번 주에 마님이 가셨던 살롱에서 본 이번 봄 시즌 디자인이랑 비슷하지?”

 “그래, 분명히 저번에 방에 틀어박히셨을 때 만든 게 분명해.”


 어머 정말, 난 믿을 수가 없다니까⋯⋯ 따위의 이야기가 미카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쟁반을 들고 하녀 둘이 아가씨가 계신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미카는 확 기분이 나빠져서 인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하녀들이 살갑게 인사하자 무심코 인사를 받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저렇게 뒤에서 떠드는 건 야비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그저 우리에게 선물을 만들어 주셨을 뿐인데. 뭐가 나빠? 저만치에서 아가씨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미카는 약간 뚱해진 기분으로 그녀의 모자를 들고 걸어갔다. 


 산들바람이 불자 의자에 앉은 아가씨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살짝 바람에 날렸다. 그걸 손으로 잡고 가지런히 어깨 뒤로 넘긴 뒤 아가씨는 옆에 앉은 아델리아(밝은 금발의 도자기 인형)와 대화를 했다. 미카는 아까 그 하녀들의 기분 나쁜 언행도 잊은 채 아가씨의 모습에 넋을 살짝 놓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모자를 받아 든 뒤 이미 쓰고 있던 것과 바꾸어 썼다.

가지런한 손이 턱 밑으로 투명한 분홍색의 끈을 묶었다. 미카는 아가씨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만 보면 기분이 묘하게 들뜨는 것 같았다. 그가 제 자리에 앉아 다른 인형들을 둘러보자 아가씨는 티타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테이블에 호화로운 디저트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 저거, 먹을 수 있는 건가? 


 먹을 수 없어 보이는 색들이 많았다. 총천연색의 여러 과자들과 빵, 모형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게 생긴 갖가지 디저트들을 보며 미카는 당황한 숨을 삼켰다. 그래서 아가씨를 바라보자, 그녀가 찻잔을 드는 게 보였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흰색 찻잔을 들어 입가 주위로 가져갔다. 먼저 찻잔을 손에서 가볍게 돌려 코 주위에서 차의 향을 음미한 그녀는 한 모금을 마셨다. 저렇게 마시는 거구나⋯ 하고 미카는 자신도 저렇게 우아하게 마실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다.

아니, 내는 절대 못 할 기다. 마른침을 삼켰다.


 “왜 먹지 않고.”


 그녀가 미카에게 말을 붙였다. 미카는 흠칫 놀라 손사래를 쳤다. 방금, 방금 묵으려⋯⋯ 했습니데이.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그림처럼 놓인 디저트에 어떻게 손을 대? 작은 집게를 든 손이 떨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남의 작품을 망가뜨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이런 예쁘고 귀한 걸 먹으면 틀림없이 배탈이 날 것 같아서 미카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가씨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에서 집게를 가져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디저트 하나를 덜어 그의 앞으로 가져왔다.


 뭔가 가벼운 돌덩이처럼 생긴 것도 같은데, 돌덩이치고는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옅은 황토색의 동그란 디저트 위에 흰 크림과 분홍색 설탕 장식이 뿌려져 있어 진심으로 먹기 아까웠다. 미카는 나이프를 들었다. 이리 예쁜 걸 우찌 묵나⋯⋯. 


 “이, 이 빵은 이름이 뭡니꺼?”


 갑작스러운 미카의 질문에 아가씨는 눈을 살짝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다가 묘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슈.”


 미카는 제 앞에 놓인 슈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진짜 못 먹을 것 같다, 너무 예뻐가. 먹으면 천벌 받을 것 같데이. 미카는 시간을 끌어 보려 머리를 쥐어짰다. 절대, 절대 먹기 싫은 건 아니지만⋯⋯ 아가씨는 미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안에는 뭐가 들었나예?”


 포크를 들어 아래를 살짝 들춰 보였다— 짙은 갈색으로 움푹 파여 있다. 그리고 아가씨의 눈치를 보려 그녀를 흘끗 바라보자⋯ 예상외로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물게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 보여 주는 흔치 않은 귀한 미소였다.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한 걸까?

아가씨도 봄을 좋아하나?


 “숭고한 예술혼이 들어 있지.”


 그녀답지 않게 약간의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였다. 예? 하고 미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그녀가 바람 빠지듯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혼잣말이다, 안에는 크림이 들어 있다는 것이야⋯⋯ 정 궁금하면 먹어 보면 돼.”


 얼른.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결국 등살이 떠밀려 미카는 슈를 어색하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겉만 보면 조금 딱딱해 보였는데, 막상 포크로 찍으니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맛은 달콤했고, 입안에서 부드럽게 흩어졌다. 이걸 어떻게 먹나 고민한 게 바로 몇 분 전인데 고민한 게 민망할 만큼 맛있게 먹어 버렸다. 조금 쑥스러운 기분에 미카는 식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가씨를 흘끗 보자 아까의 표정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찻잔을 가져간 입가에 장난을 치던 소녀의 미소가 희미하게나마 걸려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이츠키 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조금이 더 지난— 나중의 이야기이다.


‧✧̣̥̇‧

 귀족들이 타는 배는 물 위를 가른다기보다는, 하늘 위를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승선감이 무척 좋다는 뜻이었지만 미카의 어휘력에는 한계가 있어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가씨는 흰색 양산을 다소곳하게 든 채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미카는 그런 표정도 평소와 다름없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에 파란 물빛이 비치며 오묘하게 색이 섞인 게 신기해 미카는 평소보다 더 노골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 한 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다른 인형들은⋯⋯. 미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아가씨가 답했다. 유모를 시켜 방으로 돌려놓았다, 하고. 미카가 의아해하자 그녀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혹시라도 물에 빠지면 안 되니까. 그 아이들은 물이 천적이거든. 그제야 이해한 미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카는 노를 살살 저었고, 배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호수를 가로질렀다. 이 밑은 많이 깊을까? 여기 떠 있는 식물들은 진짜인가? 이렇게 넓은 곳은 누가 관리하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정신이 팔려 버린 것 같았다. 아가씨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미카는 알지 못했다. 

  “내일은 올 필요 없으니 쉬도록 해라.”

  예상외의 말에 카게히라가 필요 이상으로 놀라 그녀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몸은 미카를 향해 있었지만 시선이 호수 끝으로 가 있었다. 레이스 장갑을 낀 고운 손은 연신 양산을 조금씩 돌리고 있었다. 아가씨가 오늘따라 유독 더 새침해 보이는 느낌이 들어 미카가 우물쭈물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그⋯⋯ 바쁘신 거면, 방해만 안 되게 인형 누나들만 살짝 보고 가두⋯⋯.”

  “평소라면 안 될 것도 없지만, 내일은 내가 아예 저택을 비운다는 게야.”

  아가씨가 밖에? 온갖 물음표들이 미카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웠다. 쇼핑을 가실 리도 없고, 아는 친구가 있을 리도 없는데.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것조차 하지 않아 아가씨는 미카를 만난 이래로도, 그전에도 저택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 후작 부부가 왜 그녀를 그렇게까지 외부와 떨어져 고립시키는 건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하여튼 아가씨가 밖에 나간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 실은.”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약간 망설이다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말을 꺼냈다. 황실과의 혼담 때문에 가는 거다. 아가씨가 묘한 눈빛으로 미카를 바라보았다. 혼담이라면 결혼? 미카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에 노를 젓던 것도 멈추었다. 놀란 표정이구나.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도 웬만하면 나가고 싶지 않았다만, 상대가 황실이라.”

  황실. 혼담. 온갖 이야기들이 미카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들이 있는 곳. 황제와 황후, 황자가 사는 곳. 웬만한 이들은 평생 단 한 번 주어지는 알현을 제외하고는 구경하기도 어렵다는 황궁. 아가씨는 그럼 제국의 황후가 되는 건가? 태후를 제외하면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 아니, 그보다 언제 결혼하시는 거지? 결혼하는 건 확실한가?

  “아직 결혼한다고 결정이 난 것도 아니야. 그저 황실이 이쪽을 지목했기에 만나러 가는 거니까⋯⋯.”

  하지만 당신을 보고 누가 결혼을 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카는 아무 말도 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고, 이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자신이 왜 이런 고뇌를 겪고 있는지 갑작스레 의문이 들었다. 내는 아가씨의 뭣두 아닌데. 그냥 인형. 그게 다인데. 아가씨가 결혼한다면 기뻐하고 축하해 드려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가씨는⋯⋯ 제국에서 가장 예쁜 신부가 될 낍니더.”

  그 말에 아가씨가 고개를 들어 미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가씨 말대루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암것두 없지마는. 아가씨가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미카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 그냥⋯! 아가씨가 결혼헌다구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가⋯⋯. 빈약한 변명을 하며 미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가씨의 분홍색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지금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미카의 눈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한 아가씨는 뱃놀이가 끝날 때까지 미카를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미카도 그저 그녀의 드레스만 뚫어져라 응시한 채, 노를 젓기만 했다. 둘의 세상이 조용해졌다.

  “아저씨, 아저씨⋯⋯.”

  웬일로 숨 가쁘게 뛰어온 미카를 발견한 아저씨가 놀라 물었다. 뭐 때문에 그리 급하게 뛰어오냐? 장작을 패던 아저씨의 손이 멈추었다. 미카는 잠시 헉헉 숨을 내쉬었다. 뱃놀이가 끝나고 아가씨는 먼저 저택에 들어갔으며, 미카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인사를 한 뒤 도망이라도 치듯 아저씨가 있는 오두막으로 뛰어왔다. 숲을 가르고, 나무를 헤치고 냇가를 건너.

  “아가씨가, 결혼헌다구 카데요⋯⋯.”

  아저씨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하게 정해진 게 맞냐는 질문에 미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저 혼담이지만, 상대가 황실이라고 말하자 아저씨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이츠키 후작 부부는 대단하다며, 아가씨를 그렇게 온실 속 화초로 키워 놓고 황실로 시집을 보내는 것도 참 독한 사람들이라고 아저씨는 말했다.

  “할 것 같아예?”

  미카의 물음에 아저씨가 어깨를 살짝 으쓱하더니 말했다. 아마 하겠지, 황실 가문 족보에 이름 올리는 셈인데 후작 부부가 안 주선하고 어떻게 배기겠어? 그는 다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저녁노을과 함께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하게 될까? 낯선 황실 가족이랑 아가씨가. 결혼을.

  그 생각에만 얽매여 있다 결국 소스를 태우고야 말았다. 평소 하지 않던 실수에 어디 몸이 안 좋냐 물은 아저씨가 주방까지 도맡아 식사를 내어 왔다. 미카는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아저씨는 자신도 가끔 졸다가 고기를 자주 태운다며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도무지 아가씨의 혼담 얘기가 신경이 쓰여 이렇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베넷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리 없겠지만- 제 몸속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이 아가씨에게 네가 뭔데? 하고 물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미카는 그 사실을 꾹꾹 숨겼다.

  “그나저나, 황가에 그 아가씨가 들어갈지도 모른다니 걱정이구나.”

  식사를 하던 와중 베넷 아저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카는 생선을 입에 채 가져가지도 못하고 내려놓은 뒤 물었다. 왜냐고 묻는 그에게 아저씨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미카가 요새 아가씨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에, 요즘 그는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신중히 가려서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베넷 아저씨는 고민하다가 이내 끙 소리를 내며 답을 내놓았다.

  “아가씨는 너무 약하시니까.”

  약해? 미카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녀가 약하다니. 집안의 차별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바느질을 하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사람인데. 아저씨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앞머리를 살짝 털더니 생선 뼈를 발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온 집안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후작 저에서만 자라셨잖아. 그러니까 황후가 되면 견뎌야 하는 것들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걸 다 어떻게 버티나 싶어서 그러지.”

  그 아가씨, 어릴 땐 울보였거든. 베넷 아저씨가 기억 속 아가씨는 사촌들의 가벼운 장난에도 쉽게 울음을 터뜨려 한 손에 인형을 들고 온 후작 저를 돌아다니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기이할 정도로 예쁘장한 외모와 유독 까탈스러운 성격에 사촌들이 그녀를 끼워 주지 않아 가족 모임이 있거나 하면 언제나 혼자였다고 하는 아가씨는 생각보다 무척 여린 속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일 연회가 있던 날에도—

  당신의 세계는 대체 얼마나 고독한 걸까.

  미카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쌓여 갔기 때문에. 그렇게 곱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왜 외로워야만 하는지. 그녀의 집안은 어째서 아가씨의 예술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건지. 미카의 말대로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이다. 만약 그녀가 정말 황자와 약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온 나라의 축하를 받으며 가장 높은 여성의 자리에 서서,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지만 그게 아가씨의 진정한 행복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한층 가라앉은 기분으로 미카는 제 그릇을 치웠다.

✧̣̥̇‧

  결론만 말하자면, 아가씨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황제와 황후 모두 이츠키 가의 막내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황자 또한 군말 없이 동의하여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아가씨가 떠나던 날 아침, 모든 사용인들이 정원 앞 정문까지 나와 그녀를 배웅했고 미카 또한 그 사이에 있었다. 아가씨는 평소엔 입지 않던 진한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장미 모양의 장식을 달고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조숙해 보이는 차림을 한 아가씨는 말없이 마차에 올랐고, 커튼조차 열지 않았다. 뒤이어 후작과 후작 부인 또한 마차에 올랐는데, 그들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결혼이 성사되고 돌아온 날 후작가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후작께서 영지에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식량과 선물들을 내리셨다는구나.“

  베넷 아저씨가 말했다. 미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옷을 입고 브로치를 달았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눈을 감고도 단추를 잠글 수 있었다. 아가씨는 돌아오신 당일에는 쉬셨으니 오늘은 가야 했다. 아가씨는 무슨 표정으로 맞아 주실까. 그날 황궁에서 아가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고민 섞인 한숨을 내쉰 미카는 다녀오겠다고 애써 밝게 말한 뒤 베넷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고는 오두막을 나섰다.

  이제는 후작 저로 가는 길을 따로 알게 된 미카는 어릴 적 막무가내로 가로질렀던 숲길을 더는 이용하지 않았다. 베넷 아저씨가 출퇴근하는 길을 따라 정문을 거쳐 후작 저로 들어갔고, 한동안 숲에는 가지 않았다.

미카는 한참이나 봄의 푸른빛으로 가득한 숲을 바라보았다. 그날, 그렇게 저택에 숨어들어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미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가씨가 미카를 줍지 않았더라면, 미카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우습게도 아가씨는 미카에게 삶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괘씸한 사실이다.

  그렇게 숲에서 눈길을 돌리는 순간 몸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뭐지? 하고 괜히 제 몸을 내려다본 미카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가씨가 만들어 줬던 그 셔츠가 이제는 미카의 몸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미카가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길바닥 고아 생활을 하던 시절 너무 몸이 마르고 왜소해져 이후 베넷 아저씨의 보살핌과 아가씨의 손길을 거치며 몸이 커진 것이었다. 물론 키도 좀 컸지만⋯ 이제 이 옷은 작았다. 하지만 미카는 굳이 이 옷 안에 제 몸을 욱여넣었다.

  내게 성장하는 것은 발에 맞지 않는 구두 같아.

  옅은 탄식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토록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음에도 자신이 자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데, 미카가 점점 자라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버려질지도 몰라. 그래서 식사를 줄이고 일부러 누워 있는 시간을 늘려 근육을 뺐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셔츠는 이미 팔이 짧았다. 아가씨가 올해로 열네 살이 되었으니 미카는 열세 살이 되었다. 열세 살 남자아이의 성장을 누가 무슨 힘으로 막겠는가. 설령 본인이라 할지라도.

  “앉거라.”

  아마도 평소와 다름없을 것 같다는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아가씨는 마치 자신이 어제 막 혼담을 성사하고 온 사람이 아니기라도 하다는 듯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미카를 맞았다. 미카는 그녀의 결혼에 대한 얘기도 까먹고 그저 작아진 소매를 몰래 가리려 무진장 애를 쓰며 인형들의 곁에 앉았다.

  “카게히라, 오늘은 너만.”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미카의 표정이 환해졌다. 알겠다고 얼른 말한 뒤 다른 인형 누나들을 선반으로 옮겼다. 이렇게 그녀가 미카 단 한 명만을 상대해 주는 날이면 미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진심으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게 자신뿐이란 것이 기쁘게 여겨졌다.

  까막눈이라고 했던가. 돌아온 미카를 본 그녀가 물었다. 미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그렇다고 답했다. 글을 읽을 수 있을 리가. 베넷 아저씨도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미카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고, 보육원에서 글을 알던 사람은 원장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니 미카가 글을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가씨는 부끄러울 것이 아니니 배우면 된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종이 한 장과 깃펜을 꺼냈다.

  아, 에, 이, 오, 우. 가장 먼저 배운 다섯 가지의 간단한 글자였다. 아가씨가 든 깃펜 촉은 마치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흔적을 남겼다. 처음 만난 날에도 보았던 그녀의 글씨체는 까막눈인 미카가 봐도 무척 명필이었다. 평소 공고문 같은 것에서 보던 글자와 다르게 끝이 꼬불꼬불한데도 그녀의 글씨는 그녀를 닮았다. 우아하고 간결했다. 그에 비해 미카는 거의 글자를 따라 그리듯 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펜 잡는 법부터 가르쳐야 했다며 그에게 다시 펜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몇 번 반복한 뒤 미카는 다섯 가지 글자를 완전히 습득했다. 아가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로 갈수록 점점 가지런해지는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깃펜을 들어 종이 위에 무언가를 써 주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미카가 배운 글자들 중 단 한 가지도 보이지 않아 미카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쓰신 거지?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본다 한들 못 배운 글자가 읽힐 리가. 별안간 시무룩해진 그의 얼굴을 본 아가씨가 말했다.

  “네 이름.”

  카게히라 미카. 미카는 눈을 빛내며 그 글자를 응시했다. 내 이름? 아가씨의 글씨체로 쓴 자신의 이름은 무척 낯설었다. 이제 미카라는 이름은 베넷 아저씨와 저택의 친절한 누나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글로 쓴 걸 보니 또 낯설다. 언젠간 저두 쓸 수 있을까예? 그의 물음에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는 그 종이를 살짝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쓰고 싶은 걸 쓰게 되면 아마 재미도 붙을 것이야. 또 쓰고 싶은 게 있나?”

  글자로 기록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 곰곰이 생각하던 미카는 이내 베넷도 쓸 수 있느냐 물었고, 아가씨는 대답 대신 깃펜을 들어 종이를 새로 꺼내 그 위에다 휘갈겨 썼다.

  ℬℯ𝓃ℯ𝓉𝓉ℯ

  아저씨는 이름에 똑같은 글자가 세 개나 있구마. 미카는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그 글자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에는 미카가 배운 글자가 있었다. 어떠냐 묻는 아가씨에게 아가씨는 글씨체두 예쁘십니더, 하고 대답하자 기분이 좋아진 듯 아가씨는 깃펜을 놓지 않은 채 하나를 더 써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다 썼는데. 제 이름과 베넷 아저씨의 이름. 그리고⋯⋯.

“⋯⋯ 아가씨 이름도 써 주실 수 있나예?”

  살짝은 놀란 목소리가 되물었다. 내 이름? 미카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미카를 한동안 바라보다 깃펜을 들어 아까보다는 조금 느리게 종이에 이름을 써 주었다. 미카는 그녀가 눈을 다소곳하게 내리깔고 글을 쓰는 게 좋았다. 깃펜을 든 그녀의 희고 곧은 손가락도 좋았고, 우아한 글씨체도 좋았다. 미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은 보지도 못 하고 종이에 쓰인 이름을 응시했다.

  ℐ𝓉𝓈𝓊𝓀𝒾 𝒮𝒽𝓊

  이게 아가씨의 이름. 어째 아가씨는 이름도 곱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 발을 동동 굴렀고,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타박한 아가씨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본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미카는 종이를 가져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냉큼 손을 뻗어 종이를 접은 뒤 주머니 안에 넣었다.

  “잠깐.”

  손을 내밀어 봐라, 카게히라. 그녀가 갑작스레 명령하자 미카는 그 말이 뇌를 거쳐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부터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민 손은 이미 소매가 팔목 언저리에 있었고, 손목이 휑하게 다 드러났다.

아뿔싸 하고 미카는 급하게 손을 내리려 했지만, 아가씨가 그의 손목을 잡아 그럴 수도 없었다. 아가씨는 턱없이 작아진 옷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와 살갗이 닿은 건 너무나 아찔했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바보 같았다고,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사이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까지 왔다.

  옷이 작아졌다고 왜 말하지 않았지? 아가씨가 묻자 미카는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조금 작아졌지만 그래두 입을 만허구……. 뭣보다 아가씨가 주신 첫 선물이라. 아가씨는 말이 없었다. 미카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께에 멈추어 있었다. 짙은 금색의 리본으로 묶인 아가씨의 허리는 채 한 줌이 될까 말까(실제로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미카가 보기엔 그랬다) 했다. 미카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팔린 사이 아가씨가 말을 꺼냈다.

  “옷을 새로 지어 줘야겠군.”

  치수를 재 봐야 하니 일어나거라.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미카의 손목을 놓았다. ⋯ 버리지 않는 건가. 미카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안도했다. 다행이야. 한순간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아가씨의 앞에서는 정말 인형이라도 된 듯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움직이던 미카가 자리에서 일어나다 아가씨의 드레스 자락을 밟은 건.

  요란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미카가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와 둔탁한 쿵 소리만이 방을 울렸을 뿐. 아가씨는 의자에 앉은 미카 앞에 서 있었고, 미카는 그녀를 향해 넘어졌다. 넘어지며 아가씨의 체향이 훅 끼치는 걸 느낀 것 같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뛰었다. 쿵. 쿵. 쿵. 쿵. 그녀의 앞에서 심장이 두근거린 적이 적지 않았지만, 처음 만난 적 이래로 이만큼이나 크게 뛴 것은 처음이었다. 제 아래에 깔린 그녀를 보며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등이 저릿했다. 본능적으로 아가씨의 뒷머리를 감싼 덕에 아가씨는 크게 다치지 않았을 듯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미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넓게 흩어진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과 제 아래 깔린 드레스, 어정쩡한 자세와 놀란 표정. 아가씨가 눈을 크게 뜨자 동그란 보라색의 눈동자가 전부 보였다. 짙은 녹색의 드레스 자락 안쪽에서 그녀의 다리가 느껴졌다.

위험해, 위험해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곱다. 오프숄더의 드레스 덕에 훤히 드러난 그녀의 희고 동그란 어깨와 목덜미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조금만 더 크게 넘어졌으면 정말로 일을 저지를 뻔했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체감상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해서.

  “⋯⋯.”

  벌떡 하고 허리를 일으키자 아가씨도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땅을 짚고 일어나 아가씨의 손을 잡고 끌어올려 드리자 또 거리감이 무척 가까운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가씨는 얼마 동안 말이 없다가 별안간 그에게 칠칠찮다며 화를 내었다.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하면서도, 미카의 뺨에 서린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옷은 이번 주 내로 주겠다고 말한 아가씨는 이만 가 보라며 몸을 휙 돌렸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도 아주 조금은⋯ 빨간 것 같다. 미카는 급히 꾸벅 인사하고는 문을 닫고 저택을 나와 길을 내달렸다. 그새 땀이 났다. 뛰어서 그런 건지, 아까의 여운 때문인지 심장은 여전히 커다란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저질, 개자식. 미카는 자신에게 욕을 했다. 그녀를 상대로 한 상상들이 머릿속에서 얼른 사라지길 바라며.

  전부 아가씨가 너무 예쁜 탓이다. 눈동자가 제비꽃 같고, 가는 몸매는 갈대 같으며 가여운 종달새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도 아니면서 꽃향기가 나는 탓이다. 그러면 뭐가 달라져? 누군가 귀에 대고 묻자 미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그런 생각들을 전부 털어 버렸다. 상상 속의 아가씨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날카로운 보라색 눈으로 미카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저릿했다. 저급했다. 미카는 더 속도를 내어 내달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아저씨의 오두막이 보일 때까지, 아가씨의 놀란 숨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질 때까지.

 5월의 장미가 지고 있었다. 

chapter iiii. Enfant mendiant

 

완벽해요, 이츠키 양. 풍채 좋은 부인이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햇살이 좋은 날, 후작 저의 연회장에서는 사교댄스 연습이 한창이었다. 영애들에게 사교댄스를 가르친 이래로 이렇게 고상한 춤 선은 본 적이 없답니다. 부인의 극찬에 연회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부인보다 약간 키가 더 큰 여성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갸름한 얼굴과 긴 분홍색 머리, 월등히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그녀는 데뷔탕트를 아직 치르지 않았음에도 사교계 화제의 중심이었다.

  아가씨, 억수로 멋있데이⋯⋯. 그 여성을, 연회장 창가 앞에 비스듬하게 선 미카는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갓 열여덟 살이 된 아가씨는 데뷔탕트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실에서는 미래의 황후를 위하여 직접 사교댄스 선생을 보냈고, 지금 미카의 앞에서 아가씨는 훌륭한 춤 솜씨를 뽐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름다운 몸짓. 미카는 그녀에게 빨려들고 있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순간 단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아마 지금 미카보다 조금 앞에 서서 아가씨를 감상하는 그녀의 약혼자, 황자가 아닐까. 미카도 물론 키가 많이 컸지만, 기껏해야 아가씨와 조금 비슷한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황자는 키도 무척 컸고, 잘생긴 외모에 완벽한 예법까지 갖춘 남자였다. 미카는 그와 아가씨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카는 그의 뒤에 서 있자면 속이 아픈 느낌이 들어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떤가요, 전하? 이츠키 양의 춤이 일품이랍니다.”

  황자는 대답 대신 미소를 띠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렴. 미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발로 딴청을 피웠다. 아가씨는 제 약혼자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이 제국 영애들 중 사교댄스에 가장 능하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야. 부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회장의 커다란 문을 닫고 나가자 황자가 그의 약혼자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의 하인도 넋을 잃고 보던걸.”

  “⋯⋯.”

  그와의 만남은 열네 살 이후로 죽 지속되어 왔지만, 관계는 편해질 줄을 몰랐다. 황자는 다행히 권위적이거나 아가씨의 말을 빌려 ‘속물’ 같은 부류는 아니었지만, 아가씨는 그를 무척 못마땅해했다. 경박하다고 소리 내 말하기까지 했다. 어째서인지 그런데도 황자는 어느 정도 아가씨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는 아닌 듯했지만.

열다섯이었나, 심지어는 그에게 손에 들고 있던 걸 던진 적도 있었다. 황자가 아가씨의 성질을 돋구었다는데, 이유는 그 둘만이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황자가 그 일을 그저 웃어넘겨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후작 부부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나와도 한 곡 추지. 그의 말에 아가씨는 그제야 그를 바라보았다. 보라색의 눈이 무척 날카로운 빛을 띠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그는 동요조차 하지 않은 채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손을 내밀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도 그에게 손을 얹었다. 황자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고, 그 둘은 곧이어 한 쌍의 그림이 되었다.

- 절대 말없이 떠나지 마.

  미카는 그 둘이 함께 붙어 있을 때면 마치 자신이 이물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연회장 창가 귀퉁이에서 아가씨의 신발을 든 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그림 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치껏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번에 정말로 그렇게 빠져나갔더니, 말없이 가지 말라는 타박을 받았다.

  -내 곁에 있어.

  그 말을 생각하기만 하면 내는 아직두 가슴께가 저릿한데. 미카는 괜스레 그녀의 신발을 더 꽉 쥐었다. 연회장의 대리석 바닥 위로 아가씨의 하늘색 드레스 자락이 꽃잎처럼 펼쳐졌다 다시 모였다. 간간히 그녀의 구두가 보였다. 미카는 넋을 놓고 그 둘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감겼다 떨어지고, 손이 잡혔다 놓아지고,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둘의 몸이 떨어졌다. 황자는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 등을 숙이며 인사했고, 아가씨는 양쪽 드레스 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쥔 채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사교댄스 연습은 끝이 났다.

  방으로 올라간 아가씨는 지친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면 아가씨는 수도로 떠날 것이다. 데뷔탕트를 치르기 위해. 아가씨는 그날을 위해 온종일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츠키 부부와 조부가 그녀를 위해 살롱에 일 년 전부터 주문을 넣어 거의 40 벌에 가까운 드레스와 갖가지 장신구, 보석들을 조공해 왔으며 이츠키 후작가에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수도의 귀족 여럿도 그녀를 위한 드레스를 보냈다. 하지만 아가씨의 큰 키와 늘씬한 몸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의 범위 밖이었다.

  붉은색의 드레스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지만, 하필 참고하라며 황실에서 보낸 황제 부부의 의상 도안이 금색과 짙은 붉은색을 조합한(“이걸 입으면 한 쌍의 공작새 부부처럼 보이겠군.”) 화려한 색채를 뽐냈다. 그들과 같은 색을 입는 건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았기에 결국 장미 모양의 주름을 잡은 붉은 드레스는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그 이후에도 푸른색, 노란색, 흰색, 녹색, 남색의 드레스들이 거쳐 갔지만 전부 기준 미달이라며 아가씨는 치우라고 말했다. 미카는 품에 가득한 드레스들을 옮기며 그녀의 맨살을 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발탁된 건, 그녀의 조부가 골라 보낸 진주색의 드레스였다. 분홍색 빛이 짙게 서린 드레스는 아가씨에게 무척 잘 어울렸고, 데뷔탕트에 입고 가기로 결정되었다. 그날의 헤어스타일을 고민하던 아가씨는 자신의 자랑인 곱슬머리를 조금 풀기로 했다. 미카는 분주하게 다른 드레스들을 정리해 원래 들어 있던 상자에 넣으며 그녀의 말에 성실하게 답했다. 그녀는 주위에 하녀들이 잔뜩 있는데도 굳이 미카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미카는 그녀가 물을 때마다 가장 아름답다며, 꽃송이 같다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온통 입에 발린 소리만 하지 마라. 솔직한 감상평을 말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미카는 에헤헤 웃으며 말을 잘 못해가, 라고 변명했다. 흥 하고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아가씨는 이만 하녀들을 물렸다. 일제히 그녀에게 인사한 하녀들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고, 방에는 아가씨와 미카만이 남았다. 계속 거울을 보고 있던 아가씨가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내 얼굴에 심취한 줄 알겠군.”

  “제가 아가씨 얼굴이었으믄, 하루 내내 거울만 보고 있었을 겁니더.”

  또 입에 발린 소리. 그녀가 그렇게 핀잔을 줘도 미카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그런 그를 보고 어쩔 수 없는 아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귀걸이를 하던 아가씨가 별안간 아 소리를 내곤 귀걸이를 떨어뜨렸다. 미카가 급히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자신의 오른쪽 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아가씨.”

  급히 본 아가씨의 귓불이 빨갰다. 아무래도 귀가 막혔는데 귀걸이를 하려다 찔린 모양이라, 미카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쩌면 좋냐는 말을 반복했다. 정신 사나우니 가만히 있으라고 딱 잘라 말한 아가씨는 서랍에서 작고 둥근 연고 통을 꺼냈다. 데뷔탕트 전에 귀를 다시 뚫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가씨는 작은 막대기에 연고를 묻히고는 미카에게 건넸다.

  “오른쪽 귓불에 바르거라. 조심히.”

  알겠다며 받아 든 미카는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가씨의 머리카락에서는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겨우 어깨 끈 하나 달랑 있는 가벼운 원피스 차림인 아가씨는 아무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미카는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연고를 바르는 동안 미카는 숨도 쉬지 않았다. 아가씨는 거울에 비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요함의 연속이었다.

  미카가 그녀에게서 떨어지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하고 집사가 말하자 아가씨는 미카에게 가벼운 이브닝 드레스를 하나 골라 오라고 명했다. 미카는 고민하다가 연보라색의 이브닝 드레스를 골라 그녀에게 건넨 뒤 뒤돌았다. 자신은 곧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다.

  “이만 가 봐도 좋다, 카게히라.”

  아가씨가 미카를 지나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카는 아가씨의 뒤에 대고 꾸벅 인사한 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기까지를 기다렸다. 손가락에 닿았던 부드러운 귓불의 감촉이 여전히 선했다. 미카는 아가씨의 나지막한 음성을 떠올리며 잠시 얼굴을 붉히다, 뒷정리를 끝마치고는 아가씨의 방을 나섰다.

‧✧̣̥̇‧

 “아버지.”

 커다란 서재에 슈가 들어섰다. 문을 등진 채 창밖을 보고 있던 후작은 뒤돌아 자신을 만나러 온 딸의 모습을 감상했다. 역시 이츠키 가의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고 뿌듯함을 느끼던 후작은 살가운 목소리로 피곤하지는 않느냐 물으며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앉은 슈는 자신을 부른 이유가 무엇일지 머리를 굴렸지만, 후작의 속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들으렴. 네가 좋아하는 차 아니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러시지. 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부르셨나요.”

 

 그녀가 직설적으로 묻자 후작이 미소를 지었다. 조급해할 필요 없다며 차를 한 모금 한 그가 다시 그녀에게 웃어 주었지만 슈는 웃지 않았다. 후작의 눈동자 또한 짙은 제비꽃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후작에게서 자신이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면 슈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괜히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큰일은 아니고,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그 남자애 말이다. 베넷이 맡아 기르는 그 거지 아이.”

 카게히라. 

 슈가 그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요새 사교계에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는구나.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가 너라는 사실도 공론화되는 추세인데, 그런 추문이 붙으면 쓰겠니? 슈는 미간을 찡그렸다. 카게히라에 대한 소문이 사교계에, 대체 왜. 후작의 독단적인 계획일지도 모르겠다는 의혹이 들었다. 

 그리고 ‘거지 아이’라니, 이미 그런 꼬리표는 뗀 지 오래가 아니었던가. 카게히라가 거지였던 시절은 슈를 마주치기 1 년 전이었다. 단 한 번도, 후작 부부와 슈의 앞에서 카게히라가 거지였던 적은 없었다. 이미 베넷 씨의 손길이 닿은 후였다. 그런데도 후작은 여전히 그를 ‘거지 아이’라 부르고 있었다. 카게히라가 올해로 열일곱 살이 되니 이곳에서 지낸 지도 10 년이 넘었는데. 슈는 후작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이번 데뷔탕트에 그 아이를 데려가렴. 하인으로.”

 모두에게 보여 줘, 그 아이가 슈 너의 하인일 뿐이라는 걸. 슈는 서재를 나서며 문을 쾅 닫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끔찍하게 싫었다. 모든 것들이. 집사가 방을 나서는 그녀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것마저도 짜증이 났다. 그는 다 알고 있었을 테니까. 슈는 그를 차갑게 외면하고는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었다. 카게히라는 이미 오두막으로 돌아갔을 테지. 데뷔탕트를 위해 수도로 돌아가는 것이 겨우 나흘 남짓 남았으니 그를 데려가려면 느려도 오늘부터는 교육을 시켜야 했다. ⋯⋯ 하인으로서. 

슈는 사용인을 불러 그의 오두막으로 보내려다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외출복을 가져오라 이른 뒤 나갈 채비를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오른쪽 귀를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의 귀가 마치 조금 잘못하면 깨져 버릴 유리 장식이라도 된다는 듯 조심스럽게 만지던 카게히라가 떠올라 슈는 괜히 자신의 귓불을 살짝 만졌다. 아, 하고 나직하게 신음한 슈는 손을 뗐다. 후작의 말이, 이미 귓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을 나서자 슈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길이 펼쳐졌다. 전해 듣기로는 이곳을 통해 카게히라가 저택으로 출퇴근을 한다고 했는데. 긴 부츠를 신고 오길 다행이었다. 얼마 정도 걷자 비포장 된 길이 이어졌기에 슈는 옷을 신경 쓰며 걸었다. 아마 저택에서는 슈가 나간 줄도 모를 것이다. 슈 자신도 본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숲은 짙게 우거져 있었고, 길 여기저기에 도토리 껍질 같은 것들이 있었다. 사사삭 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 숲에 들어온 어느 방문자의 존재를 알리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이곳을 카게히라가. 이 길 여기저기에 카게히라의 모습을 그려 보니 나름대로 잘 어울렸다. 이제는 소년이라 하기에는 너무 커 버렸지만 슈의 기억 속 카게히라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두 눈이 크고, 깡말랐지만 볼이 동그란 나의 인형. 새로운 걸 보면 눈을 밝히고, 낯선 것을 보면 몸을 움츠리고, 나를 보면 뺨을 붉히던— 나의 카게히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만치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긴가? 슈는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턱, 하고 부츠가 어딘가에 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자신의 발이 걸린 게 벽돌이라는 것을 깨달은 슈는 제 앞을 내다보았다. 여기부터는 길에 벽돌이 깔려 있었다. 왜 다 깔아 놓지 않았지? 슈는 의문을 품은 채 치마를 살짝 들고 길 위에 발을 놓았다.

  저기구나. 조금 더 걷자 울타리가 보였다. 안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고, 장작을 패는 용도로 쓰이는 듯한 나무 밑동도 보였다. 오두막 안에 있으면 어떻게 불러야 하지? 생각하던 슈는 얼마 안 가 멈춰 섰다. 밝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다. 카게히라? 분명히 그의 목소리였다.

  오두막의 앞, 그 작은 텃밭에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뒤이어 풍채 좋은 아저씨 하나가 일어나 그에게 무슨 말을 했고, 카게히라는 웃으며 그에게 무언갈 대꾸했다. 베넷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슈의 눈에는 그들이 정말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였다. 아까 후작과 자신이 마주 앉은 것보다 훨씬…⋯ 훨씬 더 가족 같았다.

  카게히라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참 어린 나이에 주워 와서 그런 것인지, 슈가 그를 인형으로서 데리고 있겠다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인형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말수도 적었고, 감정 표현도 적었으며(볼을 붉히는 것은 예외였다), 움직임도 어색했다. 차차 그녀와 오래 지내며 많이 나아졌지만, 저렇게까지 크게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기분이 무척 묘하고 이상했다. 슈가 모르는 카게히라의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기 때문일까. 그렇게 돌처럼 굳어 그 둘을 바라보다, 인기척을 느낀 카게히라와 눈이 마주쳤다.

  “⋯⋯ 아가씨?”

  그의 얼굴을 채우던 미소가 사라지고, 화들짝 놀란 표정이 그녀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실제로 차분한 자홍색 외출복을 입은 그녀는 이 숲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괜히 왔나, 하는 마음으로 표정 없이 그를 응시하다 카게히라의 앞에 있던 베넷과도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은 어색한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카게히라가 급히 울타리 정문을 열고 그녀의 앞까지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꺼, 아가씨?”

  제가 뭐라도 놓고 간 건 아니지예? 라는 말에 슈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그의 말을 탁 끊었다. 놀란 표정이군, 하고 말을 던지자 카게히라가 말했다. 이리 오실 줄은 몰라가, 미리 말씀이라두 해 주시지⋯⋯.

  “내가 멋대로 찾아온 것이니 부담 갖지 마라. 널 데리러 온 게야.”

  의아한 표정의 카게히라 뒤로 큰 그림자가 비추어졌다. 베넷. 슈는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은 자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울며 저택 밖을 나와 떠돌다 숲에서 길을 잃은 자신을 다시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암녹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이미 너무 커 버렸는데. 그는 꾸벅 하고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는 말했다.

  “이런 비루한 곳에 발걸음 하시게 하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츠키 아가씨.”

  되었다며 고개를 돌린 슈는 얼른 카게히라를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수도에 갈 때 동행할 예정이니 짐을 챙기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카게히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인석아, 퍼뜩 챙기지 않고 뭐 하냐. 아가씨도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카게히라의 등을 떠민 그는 슈에게도 들어오라는 말을 남긴 뒤 오두막 문을 연 채로 들어갔다. 슈는 텃밭을 지나고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갈등하다 이내 오두막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장이 한참 낮은 오두막은 생활 흔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접시, 등불, 양철 주전자 말고도 낡은 가구들로 가득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카게히라가 자그마치 십 년을 넘게 자랐다.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어색해져 슈는 괜히 땅을 흘끗 바라보았다. 베넷이 부엌에서 차라도 드시겠냐 묻자 그마저도 거절한 그녀가 침묵하다 물었다.

  “⋯⋯ 카게히라는?”

“2층에 있는 지 방에 있을 겁니다. 올라가 보셔도 됩니다.”

  계단이 있나? 두리번거린 슈는 구석에 있는 벽에 붙은 계단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키가 커서, 천장에 머리가 닿을까 머리를 살짝 숙인 뒤 계단을 올라가자 좁은 공간이 드러났다. 문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닫혀 있고 하나는 살짝 열려 있었다. 열린 쪽이 그의 방일 것 같아 슈는 그리로 가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작고 아늑한 방.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서랍장 하나가 전부인 조촐한 살림살이가 안에 있었다. 작은 창문은 열려 있었는데, 나무가 바로 앞에 우거져 있어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미처 못 본 낮은 선반에 펼쳐진 손수건 위에 그녀가 어린 시절 그에게 선물한 청록색의 브로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곳이 카게히라의 방. 침대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바닥에 캐비닛 하나가 펼쳐진 채 있는 걸 보니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슈는 어색한 기분으로 그의 침대 위에 앉았다.

  바스락 하는 소리에 놀라 바닥을 보았다. 바람에 날려 온 종이 하나가 그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아마 저 작은 책상에서 날아온 듯한 종이를 슈는 살짝 주워 펼쳐 보았다. 낡은 종이 두 장이 겹쳐진 채로 접혀 있었다.

  “⋯⋯.”

  가지런한 필체로 적힌 자신의 이름. 종이 한가운데에 적혀져 있는 게 소중하게 접힌 채 안쪽에 있었다. 바깥쪽에 있는 건 훨씬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 에, 이, 오, 우로 시작한 여러 음절의 글자들을 연습한 흔적이었다. 집에 종이가 없어서 저택에서 챙겨 온 걸 쓴 건가. 밑으로 갈수록 글씨체는 조금씩 안정되었다. 베넷의 이름을 연습한 흔적도 보였고, 슈의 이름을— 열심히 연습한 흔적도 보였다.

  “아가씨?”

  깜짝 놀란 표정의 그가 문가에 서 있었다. 슈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본 순간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그녀에게로 다가와 급히 종이를 빼내어 책상 서랍에다 넣고 닫아 버린 그가 중얼거렸다. 그, 어릴 때 연습했던 건데 이게 아직도⋯⋯. 뒤에서 보니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슈는 그가 보지 않는 사이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짹짹, 하고 새가 울었다. 숲은 푸르렀다. 미카는 속으로 연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가씨와 함께 걷는 길은 무척 어색했고, 좋았다. 미카는 익숙한 배경에 묻힌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이 아가씨는 어째 심심한 나무뿐인 배경에 서 있어도 꽃처럼 곱다. 말없이 걷는 아가씨는 가끔가다 질문을 몇 가지 던졌고, 미카는 그 질문에 답을 했다. 수도로 가는 여정에 함께하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아가씨는 그런 미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이유를 알 리 없는 미카는 그저 좋기만 했다.

  그리고 아까 집에 방문하셨을 땐⋯⋯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창피한 모습을 보여 버린 것 같았다. 아직도 그 종이를 생각하기만 하면 두 뺨이 뜨끈해져 미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녀의 앞에서 새로워하는 표정을 짓던 건 자신인데, 이곳은 아가씨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이제는 그녀가 미카의 앞에서 새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텃밭에서는 무엇을 키우는지, 미카의 방에 새가 들어오는지, 왜 저 길이 반만 벽돌이 깔려 있는지— 그런 가벼운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예전에는 계속 올려다봐야 했었는데. 미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가씨는 여자치고 굉장히 큰 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를 내내 올려다봤는데 요새는 키가 많이 커져서 그녀와 눈높이가 맞았다. 더 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는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을 모양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손에 땀이 나 미카는 손을 연신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방에 도착한 아가씨는 모슬린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채 촛불만 켜 놓은 아가씨의 방은 무언가 어색해 미카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이리 오거라.”

  그녀가 명하자 미카는 순순히 그녀의 곁으로 갔다. 아까 오후에 봤던 것과 똑같은 자세로, 아가씨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쇄골과 목덜미가 드러나는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도 낯설었다.

아가씨는 말없이 빗을 건넸고, 그걸 받아 든 미카는 한참이나 벙쪄 있었다. 머리를 빗으라는 건가? 하지만 내가 어떻게? 찰랑거리는 분홍색 머리가 미카 앞에 길게 늘어뜨려졌다. 겁내지 말고. 아가씨는 언제부터인가 미카를 그런 식으로 넌지시 달래곤 했다. 미카가 아주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럴 의도로 하신 건 아니겠지만, 하여튼.

  처음 만난 날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고 하녀가 머리를 빗겨 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 일련의 순간은 별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카의 머릿속에 진하게 각인되어 있어, 미카는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살살 빗기 시작했다. 엉킴 하나 없이 빗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통과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가벼웠고, 또 부드러웠다. 빗을 때마다 좋은 향이 났다. 하지만 미카의 행동이 너무 느렸던 탓일까, 아가씨가 얼마 안 가 읊조렸다.

  “형편없어.”

  되려 미카를 의자에 앉힌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그의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했다. 응아아, 하고 미카는 머릿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얼굴이 빨개진 것은 아닐지 신경이 쓰였다. 목덜미를 간간히 스치는 그녀의 손이 너무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결국, 그녀의 방 소파에서 자게 되었다. 그게 아니면 사용인들과 함께 쓰는 공용 숙소에 들어가야 했는데, 아가씨가 그걸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방에서 재운 것이었다. 소파는 충분히 컸지만, 미카의 다리가 살짝 걸렸다. 조금 웅크리고 자야겠구마 하고 생각한 미카는 아가씨가 침대에 올라앉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안녕히 주무시라고 미카가 인사하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침대에 누웠다. 아가씨의 침대는 너무 커서, 그녀가 잘 보이지를 않았다. 낯설고 조금은 불편한데, 잠들 수 있을까⋯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미카는 얼마 안 가 무의식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미카는 익숙한 숲 속을 거닐었다. 

  여긴— 어린 시절 후작 저에 처음 들어오게 된 그 냇가가 있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푸르고 아름다웠던 숲. 어린 소년의 눈에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던 그 길. 미카는 기억을 더듬으며 익숙한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풀숲에 숨지 않고, 잘 정돈된 정원을 망치지 않고 정원 길을 거닐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장미꽃과 아가씨가 있을 텐데. 어디쯤이지— 하던 찰나, 어디선가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카가 당황해 두리번거리며 걷자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졌다. 아가씨? 미카가 외쳤지만 그것은 소년의 안에서만 먹먹하게 메아리칠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지는데도.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미카는 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꿈속에서 들린 그 울음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아가씨의 침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급하게 이불을 들추고 소파에서 내려오다 넘어질 뻔한 미카는 허둥지둥 그녀의 침대로 다가갔다. 아가씨, 하고 나지막하게 불렀는데도 답이 없었다. 아가씨는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식은땀이 나고 있었고, 눈물 자국마저 보였다. 지독한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미카는 조급한 마음에 침대로 올라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작게 흔들었다. 깨어나지 않는다. 앓는 소리만 커졌다. 그녀의 위로 올라가서 다시 흔들었다. 다시, 다시, 또 다시.

  “아가씨!”

  미카가 외치자 아가씨가 눈을 떴다. 제비꽃 같은 눈동자 주위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쉰 아가씨는 아직 현실이 와닿지를 않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제가 아가씨를 꽉 쥐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계속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정신이 차리시래이. 악몽을 꾸신 모양이라 급히⋯⋯.”

  훅 하고 미카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어깨 부근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미카가 깜짝 놀라 옆을 보자, 아가씨가 그의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다. 미카는 이런 상황에도 열로 달아오르는 자신이 무척 싫어졌지만, 일단은 악몽 때문에 우는 아가씨가 먼저였기에 계속 안절부절 못하고 망설이다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등을 몇 번 두드려 주자 그녀도 진정하는 모양인지 열기가 식었다. 왼쪽 어깨가 그녀의 숨으로 뜨거워서 녹아내릴 것 같아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등을 토닥이며 미카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려고 애를 썼다. 미카의 몸에 닿는 아가씨의 몸이 너무나 낯설었다.

  아가씨가 얼굴을 떼자 눈이 마주쳤다. 아가씨의 보라색 눈이 젖은 걸 본 미카가 제 옷소매를 손으로 감싸 그녀의 눈가를 살짝 닦아 주었다. 그의 손 때문에 아가씨의 한쪽 눈꺼풀이 움찔했다. 미카에게는 모든 상황이 다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아가씨와 자신의 경계선이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아가씨의 팔은 여전히 제 목덜미에 둘러져 있었고, 제 팔도 아가씨의 등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약한 표정을 한 아가씨는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카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것이 아가씨에게 입을 맞춘 것에 대한 핑계가 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고.

  거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행동이었다. 미카가 고개를 살짝 꺾어 그녀와 입술을 맞대는 순간 그녀도 살짝 미카에게로 머리를 내밀어 준 것 같았다. 아가씨의 입술은 무척 말랑하고 따뜻했다. 낯설었다. 바보, 멍청이, 머저리, 저질, 개자식. 기억 속 열세 살의 미카가 아가씨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열일곱 살의 미카에게 욕을 했다. 그러면 뭐가 달라져? 열일곱 살의 미카가 머릿속으로 대꾸했다. 숨이 연신 섞였다.

  점점 뜨거워지는 입맞춤을 이어가며 미카는 살짝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는 아가씨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를 받친 손을 떼 침대에 눕힌 채 미카는 홀로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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